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주 중일 해양영토분쟁
교수 : 손기섭
(부산외대 외교학과)
제12주 강의 개요
1. 서론
2. 동중국해 영토분쟁의 역사성과 쟁점 3. 덩샤오핑의 영토분쟁 ‘차세대 해결론’
4. 80-90년대의 중일관계와 해양분쟁 5. 2000년대 중일 해양영토분쟁의 특징 6. 결론
교재: 손기섭, <현대 일본외교와 중국>
(부산외대, 2012)
1. 서론
1) 전후 일본외교
- 미일 협조외교와 경제중심주의에 토대
- 개헌이나 재군비, 영토분쟁 등 정치주의노선 지양.
- 소련이나 중국과도 지나친 갈등관계는 회피
-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 댜오위다오) 분쟁 - 70년대 초에 표면화, but 센카쿠열도 갈등회피.
- 1978년 후쿠다-덩샤오핑 회담 :
: 해결을 후대에 맡김. 상호 윈-윈 게임 모색.
2 ) 중국정부 –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
- 중국정부도 70년대에는 중일 관계개선 우선정책 - 문화대혁명 정점기를 끝낸 마오쩌둥-저우언라이
: 중일 국교정상화 우선정책을 명확히
- 소련의 패권주의 막고 중일관계 개선 도모
- 덩샤오핑, 1978년 정치권력 실권, 실용주의노선 추진
: 차세대해결론 : 갈등관계의 전면적 현재화 회피.
1. 서론
3) 2000년대 현재화
- 2004년 이후 센카쿠열도 주변수역의 갈등이 현재화 - 동중국해의 해저 천연가스전의 개발 마찰 가속화 - 30여 년간 지속된 우호적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향.
- 특히, 2010년 9월 중일 간의 해양영토분쟁의 첨예화 : 이에 따른 중국정부의 초강경 대응
-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과 정치군사대국으로 떠오른 중국 - ‘힘의 외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롭게.
- 2010년 이후 중국정부의 대응방식과 강도 판이.
2. 동중국해 영토분쟁의 역사성과 쟁점
1) 역사적 연원
(1) 일본정부의 주장
- 1884년 고가 타츠시로(古賀辰四郎)가 발견
- 1895년 오키나와현 영토에 편입, ‘무주지 선점론’
- 1885년 현지조사를 행하여 동 열도가 무인도임과 동시에 청국의 지배권이 미치지 않음을 확인
- 1895년 1월 14일 현지에 표식을 건설, 각의결정.
: 일본 영토로 편입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의거 적법하게 미국에 이양했다가 1972년 다시 반환.
(2) 중국정부의 주장
- 중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영토 주장
-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대만의 일부로서 일본에 할양 - 즉, 시모노세키조약 제2조에 의해 대만과 그 부속도서 및
팽호제도를 강제로 빼앗긴 것이라고 주장.
- 1895년 1월 당시는 청일전쟁 시기로 일본의 우세가 확정적 이었던 때에 일본정부는 센카쿠열도 주변 섬들 편입.
- 제2차 세계대전 후 중국 고유영토 불법적 이양 (미일) 타국영토의 불법적 거래로 간주.
3. 덩샤오핑의 차세대해결론
1) 저우언라이의 ‘불언급론’
- 1972년 국교정상화 당시 : 미일동맹 용인,
전쟁배상권 포기
센카쿠열도 ‘현상유지론’ 내지 ‘불언급론’
2) 덩샤오핑의 ‘차세대 해결론’
- 중일 관계의 개선 중시, 소련과의 대결에 제휴.
- 일본의 대중 엔차관(정부차관) 협력 중시
-
덩샤오핑 1973년 3월 중국 공산당에 복귀. 부총리 - 대일본 외교를 적극 추진, 4개의 실무협정과 평화우
호조약의 교섭을 조기체결 강조 - 특히 평화우호조약의 체결
: ‘정치적인 각도와 장기적 중일관계에서’ 접근.
- 중국에서 덩샤오핑이 실세로 부각되는 1977년 가을 - 1978년 7월에 정식교섭이 개시
: 양국은 '제3국 조항'의 문구차이로 줄다리기.
- 덩샤오핑, 센카쿠열도에 관한 문제와 대륙붕문제
: 지금은 자세히 논의할 때가 아니며, 나중에 차분히 토 론하여 상호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모색 제안.
“현 세대가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다음 세 대가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가 방법을 모색 하면 된다” (石井明 2006 : 144).
: ‘차세대 해결’을 시도하는 ‘현안 제쳐두기’ 식의 ‘다나
아게론’으로, 센카쿠열도 영유권의 ‘차세대해결론’ 제안.
4. 80-90년대의 중일관계와 해양분쟁
1) 나카소네 내각기
- 중일관계는 80년대에도 우호협력 관계가 지속.
1984년경 나카소네-후야오방(胡耀邦)시기가 최상시기
- 나카소네 수상과 후야오방 총서기 간에 진행된 정상회담 에서 기존 ‘중일관계 3원칙’에 ‘상호신뢰’ 의 항목이 추가되어 ‘중 일관계 4원칙’으로 발전
- ‘후야오방 방일’ 이어 ‘나카소네 방중’ 실현
: 1984년 3월 23일에서 26일까지 실현되어 중일관계는 ‘나 카소네 ․ 후야오방 파트너십’의 역사상 ‘최상의 상태' 구가.
2) 중일 관계의 변화
- 냉전이 종결되는 1989년을 시점으로 급격히 변화
- 첫째는 1989년 6월 천안문사건 ‘중일 특수관계론’이 도전 : 미국과 유럽의 압력과 견제로 ‘서구협조론’
: 제3차 대중 엔차관의 동결을 결정, 관계 재조정 - 둘째는 눈부신 성장률, 군사비 급증, 핵실험 강행.
-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중국위협론' 급속 대두.
- 셋째는 1992년에 중국정부는 영해법, 및 EEZ법 제정.
- 대만, 팽호제도와 더불어 댜오위다오 제도 즉 일본의 센카 쿠열도가 중국영토의 일부로서 분명히 기술됨.
5. 2000년대 중일 해양분쟁의 특징
- 2000년대 들어 후진타오-고이즈미 시대의 중일 간에 해양영토분쟁은 다음 네 가지 특징.
첫째, 동중국해 센카쿠열도의 영유권분쟁이 현재화되고 격화된 점. ‘차세대 해결론’이 현재화되어, 마치 덩샤오핑의 차세대인 후진타오가 해결을 도모하는 모습.
- 둘째, 2004년경부터 동중국해 해양자원분쟁이 날로 격
화된 점. 센카쿠열도 영유권 대립 자체보다는 동중국해 천
연가스자원 발굴을 두고, 보다 더 첨예하게 대립.
- 셋째, 중국정부가 해양에 관한 기본적인 입법 강화, 해양정책 을 발전시켜왔을 뿐만 아니라, 천연가스자원의 개발을 노골적으 로 추진. 중국의 후진타오정권은 해양조사와 해양개발 구체화.
- 넷째, 중국의 동중국해 해양자원 도전에 대해 2005년 당시 여당인 자민당은 물론이고 야당인 민주당 지도부도 중국을 성토 하여, 해양관련 국내법을 정비 계기.
- 종합적인 해양정책의 법제화는 아베(安倍)내각.
: 일본정부는 2007년 4월 일본 국가의 해양정책 전반 첫 법안 이 되는 ‘해양기본법안’과 EEZ 내의 천연가스 개발 안전 확보 목 적으로 ‘해양구축물의 안전수역 설정에 관한 법안’가결.
5. 결론
- 첫째, 중일 정치경제관계의 구조적 변화와 동중국해 해 양영토분쟁은 밀접한 상관성.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 대해지고 중일 ‘72년 체제’ 가 점진적으로 전환되자, 중국은 1992년 영해법, 1998년 배타적 경제수역법을 제정.
→ 일본과의 영유권분쟁 재연.
- 둘째, 동중국해 영토분쟁은 21세기 들어 급속히 악화된 양상을 띠며, 센카쿠열도와 동중국해의 경제적 및 안보전략 적 가치가 증대.
- 셋째, 중일 양국정부의 정책결정 상에 나타나는 특징
: 중국과 일본
- 중일관계에서는 ‘전후적 특수관계’의 중일 ‘72년 체제’
: 1996년경부터 ‘탈전후적 보통관계’로 전환.
- 2005년의 격렬한 대립
: 2007년에 후진타오와 아베정권 ‘전략적 호혜관계’ 합의.
- 2010 9/ 2012.9 양국 간 분쟁의 격화
: 이러한 합의가 상호 실리적으로 추구되는 일시적 현상.
- 중국은 강대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힘의 외교’ 전개.
: 2010년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화평굴기’한 중국, 차 후에도 센카쿠열도나 난사군도 및 시사군도의 해양자원 개발이 나 영유권분쟁에서도 ‘힘의 외교’를 구사할 가능성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