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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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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동유럽, 러시아 방면으로 발전 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 교회

• 정(正; 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 른 예배의 의미를 가진다

• 전례문서, 교회법에 따른 정식명칭은 정통 가톨릭 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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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동방교회 (Orthodox Catholic Church) 가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 Church)과 비교해 크게 구별되는 세가지 부분은 첫째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부분, 둘째 필리오쿠에(Filioque)에 대한 신학적 입장 셋째, 성상(icon)에 관한 입장으로 설 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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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사도교회를 계승했으며, 독특한 전례, 지역 교회들의 독자성 등을 특색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주요3분파들 가운데 하나.

• 동방정교회는 처음 7차례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정의된 신조와 관행을 따르는 그리스도교도들의 큰 단체이다. 동방정교회의 전례 문서 혹은 교회법 문서에서 사용되는 공식적인 명칭은 '정통 가톨릭 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이다.

•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1054)은 AD 1세기에 시작되어 중세기 내내 계속 되었던 점진적인 소원화과정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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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이 소원화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 정치적 사건들에서 비롯되었다. 4~11세기 동 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 이기도 했으며,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 이후 동로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이 동시에 발전했 고, 여기서 신학적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사도로부터 비롯되 었다는 개념에 입각한 로마 우위론은, 로마·안티오크·콘스탄티노플 등 지 역 교회의 중요성이 그 교회들의 수적·정치적 의의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 다는 동방 교회의 관념과 양립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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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서방에는 정치적으로 교황과 경쟁할 만한 황제가 없었 으며, 로마 제국의 몰락을 에워싼 문화적 혼란 상태와 관련된 문제들에 직면 하면서 서방교회는 공고화

• 콘스탄티누스가 330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교회가 동서방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되었음

• 395년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의 동쪽 지방과 서쪽지방의 관리를 별도의 지도자 들에게 맡김

• 서로마는 5세기에 붕괴하였으나 동로마는 명맥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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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동방교회는 동로마제국 황제의 사법권 하에 있었으나 서로마제국은 동로마보 다 혼란하여 서로마 황제가 로마 교황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음

• 서방교회는 교회의 정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정통교의를 작성하는 일 에 어려움이 없었으나 동방교회는 철학 분야 및 신학적 문제해결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 451년까지 일어난 신학적 논쟁은 대부분 동방에서 발 생

• 독신제도에 있어서 서방은 모든 성직자에 대해 독신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으 나 동방교회는 주교보다 하위성직자들에게 결혼이 허용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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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서방교회의 사제는 면도할 것이 허락되었으나 동방 교회의 사제는 반드시 수 염을 길러야 했음

• 서방교회는 라틴어 사용을 강조했으나 동방교회는 그리스어를 사용

• 필리오쿠에(Filioque) 논쟁은 양 교회의 분열을 가속화시킴. 서방 교회는 신조 에서‘필리오쿠에’(그리고 성자로부터)라는 구절을 삽입하였음.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왔고 그리고 성자(아들)로부터’란 구절을 그대로 유 지했으나 동방교회는 신학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여겨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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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726년 성화나 성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금 했고 730년 교회에서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성상과 성화를 없애라고 명령.

• 교황과 샤를마뉴는 거룩한 실재를 표현한 상징들을 사용하는데 찬성의 입장 을 보였으며 서방교회는 이 문제로 동방교회의 일에 간섭하여 양 교회의 대립 이 격화

• 서방교회는 성화나 성상의 사용을 지속하여 사용했으나 동방교회는 성상숭배 금지 이후 성상은 제거했으나 성화, 특히 그리스도의 모습을 담은 성화는 그 대로 유지. 그러나 성화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며 예배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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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교황 니콜라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성 이그나티우스를 지지했 으나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는 이그나티우스를 모욕하고 폐위시킨뒤 교회법 을 거스르면서 포티우스를 추대하여 교황은 조사단을 파견하고 이를 항의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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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교회(정교회)의 형성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미카엘 켈루라루스는 서방교회가 성찬식에서 발 효시키지 않은 떡을 사용한 것을 비난했음. 이에 대해 레오 9세는 훔베르트 추기경과 두 명의 교황 특사를 파견해 이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나 토론이 진 행되면서 견해 차이는 커짐

• 1054년 7월 16일 로마 교황의 특사들은 소피아 성당 제단에서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서를 올려놓고 로마로 돌아감

• 1965년 12월 7일 로마 교황 바울 6세와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였던 아테나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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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o da Padova; Marsilius of Padua; 1280- 1343)

•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 그의 평화옹호자론 (Defensor pacis, 1324)은 중세기의 독창적 정치이론 서로서 근대적 국가 개념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여러 가지 측 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의 선구자이자 마키아벨리적 국가론 및 근대 민 주주의의 창안자로 인정되고 있다.

• 교황권에 대항해 세속권력의 독자성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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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o da Padova; Marsilius of Padua; 1280- 1343)

• 파리대학교에서 잠시 교수와 학장을 역임(1312경~14)한 뒤 이탈리아에 돌아와 기벨린(황제파·반교황파)의 정치자문역을 맡음.

• 1320~24년 파리에서 〈평화옹호자론〉을 저술했고, 1326년 자신이 교 황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의 원작자임이 밝혀지자 1327년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4세의 뉘른베르크 궁으로 피신했고 곧 파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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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Marsilio da Padova; Marsilius of Padua; 1280- 1343)

• 마르실리오는 정치이론에 관한 소논문이자 정치적 반론이기도 한 ‘평 화옹호자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들을 토대로 세속적인 국가 개념을 전개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국가의 주요의무는 법규범 과 질서 그리고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며, 교계의 권한을 제한해서라도 개별 국가단위체는 보전되어야 한다. 모든 정치권력과 법규범의 원천은 국민에 있고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배자가 국가를 통치한다. 윤리와 교리에 대한 교회의 절대성은 평신도와 성직자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공 의회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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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증여

•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나병을 기적적으로 치료해주고 그리스도교에 귀의하 게 한 실베스테르 1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보낸 선물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현재 이같은 이야기는 날조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중세에 교황의 권 력 요구에 반대하거나 지지했던 사람들만이 이를 믿었을 뿐이다.

• 콘스탄티누스는 이 문서에서 먼저 실베스테르 1세와 교회의 주교들에게 문안 한 후 실베스테르가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해 주었고 자신이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로마 교회가 다른 모 든 교회들보다 우선하며 로마 교회의 주교가 교회 안에서 최고의 감독이라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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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증여

• 이와 함께 제국 전역에 있는 여러 지역, 라테란 궁 그리고 제국의 지위를 나타 내는 의복과 훈장을 수여했고 교황의 권리에 개입하지 않기 위해 콘스탄티노 플로 건너갔다는 언급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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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의 증여

• 이 문서는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5년 3월 30일자로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보낸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은 8세기 이후에 작성된 문서로 밝혀짐.

1440년 로렌초 발라가 750년경에 위조된 문서라고 주장.

• 750년 직후에 교황이 비잔틴 황제와의 결별을 정당화하고 이탈리아 내의 옛 비잔틴 영토를 프랑크족에게 넘겨줄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그들에게 입 증하기 위해 작성했다고 추측

• 나아가 교황이 현실 세계에서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서방의 최고 세속 군주여 야한다는 입장은 세속군주와 중세교회와의 중세의 정치적 갈등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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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중세에 대개혁을 단행한 교황(1073~85 재위).

•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주로 영적인 지도자였으며 교회의 여러 악습을 비난했다. 1075년부터 평신도 의 서임권(평신도 군주가 성직자들에게 상징물을 부여하는 권리) 문제를 놓고 황제 하인리히 4세와 대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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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그레고리우스 7세는 평신도의 성직임명권(세속군주들이 성직임명을 받는 사람들에게 성직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을 주는 권리)을 놓고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1050~1106)와 대립한 일로 가장 잘 알려짐.

• 실제로 그는 그 문제를 확대시킨 장본인이지만 원래 그의 관심은 무엇보 다도 교회개혁에 있었으며 세속군주들은 마땅히 개혁 작업을 뒷받침해 주 리라고 믿었다. 개혁의지를 갖고 있던 하인리히 3세(1017~56)가 뒷받침해 주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본 그는 젊은 황제 하인리히 4세와 함 께 교회개혁을 위해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를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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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1075년 12월 하인리히 4세에게 편지를 보내 성직임명권 문제에 대한 협상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독일에 파견한 사절들에게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공연히 그레고리우스 7세를 모 욕했으며, 자기편 주교들과 함께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 고 교황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 1076년 2월 22일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 북부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로 마 교회회의로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를 보냈다. "찬탈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된 하인리히는 이제 교황이 아닌 가짜 수 사 힐데브란트에게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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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이러한 문서가 교회회의에서 낭독되자 회의장은 분노로 들끓었고, 그레고 리우스 7세는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교황과 교회회의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교황은 하인리히 4세가 폐위되었음을 공포했다.

• 그레고리우스 7세는 메츠의 주교 헤르만에게 2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하인리히 4세에게 취한 행동을 변호했다. 즉, 황제도 교인이므로 교황은 그를 소환하여 해명하게 할 수 있으며, 성서와 교부들의 글, 그리고 역사 를 들어 자기 입장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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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파문은 효과가 있어서 하인리히 4세의 지지자들의 수는 줄어들었고, 지칠 줄 모르는 작센인들까지 다시 무장봉기했다. 유력한 제후들이 하인리히 4 세를 폐위시키고 다른 황제를 선출하려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제후들이 제안한 조건은 매우 혹독했지만 교황사절의 설득으로 좀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로써 하인리히 4세의 운명은 1077년 2월 2일 아우구스부르크 에서 열릴 제후들의 회의에 참석하는 교황에게 맡겨졌고,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 대한 반역을 철회하고 파문당한 그의 고문들에게도 사면을 빌도록 촉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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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전통적으로 지역주의가 강했던 독일지역은 독일 전 지역에 걸쳐 세력을 넓히려던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반발심이 컸고 작센인들과 하인리히 4세에 대한 다양한 적들은 교황의 파문조치에 환영

• 1076년 10월 독일귀족들은 교황의 조치를 환영하고 1077년 2월 새로운 황 제를 추대하기로 결정하며 교황은 아우구스부르크에 모일 새 회의에 초대 되어 독일의 정세를 논의할 것으로 결정

• 1077년 1월 말 교황이 아우구스부르크로 가는 도중 하인리히 4세는 교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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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가 평화를 위해 오는지 전쟁을 위해 오 는지 몰라 그레고리우스 7세의 지지자였던 베아트리체의 딸 토스카나의 백작령인 카노사 성으로 피신

• 하인리히 4세는 성문 앞에서 참회자로서 맨발로 서서 긍휼과 관용을 호소 함

•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7년 1월 28일 하인리히에게 관용을 베품

• 결과적으로 하인리히 4세는 정치적으로 승리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회의 는 무산되었다. 독일은 정치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됨. 반 하인리히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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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하인리히 4세에 반대하는 독일 제후들이 라인펠덴의 루돌프를 중심으로 하인리히 4세에 대항.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와 루돌프를 중 재했으나 실패

• 하인리히파 주교들은 새로운 교황으로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를 추대, 클레멘스 3세가 됨.

• 하인리히 4세는 로마를 정복해 클레멘트 3세를 교황으로 세움. 그레고리 우스 7세는 성 안젤로 성으로 피신했으나 라벤나의 기베르가 교황으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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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그레고리우스 7세(St. Gregory Ⅶ, 본명은 Hildebrand, 이태리어로 Iidebrando; 1073-1085재위 1020-1085)

• 세속군주와 부패한 주교들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당하였으나, 그가 교회 의 세속성을 비판하고 본질적인 입장에서 교회 개혁을 위해 매우 헌신적 인 노력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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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Ⅲ, 교황 1198-1216 재 위; 1160-1216)

• 재위기간 동안 중세 교황권의 명예와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제4차 십자군원정과 알비파(프랑스 이단종 파) 진압을 위한 십자군을 이끌었다.

• 성 도미니쿠스, 아시시의 성 프란키스쿠스(프란체스 코)의 추종자들이 건의한 사역을 승인함으로써 당시 까지 이단으로 간주되던 순회설교와 사도적 청빈을 합법화했으며,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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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11-12세기 교황제의 확립배경

• 11-12세기에 교황제의 확고한 체계가 잡히게 된것은 세속권력의 약탈로부 터 자신들을 지켜줄 최고의 보루로 여진 수도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임

• 또한 도처의 성직자들에게 실질적인 수혜를 준것은 교황의 수위권이었다.

교황의 수위권은 성직자들에게 안전한 재산권과 세속 권력에게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와, 폭력으로부터의 피난처와 복잡한 분쟁을 가라앉힐 수 있는 수단을 제공

• 교황의 수위권은 모든 성직자들에게 로마의 위대성을 입혀줌으로서 성직 자들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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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교황 1294- 1303 재위; 1235-1303)

• 서유럽, 특히 프랑스의 강력한 신흥 군주들 은 그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를 둘러싸고 그 에게 거세게 도전했다. 그가 교황으로서 이 룩한 업적 가운데 교회법 대전(Corpus Juris Canonici)의 제3부인 제6장 (Liber Sextus)을 발행한 일과 1300년을 희년으로 제정해 최 초의 성년으로 삼은 일은 불후의 업적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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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교황 1294- 1303 재위; 1235-1303)

• 1302년 우남 상탐(Unam Sanctam)의 교령을 발표해 로마 가톨릭의 영적권위가 세속적 권위에 우선한다고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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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교황 1294-1303 재위; 1235-1303)

•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맹렬한 공격은 당시 서방, 특히 프랑스의 민족주 의적인 신흥 군주들이 교황의 영적 지배권을 공개적으로 배척한 최초의 사 례였다. 13세기에 그가 교황의 충만한 권능에 대해 내세운 주장들은 전임 교황들이 내세운 주장들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이를테면 그의 주장들은 인 노켄티우스 4세가 내세운 주장들보다 온건했으며, 11세기의 대개혁가 그레 고리우스 7세 때부터 보니파키우스 자신의 시대까지 신학과 교회법 분야에 서 점점 정교하게 발전해왔던 견해들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 가 실패한 이유는 그가 새로운 견해 혹은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변했는데도 이 변화를 적절히 평가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기 때문 이다. 또 그의 성격에도 실패를 부채질한 요인이 있었다. 지적인 우월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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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권과 속권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ius Ⅷ, 교황 1294-1303 재위; 1235-1303)

• 그러나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이러한 개인적인 결점이 있었다고 해서 문서 위조, 중상모략, 협박, 교황 폭행 등을 저지른 필리프 4세와 그의 신하들의 잘못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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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파 알비파

• 12~13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발생한 카타르파 이단 분파.

• 알비파(카타르파)는 프랑스 남부 알비(Albi)에서 발흥되어 알비파라 불림.

마니교처럼 이원론자들로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온 것이라고 믿 고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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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파 알비파

• 오늘날 알비파에 관한 지식은 이들이 남긴 자료들이 드문데다가 내용이 부실하고 반대파들의 자료들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알비파 교리들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기란 매우 어렵다. 확실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 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대립하여 반(反)성직자파를 결성하고 당시 성직 자들의 부패를 끊임없이 비판했다는 점이다. 프랑스 남부에서 '선량한 사람들'(bons hommes 또는 bons chrétiens)로 알려진 알비파 신학자들 과 금욕주의자들은 언제나 소수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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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와 발도파 신자

• 12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 운동의 구성원들.

• 가난하고 소박하게 삶으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에는 초기 운동의 남은 구성원들이 스위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이 되면서 형성한 한 프로테스탄트 교회(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에 자 리잡은)의 구성원들에게 이 이름이 적용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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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

• 발데스(Peter Valdes, Valdo, Waldo라고도 알려짐)에 대해서는 초기 가톨릭과 발도파 의 자료들이 모두 빈약하고 신빙성도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 발데스는 상당한 재산가였으나 재산을 빈 민들에게 나누고 청빈한 사도적 삶을 실천 하며 설교함

•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이루기 위해 결심하고 사도적 삶을 살기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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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

• 그는 평신도로서 리옹에서 설교했으나 (1170~76), 정규 신학교육을 별로 받지 않 았고, 라틴어 성서가 아닌 다른 성서를 사 용함으로써 교회당국자들의 비위를 거슬 렀다. 로마에서 열린 제3차 라테란 공의회 (1179)에 참석하여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부터 청빈 서약을 승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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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와 발도파 신자

• 발도파의 설교에 감동된 사람들은 사도적 청빈이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 도의 명령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

• 이들은 스스로를 ‘마음이 가난한자’(pauperes)라 지칭하며 1179년 3 차 라테란 공의회때 설교허가를 호소했으나 로마 교회는 복음이 잘못 전달될 까 우려하여 승인하지 않음

• 발도파는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설교했음. 연옥 불인정, 연 미사, 보속 등에 반대, 단순한 성서주의, 엄격한 도덕, 교회의 부패 비판 등은 종교개혁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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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와 발도파 신자

• 그가 신앙고백서 (Profession of Faith)를 작성했고 정통 신조들로 구성된 진술서였으나 발데스는 교회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 나 그와 추종자들(pauperes: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단념하지 않고 계 속해서 설교하자, 리옹의 대주교는 그를 단죄했고, 1184년 교황 루키우 스 3세는 베로나 교회회의에서 공포한 칙서 (Ad Abolendam)로써 발도파 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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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파

피터 발도와 발도파 신자

• 발도파는 갖은 박해에도 청교도적인 청빈정신을 보존했고 종교개혁시 대 당시 종교개혁사상과 신앙을 수용해 완전히 개신교인이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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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분열

Ⅹ. Great Schism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 중세 말에 이르러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왕의 중앙집권화가 가속됨에 따라 교황권은 존립 기반을 상실

• 13세기 말 필립 4세가 잉글랜드가 보유한 가스 코뉴 공령의 쟁탈전에 필요한 전비를 마련코 자 국내 성직자에게 과세하려 하자 교황 보니 파키우스 8세는 교서를 발하여 반대, 필립 4세 의 지령을 받은 노가레는 교황을 아나니에서 납치

• 1305년 필립 4세의 지원으로 새로운 교황이 된 클레멘트 5세는 28명의 추기경을 임명하고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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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분열

Ⅹ. Great Schism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 단테는 클레멘스 5세를 혹평했는데, 그가 프랑 스에 굴복하여 필리프 왕의 조종을 받았고 하 인리히를 반대한 한편, 성직을 매매하고 교황 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는 이유에서였다. 단테 는 연옥편 (Inferno) 19편에서 클레멘스를 '법을 무시하고 추악한 일을 행하는 목자', '제2의 야 손'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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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Great Schism

4. 대분열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 아비뇽은 아직 프랑스의 왕령에 속 하지는 않았으나 그 세력하에 있는 도시로서 이후 교황은 프랑스왕권 의 지배하에 놓임

• 옛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를 비유하 여 교황의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of the Papacy,1309-1376)라 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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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Great Schism

4. 대분열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 1377년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가고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우르반 6세가 추기경회 의에서 선출되었으나 추기경들은 그와 대립

•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 트 7세를 선출하여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양분되는 초유의 사태 가 일어나고 교황의 위신이 실추되 기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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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분열

Ⅷ. Great S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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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황권의 약화와 후스

Ⅴ. Scolasticism

아비뇽 유수와 대분열

• 1377년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가고 로마 시민들의 압력으로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 우르반 6세가 추기경회 의에서 선출되었으나 추기경들은 그와 대립

•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 트 7세를 선출하여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양분되는 초유의 사태 가 일어나고 교황의 위신이 실추되 기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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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Ⅰ.Nominalism, Wyclif, Huss

5. 명목론, 위클리프, 후스

오컴(William of Ockham; 1288-1347)의 명목론 (nominalism)

• 근대 인식론의 아버지

• 중세 말에 활발히 일어난 보편자(공통적인 무 엇을 갖는 개별 사물들에 붙일 수 있는 단어) 를 둘러싼 철학논쟁에서 나타난 한 견해

•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부정.

• 교황과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회 는 교황이든 종교회의든 절대 무오류의 권위 없이 구성되고 본질적으로 독실한 신앙을 가 진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 보편논쟁을 통해 교황과 교회의 무오류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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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30-1384)

•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교수

• 교회의 부와 사치를 공격

• 교회재산은 세속적 권위의 배려로 유지되는 것이라고 하여 교회 재산을 탐낸 랭카스터 공 고온트등 영국 귀족의 환영을 받음

• 죄를 범한 성직자의 성사는 무효

• 성사 그 자체가 영혼구원의 본질이 아님

• 화체설 공격

•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는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서 구해야 한다

•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읽혀져야 한다

• 추종자인 롤라드는 헨리 4세와 5세의 박해를

5. 명목론, 위클리프, 후스

ⅩⅠ.Nominalism, Wyclif, Hu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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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목론, 위클리프, 후스

ⅩⅠ.Nominalism, Wyclif, Huss

후스(Jan Huss; 1372-1415)와 후스운동

• 카알 4세가 건립한 프라하 대학 내에 위클리 프의 지지자 증가

• 후스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고위성직자의 부와 세속성을 공격 하고 신앙생활의 핵심은 성경이라고 주장

• 1412년 나폴리왕과 대립중인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후스의 지지자에게 면죄부를 판매하 자 이에 항의하여 대학과 교회로부터 추방

•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짐

• 후스는 체코 민족주의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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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콘스탄츠 공의회

ⅩⅡ. Council of Constance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7)

• 대분열로 인한 혼란을 종식시키고 교회의 개 혁을 도모하기 위해 열린 공의회

• 종교개혁 직전의 공의회로서 근본적 해결에 미흡하여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

• 로마(그레고리우스 12세), 아비뇽(베네딕투스 13세),피사공의회 선출(요하네스 23세) 등 3명 의 교황이 있는 상태에서 분열을 해결

• 위클리프의 45개 조항과 후스의 30개 조항 단죄한 뒤 후스 화형

• 교황권의 우위 재확인, 대주교 권한 축소

• 7가지 개혁법령을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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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콘스탄츠 공의회

ⅩⅡ. Council of Constance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7)

• 공의회에 참석한 대표들은 정치적으로 심하 게 분열(이탈리아,잉글랜드,프랑스,독일 권)

• 교회의 전체공의회가 교황보다 높은 권위를 가진다는 사크로상타(Sacrosanta) 를 공포하 고 교회의 올바른 정치를 위해 공의회를 자주 열어야 한다고 공포

• 1417년 11월 공의회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함으로써 대분열 해결

• 콘스탄츠 공의회는 결과적으로 더욱 강력한 개혁조치에 소극적이었고 교회의 근본적 문 제를 해결하지 못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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