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후의 맨해튼 영화와 도시 72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
다양성의 가치와
그 역사를 지키는 힘, 뉴욕
최재훈 | 영화평론가([email protected])
는 삶 속의 섹스에 대한 고민을 칼럼으로 쓰는 그녀는 늘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글을 쓴다.
캐리가 집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장면은 꽤 유명 하다. 북적이는 공간 속에, 대충 묶은 머리와 편안한 옷차림으로 오롯이 자신의 글에 집중하는 모습은 멋스러워 보인다. 마치 노트북과 커피가 세 트인 것처럼 지금도 스타벅스에 가면 캐리와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 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장소가 있다. 캐리는 스타벅스 만큼이나 자주 ‘이곳’에 서 글을 쓴다. 압도적 일 만큼 크지만 뭔가 포 근한 느낌을 주는 공간.
그곳은 뉴욕의 중심부 라고 할 수 있는 42번 가의 뉴욕공공도서관,
NYPL(New York Public Library)이다.
드라마의 확장판인 영화판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는 공공도서관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소중한 칼럼이 만들어진 공공도서관에서, 자신의 가장 화려한 날을 맞이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것을 좋아 하는 캐리가 결혼식 장소로 정했을 만큼 영화 속 뉴욕공공도서관은 웅장하 고 화려하다. 실제로 뉴요커들에게는 ‘꿈의 결혼식장’으로 불린다고 한다.
뉴욕공공도서관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입구부터 박물관 같은 웅장함과 고풍스러움이 빛나는 공간이다. 넓은 천장과 아치형 창문, 중세 성을 연상 시키는 분위기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이렇듯 보통의 결혼식장이 갖출 수 없는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는 물론, 중심가에 위치한 만큼 교통도 무척 이나 편리하다. 그리고 한 가지, 결혼식 대관료가 다섯 시간 기준, 3천만 원 정도라 하니 ‘꿈의 결혼식장’이라 불릴 만도 하다.
투모로우(2004)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주연: 데니스 퀘이드 제이크 질렌할 이안 홈
뉴욕공공도서관에서 결혼식을 준비하는 캐리와 친구들
문헌과 자료 이상의 가치, 도서관
세계 5대 도서관으로 꼽히는 뉴욕 공공도서관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 광 명소이기도 하다. 세 개의 중앙 도서관과 크고 작은 80여 개의 지 점으로 이루어진 크고 넓은 규모 가 압도적이다. 캐리가 꿈꾼 결혼 식은 물론,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통해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제 몫을 해오 고 있다.
실제로 뉴욕시에 새로 이사를 갔 다면 그 동네의 공공도서관에서 모 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할 만큼, 각 공공도서관 지점들은 마을 커뮤 니티의 중심이 되어 각종 정보와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지금 이야기하는 본점이라 할 수 있는 42번가의 뉴욕공공도서관은 세계적인 인물들을 배출한 것으로
도 명성을 얻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다. 그가 첫 직장을 잡은 곳이 도서관 내 직업정보센터라고 한다. 아래 글은 오바마 전 대통 령의 도서관 예찬이다.
도서관은 문헌과 자료가 있는 공간 그 이상의 것입니다.
보다 큰 세상을 향한 창(窓)이며, 인류의 역사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보다 원대한 생각을 언제나 찾아낼 수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뉴욕의 도서관은 누군가의 꿈이자, 든든한 버팀목 같은 존재라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 앞서 말 한 ‘섹스 앤 더 시티’는 물론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공간적인 배경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뉴욕 여행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맨해튼 사교계의 여왕이 되고 싶은 오드 리 헵번이 티파니 매장을 어슬렁거리는 장면이 대표적 이지만, 가난한 작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곳이 공공도서관이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은 “뉴욕공공도서 관이 없다면, 뉴욕은 뉴욕일 수가 없다”라는 말로 뉴 영화와 도시 72
뉴욕 공공도서관
뉴욕 공공도서관 내부
욕의 도서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이처럼 도서관은 뉴요커들, 넓게는 미국인들의 자존심 같은 공간이다. 이민자와 다국적 국가로서 짧은 역사가 일 종의 열등감일 수 있는 미국인들에게 100년이 넘게 유 지되어 온 도서관은 혁신과 다문화 속에서 그 가치를 스스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역사’적 자부심이 되었다.
재난 속에 피어난 희망, 영화 ‘투모로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재난영화 ‘투모로우’는 지금 까지도 재난영화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꼽힌다. 자 연의 경고를 무시한 인간의 욕심이 낳은 재난, 가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특징대로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력이 실사처럼 구현되어 인류 멸망의 두려움을 극대화하는 영 화이기도 하다. 기후학자인 잭은 지 구에 이상변화가 일어날 것을 감지하 고 국제회의에서 지구 온난화로 인해 지구 전체가 빙하로 뒤덮이는 거대한 재앙이 올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비웃 음거리가 된다. 아들 샘은 퀴즈대회 에 참가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는데, 전 세계에 나타나던 이상징후가 결국 해일이 되어 미국을 덮친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잭 은 백악관 브리핑을 통해 현재 인류 의 생존을 위해서는 지구 북부에 위치한 사람들은 포 기하고 중부지역의 사람들부터 멕시코 국경 아래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포기한 지역 에는 아들이 있는 뉴욕도 포함된다. 그래서 모두가 남 쪽으로 이동하지만 잭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뉴욕으 로 향한다.
미국이 위기에 처하고 붕괴되기 시작하는 상징으로 영화 ‘투모로우’는 자유의 여신상이 해일에 둘러싸여 꽁꽁 얼어버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허드슨강 입구, 리버티섬에 세 워진 조각상으로, 프랑스가 1886년 미국 독립 100주 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거대 동상이다. 정식 명칭은 ‘세 계를 비추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
해일이 덮치는 위험한 순간에도 아들을 찾아가는 주인공
얼어붙은 자유의 여신상
이게 하며,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킨다.
데니스 퀘이드와 제이크 질렌할 등 속 깊은 사랑과 세밀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들의 진심은 숨 돌릴 틈 없이 내달리는 이야기 속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그래 도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믿고 싶게 만든다. 스펙터클 한 블록버스터이긴 하지만 ‘투모로우’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자연의 복수를 막기 위해 당 연히 해야 하는 인류의 노력 등을 함께 고민해 보고 실천하자는 반성의 이야기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 우리의 사회가 대자연에게 어떤 곳인지를 거듭해서 묻는다. 희망이 있는 곳인지, 거대한 재난 속에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는지, 사회 정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깊고 질긴 이기 심 앞에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과 단결만이 구원이라 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재난 블록버스터의 결 말이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안도와 위안인 것에 반해, 지금처럼 살면 미래에 우리는 안녕하지 못한다는 상 상력을 현실로 툭 불러들인다.
자유의 가치를 담은 문화 도시, 뉴욕
‘투모로우’에서 공공도서관은 거대한 해일과 강추위 이지만 통상적으로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이라 부른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으로, 이민자와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자유와 민주주 의, 인권 등을 포괄하는 상징성 때문에 1984년 유네스 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영화 ‘투모로우’에서 자유의 여신상이 꽁꽁 얼어붙 는 무서운 장면 뒤, 사람들은 공공도서관으로 달아난 다. 세상이 빙하로 휩싸이는 중에도 공공도서관은 뉴 욕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의 역할을 해 준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지만, ‘투모로우’는 인류를 구 하는 영웅으로서의 소시민이나 세계를 구하는 미국 대통령 등 도식화된 캐릭터를 최대한 배제하고 재앙 속 가족애와 인류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투모로우’는 평소 너무 바빠 서로 대화도 없이 데면데면했던 아버지와 아들 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투모로우’는 세계 곳곳의 랜드 마크가 갑자기 닥친 빙하기로 인해 얼어붙거나, 허리케인과 쓰나미에 휩 싸여 사라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앞서 자연의 재난 앞 에 속수무책이었던 일본과 동남아의 재앙이 겹쳐 보 영화와 도시 72
재난을 피해 도서관으로 피신하는 주인공들 거대한 해일과 강추위로부터 안전한 공간이 된 도서관
간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 가상은 단순한 허구만은 아니다. 실제로 911 사태가 벌어졌을 때 뉴욕공공도서 관은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공도서관은 뉴욕 시민을 위한 재난 대피처 로 도서관을 개방했다. 홈페이지를 도서관 정보가 아닌, 재난 정보를 나누는 곳으로 업데이트하고, 즉 시 상담창구를 열었다. 거처를 잃은 시민과 불안해 서 혼자 있기 어려운 시민들을 위해 도서관 안에 거 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가장 긴밀하고 가장 가 깝게 위기에 처한 뉴욕 시민들을 품었다.
더불어 뉴욕공공도서관의 정신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출입에 어떠한 제한도 없다는 것이다. 희귀 자료와 예술작품, 방대한 양의 전문 도서들을 학력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개방하 고 있다.
도서관 앞을 지키는 두 마리 사자상은 각각 인내 (patience)와 불굴(fortitud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관광객들이 인증샷을 찍는 장소로 유명하 다. 도서관이 공사 중이면 안전모를 씌우거나 하면 서 도서관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리는 재치를 보 이기도 한다.
중심으로 도보로 이동 가능한 랜드마크가 아주 많다 는 것이다. 야외 스케이트장으로 유명한 록펠러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바로 근처에 있다. 시간 이 좀 여유가 있어 센트럴 파크 쪽으로 걸어갈 수 있
MOMA 전시장면 링컨 센터 전경
있는 링컨 센터가 있는 셈이다.
2646석을 갖춘 뉴욕필 하모닉 의 전용홀인 에브리피셔홀을 비 롯하여, 뉴욕 시티 오페라단과 뉴욕 시티 발레단을 위한 2700 석 규모의 뉴욕주립극장, 3800 석 규모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가 한데 모여 있다.
상주단체인 링컨 센터 필름 소 사이어티가 주최하는 뉴욕영화 제도 매년 링컨 센터에서 열린 다. 문화의 도시 뉴욕이라는 장 점을 등에 업고 1963년 첫 영화제보다 영향력이 한층 높아진 영화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가장 실험적인 영화들이 선보이는 영화제로 꼽히기도 한다.
영화 ‘투모로우’는 세계인들이 꿈꾸는 문화와 소비의 도시,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내 는 꿈의 도시 뉴욕을 꽁꽁 얼려버린다. 사실 어떤 도시 여도 상관없었겠지만, 뉴욕이라는 낭만과 멋과 역사와 새로움, 그리고 이 도시에서라면 무엇이건 이뤄질 것 같은 희망을 가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연의 느린 속도와 다른 급속한 발전 때문에 자연이 인간을 놓아버리는 영화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도 있는 상 황 속에 있다. 캐리를 따라 스타벅스에서 멋스럽게 노 트북을 펼치기에 앞서 스타벅스의 종이 빨대가 의미하 는 것을 앞서 고민하고 실천해 보면 좋겠다.
다면 도보로 40분 정도 거리에 뉴욕 문화예술의 중심 링컨 센터를 방문할 수 있다. 링컨 센터는 도서관과 함께 뉴욕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의 중 심지가 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마구 흡수하면서 가장 거대 하고 화려하게 재배치한 뉴욕 문화의 특성이 가장 잘 반영된 것이 바로 링컨 센터라 할 수 있다. 널리 알려 진 대로 뉴욕을 대표하는 종합예술센터인데, 뭐 지금 은 세계를 대표하는 공간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다.
정식 명칭은 ‘공연예술을 위한 링컨센터(Lincoln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Inc.)’이다. 1962년 당시 보기 드물게 음악 · 무용 · 연극 · 오페라 · 발레 등 다양한 예술장르를 한 공간에서 모았다. 예술을 창작 하는 예술가와 창작 발표가 가능한 공연장과 연습실 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지금도 열한 개의 예술단체가 상주하고 있고, 거의 매일 예술이 창작되고, 발표되는 공간이다. 링컨 센터 앞 광장 역시 문화예술을 즐기기 위한 시민을 향해 활 짝 열려 있다. 뮤지컬로 상징되는 브로드웨이 42번가 를 살짝만 비껴나면 깊이 있는 순수예술을 관람할 수 영화와 도시 72
뉴욕영화제 NewYorkFilmFestival 개막식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