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
3. 오리엔트에서 이슬람 이전 역사
1) 오리엔트 고대문명
기원전 2350년경 셈족 계통의 아카드인들이 처음 통일국가를 세운 이후, 중동에는 줄곧 셈 계 민족들에 의해 흥망성쇠의 역사가 주도되었다. 특히 바빌로니아왕국은 기원전 18세기경 함 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유명한 성문법전을 남겨 놓았다.
바빌로니아를 이어 오리엔트를 차지한 정치세력은 기원전 16세기경 히타이트였다. 이 시기 부터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생달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제국 들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기술과 문명전파에 가속도가 붙었다. 더욱이 당시 세계최강 국가였던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 사이에 시리아를 둘러싼 첨예한 대결은 기 원전 1280년 양국간의 카데쉬 평화조약 체결로 일단락되었다. 시리아를 평화적으로 분할한 카 데쉬 조약은 역사상 세계최초의 국제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히타이트는 처음으로 철제 품을 소개하여 오리엔트 전 지역에 군사와 농업에서 철기문화 시대를 열었다.
히타이트가 멸망한 후, 기원전 15세기부터는 메소포타미아는 물론 동부 지중해 연안의 비 옥한 초생달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셈계 제국들이 등장하여 범세계주의적인 사상이 태동 되었다. 특히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문명의 영향 하에 있던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는 페니키아와 헤브루 두 왕국이 번성하였다. 그 중 페니키아는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여 부 강해졌고,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카르타고와 같은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다. 페니키아의 표음문자(表音文字)는 그리스에 전해져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헤 브라이 왕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정착한 유목민인 헤브라이인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헤브 라이인들은 기원전 1500년경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에 정착했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이집트 로 이주하였다. 파라오의 압제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BCE 11 세기말에 헤브라이 왕국을 세웠다. 다비드와 솔로몬 왕때 전성기를 누린 헤브라이 왕국은 곧 이스라엘과 유대 두 왕국으로 분열되어 이스라엘은 BCE 8세기 아시리아 제국에 멸망하 고, 유대왕국은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왕국에 정복되었다. 유대교를 성립시켰던 헤브라 이인들의 유일신 사상은 후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립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서양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헤브라이인들의 민족사는 구약성경에 잘 나타나 있다.
BCE 12세기경에서 약 300년 동안 필리스틴인(Philistines), 아람인(Arameans), 헤브루인 (Hebrews)들이 팔레스타인-시리아지역에서 각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이란과 메소 포타미아지방에서는 인도-유럽어계의 메디아인(Medians)과 셈계의 칼데아인(Chaldeans)이 침투하여, 혼란 속에서 교류와 쟁패를 거듭하였다. 이러한 혼란과 분열 상태를 종식시킨 세 력은 아시리아였다. 아시리아는 BCE 13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중류지방에서 팽창돼 오 다가 BCE 8세기경 최초로 오리엔트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아시리아는 아슈르바니팔 (Ashurbanipal)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는 옛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 라, 쐐기문자로 기록된 방대한 점토판을 수집하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서사시, 영웅시 등은 이 점토판의 덕택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정복일변도 정책의 결과,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왕의 사후에 쇠약해져, 메디아를 비
롯한 소수민족들의 반란으로 BCE 612년 멸망하였다. 아시리아제국의 멸망으로 오리엔트는 다시 메디아(Media), 리디아(Lydia),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의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 그 중 칼데아라고도 불리는 신바빌로니아왕국(612-538 BC)이 가장 번영하였는데, 그 중심지인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로 불릴 만큼 크게 번창하였다. 이 왕국은 네부카드네자르 (Nebuchadnezzar, 605-562 BC) 왕 때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시리아를 확보한 후, 기원전 586년에는 유대왕국의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포로로 바빌론으로 끌려갔는데, 이를 바빌론 유수라 한다. 이 사건은 동시에 유대문화 에 오리엔트의 다양한 문화적 유산이 이입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예측할 수 없는 홍수로 인한 경작의 불확실성과 개방적인 지리적 입지로 인한 피할 수 없 는 이민족의 위협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생활과 인식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는 정기적인 나일강의 범람으로 풍요를 보장해 주던 예측가능한 경제체제와는 판이한 것이었 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내세를 평온한 현세의 연장으로 보고 영혼불멸과 부활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혼불멸과 부활사상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앙으로 전해 져 후일 기독교의 부활 신앙으로 승화되었다. 반면, 현세적이고 숙명론적이었던 메소포타미 아인들은 악마(Demon)신앙과 점성술에 몰입하였다. 악마에 대한 믿음은 선신 아후라 마즈 다(Ahura Mazda)에 대항해 싸우는 악신 아흐리만(Ahriman)이라는 사상으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전승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적인 사고는 기독교 신학의 발달에도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집트를 정복하고 분열된 중동을 재통일한 세력은 BCE 6세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제국이었 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리엔트를 넘어 지중해로 진출하면서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에 대 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리스와의 전쟁 원인이 되었다. 흔히 페르시아전쟁으 로 알려진 이 격돌에서 페르시아가 패퇴하였고, 그 결과 기원전 338년경 그리스 도시국가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에 의해 기원전 331년 페르시아제국은 종말을 맞았다. 지금 이란에 남아있는 페르세폴리스 유적이 바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제국의 중심 궁성이었다.
알렉산더의 아시아 서쪽 지배는 이슬람이 등장하는 7세기 초까지 거의 1천년간이나 이 지역 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소개되면서 동서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헬레니즘이 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현상은 그리스 문화의 일방적 전파라기보다는 오리엔트의 오랜 문화적 토양에 그리스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독특하게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렉산더 사후 그의 제국은 4개 국가로 분할되어 이집트에 프톨레미 왕조, 중동에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셀루키드(Seleucid, B.C. 312~64)왕조가 성립되었다. 셀루키드 왕조는 제 6대왕 안 티오커스 3세(Antidchus III)때 국력이 절정에 도달했으나, 내부 반란으로 급격히 쇠퇴하였다.
동부지역에는 그리스계의 박트리아(Bactria)와 이란계의 파르티아(Parthia)가 독립하였으며, 나머지 영토는 결국 1세기 로마에 병합되는 비운을 맞았다.
2)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
이후 중동지역에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동로마와 3세기경 파르티아를 멸하고 이란지방 에 새로이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격돌장으로 변모하였다.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
시아라는 양대 세력의 끈질긴 소모전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피폐, 그리고 과종한 세 금으로 인한 민심의 이탈, 종교적 내분으로 인한 국론 분열은 역내에 새로운 세력의 출현을 예고하고 이었다. 이러한 세기말적, 시대적 상황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강력한 가치들로 중동역사의 새로운 원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중동이 가져다 준 가장 훌륭한 문화적 유산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일신 사상의 확립일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후일 이슬람교가 모두 중동의 토양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면 서 세계적인 일신교로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