정추의 삶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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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학습활동

<한국의 고전작가와 작품세계 2>

정추의 삶과 문학 담당교수 : 하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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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상하게도 시인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정자나 누대 위에 오르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오 르기도 하고, 집의 지붕에 오르기도 하며, 때로는 바위 위에 오르거 나 산에 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올라가서 하는 일이 무 엇인가? 그들은 높은 곳에 올라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 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하기야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는 것이 어디 시인들 뿐이겠는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도 잠시 바위 위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도 바위 위에 올라 피리를 불고 노래를 한다. 인생의 갖가지 고민과 상념에 잠긴 사람들도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왜 이들은 하나같이 오르는 것일까? 바라보기 위해서다.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지나온 삶을 바라보기 위해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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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한시사에서 높은 곳에 올라 세상과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아성 찰을 하는 시로는, 두보(杜甫)의「등고(登高)」를 비롯하여 여 러 시인들의 수많은 작품이 있다. 이는 높은 곳에 오르는 행위가 한 시의 특정한 제재로 이어져 왔음을 뜻한다. 한시뿐만 아니라 현 대시의 경우에도 이러한 경향의 주목할 만한 시들이 보인다. 예 컨대 황동규는「지붕에 오르기」라는 시는 어느 가을날 저녁 지 붕에 올라가 집을 수리하면서 바라본 세상과 자아에 대한 성찰 을 다룬 시로 매우 감동적이며 뛰어난 수작이다. 이처럼 한시나 현대시 모두 ‘등고(登高)’를 통한 조망과 자아성찰은 시쓰기의 중요한 방법이자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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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고려시대 문학사에서 이러한 등고를 통한 관조의 시학을 잘 보여준 시 인이 있다. 바로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1382)다. 그의 시에 는 자아에 대한 성찰과 응시가 곳곳에 나타나 있고, 이러한 시정신은 특히 높은 곳에 올라가 조망하는 관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성찰과 깨 달음으로 확대된다. 다음 시를 보자.

 괴로운 더위에 맑은 물에서 노닐며,

 머리 씻고 가벼운 모자로 바꿔본다.

 사다리 당겨 다락에 오르지 않아도,

 이미 먼지 세상과는 격리되었네.

 다락의 창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풍경,

 나무와 숲은 모두 다 고요하기만.

 옷깃을 헤치고 긴 하늘을 굽어보니,

 조정과 민간이 한 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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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웅장하구나! 옛 산과 강이여,

 우임금 신통한 힘에 세 번 감탄한다.

 들쭉날쭉 둘러있는 잠긴 봉우리들,

 우뚝우뚝 마주하고 솟아오른 절벽.

 다리 밑에서 몇 겹의 구름이 일고,

 머리 위로는 하늘의 궁궐을 대한다.

 달 밝은 밤에 쇠피리 불고,

 멀리 가파른 바위 위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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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苦熱弄淸漪濯髮換輕帽

 攀梯未登樓已與塵世隔

 軒窓納渺茫樹林供闃寂

 披襟俯長空朝野同一色

 壯哉古山河三歎神禹力

 陸離回鎖巒突兀對聳壁

 脚底生層雲頭邊對宸極

 月明吹鐵笛遠上巉岩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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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시인은 어느 여름날 누대에 올라 세상을 바라본다. 저 아래의 세 상은 찌는 듯한 더위에 괴롭지만, 이곳은 이미 먼지 세상과는 격 리된 곳이다. 난간의 창을 통해 바라보는 숲은 고요하기만 하다.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한 성찰의 과정을 거친 끝에 ‘조정 과 민간이 결국은 하나[朝野同一色]’라는 중요한 깨달음에 이 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멀리 두니 들쭉날쭉 잠긴 봉우리들과 우 뚝우뚝 솟아오른 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시인은 흥에 겨워 달밝은 밤에 쇠피리를 불면서 다시 가파른 바위 위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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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추의 삶과 문학

 이처럼 정추는 누대나 바위 같은 ‘높은 곳에 올라[登高]’ 세상 을 조망하고 거기에서 세계와 삶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요컨대 정추에게 있어서 ‘등고’는 자아성찰의 중요한 과정이 라 할 수 있겠다. 자, 이제 우리 주변의 것들을 바라보자. 천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바라보자. 만약 잘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의

‘등고’를 하자. 내 마음 속의 산에 오르든지, 나무 위에 오르든 지, 지붕 위에 오를 일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만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발견한 그 세계로 인해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시적(詩的)으로 변화될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