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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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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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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창 은*1)

Ⅰ. 훼손된 개념, ‘민족문학’

Ⅱ. ‘민족’과 ‘근대문학’의 기원

Ⅲ. 국민/민족의 균열, 그리고 식민주의와 민족문학

Ⅳ. ‘민족문학’ 운동과 민족국가 만들기

Ⅴ. 분단체제와 민족문학론

Ⅵ. 민족문학론이 희망한 것들, 민족문학론이 배제한 것들

Ⅰ. 훼손된 개념, ‘민족문학’

2007년 1월 27일 오후 3시, 출판문화회관 3층 강당에서 제20차 민족문학작 가회의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날 총회는 문인단체의 통상적인 정기 행사로 는 이례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주요 일간지들은 예정기사로 총회에서 논의될 내용을 보도했고, 의결 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기자들도 몰려들었다.1)

총회의 핵심 쟁점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여부였다.

‘민족문학작가회의’2)에 대한 명칭변경 제안서는 다음 네 가지 사항을 담고

* 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강의전담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11년 가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 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임.

1) 문화일보는 2007년 1월 24일자 1면 머릿기사로 ‘대표진보단체 민족가치 → 보편가치 중 심이동’이라 제목으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변경 문제를 다뤘다. 동아일보는 1월 25 일자 사설을 통해 ‘명칭변경보다, 운동권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문제제기를 했다.

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신문도 보도기사와 칼럼 등을 통해 명칭 변경 문제를 기 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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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첫째, 문학적 실천의 형식과 내용이 민족 내부 문제에 머물지 않고 국제 연대, 이주노동자 문제 등 범인류적으로 확장되었다. 둘째,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단체로서 위상에 걸맞는 명칭이 요구된다. 셋째, 새로운 문학세대를 포괄하고 나아가 ‘민족문학’이 내포하는 줄세우기와 같은 억압성을 제거해야 한다. 넷째,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으로 분단극복의 과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3) 이러한 내용이 담긴 명칭 변경에 관한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찬반의 입장 차이 는 첨예했다. 4시간에 걸친 열띤 토론은 한 문인단체의 명칭에 국한되는 것이 아 니라, 이른바 ‘민족문학’ 담론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충돌하는 사건의 현장이었다.

토론의 자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오고갔다.

“가장 민족적일 때 창조적인 발상이 나옵니다. 아직은 민족문학작가회의 깃 발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저는, 우리 작가들은 그렇습니다. 문학이 중요합 니까, 삶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학을 포기하더라도, 민족을 포기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시인 김준태)

“배신만 하면 됩니다. 변절만 하면 됩니다. 그런 선배를 저는 너무나 많이 봤습니다. 정치판으로 가는 선배들, 너무나 많이 봤고요. 문단권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존경하는 우리 작가회의 선후배 분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분명히 입장을 밝힙니다) 민족문학의 가능성과 민족문학의 이름을 정말 죽는 날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시인 김창규)

“민족문학을 제대로 하는 것을, 그것은 각 회원들의 개인적인, 한사람 한사 람이 중심이니까, 그 중심에 맡겨 두고 그 다음에 또 부분적으로는 통일위 원회를 통해서 한다든가, 민족문학연구소를 통해서 한다든가, 자유실천위원 회를 통해서 한다든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유연한 조직운영 방침이 아니

2) 민족문학작가회의는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문학인 101인 선언’을 통해 조직된 자유실천문인협회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운동조직이 되었다. ‘자유’를 기치로 내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한국 사회의 민 주화에 기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는 1987년 9월 17일 6월 항쟁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이름을 변경했다.

3) Reinhrt Koselleck, Vergangene Zukunft -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한철 역,

지나간 미래, 문학동네, 1998,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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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느냐, 명실공히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단체로서 작가회의가 발전하는데 오 히려 도움이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충분히 우리가 고려해봄직한 그런 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문학평론가 백낙청)

김준태 시인은 ‘삶의 가치’ 문제에 집중해 ‘민족’이라는 개념을 내면화했다.

그는 ‘문학적 가치’ 보다는 ‘민족적 가치’가 우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창규 시인 의 경우는 ‘도덕적 순결성’을 ‘민족문학’이라는 용어에 기입했다. 그는 명칭변경 자 체를 ‘배신/변절’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려는 강경한 입장을 제기했다. 김준태․김 창규 시인에게 ‘민족문학’은 운동성을 지닌 분명한 실체로 파악된다. ‘명칭변경’을 반대하는 문인들은 ‘민족문학’을 통해 개인의 문학적 활동을 역사적 변화와 일치 시킬 수 있었다고 파악했다. 그렇기에, 문학적 삶과 역사적 삶을 연결시키고, 그 자리에 ‘민족문학’이라는 상징적 개념을 놓고자 한 것이다. ‘민족문학’의 명칭 변경 에 반대하는 입장의 저변에는 강한 ‘두려움’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운동적 지향 성으로 개별 작가들을 묶어주던 ‘공통의 이념’이 사라진 이후에, 과연 운동조직으 로서 작가단체가 지속될 수 있을까?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민족문학’이 없어진 자리에 과연 무엇이 들어설 수 있을까? 이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이 ‘문학을 포기 하더라도, 민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제기하게 한 것이다.

두 시인의 입장에 대비되는 곳에 백낙청 문학평론가의 입장이 위치해 있다.

백낙청은 1970년대 이후 ‘민족문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문학평론가이기에, 명칭변경에 찬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였다. 백낙청은

‘민족문학’의 유효성은 개별 작가나 통일위원회․민족문학연구소․자유실천위원회 의 몫으로 남겨놓고, 단체로서 작가회의는 ‘민족문학’ 개념의 테두리에서 자유롭게 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입장은 이후 명칭 변경을 이뤄지는데 결정적인 영 향을 미쳤다.

명칭 변경 논란은 총회 자리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명칭개정소위원회’를 구 성하여 민주적으로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명칭개정소위원회’는 4개월 간 회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여론을 수렴한 끝에 명칭변경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2007년 5월 30 일의 투표결과는 참여회원 559명(총원 대비41%) 중 명칭변경 찬성 418명(74.8%), 반대 137명(24.5%), 무효 4명(0.7%)으로 나타나 명칭변경안이 확정되었다. 2007년 12월 8일에는 정관개정을 통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한국작가회의’로 명칭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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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뤄졌다.

‘민족문학’ 개념으로 인해 촉발된 명칭 변경 논의는 한국 문화예술계가 직면 하고 있는 상황을 냉철하게 보여준다. 명칭 문제에만 국한해 볼 때 ‘민족’이라는 개념은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전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민예총)에는 민족미술인협회, 민족건축인협의회, 민예총 영화위원회, 민족사진가 협회, 한국민족음악인협회, 민족춤위원회,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 민족풍물굿위원 회가 산하 단체로 있다.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는 ‘민족’이라 는 명칭을 사용하는 단체의 대부분은 87년 6월 항쟁 이후 결성되었다. 또한, ‘민 족’에 내포되어 있는 운동성을 통해 한국사회 내부의 문제와 분단 문제에 적극적 으로 개입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민족’은 ‘훼손된 개념’이 되었으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위태로운 개념’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글은 한국 문화예술계의 중요한 개념인 ‘민족’을 ‘민족문학’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기 위해 쓰여졌다. 한국 근대문학의 중요 개념이었던 ‘민족문학’의 기원을 탐색하고, ‘민족문학’ 개념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사용되었던 용법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현재적 관점에서 옹호 혹은 반박되는 ‘민족문학’ 개념이 어떤 의 미의 중첩 속에서 존재해왔는가를 밝힐 것이다. 개념의 용법을 추적해 재구성하 는 작업은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역사 속에서 개념을 해석해냄으로써 과거를 현재화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개념을 조건 짓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자 한다.

Ⅱ. ‘민족’과 ‘근대문학’의 기원

개념 혹은 명칭은 과거의 경험이 언어에 응집되면서, 구성원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에 개념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는 상호 교섭한 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공통의 개념들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 보다도 정치적 행위단위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4) 개념은 운동적 성격을 지니

4) “방법론적으로 고찰해보면 개념사와 사회사의 관계는 단순히 전자를 후자에 환원시키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두 분야의 대상영역을 살펴보면 쉽게 드 러난다. 공통적 개념이 없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행위단위는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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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그 운동은 언어의 정치로 추상화된다.

개념은 다른 개념들과 겹쳐져 관계를 형성하는 순간 기원이 지워진다. 항상 존재했던 것처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개념의 일원으 로 진입하는 것이 어려울 뿐, 개념들 간의 관계가 정립되면 의심이 사라진다. ‘민 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 개념은 근대 이전의 조선어에는 물론 한자어에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 초기에 이르러, 일본에서 번역어로 ‘민족’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다.

근대 일본에서 nation의 번역어로 국민, 민족 개념이 고안되었다. 강동국의 논의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 20년대(1887∼96)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 번 역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민족’은 처음에는 ‘국민’이라는 용어보다는 사용 빈도 수가 낮았고, 그다지 선호되지도 않았다.5) 그러다가 일본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라 인쉬의 제국주의론이 재판으로 출간되면서 ‘민족제국주의’(National Imperialism) 가 부각되었다. 여기서 출발해 제국주의와 민족/민족주의의 관계가 국제정치의 맥 락에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서 민족 개념이 등장한 것도 인종적 대립을 강조하면 서이기 때문이다. 근대 인쇄매체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897 년 12월에 간행된 대조선유학생친목회회보에서이다.6) 하지만, 현재의 용법에 걸 맞는 방식으로 ‘민족’ 개념이 쓰인 것은 황성신문 1900년 1월 12일자 2면에서이 다.7) 칠우생(漆憂生)이라는 필명을 쓴 글쓴이는 기서(奇書),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재할 수 없다. 반대로 개념들은 정치적․사회적 체계들에 근거하며, 이 체계들은 단순히 특정한 주도개념하의 언어공동체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사회와 그것의 개념은 긴장관계를 이루며, 개념과 관계된 역사의 학문분과들 역시 이 긴장관계에 의해 특징지어 진다.”; Reinhrt Koselleck, Vergangene Zukunft -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op. cit., p. 122.

5) 강동국, 근대한국의 국민/인종/민족 개념 ,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창작과 비평사, 2009, pp. 267-269.

6) “인쇄매체를 통해 ‘민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목격되는 것은 1897년 대조선유학생친목회회 보에서이지만, 여기서 ‘민족’이라는 “邦境을 限하여 민족이 集”했다고 하고 “憂高安樂의 地에 入함은 민족의 고유한 본심””(강조는 인용자)이라고 하는 용례 속에서, 단순히 인간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한번 경계가 정해지자 그리 사람들이 모였다든가 사람이라 면 누구나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어 한다고 할 때 ‘사람(들)’과 통용될 수 있는 말이 ‘민족’

이었다.”; 권보드래, 근대 초기 ‘민족’ 개념의 변화 - 1905∼1910년 대한매일신보를 중심 으로 , 민족문학사연구 제33집(2007), 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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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起源) 이라는 글에서 한국(韓國), 일본(日本), 지나(支那, 중국)를 ‘동방민족 (東方民族)’이라 지칭하고, ‘백인민족(白人民族)’이 수십년간에 동방에 유입하여 방 약무인(傍若無人)하다고 비판했다.8) 이 글은 한국, 일본, 중국을 동방민족과 동아 민족으로 표현해 ‘동일한 영토와 언어, 그리고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으로서의 민 족 개념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제국(백인민족)과 민족(동방민족)을 구분해 인식함으로써 개념적 정초화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황성신문에서

‘민족’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 이 용어는 점차 사용빈도수가 높아지는 양상 을 보인다.

권보드래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나는 ‘민족’의 어휘 출연빈도는 연구해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1905년에 0회, 1906년에 26회, 1907년에 47회, 1908년에 139회, 1909년에 126회, 한일합방이 이뤄지던 1910년에 79회가 사용되었다.9) 1900 년대에 민족은 동양적 정체성 속에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대타적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08년경부터 단위 민족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으며, 한일 합방 이후 ‘동양적 정체성’이 포함되었던 개념에서 단일 민족 개념으로 변화했다.

국민주권이 훼손되면서 근대민족 개념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고, 점차 ‘저항적 민족주의’의 양상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 개념에 바로 문학이 결합한 것은 아니다. 근대적 의미의 문학 또한 민족과 같이 번역어로서 성립한 것이었다.10) 처음에는 ‘민족문학’ 보다는 ‘조 선문학’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한일합방 이후인 1915년 7월에 안확은 학지광

에 조선의 문학 이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광수는 <매일신보>에 1916년 11월 10 7) 황성신문에 등장하는 ‘민족’ 개념에 대한 논의는 백동현에 의해 밝혀졌다. 백동현은 1900 년 1월 12일자 황성신문에 ‘민족’ 용어가 처음 등장하지만, 그 의미는 “한반도 주민집단 이 아닌 동양단위의 민족이라는 의미”였다고 했다.; 백동현, 러․일전쟁 전후 ‘民族’ 용어 의 등장과 민족의식 , 한국사학보 제10호(2001), p. 163.

8) 칠우생, 기서(奇書),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원(起源) , 황성신문, 1900.1.12, p. 2.

9) 권보드래, op. cit., p. 198.

10) ‘문학’도 근대에 형성된 역어(譯語)였다. 황종연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광 수가 정의를 내리고자 했던 문학은 그의 시대에까지 알려진 조선의 문학과는 개념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재래의 문학 유산에 대한 그의 무지나 편견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한 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록 당시의 식자층에게는 아주 친숙한 한자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은 국가, 철학, 미술 등과 마찬가지로 개화의 물결을 타고 유포된 새로운 문물의 명칭이었다. 그 문학이라는 단어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양문화가 일본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영어 리터래처의 역 어(譯語)이다.”; 황종연, 문학이라는 역어(譯語) , 한국어문학연구 제32집(1997), p.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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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터 23일까지 8회에 걸쳐 문학이란 하오 를 연재했다. 안확은 조선의 문학 에서 ‘조선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유교와 한문학을 극복한 ‘신문학’의 도래 를 갈망했다. 그는 “정치는 인민(人民)의 외형(外形)을 지배하는 자(者)오 문학은 인민의 내정(內情)을 지배하는 자(者)”라고 하면서 “정치를 부흥코쟈 할진대 몬져 인민의 이상을 부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11) 춘원 이광수의 경우는 조선문 학을 언어와 연결시키는 근대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이광수는 “조선문학(朝鮮文 學)이라 면 무론(毋論) 조선인(朝鮮人)이 조선문(朝鮮文)으로 작(作) 문학(文 學)을 지칭(指稱)할 것이라”라고 말하면서도, “조선문학(朝鮮文學)은 오직 장래(將 來)가 유(有) 뿐이오 과거(過去)는 무(無)다이 합당(合當)다니 종차(從 此)로 기다(幾多)한 천재(天才)가 배출(輩出)야 인적불도(人跡不到) 조선(朝鮮) 의 문학야(文學野)를 개척(開拓)지라”라고 했다.12) 안확과 이광수는 조선문학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문학은 근대적인 것 이고, 근대적인 것은 조선적 전통과 결별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땅과 같은 것이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번역어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과 조선 문학이 ‘과거 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미래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기묘한 조화를 이룬 다. 근대 초기 ‘민족’과 ‘문학’을 아우르는 것은 ‘새로움’이었다. 서구세계와의 문화 적 충돌 속에서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언어의 생성은 중요한 과제였다. 세계의 분명한 변화가 있는데도 그 변화를 포착할 만한 언어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라면, 이는 세계의 변화가 인식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초 기에는 문화적 충격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언어가 생성되고 경합을 벌이고, 새롭게 조합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개별적 개념들은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자 신의 위치를 정립하여야 한다. 그 정립 방식이 ‘개념들의 투쟁’이며, ‘새로움’을 포 착할 새로운 개념의 출현이기도 하다. ‘민족’과 ‘문학’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개 념 전개 방식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개념은 제국주의와 대립 하는 과정에서 ‘동방민족’ 혹은 ‘동아민족’ 개념으로부터 형성되었다가, 한일합방 이후 ‘제국과 식민’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운동성을 띠게 되었다. ‘문학’ 개념은 이 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움을 강조하면서, ‘전근대/근대’를 가르는 계몽주의적 11) 안확, 조선의 문학 , 학지광 6(1915.7), p. 64.

12) 춘원생, 문학이란 하오⑻ , 매일신보, 1916.11.23,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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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을 띤 용어로서 의미화되었다. 이 두 개념은 제국에 대응하는 개념, 전근대에 대응하는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운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근대 제 국주의에 복속된 민족과 근대성(혹은 근대 제국주의)을 열망하는 문학은 대립적 이다. 이 모순 속에서 ‘민족문학’은 발생했고, 제국과 식민 사이에서 갈등하며 발 전해온 것이다.

Ⅲ. 국민/민족의 균열, 그리고 식민주의와 민족문학

대한제국의 소멸로 인해 근대적 개념으로 ‘국민’과 ‘민족’이 화해롭게 조화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일본의 지배체제에 복속되면서 ‘민족’ 개념은

‘국민≠민족’이라는 상황에 직면했다. 주목할 부분은 한일합방 이후 어떤 방식으로

‘조선’과 ‘민족’이 결합하게 되었는가이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1915∼1916년경에 이 르면 ‘조선+민족’이 등장한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민족명으로 ‘조선’이 중심적 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10년 즈음까지 단재 신채호는 ‘부여족’을 민족과 연결 시키려 했고, 김교헌은 ‘배달족’을, 최남선은 ‘조선’을 민족 고유명으로 부각시키려 했다. 이 과정에서 최남선이 주도하는 소년을 중심으로 ‘조선이 민족명’으로 우 월적 지위를 획득했다.13)

최남선은 ‘조선+민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26년경 ‘시조부흥론’

을 통해 ‘조선민족+전통’에 가 닿으려 했다.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14) 시조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속 15)이 대표적인 글이다. ‘조선의 신문단이 조선 적인 것’을 구성해내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출발한 최남선의 논의는 ‘시조를 국민

13) “최남선은 1910년을 전후하여 고유명 ‘조선’을 내세우고 있었다. 소년지에서 이미 병합 전부터 ‘조선’을 민족명으로 적극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소년지에 게재된 이광수의 논 설( 조선사람인 청년에게 )이 ‘조선’을 민족의 고유명으로 선택한 것에 대한 선명한 자각 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최남선이 <조선광문회> 수립을 주도하면서 소년지의 조선광 문회 광고 를 통해 ‘조선’이라는 고유명을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점 등, 고유명 ‘조선’이 부 각되는 장면에는 항시 최남선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윤영실, ‘국민’과 ‘민족’의 분화 - 소년지에 나타난 ‘신대한’과 ‘대조선’ 표상을 중심으로 , 상허학보 제25집(2009), pp.

92-93.

14) 최남선,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 조선문단 제16호, 1926.5.

15) 최남선, 시조 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속 , 조선문단 제17호, 19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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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조선국민문학’이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민족개념과 결합된 국민문학 혹은 조선국민문학이 제기되고 활발하게 논의 된 배경은 무엇일까?

카프 결성으로 계급문학의 대타항으로 국민문학․조선국민문학이 설정되었 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급문학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민족문학’이라 는 용어의 의미가 강화되었다. 염상섭은 한 글에서 ‘민족운동인가, 사회운동인가’

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식민지 치하에서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 동시에 추구되어 야 한다고 주장했다.16)

1929년 6월에 <삼천리> 창간호에는 직접적으로 민족문학(民族文學)과 무 산문학(無産文學)의 합치점(合致点)과 (差異点) 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민 족문학은 무산문학의 대립 개념으로 도출된 것으로, 춘원 이광수가 제시한 차이 점에 대한 논의가 흥미롭다.

두 문학은 철학적 주의적 제 조건에 잇서서 알에와 가치 다르다.

첫재 무산문학은 반드시 유물론적이어야 하고 민족문학은 유물론적인 것 도 잇겟지만은 반드시 그러치 안어도 조타.

둘재 무산문학은 반드시 계급투쟁적이어야 할 것이로되 민족문학은 그런 것도 필요하나 반드시 그런 것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다.

셋재 무산문학은 선전적이어야 하나 민족문학은 불필선전적(不必宣傳的) 이다.

넷재 무산문학은 반드시 반항적(현재에 잇서서)이어야 한다. 즉 시간적으로 는 전통에 반항하고 공간적으로는 현 제도에 반항하여야 하나 민족문학은 반항도 조흐나 또 반드시 그러치 아너도 조타.

다섯재 무산문학은 반드시 세계적이어야 하나 민족문학은 흔히 애국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울닐 수도 잇는 것이니 로서아의 위대한 국민문학이라 일 켯는 톨스토이 작품도 반드시 그 일국에 끄치지 아니하고 널니 세계적 문학으로 일홈이 흐르는 것을 보아도 알 것이다. 대개 이상과 갓다고 생각 하다.17)

16) 염상섭, 민족, 사회운동의 유심적 일고찰(1) - 운동, 전통, 문학의 관계 , 조선일보, 1927.1.4., p. 4.

17) 리광수 , 력사적 지리적이 갓고 철학적 주의적이 다르다 - 민족문학과 무산문학의 합치

(10)

이광수의 ‘민족문학과 무산문학의 차이점’에 대한 답변은 시사하는 바가 크 다. 이광수는 무산문학을 유물론적 계급투쟁 문학으로 선전적이며 반항적이고, 세 계문학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반면, 민족문학에 대한 개념 규정은 대타항적이 다.18) ‘다르다’, ‘그러치 안어도 조타’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다만 세계적이어야 한 다는 항목에 대해 ‘애국적이다’라는 대립항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는 1920년대 후반 민족문학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카프의 계급문학에 대한 대타항으 로 형성된 ‘민족문학’은 ‘조선’ ‘민족’ ‘조선민족’ ‘조선국민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던 것이다. 식민지 상황이라는 특수성이 계급문학과 민족문학을 아 우르면서, ‘민족/계급’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개념의 맥락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민족문학이 운동개념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일합방 이 후 3․1운동의 영향 아래 ‘조선문학’ ‘조선국민문학’이 ‘시조부흥론’과 결부되어 부 각되었고, 신간회와 연결되어 염상섭의 논의가 활발해졌으며, 카프라는 급진적 운 동단체의 영향으로 ‘계급문학/민족문학’의 관계가 설정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문 학’ 개념은 관계 속에서 의미가 기입되기 시작했고, 사용 주체에 따라 다양한 용 법으로 배치되기에 이른 것이다.

‘국민≠민족’이라는 식민지 지배체제 아래에서 새롭게 부상한 계급문학은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가 “민족문학은 흔히 애 국적이다”라고 했을 때, 애국의 대상이 ‘국민≠민족’인 조건에서는 아이러니한 상 황에 처하게 된다.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대변해 줄 국민국가가 부재하기에, 노동 자계급 문학에 반대하는 애국은 ‘제국에 포섭된 신민’의 길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점과 차이점 , 삼천리 제1호(1929.6), pp. 32-33.

18) 서영채는 1920년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보편성의 결여와 잠정적인 성격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민족문학론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문학이라 는 보편적인 개념 앞에 민족이라는 한정어가 붙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순히 서술적인 의 미이건 아니면 가치 지향적인 것이건 간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 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민족 외부에 대한 일종의 대타의식 속에서 만들어지 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한 나라나 민족의 문학이란 물론 그 자체로 개별자로서 존재 하는 것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민족문학이 단지 분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민 족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인 시각과 결합되어 하나의 규범적이고 당위적인 성 격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히 개별자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외부의 세계에 대한 대타의식 속에서, 또한 민족들의 총체인 보편자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으로 존 재하는 하나의 특수자로 규정된다.”; 서영채, 한국 민족문학론의 개념과 역사적 소묘 ,  문학의 윤리, 문학동네, 2005, pp.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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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에서 민족문학 개념의 중첩현상이 발생한다. 식민지 지배상태에서는 무산계급문학을 옹호하든 부르주아 민족문학을 옹호하든 ‘제국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상 공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국가라는 틀이 옥죄고 있기에, 일본/조선의 지배/피지배 관계가 지속되는 한 계급문학도 민족문학도 직면한 현 실에 비추어 평면적 논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Ⅳ. ‘민족문학’ 운동과 민족국가 만들기

해방은 온전한 ‘민족문학’ 논의를 가능하게 했다. 해방 이후 민족문학론에 대해서는 좌익진영과 우익진영을 막론하고, 자신의 문학관에 입각한 활발한 의견 개진이 이뤄졌다. 해방 이후에 이뤄진 민족문학론 논의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 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에 현재성을 지닌다. 더불어 지금의 민족문학론의 위기의 기원도 해방기 민족문학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 이뤄진 민족문학론은 통일된 민족국가의 형성과 연결되어 있었 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강한 운동성을 띨 수밖에 없었다. 운동의 방향이 상이한 좌익 진영과 우익진영이 동시에 ‘민족문학론’을 제창하면서 민족문학론의 전개양 상은 복잡해졌다.

식민지 잔재 청산은 해방 후 좌우를 막론하고 제기하는 과제였다. 특히, 안 함광은 ‘민족문화’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다양한 담론을 제기했다. 그는 계급론과 민족문화론을 결합시키는 것에 특히 의욕을 보였다. 그가 제기한 민족문화론은

‘근로대중을 주체로 민족의식의 실천적 힘을 강화’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조선의 혁명사를 회고해본다 할지라도 진실로 조선 민족의 전통을 살리고 계승하고 발전시켜온 자는 노동자 농민 기타근로대중 및 그들의 지도자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하겠습니까. 그리하여 민족전통의 힘 을 자체의 속성으로 할려면 민족문화는 응당 노동자 농민 가운데 그 뿌리 를 박는 것이어야만 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가서 노동자 농민이 또한 이 사업을 담당하게스리 많은 문화인을 그 가운데서 배출시켜야 할 것입니다.

민족문화의 수립과 노동자 농민과의 관계는 이렇듯 밀접하고 이렇듯 유기 적이고 이렇듯 혈연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같이 시인해야 할 일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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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오늘 우리 민족문화는 앞에서 말해온 바와 같이 일체의 우익적 사상 과 극좌적 편향을 반대 비판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국제적 친선관계를 맺고 대내적으로는 계급의식과 모순되어지지 않는 민족의식을 그 주초로 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정히 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19)

안함광의 문제의식은 일본제국주의의 극단적인 탄압 아래 조선문화가 훼손 되었다는 것에 기반해 있다. 그는 ‘무산계급문화’가 인류보편적 가치이면서 조선문 화의 특색이라는 전제를 갖고 논의를 시작한다. 안함광은 민족문화에 대한 우편 향적 시각과 극좌적 편향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계급의식에 기초한 문화건설을 제시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가 극좌적 편향으로 제시한 것이 과거 프롤레타 리아 문학이라는 사실이다. 안함광은 “과거의 프롤레타리아문학은 계급투쟁이 그 테마의 전부이었고 또 그리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지마는 오늘의 민족문화는 그 방법을 그대로 답습해서 당면과제인 민족통일 대신에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극 좌적 과오를 범해서는 아니될 일”이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20) 그의 논의는 계급의식을 기반으로 하되, 계급적 연대를 염두에 둔 민족문화론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해방 직후 안함광은 ‘계급의식에 기반한 민족문화론’을 펼쳤다. 이는 북조선 정권 수립이전까지 북조선에서 활동하던 문학평론가들의 공통의 목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최승일도 “민족문화의 정당한 계승은 그 민족의 성장과 문화의 고양을 의미함이니 오늘날 민주조선에 있어서 민족문화를 키우고 세우며 계승”해야 한다 고 주장했고21), 신진 평론가인 윤세평은 “8․15 이후에 있어서 새로운 조선문학 예술은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잔재와 봉건적잔재를 숙청하고 민주주의적 대중 역량을 발양시키는 민주주의적내용과 민주적형식을 가춘 민족문학예술로서 출발”

했다고 강조했다.22) 특히, 최승일의 논의는 조선의 전통 속에서 연극론을 확립하 고자 하는 의도가 돋보인다. 최승일은 근대 이전의 작품 중 ‘처용무’를 중시하고, 조선의 본악에서 연희의 전통을 끌어오려고 했다. 특히, ‘춘향전’을 높이 평가하고,

19) 안함광, 민족문화론 , 해방기념평론집, 1946.8.; 안함광, 민족문화론 , 현대문학비평자 료집(1), 이선영 외(편), 태학사, 1993, p. 17 재인용.

20) ibid., p. 14.

21) 최승일, 조선민족고전연극론 , 문화전선, 제4집, 조선문학예술총동맹, 1947.4, p. 52.

22) 윤세평, 해방과 문학예술 , 조선문학, 창간 특대호, 문화전선사, 1947, p.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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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심청전과 흥부전을 조선 연희의 전통으로 고평했다. 이는 새로운 국가를 전통문화의 계승 속에서 확립하려는 지식인의 의지가 드러나는 논설로 평가할 수 있다.

해방 후, 월북 이전 임화의 민족문학론과 남한 김동리의 민족문학론은 주목 해서 살필만한 가치가 있다.

임화는 민족문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재로 문화 또는 예술의 영역에 있어 일본제국주의가 지배하든 흔적을 일 소해야 할 것.

둘재로 종래로부터 우리의 문화적 예술적 발전의 장애물이 되어오둔 문화 와 예술우에 남어있는 봉건적잔재를 청산할 것.

셋재로, 새로운 건설에 있어 외국문화의 섭취와 고전의 정당한 계승을 방해 하는 국수주의적경향을 배제할 것.23)

해방기 임화로 대표되는 좌익진영은 일본제국주의 잔재 청산, 봉건잔재 청 산, 새로운 문화 건설을 과제로 제시했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인식은 “근대적으 로 성숙한 민족문화, 예술과 그것의 성립을 통하여 섭취한 문화적 예술적 유산의 소화를 토대로 하지 못한 계급예술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24) 라서, 민족문학은 수단으로서가 아닌 과제로서 제기되기에 이른다. 임화는 “우리 는 결코 조직의 방편이나 운동의 수단으로서 민족문학의 구호를 내걸고 있는 것 이 아니다. 민족문학의 외형 속에서 계급문학의 건설을 기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 다. 우리는 열렬한 애국심에서 민족에 대한 진정한 충성에서 진실로 민족적인 애 국적인 민족문학건설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학가동맹은 이것의 실천을 주목 적으로 하는 단체다”라고 선언했다.25) 이는 안함광의 논의와 미묘한 차이를 보인 다. 임화에게 있어 민족문학은 사회주의적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국가 건 설을 향해 있다. 해방기 문화예술운동진영의 과제가 통일국가 건설이라고 했을 때, 민족문학을 통해 근대국가를 형성하려는 열망이 이 논의에 담겨 있었다. 따라

23) 임화, 조선에 있어 예술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에 관하여 , 문학, 창간호(1946.7), p.

115.

24) ibid., p. 119.

25) 임화, 민족문학의 이념과 문학운동의 사상적 통일을 위하야 , 문학 제3호(1947.4), p.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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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임화가 월북 이후 감당해야 할 입장 차이는 해방 후 ‘민족문학론’ 개진 과정에 서 이미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동리의 경우는 민족문학론을 순수문학론으로 대입해 논의를 펼쳤다. 그의 논의는 순수문학의 진의 - 민족문학의 당면 과제로서 (서울신문, 1946.9.15)에 서 확인할 수 있다. 김동리는 자신의 순수문학이 탐미주의나 상아탑류의 소극적 인 문학으로 평가되는 것에 대해 분명한 목소리로 비판한다. 그의 입장에서는 민 족문학은 민족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라야 하고, 이를 통해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민족문학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목적하는 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일환으로서의 민족문학인 것처럼 우리의 민족정신이란 것도 세계사적 휴맨이즘의 일환인 민족단위의 휴맨이 즘으로서 규정될 것이며 이러한 민족단위의 휴맨이즘을 세계사적 각도에서 내포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순수문학의 문학정신인 것이다. 여기 세계사적 각도 라고 한것은 상술한바와 같이 세계정신사의 제3기적 휴맨이즘에의 지향 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제3기 휴맨이즘의 본격적 출발은 동방정신의

창조적 지양(止揚) 에서의 새로운 정신적 원천의 양성(釀成)으로서만 가능 할 것이다. 이제 역사적으로 신장하려는 민족정신에 입각하여 동양적 대예 지(大叡智)의 문학을 수립하고 제3기 휴맨이즘의 세계사적 성격을 단명하므 로써 민족문학이면서 곧 세계문학의 지위를 확립하는데 이땅 순수문학정신 의 전면적 지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는 먼저 순수문학에 대한 소아병 적 편견을 버리고 각자는 각자의 개성과 양심과 성의를 통하여 민족정신을 체험하고 민족정신의 창조적 지양(止揚)에서 제3기 휴맨이즘을 단명하므로 써 민족문학수립의 정확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인간정신의 창조에 의한 순수문학이 세계사적 사명을 수행하기에 노력하는 것만이 오즉 순수문학의 진의를 실천하는 정당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26)

김동리의 논의는 문학 본질론에 입각해 있다. 그는 개성을 존중하고 휴머니 즘에 입각함으로써 세계사적 일원으로 참여하는 민족문학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보 았다. 그는 동양적 예지를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서구 근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 한다. 더 나아가 서구적 가치까지도 포괄하는 휴머니즘을 내세움으로써 ‘순수문학 26) 김동리, 문학과 인간, 백민문화사, 1948, pp. 108-109.

(15)

을 통한 세계문학 지위 확립’을 주창했다. 민족문학의 세계사적 역할은 김동리가 속한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강령이었다. 그가 민족문학을 통해 세계문학의 도정 에 참여하려 한다는 것은 ‘문학의 공식적․노예적 경향’을 배격하고 문학정신을 옹호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김동리의 내면에는 조선작가동맹의 민족문학론을

‘공식주의’로 규정하고, 이의 대척점에서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을 동일시하려는 의 도가 자리잡고 있었다.27)

해방기 민족문학 논의는 남과 북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공소해지고 말았다.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이념적 입장을 달리하는 진 영이 ‘민족문학’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놓고 쟁투를 벌이다, 공동의 목표를 잃어버 린 형국이다. 해방기 민족문학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민족문학론’은 좌파/우 파의 전유물이 아니라 상호간의 투쟁 속에서 구성되는 개념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하나의 개념이 ‘사회적 투쟁’ 과정에서 ‘훼손되면서 정교화’한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또한 ‘민족문학’ 논의는 문학에 대해 정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운동성의 방향을 놓고 입장이 갈렸다는 사 실도 확인할 수 있다. 북조선의 민족문화론이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의 공식 입장 과 결합되어 있고, 임화의 민족문학론은 조선작가동맹의 이념에 입각해 표출되었 으며, 김동리의 민족문학론이 조선청년문학가협회의 강령과 맞닿아 있었다는 사 실이 이를 반증한다.

해방기 민족문학논의는 분단으로 상호간의 공박의 길이 막혔으나, 궁극적으 로는 서로에 대한 대타의식 속에서 상이한 입장으로 고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북조선은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했고, 남한은 작가적 개성을 중시하는 ‘문 학주의적 입장’을 강화했다. 이러한 경향성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북조선에서

‘우리민족 제일주의’를 주창하고 있고, 남한 탈민족주의 경향이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7) 김동리의 논의에 대해 홍기돈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동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근대’라는 하나의 틀로 묶고 ‘제3기 휴머니즘’이라 하여 근대의 초극을 주창(主唱)했던 바, 제3기 휴머니즘의 상(象)뿐만 아니라 이를 옹호하는 ‘순수’의 개념이 지극히 모호했던 것이 다.”; 홍기돈, 김동리 연구 , 중앙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p.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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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분단체제와 민족문학론

한국전쟁 이후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분단 이라는 특수 상황이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접점을 희석화시킨 것이다. 이 와중에 서 최일수와 정태용은 진보적 관점에 입각해 민족문학론을 제기해 눈길을 끈다.

최일수는 1956년 동남아 문학의 특수성 을 발표했고28), 정태용도 1956년에 민 족문학론 을 발표했다.29) 이 두 글은 세계문학과 민족문학의 관계를 논하면서 각 각 ‘민족적 저항의식’(최일수)과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체험하고, 사상하는 문학’

(정태용)을 강조했다. 이에 대비되는 논의가 백철의 ‘민족문학론’이다. 백철은 1964 년에 발표한 민족문학의 행방 - 해방 뒤의 노우트를 정리하면서 에서 “해방뒤 20년간 문학사를 이름지어 본다”면 “그것은 민족문학을 위한 운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30) 백철은 6․25 이후의 문학적 과제를 ‘민족통일을 시야에 놓 고’ 전개된 ‘휴머니즘’의 문학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분단 현실을 인식하고 반공문학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에서는 긍정적이나, ‘휴머니즘을 사상성’과 동일시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측면에서 추상적이다.31)

민족문학론에 대한 본격적인 재논의는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1970년 10 월 월간문학 특집을 통해 촉발되었다.32) ‘민족의식’을 강조하며 기획된 이 특집 에는 문덕수, 이형기, 김상일, 김현이 참여했다33). 민족의식에 대한 전통적 맥락화 에 머물고 말았을 논의에 활력을 제공한 것은 김현이었다. 김현은 “민족문학의 특 성” 안에 “권력지향적 측면”이 존재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가 우 회적으로 지적한 인물은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등이었 다. 이는 세대론적 입장에서 행해진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김현은 여기서 더 나아

28) 최일수, 동남아 문학의 특수성 , 시와 비평, 1956.1.

29) 정태용, 민족문학론 , 현대문학, 현대문학사, 1956.11.

30) 백철, 민족문학의 행방 - 해방 뒤의 노우트를 정리하면 , 백철문학전집1 - 한국문학의 길, 신구문화사, 1968, p. 312.

31) 최원식, 민족문학론의 반성과 전망 , 한국 민족주의론, 창작과비평사, 1982, pp. 348-350 참고.

32) 김영민, 한국 현대문학비평사, 소명출판, 2000, p. 378.

33) 월간문학 1970년 10월호 특집은 문덕수의 고전문학과 민족문학 , 이형기의 민족문학이 냐 좋은 문학이냐 , 김상일의 민족문학의 기원론 - 고고학적 문학론 , 김현의 민족문 학․그 문자와 언어 를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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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급진적 태도로 민족문학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한국문학이라는 용어를 쓰자 고 제안했다.

1970년대 민족문학논의를 처음 제기한 것은 월간문학이었지만, 이 논의에 다양한 반론을 제기하며 활력을 불러일으킨 매체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1972 년에 발행한 제3호에 자료로 ‘민족문학론’을 제시했다. 월간문학에 게재된 네편 의 글을 모두 재수록했고, 이와 더불어 임헌영, 염무웅, 백철을 글을 재수록해 논 쟁을 활성화했다.34) 이후 1970년대 민족문학론은 임헌영, 백낙청, 김병걸, 구중서, 천이두, 염무웅, 고은, 조동일 등이 논의에 참가하면서 구체적인 이론의 면모를 획 득했다.35)

상황의 편집동인이기도 한 임헌영은 민족문학에의 길 에서 ‘신식민주의’

상황으로 현재를 파악한 후,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결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36)

주로 일제하에서의 민족문학을 다룬 이들 논객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프로문학에 대한 반발로 민족문학이 생겼다고, 이것은 프로문학의 이론도 모르고 민족문학의 이론도 모르는 소리다. 프로문학은 민족문학의 대전제가 있은 후에 가능한 것이다. 또 민족문학이란 당시 일제의 침략 이데올로기에 간접적으로 동조한 것이었다. 따라서 굳이 쓴다면 이것은 민족문학이 아니 라 반민족문학이 된다. 누군가는 또 민족문학 이란 낡은 말이니 한국문학 이라고 부르자는 제의를 했다. 민족문학보다 더 새로운 문제점을 주는 말 이 또 어디 있을까. 한국문학 도 낡았으니 네오 코리아 문학 이라고 부르 34) 상황 제3호에는 월간문학 1970년 10월호 특집 네 편 이외에 임헌영의 민족문학에의

길 , 염무웅의 민족문학, 그 어둠 속의 행진 , 백철의 민족문학의 오늘과 내일 이 재수록 되었다.

35) 최원식은 1970년대 민족문학론의 전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70년대 민족문 학론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소수의 탁월한 이론가들에 의해 거의 완벽한 체계를 갖추고 일방적으로 제출되었던 해방 직후와는 달리, 민족문학론이 광 범한 참여 속에서, 후기에 일부 예각화 경향이 보이기는 하지만, 서서히 진전되어 갔다는 점이다. 아마도 하나의 비평적 쟁점이 10년 간이나 토론된 것은 드물 것인데, 이 지속적인 암중모색 과정이야말로 바로 70년대 민족문학론이 우리 사회의 내발적 요구에 보다 밀착 해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인바, 이 때문에 필자는 민족문학론이 해방 직후처럼 쉽 사리 무너질 수 없는 절실한 현실성을 스스로 보장받게 된다고 믿는다.”; 최원식, ibid., p.

358.

36) 임헌영의 민족문학에의 길 은 예술계 1970년 겨울호에 수록된 글이었다. 월간문학이

‘민족문학’을 특집을 게재한 후, 바로 이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진 글을 1972년 여름호 상 황에 재수록 한 것이다.

(18)

면 좋겠다는 억설이 나옴 직하다. 이런 논리른 지금 우리의 문학이 식민지 적 의식에서 벗어났다는 전칭 긍정이 성립된 후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째 서 우리 문학은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증명을 한 뒤, 우리는 이제 민 족문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해야 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새로운 문학이란 민족문학밖에 없다)

식민의식 속에서 자라 온 문학 역시 이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식민지 적 예술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곧 민족문학의 정립이 다.37)

임헌영은 한국사회가 ‘신식민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프란 츠 파농을 논거로 삼아 식민지의 분열증적 상황을 ‘이중의 생활, 이중의 말, 이중 의 상’으로 표현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주 민족적 이념의 새길’을 찾 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의에 입각해 임헌영은 월간문학의 특집을 신 랄하게 비판했다. 프로문학을 제국주의에 반대한 문학으로 규정하고, 민족문학의 한 범주로 파악했다. 그는 ‘반식민주의 민족문학’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민족 문학은 ‘제국과 식민’의 관계 속에서 그 실체가 분명해진다.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있는 식민지에서는 ‘민족의식이 명료한 실체’로 인식된다. 그러나 1970년대 한국사 회에서는 그 실체가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임헌영은 불명료한 현실을 ‘신식민주 의’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화시켰다. 그의 시대인식은 ‘섹스, 소시민 의식, 복고주 의, 서구적 이론의 모방인 구조주의’ 등에 대한 비판으로 표출되었다. 서구의 문화 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민족문학’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임헌영이 제국과 식민의 관계를 통해 민족문학을 파악했다면, 백낙청은 근 대성과 시민의식의 연장에서 민족문학론 정립에 고투했다. 그는 시민문학론 을 통해 근대적 주체로 ‘시민’을 제시했다.38) 더 나아가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 해 에서 백낙청은 “한국의 <근대문학>이 곧 <민족문학>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39) 백낙청은 한국문학이 근대문학의 한 주체로서 세계문학과의 관계 속에 서 ‘민족문학’으로 개념이 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민족문학> 개

37) 임헌영, 민족문학의 길 , 상황, 제3호(1972.6), pp. 144-145.

38) 백낙청, 시민문학론 ,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Ⅰ, 창작과 비평사, 1978.

39) 백낙청, 민족문학 개념의 정립을 위해 , ibid., 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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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의 타당성 문제는 흔히 <세계문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제기”되고 파악하는 것 이 올바르다는 입장을 개진했다. 백낙청이 민족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끊임없이 세 계문학과의 관계를 고려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의 민 족문학론의 핵심은 ‘민중의식을 역사적 사명에 부응하는 시민의식’으로 발전시키 는 것이고, 이를 통해 ‘민중에게서 시민문학다운 문학, 민족문학다운 문학’을 만들 어냄으로써 ‘세계문학의 대열’에 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청은 ‘민중 주체’가 아닌 ‘민중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의 자 기 위치를 고수했다. 근대 지식인으로서 ‘세계문학에 참여하는 민족문학’을 구상한 것이다. 백낙청의 논의는 비교적 일관된 형태를 띠고 있다. 80년대 민족문학론의 전망 (1985)에서는 “민족문학 및 제3세계 문학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서구문학을 무조건 외면하자는 주장으로 비약하기는 커녕 오히려 서양의 고전과 현대문학에 대한 주체적인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40) 또한, 세계화와 문학 - 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2011)에서는 다음과 같이 민족문학의 의미 를 정리했다.

간략히 요약하면, 1) 반독재시대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적 구호로서의 ‘민족문 학’은 그 효용이 거의 소진된 반면, 2) 한반도의 남과 북뿐 아니라 전세계 한인 디아스포라도 참여하는 ‘민족문학’의 의미는 전에 비해 커졌고, 3) 남 한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남북의 재통합이 국가연합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 쳐서 진행될 전망이 열림에 따라 ‘남한의 국민문학을 겸한 한반도의 민족문 학’이라는 한층 복잡한 목표가 대두했으며, 4) 세계화의 진전으로 전지구적 으로 문학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한국의 국민/민족문학이 세계문학의 당당한 일원이 될 명분은 더욱 뚜렷해졌다는 것이다.41)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은 ‘제국과 식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 하려는 태도를 전향적 태도로 극복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외부 집단의 외압에 의 해 ‘저항적 민족주의’는 형성되었고, 반식민주의적 입장에서 ‘민족 정체성’이 구성

40) 백낙청, 80년대 민족문학론의 전망 ,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Ⅱ, 창작과 비평사, 1985, p.

59.

41) 백낙청, 세계화와 문학 - 세계문학, 국민/민족문학, 지역문학 ,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 는 일, 창작과 비평사, 2011, p.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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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따라서, 타자를 의식한 상태 속에서만 자신의 결속력을 유지한다는 측면 에서 ‘제한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백낙청이 앞의 인용문에서 인정했듯이

‘정치적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이 소진되었다. 그것은 이주노동자․결혼이주여성 등으로 인한 내부로부터의 세계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전지구적 자본주의화 에 따른 민족국가와 국민경제의 긴밀한 관계가 파괴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백낙청은 ‘세계문학의 일원으로서 국민/민족문학’은 강하게 고수하고 있다. 그는 근대성을 보편적 가치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근대성을 특수한 구현 형태로서의 민족문학이 오히려 세계문학을 풍부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 다.

백낙청의 태도는 한국의 민족적 특수성이 점차 약해지면서, 세계문학의 일 원으로서 민족문학의 보편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해석으로 나아간다. 이는 보편주 의적 강박이 민족문학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서구 민족 주의의 변화과정을 한국 민족문학의 변천으로 일반화시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서구적 근대의 위기를 다시 사유함으로써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을 비판 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초국적 자본의 힘이 거대화해짐에 따라, 민족국가와 국민경제의 유기적 관계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전지구적 차원 ‘계급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민족의 경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제되고 박탈당하는 주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근대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인류 공통의 운명과 연결되는 생태환경이 급격히 훼손되었다는 사실도 고려되어야 한다. 서구적 근대 가 보편적 가치로 용인될 때, 민중적 관점에서 점차 심화되고 있는 ‘불안정화하는 노동과 불평등의 심화’는 숙명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서구적 근대를 보편화하고, 그 보편화의 일부로서 세계문학을 상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

Ⅵ. 민족문학론이 희망한 것들, 민족문학론이 배제한 것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명칭을 변경한 한국작가회의가 주최한 2010년 11월 5 일에 주최한 ‘제17회 세계작가와의 대화’에서 있었던 일이다. 재일 디아스포라 지 식인인 서경식 교수(일본 도쿄 게이자이 대학 현대법학부)가 발제자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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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7년에 문제가 되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명칭 변경 문제’를 거론하며 다 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시인 윤동주가 생존해 있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산다면, 그는 한국문학에 속합니까? 중국문학에 속합니까? 윤동주가 한국문학에 속한다면 현재 연변에서 활동 중인 조선인 문학자들은 모두 한국문학에 속하는 것인가요? 한국이라는 나 라의 틀을 뛰어넘는 조선민족의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은 유효하다고 봅 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변경에 대해 아쉬움이 큽니다.”

명칭 문제에만 국한해 볼 때,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포용하려는 적극적인 노 력이 재일 조선인으로 포함한 재외 한인들을 배제하는 효과를 발생시키고 만 형 국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렇듯 민족문학론은 여전히 존재하는 모순 을 곳곳에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학론은 문제적이다. 그것은 민족이 문제적이기 때문이고, 분단체제가 엄존하기 때문이며, 세계적 보편성에 억 압되어 있는 지구 곳곳의 개별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민족문학론은 다음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첫째, 민족담론의 위기이다. 이론적 측면에서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영향이 강력했다. 그는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 체”42)라고 규정했다. 그가 우려한 것은 ‘민족주의가 하나의 이념으로 작동하는 무 의식적 경향’이었다. 배네딕트 앤더슨의 문제제기는 민족주의가 갖고 있는 패권주 의적 요소를 제어하기 위한 학문적 고찰에 입각해 있지만, 그 효과는 광범위했다.

근대의 기반인 민족국가가 회의되면서, 민족문화․민족문학의 존재기반도 흔들리 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민족중심주의를 극복하면서도 제국주의에도 저항하는 ‘비 민족주의적 반식민주의’를 적극적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비민족주의적 반식민 주의’는 민족주의의 정치적 편향을 제어하고, 탈식민주의의 해체적 특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43) 더불어, 지역공동체, 새로운 방식의 연대, 생태문제와 같은 공통의 과제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효과를 발휘 했다.

둘째, 급격한 세계화로 민족단위의 정서적 연대감이 실제로 약화되었다. 이

42)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Reflections on the Origin and Spread of Nationalism,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출판, 2002, p. 25.

43) 민족문학연구소, 탈식민주의를 넘어서, 소명출판, 2005, p. 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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