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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과정주의와 탈과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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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과정주의와 탈과정주의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단선진화론을 거부하며 문화사고고학이 유행을 하였다. 그 리고 유물을 단지 기술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물이 어떻게 사용되고 어 떻게 제작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면서 기능과정주의고고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1950년대 초에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개발되면서 고고학자들은 상대연대와 더불 어 절대연대를 수립할 수 있었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과학 적인 방법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의 가설을 통해서 그것을 입증하려 하였고 하나의 일반화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주관적인 생각은 절대적으로 배 제하였다. 그러나 1980년 대 말에 고고학자 개개인의 해석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 식하고 탈과정고고학을 제안하고 과정고고학의 단점들을 비판하였다. 두 가지의 고고 학 접근 방법들은 고고학에 대해서 문제점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러 지 못하였다. 하지만 두 가지 방법은 고고학에서 고고학자가 다룰 수 있는 부분에서 충분히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데 좋은 방법이 되었다.

1. 신진화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미국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번영을 누리면서 학문적으로는 유물론적 관점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관념론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현실적, 물질적인 것을 강조하고, 정신적인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유물론적 관점은 미 국 인류학에서 문화진화의 부활을 야기하였다. 미국 인류학에서 유물론적 관점에 토 대를 둔 것은 보아스 학파의 관념론적인 인식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보아스 학파의 관념론적인 인식에 반대하며 신진화론을 주장한 사람은 민족학자 레슬리 화이트와 줄 리언 스튜어드가 있다.

화이트는 보아스 학파의 관점들을 비판하면서 “일반진화”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일반진화라는 것은 진보를 문화변화의 흐름 속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화 이트는 문화는 일직선상에서 진화를 이룬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앞으로만 발전해갈 수 있으며, 과거의 문화는 현재의 문화와는 상관없다고 해석하였다. 또한 화이트는 유 물론적 시각으로 문화변화를 해석하였다. 그는 문화변화는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 다는 기술결정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문화=에너지×기술” 이라는 법칙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문화는 1인당 소비하는 에너지가 늘어남에 따라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동 원된 기술이 증가함에 따라 배가 되면서 진화한다는 것이다.

줄리언 스튜어드는 화이트와는 다르게 문화가 일직선상에서 진화하기보다는 여러 관점에서 진화한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문화변화를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는 문화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생태계의 변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유사 한 환경 안에서의 문화는 유사하게 발달하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보여 지는 유사성들은 문화핵심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 안에는 생태계의 변화에 따른 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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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기 위한 경제나 정치, 종교적인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다. 즉 스튜어트의 문화변 화에 대한 해석은 문화들은 모두 동일선상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이것들은 서로 유사성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트의 일반진화와 스튜어드의 특수진화는 해석하는데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화가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접근 방식을 융화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살린스와 서비스는 일반진화는 진보적인 것, 특수진화는 적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살린스와 서비스는 이러한 이론들을 적용하여 무리, 부족, 군장, 국가라는 진화적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진화적 개념들에 대해 더 세부적으로 이론화한 학자는 마빈 해리스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주장하였다. 정신적 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 문화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문화를 비 용과 효과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몇몇 북아메리카 고고학자들은 신대륙 원주민의 문화 발달 단 계를 연구하였다. 원주민들의 문화 발달 단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진화적 접근을 벗어 나지 못했고, 전파론적인 관점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미국 고고학자들은 기능 주의와 과정주의 설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원주민들의 문화 발달 단계를 설명하 는 진화론적인 관점과 전파론적인 관점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보아스 학파의 관념론적인 해석과는 달리 신진화론을 고고학에 더 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신진화론을 처음으로 고고학에 적용시킨 학자는 메거스이다. 메거스는 「실천 연구 도구로서 문화진화의 법칙」이라는 글에서 화이트의 법칙을 바꾸었다. “문화=환경×기 술”이라고 설명하였다. 메거스는 문화는 기술과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 다. 메거스의 이론은 기술환경적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행위를 연구하는 것 이 아니라 기술, 경제 등 물질적이지 않은 것을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메거 스는 신진화이론을 고고학에 적용시켰지만 실제적으로 직접 적용하지는 못해서 다른 고고학자들에게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2. 초기의 신고고학

조셉 콜드웰은 빈포드 이전의 신고고학 창시자이다. 그는 생태학과 취락유형에 대 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문화진보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전의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은 유사성을 가진 고고 자료의 종합적인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생태학 과 취락유형에 대한 이해로 인해서 양식적인 유행에 있어서 각각 독립된 것이고 각 문화들은 계급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콜드 웰은 문화는 역사적 과정을 거쳐 발달하게 되었고, 지나간 과거의 문화는 지금으로서 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한 신진화론을 받아들였다. 즉 고고학자는 고고학 문 화 안에서 나타나는 문화변화를 과정주의 측면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빈포드와 신고고학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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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웰의 해석은 루이스 빈포드를 포함한 미국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빈포드는 콜드웰의 해석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 신고고학 또는 과정고고학의 시작이라 고 불리는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

빈포드와 그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신고고학은 이전의 고고학을 해석하는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라고 하였다. 빈포드는 「인류학으로서의 고고학」, 「고고학 분류체 계와 문화과정의 연구」에서 신고고학의 주장을 설명하였다. 그는 고고학의 목적은 상 사성과 상이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상사성과 상이성을 밝히기 위해 서는 고고 자료를 기능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여 인간행위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빈포드는 상이성보다는 상사성에 관심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는 화 이트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으로서 화이트는 문화에 규칙성이 있다는 신진화론을 주장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의 전체적인 상사성을 설명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빈포드는 문화를 인간의 이성적 적응 수단이라고 보았다. 문화가 변화하는 것은 자 연환경의 변화, 인구의 변화, 이웃문화와의 접촉 등에 대한 적응한 결과라고 보는 것 이다. 인간 집단이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해서 문화변화가 일어난다 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문화는 인간 집단에 따라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신진화론에서 인간의 이성은 사회진화에서 행위, 믿음, 가치 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빈포드의 주장은 신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빈포드가 주장한 신진화 고고학은 상사성을 보여주는 단선진화론자들의 시각과 스 튜어드의 생태학적인 관점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빈포드는 문화변화를 자연환경 의 변화에 대한 적응의 결과라고 하였듯이 신진화 고고학에서 문화체계에서 모든 변 화들은 사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과 연관있다는 것을 확장시켜 나갔다.

빈포드는 문화의 내적 차별화와 통합체계를 강조하였다. 내적 차별화란 각각의 문 화는 모두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각 문화 안에서도 개인 성향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빈포드는 상이성보다는 상사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상 사성의 사전적 정의는 공통 조상에서 유래하지 않았으나, 수렴진화나 그 외 진화 과 정을 거쳐 발달한 유사한 형질이다. 상사성이 정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동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문화들은 범문화체계에서 보 면 서로 상호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문화체계를 이해하려면 극단적이거나 편파적인 관점이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빈포드는 이 문화체계를 기술, 사회조직, 이념 이 세 가지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화이트가 문화를 이해한 방식과 같은 것이다. 이 세 가지 개념들에서 고고 자료는 각각의 개념 안에서만 상호 연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고 고 자료가 세 가지의 개념에 모두 적용된다. 그래서 모든 유물들은 문화체계의 세 가 지 개념들에서 모두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이해하는데 체계적으로 정보 를 준다고 하였다.

빈포드는 다른 신진화 고고학자들처럼 과학적인 접근 방식이 과거 선사시대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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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많은 진전을 주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에 대해서는 빈포드는 인간 행위나 믿음에 대해 전혀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고 문화체계의 앞에서 본 세 가지 개 념들에 대한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문화체계의 각 성격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난 뒤에야 문화변화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빈포드는 고고학자들이 이러한 상응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족지 접근 방법을 실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문화체계에는 기술, 사회, 이 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개념들과 물질자료의 상응관계를 추론하기 위해서 직접 관찰과 경험으로서 행위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고고 자료를 이해 하기 위해서도 실제로 인간이 고고 자료를 사용하여 어떤 행위를 하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인간행위를 먼저 확인한 후에 이후에 유사한 유형이 고고학 적 기록에서 발견된다면 직접 경험하였던 행위를 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을 실증주의적 인식론이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빈포드의 실증주의적 관점에서는 설명과 예측이 동등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하고 있는 것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된 것이고 이를 통한 예측 또한 고고 자 료가 이미 검증되어 그러한 예측이 가능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 한 관점으로 보면 주관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객관적인 요소를 통해서 고고 자 료를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설명과 예측을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고 그것을 과학적인 방법과 분석을 통 해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연역적 방법을 채택하였다. 이왁 같은 방법은 하나의 규칙성, 일반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것을 제외하고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빈포드는 문화사고고학에서 보여준 편년, 서술, 우연적인 사고 등을 비판하였 다.

빈포드의 주장을 정리해보자면 그는 실증주의자로서 객관성을 중시하였고, 자료를 해석하거나 문화변화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연역적인 추론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직접 관찰하는 민족지학적 방법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과학과도 유사하여 하나의 일반화이자 규칙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초기 신고고학의 양상

신고고학자들은 지표조사 발굴을 위해서 표본추출전략을 사용했다. 신고고학자들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나의 규칙성과 일반화를 추구하였는데, 표본추출전략은 문화 안 에서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발굴 조사를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신고고학자들 이 이 방법을 적용하였다.

표본추출전략을 포함해서 신고고학의 초기의 연구들은 빈포드의 생각을 적용하고 연역 추리를 논증하고자 했다. 신고고학을 적용한 사례로는 토기사회학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토기를 주로 여성이 만들었다는 전제가 필요하고 모거사회 에서는 토기제작 기술이 집약적으로 나타나지만 이웃하는 부거사회에서는 무작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가정한다. 즉 여성에서 여성으로 전수되는 집단들에서는 토기의 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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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 요소가 서로 다른 문양이 결합되어 나타나지만 여성 집단들과 이웃해서 사는 남 자 집단에서는 디자인이 결합된 것이 아니라 무작위식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 서 여성 집단들은 소수의 장인 집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토기사회학에서 소 수 장인 집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로 이웃하는 집단에서 만 토기 디자인이 보여진다고만 생각했고 무역이나 교환을 통해서 토기 제작기술이 들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신고고학의 연구들은 민족지고고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민족지고고학은 과 거 선사시대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 현재 남아있는 부족들을 찾아가 직접 관찰하여 이 해하는 것을 말한다. 신고고학에서도 직접 관찰을 통해서 얻은 결과물로 설명하고 예 측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빈포드 역시도 그러하였다. 빈포드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알래스카 누나미우트 에스키모의 취락과 생계를 민족지학적 방법을 통해 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누나미우트 족은 남아있는 과거의 선사시대 부족들과 가장 유 사하다고 생각하였고 이들을 통해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빈포드는 이러한 민족지학적 연구들을 통해서 범문화체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직접 관찰을 통해서 하나의 일반화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화 를 끌어내기 까지는 각 개별의 문화체계의 확립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화체계의 흐름 을 파악해야 한다.

·반역사주의적 경향

일반화를 추구하는 신고고학의 경향은 실제적인 것을 지향하는 미국인들의 정서에 부합하였다. 왜냐하면 미국인들은 과거보다는 현재를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성향이 학문적으로는 반역사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한 이 해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인간행위에 대한 일반화를 만들 려고 하였다. 신고고학의 목적은 일반화이다. 모든 것이 일반화를 수립하기 위한 수단 으로 적용되었던 것이다.

반역사주의적 경향은 민족의 연구를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왜냐하면 일반화를 수립하려는 신고고학에서는 과거에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현재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과거를 연구해야 하는 민족연구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 러나 반역사주의는 미국에서 인종주의를 줄어들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문화사고고 학에서 원주민들에 대한 연구에서는 원주민들은 열등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반역사주의 경향으로 원주민의 창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었고 원주민을 유럽인들 과 같은 종족의 위치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원주민들의 창의성을 인정을 하기는 하였 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문화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여전히 일반화를 주장하 는 고고학자들로 인해서 과학적으로 도출할 수 없는 것들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 문이다.

·진보에 대한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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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고학에서 스튜어드와 빈포드는 문화변화는 생태적 변화에 대한 적응이라고 해 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인간은 생태계의 변화에 적응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증가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변화가 장기가 지속된다고 하더라 고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미국이 여러번 의 외교 정책의 실패와 더불어 경제위기의 위협 속에서 이러한 해석들은 점차 변화하 게 되었다.

첫 번째로 변화하게 된 것은 생태 운동이다. 기술이 발전해 갈수록 인간에게 해를 끼치며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번째는 기술 발달은 자원을 필요로 하는데 자원은 무한정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간의 산업 팽창은 어렵다고 보고 환 경을 보존하자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서 일반 대중들은 기술의 발달로 이루어지 진보에 대해서 희의 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은 경제 위기속에서 불안해 하는 심리적인 요인에 반 응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들은 단순히 하나의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 다. 경제학자 에스터 보서럽은 기술발달로 인해서 농업 생산량이 늘었지만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고 말하였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는데 한 사람당 부양하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집약적인 농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기술발달은 단지 생산량에만 영향을 끼친 것 뿐이고, 사람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더불어 생태환경까지 않좋게 만들어다는 것이 보서럽의 주장이다.

이러한 문화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진화에 대한 부정적 관점이 발달하게 되 었다. 기술과 자연환경, 경제적 요인은 변화를 강제적으로 일으켜 인간이 어쩔 수 없 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가 진화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종말 론적인 해석과도 유사하다. 미래에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의 진보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서 신진화이론들을 이전에 비해서 적극 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진보에 대한 회의감은 미국의 사회, 정지, 경제적인 상황과 도 맞물려 나타나게 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몇몇 고고학자들은 카타스트 로피이론을 고고 자료에 대한 해석으로 적용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불안감이 카타스 트로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사회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불안 감은 현재의 서구 사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고고학자들은 사회 의 문화체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약하고 위험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고고학자들은 기술발달에 대한 진보의 부정적인 시각들은 사회에서 자 연환경의 파괴와 더불어 카타스트로피 이론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할 수 있었다. 이러 한 기술발달에 따른 긍정적인 면만 아니라 부정적인 시각도 살펴봄으로서 고고 자료 에 대한 해석 방법에서 상호 보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었다.

·중범위이론과 민족지 유추의 문제

기술발달에 따른 진보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면서 민족지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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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위와 고고 자료에 대한 관계를 수립하려는 것이 생각했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 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빈포드는 고고 자료와 인간 행위에 대한 관계를 다시 수정하 였다. 이 부분에서 중범위이론이 발전하게 되었다. 중범위이론은 인간행위와 민족지학 적인 연구로 관찰가능한 것에 대한 상응관계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빈포드는 자신 의 중범위이론을 이용해서 전기 구석기시대에서 관찰되는 유형과 호미니드의 행위에 대한 기존의 연구를 비판하는 연구는 발표하였다. 기존의 연구와는 다르게 스카벤징 으로 해석되었던 자료들은 자연스럽게 퇴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연구 결과를 보여주 었다. 빈포드의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고고학자들이 기존의 인간행위에 대한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수용하였기 때문에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분석되지 못한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중범위이론 연구가 지지를 받게 되면서 고고 자료의 맥락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빈포드는 현재의 규칙성과 일반화를 통해서 과거를 해석하기 위해서 동일과 정반복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동일과정반복은 예를 들어 현재에도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과거에도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빈포드는 동 물이나 식물,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도 동일과정반복설이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빈포드의 주장에서 몇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빈포드가 말한 동일과정 설은 현재와 과거의 일어나는 현상들이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보는 것인데, 실제로는 현재에서는 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현상들은 짧은 기간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동안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을 고려하 지 않으면 과거를 잘못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빈포드 는 규칙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부분 또한 그렇지 않다. 빈포드는 부시멘과 누나미우트 족에 대한 민족지고고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서 수렵채집민들의 캠프 공간에서 사람들 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수렵채집민들은 일정하게 뼈를 버리거나 묻는 일정한 장소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두 수렵채집 민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모든 구석기 시대 유적을 해석하였다는 것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두 수렵채집민들간에는 공통점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원주민들에 대한 민 족지 자료를 얻게 되면 빈포드가 제시한 캠프공간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인간 행위에 어느정도 규칙성을 있을 수 있지만 여러 민족이 아니라 두 수렵채집민들의 행 위로 모든 구석기 시대의 캠프공간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인간행위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다양성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 각하고 고고 자료를 해석해야 된다.

3. 과정고고학의 분화

신고고학은 빈포드에 의해서 체계화되었다. 빈포드는 인간행위와 물질문화사이에 상응관계를 세우려 하였고, 규칙성과 일반화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빈포드의 주장에 대해서 모든 고고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신고고학이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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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서, 과정고고학의 정의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고고학자들도 생겨났다. 고고학자들의 의견이 대립하게 되면서, 하나의 의견이 새로운 의견에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경쟁하는 입장에서 대립하였다.

그래서 과정고고학은 하나의 일치된 공통의견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들이 대립하였다 고 볼 수 있다.

·플래너리와 체계이론

빈포드는 신고고학에서 문화변화를 해석하는데, 일반화와 규칙성을 강조하였다. 그 리고 문화 안에서 유물들이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그 체계에 대해서 총체적인 관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즉 문화변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유물들의 체계를 이해해야한 다. 이러한 체계이론을 선사고고학에 적용한 학자는 켄트 플래너리이다.

플래너리 역시 문화변화를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지만 이것을 역사학적이 아니라 과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였다. 그는 일반체계이론을 강조하였는데, 이것 은 1940년대 생물학자 버탈란피가 개발한 개념이다. 그는 모든 사물, 존재물에 대해 행위를 지배하고 있는 규칙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규칙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 고 있기 때문에 체계화시켜 개념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체계이론은 사이버네틱스라는 피드백 도표로 잘 설명되었다. 여기에는 네거티브 피드백과 포지 티브피드백이 있는데, 전자는 외적요인으로 인해서 다시 고정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 이고 후자는 체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피드백 개념은 체계이론이 어떻 게 구성되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플래너리는 생태학적 관점으로 문화변화를 해석하기는 하였지만, 중점적으 로 다룬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옥수수와 콩에 대한 연구에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옥 수수와 콩이 유전적 변화를 일으켜 수렵채집민들이 이것을 다시 재생산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플래너리는 이것은 수렵채집민들이 환경에 적응해서 얻은 결과물이 아니라 옥수수와 콩의 변화로 인해서 이것을 수렵채집민들이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이용한 것으로, 기능적인 접근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플래너리는 문화변화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문화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고 자료에서 체 계적인 변화의 형식들을 관찰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플래너리는 생태학자인 로이 라파포트에 의해서 물질적인 것 말고도 정신적인 체계가 환경에 적응하는데 중 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행위고고학

행위고고학의 시작은 고고 자료를 남기는 문화체계의 맥락과 현재의 맥락은 실제로 다르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행위고고학자들은 물질문화안에서도 과학이 필요하다 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과거 사람들의 행위에 과학을 적용하여 규칙성을 찾으려고 하 였다.

마이클 쉬퍼는 이러한 규칙성이 고고 자료를 설명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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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였다. 그가 말하는 규칙성에는 발견된 고고 자료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발견되기 전까지의 과정과 맥락에 포함된 뒤에는 어떠한 행위들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러한 규칙성은 유적형성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문화형성과정”이다. 이것은 C-transform 라고도 불리며 이것은 고고 자료가 어떻게 사용되고 폐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비문화형성과정”이다. 이것은 N-transform 라고도 불리며 고고 자료가 버려지고 나서 발견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문화형성 과정은 인간이 개입하는 것이고 비문화형성과정은 인간의 개입이 없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다윈진화고고학

다윈의 진화론은 과정고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다윈진화고고학은 선택이라는 개 념으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물들은 열등한 것보다 월등한 것이 자연선택적으로 이루어 져 발달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다윈진화론은 로버트 더넬, 데이비드 브론, 데이비드 린도스에 의해서 체계적 접근을 시도해 생물학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 변화까지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문화체계에 적용시켜 해석하려고 하였다. 많은 문화들 사이에서 자연선택이 이루어져 조금 더 나 은 환경이나 인구비율을 포함한 문화가 경쟁에서 이겨 잘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 다. 이것은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인데, 대신 문화체계 안에서 해석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문화사고고학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과학적인 자연선택개념으로 인해서 이것 이 인간행위를 설명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데이비드 클라크

클라크는 영국 고고학자로서 당시의 문화사고고학을 비판하면서 미국의 신고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1960년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자연지리학자 리처드 촐리와 인문지 리학자 피터 해겟에 의해 진행되던 신지리학의 체계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유물분석 을 모델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클라크의 연구 방법을 분석고고학이라 부른다.

클라크는 유물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형태, 생태, 지리적인 관점에서 통계적 분석을 하여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는 유물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현실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연구하였다. 그는 유물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작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만 모든 유물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물을 연구하는데 있어 발견된 유물일지라도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줄 흔적은 많이 남아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크는 고고학이란

“나쁜 표본에서 간접적인 흔적을 통해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인간행위의 유형을 복원 하는 이론과 실제를 가진 학문”이라고 말하였다.

클라크는 또한 고고 자료를 발견하고 이를 보고서를 완성하는데까지 고고학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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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는 이론을 다섯가지로 정의하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선퇴적과 퇴적 이론이 다. 전자는 고고 자료에 영향을 미친 침식이나 풍화작용, 농경 등과 같은 자연 및 인 문적인 과정을 말한다. 후자는 인간의 행동이나 사회 유형들로 일어나는 과정을 의미 한다. 세 번째는 복원이론이다. 이것은 자료수집에 관한 것으로 고고학적으로 이미 알 수 있는 것과 발굴되는 고고 자료의 관계를 설명한다. 네 번째는 분석이론이다. 이것 은 클라크가 연구 방법으로 채택한 것으로서 유물들을 형식분류하거나 모델화하여 어 떻게 다룰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해석이론이다. 이것은 유물 에 대한 분석적 해석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확인된 고고 자료의 유형들과 직접 관찰하 기 어려운 고대 문화들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즉 해석이론은 네 번째까지의 이 론을 모두 거친 뒤에 제일 마지막으로 완성된 모델화를 통해서 과거 선사시대의 문화 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클라크는 이러한 다섯 가지 이론들을 제안 하면서 이외의 나머지들은 생물학이나 물리학에서 도움을 받아 고고학을 과학적 학문 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콜린 렌프류

콜린 렌프류는 학부 때 물리과학을 공부하면서 과정고고학의 실증주의적 관점을 중 요하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방법이 모든 인간행위를 결정짓는다 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렌프류의 초기 연구들은 포지티브 피드백을 통한 변화들을 강 조하면서 기능적인 것보다는 사회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1980년대 이후로 렌프류는 인간행위의 정신적인 것, 즉 인지적 양상에 관심을 가지 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유물을 가지고 행위를 하는 것에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러 한 행위를 하였는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사용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였다. 이러한 접 근 방법은 과학적인 방법과 결합되어 인지과정고고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인 지과정고고학에서 고고 자료를 가지고 인간들의 생각을 판단하는데는 어려움이 있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렌프류는 다른 과정고고학자들과는 달리 문화사적 해석과 신고고학에서의 일반화를 다른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유물이나 사회체계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종족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렌프류의 접근 방법은 과정고고학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학문적인 시도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회 간 접촉과 네트워크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과정고고학안에서는 과학적인 방법이라는 공통점을 포함하지 만 학자들에 의해서 각각 다르게 해석되었다. 그래서 과정고고학에서 강조하는 규칙 성이나 일반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현상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살린스와 서비스의 진화적 개념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다. 살린 스와 서비스는 무리·부족·군장·국가라는 진화적 개념을 사용하였는데 그들이 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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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해서 부족단계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부족단계의 특 성을 가지고 있는 뉴기니 사회는 다른 북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등에서 보여지는 원주 민 사회들과 다른 사회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되었다. 그들은 무리·부족·군 장·국가 이라는 일반진화를 강조하였는데, 다른 지역이지만 부족사회 단계라고 알려져 있는 원주민사회와 다른 특성을 보인다는 것은 그들이 주장한 일반화와 일치하지 않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과 같이 진화적 개념을 지지하였던 모던프리드 역시 부족사회안에서 변화는 내재적인 진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접촉을 통한 변화라고 하면서 사회의 진화적인 개념에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의심을 통해서 보아스학파의 역사특수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역사특수주의자들은 각각의 문화들은 특정 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 문화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인 간의 행위도 다양한 요인들로 인해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화사고고학에서 문화변화는 전파와 이주로 인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화한다 는 관점에 다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이것이 단지 기술로만 연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으로 접근을 하면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들은 문화변화의 요인들간에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 식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들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문화는 한 지역 안에서 다양한 문 화들이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이마누엘 월러스틴에 의해서 세계체제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노동을 분할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핵심지역이 존재하고 그 주변의 작은 지역들로 자원들을 공급해주며 핵심지역은 경제 적이나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러한 체제론에 대해 서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사회들은 상호작용을 하면서 문화가 변화된다고 하였 는데 과연 세계체제론처럼 문화들에 대해서 위계질서를 세울 수 있냐는 것이다.

빈포드는 실증주의적 관점으로 인해서 문화변화는 자연환경, 기술발달 등에 있어서 규칙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환경, 기술발달 등에서 일어난 변화는 사회나 신념등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플래너리의 체계 이론을 통해서 각각의 문화들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면서 문화의 다양성을 인식하 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문화변화는 외부적인 요인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 게 되었고, 과정고고학에서의 생태적인 관점과 일반화로 모두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 이 많아지게 되었다. 빈포드는 이러한 과정고고학에 대한 비판이 불거질때에도 생태 적인 관점을 옹호하여 점차 새로운 고고학의 방법론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수렵채집민 자료의 신뢰성

문화들 사이에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면서 이전의 민족지적 연구 방법에 대해 다시 문제제기가 되었다. 선사시대 원주민 사회에 대한 해석은 유럽과 접촉하기 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과 접촉하기 전에는 자체적으로 문화가 발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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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했고, “미개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자체적인 발달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고 우월한 유럽민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문화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문화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유럽민들과의 접촉 이전에 이웃한 문화들 간의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졌 다. 이러한 근거들은 산족에 대한 연구에서 드러났다. 그래서 산족의 수렵채집민들의 생활양식이 구석기시대의 일반화라고 생각했던 시각에서 벗어나야했다. 이러한 생각 들은 과정고고학이 진행되던 시기에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빈포드는 몇 세대를 거쳐서 덫으로 사냥하고 유럽인들과 모피를 교환하였던 북극 근처의 원주민 집단을 이용해서 수렵채집민들의 환경적응에 대한 일반화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방에서 보이는 환경적응력으로 인해서 몇몇 인류학자들은 모 피를 교환하여 생활하였다는 것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반화에 반대를 하는 이유는 민족지 자료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단 지 과거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지 자료의 중요성 을 이해하며 해석해야 한다.

·과정고고학 평가

과정고고학은 신진화 고고학을 바탕으로 하여 실증주의적인 관점으로 인해서 문화 체계 안에서 규칙성과 일반화를 강조하였다. 점진적으로 과정고고학이라고 불리면서 이 안에서 학자들간의 견해에 따라 분화되었다. 하지만 학자들간의 견해가 서로 대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쟁하면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과정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과학 적인 방법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인간들의 신념, 종교 등과 같은 인지적 양상에 대해 서는 많은 관심을 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에 문화변화에 대해서 더 이상 일반화로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 히면서 문화사고고학에서 보여주었던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 고 내적인 발달만이 아니라 문화변화의 요인들은 외부에서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 였다. 이러한 과정고고학에 대한 비판이 적용되면서 이에 대안적인 방법들이 제시되 었다. 이후에 대안적인 방법들이 제시되기 이전까지는 미국에서 과정고고학이 고고학 에 미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 탈과정고고학

·지성적 배경

1970년대부터 과정고고학에 대한 비판이 불거지면서 이를 대체하는 방법들이 제안 되었다. 1985년에 이안호더는 이러한 움직임을 탈과정고고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탈과정고고학은 과정고고학의 과학적인 방법을 대체하는 방법으로 문화변화를 인간의 인지적인 것과 이로 인한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탈과정고고학의 발견 은 몇 가지 지성적인 배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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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 인류학

이것은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의 사회인류학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를 곧바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구조주의를 결합한 것이다. 구조주의 학 자들은 신진화 고고학에서 보여지는 반역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인류학자 들은 역사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두 접근 방식이 상호보완하여 중요한 역 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회인류학자들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념론에 영향 을 받았는데, 그래서 인간행위는 인지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신마르크스주의라고 불렀다. 신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들은 이제는 변화를 일으키는데 인간의 지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신진화론, 문화유물론이 문화변화를 너무 외적인 요인에 반응한다고 하였고, 인간행위 역시 스스로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서 반응하는 것이라는 의견들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았다. 이들 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인간행위가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지하여 의도적으로 행위를 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계급 간의 갈등이 문화변화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았는데, 이들은 문화변화에서 각각 나타나는 사회 간, 계급간의 개별적인 차이나 세부적인 것에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2) 포스트모더니즘

당시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실증주의와 행위주의를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연구자들은 지식의 주관성을 인정한 다. 즉 인간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과정고고학의 객관성만 중시하는 것과는 완 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과정고고학에서 중시한 규칙성이나 일반화가 인간행위에서 보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상대 주의를 옹호하였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행동을 하더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 고 행동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연구자들은 헤게모니적 지식을 해체하고자 하였다. 헤게모 니적 지식이란 남성을 우월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연구자들은 상대주 의를 옹호하기 때문에 남성만을 강조하는 의견에 대해서 없애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 러운 일일 것이다.

(3) 미국 문화인류학의 신경향

미국에서 보아스학파의 인류학이 쇠퇴하면서 나타난 것이 신문화인류학이다. 신문 화인류학자들은 문화변화에 대한 해석이 자민족중심주의와 식민지 경향을 가지고 해 석된다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모든 문화들은 각기 특성들을 가지 고 있고 과정고고학에서 보여지는 일반화를 따르기 보다는 각 문화의 특이성을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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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고 했다. 신문화인류학자들은 위에서 본 포스트모더니즘의 생각들에 동의하였 다. 그래서 이 신문화인류학은 탈과정고고학을 강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마르크스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역할

탈과정고고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이안 호더의 연구로 시작되었다. 호더는 『상징 및 구조고고학』이라는 책을 내면서 빈포드의 과정고고학에 대한 대항의 의미로서 받 아들여졌다. 호더는 과정고고학에서 연구 성과를 내기도 하였지만 과정고고학에 대한 의문을 품고 문화적인 요인이 인간행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탈과정고고학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초기의 탈과정고고학자들은 일반화와 규칙성을 반대하며 인간의 인지적인 면에 관 심을 쏟았다. 그래서 종교나 신념 등과 같은 비경제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래서 초기의 학자들은 이데올로기가 인간행위를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 였다. 이데올로기를 인간행위에 있어서 강조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론적인 것을 중시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 간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스스로 처한 상황을 극복해내는 것에 대해서는 간 과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문화변화나 인간행위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탈과정고고학자들은 과정고고학에서 보여줬던 실증주의적 관점을 거부한다. 탈과정 고고학자들은 실증주의적 관점이 계급차이를 분명하게 하는데 적용된다고 생각하였 다. 대니얼 밀러는 규칙을 만들고 행위등을 일반화시키면서 엘리트들이 일반인들에게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해준다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탈과정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이 가 진 공통점을 사용해서 탈과정고고학이라는 개념을 전 세계화 시키고 있었다.

·이안 호더와 맥락고고학

탈과정고고학의 주요한 특성들은 이안 호더의 연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들 은 과정고고학에서 보여준 것을 거부하고, 관념론적인 것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호더는 물질문화가 사회체계의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 다. 과정고고학에서는 무덤의 구조나 부장품들이 사회적 계급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였지만 호더는 무덤의 구조나 부장품들의 다양화 한 것은, 종교나 신념의 영향 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번째는 호더는 과정고고학에서도 쓰이던 민족지학적 접근 방법을 채택하였다.

그는 과정고고학의 가설들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 민족지학적 방법을 선택하였는데 이것은 그도 역시 민족지학적 접근 방법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맥락고고학이라고 부르는 호더 만의 고고 자료 해석 방법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유적이나 유구 및 유물에서 맥락을 중요하게 보는 것으로 하나의 양상을 파악 하기 위해서 그것만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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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즉 한 가지 측면에서만 관찰과 해석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 서 파악이 가능해야 하나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맥락고고학은 특 수성과 보편법칙을 통해서는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 것은 맥락고고 학에서만이 아니라 탈과정고고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가지 학문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고고학으로 인해서 경시되었던 학문까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탈과정고고학의 전개

미국에서 탈과정고고학은 1980년대 되어서야 조금씩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점차 실증주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이로 이한 상대주의와 역사특수주의로 인해서 고 고학에 대한 과학적인 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방법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 다. 그래서 고고 자료를 통해서 인간행위를 분석하는데 더 이상 일반화가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인간행위를 해석하는데는 주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 을 알게 되었다.

미국 고고학자들은 종족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종족성에 대한 편견이라 는 것은 인종주의를 말한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원주민들의 문화는 발달하지 못했 다고 보고 만약 문화에 발달이나 변화가 생기는 것은 유럽민들이 원주민들에게 기술 을 전파하여 이를 받아들인 결과라고 해석하였다. 절대 원주민 문화 내부에서의 자체 적인 발달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후에 다양한 고고학적 기록으로 인해서 원주민 문화의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젠더고고학과 비판이론

미국 고고학에서 젠더의 편향에 대한 논의는 여성차별에서 시작하였다. 고고학에서 여성들 중 대부분은 발굴 단장이나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없었고 대부분 기술직을 맡 고 있었다. 고고학은 대부분 남성이 주도하에 이루어 진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생기 면서 젠더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주도적인 연구에 대한 것은 실증주의적 관점으로 일반화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제는 상대주의와 탈과정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젠더고고학자들은 젠더가 문화체계를 이룰 수 있는지, 생물학적인 차이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대부분의 젠더고고학자들은 남성과 여성에 있어 서 하나의 일반화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비판이론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연구자들의 설명을 해체하여 그 설명에 들어있 는 내재된 의미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비판이론을 적용 시켜 고고학에서 자신이 편향된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고자 하였다. 대부분의 고고학 자들은 자신도 편향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더욱 더 상대주 의적 인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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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와 고고학

초기에 주로 선호되었던 설명은 마르크스의 ‘사회’가 아니라 ‘문화’구조주의 였다.

이런 접근 방법의 창시자는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이다. 그는 문화의 유형들이 외부적인 요인에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았다. 모든 문화는 본질적으로 법칙 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인간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반 화가 진행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에는 이분법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 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보아스 학파의 형상주의와 매우 유사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둘의 공통점 인간의 인지적 양상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선사고고학에서 구조주의를 처음 적용한 학자는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르루아구 랑이다. 그는 구조주의 방법을 적용하여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개념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후에 르루아구랑은 서유 럽 후기 구석기 동물 벽화의 구성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르루아구랑은 이분법 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동물들과 연결시켜 이를 통해 신화적인 접근을 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같이 연구한 라멩앙프레르는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고고학 자들이 두 사람의 의견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것인지 판단할 수 없어 르루아구랑은 이러한 접근은 스스로 없앴다.

구조주의적인 접근을 한 또 다른 학자는 이안 호더를 예로 들 수 있다. 호더가 구 조주의를 선사고고학의 해석 방법으로 적용시킨 사례는 『순화와 유럽 농경사회의 기 원』에서 알 수 있다. 호더는 이 책에서 선사시대 생활 양식의 유형들은 자연과 문화, 남성과 여성 등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이분법적인 대립을 이루면서 변화하였다고 설명 하였다. 그러나 호더의 이러한 해석은 민족지학적 접근 방법으로 얻어낸 유형들에 어 떤 의미를 지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접근 방식은 문화사고고학과 과정고고학에서 간과한 복잡한 유 형들에 대해서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구조주의도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다양한 자료를 분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이분법적인 방법으로 인간 의 사고를 다 해석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더 이상 선사시대 고고 자료에 대한 해석을 얻지 못하였다.

·극단상대주의와 탈구조주의

탈과정고고학은 영국에서 탈구조주의적 정치 행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탈구 조주의적 정치는 권위의식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 이클 섕스, 크리스토퍼 틸리, 피터 우코의 연구로 인해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과정주의에서 강조하였던 인간행위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행위를 하는 인간이 속해 있는 집단의 문화나, 신념 등에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 인간들의 사고를 중시 하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념론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권위적인 것에 저항하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 권위라는 것은 모든 사회의 특성으로 일정하게 불평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불평등의 차이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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섕스와 틸리, 우코는 극단상대주의자들과 의견이 일치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가 가 지고 있는 해석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민족지 자료를 통해서 전혀 가지고 있 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고고 자료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이루어질 수도 있어서 수 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학자들 개인들이 자신이 주장하는 의견을 강조하기 위 해서 고고 자료를 그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억지로 끼워 맞춘다는 것이다. 그 래서 극단 상대주의자들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하거 나 신화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한다.

섕스와 틸리는 인간 스스로가 변화를 일으킬 수 없고 일반화와 규칙성으로 모든 사 물이 정의된다는 것에 반대하여 에이전시 개념을 강조하였다. 인간이 사회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모든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 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에이전시의 개념은 탈구조주의가 발달하면서 관심이 수축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은 하나의 구조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조들에 의해서 둘러싸인 존재로 생각되었다. 즉 인간의 여러 사회현상들에 의해서 행동의 저지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다. 탈구조주의의 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전에 존재하는 사회 조건들을 인간의 자유 를 막는 요인으로 생각하였다. 또 다른 학자인 피에르 브르디외는 개인들의 행위나 믿음 등을 이용하여 인간들이 스스로 사회를 어떻게 재형성하는 분석을 하기도 하였 다.

영국에서 탈과정고고학의 흐름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극단상대주의와 탈구조주의 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접근은 모두 각각의 문화들을 인정하고 일반화와 규 칙성을 배제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 작은 문화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하였다. 호더는 이것을 해석고고학이라고 불렀다.

·인문학적 고고학

탈과정고고학의 세 번째 흐름은 인문학적 고고학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특징을 가진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고고학은 현상학에 배경을 두 고 있는데, 현상학은 인간과 인간이 보는 물질문화를 따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서 로 상호작용하는 객체로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의 인문학적 고고학의 연구는 경관고고학으로 나타났다. 선사시대의 경관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연구하는 분야이다. 경관고고학의 연구는 호더의 사례로부터 발전하였다고 본다. 호더는 선사시대의 유적들에 대한 상징을 지리적인 배경으로 해석하였는데, 지리적으로 다르게 분포하고 있거나 특정한 위치를 알려준다 고 보았다.

탈과정고고학자들은 경관을 통해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것을 어떤 의미로 생각하 였는지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탈과정고고학자들이 이러한 생각들이 고고 자료 로서 증거를 입증하지 못한다고 동의하면서도, 이러한 문제점들로 인해서 사변적인 생각이 가능하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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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화의 의미

탈과정고고학에서 물질문화란 민족지학적 자료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민족지학적 연구 방법을 통해서 얻어낸 물질문화는 실증주의적 관점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과정고고학자들과 달리 탈과정고고학자들은 실증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며 관념론적인 관점을 취했다. 그래서 이들은 보아스 학파 의 주장들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문화의 상대주의와 인간의 주관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유물에는 의미가 있다고 보았고 경관을 통해서 의미와 상징 에 대해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5. 대륙 유럽의 대안들

과정고고학과 탈과정고고학의 개념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럽지역에서 과정고 고학은 문화사고고학을 하던 학자들에게 생태학적인 관점과 일반화와 규칙성의 관심 을 불러 일으켰다. 탈과정고고학은 고고 자료에 대한 상징성 연구의 관심을 불러일으 켰다.

유럽에서의 고고학은 당시의 많은 사회과학 분야의 학문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나 보아스학파의 관념론과 형상주의 등과 같은 이론들이 고고학 에 적용되어 문화를 해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유럽의 고고학에서 주목 받았던 이론으로는 가르뎅의 논리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가르뎅은 고고학을 고대 선사시대 사람들의 역사와 생활양식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물질자료의 종합이라고 정 의하였다. 가르뎅의 연구는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서 이해되었는데 고고학 연구에 이 러한 논리적인 단계들을 적용시켜서 중요한 방법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논리주의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 그 과정을 논리적인 단계로 나누는 것은 효과적일지 몰라도 이것을 통해 고고 자료에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6. 인류학 이론과 고고학

과정고고학과 탈과정고고학은 실증주의과 관념론적인 해석이라는 것에 차이점을 두 고 있지만 모두 인류학을 바탕으로 해석하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접근 방법은 초기 에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되었지만 서로의 단점들을 보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경 계가 모호해졌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생각이다.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진행되면서 인간행위를 물질문화와 결합하여 설명함으로써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각이 많아졌다.

인류학에 대한 많은 이론들은 많은 고고학자들에게 수정되어 고고 자료에 적용되었 다. 중범위이론, 구조주의, 맥락고고학, 직접역사적 접근, 해석학적 접근 등을 예로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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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고고학을 인류학 이론의 소비자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은 고고학은 다양 한 학문의 영향을 받고, 고고 자료에 적용하여 과거 선사시대를 해석할 수 있지만 여 전히 인류학에 배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차일드는 고고학에 대해서 두 가지 언급을 하였다. 첫째는 사람들이 적응하는 세계 는 사람들이 의도적인 행위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과 그들의 신 념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당시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인 상황과도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즉 차일드는 인간행위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고 인간행위와 인 지적 양상은 당시 사회적 상황의 흐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한다고 생각하였 다. 만약 이러한 차일드의 이론에 많은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다면 고고학 이론은 빨리 발전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정고고학과 탈과정고고학에서 보여 준 학문의 분화와 인류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이론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겪지 않 았을지도 모른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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