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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건의 순간성

-횔덜린의 비극론으로 본 1910년 ‘자정순국'-*

110)이 경 배**

<국문초록>

논문의 근본 물음은 1910년 나라가 망한 후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를 통해 순국한 순국자들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이다. 역사 상 존재 한 공동체 중 공동체 구성원의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 체는 때때로 자살을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혹은 ‘위대한 자의 죽음’으로 승화하여 기억 한다. 이런 공동체는 어떤 자살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으로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기보

* 이 논문은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8S1A6A3A01045347).

또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단에서 주제 「‘국망’과 ‘합방’ 그리고 유 교적인 것」 아래 주최한 국내학술대회(2020.8.27.)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보안한 것임.

** 전주대 HK 연구교수

대표논저 : 2018, 「사건, 기억 그리고 반복: 횔덜린의 낭만주의적 역사철학」, 뺷범한 철학뺸 89 ; 2020, 「“검은 책” 이후 하이데거: 반유대주의, 국가사회주의, 메타 정치 학」, 뺷현대유럽철학연구뺸 58.

1. 머리말

2. 존재의 비존재로의 비극적 몰락 그리고 비존재의 존재로의 극적 승화

3. 시대적 명운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킨 사람들 4.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으로서 역사 순환론 5.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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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끊임없이 기억의 장소에 소환하고, 회상하는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생명으로 전 환하여 공동체 운영과 보존의 원리로 제시하려 한다. 여기서 개인의 비극적 죽음으로 서 자살은 개별자의 존재소멸의 차원을 넘어 비극의 역사가 된다. 이런 논의 맥락을 따라서 첫째, 모든 것을 정화하는 ‘불’의 상징으로서 에트나 화산에 뛰어든 엠페도클레 스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횔덜린의 극적 승화를 고찰할 것이며, 둘째, 1910년 ‘국망’ 이 후 향산 이만도와 매천 황현의 순국을 통해 자살과 죽음의 유교적 의미를 살피고, 셋 째, 비극적 개인의 결단이 함의하고 있는 역사성을 낭만주의 역사철학의 논의 지평에 서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논문은 개인의 죽음과 공동체의 몰락 사이의 비극적 부정성과 절대적 공허의 순간인 역사적 전환기가 사건으로서 절대적 일회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기억의 무대에 등장하여 삶으로의 보편적 연속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란다.

1. 머리말

시간(크로노스)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절대 폭력이다. 모든 존재를 무로 되돌리는 근원적 부정의 시간 속에 머무르는 존재자는 자기 해체라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는 필연의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의 무한 운동 앞에 무기력하게 사라져 가야 할 운명의 존재를 기억의 무대로 소환하는 역사는 소멸의 운명을 짊어진 사건의 제약자를 무제약적 무한으로 재현한 다. 즉, 역사는 생성, 소멸, 변화하는 시간의 무한 운동을 공간이라는 불변 의 장소에 붙들어 매는 기억의 투쟁이다. 이렇게 소멸하여 죽음의 운명을 맞이하는 모든 존재의 비극을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은 비극형식을 빌려 기억의 영원한 무대에 고착했다.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에 참여한 그 의 친구 싱클레어(Isaak von Sinclaire)에게 보낸 1798년 12월 24일 편지 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os)로부터 알게 된 “엠페 도클레스의 죽음”에 대한 비극작품 기획을 알린다.1) 그리고 그 후 1년 뒤 1) Friedrich Hölderlin, “An Isaak von Sinclaire 24. Dez. 1798”, in: Sämtliche

Werke, Briefe und Dokumente, Bd. 6, hrsg. v. D. E. Sattler, Mün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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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1799년 말 횔덜린은 세기말의 전환기에 자신의 역사철학 기획이 담긴 단편 논문 “몰락하는 조국(Das untergehende Vaterland)”을 썼다.2) 따 라서 횔덜린에게 비극작품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허구적 사건의 극화 가 아니라, 구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임박한 시대적 전환기 에 대한 역사철학적 기획 아래 구상된 몰락과 이행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억의 기록이다. 물론 서양 사상사의 출발점에 서 있는 플라톤은 비극을 수사적 허구로 간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허구의 수사가 교육에 미치는 좋 지 않은 영향을 고려하여 비극작가를 폴리스로부터 추방하여야 한다고 주 장했다.3) 그러나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극예술 작품의 성격과 구 성을 다루면서 비극이 함의하고 있는 사실적 논증을 넘어선 설득의 위력에 주목했다. 인간의 탁월한 모방능력이 내포하고 있는 소통적 교감 가능성으 로부터 비극은 더 이상 수사적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모방되는 것과 모방 하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공통어의 형상물로서 작품이 된다. 이런 의미에 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희극을 구별하여, “희극은 우리만 못한 인간 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을 모방하려 한다”4)고 했다. 유교 개념을 빌려 말하면, 비극은 군자의 죽음을, 희극은 소인의 죽 음을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벌어진 일과 벌어질 가능성으로 기억의 무대에 소환한다. 왜냐하면 소인의 죽음은 조롱의 대상 이겠지만, 군자의 죽음은 모방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건을 수용하는 타인 에게 “감정의 카타르시스”5)를 일으켜 공감의 언어를 생성할 것이기 때문 이다.

서양 정신사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는 기독교가 유입된 이후로 논의 중 심으로부터 주변부로 사라졌지만, 서양 정신사의 초입에 서 있는 소크라테 스는 죽음을 영혼의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에 따 르면 “우리가 언제고 뭔가를 순수하게 알려고 한다면, 우리는 몸에서 해방 되어야만 하며 사물들을 그 자체로 혼 자체에 의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Luchterhand 2004, S. 185-187.

2) Hölderlin, “Das untergehende Vaterland”, in: Bd. 8, S. 119-125.

3) 플라톤 저, 박종현 역, 2005, 뺷국가・政體뺸, 서광사, 10권 595a 이하 참조.

4) 아리스토텔레스 저, 천병희 역, 2017, 뺷수사학/시학뺸, 숲, 1448 a 17-18.

5) 같은 책, 1449, b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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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 그리고 우리가 열망하는 바의 것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들인 바의 것인 지혜는 […] 우리가 죽게 되었을 그때에야, 우리의 것이 되지, 살아있 는 동안은 아닌 것 같아.”6) 소크라테스에게 삶은 신들의 공간 가까이 자유 롭게 여행하여 신들을 엿보던 영혼이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기간 이며, 죽음은 이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 다시 자유를 얻는 순간이다. 따라 서 그에게 죽음은 비가시적인 초월적 세계로의 영혼의 귀향이므로 애통해해 야 할 사건은 아니다. 근대의 철학자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는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 동물과 인간을 구분한다. 즉, “동물은 죽음에 대 한 인식 없이 산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운 확신”을 갖고 있 다.7) 동물은 죽음에 대한 자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무한자로 여기며 산 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에 대해 각성하자마자 자기 존재의 소멸을 염려하 며 살아가는 유한자라는 의식을 갖는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인간 은 죽고, 동물은 도살당한다고 하여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존재소 멸의 차이를 규정했다.8) 하이데거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죽음 을 향해 있다. 그러나 인간 현존재만이 죽음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지만, 주변인들의 죽음에 대한 경험을 통해 ‘죽음에 미리 가 보는’ 죽음에 대한 사전체험이 가능한 존재다. 이런 죽음에 대한 근원적 불안은 현존재로 하 여금 존재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을 전환할 계기를 준다.9) 서양의 죽음에 대한 사유방식이 영혼의 해방이나 동물과의 구분에 천착한 데 반해 유교의 사유방식은 죽음을 군자의 죽음과 소인의 죽음으로 구분한 다. 유교는 군자의 죽음은 ‘終’이라고 하고, 소인의 죽음은 ‘死’라고 한 다.10) 군자의 죽음이 ‘終’이라고 한다면, 유교는 군자를 무언가 소임을 부

6) 플라톤, 박종현 역주, 2010, 뺷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뺸, 서광 사, 66d-e.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 육신을 가리키는 말이 ‘soma’이고, 감옥을 가리 키는 말이 ‘sema’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육신을 감옥이라고 이해했다.

7) Arthur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Zweiter Band, in:

Sämtliche Werke, Dinslaken: asklepiosmedia 2014, § 41. 이서규, 2012, 「쇼펜하 우어의 죽음에 대한 고찰」, 뺷철학논총뺸 67, 235~259쪽.

8) Martin Heidegger, “Das Ding(1950)”, Vorträge und Aufsätze, in: Gesamtausgabe I. Abt. Veröffentlichte Schriften 1910-1976, Bd. 7, Frankfurt a. M. 2000, S. 180.

9) M. 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Max Niemeyer 2001, S. 386.

10) 뺷예기뺸 상권, 단궁, 이상옥 역, 2012, 명문당,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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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받은 자, 소임을 다한 자, 과업을 완수한 자라고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군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고 괜찮 은”11) 그런 사람이다. 군자는 평생 仁을 배우고 실천하여, 어진 사람은 어 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며, 이렇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소인은 자신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자 각하지 못한 사람이며, 자기 이익에 밝은 사람이지만, 군자는 소임을 아는 자이며, 소임을 다하기 위해 평생 노력하는 자이고, 마침내 유교적 ‘도’를 얻는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존재다.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사력을 다해 지키고 도를 잘 실천”12) 하는 자가 군자이기 때문에, 군자는 ‘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 도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군자의 죽음, 특히 구도자로서 군자의 자기희생, 자살은 자신의 이익을 좇 는 소인의 죽음보다 비통하며, 연민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기억 의 무대로 반복 소환하는 비극의 대상이 된다. 비극은 “위대한 자의 죽 음”13)의 결단을 재현하고, 반복하여 발생하는 기억의 장소로 불러들이지 만, 본래 기독교는 신이 부여한 삶의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자살을 범죄화 하였으며, 유교 또한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의 온전한 보존이 효의 근원이 자 시작이라 간주한 사실에서 보았을 때, 자살은 유교 윤리에도 어긋나는 행위다. 이에 반해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양 전통의 사유와는 다른 자살에 대한 이해가 등장했다. 근대의 개인은 절대적 자유의 주체이며, 자유의지 의 완전한 실행 주체다. 이 때문에 개인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 을 중단할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이해되었다. 근대 개인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칸트(I. Kant)는 실천이성의 규범적 이념으로서 정언명령에 따라 자살을 비도덕적 행위로 판단한다.14) 왜냐하면 칸트의 관점에서 자살은 현실의 문제들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생 명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또한 “자살자는 의욕하는 것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사는 것을 멈추는 것이”15)라고 말한다. 그는 자살을 삶의

11) 뺷논어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2017, 민음사, 팔일, 4-8.

12) 뺷논어뺸, 태백, 8-13.

13) Hölderlin, “Empedokles”, Bd. 7, S. 13.

14)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2015, 뺷윤리형이상학 정초뺸, 아카넷, 398 B 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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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성에 대한 맹목적 의욕의 연속성 아래 있는 죽음의 한 현상으로 이해 한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맹목적 의지의 표현으로서 자살에 대해 비판적이 었지만, 유교는 구도자로서 군자의 자기희생을 자손과의 존재 연속성의 관 점에서 파악한다. 쇼펜하우어에게 자살은 개인의 자기보존 욕구의 극단적 표현, 개인의 존재소멸에 대한 절대적 부정의 의지이지만, 유교의 ‘위대한 자의 죽음’은 개인의 단순한 존재소멸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재 연대감에 토대를 둔 비존재의 존재로의 소환 행위를 통한 정신적 삶과 육체적 삶의 공속성(Zusammengehörigkeit)을 갖는다. 공동체의 명운을 자신의 운명 으로 받아들이는 군자의 죽음은 개별자의 고독한 죽음이 아니라, 구도자로 서의 자기희생이기 때문에, 단순한 사건으로서의 자살 현상을 넘어 비극의 무대로 승화되어 무한 재현된다.

우선 논문의 근본 물음은 1910년 나라가 망하고 나서 개인의 관점에서 든 공동체의 관점에서든 비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 태를 통해 순국한 순국자들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이다. 인신 공양 의 문화적 흔적이 남아 있는 공동체가 존재했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동체는 때때로 자살을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혹은 ‘위대한 자의 죽음’으로 승화하여 기억한다. 이 런 공동체는 어떤 자살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으로 망각의 강에 흘려보내기 보다는 끊임없이 기억의 장소에 소환하고, 회상하는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생명으로 전환하여 공동체 운영과 보존의 원리로 제시하려 한다. 여기서 개인의 비극적 죽음으로서 자살은 개별자의 존재소멸의 차원을 넘어 비극 의 역사가 된다. 이런 논의 맥락을 따라서 첫째, 모든 것을 정화하는 ‘불’의 상징으로서 에트나 화산에 뛰어든 엠페도클레스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횔 덜린의 극적 승화를 고찰할 것이며, 둘째, 1910년 ‘국망’ 이후 향산 이만도 와 매천 황현의 순국을 통해 자살과 죽음의 유교적 의미를 살피고, 셋째, 비극적 개인의 결단이 함의하고 있는 역사성을 낭만주의 역사철학의 논의 지평에서 재구성하고자 한다.16) 이를 통해 논문은 개인의 죽음과 공동체

15) 쇼펜하우어, 홍성광 역, 2019, 뺷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뺸, 을유문화사, 530쪽, 이 서규, 2015, 「쇼펜하우어의 자살개념에 대한 고찰」, 뺷철학논총뺸 82, 423~454쪽 참조.

16) 횔덜린 역사철학 논의에 관해서는 이경배, 2018, 「사건, 기억 그리고 반복: 횔덜린 의 낭만주의적 역사철학」, 뺷범한철학뺸 89, 139~17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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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몰락 사이의 비극적 부정성과 절대적 공허의 순간인 역사적 전환기가 사건으로서 절대적 일회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한 기억의 무대에 등장하 여 삶으로의 보편적 연속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기를 바란다.

2. 존재의 비존재로의 비극적 몰락 그리고 비존재의 존재로의 극적 승화

그리스 신화 속의 신, 일신론의 신 그리고 유교의 ‘神’ 개념 사이의 차이 는 분명하지만, 신의 초월성과 매개성에 대한 이해는 공통지반을 갖는다.

특히 기독교 일신론의 역사적 영향이 뚜렷해지면서 신의 실체성과 불멸성 에 대한 확신이 서양 정신의 근본 뿌리에 존재했다면, 유교는 신의 실체성 과 불멸성을 논증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대를 넘어 사라지 지 않는 영원한 가치와 이 가치를 위한 위대한 자들의 존재 방식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유교적 가치를 자신의 삶을 통해 구현 한 “立言”, “立功”, “立德”, “立節”의 군자를 신적 존재로 추앙해왔다. 그 들의 불후의 업적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보편성을 간직하고 있 을 뿐만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매개하고, 유교적 가치의 역사 맥락적 연속 성을 매개하기 때문이다.17) 이와 마찬가지로 횔덜린에게 반신들, 그리스도, 디오게네스 그리고 헤라클레스가 초월성과 매개성을 갖는 존재들이다. 횔덜 린이 상징화하고 있는 반신들은 몇 가지 공통성을 갖는다. 첫째, 이들 모두 는 고통스러운 탄생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 둘째, 삶을 얻은 이후 곧바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위험에 처했던 경험이 있다. 셋째, 신이 그들의 삶에 내린 운명적 과업을 수행했다. 넷째, 그들이 수행한 과업이 인류 보편적 가 치를 향상하는 데 기여했다. 다섯째, 그들은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반신은 인간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 간이기 때문에 ‘초인(Übermensch)’이라 불리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신들 중 가장 하위의 신보다도 못한 존재자다. 반신의 존재가(Seinsvalenz)는 17) 이용주 지음, 2015, 뺷죽음의 정치학. 유교의 죽음 이해뺸, 모시는 사람들, 161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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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는 상위에 위치하지만, 신보다는 하위의 자리 잡은 사이존재이기 때문에, 반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매개자이면서, 동시에 신과 인간 으로부터의 절대적 위협에 놓일 수 있는 존재다. 횔덜린의 시선에서 엠페 도클레스는 앞서 반신들과 같은 존재가를 갖는다.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지방 에트나 화산이 있는 아크라가스 사람으 로 귀족 정치체제로부터 전제군주정치체제로의 정치적 변환 시기에 시민 들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한 정치인이며, 자유 사상가다. 횔덜린이 어떤 이 유로 반신의 존재가를 갖는 존재로 엠페도클레스를 결정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횔덜린은 초기에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비극의 주인공을 소 크라테스로 결정하였다가 나중에 엠페도클레스로 교체하였다. 일단 소크라 테스가 도덕 철학자이며, 계몽주의자인데 반해서, 엠페도클레스는 자유로 운 사상의 정치인이었으며, 소크라테스가 재판의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른 데 반해서,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죽음을 선택 결정하였 다는 차이가 횔덜린을 소크라테스보다는 엠페도클레스로 이끌었다. 왜냐하 면 횔덜린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기였고, 프랑스 혁명 정신이 유럽 북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전환의 시대에 엠페도클 레스의 에트나 화산으로 뛰어내린 투신자살의 죽음은 횔덜린에게 과거 시 대의 몰락의 상징이었으며, 도래할 시대와의 화해의 염원을 담고 있는 시 대와 시대, 자연과 예술(인공) 사이의 소통을 위한 몸짓이었다. 이에 반해 횔덜린의 시각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비가시적 세계의 진리에 대한 확 신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철학자의 죽음이며, 철학하기의 자유를 위한 선 구자의 죽음이면서, 광신과 미신에 저항하여 투쟁한 계몽주의자의 죽음, 스토아적 죽음을 가르치는 도덕적 영웅의 죽음이면서, 자신의 철학적 연설 에 논증적 설득력을 부여할 능력을 지닌 현자의 죽음, 기독교적 구원자의 죽음을 미리 형상화한 종교 창시자의 죽음으로 비쳤다.18) 철학사적 의미 에서 그리스 계몽주의 시대를 이끈 소크라테스 사상은 자연의 야생성으로 부터 인간의 탈피, 자연성으로부터 인간 이성의 해방을 주장하여 횔덜린에

18) Theresia Birkenhauer, artl. Empedokles, in: Hölderlin-Handbuch. Leben- Werk-Wirkung, hrsg. v. Johann Kreuzer, Stuttgart/Weimar: J. B. Metzler 2011, S. 200 이하 참조.

(9)

게는 당대 피히테 주관적 관념론의 인간 중심주의와 다르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횔덜린의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서 엠페도클레스는 아크라가스 정치혁명을 주장하다가 자신의 정적과 대중에 의해 추방당한 후 비극적 죽 음을 맞이한 정치가다. 엠페도클레스는 자기 시대의 과제로 ‘낡은 신의 이 름 아래 지속되어 온 법과 관습’, 즉 전통 관습법과 종교 질서의 극복 그리 고 “올바른 질서 위에 새로운 삶을 정주”하고, 아크라가스 시민들의 연대의 토대 위에 “법을”19) 입법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에 반해 비극에서 낡은 시대 질서와 법을 옹호하는 인물은 성직자 헤르모크라테스(Hermokrates) 와 집정관 크리티아스(Kritias)이며, 추방당한 엠페도클레스의 마지막을 지킨 인물인 ‘고통을 끝내는 자’인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엠페도클레 스의 영원한 안식을 ‘영웅적 죽음’으로 증언한다. 횔덜린이 비극 주인공의 극적 대립자로 성직자를 설정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크라가스 의 혁명원리로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 즉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엠페도클레 스에 반해 전승된 제도의 가치를 강조하는 보수적 입장의 성직자 헤르모크 라테스는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헌법 앞에 맹세하기를 거부한 가톨릭 성 직자들을 생각나게 한다. 프랑스 혁명 기간 성직자들의 일부는 프랑스 혁 명 헌법에 맹세 동의하였지만, 로마 교황청 중심의 구가톨릭 질서와 관습 을 보존하고자 한 성직자 집단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초월한 교황의 권위를 주장했다. 이런 교회와 국가의 정치적 충돌이 1792년 8월 10일 봉기의 원 인이 되었으며, 또한 9월 헌법 수호를 거부한 성직자들의 대량 학살의 원 인이 되기도 했다.20) 비극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서 엠페도클레스의 입

19) Hölderlin, Empedokles, S. 62.

20) Christoph Prignitz, Hölderlins >Empedokles<, Hamburg: Helmut Buske 1985, S. 56 이하, Pierre Bertaux, Hölderlin und die Französiche Revolution, Frankfurt a. M. : suhrkamp 1969, S. 13 이하 참조.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1791년 2월 자코뱅당은 시민들의 애국심과 공화주의적 자유를 강조하고 호소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유럽의 왕과 귀족은 국가라는 제한된 장소에 대한 특별한 연대감을 가질 필요 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왜냐하면 유럽 전역이 그들의 친척이 지배하는 땅이었기 때 문이며, 또한 자신의 영토에 정치적 변고가 발생할 경우 친척의 영토로 이주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예도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대지에 충성할 이유 가 없었다. 왕과 귀족만큼이나 노예도 영토에 제약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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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빌린 횔덜린의 성직자 헤르모크라테스 및 집정관 크리티아스에 대한 정 치적 공격은 프랑스 혁명정부 수립 이전의 구가톨릭 종교 질서와 프랑스 왕정, 귀족 정치권력에 대한 혁명세력의 비판적 공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엠페도클레스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자신의 고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혁 명가 횔덜린의 염원이 투영된 인물이기 때문에, 엠페도클레스는 더 이상 극적 장치를 위해 창작된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혁명에 뛰어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 엠페도클레스이며, “대의를 실현하고 자신 의 굳은 의지를 표시하기”21) 위해 자의적인 죽음을 결단한 ‘입절’의 엠페 도클레스다.

엠페도클레스는 역사 시대(Epoche)를 최초 4원소가 조화로운 구체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로부터 4원소가 ‘사랑’과 ‘불화’의 원리에 따라 생명을 탄생하게 하고 소멸시켜 가던 시대 그리고 4원소 사이의 ‘사랑’의 원리가 지배력을 상실하고 ‘불화’의 원리만이 지배하는 시대로 구분한다. 이런 시 대 구분에 따라서 보면 엠페도클레스의 당대는 4원소가 완전히 조화로운 상태에 머무르던 ‘사랑’의 시대와는 동떨어진 오직 ‘불화’의 원리만이 남아 있는 죽음의 시기다.22) 따라서 4원소들 간의 결합이 낳는 탄생의 시기가 지나고 오직 4원소들간의 대립, 다시 말해서 자연과 예술의 절대적 투쟁이 지배하는 ‘불화’의 시대가 빚어내는 폭력의 근원을 인지하고 각성한 개인, 폭력에 대항하여 마주 선 개인은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개인일 수밖에 없 다. ‘불화’의 시대를 지배하는 두 요소 중 하나인 자연은 ‘비유기적인’ 불변 자, 초월적 무한자이며, 예술의 주체인 인간은 ‘유기적인’ 생성과 변화, 소 멸을 경험하는 유한자다. 때문에 대립을 자각한 개인은 비유기적 무한자인

이다. 왕, 귀족, 노예와 함께 성직자들 또한 특정 영토에 소속감을 느끼거나 충성 서 약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성직자들이 충성을 맹세해야 할 대상은 오직 로마 교 황청과 교황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에 애국주의의 이데올로기나, 애국심의 호소는 프랑스 혁명 이후 자신들의 국가, 자신들의 배타적 영토를 지켜야 만 했던 시민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애국심은 분명 근대의 산물 이며,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에게 지운 자발적 부채다.

21) 이용주, 앞의 책, 185쪽.

22) 김인곤 등 역, 2005, 뺷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뺸, 아카넷5, 356 쪽 이 하. 이온화, 2006, 「횔덜린 문학의 4원소론 수용-비극 뺷엠페도클레스의 죽음뺸을 중심으로」, 뺷괴테연구뺸 18, 97~11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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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벗어나 유기적인 유한자, 즉 인간의 영역으로의 “탈중심적 궤 도”23)운동을 그리고 그 역으로 유한자로부터 불변의 초월적 무한자로의

“탈중심적 궤도”운동을 감행해야 할 과제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매개자다. ‘탈중심적 궤도’운동의 투쟁과정 중에 매개자는 매개의 주체이지 만, 운동이 지나간 이후 매개자는 필연적인 소멸의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비극의 개인이다. 자신의 시대가 비유기적 무한자와 유기적 인간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불화의 시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엠페도클레스는 자 신의 운명이 비유기적 무한자의 유기적 인간으로의 특수화, 유기적 인간의 비유기적 무한자로의 보편화를 구체화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매개자라 는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다. 때문에 엠페도클레스의 에트나 화산으로의 투신은 영원한 생명인 자연의 ‘불’과의 일치, 즉 유기적 유한자의 비유기적 무한자로의 보편화이며, 또한 동시에 비유기적 무한자의 유기적 유한자로 의 특수화를 실현하려는 엠페도클레스의 탈출구다. 여기 매개자의 존재 탈 각에서만 대립자들 사이의 대립적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는 자기 보존적 조 화, 다시 말해서 “사각형의 원으로의 무한접근”24)운동의 가능성이 열린다.

엠페도클레스는 ‘불화’만이 지배원리로 남은 자신의 시대는 사랑만이 지배 하던 최초 조화로운 구체의 시대를 다시는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불화의 시대에 투쟁하는 자신의 과제를 엠페도클레 스는 대립자의 부정적 지양을 통한 완전한 통일이 아니라, 대립자 사이의 무한 접근과정에 대립자들간의 공존의 조화로 보았다.

매개자 엠페도클레스의 대지의 영원한 불과의 화해는 횔덜린에게서는 비극시의 언어로 표현된다. “이제 비극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자체로 무의 미하고, 작용하지 않지만, 근원적인 것은 곧바로 등장한다. […] 그러나 기 호가 그 자체로 무의미한 = 0으로 정립되는 한, 또한 근원, 각 자연의 은 닉된 근거가 묘사될 수 있다. 자연이 그의 가장 허약한 재능에서 본래적으 로 묘사된다면, 그때 기호는 […] = 0 이다.”25) 비극의 언어는 판단 명제 로 사태를 설명하는 진술의 언어가 아니며, 한동안 우리의 귀를 사로잡은 연주가 끝나고 난 직후 그 어떤 언술도 불가능한 것처럼 분절적 언어 행위

23) Hölderlin, Fragment von Hyperion, Bd. 4, S. 48.

24) Hölderlin, Brief an Schiller 04. 09. 1795, Bd. 4, S. 191.

25) Hölderlin, Die Bedeutung der Tragödie, Bd. 10, S.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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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중간휴지(Zäsur)”26)다. 극단적 대립자인 자연과 예술, 공동체와 개인 사이의 조화를 자신의 역사적 운명으로 인지한 매개자 엠페도클레스의 자 살은 대립자들과의 소통을 염원하는 엠페도클레스의 간절한 몸짓이며, 이 몸짓은 더 이상 논리적 해명의 언어도, 추론적 증명의 언어도 아니다. 비극 의 언어 “= 0”은 무로의 몰락과 이행 자체인 비극적 부정성이며, 이 부정 성은 ‘부정의 부정’이 약속하는 절대자의 긍정성을 전제하기보다는 모든 것이 붕괴하는 파국의 공허일 뿐이다. 즉, 엠페도클레스 최후의 언어인 비 극의 언어는 이미 약속된 매개자의 운명적 몰락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 로운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전환기의 기호다. 또한 소포클레스 비극에서의

‘중간휴지’가 극적 파국을 끌어내는 것처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에서 판 테아, 델리아, 파우사니아스는 엠페도클레스의 몰락을 예견하고, 증언하는 자들이며, 엠페도클레스라는 존재의 실체성이 부정된 절대적 파국의 순간 에 등장할 ‘무한 새로움’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따라서 비극적 부정성은 뺷안 티고네뺸의 하이몬이 안티고네와 자신의 운명적 파국을 예견하듯이 모든 것을 토해낸 공허한 빈 공간의 장소성일 뿐 모든 비극을 극복한 유토피아 를 약속하지 않는다. 단지 비극적 부정성은 매개자의 실체성이 사라진 무 의 공간을 다른 시선들에게 보여줄 뿐이다.

3. 시대적 명운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킨 사람들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일이지만, 죽음의 경험은 타인 과 공유할 수 없는 개인의 고독하고 특수한 사건이다. 그러나 죽음 자체의 경험이 개인적이라고 하여 죽음을 마주하는 태도까지 개별적이지는 않다.

기독교 사회가 삶의 시작과 끝을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겪어내듯이, 유교 사회는 죽음을 공동체의 몫으로 간주한다.27) 유교는 죽음을 공동체의 일 로 받아들이는 상례와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제례를 유교 사회질서

26) Hölderlin, Anmerkungen zum Ödipus, Bd. 10, S. 155.

27) 이용주, 같은 책, 15쪽 이하 참조, 한예원, 2016, 「조선시대 유교적 죽음 이해-生 死, 鬼神, 祭祀 개념을 중심으로」, 뺷동양철학연구뺸 87, 132 쪽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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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근본 운용원리로서 ‘효’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부모 의 장례와 제사를 유교적 禮治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증자에 따르면 “어 버이의 喪事를 신중히 거행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모셔 추모하면, 백성 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28) 다시 말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질서 위에 삶을 영위하고, 이에 합당한 법을 입법하여 마땅히 법에 따라 삶을 구성할 수 있는 공동체는 상례와 제례가 격식을 갖춰 실행되는 사회 다. 유교의 시대사적 인식에 따르면 우선 상례와 제례가 정상적으로 격식 에 따라 수행될 수 있는 시대의 사회는 정상적 사회 공동체이며, 상례와 제례가 정식적으로 치러질 수 없는 시대의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회 공동체 라는 의미다. 장례와 제사는 근본적으로 장례와 제사의 짐을 진 당사자 개 인의 몫이겠지만, 정상적인 사회라고 한다면, 공동체 구성원 각자가 자신 들의 몫을 예를 갖춰 수행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과 시간을 제공하여야 한 다. 따라서 죽음은 기독교 사회에서든 유교 사회에서든 개인과 개인, 개인 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매개자였으며, 그 때문에 죽음은 단순히 존재의 비 존재로의 존재소멸의 사건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발생하는 회상행위에 의 한 비존재의 존재로의 끊임없는 존재 재현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삶의 시작만큼이나 죽음은 개인에게 벌어지는 절대적 일회성을 갖는 사 건이지만, 또한 동시에 죽은 자를 둘러싼 가족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의 공 동의 문제이기 때문에, 죽음의 한 형태로서 자살은 생명을 신으로부터 부 여된 권리로 이해하는 기독교 사회에서도, 부모로부터 받은 신체를 훼손하 지 않는 것을 효의 시작으로 보는 유교 사회에서도 도덕 윤리적 비난의 대 상이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사적 이익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명운을 개인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비극적 결단까지도 ‘자살’이라는 이유 로 비난하여야만 하는가?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29)는 말처럼, 유교 사회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에 대비되는 소인은 개인의 사 적 이익에 따라 선택하는 개별적 단독자이지만, 군자는 의에 따라 결단하 는 자기희생적 개인이다. 엠페도클레스가 자연과 예술, 공동체와 개인 사 이의 ‘불화’만이 지배하는 시대의 고통을 지나 무한자의 유한자로의, 유한

28) 뺷논어뺸 학이, 1-19.

29) 뺷논어뺸 이인,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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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무한자로의 무한접근 운동의 계기를 열기 위해 꺼지지 않는 대지의 불에 뛰어든 것처럼, 군자는 “자신이 살자고 인을 해치는 일은 없지만, 자 신을 희생해서 인을 이루는”30) 자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자기희생은 호혜 주의적 이타성뿐만 아니라, 자기애에 토대한 자기 목적론적 특성을 지닌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나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이기적 개인의 자 기 보신주의자가 소인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립된 인간형으로서 군자는 유 교적 실천윤리로서 ‘인’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이며, 인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자다. 이런 사람에게 ‘인’을 보존하는 절의는 개인적 삶의 목적을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말은 구도자의 삶 을 살아가는 유교 선비에게는 삶의 지침과 같은 금언이다. 이 문장에서

“도를 들으면”은 ‘도’를 소유하거나 점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들으면’이 기 때문에 도를 타인과 공유할 수 있다면 혹은 도를 대화 상대자와 나눌 수 있다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를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시대의 고통을 짊어진 선비가 도를 구하는 방법과 태도는 스스로 도 를 구현하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대의 명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 아들여 유교적 가치를 실천적 방식으로 수행하는 자기희생의 결단일 것이 다. 더 이상 도를 공유하고, 나눌 수 없는 시대에 구도자로서 선비는 자기 희생을 통해 ‘입절’의 유교적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타인에게 말을 거는 화자가 된다. 이렇게 시대가 요구하는 비극적 운명을 진 사람들이 아 크라가스로부터 추방당한 엠페도클레스이며, 1910년 ‘망국’을 개인의 운명 으로 받아들인 향산 이만도와 매천 황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공동체의 명운과 개인의 운명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며, 시대의 아들로서 시 대가 요구하는 운명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희생의 비극적 결단을 내 렸다는 사실이다. 이만도는 1910년 나라가 망하고 나서 단식순국을 결단하 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라가 위급하면 목숨을 바치는 도리(見危授 命)’를 내가 전해 받은 바가 있지만, […] 병든 폐인으로 산속에 있다 보 니 변고의 소식을 듣는 것 또한 늦었으므로, […]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 遺體를 온전히 하는 것이 마땅하다.”31) “주자학 근본주의자”32)로서 이만

30) 뺷논어뺸 위령공,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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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왕과 나라에 대한 ‘충’의 유교적 가치에 따라 망국의 신하로서 마땅히 자결하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한 이미 낙향한 옛 신하로 자신의 신체나 마 온전히 보전하여 죽음 이후 자신의 아버지를 만났을 때 ‘효’의 가치를 어 기지 않으려 했다. 황현은 1910년 음독자살하면서 절명시 4수를 남겼는데, 망국과 함께 자신이 자살하는 이유는 “살신성인 그뿐이지 충성은 아니”33) 라고 했다. 유교 근본주의자였던 이만도와 달리 황현은 왕과 나라에 대한 충의 가치 때문에 자결을 결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신성인”이 황현이 결단한 이유다.34) 무엇을 위한 살신성인인가? 황현은 평생 구도자로서 삶 을 살아간 유학자였으며, 또한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가 그린 세계와 현실의 괴리가 낳는 모순의 고통을 겪은 선비였다. 황현이 자기희생을 통해 완성하 고자 한 세계는 유학자로서 유교적 가치가 온전히 작동하는 사회였을 것이 며, 시인으로서 자신의 시 세계와 현실이 화해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엠페도클레스가 아크라가스 시민 평등권이 전제군주제 정치체제로 인해 붕괴하여가던 시기에 자유 시민권을 위해 투쟁하였듯이, 이만도는 조선 정 치에 참여한 대신이자,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을 놓은 퇴계의 후손으 로서 망국의 길을 걷는 나라와 쇠퇴하여 가는 유학 정신의 복권을 위해 투 쟁하였으며, 황현은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유학 자이자 시인으로서 유학의 “온건한 개혁”35)을 주장했다. 이만도가 자결을 결단하기 이전 자신의 행적에 관해 서술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乙未年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죽지 못하고, 다시 乙巳年에 5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도 […] 지금 내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明洞에 가서 생을 다할 참이다. 다시는 여기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36) 이만도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졌던 시기 의병을

31) 뺷향산집뺸, 한국고전종함DB.

32) 윤천근, 1997, 「향산 이만도 선생의 절의정신」, 뺷퇴계학뺸 9, 259~294쪽, 특히 267 쪽.

33) 뺷매천집뺸, 한국고전종함DB.

34) 허경신, 2011, 「매천의 죽음과 문학적 성과」, 뺷민족문화뺸 36, 45~70쪽 참조.

35) 박걸순, 2010, 「매천 황현의 당대사 인식을 둘러싼 논의」, 뺷한국근현대사연구뺸 55, 61~89쪽 참조.

36) 뺷響山 全書뺸 下 한국국학진흥원 소장자료 影印叢書 7, 청구일기, 2007, 도서출판 영남사, 380~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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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하여 의병활동을 하였지만, 고종의 해산명령으로 의병활동을 중단하였 으며, 을사년에는 조약체결의 책임이 있는 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상소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직 나라는 망하지 않 았다’는 의식으로 자살을 결단하지는 않았다. 37) 황현은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동학의 요구사항과 유사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38) 동학을 동비, 동비적당이라거나, 손병희를 천도교 괴수라고 부르는 것으로 봐서 동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39) 따라서 황현은 유교 근본주의자인 이만도 보다는 “진보적 시국관을 가진 온건 개화파”라고 할 수 있지만, 동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로 미루어 봤을 때, 그는 “평등사상”을 가진 근대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40) 황현에 따르면 개화는 다음과 같다. “[…] 개화라는 것은 별다른 게 아니라 문물 이 바뀌고 사람이 교화되는 것開物化民〕을 말하는데, 문물이 바뀌고 사람 이 교화되는 데에 근본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훌륭한 이를 가까 이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재정을 절약하며 상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따위가 바로 이른바 근본이며, 군대를 훈련시키고 기계 를 활용하며 通商을 잘하는 따위가 바로 이른바 지엽입니다. […] 실로 그 근본이 없으면 아무리 강해도 반드시 피폐해지는 법이니, 이는 흥망의 자 취를 통해 종종 상고할 수 있습니다. […] 사실 중국의 治道와 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41) 황현의 이런 주장은 그가 여전히 유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황현의 개화사상은 유교 이념 을 근본틀로하고 그 토대 위에 서양문물의 수입을 주장하는 ‘동도서기’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 박민영, 2010, 「향산 이만도의 생애와 순국」, 뺷한국독립운동사연구뺸 37, 37-74쪽 참 조, 변창구, 2015, 「향산 이만도의 절의정신과 구국운동」, 뺷민족사상뺸 9, 191-218쪽 참조. 변창구는 1894년 갑오개혁에 반대하는 의병결성은 고종의 밀령에 의해 준비 되었으나, 준비과정에서 일본군에 발각되어 의병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와해되었 다고 한다.

38) 황현 지음, 허경진 옮김, 2006, 뺷매천야록뺸, 서해문집, 91, 94, 104쪽 참조.

39) 같은 책, 170, 177, 178, 228, 366쪽 참조. 박맹수, 2010, 「매천 황현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에 대한 인식」, 뺷한국근현대사연구뺸 55, 34~60쪽 참조.

40) 황현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논의들과 관계하여 박걸순, 앞의 논문, 62쪽 참조.

41) 한국고전종합DB. 국사에 대해 논한 상소남을 대신하여 짓다.言事疏 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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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명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비극적 결단을 내리게 된 사 람들의 공통의 결단근거는 수치심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너희가 여전히 왕 을 원한다는 사실을 […] 부끄러운 줄 알라.”42)고 했으며, 이만도는 단식 자결을 결단한 후 24일을 지속하는 자신의 생명을 부끄러워하여 “자신을 속이고 남까지 속여/하늘도 두렵고 땅도 두렵다/[…]/다시는 깊은 골에 납시지 말게”43)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황현은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44)라고 한탄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수치심은 시민 평등권 수호를 위한 자신의 정치적 투쟁과 추방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아크라가스 시민들과 자신의 무기력을 향한 죄의식이며, 이만도와 황현의 수치심은 유학자로서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망국에 대한 죄의식이다. 특히 이만도는 자살을 결단한 직후 ‘遺疏’에서 자 신의 죄의식을 분명하게 언술한다. “신은 그 당시 시종의 신하로서 […]

간쟁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을사년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에 […] 간신적자와 죽음을 다투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지금 폐 하께서 위호를 잃었는데 […] 직질을 받았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대대 로 녹봉을 받는 신하로 원수의 백성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면서 전혀 수치 스러움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45) 유학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 확신을 가진 유학자이자 망국의 신하로서 이만도는 망국의 수치가 왕 과 나라에 대한 신하로서의 충성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유학자의 도리를 자신의 시대에 충실히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황현 또 한 성리학의 질서가 지배하던 나라가 망한 세상에서의 선비, 지식인이 짊 어져야 하는 유학적 도리를 다하지 못한 수치심과 자신의 시적 이상과 현 실의 모순을 넘어선 초월로 삶을 완성하기 위해 자살을 결단했다. 이들에 게 망국의 수치심과 죄의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46) 여기서 수치심은 성

42) Hölderlin, Empedokles, S. 59.

43) 청구일기, 418쪽. 9월 8일 순국 전 9월 3일에 쓴 이만도의 절명시다.

44) 뺷매천집뺸, 한국고전종합DB.

45) 뺷향산집뺸, 한국고전종합DB.

46) 김요한, 2012, 「수치심 문화와 죄의식 문화: 미드(M. Mead)의 외적 제재와 내적 재재의 대립을 중심으로」, 뺷범한철학뺸 64, 307~330쪽 참조 그리고 「수치심과 죄 의식의 구분: G. Taylor와 H. B. Lewis의 이론을 중심으로」, 뺷범한철학뺸 66, 249~27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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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학 세상의 붕괴와 유교적 도학 이념의 실패에 대한 죄의식이다. 그리고 이들의 결단은 실패의 죄의식을 넘어 다가올 미래 세계에 대한 희망의 몸 짓이다. 이들이 내린 죽음의 결단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왜냐하 면 나의 끝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 새로 태어날 것들을 둘러싸는 바 람”47)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 전통에서 수치심은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 감정 으로 이해되었다. 신이 에덴동산을 만들고 아담과 이브가 이곳의 주인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신에 대한 원죄를 저지른 후 이들의 최초 행위는 이들의 성기를 가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수치심은 금지에 대한 의식이며, 결코 채 워지지 않는 결핍에 대한 의식이다.48) 이 때문에 영원히 변상할 수 없는 채무를 지고 있다는 죄의식과 금지된 것에 대한 위반의 수치심은 근대에 들어서서는 윤리 도덕적 판단과 법적 처벌의 원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 했다. 특히 수치심과 처벌의 양적 등가관계는 근대 규율사회의 공동체 원 리로서 작동했다.49) 그러나 수치심과 죄의식이 도덕적 선악 판단의 준칙 이거나 혹은 법적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면, 위반자를 처벌하는 수단 으로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이용될 수 있다. 수치심은 윤리적 타인의 관찰 자 시선으로서 내적 자기통제 기제로 작동하는 “원초적 수치심”으로서 유 아기에 이미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윤리 도덕적 죄의식의 촉발자이지 처벌수단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50)

47) Hölderlin, Empedokles, S. 69.

48) J. Ruhnau, artl. Scham, Scheu, in: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hrsg. v. Joachim Ritter u. Karlfried Gründer, Basel/New York: Schwabe 1980, S. 1208-1215 참조.

49) 독일 관념론의 논의지평에서의 수치심, 죄의식 개념에 대해서 임홍빈, 2011, 「칸트 와 헤겔: 인륜성과 죄의식」, 뺷헤겔연구뺸 30, 171~189쪽 참조. 수치심과 법적 처벌 의 등가관계를 공동체 보존과 운용의 이상적 원리로 이해한 근대 규율사회는 자기 처벌의 주체적 죄의식을 형벌의 완성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소포클레스 비극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의식한 순간 자기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자신 을 처벌한다. 이런 주체의 자발적 처벌로 주체의 죄의식, 수치심은 등가적으로 해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죄는 무지의 죄로서 유한자인 인간이 주체 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던 신이 오이디푸스에게 부여한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해 서는 안 된다. 오이디푸스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죄를 판단할 수도, 처벌할 수도 없 는 유한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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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우리는 도덕적 선악 판단이나 법적 형벌판단을 넘어 예치를 강조하 는 유교의 염치, 즉 수치심의 공동체적 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백성을 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써 질서 정연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형벌을 피하고 자 할 뿐이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 덕으로써 인도하고 예로써 질서 정연하게 하면, 백성들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뿐 아니라 또한 바 르게 될 것이다.”51) 유교적 도리를 삶의 지침으로 삼은 이만도와 황현에게 수치심은 유교 공동체의 예치의 이상을 자신의 결단을 통해 보여주도록 촉 발한 계기이며, 또한 예치의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의 토대다.

망국의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인해 죽음의 비극적 결단을 내린 선비의 유교적 생사관을 간략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공자의 생사관은 “아직 삶을 제대로 모르면서,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52)라는 제자인 자로의 물음에 대한 반문에서 나타난다. 일단 공자의 반문은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삶에 충실한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반문이 나는 죽음을 전혀 모른다거나, 죽음이 삶에 전혀 의미가 없 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오히려 죽음이 삶에서 지니는 의미 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 함한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필연의 존 재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모든 존재는 ‘죽음을 향 해 있는 존재자’다. 그 때문에 인간 현존재는 죽음의 절대적 공포로 인해 죽음으로부터의 무조건적 도피를 감행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존재 다. 따라서 인간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미리 질문하고, 죽음 앞에 미리 달 려가 죽음을 마주하려고 시도해야 하는 운명의 존재이며, 이런 시도로부터 현존재에게 언제나 중요한 존재의미에 대한 새로운 물음의 지평이 열린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반문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공자는 죽음 이후 사후 세계의 실체성이나, 사후 세계에서의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형 이상학적 논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공자에게 죽음은 삶과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어떻게, 어떤 방식 혹은 어느 정도의 의미망을 형

50) 마사 너스바움, 조계원 옮김, 2018, 뺷혐오와 수치심.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뺸, 민음사, 315~403쪽 참조, 특히 38쪽.

51) 뺷논어뺸 위정, 2-3.

52) 뺷논어뺸 선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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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다. 공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결국 삶의 영역에서의 ‘예’의 문제와 관계된다. “조상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조상이 실제로 계시는 것처럼 하고, 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하셨다.”53) 여기서 공자 가 “조상이 실제로 계시는 것처럼”, “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제사 지냈다 는 말은 죽은 조상 혹은 영혼이나 신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의 실체성을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조상이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과례 는 아니지만, 예에 합당하게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공자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삶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교의 죽음 이론은 혼백론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율곡에 따르면

“氣는 모이고 흩어지지만, 理는 처음과 끝이 없다.” 따라서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 존재는 ‘기’의 분유이며, ‘리’는 ‘처음과 끝이 없으니’, 형태도 없 고, 행위도 없다. 그러므로 리는 제약이 없는 무제약자이고, 그 때문에 언 제나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항존자다. 이제 생명이 있고, 생명이 다한 죽음 이 있는 존재는 ‘기’의 관여를 받는 존재자이며, ‘기’가 모이면 생명이 있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에 이른다. 이어서 율곡은 또한 죽음을 맞이한 혼백의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일신은 魂魄의 성곽입니다. 혼은 氣 의 神이요, 魄은 精의 신입니다. 그 살아 있는 때에는 펴 있어 神이 되고, 죽었을 때에는 굽혀져 鬼가 됩니다. 魂氣가 하늘로 오르고 精魄이 땅으로 돌아가면 그 기는 흩어집니다. 그 기가 비록 흩어진다고 하나 곧 그 흔적 조차 없어지지는 않습니다.”54) 이에 따르면 우선 인간은 혼과 백으로 이 루어져 있으며, 인간이 죽음을 맞으면 혼과 백으로 기가 흩어진다. 이렇게 흩어진 혼은 하늘로 오르고, 백은 대지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흩어 진 기인 혼과 백이라고 하더라도, 하늘로 올라간 혼은 곧바로 소멸하는 것 이 아니라, 처음의 기의 세계로 귀환하기 전에 일정 기간 흩어지지 않고 머문다. 이렇게 인간 혼은 기의 세계로 흩어지지 않고 일정 기간 자신의 세계에 머문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교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효의 근본으 로 보았다. 제사는 세대와 세대의 존재 연속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제례의

53) 뺷논어뺸 팔일, 3-12.

54) 한국고전종합DB. 율곡선생전서습유 제4권/ 잡저, 死生鬼神策. 유교 혼백론과 유사 한 “염려(cura)”로부터 인간의 탄생신화에 대해서,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S.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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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며, 이 의식에 돌아가신 부모의 혼이 방문한다는 믿음은 부모의 신체 적 삶과 정신적 삶을 계승한 자손의 ‘기’와 부모의 ‘기’가 함께 감응한다는 유교적 확신에 근거한다.55) 제사라는 의례 행위가 진행되는 동안 부모와 자손은 같은 기를 공유하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한 곳에서 서로 감통할 수 있으며, 제사가 끝나면 부모의 혼은 자신의 세계로 자손은 삶의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기의 만남, 모임으로 생명이 발생하고 기의 이별로 존 재는 소멸하며, 다시 기의 만남은 존재 발생을 낳는 기의 세계의 영원한 순환이 유교의 시간 개념이다.

4.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으로서 역사 순환론

크로노스가 통치권을 행사하던 시대에 시간의 운명은 온전히 신들의 몫 이었다. 이 시대 대지를 다스리던 인간은 시간의 비극적 운명에서도, 정치 하는 신 제우스의 율령에서도 자유로웠으며, 노동하지 않아도 풍요로웠 다.56) 그러나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이 크로노스의 통치권을 찬탈하고 크 로노스를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추락시킨 이후로 시간의 운명은 온전히 대지의 인간의 몫이 되었으며, 제우스의 율령은 인간의 법이 되었다. 크로 노스를 대지로 내던진 제우스는 거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천상 의 질서와 정치 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거인족의 야생적 폭력의 세계를 제 거하고 신적 율법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운 명조차 모르는 제우스의 폭력 앞에 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인간을 사 랑한 유일한 신 프로메테우스의 자기희생적 구원으로 인간은 망각의 강으 로 끝없이 끌어가는 크로노스의 위력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인 기억 능력 을 갖출 수 있었으며, 제우스의 인간 존재의 대지로부터 영원한 추방과 더 불어 대지 위의 인간 역사의 말살 기획에 저항할 수단을 가질 수 있었다.

크로노스의 몰락과 함께 천상의 일로부터 대지의 일이 된 역사는 이제 기

55) 임헌규, 2016, 「유교에서 죽음의 의미: 뺷논어뺸와 그와 연관된 栗谷의 해석을 중심 으로」, 뺷온지논총뺸 47, 161-187쪽 참조. 선진 유학 시대 생사관과 송대 이후 이기 론을 토대로 한 생사관에 대해서 이용주, 같은 책, 67쪽 이하 참조.

56) 오비디우스, 이윤기 옮김, 1997, 뺷변신 이야기: 신들의 전성시대뺸, 민음사, 15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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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능력을 지닌 인간에 의해 초월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교차하는 지점, 하늘과 대지가 교차하는 장소가 된다. 시간의 위력에 대항하는 기억이 비 존재의 영역으로 사라진 존재했던 존재자를 역사의 무대로 소환하며, 이미 초월적 존재가 된 혼을 지상에 펼쳐진 의례 행위의 장소로 불러들인다. 비 존재의 존재로의 전환과 존재의 비존재로의 전이가 수행되는 기억의 투쟁 장소로서 역사는 대지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초월 세 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조우에 내재하는 불멸의 존재 사건발생 장소다.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되기 이전 그리스 정신에서 존재의 사건발생사는 유교가 기의 모임과 흩어짐으로 생명과 죽음을 이해했던 것처럼, ‘사랑’과

‘불화’의 원리에 따라 4원소가 만나고 헤어짐으로써 존재가 발생하고 소멸 한다고 설명한다. 즉, 고대인들에게 역사는 기독교 원리에 따른 아우구스 티누스의 “신국”과 같은 목적 지향적 운동이 구체화되는 장소가 아니며, 반복적이며 순환적으로 존재의 발생과 소멸이 펼쳐지는 시공간이다. 아우 구스티누스의 뺷신국론뺸의 주제가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신 태초로부 터 당신을 모시고 영속할 당신의 거룩한 도성의 왕국에 이르기까지의 현의 를 헤아리”57)는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역사는 신의 왕국으로의 자기 지향적 부정을 통해서만 완성된다고 해야만 한다. 신의 왕국에서의 인간 역사의 완성은 역사로부터 시간의 추방이며, 운동, 생성, 소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추방당한 무시간의 시공간은 이제 인간의 몫이 아니 게 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목적론적 역사관이 지향하는 신의 왕국은 그 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신정론적 역사를 완성하는 종말론적 역사철학으로 인간 역사의 자기부정을 전제한다. 이런 목적론적 발전사관이 내포하고 있 는 인간 역사의 초월적 지양과 역사성 자체에 대한 부정에 대립하는 순환 론적 역사관은 4원소 혹은 기의 반복, 변화, 운동의 영원성을 주장한다.58) 인간 역사의 근본 활동인 생명 활동으로서 “변화를 의미하는 역 易은 반 복이고 순환이며, 반복과 순환에 의해 지속되는 영원이다. 일직선적 영원 이 아니라 죽고 살고 죽고 살고를 반복하는 순환적인 변화의 리듬으로서

57) 아우구스티누스, 성염역주, 2017, 뺷고백록뺸, 경세원, 11, 2.3.

58) Jochen Schmidt, Hölderlins geschichtsphilosophische Hymenen>Friedensfeier<->

Der Einzige< >Patmos<,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S. 15 이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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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다. 변화야말로 영원이다.”59) 역사가 존재발생 사건의 영원한 시공 간이라고 한다면, 역사는 자기 부정적인 목적론, 모든 존재의 자기 지양을 약속하는 종말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진행되는 생과 사의 반복적 순환의 장소, 사건과 사건의 기억의 무대다.

인간 역사의 필연적 패러다임은 초월적 존재가 미리 마련한 시작과 끝 을 향한 자기 부정운동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비극 무대에서의 반복적 재현이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명운을 자신의 운명으로 짊어진 영웅에게 역 사는 역사적 개인이자 동시에 사적 개인인 자신의 고통의 시간이기 때문이 며, 비극의 형식이 이 고통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서 비극만이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투쟁과 개인으로서의 한 인간의 죽음 의 결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극적으로 재현할 수 있으며, 이런 비극적 사 건을 개별과 보편의 대립 관계로, 개인의 운명과 공동체의 명운 사이의 변 증법적 부정관계로 묘사할 수 있다. 또한 비극의 이런 재현에는 비극적 사 건의 반복적 소환만이 존재하며, 종말을 향한 기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 극에는 오직 역사적 개인의 몰락만이 있지만, 이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몰락하는 순간이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낡은 시대의 몰락의 순간이며, 동 시에 새로운 시대의 탄생의 순간이다.60) 횔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에서 엠페도클레스의 몰락은 프랑스 혁명 시기 구체제의 붕괴이며, 동시에 새로운 체제의 탄생이고, 근대 주체의 자연에 대한 약탈적 지배의 시대의 종말과 자연의 원리에 따른 생과 사의 무한 반복의 세계관 정립의 순간이 다.61) 이와 마찬가지로 이만도와 황현의 죽음은 망국의 순간이며, 또한 새 로운 시대의 탄생에 대한 약속이다. 이렇게 비극에서 사건으로 재현되는 역사적 영웅의 죽음이 지닌 상징성은 죽음을 통한 삶의 승화라 할 수 있 다. 여기서 죽음은 오히려 삶의 영원성을 상징화하기 때문에, 죽음은 종말 에 대한 부정으로서 ‘끝없음(Endlosigkeit)’이며, 끝없음이기 때문에 ‘시작 도 없음(Anfangslosigkeit)’이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유교의 죽음에 대한 달관 의식을 볼 수 있다. 망국의 명운을

59) 이용주, 같은 책, 138쪽.

60) Ernst Mogel, Natur als Revolution. Hölderlins Empedokles Tragödie, Stuttgart 1994, S. 25 이하 참조.

61) Hölderlin, Hyperion, Bd. 5, S. 110-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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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인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초탈한 태도는 유학자의 생사 달관 의식에 서 비롯하였으며 그리고 공동체의 이들 죽음에 대한 상례와 제례는 죽음을 다시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으로 승화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62) 역사적 사건으로서 죽음은 절대적 일회성이지만, 죽음을 공동체의 삶으로 승화하는 상례와 제례는 세대간의 역사적 공속성과 문화적 공통의식을 형 성하는 재현의 장소다. 여기서 죽음의 비극적 결단은 시대와 시대의 경계, 세대와 세대의 결별을 낳지만, 동시에 시대를 넘어선 상기의 무대를 마련 한다.

죽음과 삶의 초월적 경계를 넘어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의 돌이킬 수 없 는 일회적 사건으로서 이별을 넘어 양자의 영역을 한 곳에 결합하는 매개자 는 기억 능력으로서 상기(Anamnesis)다. 플라톤에 따르면 진리(a-letheia) 의 본래적 의미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어떤 것” 혹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무엇”이다.63)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자는 레테라는 ‘망각의 강’을 건너 하데스의 세계에 들어선다. 망각의 강을 건넘으로써 죽은 자는 삶의 세계에서의 모든 경험을 버리고 텅 빈 상태의 무의 세계, 하데스 세계의 일원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죽어야 할 필연적 운명을 타고난 인간 에게 진리란 신적 권능이 작용하는 경계인 망각의 강을 건너 그리고 다시 하데스의 세계를 넘어서도 ‘잊어서는 안 되는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전생 의 삶의 경험과 망각의 강을 건너 저승에서의 절대 무를 지난 이번 생의 삶을 연결하는 오직 하나의 초월적 위력이 진리다. 따라서 진리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얻은 불변하는 객관적 사태, 이 때문에 세대를 넘어 변함없이 가르쳐지고 배울 수 있는 기술지가 아니라, 끝없이 ‘망각의 강’ 속으로 빠 져드는 침몰을 거부하고 기억의 장소에 보존하는 상기의 노고다. 이제 기 억에 보존되는 상기의 진리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복제나 재생산이 아니 라, 오히려 지금 여기로의 과거적 비존재의 의미 지평의 소환이다. 이렇게 소환된 사태는 필연적으로 왜곡, 변형, 강조의 의미 지평을 자신의 구성요 소로 포함한다. 왜냐하면 상기 행위에서 역사적 사건은 비존재의 존재로의

62) 김기현, 2012, 뺷선비. 사유와 삶의 지평뺸, 민음사, 391쪽 이하 그리고 이용주, 같은 책, 99쪽 이하 참조.

63) 플라톤, 이상인 옮김, 2010, 뺷메논뺸, 이제이 북스, 80e-81e 참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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