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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강경포구와 덕유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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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강경포구와 덕유정 1)

오석민|충남역사박물관장

머리말

금강의 중계포구였던 강경포구에는 덕유정이라는 활터가 있다. 그 활터는 1828년 이전 어느 시기에 건립되었고, 원래 금강 뱃길이 활발했던 시절에 상업활동을 감독 하였던 하급 무관들의 집회소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그 기능이 다 각화되면서 포구의 상업활동을 총괄하는 기구로 성장하였고, 나아가 지역공동체 의 의례와 공동 노동조직까지 감독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격변기였던 한말 개항기 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연합하면서 근대 교육에도 관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데 관련 옛 문서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덕유정 운영비를 조달했던 덕유 계의 성격이 변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활터의 건립 초기에는 운영비용을 전 담하는 조직조차 없었으나, 재정을 지원하는 덕유계가 결성되었고, 뒤로 갈수록 세세한 운영규칙들이 마련되었으며, 활터로서의 본연의 기능 외에 다양한 사회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보다 관심을 끄는 부분은 덕유계원으로 참여 한 인물들의 면면이다. 후대로 갈수록 전현직의 고위 관료들은 물론이고 기생까 지도 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덕유정이 상업 이외의 다양한 사회경 제적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상업의 발전이라는 사회적 변화 에 따라 일정한 변신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강경포구가 금강의 중계포구로 부상하는 배경을 살펴본 후에, 후

1) 이 글은 이미 발표한 두 편의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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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포구상업을 감독하였던 덕유정의 시기별 변화상을 추적해보고자 한다. 우 선 덕유계 좌목에 등재된 인물들을 분석하고, 좌목 이외의 다른 자료를 통해 해당 인물의 활동을 추적하고자 한다. 물론 덕유계 좌목에 등재된 계원 전체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일부 추적 가능한 계원의 동향 또한 단편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옛 문서 등에서 확인되는 그들의 행적만으로도 강경포 구의 상업경제와 지역권력, 나아가서 중앙 정계와의 연관성 부분을 파악하는 데 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 다만 강경포구가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도 급변하는 경 제적 상황 속에서 변신을 거듭하였으나, 필자가 확인한 자료상의 한계로 이에 대 한 논의는 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임진·병자 양난 이후 강경포구의 성장배경

조선후기는 일정 부분 상업이 성장하였던 시기다. 실제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을 거치면서 정부에서는 시장의 활성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들을 내놓기 시작하 였다. 돈(錢)의 사용을 권장하는 차원에서 주점(酒店)과 전시(錢市)를 거론하고, 상인(市井人)에게 전시 설치나 사사로이 포자(舖子) 설립을 허용하여 서울에서 전국 각지로 가는 주요 도로(直路)에 포자를 설치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돈의 유통을 위하여 우선 경기·황해도·평안도에 포자를 설치하는 정책이 시행 되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경상좌도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에서도 고기 잡 는 곳에 포자를 설치하였다가 폐지되는 일도 있었다. 상업이 이미 시대적 대세 가 되었던 것이다.2)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대량수송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뱃길 을 통한 화물의 유통은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금강에서는 강경포구가 중계포 구로 급부상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초기 강경은 어떠한 곳이었을까?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될 때까 지도 금강의 대표적 포구는 금강의 지천인 논산천변의 시진포(市津浦)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와 관련하여 장삿배가 모이는 곳으로 돛대가 연접 하고 사람들이 잡답하게 왕래하며 물화를 매매하기 때문에 시진포라 이름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강경은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작은 나루터에 불과하였다. 「동

2) 인조실록 31권, 13년(1635) 5월 28일; 같은 책, 13년(1635) 7월 14일; 현종(개수)실록 5년(1664) 윤 6월 13일;

같은 책, 윤 6월 22일; 같은 책 11월 5일; 같은 책 12월 2일; 같은 책, 9년(1668) 10월 6일; 효종실록 2년(1651) 7월 9일;

같은 책, 6년(1655) 12월 13일. 1670년 정초청(精抄廳)에서 군인들에 대한 포상으로 돈을 지급하고 포자에서 먼저 시험하게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11년(1670)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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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여지승람」에는 은진현에서 서쪽으로 26리 떨 어진 강경산(江景山, 지금의 옥녀봉)에 봉수대가 있었고, 이곳에 나루터가 있어서 임천군을 왕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강경포구가 조선후기 금강을 대표 하는 포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 을까? 여기서 일제강점기에 강경포에는 쌀 400 석을 실은 선박이 자유롭게 운항하였고, 반면 에 논산포까지는 200~300석을 실은 선박이 출 입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기요 람」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세곡선에 적재하는 양 이 800~1천 석이었으나, 실제로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던 점을 고려할 때, 강경포에 출입 하는 선박은 거의 조운선에 버금갔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대규모의 상품유통에 따라 쌀 400석을 실은 배가 출입할 수 있었던 강경포가 성장하여 주변의 기존 포구 를 압도했던 셈이다.

포자의 설치와 강경포구의 성장

강경포구의 등장은 조선후기 뱃길을 통한 상업 의 발전이라는 변화 속에서 가능했다. 강경포구 에는 1683년 훈련도감에 의하여 포자(鋪子 또는 舖子)가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에서 포구의 세금 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받았고, 별장(別將)으 로 하여금 관리하여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 게 한 것이다. 그런데 뱃사람(船商)들로부터 어 물을 싼 값에 사들이면서 문제가 불거졌고, 결국

조정에서 논의를 거친 끝에 폐지되었다.3) 외부 세력의 개입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725년 「영조실록」에는 원래 강경포의 세금으 로 은진현의 비용을 충당하였는데, 1689년 어의 궁(於義宮)에 그 권리를 넘겼다가 폐지하였고, 다시 어의궁에 예속시켜 은진현과 함께 거둔 세 금을 반으로 나누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 다. 훈련도감에서 포자를 설치하려다가 실패하 고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에 어의궁에서 수조권 을 확보하였고, 1822년 용동궁(龍洞宮)으로 넘 겨진 것이다. 이 권리는 1894년 광무개혁에 의 해 비로소 폐지되었다.

그런데 궁방에 의한 포구세 징수를 일방적인 수탈로 보기는 어렵다. 조선후기 각 포구에서 는 상선을 유치하려고 경쟁했다. 그런데 강경 포구는 용동궁에 포구세 상납을 전제로 독점적 거래권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조선후기 소위

주인권(主人權)에 의한 거래 독점이 그것이다.

강경포구의 경우, 독점적 거래권은 북어를 대상 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1808년 충청 도 수영(水營)에서 발급한 문서에는 1700년경 북어 상인(北商)의 독점적 거래가 인정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독점상인 6명으로 구성된 6주 인도중(六主人都中)이라는 일종의 협의체(都 中)까지 조직되었다.4)

한편 1867년의 완문(恩津江鏡浦北魚收稅完 文, 규장각 25069)에는 북어에 대한 세액이

원래 1,500냥이었는데, 1840년 상인들의 소청 으로 1천 냥으로 감액하였고, 1867년 다시 400

3) 숙종실록 9년(1683) 윤 6월 6일; 승정원일기 숙종 9년 윤 6월 6일; 같은 책, 숙종 9년 윤 6월 16일.

4) 이에 대해서는 이영호(1986)의 연구성과가 있다. 당시 강경포의 북상주인은 임석귀, 김홍엽, 김호명, 강우성, 김시옥, 김동철 등 모두 6명이 었다. 「충청수영관첩」 무진(1808년) 4월 27일(규장각 15122), 은진강경포북어수세완문(1867년, 규장각 25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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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을 감액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감액조치는 정치적 영향력에 의하여 좌 우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와 관련한 배후세력의 동향이 이 글의 초점 가 운데 하나다.

한편 1834년 4월 23일 은진현에서 발급한 문서(龍洞宮納恩津縣江景浦下陸物 種出浦物種定稅完文, 규장각 25134)에는 다른 품목에 대한 징세 규정이 실려 있 다. 강경포구에 하역하고 다시 다른 지역으로 나가는 각종 상품 및 선박에 대한 세금 징수규정을 담은 완문(定稅完文)인 것이다. 북어 외의 품목에 대해서도 세 금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다.

덕유계(德游契)의 성립과정

1. 용동궁 지배와 무인들의 집회소 덕유정

덕유정의 건립 시기는 확인할 자료가 없다. 덕유정의 소장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 된 1828년의 덕유계 서문에 정자를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 재물을 내어 계 (契)를 조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전에 건립되었으므로, 덕유정은 1700년 대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하급 무관들이 포구의 상업활동을 감 독하였으므로, 활터 운영을 위한 재원이 상인들에게서 나왔음은 익히 짐작하고 도 남는다.

그렇지만 막상 1828년 덕유계원들이 강경포의 상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 는 기록은 없다. 다만 1832년 강경포가 범람 피해를 입었을 때 상인들이 올린 등장(等狀)에 연명(連名)한 인물 가운데, 1828년 덕유계 좌목에 등재된 강문명 (姜文明)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5) 1828년 좌목에 오른 임영진(林英鎭) 또 한 강경포구의 대표적인 상인으로 보인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1839년 당 시 산송(山訟) 관련 문서 [임영진소지(林英鎭所志), 240654]에는 그가 120냥 (兩)의 거금으로 멀리 정산현(定山縣)의 임야를 매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46년에는 재원이 고갈되면서 접장 양사문(梁士文)의 주도로 신·구 계원 간 에 가입비의 차등을 두어 덕유계를 중수하였다. 그런데 당시 덕유계 중수를 주도한 인물은 모두 15명인데, 그 가운데 7인은 새로이 참여한 사람들이고, 전체 계원 58 명 가운데 15명만이 재가입했다. 일부 사망한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대대적인 재

5) 충청도 감영의 아관(亞官)에게 올린 등장이다. 文允仲等等狀(규장각, 235772). 참고로 강문명은 1846년 좌목 에도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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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성격의 변 화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 만 용동궁에 조세를 납부하는 북어 상인, 즉 북 상도중(北商都中)으로 덕유계에 참여한 첫 인물 이 이 좌목에서 확인될 뿐이다. 즉 강진호(姜鎭 顥)는 1822년 9월 용동궁에서 발급한 절목에 첨 부된 1830년의 수표(手標)에 북상도중의 자격으 로 서명했다.6)

그러나 이때까지도 덕유계원 가운데 관직에 있는 인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1828년과 1846년 좌목에 등재된 김교승(金敎 升)의 벼슬이 행첨사(行僉使)로 표기되어 있으 나, 다른 기록에서는 그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산직(散職)일 가능성이 높다. 결 국 강경포구는 17세기 중반 이후 금강의 중계항 으로 성장하였으나, 약 200년 동안은 용동궁의 비호를 받으면서 상인과 하급 무관들 사이에 일 종의 균형상태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 19세기 중·후반 정치권력의 개입과정

1870년의 덕유계 좌목에는 계원 명부만 기록되 어 있다. 그런데 1884년 좌목 서문에는, 1866년

현감을 지낸 김씨 성의 사백(前縣監金射伯)의 노력으로 500냥을 마련하여 다시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김씨 성의 사백이란 지금도 덕유정에 공 덕비(前縣監金鍾奎農武施惠碑)가 전하는 김종 규(金鍾奎, 1808년생)를 말한다. 1866년 좌목 에는 그가 전주(全州) 중군(中軍)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덕유정에 남아 있는 비문에는 전 현감 (縣監)으로 되어 있다.

김종규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일성 록」, 「승정원일기」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상인 출신으로서 정치적 중개인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짐작된다. 그에 대한 첫 기록은 덕유계에 참여하기 이전인 철종 2년(1851) 암 행어사 김유연(金有淵)이 전 충청도관찰사 조득 림(趙得林)을 탄핵하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살 펴보면, 조득림이 김상윤(金尙潤)을 비호하고, 김춘집(金春執, 김종규)으로 하여금 서울로 보 내어 수표를 바꾸어 거래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7) 그 이후에도 김종규는 조득림 이나 김상윤과 깊은 관련을 맺었다. 1862년 김 종규는 은진에 거주하는 전(前) 중군의 신분으 로 전 첨사(僉使) 김상윤과 더불어 각각 3,500냥 을 내어 민폐를 구제하였으며, 불과 8년이 지난 1868년(고종 5) 9월 25일에는 충청도의 연변 20 개소에 포소(砲所)를 설치하는 데 여산(礪山)의 유학 양희영(梁禧永)과 더불어 각각 1만 5천 냥 을 내었고, 이에 김종규를 수령에 제수하라는 지 시가 내려졌다. 다시 고종 13년(1876) 12월 17 일과 이듬해 8월 21일의 기사에는 전 중군 김종 규가 진휼을 위하여 1만 냥을 내었다고 되어 있 다. 그 결과 고종 13년(1876) 12월 17일에는 김 종규에게 구례 현감이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에 도 김종규는 6천 냥의 돈을 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2만 4천 냥을 조정에 헌납할 정도의 경제 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6) 公淸道恩津縣江景浦北魚收稅冊節目(규장각, 18288-7)의 帖紙 “庚寅二月十五日 前手標”. 본 절목은 북상주인 안성택과 용동궁 사이의 소송 과 관련된 것으로, 안성택의 주인권이 파기되고 유배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이영호(1986)의 논문에 자세하다.

7) 일성록 철종 2년(1851) 4월 2일 忠淸右道暗行御史 金有淵進書啓別單; 비변사등록 철종 2년 4월 5일; 철종실록 2년(1851)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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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김종규와 같은 혐의로 연루되었던 충청도관찰사 조득림은 1831년(순 조 31) 식년시에 급제하고,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 후에도 1855년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으며, 예조·형조·공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문숙(文肅)의 시호를 받은 인물 로, 중앙 정계에서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1862년 김종규와 함께 각각 3,500냥 을 내어 민폐를 구제했던 김상윤은 무과에 급제하여 적량 첨사(赤梁僉使)를 역임 하였던 인물이다.8) 김상윤은 무반 출신으로 상업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것 으로 보인다.

1870년의 좌목에는 김종규 외의 다른 계원들의 관력(官歷)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최인규(崔仁奎, 嘉善大夫, 五衛將), 김제석(金濟錫, 通政大夫), 황관보(黃寬寶, 出身), 최치열(崔致烈, 主簿), 공양기(孔良基, 出身), 김영집(金 泳集, 五衛將) 등은 다른 기록에서 행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서항순(徐恒淳, 五 衛將, 僉知) 또한 「승정원일기」 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되었으나, 현직에 임명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김우식만 1901년 하급 관리에 해당 되는 사자관(寫字官)의 직을 맡았을 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김종규와 같은 인 물을 통하여 덕유계에 참여한 다수의 상인들이 납속직을 받은 것으로 봄이 타당 할 듯하다. 포구경제가 성장하면서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얻은 상인층이 충청도 관찰사와 같은 고위 관직자와의 연망을 이용하면서 김종규와 일부 계원이 납속을 통하여 실직을 얻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덕유계에 참여한 상인들은 후대로 가면서 조정과 관련된 각종 이권 에 개입하는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1870년 좌목에 등재된 최원여(崔元汝) 는 1898년 흥양군(興陽郡)의 호포전(戶布錢) 5150냥을 탁지부(度支部)에 대납 한 사실이 확인되며,9) 서명여(徐明汝)는 1900년 다른 3인과 함께 다른 개인으로 부터 내장원 소관의 노전(蘆田)을 1,500냥에 불법 매입한 혐의로 소송에 휘말리 기도 하였다.10)

한편 1870년 좌목에서는 처음으로 기생 최옥희(崔玉姬)가 계원으로 참여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그녀의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41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음을 고려할 때, 예컨대 강경포구를 계방으로 거느렸던 공주목 의 교방(敎坊)에서 높은 지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33세의 진채선(陳彩僊, 관향:

8) 일성록 정조 7년(1783) 9월 4일; 같은 책 정조 9년(1785) 5월 4일.

9) 공문편안(公文編案)(규장각 18154) 44책.

10) 궁내부 내장원 편. 훈령조회존안(奎 19143) 13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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寧陽, 戊戌生) 또한 자(字)가 취련(翠蓮)이었다 는 점으로 미루어 여성으로 추정된다. 현재로서 는 그녀가 판소리사의 첫 여류명창 진채선(陳彩 仙)과 동일인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11) 이 후에도 기생의 덕유계 참여는 계속된다.

이렇듯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 덕유계 는 다양한 신분과 계층에 속한 인물들의 활동 이 중첩되는 장소로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 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1840년 1,500 냥이었던 용동궁 상납액을 1천 냥으로 감액하 고, 1867년에 다시 400냥을 감액한 것으로 보아 도 무방할 듯하다. 그 시기를 기점으로 덕유계에 참여한 인원은 더욱 다양화되었고, 운영방식은 향약과 유사한 방식으로 공식화되었으며, 덕유 정의 사회적 기능도 다각화되었다.

3. 상업권력의 성장과 덕유정을 둘러싼 갈등

1884년 덕유계의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1870년의 덕유계를 구계(舊)로 칭하면 서, 구 계원의 권리 자체를 배제하고 새로운 규정 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쫓아내는 규정을 삽입 하였다. 중수 이유로 재원 고갈을 들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다양 한 세부규정이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덕유계 에서 계방을 운영하고, 당산제를 주관하며, 두레 패를 감독하는 등의 일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공주목의 여러 기관에 계방(公州各廳稧 防)과 관련하여, 면중(面中)의 요청에 의하여 계 방의 업무를 덕유정의 장무(掌務)가 전담하게

되었다. 신증조(新增條)에는 지역의 당산제(堂 山祭)를 덕유정의 접장이 주관하고, 주변 농촌 두레패의 서열을 덕유정에 모여 정하도록 되어 있다. 좌목 말미에 신증(新增)으로 추기된 것으 로 보아 덕유정 중수 이후 지역 여론을 받아들였 던 것으로 판단된다. 계방의 업무를 전담하고 공 동체의 의례와 노동조직을 관장하였다면, 덕유 정은 이미 공동체를 통제하는 기관으로 성장하 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후대의 기록이지만 1897년 공 주부 관찰사 이건하가 내린 완문(完文)에는 덕 유정이 각종의 공무(公務)도 맡아왔던 까닭에, 어려움이 매우 많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업 무를 적시하고 있다. ① 전라도와 충청도에 걸쳐 있는 경운보(景雲洑)의 관리, ② 조세의 납부,

③ 서울 양반(京宰)의 도지 수납, ④ 하천의 제 방 축조, ⑤ 감영과 본부(本府) 각청(各廳)과 경 무청(警務廳)에 1년에 두 번씩 관례적으로 비용 을 내는 계방(契房)으로서의 업무, ⑥ 강과 산에 서 지내는 신에 대한 제향, ⑦ 감영과 본부 말단 실무자(校隷輩)들의 왕래 비용 부담.

그런데 사설단체가 준공식적인 기관으로 위 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사회적 지위 가 그만큼 높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1884년 좌 목에는 전·현직의 관료가 대거 참여했다. 먼저 그 현황을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그런데 이들의 행적을 보면, 단순히 상인들의 납속을 통한 신분상승의 목적 또는 지배층에 의 한 경제적 수탈로 해석하기 어려운 사례들이 적 지 않다. 먼저 사료를 통하여 확인되는 행적을

11) 신재효(申在孝)에게 판소리를 배웠다는 첫 여류명창 진채선과는 이름이 같으나,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여류명창 진채선의 출생연도는 1842년 또는 1847년이므로 다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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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문반 출신의 계원: 공주에 거주하는 서현보(徐賢輔)는 인일제(人日製)에 급제하여 장단부사를 역임하였던 인물이다.12) 조균하와 구연소 또한 군수 또는 부사 등을 역임한 관료들이며, 박태석과 강주형도 문과에 급제한 경우다.

② 무반 출신의 계원: 손응계는 수문장과 오위장뿐만 아니라 현감에 임명되 자마자 사직을 청하였으나, 1895년 전라도의 동학농민군 토벌 때는 적극적으로 초토영의 참모관으로 활동하였다. 송항진은 강경포구와 이웃한 전라도 여산 고 을 출신의 무반이다.

③ 상인 출신의 무반: 좌목에 행 초산첨사(行楚山僉使)로 등재된 유용준(劉龍 俊)은 실상 상인으로 보인다. 예컨대 1887년 4월에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

<표 1> 1884년 덕유정 계원의 주요 행적 1884년 좌목의 내용

기타 자료 성명 자(字) 본관 생년 특기사항

崔琮林 致明 全州 己酉 僉使 彌助項僉使

孫應契 仲三 密陽 癸巳 羅州, 五衛將 守門將, 五衛將, 僉知, 龍宮縣監, 湖南招討營 參謀官(동학군 토벌시)

康瑢九 錫甫 谷山 乙卯 五衛將

五衛將 加設, 僉知中樞府事 加設, 金城郡守, 嶺南金礦委員, 全羅慶尙南北道蔘政各礦督刷 官, 內藏院 捧稅官(정3품), 全羅南道 視察, 기타 전라남도와 경상북도의 觀察 또는 捧稅官 등으로 활동했던 기록 다수

宋恒鎭 士龍 鎭川 辛丑 行礪山府使 橫城縣監, 五衛將, 淸州營將, 礪山府使 趙均夏 平仲 豊壤 乙未 行厚昌郡守 慈城郡守, 厚昌郡守

崔鳳煥 星振 慶州 乙卯 五衛將

선공감 가감역관, 五衛將 加設, 僉知中樞府事 加設, 同知中樞府事 加設, 副司果, 司果, 機器 局 司事, 陽智縣監, 禮安縣監, 彦陽縣監 徐榮淑 敬模 扶餘 戊申 出身 昌德宮 衛將, 中樞院 議官

朴泰錫 春茂 密陽 辛丑 乙酉 式年 초시 입격, 충청남도관찰부 總巡 劉龍俊 漢汝 忠州 甲午 前五衛將

行楚山僉使 直赴殿試, 僉使, 分五衛將, 五衛將 具然韶 - 綾城 庚戌 行礪山府使 礪山府使, 甲山府使, 忠州營將, 橫城縣監,

중추원 이등 의관 徐相集 致敬 達城 乙巳

탁지부 典圜局技師, 駐箚日本國公使 隨員, 仁川 監理兼仁川府尹, 兼任仁川港裁判所判事, 稱慶 時禮式事務委員

徐賢輔 敬學 達城 - 公州 人日製 급제, 長湍都護府使, 中樞院 議官 劉翼烈 - 江陵 甲寅 學官 承文院 吏文學官, 副司猛

12) 고종실록 32권, 31년(1894) 7월 19일.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장계 등에는 “전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와 이존필(李存馝), 진잠현감(鎭岑縣監) 이시우(李時宇), 공주의 서현보(徐賢輔)와 신천서(愼 天瑞,), 감영의 아전 고복은(高福殷)과 서형쾌(徐亨快) 등은 모두 조병식의 매와 개가 되어 옥에 가두어 뇌물을 거두면서, 모든 것을 간섭하고 피해를 백성에게 끼쳤으니, 청컨대 모두 담당 벼슬아치와 관찰사의 죄상을 참작 하고 감안하여 처단하시기 바랍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동학농민혁명 자료총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 이터베이스(db.history.g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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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 衙門)으로 보낸 첩정(牒呈) 등의 자료에는 유용 준이 일본 상인(左伯榮二郞)과 상품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확인된다.13)

④ 세리(稅吏) 출신의 계원: 강용구는 오위 장, 첨지, 군수 등을 역임한 무반이다. 무반들이 주로 상업활동을 감독하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 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는 내장원 봉 세관의 직책을 포함하여 인삼과 탄광을 감독하 거나 각지 세금 징수와 관련한 직책을 주로 맡 았다. 본래부터 수세와 관련된 직책을 주로 했던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양상을 보면 상업활동을 배경으로 하 는 새로운 정치권력이 형성되었다는 인상을 지 울 수 없다. 상업적 경제력을 배경으로 기존의 정치권력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문·무반을 가 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덕유계에 직접 참여하면 서 상업적 이익에 접근하는 양상이다.

그리고 덕유정을 둘러싼 연망은 전국적인 규 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1884년 좌목에는 다른 지역에 거주하던 계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 다. 금강 상·하류의 임천(朴大淵)과 공주(朴 潤成, 李希俊, 李潤國, 徐賢輔, 白士吉, 鄭昌敎) 또는 금강의 지천인 함열천 인근의 전라도 용 안현 운교(尹相殷)뿐만 아니라, 나주(孫應契)

와 서울(徐相集)에 거주하는 인물까지 계원으 로 참여했다.

그 가운데 주목할 인물은 서울에 거주하던 서 상집이다.14) 단언할 수는 없으나, 그는 이영호가

한국형 매판자본가로 지목하였던 인물로 추정 되기 때문이다. 이영호(1986) 등 여러 연구자들 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서상집은 1883년 1월 인천항이 개항한 후 미국인 타운센드(W. D.

Townsend, 한자 이름 淡順)가 1883년 음력 12월 31일 설립한 순신창회사(順信昌會社)의 국내 대리인으로 활동하던 사업가였다. 그는 회사 설립 당시부터 사원으로 일하며 연안무역을 통 해 주로 미곡의 매집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울, 의주, 개성, 평양, 인천 상인들의 보증인 (保人)이 되었는데, 그 상인들은 국내 포구뿐 아 니라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는 무역상이었다. 당 시 그는 대리인으로 활동하면서도 동시에 독자 적인 영업활동을 하였고, 1895년 3월 공동회사 (公同會社)를 설립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세곡운 송 등 조정의 역할을 대행하는 국내에서의 경제 활동부터 홍삼무역에 이르는 국제교역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다고 한다.15)

서상집이 덕유계원으로 가입한 시점은 순신 창회사 설립 직후였다. 비록 강경포구는 순신창 회사와 비슷한 시기에 의주에 본사를 둔 의신회

<표 1> 1884년 덕유정 계원의 주요 행적

13) 仁川監理署牒呈 4(규장각 24492, 24493, 24494) 등.

14) 덕유계의 좌목에는 ‘徐相集’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다른 기록에는 ‘徐相潗’으로 확인된다는 사실부터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승 정원일기」 등의 자료에 두 가지 표기가 혼재되어 있어 동일인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영호(1986)는 오성(1998)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서상집이 1854년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인천항 축현리 외동 4통 6호라 하였으나, 1884년 덕유계의 좌목에는 을사년 (1845)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오성. 1998. “19세기 말 인천항의 호와 호주”. 한국근대상업도시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p37).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향후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15) 이후에도 서상집은 1897년 인천에서 신상회사를 조직하고, 1899년에는 대한천일은행에 투자하는 등 자본가로 변신하였다. 참고로 대한천 일은행은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상집은 또한 고종의 밀명으로 개화파 망명자의 동향을 파악하였고, 특히 유길준의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킨 사건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05년 한국이 보호국으로 전락하면서 개화파들이 귀국하였고, 이에 1906년 말 상하이로 건너가서 해운업에 종사하면서, 민영철·민영익·민영찬 등과 견줄 정도의 재력가로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러나 이러한 서상집의 정치·경제적 활동에 대한 상론은 피하고자 한다(이영호.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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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義信會社)에서 강경포에 지사를 두면서 그 유통권에 포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 나, 서상집의 덕유계 참여는 격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강경포구의 경제권을 장악 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개항이라는 격변기를 맞이하여 강경포구가 국제 적인 상업망에 포섭되어가는 단면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에 덕유계가 복설되면서 계원이 대거 교체되었다.

그리고 1884년 좌목의 외지인 10명 가운데 1890년 좌목에 등재된 사례로는 공주 의 이희준(李希俊)과 정창교(鄭昌敎)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대신 개치(盖峙) 의 조균하와 조탄하(趙坦夏), 화산(華山)의 김원식(金源植), 웅호(熊湖)의 최상 규(崔相奎), 서울의 박홍준(朴泓俊)과 성천영(成天永, 1890년 가입), 송(松)으로 표기된 백문수(白聞洙)·김재의(金在禧)·임덕명(林德明), 연산의 김종희(金宗 喜), 여읍(礪邑)의 김복암(金福巖), 공주의 박의진(朴宜鎭), 전라도 진도 북면 나동 (羅洞)의 최한준(崔翰俊) 등이 등장한다. 화산은 나암포가 위치한 전라북도 익산 시 망성면 화산리, 웅호는 웅포의 다른 이름으로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 웅포리, 여읍은 여산(礪山)을 가리킨다. 개치의 현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나, 광무 5년 (1901) 8월에 제주목사를 지낸 조균하가 내장원(內藏院)에 낸 소장에는 석성군 (石城郡)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16) 모두 강경 인근의 지역들이다. 원격지의 인물로는 진도의 최한준, 서울의 박홍준과 성천영, 송상(松商) 즉 개성상인 3명 을 확인할 수 있다. 고위 관직의 인물이 확인되는 것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단 언하기는 어려우나, 개항이라는 격변기에 새로운 대외적인 교섭망을 확보하려던 1884년 덕유계의 노력은 좌절되고, 이를 대신하여 개성상인 등으로 새로운 계원 을 충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맺음말

20세기에 철도와 신작로가 개통되었으나, 수로교통이 곧바로 쇠퇴하지는 않았 다. 오히려 초기에는 철도를 포함한 육상교통과 수로교통이 기능적으로 상호보 완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현실적으로 철도 또는 신작로는 포구 등 의 주요 상업거점을 연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부선 철도의 부

16) 충청남북도각군소장(규장각 19150). 그 내용은 전라도 용안(龍安) 고을의 개인 소유 초장(草場)에서 혼동하여 세금을 거둔 것에 대하여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단언할 수는 없으나, 원래 석성에 속하였다가 1914년 논산 군 성동면으로 편입된 개척리(盖尺里)의 이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척’‘개재’ 또는 ‘개자’라고도 한다.

참고로 조균하는 1890년 제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일성록 고종 27년(1890) 윤 2월 12일; 같은 책 3월 11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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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사는 강경포구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철도공사를 위한 자재가 강경까지 운반된 이후 에 소형 선박으로 옮겨 실려 부강까지 운반되었 기 때문이다.

한편 금강 뱃길과 경쟁관계에 있던 철도는 호 남선과 군산선이었다. 1910년 공사가 시작된 호 남선은 1911년 11월에 연산-강경 구간이 개통 되었고, 1912년 3월에는 강경-이리 구간과 이 리-군산 간 군산선이 개통되었다. 경쟁이 촉발 될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뱃길과 철길의 운송비에서 월등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강경포 구의 물동량이 급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 다. 이보다는 오히려 개항장으로 급속하게 성장 한 군산항의 발전이 변수가 되었다. 외국의 상품 이 유입되면서, 금강의 중계항으로서 강경포구 의 기능은 강화되었으나, 기본적으로 개항장인 군산항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조선후기의 변화상만 다루고자 하며,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서는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다만 이러한 급변 의 시기에 덕유정 자체도 변신을 시도하였다는 점을 지목해두고자 한다. 예컨대 덕유계원들이 근대적 교육 내지는 종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 선 것이다. 송현강(2009)의 연구에 의하면, 1905년 4월 윤경중(尹敬重) 등 덕유계원 22명 을 포함한 강경 유지 43명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덕유정을 임시 교사로 하여 보명학교(普明學校) 를 설립하였고, 1908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덕유계원 이관하(李寬夏)의 주선으로 북감리교 회가 덕유정에서 예배를 보았다. 이러한 변신을 하면서, 20세기 중반까지도 강경포구는 일정 부 분 상업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한국전

쟁으로 한강의 뱃길이 끊기면서, 특히 강경포구 를 통한 미곡의 반출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것 으로 판단된다. 이후 강경은 단지 젓갈의 고장으 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덕유정은 단순히 강 경에 위치한 활터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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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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