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안08] 스티븐슨『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나’ 자신은 몇일까?
[학습목표]
1. ‘취미판단’ 혹은 ‘미’의 ‘중립성’은 ‘기만(속임수)’이란 주장에 대해 알아 본다.
2. 예술은 자신의 해방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전에는 자신을 통속화 (popularize)할 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알아본다.
[주요용어] 취미판단(judgment of taste), 중립성(neutrality), 정언명령 (categorical imperative)
[학습과제]
1.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란 작품의 감상과 분석을 통해 물질 적인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예술의 분리는 그러한 과정에서 산출된 현실의 비신화화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보자.
2.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란 작품의 감상과 분석을 통해 예술 의 급진적 잠재력이 예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으 며, 어떻게 의식 변화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개관]
스티븐슨『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스티븐슨(Robert L. Stevenson)의『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는 어렸을 적 읽은 동화거나, 한여름 밤에 “무서운 이야기 해주세요!” 하면서 어른을 졸라들은 등골 오싹한 공 포 이야기일 것이다. 명망 높은 의사 지킬 박사가 자신이 발명한 특수한 약을 마시고 흉측하고 포악한 하이드 씨로 변한다는 괴상한 이야기가 사람 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작품의 내용 자체가 철학적 주제를 명시적으로 담고 있음에도,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흥미 진진한 이야기가 오히려 진지한 철학적 탐색을 가려온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파악하는 철학 주제는 ‘이중인격’
및 ‘선과 악의 대립’이다.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이중인격을 다룬 도덕적 상징으로 가득한 공상과학 작품이자 정신적 모험담이며, 인간성에 내재한 선과 악의 문제를 드러낸 현대적인 우화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1886년 출간된 이 작품을 굳이 환상소설 또는 공포소설의 범주에 묵어둘 필요 없이, 일반 문학의 고전으로서 ‘철학하기’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을 것 이다. 그럼으로써 더욱 풍부하고 새로운 철학적 화두들을 추출해낼 수 있 기 때문이다.
자아는 여럿이다.
우선 지킬이 하이드로 변하는 것을 이중인격이라는 통념으로 볼 수도 있 지만, 그것을 인간이 ‘자아를 복제하는’ 한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 헨리 지킬 박사는 - 세포 분열에 빗대어 표현하면 - ‘심성 분열’을 시도한 것이 다. 지킬은 분리된 심성에 변형된 육체의 외형을 갖게 해서 에드워드 하이 드라는 또 다른 자기를 복제해낸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자신 전체를 그대 로 복제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일부’를 새로운 외형을 갖추어서 복제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복제의 다양한 개념을 시사한다.
흔히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라는 제목에 의식이 점령당해 이 작품을 이
분법적 틀에 가두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처럼 해석하는 경향에서 탈피할 가능성 또한 얻을 수 있다. 스티븐슨의 작품을 이분법적 으로만 파악한다면, 그것을 생각의 화두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지적 유산은 엄청 축소된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는, 지킬이 말한 “인간은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온전한 둘이다”라는 명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분법 적 사고를 벗어나면, ‘인간은 온전한 여럿이다’라는 철학적 주제까지도 발 견할 수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 다.
자아는 단수도 아니고, 이분적인 둘도 아니며, 복합적인 여럿이다. 작가 스티븐슨은 이 점에 대해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으면서 도, 주로 이원적 입장을 주인공 지킬의 입을 통해 말한다. 하지만 지킬이 친구인 어터슨 변호사에게 남긴 유언장에는 복합적 입장이 일부 담겨 있 다. “나는 이원적이라는 말을 했다. 현재 나 자신의 지식 수준으로는 그 이상을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문제에서 혹자는 내 입장을 따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능가하겠지. 그래서 감히 추측건대, 인간 은 잡다하고 서로 모순되는 개별적 거주자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이 결국 드 러나지 않을까 한다.”
복수(複數)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통로를 제공해줄 수 있다. 특히 현대 문화의 지형에서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 한 열망과 노력이 어떻게 다양하게 표출되는지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 한 인식 도구가 될 수 있다. 쉬운 예로,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복 제한 자아에 아이디(ID)와 아이콘(icon)으로 새로운 외형을 입혀 활동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자아들은 때로 ‘하이드 씨’
처럼 포악하고 비열하며 무차별하게 공격적이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즐겨 해온 황금 질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도 복수의 자아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양한 생각의 갈래를 갖고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종종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이 짓궂은 질문은, 역설적으로 ‘나 자신’을 온전히 알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은연중에 ‘완벽한 하나로서 나’라고 전제하는 것은 과업을 더욱 황당하게 만든다. 복수의 자아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여럿이다. 나 자신을 아는 일은 우선 자아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일이며, 그 다양한 자아의 의미들을
연계할 줄 아는 능력일지 모른다.
선과 악의 비밀
이 밖에도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만 그치는 게 아니 라, 선과 악이 만나서 접점을 이루고 또한 서로 다양하게 영향을 주는 ‘선 악의 인터페이스’ 또는 ‘선악의 상호 작용’이라는 주제를 끌어 낼 수도 있 다. 선과 악의 문제는 그 구분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유언장에서 지킬 박사는 선과 악을 철저하게 구분하려고 노력했다고 고 백한다. “내가 현재의 타락한 나로 된 것은 특별히 비열한 결점이 있어서 가 아니라, 오히려 뭔가를 끝없이 열망하던 내 본성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이중적 본성을 나누기도 하고 결합하기도 하는 선과 악의 두 영역 사이에 보통 사람들보다 한층 더 깊은 간격을 파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 킬이 고백한 내용은 오히려 선과 악이 쉽게 나누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둘 사이의 간격을 철저히 떼어 놓으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도 지킬은 선과 악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결국 악의 삼투압적 흡입력에 자신이 점점 빨려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고 괴로워 한다. 이는, 처음에는 지킬이 자신이 발명한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하이드 가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약을 마시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한 자신을 발 견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는 다시 안락한 아침잠에 빠져들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 얼마 쯤 정신이 든 순간 나는 내 손에 눈길을 주었다. 헨리 지킬의 손은 (어터슨 자네가 종종 말한 것처럼) 그 형태와 크기가 의사라는 직업 에 맞게 듬직하며 희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이불을 반쯤 덮은 채 누워, 런던 중심부의 노오란 아침 햇살 속에 바라본 손은 확실히 여위고 울퉁불퉁하면서 손가락 마디가 굵고 거무죽죽하며, 검은 털이 수북히 덮여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하이드의 손이다 ···
그렇다. 나는 헨리 지킬로 잠이 들었다가 에드워드 하이드가 되어
깨어난 것이다.”
어쩌면 선보다 ‘악은 작지만 힘이 세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지 킬과 하이드 사이에 이뤄지는 변신의 은유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이드는 몸집이 작다(그래서 지킬이 하이드로 변하면 지킬이 입고 있던 옷에 몸집 이 작아진 하이드가 음흉하게 푹 파묻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 격은 몹시 거칠고 우악스러우며 억세다. 악은 작지만 힘이 센 것이다.
억센 악에 저항하는 선의 투쟁은 이야기가 대단원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다. 전에는 하이드가 되기 위해 약을 먹었지만, 지금은 지킬의 모습을 유 지하기 위해 더 많은 약을 먹어야 한다. 지킬은 그 원래의 모습으로 마지 막 안간힘을 다해 자신이 일으킨 사건들에 대한 진술이 담긴 유언장을 쓴 다. 지킬은 서두르고 있다. 약 기운이 떨어져서 하이드로 변하기 전에 유 언장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꾸물대다가 이글을 마치지 못하 면 안 된다.··· 이것을 쓰고 있는 동안 내가 변신의 진통에 휩싸이면, 하 이드가 이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이다.”
지킬은 고백서를 마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의 주검은 하이드의 모 습으로 발견된다. 선한 자의 모습으로 악행을 고백하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은 주인공의 주검은 결국 악의 모습이다. 하지만 악을 고발한 선한 자의 진술서는 남은 셈이다. 어쩌면 지킬이 남긴 고백서는 선과 악 사이의 끈끈 한 관계를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지킬과 하이드의 공포 이야기는, 그 배경이 된 안개 자욱한 런던의 새벽 거리처럼 철학적 수수께끼 자욱한 미로로 우리를 몰고 간다. 우리 자신 역 시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원제는 ‘지킬 박사와 하이 드 씨의 이상한 경우’이다. 하지만 이 ‘이상한 경우(strange case)’가 어느 정도까지 정말 이상하고 특별한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 ‘경우’라 는 말이 우리 모두에 해당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 는 스산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