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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화사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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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문화사고고학

19세기 말 유럽에서는 단선진화론이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게 된 문화사고고학은 고고학기록에서 유물의 분포에 대한 지리적 다양성에 대한 것이었 다. 이러한 흐름 당시 나폴레옹 전쟁의 패배이후에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다윈의 진화 론과 러복의 연구에 의한 인종주의의 성장과도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 다. 그래서 종족성은 인류역사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되었다. 19 세기 말에 지식인들은 산업화로 인한 기술발달과 발생하는 사회적 불안을 자국이 아 닌 다른 나라의 경제 및 사회적 문제의 탓으로 돌리면서 자국에서는 연대감을 고취시 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1993년에 크리스티안센은 “우리 덴마크사람들에게는 벌판과 황야에 고대 기념물들 이 흩어져 있는 조국이 있다. 이러한 역사와 조국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가 한 민족임을 의미한다.” 라고 말했다. 문화사고고학에서 문화변화의 주된 요인은 전파와 이주의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어떤 지역의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 되는 것으로 보았는데, 문화를 동일한 언어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각 문화들은 종족에 따라서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되 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안센이 언급한 조국은 하나의 문화체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 다.

1. 종족성에 대한 초기의 관심

·민족주의의 등장

민족의식은 16세기와 17세기에 북부 및 서부유럽에서 중세시기가 지나가고 르네 상스가 퍼질 무렵에 애국심이 확산되면서 자신의 조상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되 어 호고주의의 발달까지 영향을 미쳤다. 민족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집단 정체성 의 감정 및 공통의 고국에 대한 충성으로 정의된다. 즉 민족주의의 발생은 조상에 대 한 관심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의 민족국가의 시민들은 자신들을 더 세분할 수 없는 생물학적인 존재물로 간 주하였다. 민족성이 강조되면서 민족국가의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하고 국 가들은 민족의 통일을 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민족주의는 인종주 의와도 결합되어, 한 민족 안에서도 계급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인 고비노는 이러한 과정에서 과도기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문명은 인종적 구성에 따라 결정되며 우월한 인종이 적을수록 국가는 황폐해져 간다 고 서술하였다. 이는 유럽의 인종은 우월하다는 인종주의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다.

민족주의가 국가적 차원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은 프랑스를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 는 프랑스혁명으로 인해서 켈트족이 주권회복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켈트족의 기원이 어느 민족이냐는 것이 논란이 일게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켈트아카데미를 세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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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연구들은 프랑스를 단일민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초기 고고학과 민족주의

영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역사기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역사기록을 보면 영 국인들은 로마, 색슨, 덴마크, 노르만 족이 영국을 차례로 정복하고 점유했다는 사실 이 있다. 이러한 점유사실을 근거로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선사시대에 유사한 침략이 있었다고 가정하였다. 그래서 현재 자신들의 종족, 영국인의 조상은 이러한 침략에서 들어온 종족들과 원래 지역에 있던 종족 중에서 우월한 종족과 결합되어 혼혈민족을 낳게 되고 현재 가장 훌륭한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적 용되어 자연선택의 결과로 영국의 종족들은 현재 살고 있는 지역에 잘 적응한 것이라 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북부와 중부 유럽에서는 19세기 동안 선사시대 연구가 민족주의와 연관성이 있었 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민족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주로 각 나라들의 선사시대에 대한 관심과 이를 통해 편년을 만들어내는데 주로 연구를 하였다. 독일은 1871년에 통일이 되었지만 독일의 역사 연구는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당시의 보수층 들은 역사 연구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8세기 동안 독일에서는 역사적접근 방식으로 고대 독일의 영광을 보여주었다. 요 한 헤르더는 이러한 역사적접근적인 연구를 통해서 역사는 그 민족이 발달하는 과정 을 알려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호고가들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고 1871년 독일의 통일에 영향을 미쳤다.

동부유럽에서는 고고학자들이 강대국인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러시아의 지배 아래 살고 있던 민족들의 정체성을 고취시켰다. 이것은 강대국의 한 민족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그 지배하에 있던 약소국들의 민족까지 강조하는 것으로 제국의 쇠락을 가져오 고 몇몇 민족국가들의 등장에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고고학이 강대국의 지배하에 있 는 체코나 폴란드의 계층들에게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동안 유럽고고학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박물관 및 연구기관 등이 많이 설립되고 대학의 학과개설이 이루어지면서 각 대학에 고고학 교 수들이 배치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편년보다는 유물 자체를 연구 하는 쪽으로 관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유물을 연구하면서 유사한 형태나 기술 적인 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리적 부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종족성과도 연결 된다. 지리적으로 그 지역에서 나온 것은 그 지역의 민족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 되었다.

2. 전파론

19세기 문화진화론자들은 문화변화를 독자적인 발명뿐만 아니라 전파와 이주의 측 면에서도 생각하였다. 원주민들의 문화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문화는 유럽민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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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온 것이고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즉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력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문화변 화에 대한 생각들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인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이 기술발 달에는 상당한 발달을 가져다주었지만 혁명들과 운동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진보라는 것에 반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들은 당시에 진화론으로 인해 생물학적차이까지 원 인으로 여겨졌다.

·라첼과 보아스

문화변화를 창의성보다는 전파와 이주에 의존하였다는 사실은 라첼과 보아스의 저 술들에서 명백해진다.

라첼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민족학자였다. 라첼은 계몽주의의 심적동일성을 거부 하면서, 민족학자들은 인류역사상 발명이 한 번 이상 일어나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라첼은 활이나 화살과 같은 물건들은 분명 하나의 공 통된 원천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이 기술이 한 인간집단에서 전파와 이주로 인해서 유사성이 나타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라첼은 기술의 전파가 장 기간 이어져 문화영역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첼의 주장은 보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 보아스는 라첼의 주장에서 더 발전하여 각 집단의 문화는 그 자체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에서 발명은 한 번 이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각 문화들은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 보아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개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보아스의 주장은 문화상대주의와 역사특수주의를 포함한다.

비엔나학파의 인류학에서도 이루어졌다. 프리츠 그레브너와 빌헬름 슈미트는 중앙 아시아에서 문화들이 발달하였고 거기에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다며 라첼과 보아스의 전파론에 동의하였다.

·극단전파론

영국에서 전파론는 케임브리지대학의 학자 리버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오 세아니아 사회들에서 문화의 특징들을 연구하였는데 진화적인 단계들을 찾지 못하면 서 진화론을 거부하고 전파론을 지지하게 되었다. 전파론은 그래프턴 엘리엇 스미스 에 의해 더 확산된다. 그는 미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시신처리가 이집트에서 발 명되어 세계 각지로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술이 퇴보하게 되어 이집트와는 다른 방식의 시신처리가 보인다고 하였다. 그는 미라의 전파론에서 멈추지 않고 모든 초기 의 문화 발달이 이집트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기원전 4000년 이전에는 농경 이나 정부 등 문화라고 불릴만한 것들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일강 유 역에서 농경이나 토기, 건축물들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하는 학자 들을 극단전파론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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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의 극단전파론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거석묘가 이집트 피라미드의 기술적 으로 퇴보한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문명이 서유럽으로 전달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구대륙과 신대륙의 문화들은 다른 지역과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전파론의 영향으로 인해서 인류역사상 기술적으로 발명은 한 번 이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나 전파론은 문화가 발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고 자료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서로 관련된 문화들을 비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체되었다.

3. 몬텔리우스와 유럽 선사시대의 종합

사회과학에서 점차 문화변화와 전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시간적 변화뿐만 아 니라 공간적인 변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19세기 동안 영국, 프랑스, 스위스, 독일 및 중유 럽의 고고학자들은 동전, 거석묘,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의 고고 자료들의 지리적 분 포를 발견하였다.

·몬텔리우스와 형식 편년

선사시대에 대한 편년에만 관심을 두었던 단선진화론적인 시각은 각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역사 지향적인 시각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 물은 구스타프 오스카 몬텔리우스이다.

몬텔리우스는 톰센의 연구법을 따라 유물들을 분류하였다. 유적 내에서도 동일한 유구에서 나온 것들을 분류하고 동일한 형태의 유물들을 분류하였다. 톰센과는 다르 게 그 시대 안에서도 세부적으로 여러 시기로 나누어지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 유물들에서 보이는 제작기법, 형태, 장식성 등의 유사성을 파악하여 편년들을 배열하였다. 몬텔리우스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서 배열한 유물들에서 진화적경향이 있 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몬텔리우스의 순서배열법의 특징은 스칸디나비아 고고학을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는 유물들을 그의 방식대로 분류하기에 앞서 톰센의 분류법을 첫 단계로 실시하였고, 발견된 유물들을 제작기법, 형태, 장식성 등의 인간의 생활과 연 관지어 해석하려했기 때문이다.

·전파론적 해석

1880년대가 되면 몬텔리우스는 스칸디나비아 청동기시대에 대해서 자신의 순서배열 법을 통해서 여섯 시기로, 신석기시대는 네 시기로, 철기시대는 열 개 시기로 나누었 다. 몬텔리우스는 자신이 나눈 시기가 유럽 전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 였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게되어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발생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다른지역으로 전파되어, 기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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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유물들이 무역으로 교환되거나 이동해갔다고 생각되는 지역들에는 자신의 시기 를 대응시키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유물 분류에는 모든 유물들이 만들어지고 나서 바로 교환되거나 이동하였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또한 그는 라첼과 보아스의 전파론 과 유사한 주장을 하였다. 그는 선사시대의 기술발달은 서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 왔다고 하는 “동방에서 온 빛”학파의 주창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서아시아 전파라고 주장하였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몬텔리우스의 해석을 지지하였다.

그의 전파론적 해석은 유럽에서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 였다. 그러나 전파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고고학의 발전

몬텔리우스의 순서배열법은 유럽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러시아 고고학에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세기 후반 중요한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정부가 1959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러시아제국고고학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870년대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러시아에서 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취락이나 묘 지 발굴, 신석기, 청동기시대 등의 유적들까지 다양했다. 러시아 고고학회의 학자들 중에는 슬라브 및 중세 러시아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학자들도 있었다. 이러한 관심 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대학에 고고학 강좌가 개설되 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고고학자들은 북부 및 중부 유럽의 선 사고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 바실리 고로드초프는 몬텔리우스의 연구법 말고 다른 스칸디나비아 형식학자들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서 러시아고고학의 형식주의학파 라 불리는 학파를 만들었다. 또한 그는 전파와 이주를 통해 문화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러시아의 고고학은 몬텔리우스의 순서배열법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스칸 디나비아의 고고학이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또한 가장 주목할 점은 여러 강대국 들은 부족사회의 부족민들의 지역을 점령하고 이들을 인종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 아 식민화를 정당화하려 했지만, 러시아는 그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4. 고고학 문화의 개념

19세기 말 종족성에 대한 관심이 고고학 문화의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 다. 문화라는 용어는 처음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어에서 사용되었던 듯하다. 본래 뜻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수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17세기가 되면 어떤 한 민족의 특정한 생활양식을 지칭하고 18세기가 되면 이러한 민족들은 특징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문화라는 말이 문명이란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고 독 일에서는 문화는 더욱 좁은 의미로서 부족 또는 농민 집단 등 느리게 변화하는 생활 양식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분 19세기의 단선진화고고학자들은 문화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나라에서만 아니면 특정 민족에서만 사용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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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고고학 문화나 문명으로 보았던 것은 몇몇 고고 학자들의 관점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들 고고학자들도 문화라는 개념을 정확히 언급하지 못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고고학 문화에 대한 해석도 달랐다. 왜냐하면 당 시 문화사적 접근 방식의 발달이 동일지역에서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기 아니기 때 문이고, 심적동일성의 성격을 거부하고 전파와 이주가 문화변화 원인으로 보았기 때 문이다.

5. 문화사고고학의 탄생 : 구스타프 코시나

앞에서 서술하였듯이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이 확산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바로 문화 사고고학이 발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화사고고학은 독일에서 먼저 발달하였다. 독일 에서 선사고고학의 전문화는 1869년 독일인류학, 민족학, 선사고고학회의 창립과 함 께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 루돌프 피르호프는 독일 고고학 조사에 활발하게 참여하면 서 선사인류학을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고,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선사문화에 대한 기원과 발달 과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의 조사는 유럽 선사시대 문화에 대한 정 보를 주었지만 그는 야외조사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선사시대 문화의 과거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를 가져다주지는 못하였다.

·구스타프 코시나

구스타프 코시나는 독일의 애국주의자였다. 그는 고고학을 많은 학문 가운데 가장 민족적이고 고고학 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독일인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애 국주의자였던 그는 독일의 고고학자들이 고대 독일인들 외에 고전고고학과 이집트고 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의 애국심과 민족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그의 민족적인 성향은 <독일인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보인다. 그는 이 책에서 독일 선사시대에 대해 찬양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찬양의 정치계에서 대환영을 했다.

또한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코시나는 전파론보다 는 사람들의 이주를 통해서 문화가 변화되었다고 보았다. 전파는 단지 문화변화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 전파는 아이디어가 옮겨가는 것이지만 이주는 사 람이 이동하는 것이다. 그는 종족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주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코시나는 고대 독일인들에 종족성을 강조하였고 실제로 집자리나 매장 풍습에 관심 을 가지지는 않았다. 코시나는 독일이 문명발달의 중심지라고 여기면서 독일의 생활 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코시나의 학사적 의의

코시나의 연구에는 너무 애국주의에 치우쳐 정작 고대인들의 생활양식은 제대로 조 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문화적 접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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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중심으로 문화를 설명하려 했다. 전파보다는 이주를 문화변화의 원인으로 보았 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각 종족들이 가지는 특성들로 이웃한 문화들을 연구 하려 하였다. 그리고 코시나의 애국주의적인 고고학 연구는 정치적으로 나치가 권력 을 잡게 되면서 이용되기도 하였다.

6. 차일드와 「유럽문명의 여명」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외국 고고학자들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코시나의 접 근법은 아니지만 몬텔리우스의 접근법을 받아들였다. 영국의 고고학자인 존 마이어스 는 몬텔리우스의 접근법과 더불어 극단 전파론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그는 <역사의 여명>이라는 책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럽으로 기술이 확산되었다고 보았 고 위계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들은 자신들보다 열등한 있는 종족들을 점령하면서 발달하였다고 보았다. 마이어스는 민족들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고고학 문 화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후에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 문화와 문명이 다루어지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는 학자는 고든 차일드가 <유럽 문명의 여명>에서 다루기 이전까지 없었다.

·「유럽 문명의 여명」

그는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유럽 문명의 여명」, 「선사시대의 다뉴브 지역」이라는 두 권의 책을 출간하였다. 「유럽 문명의 여명」은 유럽 선사시대 의 청동기시대 말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고 「선사시대의 다뉴브 지역」은 별로 알려지 지 않은 지방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유럽 문명의 여명」에서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외국의 고고학 접근법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코시나의 접근법보다는 몬텔리우스의 접근 법을 채택하였다. 차일드 역시 초기 문명 기술이 서아시아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전 파되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고학 문화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되풀이 출토되는 어떤 형식들의 유존물-토기, 도구, 장식물, 매장 의례, 집자리 형태-”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단선진화론자들이 고고학을 해석하는 방법보다는 유물 자체 에 대한 측면에서 문화변화들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편년이나 시기를 설정 하는 것보다 유물의 형태나 형식분류를 통해서 문화는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 시나가 문화는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 것처럼 차일드 역시 문화들은 모자이 크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차일드는 두 권의 책에서 고고학 유존물에 대한 공간적 분포에 대해서 다루었다.

차일드는 유물들을 기능적인 면을 중요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진 유물들은 선사시대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생각해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 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지역의 특징적인 유물로 종족을 확인할 수 있 다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유물들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토기나 장식물은 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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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무기들은 교환과 무역을 통해서 다른 지역 으로 빠르게 확장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의 결과로 보았다. 전파는 다른 학자들과 의견이 비슷하지만 이주는 본래 존재하던 문화가 유입 하여 온 문화로 인해 문화적 혼합으로 다른 문화로 대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였 다.

차일드의 이러한 연구법은 이후에 다른 고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고학자들 이 단선진화론적인 해석보다는 알려지지 않는 민족들을 확인하고 이동하는 것이나 그 기원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차일드의 이러한 연구는 문화는 일련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달하였다는 문화진화론의 반대 입장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의 의견과는 반대로 인간의 창의성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 것이다.

7. 유럽 고고학과 민족주의

스칸디나비아, 독일, 영국에서 문화사고고학은 선사고고학이 유럽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나타나는 과정 중에 발달하게 되었다. 모두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발달한 것 은 아니었다. 민족주의는 유럽에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고학에도 많 은 영향을 미쳤는데, 저술들에 의해서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북부, 중부, 동부유럽

민족주의는 국가 간에 대립을 유발하기도 하고,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감정들은 변 하기 쉬운 것이어서 국가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의 지역이나 지방적인 범위 안에서도 발생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립 안에서 고고학은 정치적이나 경제 적인,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몇몇 유럽 국가들에서는 정치, 사회적 인 이유로 인해서 정부가 고고학 조사를 중단하거나 이어가기도 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나치의 팽창으로 인해서 민족성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나치에 의 해서 러시아가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독일인들의 우월성을 무시하고 슬라브족 이미지 를 고양시키라고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러시아에서는 중세 마을에 대 한 연구의 일환으로 노브고로드 유적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는 러시아에서 도시 고고 학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마을 연구로 인해서 러시아인들은 유럽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공업, 요역,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의 마을들이 식민지이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형 성에 대해서 전파와 이주를 통해서 문화변화를 해석하려고 하였다.

·서유럽의 민족주의 고고학

서유럽에서도 다른 유럽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사건들이 고고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단선진화론의 영향으로 문화사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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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야 만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을 대부분 로마와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 아 세계를 주도하는 국가라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의 예 술품들을 사들이고 수집하는 것으로 입증하려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진화적 접근이 문화사 접근으로 대체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이다. 프랑스에서는 조셉 드셸레드가 골족에서 로마에 이르는 토기편년을 수립 하면서 유물의 형식을 분류하였다. 앙리 브뢰이는 프랑스 구석기고고학의 진화적인 틀을 보여주었다. 그는 석기를 통해서 프랑스에서 아주 이른시기부터 두 집단의 오미 니드가 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석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집단은 양면석기를 제작, 다른 집단은 격지석기를 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 한 집단들 간에 혼혈이 있었다고도 주장하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고고학자들은 중동의 선사시대에 대해 관심 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저술들을 통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 로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을 예로 들 수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중동에 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데 대부분 유럽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서아시아 의 선사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발굴을 하였다. 이들의 연구 목적은 중동의 선사시 대의 기원과 영향을 정의하려 하였다. 이러한 중동의 고고학 발굴조사로 인해서 서아 시아가 유럽 문명의 요람이라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다. 라첼과 보아스의 주장과 유사 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유럽인들의 관심 범위가 자신들 이 살고 있는 지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장을 이룩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정치적으로 고고학을 이용 하는 일은 사라졌다. 즉 고고학을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이용하는 것이 줄어든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 개발되기 이전에 차 일드의 연구법은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변화를 전파와 이주로 설명하는 것 외에 문화변화 요인을 찾는 것에도 열정적이었다. 또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줄어들 면서 유럽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도 줄어들었다.

영국에서는 선사시대의 거석기념물과 남아있는 석조유구들에 대한 관심이 폭팔적으 로 일어났다. 이러한 잔재들은 환상 속의 외계인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아일랜드의 고고학에서는 이주가 아직까지도 고고학 문화를 해석하는 적용되고 있었 다.

세계대전 이후에 고고학은 전처럼 정치적으로 마음대로 이용되지는 않았고 유럽의 국가들은 이제 근대성에 관심을 돌렸다.

·전후 독일의 고고학

문화사고고학은 독일어권 국가들보다 서독에서 더욱 완전해졌다. 고고학 문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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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은 코시나에게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코시나가 주장하였던 특정한 민족이나 언어 를 사용하는 집단과 일치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거의 폐기되기 시작하였다. 고고학 문화에 대한 민족적 접근의 해석이 아니라 경제적이나 정치, 사회구조가 더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고 자료를 해석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역사적 접근을 이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한스위르겐 에거스에 의해서 이론적인 작업이 역 사학의 비판과 동등하다고 판단하였는데 독일고고학은 코시나의 연구로부터 시작하여 종족성에 심취되어 제대로 된 고고학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최근의 흐름

민족주의는 애국심과 그 나라나 지역의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공통 점을 가지지만 여러 나라에서 다른 특성으로 발달하였다. 몬텔리우스나 차일드와 같 이 유럽을 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그 문명 기원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은 계속 논 란이 되고 있다. 몬텔리우스와 차일드는 문화변화를 전파론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였는 데 콜린 렌프류는 그들의 전파론과는 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야금술이 더 발달된 문 화로부터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서아시아에서 발달하였다고 주장한 것을 근 거로 들 수 있다. 이안 호더는 『유럽 농경의 기원』에서 고고학적 기록들을 연구함으 로써 이 유물들에는 유럽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어서 신석기 시대 또는 구석기 시대까 지 연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에 대해서 몇몇 고고학자들이 비판을 하기 도 하였다.

유럽에서 문화유산 관리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현재 고 대의 거석기념물이나 위대한 건축물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만 관리를 하고 다른 것에 는 소홀히 하였다. 20세기 말 국가들은 문화유산 관리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였다.

그래서 고고학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가 후원을 하면서 지 역적인 관심도 커지게 되었다.

8. 아시아의 민족주의 고고학

유럽의 문화사적 접근은 전 세계 민족주의 고고학이 표본이 되었다. 문화사적 접근 법은 특정 선사시대 민족을 연구하는 것으로 민족주의 고고학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할 가능성이 있다. 약소국들에서는 이러한 문화사적인 접근법이 국가적 인 통일이나 민족의 단일성으로 위해서 이용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유럽민들의 기 술적인 우월성이나 특정한 시기의 역사를 강조하고자 할 때 이용된다.

·일본의 문화사 고고학

일본에 서양의 고고학 접근법이 들어온 것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과 유 럽의 자연과학자들이 들어오면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에드워드 모스이다. 모스는 동물학자로서 동부에서 조개더미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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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일본 최초의 패총연구인 오오모리 패총이다. 이 패총을 계기로 일본 고고학이 근대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의 문화사고고학은 1895년에 설립된 고고학회에서 정의되었다. 학회의 목적은

“일본 역사 여러 시기에 대한 문화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하여 일본의 고고학”을 연구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고고학자들은 문화사를 여전히 지지하고 있었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이 되자 일본에서 고고학 발굴 조사에 정부가 정치적으로 억압을 하기도 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일본 고고학 자들은 문화사적인 틀을 지지하였다. 전쟁 이후 패망한 일본은 우월주의에 대한 감정 이 쇠락하게 되었다. 그래서 전쟁의 패배를 지우기 위해 과거를 연구하려 하였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 민족주의가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은 자신들의 선 사시대가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상상력을 동원해 일본민족과 기원에 대한 환상에 젖게 되었다.

194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고고학은 큰 발전을 하였다. 왜냐하면 고고학자 자신들 이 가지고 있는 기술들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대중의 관심도 높았고 지표조사와 구제발굴이 의무화가 되었기 때문에 발굴조사도 많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발견물 들이 전시가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의 문화사고고학

중국에서 야외고고학이 일어난 것은 1919년에 시작된 중국은 5·4운동 안에서 시작 되었다.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고고학은 서양의 영향으로 발전하게 되었 다. 중국에서 첫 야외조사는 서양학자들이 실시하였고 중국인 최초 야외조서는 리지 가 발굴하였다. 리지는 은허에서 상나라 후기 유적을 발굴하였다. 안양 은허에서 발굴 된 자료들은 후기 상 왕조와 관련된 자료들로서 중국이 자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리지는 중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려 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궈모 뤄는 사회를 중시하였으며 세계적인 비교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중국의 서술하려 하였 다.

중국이 국가의 지도를 받은 것은 1949년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이다. 러시아와 마찬 가지로 고고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정부에서 고고학을 후원하였다. 그래서 많은 지방과 소지역의 박물관을 운영하기도 하였고, 유물들을 다양하게 전시를 하게 되었 다. 중국의 문화변화는 마르크스주의와 어울려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라는 단 선진화적인 발달단계로서 사회중심으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고고학을 중국 정부에서 지원을 하고 관리를 하면서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정부가 원하는데로 해석되었다. 또 한 중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사회적인 면에서 보면 마 르크스주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문화사적인 접근을 하고 있었 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이전에는 중국 고고학은 중국의 민족의 통일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 용되기도 하였다. 중국의 문명은 황하에서 진화하고 황하에서 확산되어 철기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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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고 해석되었다. 그래서 황하지역의 민족적 특성만이 우 월하다고 생각되고 다른 민족들의 문화적인 창의성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지방에서도 고고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그 지방의 특성을 이해 하고 인정해 주었다.

·인도의 문화사고고학

인도는 오랫동안의 식민지화로서 학문적인 것에 도태되어 있었다. 그래서 인도에 있는 기념물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은 17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인도 북부의 근대 언어가 유럽의 인도유럽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직 까지 식민지화로 진행되고 있던 나라에서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유럽인들의 언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유 럽민들과 생물학적으로 비슷하다는 추측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의 고고학자들은 인도의 기념물들을 조금씩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1861년에 인도고고학 조사국이 설립되고 나서 알렉산더 커닝햄과 존 마셜에 의해서 엄청난 양의 고고학 발 굴조사가 이루어지고 보고서도 출간되었다. 휠러는 서양의 야외고고학 조사방법을 인 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독립 이후에 고고학 발굴조사에 정부가 적적하게 재정을 지원해 주었다. 중국에 비 해서 인도의 정부들은 고고학자에게 발굴을 억압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 도의 고고학자들은 자유롭게 발굴조사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고학자 들은 문화의 과정을 설명하기보다는 특정 문화에 대한 종족이나 언어를 확인하는 일 에 그치고 말았다.

인도의 정치가 힌두민족주의가 강해지면서 고고학에도 변화가 생겼다. 힌두민족주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화변화를 인도 외부에서 찾으려 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 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북쪽의 유럽민들에게 기술적인 문화들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 니라 인도 내부의 자체적인 발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차크라바 르티는 종족성이 고고학에서 보이는 문제점은 아니며, 인도의 다양한 종족들을 통일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인도 내부에서의 문화가 변화하 였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인도의 문화가 외부에서 기원하지 않았다는 것과 인도 자 체 내의 창의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랍의 고고학

아랍에서의 고고학은 각 지역의 고대 문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이집트의 중간계급들은 고대 이집트문명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고대 이집트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모두에게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상징의 역할을 했기 때 문에 중간계급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때 파라오의 모티브를 가진 것들은 독립의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란에서는 페르시아 민족성이 아직도 남아있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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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이란의 고고학 발굴조사는 외국의 조사단들이 행하였다.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고고학 조사가 거의 쉬고 있었고 이후에 다시 수행되 었을 때는 이슬람시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고고학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문화사고고학은 다른 아시아의 고고학보다 복잡하게 전개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팔레스타인에서의 고고학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주로 성경에 입각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성서고고학자들은 성서의 진실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팔레스타인에서 고고학 발굴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이스라엘 고고학은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면을 가졌지만 성서가 고고 학의 주된 목적은 아니고 국가지향적인 성향이 많았다. 즉 종족성에 목적을 두고 국 가를 더 굳건히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민족주의 고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유대민족국가를 설립하기를 원했던 시온주의자들은 고고학을 시온주의의 상징으로 여 겼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높이기 위해서 고대 히브리유적들을 발굴하 였다. 또한 취락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생각하여 발굴되었다. 이스라 엘의 고고학은 시온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로 유대인의 취락과 문화를 연구하는데 관심 을 두었고, 기독교나 이슬람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국 고고학자 윌리엄 디버는 성서고고학을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으로 대체하 고자 한다. 이스라엘 고고학은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강하였지만, 팔레스타인 고고학 은 모든 사람들의 행위의 결과인 유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9. 아프리카와 멕시코의 고고학

·아프리카 고고학의 어제와 오늘

1960년대에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이 식민이 해방되면서 고고학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아프리카의 고고학자들은 다른 지역의 고고학자들과 같이 구석기고고학보 다는 문헌기록이 남는 역사시대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주요 관심은 경제적인 관계나 교역 등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아프리카의 고고학자들은 고고 자료를 통해서 민족의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정 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할지도 생각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인류학은 학문으로 인정이 잘 되지 않았는데 고고학은 역사학과 함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고고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민족학은 사회학으로 재정립되면서 아프리카인들은 구 비전승이나 역사언어학에 대한 관심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아프리카인 들은 문헌자료를 이용할 수 없는 시기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고고학은 식민 주의적이라고 보다는 아프리카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 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이러한 고고학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식 민주의적인 성향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배가 끝난 뒤에 고고학 을 지배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고고학이 아니라 신식민주의 고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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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고고학

멕시코 고고학은 1910년 스페인에서 레오폴도 바트레스의 테오티우아칸 보존 프로 젝트에서 시작하였다. 멕시코에서 오랜 독재정치가 원주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끝 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식민지 시기동안의 원주민들과 높은 계급들간의 불평등 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국가에 통합시켰다. 또한 선 히스패닉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를 후원하며 이 문화유산을 멕시코의 일부로 인정함으로써 원주민들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멕시코 정부는 대중 박물관을 만들고 주요 지역의 고고학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였다. 멕시코 고고학은 멕시코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통합 하여 국가적 통일성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지역적인 문화의 연구로 인해서 재정 부족 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민족주의 고고학

일본, 중국, 아랍,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등의 민족주의 고고학은 문화사고고학과 관계를 보여준다. 모두 고고학적 기록에서 특정 국가나 민족에 대해서 추적하는 것이 다. 그리고 이들의 국가들에서 보여지는 고고학 유물들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보여주었다. 또한 발견물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보이 는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0. 미국의 문화사고고학

미국에서는 1910년 이후 고고 자료 자체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문화사적인 접근을 받아들였다. 고고학은 보아스 학파의 문화인류학에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에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국가적인 문제점으로 드러나면서 보아스 학파가 학문적으로 큰 인정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보아스 학파는 각각 다양한 문화들을 전체적으로 하나로 통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아스 학파는 문화상대주의와 역사특수주의라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아스와 그를 지지하는 연 구자들의 활동으로 북아메리카로 확산되면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고고학 해석이 유사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문화변화가 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를 단순히 대체하게 되었다는 고고 학적 해석은 계속적인 고고학 발굴 조사를 통해서 한계가 드러났다. 1927년 뉴멕시코 주의 폴섬 유적의 플라이스토세 말 퇴적층에서 고 인디언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 데, 이 유물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서 살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 분명해 졌다. 그래서 기술이 발달되 어 있던 문화가 덜 발달된 문화가 있는 지역을 점유하면서 그 문화를 대체했다는 관 점은 문화변화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유적을 통해서 문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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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에서 다른 문화가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발달이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보아스 학파의 문화상대주의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19세기 동안 미국의 중부지역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 기록을 그 자체로 인식하기보 다는 지리적으로 분류하려고 하였다. 문화들을 지리적으로 나눈 것은 시간적인 흐름 으로 편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래도 지리적인 것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서남부의 문화사 고고학

1913년 미국의 민족학자 버트홀드 로퍼는 미국고고학의 문제점으로 편년을 수립하 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미국의 서남부 지역에서 북아메리카 문화에 대한 체계적 인 연구는 넬스 넬슨과 앨프리드 키더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넬슨은 1914년에 뉴멕시 코 주 산크리스토발 푸에블로 유적에서 층위발굴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위고 오베르 마이에르와 앙리 브뢰이와 함께 스페인의 구석기 유적과 카스티요 동굴에서 층위발굴 을 하였다. 1915년부터 키더는 뉴멕시코 주의 페코스 푸에블로에서 폐기층을 발굴하 였는데, 퇴적 단위에 따라서 유물을 수집하였다. 넬슨과 키더는 이러한 퇴적층을 통해 서 유적들이 상층에서 하층으로 가면서 규칙성을 가지고 변화한다는 것을 발견하였 다. 그들은 이러한 토기의 변화는 점차적으로 발달한 결과라고 하였다. 토기의 변화가 문화가 연속된다는 것과 내부적인 곳에서도 문화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가 되 었다. 이러한 넬슨과 키더의 발굴 조사는 미국에서 문화사고고학이 발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키더는 『미국 서남부 고고학 개설』이라는 책에서 전 미국의 고고학적인 문화사를 지리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미국 전 지역의 아홉 개의 수계에서 나온 고고 자료를 배스킷메이커, 후배스킷메이커, 선푸에블로, 푸에블로 라는 네 가지의 문화로 나누었 고, 단계를 설정하였다. 이 시기를 문화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나 아홉 개의 수계와 연 결되어 있는 지리적인 차이를 감안하여 치우아우아베이신 문화, 밈브리스 문화, 힐라 하류 문화 등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키더는 문화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언급하 지 않았는데, 1925년 이전에 영국에서 문화라는 개념이 사용된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도 문화라는 개념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제한되어 분포 하는 고고 자료들을 문화 또는 문명이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개념이 미국 서남부 지역에서 의미를 가지지는 못하였지만, 지리적인 차이의 분류로 고고학 문화라는 개념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

키더의 연구에서 가장 큰 관심은 편년에 관한 것이었다. 키더가 지리적인 변이로 분류한 문화가 1927년에 페코스회의에서 몇몇 고고학자들이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글래드윈은 페코스 회의에서 채택된 이 분류가 서남부지역보다는 북쪽 지역에서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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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글래드윈과 그의 부인인 위니프레드 글래드윈은 페코스 지 역에 알맞은 체계를 제안하였다. 글래드윈의 체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분류는 세 가지 였는데 미국 서남부 북쪽의 베스킷메이커, 남쪽의 호호캄, 그리고 그 사이의 산악지대 인 카도안으로 나누었다. 이 세 가지 분류를 뿌리라고 부르고 뿌리는 다시 줄기로 세 분화하고 가지와 단계로 나누어서 더 구제적인 지리적 명칭을 부여하였다. 이 분류 안에서 각각의 유물들은 높은 유사성을 가지는 정도로 분류되었다. 글래드윈은 이 나 무분류를 통해서 뿌리는 줄기보다 먼저 앞선 것이고 줄기는 가지보다 앞선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먼저 선행되었다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미국의 고고학자들과는 다르게 집단이 그 지역에서 내부적으로 기술이나 문화가 계속적으로 발달하여 변화하 였다고 생각하였다.

글래드윈의 체계보다 더 영향력이 컸던 것은 윌리엄 맥컨이 제안한 중서부분류체계 이다. 미국의 중부와 동부 전역에서 오랜 시간동안 점유하는 것을 보여주고 층위를 가진 유적들이 드문 지역에서 유물들을 형식 분류하였다. 한 유적에서 한 시기의 퇴 적층에서 보이는 유물들은 ‘성분’이라 불렀고, 유물들이 거의 동일한 성격을 가진 것 들은 ‘초점’, 압도적으로 많은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는 초점들은 ‘양상’, 양상보다는 아주 일반적인 특성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단계’, 그리고 특정한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단계들은 ‘유형’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분류체계로 아케익 시대가 정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접근법은 보아스가 말하였던 역사특수주의의 개념과 일치한다. 각 문화는 특징적인 발달과정의 결과이고, 이러한 문화들은 무작위한 전파로 인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하나의 통합된 것이 아니라 무작위한 전파로 인해서 다양한 특성들이 모인 것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문화들의 특징들을 설명하는 것은 오로지 전 파로 설명되었고 인간행위에 대한 것은 포함되지 않았고, 유물들의 기능적인 면도 포 함되지 않았고 다른 특징을 가진 유물들의 빈도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일한 문화에 속하는 매장 및 주거지 유적들에서 유물형식들이 다르게 발견된다는 점을 알 게 되었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단순히 유물들의 성분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한 민족의 문화를 보여주는 특징적인 유물에서 보이는 특성들을 분류해서

‘초점’을 설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는 모두 문화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문화사적으로 고고 자료를 분류하는데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글래드윈의 체계는 문화들이 나무의 유형과 같이 뿌리와 줄기, 가 지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는데 전파로 인해서 각 문화들이 혼합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 하지 못하였다. 중서부분류체계의 연구자들은 초점과 단계를 통해서 문화를 분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두 분류체계는 한 지역에서 보이는 형태적인 차이 는 시간의 차이로 나타난다고 보았는데 여기서 보이는 문화들은 동시기에 광범위하게 분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체계를 채택하였던 많은 고고학자들은 많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은 공통적인 기원, 역사, 종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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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유물들에서 보이는 유사성들은 세부적이어서 공유되기 어려운 특성을 가진 것들 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면 코카콜라 병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코카콜라 병이 아슐리안 주먹도끼보다 더 오래전에 사용되었다 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중서부분류체계는 객관성과 정 확성을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미국고고학에서 인디언들의 부정적인 시각에 도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파와 이주를 통한 문화변화의 설명

코카콜라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같은 잘못된 이해는 그렇게 오래 존속되지 못하였 다. 글래드윈 체계와 중서부분류체계의 일부 시기들은 폐기되고 고고학 문화는 모자 이크처럼 구성되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유물 형식뿐만 아니라 문화도 전통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문화에서 특정 지역에서 유지되거나 많은 지역에서 문화들이 공통되게 형성되면서 확산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이로써 각 지역의 문화 편년들이 수립되었고, 각 문화안의 물질문화들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안에서 전파가 문화변화의 주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파론적인 시각은 보수적인 시각에서 사용되었다. 토기나 금속기 등의 발달은 동아시아나 메조 아메리카에서 기원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러한 해석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창의성이 있다기보다 모방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문화상대주의와 역사특 수주의로 인해서 원주민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관점은 폐기되었지만 아직 원주민에 대 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문화사고고학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을 보여준 것은 고든 윌리와 필립 필 립스의 『미국 고고학의 이론과 방법』이다. 이것은 이전에 고든 윌리와 필립 필립스의 논의가 가장 많이 되었던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문화사 종합”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였던 것은 ‘성분’과 ‘단계’였다. 그들은 지점, 권역, 지역이라는 세 가지의 단위들을 정의하였다. 이들은 문화들을 연결하는데 ‘전통’과

‘평면’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모든 고고학 문화들을 경제와 정치의 범주안에 있는 것 으로 생각하고 석기, 아케익, 형성, 고전, 후고전 시대라는 다섯 개 단계로 배열하였 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독자들에게 미국 문화사고고학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미국고고학의 유럽에서 이미 체계화된 방법론을 전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새 로운 부분을 만들어 내었다. 미국고고학이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기 존에 있던 편년의 변화들을 지리적인 변화들로 대체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럽 에서는 문화사고고학이 지역 마다 다르게 나타났지만 인종주의적인 관점은 공통적으 로 나타났다. 미국에서 인종주의적 관점은 문화상대주의와 역사특수주의로 인해서 폐 지되어 고고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지만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완전 히 사라지지 못하였다. 미국의 문화사고고학은 새로운 방법과 체계들을 발견하면서 이를 고고학적 기록과 연결시키기 위해서 기존의 생각들을 아주 약간만 변화시키는 정도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방법론에 있어서는 유럽보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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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식민주의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들 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등과 같은 백인들의 정착지에서도 발생했다.

11. 기술 발전: 발굴법과 방법론의 성장

선사시대의 고고학적 기록을 해석하는데 문화사접근방법론을 채택하면서 고고학 발 굴 방법에도 많은 발달이 있었다. 이것은 층서법, 순서배열법, 형식분류에서 확실히 나타났다. 그리고 선사고고학자들이 역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화뿐만아니 라 편년의 변화에 대한 것에 세부적인 고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발굴법의 발달

선사고고학에서는 세밀한 방법이 늦게 발달하였다. 왜냐하면 1870년대까지 진화론 에 영향을 받아 유럽인은 우월하고 원주민들은 열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에 원주민이 살았던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아주 표면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선사고고학 분야에서 피트리버스는 예외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다. 그가 처음부터 고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장군으로서 영국 군대의 새로운 총기 선택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총기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인류학에 관심 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민족지 수집품을 모으면서 자신의 연구를 선사시대 자료에 까지 확장을 시키고 싶어했다. 그러나 영국의 유적들은 선사시대의 한 시기 이상의 고고 자료를 포함하고 있고, 이러한 유적들을 발굴 조사할 때는 서로 다른 시기들을 확인하면서 발굴 조사를 해야 유물들을 제대로 고찰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그 래서 그는 직각으로 도랑을 파고 수직으로 파내려가면서 층위를 기록하고 유물들을 층위별 맥락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법을 사촌에서 물려받은 크랜 본 체이스지역의 땅을 물려받고 그 지역에 있던 많은 유적들을 이 방법론을 이용해서 발굴하였다. 피트리버스가 사망하고 그의 지도를 받았던 보조원 아서 불라이드와 그 레이는 1892년에서 1911년까지 글래스톤버리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이를 기록에 남겼 는데 1970년대에 들어와 주거지와 건축 레벨에 관한 정보를 다시 분석할 정도로 아 주 자세하게 기록에 남겨졌다. 이런 사실은 피트리버스의 발굴법이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다시 파악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발굴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트리버스의 발굴법을 채택하면서 자신의 발굴법은 완성한 고고학자는 모티머 휠 러이다. 그는 1921년에서 1937년까지 이어진 발굴조사를 통해서 자신의 발굴법을 완 성시켰다. 그는 유적에서 사각형 그리드를 설치하고 발굴둑을 남기고 그것을 자세하 게 기록하였다. 휠러의 발굴법은 평면적인 것보다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아는데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순서배열법의 개발

순서배열법 또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발달하게 되었다. 순서배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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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리에 의해서 발달하게 되었다. 페트리는 이집트 유적에 대해 명문 기록을 통해서 연대를 추정하였는데, 이집트 남부에서 명문이 없는 공동묘지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비슷한 기형들에서 양식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 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적인 변화는 무덤이 장기간 사용되었다는 사 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덤들이 층위도 존재하지 않고 장기간 사용되 었다면 확장된 증거가 있을 만도 한데, 그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페트리는 이 공동묘지에서 나온 토기를 아홉 개 집단으로 나누고 수백 개의 형식으로 다시 분류를 하였다. 그리고 다섯 개 이상의 형식을 포함하고 있는 무덤에서 어떤 형식들을 포함 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가장 많은 형식이 있는 것을 순서배열하였다. 결국 페트리는 무덤들을 절대연대를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계기연대”를 이루도록 50개로 구 분하여 배열을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페트리는 자신들이 분류한 토기의 분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유행이 되었다가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였다. 즉 토기들 이 발생하고 그 토기의 기형이 많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있었고, 다른 족속이 들어오 면서 유행하던 토기가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페트리의 분류를 표로 그려 보면 전함형을 그리고 있다고 하여 전함형곡선을 이룬다고 말하기도 한다.

1915년 앨프리드 크로버는 주변에 많은 유적들이 존재하고, 그 유적마다 토기형식 이 다른 것에 주목하였다. 그는 18개의 유적에서 토기편들을 수집하여 세 개의 형식 으로 나눈 뒤에 각 형식의 빈도를 비교하여 편년을 수립하였다. 1930년대부터는 제임 스 포드가 크로버의 빈도순서배열을 이용하여 층위적인 발달을 보완하여 미시시피 유 역의 선사시대의 편년을 수립하는 토대로 사용하였다.

페트리의 발생순서배열법은 각 특성을 가진 유물들이 각 유구에서 얼마나 나오지는 에 집중하였다면 크로버의 빈도순서배열법은 페트리의 많은 수의 유물의 형식들보다 는 적은 수의 유물 특성의 빈도를 가지고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페트리의 방법론보 다 더 빨리 퍼지게 되었다.

·형식분류의 발달과 고고학 문화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더 체계적인 순서배열법이 발견되면서 유물의 형식분류에 있어서도 발전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몬텔리우스가 수립한 형식분류를 대부분 고고학자들이 받아들였다. 이러한 형식분류의 기존의 것에서 조금 다듬어져서 받아들 이거나 조금 더 첨부하여 자신의 형식분류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식분류 는 선사시대의 삶의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편년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 졌다. 그러나 고로드초프는 자신의 형식분류 틀을 발전시켜서 그룹으로 나누고, 각각 기능, 재질, 형태를 바탕으로 다시 형식분류를 하였다. 고도르초프에 이어서 프랑수와 보르드에 의해서 유물에 대한 형식분류가 편년을 세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유물 자 체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보르드는 유물집단에 대한 서술과 각각 유 물에 대한 서술을 구분하여 설명하였고, 유물형태에 대한 서술을 유물을 만들어내는 제작기법과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미국에서 유물에 대한 형식분류는 글래드윈 부부는 무역이나 교환같은 과정이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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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유물은 문화는 별개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은 토기 형식이 문화변 화의 주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관성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토기 변화를 신경 쓰지 않고 토기를 형식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항지정이라는 방법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토기 형식이 발견된 지리적 위치 를 지정하고, 두 번째는 툴라로사지역의 화이트샌드 위에 검은 무늬와 같은 색깔을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해롤드 콜튼은 토기의 성분을 비롯하여 더 구체적인 특성들에 근거해서 형식 분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임스 포드는 형식이란 단지 문화사를 해석하는 수단으 로 사용될 때만 인정될 수 있고 시공간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면 형식들을 나눌 수 없 다고 말하였다. 포드는 형식을 단지 역사적인 해석을 위해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이 후 토기 형식이 이를 제작하고 사용한 사람들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기능성과 유용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라우즈는 토기 형식 중에서 가장 밀집되어 있는 부 분에서 내재적인 형식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의 조사에서도 규 칙적으로 보였다. 이러한 형식들은 포드가 생각했던 형식들보다 인간생활과 문화변화 에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고고학 문화 개념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미국 에서는 중서부분류체계를 토대로 하여 개별 특성의 빈도수가 아니라 공유하고 있는 특성의 수에 근거하여 분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체계는 유물에 대한 기능적이 고 실용적인 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편년을 수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유럽에서는 기능적인 면에서 물질문화를 보려했다. 영국의 고고학자 차일드는 많이 사용되는 유물들은 광범위한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에 변화에 더 민감해서, 종족들간의 차이에서 문화들을 정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문화의 경계와 유물의 경계는 다르다고 보았다.

·문화복원에 대한 관심

선사시대의 집단들의 생활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와 연관되어 있지만 스칸디나비 아의 고고학 전통에 그 뿌리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스칸디나비아는 선사시대 사람 들의 생활양식에 관심을 두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패총이나 야영지에 대한 연구에는 관심이 없을 때 덴마크에서는 패총에 대한 연구가 이미 이루어지기도 하였기 때문이 다. 그리고 과거 생활양식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선사시대에 무시되었던 고고 자료에 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 이전부터 매장유적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졌는 데 이제는 취락 유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층위발굴이 아닌 대규모 발 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발굴조사에는 피트리버스의 발굴법이 도움이 되었다.

취락 유적의 기둥구멍을 통해서 나무 구조를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유물들이 유 적 어디에서 출토되었는지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였고 유물이 출토되는 유구들과 관 련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점차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지면서 파편이나 동식물의 유체도 연구를 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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