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차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연결의 도시 익산입니다
김태호 숭문고등학교 지리교사 ([email protected])
대륙횡단 열차 개통의 꿈을 담은 익산역, 이곳에는 곧 복합환승센터가 새롭게 들어설 예정임.
철도를 따라 백제의 금마저에서 갈대숲 솜리로
장항선 마지막 답사지인 익산은 기차표 예매 담당자의 실수로 영등포역에서 익산까지 전 라선 새마을호를 타고 이동하게 되었다. 용산에서 익산으로 가는 기차표를 검색하면 소 요시간 1시간 10분 전후의 KTX와 3시간 전후의 호남선과 전라선 일반열차, 그리고 3시 간 30분 전후의 장항선 일반열차까지 다양한 선택지가 검색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연 결의 도시 익산’의 가장 뚜렷한 특성을 보여준다. 장항선을 통해 익산으로 여행하고자 할 때, 평소 기차여행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열차번호 십의 자리 숫자가 ‘5’나 ‘6’인 열차 가 장항선 열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전체 운행노선을 확 인하거나 출발하고자 하는 시간대의 가장 느림보 열차를 선택하면 된다. 어찌 되었든 예 매 실수 덕분에 우리는 계획한 시간보다 30분 정도 익산에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익산에 도착한 우리는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역전에서 만난 주민의 이야기를 듣 고 길 건너편 문화예술의 거리로 향했다. 문화예술의 거리는 낙후되어 가는 익산역 앞 중 앙로에 문화 거점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젊은 층이 찾을 수 있는 ‘제2의 홍대 앞’을 목표 로 2012년부터 추진했던 구도심 활성화 사업이다. 이 거리에서 처음 들른 곳은 ‘익산근대 역사관’이었다. 이곳은 원래 1922년 독립운동가 김병수 선생이 개원했던 삼산의원(등록 문화재 제180호) 건물을 2019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복원하면서 익산근대역사교육장으로 변모하였다. 건물 앞으로는 작은 광장을 조성하여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을 두었는데, 이날도 옛날 이곳이 ‘작은 명동’이었던 때를 추억하며 문화행사가 진행되고 있 었다. 건물의 규모는 작았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와 친절한 문화해설사의 설명 을 통해서 우리는 익산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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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역의 다양한 모습이 펼쳐집니다.
제482호 2021 December
<그림 1> 옛 영정통 문화예술의 거리 <그림 2> 익산근대역사관(구 삼산의원, 등록문화재 제180호)
익산은 북쪽으로 금강, 남쪽으로 만경강이 둘러싼 땅이다. 두 강의 지류들이 범람하여 형성한 범람원이 넓게 펼쳐져 있어, 북동측의 용화산과 미륵산, 북서측의 봉화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풍요로움 때문에 마한의 준왕(準 王)과 백제의 무왕(武王)은 나라의 새로운 터전으로 삼고자 하였을 것이다. 위만에 쫓긴 준왕이 자리 잡은 북동측 산자락의 금마면은 근대 이전 익산의 중심지였다. 금마면 서동 공원 내 마한박물관에서는 마한에서 백제로 이어지는 과정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백제의 무왕은 신분과 국경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이다. 사비(부여) 시대 백제의 왕으로 즉위한 무왕은 풍요로운 익산 으로 천도를 꿈꾸며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실제 천도가 이루어졌 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2018년 익산 쌍릉의 재발굴 조사에서 무왕의 것으로 추 정되는 인골이 발견되면서 무왕이 익산천도를 준비했다는 사실은 명확해졌다. 익산 시민 들은 매년 서동축제를 통해 익산 백제를 꿈꾸던 무왕을 기념하고 있다. 올해 서동축제는 11월 중에 개최되었으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와 무왕의 익산천도 입궁 의례식을 재현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금마면은 오랜 기간 익산지역 행정의 중심지였으나, 철도 부설과 함께 익산 중심지가 금마면에서 현재 익산역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1911년 익산군 청도 남일면(현재의 위치)으로 이동하였다.
갈대만이 무성한 습지에 불과하던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 솜리는 10여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으나,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되고 1908년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 군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작은 시장과 마을이 생겨났다. 1912년 호남선 철도의 개통과 함 께 솜리의 한자 지명인 이리(裡里)역이 개설되었다. 개통 당시 이리역은 전통적인 교통 거점이었던 강경을 연결하는 강경-이리 간 호남선과 군산-오사카 사이의 항로를 개설 하여, 전라도의 미곡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개항장이었던 군산을 연결한 이리-군산 간 군산선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일본인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전북철도주 식회사가 1914년 전라선의 모체가 된 전주-이리 간 한국 최초의 사설철도를 개통하면서 1914년 이미 전 구간이 개통된 호남선과 군산선, 그리고 전라선이 만나는 결절 지점으로 서 철도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라선은 주로 평지를 지나는 장항선과 달리 호남 의 동부 산악지역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있어 지형적 장애물이 많다. 때문에 전주-순천 구간이 완공된 1937년이 되어서야 전라선 전 구간의 영업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리는 상전벽해라 할 수 있는 번영을 맞이하게 되어 1915년에는 일본인 2053명, 조선인 1367 명의 신도시로 발전했다.
역 주변은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유동인구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상업이 발달하였 다. 이리역 앞의 영정통은 일본인 신시가지로, 영정(榮町)은 꽃밭, 즉 번영한 곳을 뜻한 다. 당시는 구경하기 힘든 백화점만 풍천양행을 비롯하여 두 곳이 있었고, 전국구 유흥
가로 자리매김하면서 밤낮으로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리의 번영은 일본인들 에게 땅과 쌀을 빼앗긴 농민들과 철도 부설, 수로 공사에 동원되었던 한국인 노동자들 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지역 주민들이 기억하는 영정통의 전성기는 1960년대 초에서 이리역 폭발사고가 있던 1977년 11월 11일 사이의 시기로, ‘낮에는 10만, 밤에는 6만’
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기찬 곳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신도심이 개발되고 익산의 중심이 영등동, 모현동 등으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빈 상가들이 곳곳에 남아 있 는 쇠퇴한 구도심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2009년 익옥수리조합 건물에 ‘익산문화재 단’이 입주하면서 영정통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만들기 위한 변화의 노력들이 일어나 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익옥수리조합 건물을 찾아 이동하면서 보았던 빈 상가들만 보 아도 영정통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는 도전은 꽤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근대역사관에서 나와 문화예술의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걸어서 방문한 곳은 ‘익산 왕도 미래유산센터’로 사용되고 있는 옛 ‘익옥수리조합 사무실 건물’이었다. 익옥수리조합은 1920년 만경강 중류의 임익남부수리조합과 하류의 임옥수리조합이 합병하여 설립되었 다. 익옥수리조합은 군산 서부지역의 간척사업과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 등으로 물 부족문제가 심각해지자 기존 수원(水源)에 한계를 느끼고 만경강 지류인 고산천 상류에 1922년 대아댐을 건설하고, 1923년에는 군산간척지에 만든 옥구저수지까지 대간선수로 를 연결하였다. 일제를 등에 업은 일본인 지주를 중심으로 진행된 농업혁신은, 당시 대 다수가 소작농으로 전락했던 익산 농민들에게 토지개량과 수리사업을 명분으로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키고 저임금으로 노역에 동원하여 이중의 고통을 안겼다. 농업의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민중들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던 수탈의 현장인 이곳은, 현 재 이곳을 기억하고 방문하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며 회의실과 시민기록관으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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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익산 왕도 미래유산센터(옛 익옥수리조합 건물) <그림 4> 당시 건축물의 목재 구조를 직접 볼 수 있는 독특한 공간
되고 있었다. 3층은 드라마 ‘이몽’과 영화 ‘동주’의 촬영장으로 쓰인 다락방과 상설전시관 으로 구성해 당시의 모습 그대로 거대한 목재 트러스트 구조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해 놓았는데, 독특한 공간감을 주는 곳이었다.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대장촌에서 만난 사람들
우리는 일제의 식민 수탈과 농업근대화를 온몸으로 겪어 낸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만경 강변의 춘포로 향했다. 춘포역은 1914년 이리-전주 간 열차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驛舍)로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슬레이트를 얹은 맞 배지붕의 목조 구조는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춘포역은 개통 당시 지역명이었던 대장촌의 이름을 딴 대장역이었는데, 199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지명을 춘포리로 바꾸고 역이름도 춘포역으로 개명하였다. 하지만 대장촌이라는 지명은 일제 침략 이전인 19세기 후반부터 역사 자료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제의 잔재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춘포역은 대장촌의 농장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으로 효율적으 로 운반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설된 역이었다. 당시 춘포면의 중심지는 인수리였으나 일 본인 호소카와 농장이 위치한 대장촌리를 통과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에 설치되었고, 춘 포면의 중심지도 인수리에서 대장촌리로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역이 들어서자 수탈의 목적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철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해방 이후에도 춘포역 은 대장촌 사람뿐만 아니라 만경강 건너의 김제 주민들, 전주와 이리로 통학하는 학생들, 이리나 삼례에서 열리는 장에 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근방 사람들에게는 사랑방과 같은 존재였다.
우리가 처음 방문했을 때 역사는 폐쇄되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건물을 돌
<그림 5> 춘포역사 <그림 6> 춘포마을 전경
아 철로 쪽으로 나가보니 철로도 철거되었고, 철길이 있던 자리 위로 전라선 복선전철 화 사업 때 건설된 고가철도가 거대한 모습으로 옛 철길을 대신하고 있었다. 최근에 다시 방문했을 때 이곳을 지키며 방문객들에게 대장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우리 동 네 알리미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자 어르신께서는 처음 방문했을 때 는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역무실로 우리를 들이고 커피 한 잔을 건네셨 다. 대장촌 출신인 어르신이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던 일제강점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춘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리로 통학하던 시절이 이야기, 만경강변으로 향하는 여행객을 쏟아내던 춘포역의 전성기 시절 이야기 등을 들으면서 수탈의 도구로 건설된 철도가 다 음 세대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고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70년대 연간 승하차 인원이 30만 명에 육박하던 춘포역은 인구감소와 4차선의 27번 국도에 밀려 점차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여객수송이 중단된 2007년에는 연간 승하차 인원이 291명에 불과했고, 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철길과 플랫 폼도 함께 철거되었다. 춘포역은 이제 이동수단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로 수탈의 현 장을 찾는 답사자나 가장 오래된 역사를 찾는 철도 팬들을 기다리는 문화재가 되었다.
대장촌은 유서 깊은 마을이기보다는 1924년부터 시작된 만경강 본류의 직강화 공사를 통해 배후습지를 농업용지로 확보하기 위한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신생 마을이었 다. 만경강은 감조하천(tidal river)이어서 농업용수로는 이용되지 못했고, 주변 경지의 농 업용수공급은 지류인 고상천에 만들어진 대아댐과 저수지를 연결하는 대간선수로에 의해 서 이루어졌다. 만경강 본류의 기능이 배수기능으로 제한되면서 직강화 공사가 본격적으 로 시작되었으며, 82㎞의 짧은 하천인 만경강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직강화로 인하여 15㎞ 정도가 짧아졌다. 대장촌 일대는 대보둑이라 불리는 6~7m 높이의 제방이 쌓이면서 연중행사로 겪었던 물난리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제방 아래쪽으로 새로운 마을 이 속속 들어섰는데, 제방 바로 아래의 신촌, 동네 가운데 있는 중촌, 춘포역 근처의 마을 은 역전이라고 불렸다. 동네 사람들은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으로 일하거나 철도공사와 제 방공사 등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모여든 전북지역과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이 지역의 대지주는 호소카와 가문이었다. 소작료로 받은 쌀은 도정을 거 쳐 부피를 줄이고 전군도로와 춘포역을 통해 군산항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대장촌에는 춘포역이 개통한 1914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호소카와 도정공장이 있었는 데, 당시로는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연면적 2056㎡에 정미기 12대가 설치된 대형 공장이 었다. 해방 이후에는 정부의 양곡 도정공장으로 운영되다가 1998년 폐쇄되었지만, 그 원 형을 유지한 채로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초행길인 우리에겐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고 도정공장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골목길을 지나던 중년의 아저씨를 만나 도정공장 가는 길을 물을 수 있었는데,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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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공장 앞까지 데려다주시는 친절을 베푸셨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려는데, 주머니 에서 주섬주섬 열쇠를 찾으시더니 닫혀 있던 문을 열고는 본인이 이 공장의 주인이라고 소개하셨다.
도정공장은 공장이라는 이름답게 규모가 컸다. 이곳을 둘러보려면 50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겠냐고 물으셔서 당연히 감사하다고 수락했더니, 정말 공장 구석구석 잠겨 있던 공 간들까지 전부 개방해가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건물 밖을 함께 둘러보고 있을 때, 주민 한 분이 “이 건물은 동네 애물단지인데 개인이 사들이는 바람에 어떻게 하지도 못하 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셨다. 공장장은 이 건물과 건물에 남겨져 있던 물건들 하나하나 관찰하고 정리만 한 것이 아니라 이 건물과 동네의 역사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 하신 분이셨다. 이 건물을 잘 정돈하고 가꿔서 문화행사를 열고 공간을 개방함으로써 수 탈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을 주민들과 이 공간이 서로 화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야기하셨다. 최근 다시 이곳을 방문하 였을 때, 공장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창고 한 곳에서 익산 시민들이 ‘삼 삼오오 우리 동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익산문화관광재단과 익산도시지원센터의 지원 을 받아 ‘일제강점기 농장에서 만경강 노을까지’라는 부제로 ‘춘포 가는 길 사진전’을 준 비하고 있었다. 필자는 전시된 사진들 사이에서 작은 꿈을 실현해가고 있는 공장장을 발 견할 수 있었는데, 여전히 익산의 매력에 빠져 방문한 답사자 한 분과 춘포와 도정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대장촌을 방문했을 때는 수탈의 아픔과 농민들이 저항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춘포마을에는 춘포역과 도정공장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인 에토 가옥, 만경강의 범람을 막고 있는 대보둑 등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이곳을 점유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채워가는 새로운 이야기들로 과거와 화해하며 소박하 게 살아가고 있었다.
장항선과 만난 또 다른 종착역, 동익산
대장촌에서 익산으로 돌아오며 익산 시내에 들어서기 전, 인화동에 위치한 동익산역을 들렀다. 동익산역은 익산역 기점 동남 방향으로 1.9㎞ 정도 떨어진 전라선 하행열차의 첫 번째 역으로서, 익산역 주변이 중심지가 되기 전까지 이 지역의 중심지였던 인화동 2가 에서 1914년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 개통과 함께 ‘구이리역’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 작했다. 1938년 ‘동이리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다가 이후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 합되면서 ‘동익산역’으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하루 평균 승하 차 인원이 1500여 명에 달하고 연탄이 45t, 경유, 밀가루, 양회 등이 160t씩 내려지곤 했
다. 기록에 따르면 1984년에는 연간 승 하차 인원이 167만 명에 이르러 꽤 많은 이들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1987 년 전라선의 호남선 접속 구간이 개량되 면서 남쪽으로 후퇴하여 동산동으로 자 리를 옮기면서 수송 실적은 땅에 떨어지 게 되었다.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가 마 지막으로 운행되던 2007년에는 연간 승 하차 인원이 1만 871명으로 감소하였고, 결국 2009년에는 여객 취급이 중단되었 다. 2011년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사업으 로 인해 500m 더 남쪽의 벌판으로 자리 를 옮기게 되면서 이제는 주민들의 관심에서도 완전히 멀어졌다.
현재의 동익산역은 컨테이너 위주의 화물역이라 역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역 무실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대합실로 들어서니 역무원에게 동익산에 대한 설명을 들 을 수 있었다. 동익산역의 주요 업무는 인근 화학공장에서 나오는 도로로 운반하기엔 위 험한 화학물질들을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 것이지만, 동익산역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장항선과 익산이 연결되면서 장항선 익산 삼각선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다. 장항선이 군산선이었을 때부터 전라선과 장항선은 익산역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으나, 기관차 견인 방식의 화물열차는 군산선에서 익산역을 향해 올라간 열차가 전라선을 통해 동익산역 방 향으로 이동하려면 익산역에서 열차의 머리 부분을 반대로 돌려서 내려와야 하는 구조였 기 때문에 매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2020년 12월 장항선 익산 삼각선이 설치 되면서 대야-동익산역 구간이 복선전철로 직결되어 군산에서 오는 화물열차는 익산역을 거치지 않고 동익산역을 통과하여 전라선으로 연결될 수 있게 되었다. 익산 삼각선의 개 통으로 선로용량이 하루 23회에서 130회로 대폭 개선되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나 어떤 의미에서 장항선 여객열차의 종착역은 익산역이지만, 장항선에서 전라선으로 이어지는 화물열차의 장항선 종착역은 동익산역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항선에 속하지만 장항선이었던 적이 없는 오산리역
익산에서는 익산역을 제외하면 유일한 장항선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역이 오산 리역이다. 오산역이 아니라 굳이 마을 ‘리’를 붙여 ‘오산리역’이 된 것은 역명 제정과정에 서 경부선 오산(烏山)역과 이름이 중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산리역은 이렇게 역이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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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인화동 옛 동익산역 자리 시민의 숲
현재의 동익산역
군장산단 인입철도
대야 임피역
익산역
동익산 대야
오산리역 (폐역)
새만금쪽
순천쪽 안 천
쪽
대전쪽 오송쪽목포쪽
홍성 신군산역
군장항 군산항역
서해선
새만금-대야 복선전철
호남고속철도 호남선
전라선 익산-대야 복선전철
장항선
터 양보하며 1931년 ‘역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초라하게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1972년 까지 역원이 배치된 적이 있었지만 이때를 제외하면 계속 역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명맥 을 유지하고 있었다. 군산선 통근열차가 다니던 마지막 해인 2007년 오산리역의 연간 승 하차 인원은 4852명에 불과했고, 이용객의 대부분은 군산 쪽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었다.
왜냐하면 익산 쪽은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도 2008년 1월 장항선이 연결되어 군산선 통근열차가 폐지되면서 오산리역은 그날로 여 객 취급이 중단되었다.
오산리역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근처까지 갈 수는 있 었지만, 어디 하나 이정표도 없고 마을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2019년 11월 첫 답사에서 우리가 오산리역을 방문했을 때는 그나마 철길 위로 열차가 달 리고 있었기 때문에 오산리역을 곧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철길을 따라 걷다가 만난 오산리역은 임피역과 익산역 사이에 위치한 역이라는 표지판이 여기저기 패 이고 주름진 빛바랜 얼굴로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 준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하지만 최 근 다시 오산리역을 찾은 필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야-익산 간 복선전철이 개 통되면서 철길을 들어내어버린 통에 과연 오산리역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 문이었다. 2년 전 기억을 더듬어 다행히 오산리역을 만날 수 있었지만, 철로가 있었던 자 갈도상(道床)은 잡초가 무성하였고, 더욱 빛바래고 갈라진 표지판은 고추를 말리려고 동 네 주민들이 깔아 놓은 검정 비닐 차양막을 뒤집어쓰고 부끄러운 듯 필자를 바라보고 있 었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하며 늙고 지친 친구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 았다. 익산에서 출발하여 서울로 돌아오면서 아까 만났던 오산리역의 모습이 자꾸 마음 에 걸렸다. 빠르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도 좋지만, 오산리 역에서 타고 내리던 4천여 명의 이야기와 기억들을 지켜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 않
<그림 8> 장항선 익산 삼각선 노선도
자료: https://www.kr.or.kr/sub/info.do?m=05010302 (2021년 11월 8일 검색).
을까. 그렇게 보면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우리들의 작업도 나름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익산 백제를 꿈꾸던 서동의 꿈은 철길을 따라
익산역은 장항선, 호남고속선과 일반선, 전라선, SRT가 연결되어 5개의 철도노선이 지 나는 호남 최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1912년 개통 이후 줄곧 익산의 도시성장을 이끌 었다.
2015년 5월 KTX, 2016년 12월 SRT 개통 이후 연간 이용객 수도 2015년 447만 명에 서 2019년 681만 명으로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익산시 인구는 2007년 31만 2590명으 로 정점을 찍은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 2020년에는 28만 2276명으로 감소하였다. 또한, 익산역 앞의 구도심은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 보다는 빈집이 늘어가는 문제에 대한 논문과 신문기사에서 익산의 중앙동을 사례지역으 로 하고 있을 정도로 예전의 활기를 되찾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리역 폭발사고의 아픔을 딛고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우등생으로 우뚝 섰 던 저력이 있는 도시 익산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왕궁리 유적과 미륵 사지, 사통팔달의 철도망을 기반으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2022년 장항선과 연결될 서 해선이 개통되고 2024년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장항선의 복선전철화 사업이 완료되 면, 경의선과 연결되어 수도권 접근성이 개선된다. 뿐만 아니라, 통일 한국의 미래가 열 리면 장항선을 포함한 서해안축 간선철도망은 한반도 종단철도인 경의선을 통해 신의주 를 거쳐 대륙철도로 이어져 뻗어 나아가게 될 것이다. 또한, 익산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 는 새만금 신공항과 신항만을 철도로 연결하여 물길과 하늘길, 철길을 통해 세계로 진출
제482호 2021 December
<그림 9> 오산리역(2019년 11월) <그림 10> 오산리역(2021년 10월)
할 수 있는 물류 거점을 꿈꾸고 있다. 계획이 완성되 는 2030년 즈음이면 익산역 철도 이용객 수는 연간 약 2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를 대비해 익산역은 광역복합환승센터를 건립하고 효율적인 시 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새만금과 전주, 군산 등 전북 주 요 지역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나 · 당 연합군에 패해 수도를 옮기며 안팎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던 시대에 백제 왕위에 오른 서동이 이곳 익산에서 백제의 화려한 부 활을 꿈꾸었던 것처럼, 수도권 집중 심화로 지방 소멸 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 철도 네트 워크의 핵심 노드(node)로서 지방 소멸의 위기를 딛고 국토균형발전의 중심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한 익산의 힘찬 날갯짓을 응원해본다.
익산역 광장에는 익산역이 유라시아 대륙의 철도 거점역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제작된 거대한 가 상 승차권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승차권의 출발일 인 7월 8일은 백제 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일인 2015년 7월 8일이고, 소요일수 11일은 국보 제11호 미륵사지 석탑을 상징 한다. 좌석번호 6호차 28A는 철도의 날 6월 28일을 기념하는 의미로, 운임요금 95만 510원은 익산군과 이리시 통합일인 1995년 5월 10일을 상징적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림 11>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안) 지도
범례 기존선 고속철도 시행 중 사업 신규사업
<그림 12> 익산역 광장 가상 승차권 조형물
제482호 2021 December
2018년 6월 우리나라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 정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대륙철 도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다. 운임요금이 조금 저렴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익산에서 출발하는 유라시아 대륙철도 승차권을 스마트폰에 담아서 떠나는 모습을 상 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느림보 장항선 열차를 탔다.
연재를 마치며…
‘장항선을 타다’의 기획은 우리 답사팀이 2017년 6월호부터 2018년 4월호까지 「국토」에
‘제2 종관철도_중앙선을 타다’의 연재를 채 마치기도 전인 2018년 3월에 시작되었다. 첫 연재를 끝마쳤다는 기쁨과 함께 답사여행에서 얻은 현장의 지식과 행복했던 느낌들을 더 잘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던 터라 팀원들 모두 의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 지만 장항선 연선지역들에 대한 답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가는 시점에서 발생한 코로나 19로 답사팀은 발이 묶인 채로 한참의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내야 했다. 2021년 4월부터 시작된 연재를 위해 재방문할 때는 해당 일자의 방역 수칙에 따라 소규모 인원을 중심으 로 답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재방문을 통해서 코로나19로 우리들의 삶이 멈춰 있 는 동안 장항선 연선지역들이 빠르게 변신 중인 모습을 팀원들 모두와 함께 볼 수 없어 아쉬움이 컸다. 장항선은 진행되고 있는 복선전철화 사업과 서해선 연결이 완성되는 가 까운 미래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더 큰 질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더 빠르고 세련된 모습 의 장항선의 미래를 기대하며 장항선이 가진 ‘올드함의 향수’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우리 답사팀에게 부여해준 국토연구원 출판편집위원회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 린다.
또다시 두 번째 연재를 끝마쳤다는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지금, 답사 팀장님의 두 껍고 아이디어로 가득한 다이어리가 펼쳐지면 우리 답사팀의 새로운 철도 이야기가 시작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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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