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조선 시대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또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食色의 욕망을 적 절히 통제함으로써, 개인의 건강을 유지함과 동시에 사회의 질서를 구현하는 방도로 삼았다. 이는 모든 개인의 질병과 사회적 무질서의 원인이 되는 욕망의 통제를 근본적인 정치 목표로 삼은 성리 학적 이상과 무관하지 않다.1)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성리학은 고대 이래의 氣論에 절대가치인 理를 결합시킴으로써 孔孟의 유 학을 새롭게 재해석한 新(Neo)儒學을 의미한다. 신유학은 전통적인 기 중심의 의학이 리 중심의 의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였는 바, 간단히 말해서 氣의 조절이라는 養生과 더불어 심[理]의 통제라는 養性을 더욱 밀접하게 연관시킬 수 있었다. 기의 의학이 陰陽의 過不及 과 조화를 우선하였다면, 리의 의학은 理/氣의 조화 즉 經과 權의 중용을 강조했다. 이로써 標보 다는 本으로 침잠하면서 ≪傷寒論≫보다 ≪내경≫을, 方劑보다 원리를, 外丹 보다 內丹를, 養生보 다 養性을 강조하는 조선 특유의 의학 문화를 창출하는 배경이 되었다.2)
1) 김호, 2008 <조선의 食治 전통과 조선왕실의 食治 음식> ≪조선시대사학보≫45 참조.
2) ≪東醫寶鑑≫은 이러한 기와 리의 의학이 적절하게 결합된 가장 조선적인 의서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송 대 이후 금원시기를 거쳐 명대 완성된 의서들 가령 ≪醫學入門≫이나 ≪萬病回春≫의 경향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김 호, 2000 ≪허준의 東醫寶鑑 연구≫ 일지사 참조).
조선시대 食治論
- ‘閑情의 養生’에서 ‘濟衆의 備急’으로
김 호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이 글에서 필자는 조선의 성리학 이념이 의료와 음식문화 한 복판을 관통하며 엮어내는 다양한 양상들을 탐구함으로써, 하나의 문화적 가치가 건강을 둘러싼 담론들을 정의하고 제약하며 나아가 언어와 정치적 언설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음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때 조선의 질병과 예방 그리고 건강과 음식 문화를 아우르는 ‘食治’라는 용어에 주목하고자 한다.3)
食治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다음 세 가지 개념, 즉 ‘和’ ‘豫’ 그리고 ‘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조화를 의미하는 ‘和’ 그리고 미리 병들기 전에 조섭하는 의미의 ‘豫’
마지막으로 절욕, 절제를 뜻하는 ‘節’이다. 식치를 둘러싼 氣와 음양의 조화, 절욕을 통한 存心養性의 기획, 그리고 예방의 정신은 조선 전시기를 관통하면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했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를 ‘節慾養生의 정신’으로부터 ‘濟衆必知에 지식’으로 정의하 고자 한다.
2. ‘和’, ‘節’ 그리고 ‘豫’
2.1. 和의 추구
≪내경≫은 陰陽 두 기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건강은 음양의 조화와 기의 균형에 다름 아니라 고 생각했다. 이에 ‘陰陽이 均平하면 (중략) 平人이라 할 수 있다.’4) 그런데 ‘평인(平人)은 병들지 않은 사람이다.’5)라고 하였다. 음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룬 사람이 곧 건강하 다는 것이다.
의학에서 말하는 均平의 ‘平’은 유학에서 말하는 중화의 ‘和’에 해당한다. 음양의 균형 혹은 조 화는 음과 양이 각기 직책을 굳게 지키는 것 즉 그 중절을 잡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음은 안에 있고 밖으로 양의 지킴을 받으며 양은 밖에 있고 음의 보좌를 받는다.’6)거나 ‘음양의 핵심은 (중 략) 조화를 이루는 것’7)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음양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음양의 균형 상태가 깨진다는 것은 곧 병을 의미했다. ‘음이 성하면 양이 병들고 양이 성하면 음이 병든다.’거 나 ‘양이 허하면 外寒이 생기고 음이 허하면 內熱이 생긴다.’는 구절에서 음양의 균형을 잃는데 대 한 경계를 읽을 수 있다.
3) 김호 2008, 앞의 논문 참조.
4) ≪素問≫ <調經論>
5) ≪素問≫ <平人氣象論>
6) ≪素問≫ <陰陽相應論>
7) ≪素問≫ <생기통천론>
음양이 어그러져 질병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내경≫에는 아무리 병의 종류가 많고 복잡하 여 치료법이 다양하더라도 모두 하나의 치료 원칙을 따랐다. 즉 음양의 소재를 파악하여 조절하고 음양의 和平을 치료의 근본으로 삼는8) 다시말해 ‘어떤 병이든 상관없이 和平을 목표로 한다.’9)는 것이다. 음양의 均平은 단순한 정태적 중간이 아니라, 일종의 동태적 평형이다.10) 생명의 리듬은 단지 인체 내 음양의 평형만을 목표로 하지 않고 외부 환경의 음양 변화에 맞추어 동태적으로 균 형을 이루어야 한다. 가령 사람의 양기는 아침에 생겨나 낮에 왕성하고 저녁에 약해진다.11) 따라 서 하루의 변화라는 외부 요인이 내부의 균형을 이루는데 영향을 미친다.
≪내경≫에는 “도를 아는 자는 음양을 본받고 술수에 화합하며 음식에 절제가 있다. 활동과 휴 식에 항상됨이 있으며 함부로 힘들게 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육체와 정신이 건실하고 타고난 천수 를 마칠 수 있다.(중략) 또한 虛邪와 敵風을 피하는 데 때가 있고 염담과 허무에서 진기가 나오며 정신이 안을 지키니 병이 어디에서 생기겠는가?”12)고 했다.
성인은 절대 조화를 잃지 않는다. “성인은 그러한 상황을 만나도 조화하며 다투지 않는 법이 다.”13) 明代의 의사 장개빈은 ‘성인은 평소 중도를 소중히 생각해 음양의 기를 조화롭게 하기 때 문에 기후변화가 이상할 때를 만나도 부조화로 인한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14)
요컨대 의학의 ‘中道’는 인체 내부의 음양의 조화와 더불어 외적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는 균 형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내부의 정적인 음양의 균형만이 아닌 외부의 변화에도 잘 적응하는 동태적이고 상황적인 균형과 중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的中’이요 ‘時中’이라 할만하다.
단순한 ‘중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상황적이고 변화 가능한 열린 중간이다. 여러 가지를 적당이 절 충하거나 기계적으로 합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가에서 말하는 중도는 시의적절하게 ‘헤아리다’, ‘덜어내거나 첨가하다’, 혹은 ‘변통하다’는 뜻 이 있는데 이는 물건을 저울질할 때 물건의 무게에 따라 저울추를 이동하면 균형을 잡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자막이 중간을 잡았지만 저울추를 이동할 줄 몰랐기 때문에 “중도를 고집하지만 균 8) ≪素問≫ <至眞要大論>
9) ≪素問≫ <三部九候論>
10) 林殷(문재곤 역), 1999 ≪한의학과 유교문화의 만남≫ (예문서원) p.56 참조.
11) ≪素問≫ <생기통천론>
12) ≪素問≫ <上古天眞論>
13) ≪素問≫ <육미지론>
14) 임은, 앞의 책 p.59
형을 잡지 못했다(執中無權)”고 한 것이다. 자막이 고집한 것은 고정된 중간에 불과하므로 결국 여전히 한 쪽 끝만을 잡고 있는 것이다.
불변의 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에 응하는 權이 있어야 한다. 물론 경이 굳건해야 權이 가능하다. 중용 혹은 중도의 權은 일종의 運用의 묘이며 이를 이용하여 經을 실현해야 한다.
이에 ≪春秋公羊傳≫에서 ‘권이 경으로 돌아온 후에 라야 선한 것이 있다.’고 한 것이다.15) 공자 역시 ‘군자의 中庸은 時中’16)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시중은 서로 다른 상황과 조건에 원칙적이면 서도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주희는 集註에서 ‘중은 고정된 모습이 없고 상황에 따라 있게 된다.’고 풀이하였다.
經과 權의 조화로운 관계란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섬세하고도 융통성있게 적응하는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고집스럽지 않고 변화하면서도 근본을 잃지 않는 태도야말로 상 황에 가장 잘 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중의 관점은 의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상 이한 시간(春夏秋冬)과 상이한 지역(東西南北) 그리고 상이한 환자의 조건(나이와 체질 건강상태 등)에 입각하여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방제를 가감 조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名醫의 자격은 經과 權의 조화에 있다. ‘모든 병의 변화를 모두 헤아리기 어렵다. (중략) 변화에 따라 기운을 조절하기 때문에 최고의 명의다.’17) 명의는 치료의 기본 원칙을 고집하면서도 病變에 민감하다. 요컨대 의학 치료의 기본은 음양의 균형을 유지하고 이를 변증의 시시각각 변화에 따라 경권의 조화를 얻는 것이다. 이를 ≪내경≫은 “陰陽이 서로 뒤집히면(균형을 잃게 되면) 치료법은 權衡하여 相奪하는데 있다[陰陽反他, 治在權衡相奪]”18)고 설명했다. 질환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음 양의 상대적 평형이 무너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학 치료의 기본은 음양을 조화시키고 음양의 상대 적 평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의학의 중용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調劑保合의 治術로도 드러난다. 가령 약과 음식을 함께 쓰고, 침과 뜸을 함께 시술하며, 안과 밖을 함께 치료하는 형태가 그것이다. ‘(實하면) 藥으로 써 이를 제거하고, 음식으로써 이어 調養하며 물로 몸을 닦고 몸의 안과 밖을 조화롭게 한다.’19)고
15) 蔡仁厚(천병돈 역), 2000 ≪맹자의 철학≫ (예문서원) pp.216~220 참조 16) ≪論語≫ <雍也>
17) ≪영추≫ <衛氣失常>
18) ≪素問≫ <玉版論要>
19) ≪素問≫ <五常政大論> 藥以祛之, 食以隨之 行水漬之, 和其中外, 可使畢已
하였으니 약물로 사기를 제거하고 음식물로 정기를 복돋아 주며 밖으로는 목욕물로 씻어주어 안으 로 경락을 소통시키면 결국 내외가 중화(和順)되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이다. “五穀은 양식이 되고 五果는 보조가 되며 五畜은 보익이 되고 五菜는 보충이 된다. 이것들의 기미를 조화롭게 섭취하면 정기에 보익이 된다.”20)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 거나 지나쳐서는 안 되고 골고루 기미가 화합할 때 가장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맛 또한 다섯 가 지가 조화로워야 한다. 辛, 酸, 甘, 苦, 鹹이 있어 각각 이로운 데가 있으므로 이를 각 병과 계절 의 적당함에 맞추어 조화롭게 사용해야 하고 편식이나 偏好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고대부터 음식의 ‘조화[和]’를 관장하는 食醫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상할 게 없다.
食醫는 왕의 六食, 六飮, 六膳, 百羞, 百醬, 八珍을 조리한다. 무릇 밥은 봄에 맞아야 하고, 국은 여름에 맞아야 하며, 장은 가을에 맞아야 하고, 음료수는 겨울에 맞아야 한다.
무릇 맛의 조화는 봄에 신 맛을 많이 먹고, 여름에 쓴 맛을 많이 먹고, 가을에 매운 맛을 많이 먹고, 겨울에 짠 맛을 많이 먹되, 부드럽고 단 음식들로 이 맛들과 어울리게 한다.
무릇 고기와 곡식은 서로 적절해야 하는데 소고기는 마땅히 쌀과 함께 먹고, 양고기는 마 땅히 기장과 함께 먹고, 돼지고기는 마땅히 기장과 함께 먹고, 개고기는 마땅히 기장쌀과 함께 먹고, 거위는 마땅히 보리와 함께 먹으며 생선은 마땅히 야채[苽]와 함께한다. 무릇 군자의 식사는 항상 이를 따라야 한다.21)
조화와 중용의 개념은 과불급 모두를 지양한다. ≪논어≫에는 자공이 사와 상 가운에 누가 더 현명한지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22) 사는 과하고 상은 불급하다고 공자가 답하자 다시 자공 이 물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다는 말씀입니까? 공자는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과나 불급 모두 문제라는 말이다. 자장과 자하의 경우 한 쪽은 지나치고 다른 편은 모자란데 공자는 둘이 서로 다 를 바 없다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결국 과유불급이란 지나쳐도 좋지 않고 모자라도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과유불급의 사상은 의학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20) ≪素問≫ <藏氣法時論> 五穀爲養, 五果爲助, 五畜爲益. 五菜爲充, 氣味合而服之, 以補精益氣
21) ≪周禮≫ <食醫> 食醫掌和王之六食六飲六膳百羞百醬八珍之齊 凡食齊眡春時 羹齊眡夏時 醬齊眡秋時 飲 齊眡冬時 凡和 春多酸夏多苦秋多辛冬多鹹 調以滑甘 凡會膳食之宜 牛宜稌 羊宜黍 豕宜稷 犬宜粱 雁宜麥 魚宜菰 凡君子之食 恒放焉
22) ≪論語≫ <선진>
脈象에는 平脈, 太過, 不及의 기준이 있다. 또한 침자법에는 천심의 차이로 刺齊, 太過, 不及이 있다. 오운에도 평기와 불급 태과의 설이 있다. 태과와 불급은 모두 병이 난 상태를 말한다. 음식 으로 말하자면 “곡식이 반나절 들어가지 않으면 기가 적어지고 하루가 지나가면 기가 쇠해진다.”
“음식을 배로 늘리면 장과 위가 손상된다.”(≪소문≫ 痺論)는 것이요, 針刺의 경우 “과하면 내상 을 입고 불급하면 外壅이 생긴다.”(≪소문≫ 調經)는 것이다.
過와 不及 가운데 의학에서는 과의 해를 더욱 문제 삼는다. ≪소문≫의 <오상정>에는 “오래보 면 혈을 손상하고 오래 누우면 기를 손상하면 오래 앉아 있으면 육을 손상하고 오래 서 있으면 골 을 손상하면 오래 걸으면 근을 손상한다.”고 하였다. 의학에서는 이를 五勞에 의한 손상이라고 한 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병이 되고 균형을 해친다는 인식이다.
약물 또한 지나칠 경우 문제가 된다. ‘大毒으로 치료할 때는 병의 10분의 7이 나으면 그만하고, 小毒으로 치료할 때는 병의 10분의 8이 나으면 그만둔다. 無毒으로 치료할 때는 병의 10분의 9가 나으면 그만한다. (중략) 지나치면 안 되는데 精氣를 손상하기 때문이다.’23)
과불급을 지양한 기와 음양의 조화는 절욕을 통한 양성을 강조한 성리학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 었다. 과불급은 기의 조절과 억제에 실패한 결과이므로 기는 리와 함께 중요해졌다.
2.2. 節慾과 養性
리와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기질의 문제는 성리학에도 절욕의 문제와 관련하여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물론 인간의 기는 다른 사물의 기와 다르지만, 리와 기를 대조하게 되면 기는 순선한 도덕적 본성, 즉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훼방하는 극복과 억제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성리학에서 기질의 속성은 쉽게 욕망으로 정의되곤 했다. 기질의 욕망을 제어하고 순선한 리의 본성을 회복하 는 일이 가장 중요한 수양의 방법이 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의 리에 대한 강조는 기질의 억제, 즉 절욕을 통한 養性의 철학으로 전개되었다.
앞서 언급한 ‘和’의 강조가 기와 음양의 조화를 추구한 養生의 기획이었다면, 성리학에서는 욕망 의 억제[去欲]를 통한 리[性善]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養性의 기획으로 발전해갔다. 氣에서 출발한
23) ≪素問≫ <五常政>
양생은 理의 양성으로 하여 완성되었다. 이미 ≪禮記≫에는 다음과 같이 천리와 인욕을 대비하여 욕망의 억제를 요구한 바 있다.
사람이 태어나 고요한 것은 자연에서 부여받은 성이다.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성이 일으키는 충동이다. 사물과 접촉하여 지각이 반응한 다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이 일어난다. 이 감정이 내부에서 조절 되지 않으면 지각이 밖의 사물에 이끌려 자신으로 돌이키지 못하여 천리가 없어지게 된다. 外物이 사람을 자극하는 것은 끝이 없는데 好惡 의 감정이 절제되지 않으면 사물과 접촉하였을 때 사람이 사물에 지배된다. 사람이 사물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은 천리를 없애고 인욕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치를 거스르고 정도를 어기려는 마음이 생겨 본분을 넘어서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을 하게 된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천성은 매우 고요한데 마음이 외물과 접촉하여 감정과 지각이 생겨 나면 好惡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好惡의 감정과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마음의 좋 아하는 바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되고 결국 天性을 해칠 수 있다고 보았다. 욕망 즉 인욕은 탐욕, 物慾 등이며 천성은 곧 천리를 의미한다. 인욕에 매달리고 천리를 거스르게 되면 법도와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주희는 특히 ‘인욕의 제어’ 나아가 제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주희는 인욕의 제거를 천리 회복의 중요한 방법으로 삼았다. 정주성리학에서 말하는 천리는 인 간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본성[천성]으로 현실에서는 삼강오륜과 같은 도덕법 칙들이었다. 그렇다면 인욕이란 무엇인가? 耳目口鼻가 원하는 바이다. 주자는 욕망이 인간의 거부 할 수 없는 필수 조건이라고 보았다. “배가 고파 먹고 싶고 목이 말라 마시고 싶은 이러한 욕망 도 없을 수 있겠는가?”24) 주희는 불교의 금욕이나 무욕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했다. 주희는 음식 을 먹으려는 욕망은 인정하지만 좋은 맛을 찾는 것은 인욕이라고 보았다.25) 기본적인 욕망은 인정 하였지만 지나친 욕망은 위험하다. 이처럼 인욕은 욕망 가운데 부정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특히 천리를 해치는 욕망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26)
24) ≪朱子語類≫ <周子之書>
25) ≪朱子語類≫ <學七>
26) ≪朱子語類≫ <性理 二>
일찍이 ≪내경≫에는 욕망의 절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지적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은 술로써 漿을 삼고 망령으로 常을 삼으며, 취한 채 入房하여 욕망으로 精을 모두 써버려 眞氣를 소모한다.
(중략) 마음이 좋아하는 바에만 힘써 진정한 삶의 즐거움을 역행하고 起居에 절도가 없어 半百에 쇠한다.”27)는 것이다. 인간의 일반적인 욕망 가운데 食色이야말로 가장 본원적이며 절제하기 어려 운 욕망이다. 따라서 의학에서도 식색의 조절을 건강의 제일 원칙으로 삼았다. 주희는 “耳目口鼻 와 사지의 욕구는 오로지 분수에 만족해야 하니 무엇을 욕심낸단 말인가?”28)라고 하여 분수에 맞 는 절욕을 강조하였다. 남녀의 정은 단지 대를 이어나가려는데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색욕을 억제 하지 못한 경우 淫慾의 화기는 쉽게 오장육부를 불태워 온 몸을 망칠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실학 자 李德懋 역시 여색을 강하게 경계했다. 음욕(婬慾)을 섶에 비유하고 섶에 불을 붙이면 활활 타 오르는 이치와 같이 여색(女色)을 밝히는 사람은 체내의 오장육부(六腑)가 모두 타버리고 그로 인 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29)
한편, 16세기의 학자 蘇齋 盧守愼은 음식의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 그는 많이 먹지 말고 아무 때나 먹지 말며 배고픈 후에 먹어야 하며 먹을 때 배부르게 먹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특히 기름 진 음식[膏粱]이야말로 백병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음식의 量 뿐 아니라 맛의 조화가 중요하다. 어 떤 맛이든 지나치게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너무 짜거나 시거나 달게 먹지 않도록 충고했다.30)
1620년(광해군12)에 李昌庭31)이 펴낸 ≪수양총서류집(壽養叢書類輯)≫에는 음식에 관한 주의 사항이 보다 구체적이다. 그는 중국의 다양한 양생서적들을 보고 허탄한 방법들은 삭제하고 구체 적인 醫藥의 방법을 소개하였는바,32) 음식을 잘 아는 일이야말로 양생의 중요한 방도라 강조하고 음식이 조화롭지 않으면 목숨을 해친다고 설명하였다. 음식을 잘 아는 일은 병이 나기 전[未病]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계절에 따라 따뜻하고 찬 음식을 적절하게 가려 먹어야 하 고, 배부르거나 취하도록 먹어서는 안 된다. 특히 밥을 먹은 후에도 바로 눕거나 가만히 앉아 있
27) ≪素問≫ <上古天眞論> 今時之人不然也, 以酒爲漿, 以妄爲常, 醉以入房, 以欲竭其精, 以耗散其眞, 不知持 滿, 不時御神, 務快其心, 逆於生樂, 起居無節, 故半百而衰也.
28) ≪朱子語類≫ <力行>
29) ≪靑莊館全書≫권54 <大猛火> 人之一身 都是水火所聚 故道家以水升火降 爲極工 醫家以滋陰降火 爲至要 婬慾者 譬之薪也 引而熾火 乃焚其身 理固然也 此惟外熾也 人以爲怪 凡以色死者 皆內焚其府藏也
30) ≪穌齋集≫ 內集 下篇 <治心養胃保腎之要>
31) 이창정(1573~1625)은 자가 중번(仲蕃), 호가 화음(華陰), 무구옹(無求翁)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광해군 원년(160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순천부사, 동래부사, 양주목사를 지냈고, 인조 초년에 충청도 수군절도 사가 되었으며,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仁祖)를 공주까지 수행하였다. 인조3년(1625)에 선위사(宣慰使) 로 안변(安邊)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기다리던 중 53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32) ≪壽養叢書類輯≫ <跋文>
게 되면 기혈이 뭉쳐 건강을 해치므로 식후에는 항상 손으로 배를 수백 번 문지르고 얼굴을 들어 수백 번 호흡하고 천천히 수백 보 행보하여 소화가 잘되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33)
조선시대에 식색의 욕망을 억제하는 일은 養生의 중요한 方道로 권장되었다. 인조의 병환에 섭 생법을 전달한 신하는 음식과 기거의 절제를 당부했다. “몸을 수양하는 옛사람의 설은 심기(心氣) 를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고 기거(起居)를 삼가는 세 가지 요점에 지나지 않으며, 약물은 오로지 질환을 다스리고 허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하여 배려한 것인데 이 또한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올 바르게 지켜진 뒤에 그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34)
正祖 또한 食色의 억제가 주요한 양생의 도리임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 한위(漢魏)시대의 시를 읽 다가 장수한 노인들의 대화 속에서 장수의 비법을 간취했다. “상노인(上老人)은 대답하기를 우리 집 마누라가 박색이라오. 다음 노인이 대답하기를 저녁 일찍 자리 들되 머리는 내놓지요. 셋째 노인이 대답하기를 음식 먹기 절제하여 배 채우지 않았다고 했으니, 좋도다 세 노인의 말씀이여. 나는 이 말씀을 벽에다 적어 놓고 늘 쳐다보는 볼거리로 삼은 적이 있었다. 한 분은 여색을 멀리함으로써 정 기(精氣)를 굳힐 수 있었고, 한 분은 섭생을 잘하여 장수하였으며, 또 한 분은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병을 없앨 수 있었으니, 평소에 늘 명심하고 지킨다면 저절로 그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35)
과불급을 지양한 기의 조화, 절욕을 통한 존심양성의 기획은 모두 병들기 전에, 정치가 어지러워 지기 전에 예방하려는 태도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개인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나 나라의 바른 통 치를 유지하는 일은 모두 나쁜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조짐[機]을 막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36)
33) ≪壽養叢書類輯≫ <節飮食篇> 攝生飮食篇曰 人知飮食所以養生 不知飮食失調 亦所以害生 故能消息 使適 其宜 是謂賢喆悟於未病 凡人飮食無論四時 常欲溫暖 夏月伏陰在內 煖食尤宜 不欲苦飽 飽則筋脈橫解 腸 癖爲痔因而大飮 則氣乃暴逆 養性之道 不欲食後卽臥及終日穩坐 皆能凝結氣血 久則損壽 食後常以手摩腹數 百遍 仰面呵氣數百口 趑趄緩行數百步 謂之消食 食後卽臥 令人患肺氣頭風中痞之疾 蓋榮衛不通 氣血凝滯 故爾
34) ≪인조실록≫ 권44 인조21년(1643) 5월 14일 35) 정조 ≪일득록≫
36) 영조가 사도세자 및 정조를 가르친 御製 敎訓書를 보면 한결같이 정치와 수신의 幾微를 잘 살필 것이야말로 핵심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2.3. 예방의 중요성
사태가 벌어지기 전의 ‘豫’와 관련하여 淸心寡慾은 다시 한번 더 중요해진다. 병든 이후의 치료가 아니라 병들기 전의 예방 때문이다. 약물은 사후의 방법이자 도구라면 청심과욕은 근본이자 예방책이었다.
옛사람도 만 가지 처방의 보약(補藥)은 모두 허위요, 단지 마음을 잘 조존(操存)하는 것 이 요법(要法)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약이(藥餌)와 식물(食物)은 병을 치료하는 도구인 것이고 청심(淸心)과 과욕(寡慾)은 병을 치료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먼저 그 근본을 보양한 뒤에 그 말단을 다스린다면 마음이 편안하여 온몸이 명령하는 대로 따르게 되어 보이고 들리는 것이 가릴 수 없고 감미로운 기호가 빼앗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진 원(眞元)이 날로 불어나고 신기(神氣)가 더욱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외사(外邪) 가 빌미가 될 수 없으므로 약물의 공효를 거두기가 쉬워지는 것이니, 병을 치료하는 요점 이 역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37)
조선후기의 학자 항해(沆瀣) 홍길주(1786~1841)는 형 홍석주가 쓴 약계(藥戒)라는 글을 보 고,38) ‘병이 난 뒤에 비로소 약을 쓴다’는 형의 논리를 비판했다. 홍길주는 근래 수십 년 사이에 고질병을 치료하였다거나 위중한 병에서 회복되었다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도리어 병이 없을 때 날마다 의원과 약물을 가까이 한 경우 칠십 팔십을 넘겨 건강을 누린 사람이 많다고 반박 하였다. 즉 평소에 병이 없을 때 의원을 늘 가까이 하여 자신의 타고난 내장 기관이 어디가 약한 지 또 어디가 튼튼한지를 미리 알게 해두어 가끔씩 약물을 조제하여 부족한 데를 보충해야 병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병이 생긴 뒤에 비로소 약을 쓰면 비록 훌륭한 의원일지라도 수고로움이 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미리 대비한다는 의미의 예(豫)야말로 모든 일의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禮記≫에서 ‘禮란 일이 생기기 전에 제재하는 것이요, 法이란 일이 생긴 후에 제재하는 것’39) 이라고 언급한 바대로, 治(다스림, 억제 제재)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한 차원은 어떤 사태가 벌어지기 전[事前]에 ‘治’하는 것이요, 다른 차원은 어떤 사태가 발생한 이후[事後]에 ‘治’하는 것이다.40) 또한 37) ≪효종실록≫ 권10 효종 4년(1653) 5월 19일(갑신)
38) 홍길주, 2006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 창고: 홍길주의 수여방필 4부작≫(돌베개) 참조.
39) ≪禮記≫ <禮察篇> 禮者 禁於將然之前 而法者 禁於已然之後
≪내경≫에는 “성인은 이미 발생한 병을 치료하지 않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병을 치유한다. 성인은 이미 일어난 혼란을 다스리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혼란을 다스린다.”41)고 하였다. 발병하기 전에 미리 조섭과 양생을 통해 예방하는 것으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다스리는 방법을 우선하였다.
최고의 다스림은[治]은 事前에 방지함으로써 우려의 사태를 미연에 예방하는 것이다. 무질서가 나타나기 전에 질서를 잡는 것이요, 병들기 전에 몸을 조섭하는 일이다. ≪맹자≫의 ‘少私寡慾’이 야말로 중요한 방책이다.42)
심성도야와 治病은 분리되지 않으며 寡慾은 정치가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이러한 원리에 근 거하여 醫人이 곧 醫國이 되고, 治病이 治國의 원리와 같게 되었다. 사람을 고치는 일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생각은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고 대 중국의 문헌들은 이러한 신체의 정치학적 사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릇 사람은 360개의 마디와 9개의 구멍과 오장 육부가 있다. 피부는 조밀하기를 바라 고 혈맥은 통하기를 바라며 힘줄과 뼈는 단단하기를 바라고 마음과 의지는 조화롭기를 바 라며 정기는 운행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면 병이 머물 곳이 없고 추한 것이 생겨날 근거 가 없게 된다. 병이 머물고 추한 것이 생겨나는 것은 정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이 막히면 더러워지고 나무가 막히면 굼벵이가 생긴다. 나라도 막히는 것이 있다. 군주의 덕이 베풀어지지 않고 백성이 바라는 바가 펼쳐지지 않는 이것이 나라가 막힌 것이다. 나라가 막 힌 채 오래되면 온갖 추한 것들이 한 번에 일어나고 모든 재앙이 무더기로 발생한다. 上下 간에 서로 차마 하지 못할 직을 하는 것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이에 성왕은 호걸과 충신을 귀하게 여겼다. 이는 그들이 과감히 직언하고 뭉치고 막힌 것을 터주기 때문이다.43)
사람의 몸이 국가의 통치 시스템과 유비되면서 醫國은 醫身이요 의신은 곧 의국이 되었다.44) 중국과학사학자인 네이선 시빈 역시 (황제내경의 구조를 보면) 성인인 조언자와 군주 사이의 대화
40) 이하의 내용은 김호, 2008 <조선의 食治 전통과 조선왕실의 식치 음식> ≪조선시대사학보≫45 참조.
41) ≪소문≫ 四氣調神大論 “是故聖人不治已病 治未病 不治已亂 治未亂”
42) ≪孟子≫ <盡心>
43) ≪呂氏春秋≫ <恃君覽 達鬱>
44) Paul U. Unschuld(홍세영 역), 2010 앞의 책, pp.280-282 참조
는 육체적인 소우주와 정치적인 소우주가 동일한 원리에 기반하고 있음을 충실히 보여준다고 말하 고, 질서를 부여한다는 의미의 治자를 쓰는 치국과 치신의 유사성은 중국 고대 의학의 역사 전체 를 관통하여 지속하는 주제라고 주장한 바 있다.45)
조선의 대표적인 명의 허준은 중국의 고양생(高陽生)이 지은 진맥 의서 ≪찬도맥결(纂圖脈訣)≫
을 발췌, 교정하여 1611년(광해군 4)에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드러난 허준의 생각 역시 이상의 논 의와 일치하고 있다.
삼가 생각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나[醫國] 사람을 다스리는 것[醫人]이나 그 이치 는 실로 동일하다. 사람의 맥은 곧 경락이요 나라의 맥은 곧 기강이다. 紀綱이 서지 않으 면 邪와 正이 혼동되어 禮와 法이 무너지게 되고 社稷이 위태로워지는데 이른다. 또한 經絡이 通하지 않으면 表裏가 막히고 陰陽이 혼란되어 性命이 거의 끊어지게 된다. 무릇 어지러움[亂]을 다스려 바름[正]을 회복하고 위급함을 돌이켜 안정을 찾는데 있어 요점은 병의 근원을 잘 살피고 시무를 잘 알아 경락을 조화롭게 하고 기강을 정돈하는데 있을 뿐이다.46)
조선후기의 의서 ≪곡청용어(谷靑冗語)≫에서 儒醫 李顯養(1783~?)도 “醫國과 醫人을 한 가지”
라고 강조했다.47) 또한 18세기 경상도에서 활동한 鄕醫 유이태는 자신의 저술 ≪마진편≫ 서문에 서 그의 경험방이 시골에서 사람을 구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떤 객이 와서 보고 규모와 절차가 매우 완비되어 단지 鄕曲에 도움이 될 정도가 아니라 광제창생의 방법이 될 것이요, 결국 나라를 다스리는[醫國] 방도라고 칭찬하여 부끄러워했다고 술회했다.48) 유이태는 자신의 의술을 ‘의국’의 한 방법으로 자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신체와
45) Nathan Sivin, 1988 "Science and Medicine in Imperial China", Journal of Asian Studies Vol.47 p.53 46) ≪纂圖方論脈訣集成≫ <纂圖脈訣跋> 進竊以醫國醫人其理實同 人之脈者經絡是也 國之脈者紀綱是也 紀綱
不立則邪正渾殺 禮法陵夷而社稷及於危亡 經絡不通則表裏壅遏 陰陽汩亂而性命幾乎絶滅矣 夫撥亂而反正 轉危而致安 要在乎察病源識時務 調和經絡 整頓紀綱而已 (중략) 萬曆九年 辛巳五月日 通訓大夫 行內醫院 僉 許浚 拜手稽首謹跋
47) ≪곡청용어≫ <本草精義序> 天下之道 布在方策 惟其孜孜乎爲治 鑑之以古跡 耆시蓍之以聖謨 夙夜匪懈則可 爲賢宰相云尒 余曰輪人之說 足以悟大道之要 況醫國醫人同一軌也 奚疑乎斯 道光 丙戌八月朔旦谷靑散人 48) ≪麻疹編≫ <마진편서> 所驗以著此篇 人或以余淺短不棄庶或有少補於鄕谷救治之方乎 客乃楫曰吾觀此篇
規模該備 節次詳細 開卷瞭然 不但以鄕谷救治之方爲言也 布這邦國則可以爲廣濟蒼生之方也 爲子一賀以醫 國之術云矣 余愀然而起曰子之言過矣 余何敢當之乎 俄而客退 歲在丙午下瀚劉爾泰自記
국가의 정치적 유비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좋은 정치는 心身의 양생(혹은 양성)과 밀접 하여, 기의 유행이 막히면 나라나 인체 모두 병이 든다고 생각했다.
조선후기의 正祖 역시 의학의 도구인 음식과 약물을 정치의 도구인 예악 형정에 비유하여 양자 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는 醫書에 좋은 구절이 많은데 사람의 치료가 나라를 다스리 는 일과 같으므로 유추하면 배울 점이 매우 많다고 강조했다.49)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정치를 돕는 도구로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마치 음식 과 약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으니, 몸을 편안히 하려면 먹어야 하고 병을 낫게 하려 면 약을 써야 한다. 그래서 醫書에는 ‘알맞게 먹는 것을 모르면 삶을 온전히 할 수 없고 약 성분에 밝지 않으면 병을 없앨 수 없다. 음식으로 치료하고도 낫지 않은 후에야 약을 쓴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통치의 법에 비유할 만하다.50)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의국과 의인의 방법으로 예방과 더불어 근본적인 치료가 강조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음식으로 해보고 안 되면 약으로 하듯이, 예악으로 다스린 후 문제가 생기면 형정을 사용한다는 논리다. 사람이든 나라든 망령된 욕망이 발하기 전에[未發], 그리고 몸이 병들기 전에 [未病], 제도나 질서가 혼란하기 전에[未亂] 미리 미리 다스려야 한다. “上醫는 나라를 치료하고 中醫는 사람을 치료하고 下醫는 병을 치료한다. 상의는 목소리를 듣고 중의는 안색을 살피며 하의 는 진맥을 한다. 또 상의는 병이 나기 전에 치료하고 중의는 병이 들려고 할 때 치료하고 하의는 병든 후에 치료한다.”51)는 것이다.
이상 氣의 조절을 통한 양생과 節慾을 통한 養性 나아가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예방하려는 和, 節 그리고 豫의 정신은 조선의 ‘食治’ 개념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49) ≪日得錄≫4 <文學>4
50) ≪弘齋全書≫ 제167권 <日得錄>7 ‘政事’ 2 禮樂刑政 爲輔治之具 不可廢一 如食藥療病 蓋安身須食 救疾 須藥 故醫家書 不知食宜 不足以全生 不明藥性 不能以除病 食以療之 不愈然後命藥 此言足可以喩治法 51) ≪醫方類聚≫ 권1 <敍爲醫> 故曰醫者 意也, 非常之意爾. 是以上醫醫國, 中醫醫人, 下醫醫病. 又曰上醫聽
聲, 中醫察色, 下醫診脈. 又曰上醫療未病, 中醫療欲病, 下醫療已病.
3. 食治論의 전개
필자는 조선 왕실의 食治 논의를 소개하면서 食治論이 節慾과 豫防을 근본으로 여기는 성리학적 가치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52) 다음은 이러한 食治論의 양생론적 측면이 仁濟의 대중 지식으로 확산되는 역사적 흐름과 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지하는 대로 조선전기 식치론의 대표적인 논술은 세조의 <의약론>이다. 1463년(세조9) 세조 는 ≪醫藥論≫을 지어 韓繼禧·盧思愼 등에게 보이고 御醫 任元濬에게 명하여 註解를 달아 세상 에 보급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글에서 세조는 心醫, 食醫, 藥醫, 昏醫, 狂醫, 妄醫, 詐醫, 殺醫를 언급하였다. 최상의 心醫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편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는 자로 병들기 전 養 生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세조에게 실질적인 최고의 의원은 食醫였다. 食醫는 입[口]으로 달게 음 식을 먹게 하는 것이니, 입이 달면 기운이 편안하고, 입이 쓰면 몸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음식에 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치료할 수가 있는데, 어찌 쓰고 시다거나 마른 풀이나 썩은 뿌리라고 핑계하겠는가? 지나치게 먹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食醫가 아니다. 藥醫는 다 만 藥方文을 따라 약을 쓸 줄만 알고, 비록 위급하고 곤란한 때에도 服藥만을 권하는 자이다.53)
세조는 食治를 훌륭한 의사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세조의 食治論은 어의 全循義의 ≪食療纂要≫
(1460)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식료찬요≫ 서문에서 全循義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 어 음식이 으뜸이고 藥餌가 다음이다. 시기에 맞추어 風寒暑濕을 막아주고 음식과 남녀관계를 절 제한다면 병이 무슨 이유로 생기겠는가? (중략) 고인이 처방을 내리는 데 먼저 음식으로 치료하는 것을[食療] 우선하고 음식으로 치료가 되지 않으면 약으로 치료한다고 하였으니 음식의 효능이 약 의 절반이 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병을 치료하는데 당연히 五穀, 五肉, 五果, 五菜로 해야지 어 찌 마른 풀과 죽은 뿌리에 치료법이 있겠는가? 이것이 고인이 병을 치료하는데 음식으로 한 이유 이다.”54)라고 하여 식치론의 핵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순의는 세종대에서 세조대에 걸쳐 활약한 御醫로 1445년에 ≪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했으
52) 김호, 2008 앞의 글 참조.
53) ≪世祖實錄≫ 권31 세조 9년 12월 27일(신해)
54) ≪食療纂要≫ 「序」 (全循義 撰) 人之處世飮食爲上 藥餌次之 雖曰如此風寒暑湿 禦之以時飮食 男女節之以 限 病何由生 然或四時失序 平日尙小亂日尙多豈無人感乖戾之氣乎 是以古人立方先用食療 食療不愈然後藥 治 且云將食得力大半於藥 又曰治病 當以五糓五肉五果五菜 治之奚在於枯草死木之根荄哉 此古人治病 必 以食療爲先 可知矣
며,55) 1447년에는 ≪鍼灸擇日編集≫을 金義孫과 함께 썼고, 그 뒤 ≪山家要錄≫을 저술하여 산거 경제에 필수적인 음식 제조 및 조선의 고유한 음식과 술 제조법을 정리하였다.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여 1460년경 食治에 관한 의서를 저술하자 직접 ‘식료찬요’라는 제목을 하사하였다.56)
≪식료찬요≫는 여러 가지 風病에서 시작해, 傷寒, 心腹痛과 소아들의 질병과 경기에 이르기까 지 모두 45부문으로 나누어 온갖 질병과 처방을 소개하고 있다.57) 물론 대분의 치료는 음식물이 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초본류를 통한 방법이었다.
가령 갑자기 중풍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콩을 삶아 그 즙을 엿처럼 고아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중풍이지만 얼굴이 부은 경우라면 파를 삶아 먹도록 했고 말이 어눌해지고 손발을 쓰지 못할 때에는 율무를 이용하도록 했다.
吐血에는 무를 통째로 구워 먹거나 삶아 먹어 보라고 권했다. 잦은 기침에는 좋은 배를 구해 씨 를 빼고 갈아 즙을 낸 다음 산초 40개를 넣고 끓여 내어 찌꺼기는 버리고 엿을 고아 먹도록 하였 다. 이 밖에도 속을 데워 주고 비위를 기르는 방법으로 소고기를 권하거나, 허리가 아플 때 참깨 를 먹도록 하는 등 다양한 食治法을 소개하였다. 술에 취해 깨어나지 않을 때에는 배추를 이용하 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즉 술을 먹고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나는 증상을 치료하려면 굴에 생강과 식초를 넣어 먹는다. 술을 마시고 난 뒤의 갈증을 풀어주려면 배추 2근을 삶아 국으로 먹 는다. 술에 취해 깨어나지 않을 때 배추씨 2홉을 잘게 갈은 다음 이른 새벽에 우물에서 물을 길어 다가 타서 마신다고 했다.
≪식료찬요≫는 鄕村에 거주하는 사족들 혹은 일반인들이 급하게 약재를 구할 수 없을 때 평소 음식으로 먹는 여러 가지 식물을 약재 대신에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른바 음식을 이용한 적극적인 치료법의 모색이라는 점에서 향촌 구급방의 한 종류라 할만하다. 가령, 코피가 그치지 않을 때 입쌀을 누렇게 볶아 가루 내어 물에 타먹는다거나, 설사를 다스리는데 조기를 구워먹는 방법, 오래된 이질을 치료하는데 홍합이 좋다는 내용 등은 ‘식치’가 단지 예방의 차원을 넘어 구급 의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55) ≪世宗實錄≫ 권110 세종27년 10월 27일(무진)
56) 전순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종봉, 2011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지역과 역사≫28 참조.
57) ≪食療撰要≫는 이후 경상도에서도 간행되는 등 여러 번 중간된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권202 성종 18년 4월 27일(병신) “右贊成 孫舜孝가 ≪食療撰要≫를 올렸다. 醫員 全循義가 편찬한 것인데, 손순효가 일찍이 경상도 감사가 되었을 때 尙州에서 간행하였다.” 참조)
때문에 ≪식료찬요≫가 다루는 질병의 범위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응급상황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대변불통을 치료하기 위해 산앵두씨 6푼을 갈아 즙을 내고 율무 3홉을 푹 삶아 죽 을 만들어 공복에 먹거나, 장을 윤활하게 통하게 하기 위해 참깨를 먹는다. 또한 개에게 물리거나 타박상 등을 치료할 때도 생강즙을 마시거나 암탉을 고아먹는 방법 등을 권장하였다. 뱀에게 물린 경우 밤을 먹거나 씹어서 붙이도록 했으며, 거미나 벌레 등에 물렸을 경우 양 젖을 먹도록 했다.
이상을 통해 ≪식료찬요≫가 향촌에 거주하는 이들이 손쉽게 음식을 이용하여 각종 질병을 치료하 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기획된 책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전순의는 ≪식료찬요≫와 더불어 ≪산가요록≫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山家要錄≫에 는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식치 음식 煎藥의 원형으로 ‘우무 煎果’를 소개하고 있다.58) 우무 전 과는 전순의와 같은 식의가 왕실 식료품으로 개발한 것으로, 우뭇가사리의 젤라틴에 꿀과 후추 등 향신료를 약간 넣어 만든 것이다. 현존하는 책은 앞뒤가 모두 훼손되어 농업 부분 일부와 더불어 뒷부분의 내용을 읽을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음식과 酒方 등 210여 가지의 조리법은 다행히 멸 실되지 않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59)
≪산가요록≫은 단지 음식이나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국한되지 않았다. 이를 넘어서 곡식을 재배하고 나무를 심는 방법, 혹 가축을 치고 물고기를 기르는 다양한 山居 생활의 기술을 알려주었다.60) 이른바 ≪식료찬요≫와 ≪산가요록≫은 실제 山林 經濟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약물보다는 음식으로 섭생하여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세조의 食治論은 ≪식료찬요≫
에 이르러 향촌에 기거하는 사족들을 위한 山居 경제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음식은 건강 을 위한 섭생의 기초이자 질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방도가 되었다. 이상 15세기의 식치론은 16세 기에 이르면서 중국 明代의 山居, 淸供 혹은 淸言 계통의 책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은둔의 산림경 제>를 추구하는 식치론으로 변화했다.
58) 전약에 대해서는 김호, 2005 <조선왕실의 藥饍, 煎藥 연구>, ≪진단학보≫100 참조 59) 한복려, 2003 <산가요록의 분석 고찰을 통해서 본 편찬 연대와 저자> ≪농업사연구≫2-1 60) 염정섭, 2011 <山家要錄 農書 부문의 편찬과정과 서술방식> ≪지역과 역사≫28
3.1. ‘閑情’의 養生으로서 食治
16세기 은둔 사족의 산림경제를 책으로 남긴 이는 象村 申欽(1566~1628)과 許筠(1569 ~1618)이 대표적이다.61) 이 둘은 거의 같은 시기에 명대 양명학에 마음을 빼앗긴 후 산거 경제의 삶을 추 구하는 글을 남겼다. 먼저 신흠은 <野言>이라는 글에서 은둔의 山居 생활을 칭송한 바 있다. 정치 적인 실세로 인해 유배에 처해진 신흠으로서는 처세의 방도로 비평과 번뇌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산림의 신선과 같은 자로 정의한 채 이러한 삶을 추구하였다. 이른바 淸士로서의 고아한 생활을 꾸리기 위해 산림경제를 도모한 것이다. “입 속에 자황을 담지 않고 미간에 번뇌의 그림자를 드리 우지 않으면 煙火神仙이라 할만하다. 마음 내키는 대로 화초와 대나무를 심고 성질에 따라 새와 물고기를 기르면 이것이 곧 山林經濟이다.”62)라는 신흠의 논설을 통해 그의 ‘산림경제’는 산거 생 활의 유유자적을 즐기는 신선의 삶이요, 이를 위해 나무를 심고, 새와 물고기를 기르고 농사를 짓 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흠은 “일 많은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세월이 부족해도 족함을 아는 것은 은둔생활 의 정이요, 봄에 꽃 심느라 눈을 치우고 밤에 圖籙 보느라 향을 피우는 것은 은둔 생활의 흥이요, 硏田[문필생활]은 흉년을 모르고 酒谷에 언제나 봄기운이 감도는 것은 은둔생활의 맛이다.”63)라고 하여 산림에 은거한 삶의 정과 흥취 그리고 묘미를 노래했다. 그야말로 田野의 삶을 즐기려는 은 둔 거사의 취향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전원에 산지 오래되어 이미 세상 밖 사람이 되었는데, 글 을 볼 때 마다 모아놓은 구절로 책을 만들었으니 마음에 맞는 구절들로 작은 책 한권을 이루었다.
한가할 때마다 내 의견을 부록하고 이름하여 野言이라 하였다. 그 말들이 모두 田野에 사용할만하 니 야인과 더불어 나눌 말이라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했다.64) 신흠이 화초를 심고, 닭을 기르고 나 무를 심어 생활을 꾸리는 것은 세상을 버린 隱者의 삶을 칭송한 것으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18 세기 어찌할 수 없이 山居에 살아야하는 많은 寒士들의 산림경제와는 사뭇 달랐다.
은둔거사의 산림 생활을 위한 ‘淸供’ 즉 절제되고 자연과 조화로운 의식주에 대한 논의는 허균
61) 김은정, 2012 <申欽의 淸言 선록집 野言 연구> ≪국문학연구≫22; 김은정, 2011 <소창청기 異本과 17세 기 초반 조선에서의 수용 양상> ≪韓國漢文學硏究≫47 참조.
62) ≪象村稿≫ 권48 <野言>1 口中不設雌黃 眉端不掛煩惱 可稱煙火神仙 隨意而栽花竹 適性而養禽魚 此是山 林經濟
63) ≪象村稿≫ 권48 <野言>1 得閑多事外 知足少年中 棲遁之情也 種花春掃雪 看籙夜焚香 棲遁之興也 硏田 無惡歲 酒谷有長春 棲遁之味也
64) ≪象村稿≫ 권48 <野言>1 田居歲久 已作世外人 適披前修著撰 有會心者 錄爲小帙 間附己意 名以野言 迹 其實也 其言宜於野 可與野人言也
의 ≪한정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물론 허균은 산림의 생활을 좋아서 하는 이는 없다고 강조하 였지만 스스로 산거의 삶을 ‘한정’으로 규정하고 섭생을 기획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어찌 벼슬을 더럽다 하여 버리고 산림(山林)에서 오래 살기 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그 도(道)가 세속(世俗)과 맞지 않고, 그 운명이 때와 어긋 난다 하여 고상(高尙)을 가탁하여 세상을 피한 자의 그 뜻은 역시 비장한 것이다. (중략) 내 만약 몸이 건강한 날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여 나의 천수(天壽)를 다한다면 행복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겠다.65)
산거경제를 高尙을 가탁한 삶이라 삐딱하게 정의하면서도 허균은 山林의 淸供을 구차함이나 빈 곤이 아닌 ‘절제의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은둔한 산림 처사의 음식은 맛있는 것만을 찾아서는 안 되고, 물건 역시 좋은 것을 추구할 수 없다. 이는 청사 중의 탁사요 청사의 좀에 불과하다는 주장 이었다.66)
그렇다고 삶을 영위하는 도구가 없을 수는 없다. 허균은 산거(山居)에 필요한 물건들을 나열하 고 있는데, 이를 보면 생계를 꾸리기보다는 너그러운 삶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먼 저 경전과 서적 그리고 북과 베틀을 준비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자손을 교육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또한 약물과 의서를 준비하여 질병과 邪惡한 기운을 물리치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좋은 붓과 종이를 저장하여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 서 손님을 접대하거나 홀로 술을 마실 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67) 이밖에 허균은 산거 생활의 즐거움을 위해 아름다운 돌과 좋은 먹, 고옥(古玉), 기이한 서적 등을 수집하여 긴 날의 지루함을 덜어야 하고, 산 중의 중들과 백발의 어부를 사귀어 무료함을 잊고 번거로운 세상사를 떨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쯤되면 허균에게 山居 경제란 일종의 취미요, 벽(癖)에 가까운 느낌이다. 고아한 淸士를 위해
65) ≪한정록≫ 권수 <閒情錄序>
66) ≪한정록≫ 권14 <淸供> “청사(淸事)는 지나치게 의도적이어서는 안 된다. 만일 의관(衣冠)은 반드시 기고 (奇古)한 것만을 찾고, 물품은 정량(精良)한 것만을 구하며, 음식은 색다르게 맛있는 것만을 구한다면, 이는 청사 중의 탁사(濁事)이니 나는 이들을 청사의 좀이라고 생각한다.”
67) ≪한정록≫ 권14 <淸供>
자연과 ‘조화’된 ‘절제’의 삶이 그 핵심이다. 그의 식치론은 은둔 산림의 養生을 위한 방도의 측면 이 강했다. 가령 허균은 밥은 부드럽게 익혀 먹고 고기는 문드러지도록 푹 삶아 먹고 항상 술을 적게 마시고 매일 밤 혼자 자는 것이 옛사람들의 양생의 묘법(妙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허균은 명대의 학자 진계유(陳繼儒)가 지은 “부드러운 밥으로 위를 보양(保養)하고, 푹 익은 고기로 온 몸 을 보양하고, 술을 조금 마심으로써 피를 보양하고, 홀로 잠으로써 정신을 보양한다. 이는 日用의 묘법이며 집에서 거처하는 자가 천성(天性)을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이라는 구절을 손수 옮겨 적 어 벽에 걸어두었다.
산 속에서의 음식은 뛰어난 맛을 추구할 수 없지만 청아(淸雅)한 가운데서도 풍부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허균의 주장이다. “연근을 취하여 도톰히 살찐 열매와 뿌리의 단맛을 취하고, 나무 종류 에서는 대나무의 운치와 고(菰)나무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물 종류에서는 순채의 향긋함과 아욱의 담박함과 토란의 미끄러움을 취한다. 또 계수나무로 기름을 내고 국화를 심고 매화로 장을 담근다.
농어회와 포를 준비해 곁들여 놓고, 농사일을 얘기하다가 거문고와 서화에까지 말이 미친다. 이같 이 조석으로 편히 누워 성세(盛世)를 즐기니 큰 벼슬자리의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라는 것이다. 산림의 여러 가지 식물을 대체품으로 삼아 세속의 맛을 취할 수 있으니 그 청아함은 도리 어 더 낫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허균은 이러한 삶을 소동파의 산림생활에 비유하기도 했다.
“동주(同州)에서 나는 양(羊)을 푹 쪄서 행락(杏酪)을 발라 먹는데 숟가락으로 먹고 젓가 락으로 먹지 않는다. 남도(南都)의 발심면(撥心麪)으로 괴엽냉도(槐葉冷淘 냉면의 이름)를 만들고, 양읍(襄邑)에서 나는 작은 돼지로 국을 끓이고, 공성(共城)에서 나는 좋은 쌀로 밥 을 짓고, 거위 알을 찌고 오흥(吳興)의 포인(庖人)이 송강(松江)에서 나는 농어로 회를 쳐서 가져오면 배불리 먹고, 여산(廬山) 강왕곡(康王谷)의 물로 증갱(曾坑 차 이름)의 상품을 달 여 마신다. 조금 후 옷을 벗고 편히 누워서 사람을 시켜 나의 적벽부(赤壁賦) 전후편을 외 게 하면 크게 즐거울 것이다.”68)
山居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음식들을 도리어 세속의 그것들보다 낫다. 가령 청정반(靑精飯)이다.
허균은 ≪소창청기(小窓淸記)≫를 인용하여 “버들잎이나 오동잎의 즙(汁)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
이를 먹으면 양기(陽氣)를 도와주는데, 도가(道家)에서 중하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청정반은 버들 68) 허균은 소동파의 문집을 그대로 인용하여 소식에 비견되는 산거경제의 삶을 찬양하였다.
잎과 오동잎을 뜯어 즙을 내어 밥물로 삼는 것이다. 후일 ≪산림경제≫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산림 의 필수음식인 <죽(粥)·밥[飯]>에 넣어 설명하고 있다.69)
산림에서는 야생차를 즐길 수도 있다. “차의 채집은 정선(精選)해야 하고, 차의 저장은 건조하 게 해야 하며, 차를 끓일 때는 정결하게 한다.” “차를 감별하는 법과 대나무를 감별하는 법은 같 으니 살이 찐 것은 좋지 않고 여윈 것이 좋다. 다만 서리를 흠뻑 맞은 것이라야 한다.” “차를 끓 일 때는 불을 너무 세게 하면 좋지 않으니 세게 하면 맛이 지나치게 쓰다. 그러므로 간수(磵水)나 송풍(松風)과 같은 소리가 나는 정도로 끓이는 게 좋다. 또 차를 거를 때는 갑자기 하지 않는 것 이 좋다. 병에 옮기고 불을 끈 뒤에 잠깐 물이 끓는 것이 그치기를 기다려서 걸러야 절도에 맞는 다.” 허균은 “차가 처음 눈이 터서 여린 것을 일창(一槍)이라 하고 점점 자라서 잎이 핀 것을 기 (旗)라 한다. 더 자란 것은 쓸모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어린잎만을 뜯어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허균은 술을 먹고 술병이 나면 국화의 순으로 만든 나물을 먹고, 채식(菜食) 중에서 가장 맛나다고 알려진 이른 봄에 일찍 나오는 부추를 즐기고, 늦여름에 늦배추를 즐길 수 있다고 보았다. 산중 최고의 음식으로 알려진 죽순(竹筍)은 산림 은둔의 호사 가운데 하나이다.
죽순은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맑고 아득한 운치를 주니, 진실로 소식(蔬食) 중의 기품 (奇品)이다. 이것으로 국을 끓이거나 포(脯)를 뜨는 것은 모두 그 본맛을 잃게 되니 구워서 찢어 먹는 것이 가장 좋다. 나는 술에 취하고 배가 불러 조갈증(燥渴症)으로 괴로울 때면 집사람을 시켜서 이를 구워먹으면 그 단맛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70)
막 돋아난 채소의 잎과 싹[菜甲]은 또 어떠한가? 그 맛이 우유보다도 좋다. 허균은 “비오는 썰 렁한 날 밤에 아이를 시켜서 따다가 무치고 술을 곁들여 놓고서 야담(夜談)을 나누며 그 맑고 향 긋한 맛을 즐기면, 향긋함이 가슴속의 답답함을 싹 씻어준다.”고 칭송했다. “토란[山芋]으로 옥삼 갱(玉糝羹)을 끓이면 빛과 향기와 맛이 모두 좋으니 지상에 결코 이보다 맛있는 음식이 없다.”고 도 했다. 허균에게 산림 속의 채소와 토란은 궁핍함을 채워주는 음식이 아니라 섭생에 도움이 되 는 食治의 방도였다.
69) ≪산림경제≫ 권2 <粥飯>
70)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서유구는 ≪인제지≫에서 죽순을 구황식품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