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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마애삼존불에서 개심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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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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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상징을 잡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재하고 있는 나라도 그러할진대 역사 속에 실재했다가 지금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나라의 상징은 더구나 어려운 일이 다. 그중에서도 백제는 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진 나라 중 하나라서 더욱 그렇다.

백제의 상징은 무엇이며, 백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하면 백제의 미소로 알 려진 서산 마애삼존불의 천진스런 웃음이 저절로 떠오른다. 백제의 미소라고 알려진 서 산 마애삼존불이 있는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는 원래 해미군 부산면의 지역이었다. 1914 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보현동, 강당리, 갈동, 용비동, 이도면의 거산리 일부를 병합 하여 용비동과 보현동의 이름을 합한 뒤 용현리라고 지어 서산군 운산면에 편입시켰다.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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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저자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개심사까지

백제의 미소로

해찰의 즐거움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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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미소가 안개처럼 감싸는 곳

서산 마애삼존불로 가기 위해 용현계곡을 따라가 다 보면 맨 처음에 만나게 되는 미륵이 있다. 차곡 차곡 쌓여진 돌무더기 위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 를 띤 채 우뚝 서 있는 이 미륵은 얕은 부조로 장식 된 보관과 양손을 가슴으로 얌전하게 모으고 있는 자세가 당진 안국사터의 보살상과 닮아서 고려시

이 들어서면서 이 부근에 있던 아흔아홉 개의 절들 이 모두 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산 마 애삼존불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한 이 미 륵불을 지나 조금 오르다가 냇가를 건너서 산길을 한참 오르면 벼랑의 끄트머리에 서산 마애삼존불 이 새겨져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거 리낌 없이 표현한 작품으로 꼽힌다. 운산면 일대 사람들에겐 고란사라고 알려진 서산 마애삼존불 은 1959년에야 발견되어 국보 제84호로 지정되 었다. 세 부처는 법화경 교리에 의하면 본존인 석 가여래입상이 서 있고, 좌측에 제화갈라보살과 우 측에 미륵보살이 서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당시 성행했던 신앙에 의하면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관 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 다. 석가여래불의 옷맵시에서 중국풍이 연상되기 도 하지만, 그 얼굴의 크게 뜬 눈은 옛날양식이면 서도 활짝 웃는 미소는 틀림없는 백제의 미소라 아 니할 수 없고,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햇빛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 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양옆의 협시보살들 또한 얼 굴 가득히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라서 어떤 사 람들의 말로는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 서 한껏 기분이 좋은 첩 부처라는 장난스런 이야기 도 전해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그 너그러운 웃음이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 태로 자리매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이나 태안 마애삼존불 또는 보 원사터 등의 불교 유적들이 서산 일대에 산재해 있 는 이유는 6세기 말엽의 백제의 정치사와 밀접한

서산 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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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무렵의 백제는 한강 유 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 려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 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역 을 하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정책을 펴고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 겨버린 뒤로 백제는 중국으 로 가는 길을 바다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 다. 그때 당진과 태안 지역이 중국의 산둥반도와 가장 가 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 서산 일대가 교역항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로 가는 길이 이곳이었고 또한 중국으로 가는 교역로였으므로 이 길목에다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비 는 큰 절, 즉 보원사나 개심사 같은 절과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의 마애삼존불, 또는 화 전리의 사면석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시름을 잊을 수 있는 곳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용현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용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보현동 에 이른다. 보현동 동쪽에는 강당동講堂洞 또는 강당리江堂里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고, 바로 그 근처에 보원사普願寺 터가 있다.

서산 마애삼존불을 찾아온 답사객들이 대부분 놓치고 가는 답사코스가 보원사 터다.

정확하게 어느 때 누가 세웠으며, 어느 때 폐사가 되었는지 내력조차 전해오지 않는 보 원사는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 중 한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사적 제316호로 지정된 보원사 터에는 보물 제103호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절 앞에 인 접하여 서 있다. 원래 세웠던 그 자리에 천 년이 넘도록 서 있는 보원사 터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4.2m에 이르는데, 전체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당간을 받치는 간대杆臺가 보기 드물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당간지주를 보고 탑을 바라보며 가다보면, 그 서 쪽에 보물 제102호로 지정된 석조가 있다. 스님들의 목욕탕 구실을 했을 것이라느니 또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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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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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로 서 있는 이 석조는 길이가 3.5m에 이르고 높 이는 90cm다. 장성한 사람 예닐곱에서 열 명 정도 가 들어앉을 것 같은 석조에 몸을 담근 후에 개울 을 건너면 아름다운 오층석탑이 나그네를 맞는다.

눈길 지나는 곳곳마다 깨어진 기왓장이 오랜 역 사 속의 옛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풍경 속에 통일신 라시대 양식을 가장 잘 이어받았으면서도 백제탑 의 전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보원사지 오층 석탑이 서 있다. 높이가 9m에 이르는 이 탑은 하 층 기단의 면석을 형식적으로 칸을 나누었는데, 칸 마다 사자상을 새겨서 열두 칸에 열두 마리의 사 자상이 새겨져 있다. 사자들은 제각기 다른 자세 를 취하고 있고, 발 모양이나 표정들이 매우 생생 해서 금방이라도 울음소리를 내며 뛰쳐나올 것 같 은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상층 기단에도 기둥 모양을 새긴 뒤 한 면에 두 개씩 팔부신장을 새겼 는데, 그중 서쪽 면에 새겨진 아수라상이 가장 선 명하다. 부여에 있는 정림사탑 이래로 내려오는 백 제탑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온 탑으로 평가받고 있 는 이 탑 너머로 보이는 부도와 탑이 고려 경종 3년인 978년에 건립된 법인국사法人國師의 부도와 부도비다.

김정인이 글을 지었고, 한윤이 글을 쓴 법인국 사 부도비에는 가야산 보원사, 고국사 계증시, 법 인삼존대사비라는 제액이 새겨져 있으며, 비문에 는 법인국사 한 분의 생애와 화엄종이 강력한 전 제왕권을 수립하는 사상적 배경으로서 법인국사 가 고려왕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고 기 록되어 있다.

부도의 주인공인 법인국사法人國師는 나말여초의

고승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오大悟, 법명은 탑문坦文, 시호는 법인이고, 성은 고씨다. 그 의 어머니가 꿈에서 귀신과 관계를 하고 있는데, 스님 한 사람이 금빛의 자를 주고 갔다. 그날 임신 이 되어 태어난 사람이 법인국사다.

법인국사는 원효대사가 살던 향성산의 옛 절터 에 암자를 지은 뒤 수도를 하다가 장륙사의 신엄화 상에게 화엄경을 배우고 신라 신덕왕 3년인 914년 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925년에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왕명을 받고 아들을 낳도록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 가 아들을 낳자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의 기 도로 태어난 아들이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이다. 그 는 50세가 되던 949년에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 서 법회를 베푼 뒤 개경에 새로 지은 귀법사의 주 지가 되는 동시에 왕사가 되었다.

그때 법인국사가 광종의 즉위를 위하여 조성한 불상이 보원사지 장륙철불좌상이다. 현재 국립부 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원사지 장륙철불좌 상은 높이가 2.57m이고, 운산면 철불좌상이라고 부르는 철불좌상은 높이가 1.5m에 이른다.

보원사지 석조(출처: 연합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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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 중기 때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도 보원사는 찾아볼 길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폐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들리는 말로는 보원사 주위에 아흔아홉 개의 절이 있 다가 백암사라는 절이 들어서자 모조리 불이 나서 없어지고 말았다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 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바람도 없는 가을이나 봄 날에는 잘 다듬어진 부도비 옆에 몸을 누이고 한숨 자면서 그 옛날 번창했던 절 이야기를 듣 는 것도 아름답지만, 몇 개의 문화유산만이 남 은 폐사지를 이리저리 쏘다녀도 싫지가 않은 곳이 보원사 터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져서 아쉬움으로 남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보원사 터를 빛내주던 것 이 내를 건너기 전부터 밭두렁 사이에 늘어서 있던 감나무이고, 냇가에 우거져 있던 다래덩굴이다. 봄이면 그 연푸른 잎의 감잎들이 보석처럼 빛나고, 가을이면 붉은 홍시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가지가지마다 휘어 늘어진 감나무 가지를 잡아당기거나 나무를 조금만 올라가면 냉큼 손에 잡히던 홍시를 따먹는 재미에 빠져 다음 답사 여정을 놓치기도 하였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 딴짓을 할 때가 있고, 그것은 삶에 묘한 활력을 준다. 세상 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해찰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가끔은 해찰 도 하고, 지각도 하고, 어떤 때는 결석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 않을까? 너무 매이 지 말고 스스로를 발견하여 스스로의 빛깔을 드러내면서 살아갈 것, 그렇게 한 세상을 흘러가다가 만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이런저런 인연일 것이고 어쩌면 감나무에 매달 린 홍시도 같은 연유이리라. 그런데 절터를 정비한다는 미명하에 감나무와 다래덩굴들 을 다 베어내고 말아 그 이전의 흥취 높던 가을의 아름다운 놀이, 아름다운 풍류 하나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보원사지 뒤편으로 아기자기한 산길을 한 시간 반 남짓 걸어가면 만나는 절이 마음 을 여는 절 개심사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내려 만들어진 상왕 산(307m)의 남쪽 기슭에 세워진 전형적인 산지 가람으로,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스 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개원사였으며, 고려 충정왕 2년(1350년)에 처능대 사가 중창하면서 개심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의 절집은 1941년에 해체 수리 우 리 옛 길 걷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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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지 오층석탑(출처: 연합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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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창하였으며, 그 후 17세기와 18세기에 한 차례씩 손을 보았음 을 알 수 있다.

개심사는 우리나라 절집 중에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조선 시대의 고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들이 여러 채 남 아있다.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수덕사의 대웅전을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지붕의 맛배지붕으로 우 리나라의 건축이 천축식에서 다포집으로 이행하 는 과도기적 건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 다. 그보다 더욱 이 절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는 건물은 심검당尋劍堂이라고 이름 붙여진 요사 채일 것이다. 대웅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어지고 부 엌채만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나무의 자연스러움을 마음껏 살린 건물 중 나라 안에서 손 꼽힐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다.

1962년에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 하면, 1477년에 3중창되었고 영조 때까지 여섯 번 이나 중창을 거쳤으며, 시주자들의 이름과 목수였 던 박시동朴時同이라는 이름까지 들어 있어 사료로 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몇 채 안 되는 건물로서 송광사의 하사당, 경북 하 양 환성사의 심검당과 함께 초기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그것뿐만 이 아니다. 안양루의 너른 창문 사이로 내다보이는 범종루의 기둥들 또한 휘어질 대로 휘어져서 보는

사람의 눈길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크지 않으 면서도 정신적으로 큰 절인 개심사를 두고 어떤 이 는 자연의 흐름을 한 치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마 음껏 멋을 부린 옛 선인들의 지혜로운 마음을 제대 로 표현한 절이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질 때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보원사 터를 지나 개심사로 이어진 길을 걷는다면, 가을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 붉은 단풍이 들지 않을까?

개심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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