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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ificance architectural history of Goryeo-Sa-Haeng-Guan(高麗使行館) built on Myeong-ju(明州) of Song Dynasty(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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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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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명주(明州)에 건립한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의 건축사(建築史)적 의의

Significance architectural history of Goryeo-Sa-Haeng-Guan( 高麗使行館) built on Myeong-ju( 明州) of Song Dynasty(宋)

1) 이 용 준* Lee, Yong-Jun

Abstract

This preliminary study examines historical background of construction, establishment process, and destroy process for the Goryeo-sa-haeng-guan in Myeong-Ju during the Song Dynasty. The research was conducted based on local journals at that time.

The Myeong-Ju is one of the famous port cities for marine trade. The Myeong-Ju had a good relationship with the Goryeo.

Especially, the Song Dynasty built the Goryo-sa-haeng-guan for Goryeo envoys and traders to maintained a good partnership with Goryeo. A comprehensive review on records and historical issues of the Goryeo-sa-haeng-guan helps us to understand foreign policy and inter-relationship between Korean and China.

주 요 어 : 송, 명주, 고려, 고려사행관, 사관, 해상교류

Keywords : Song Dynasty, Myeong-Ju, Goryeo Dynasty, Goryeo-Sa-Haeng-Guan, Guest House, Marin Exchange

http://dx.doi.org/10.14577/kirua.2020.22.4.17

1. 서 론

우리나라와 중국은 지리적으로 근접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 간 동안 정치 및 경제, 무역, 종교,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광범 위한 교류관계를 형성해 왔다. 정치는 당대(當代)의 도성(都城), 종교는 각 종파지(宗派地), 무역은 각 지역의 항구(港口)가 중심 이 되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관(官)에서 민간(民間)에 이르기 까지 여러 계층으로 폭 넓게 확장되어 다양한 교류활동으로 이 어졌다.

한․중 양국의 교류는 불교(佛敎)가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전래되기 전부터 이미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시작 되었다. 불교 가 전래되었던 4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후에는 승려(僧侶)를 비 롯하여 유학생(留學生), 사신(使臣), 상인(商人) 등을 통해 다양 한 형식으로 교류가 이어져 왔으며, 고려(高麗)와 송(宋)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비속한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 다. 특히, 비속적으로 늘어나는 양국 사신들의 사행(使行)을 위 해 일종의 접객(接客) 시설로서 사관(使館), 역관(驛館) 등을 설 치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송 정부는 고려와 바닷길로 서로 통하 는 동남연해(東南沿海)의 항구도시 명주(明州)1)에 고려 사신들 이 머무를 수 있는 전문적인 시설을 마련, 운영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록 단편적이고 산발적이기는 하나 宋(송)『건도사 명도경(乾道四明圖經), (이하『건도사명도경), 宋(송)『보경 사명지(宝慶四明志), (이하『보경사명지) 등 당시의 지방지

*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공학박사

(Corresponding author : Cultural Heritage Adminstration, [email protected]) 1)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영파시(寧波市) 지역으로 북송(北宋)때 명주(明州)로

불렸으며, 별칭으로는 사명(四明)이라 하였고 남송(南宋) 중기에는 경원부(慶 元府)로도 칭하였다.

(地方志) 속에 묘사된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의 기록을 통해 서 확인할 수 있다2). 또한, 당시 사행단(使行團)의 성격으로 미 루어 볼 때, 사관 등의 시설은 단순한 체류 장소를 넘어 교역(交 易) 창구이자 교류(交流) 활동의 거점 공간으로 폭 넓게 활용되 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송대(宋代) 명주에 설치되었던 고려사행관의 건립 배경과 그에 따른 일련의 과정 등을 살펴보고, 건축사(建築史) 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2. 명주(明州)의 지리적 특징과 대외교류

2.1 지리적 위치와 특징

고려와 송의 교류는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서 진행되었다3). 이 시기 중국 대륙의 북방지역이 선․후로 요(遼)와 금(金)에 의 해 점유되었기에 육로(陸路)를 이용하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 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송 정부는 당시 중국 대륙의 동남연해 지역에 위치한 크고 작은 항구(港口)를 직․간접적으로 이용하였 는데,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는 명주와 천주(泉州), 복주(福州), 광주(廣州) 등을 들 수 있다〈Fig. 1〉4). 또한, 이들 도시 중 명

2)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을 비롯하여 ‘고려사(高麗司)’, ‘고려행아(高麗行 衙)’ 등 다양한 명칭을 확인할 수 있으나, 모두 동일 시설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이하 본문에서 인용한 지방지의 원문(原文)은 ‘寧波市地方志編纂 委員會, 寧波市志外編, 中華書局, 1998’에서 발췌, 정리).

3)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高麗史) 문종(文宗)12년8월의 기사에는 “왕이 탐라 와 영암에서 목재를 장만하여 큰 배를 건조함으로써 장차 송나라와 관계를 가지려 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이하 본문에서 인용한 고려사(高麗 史) 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기사 내용은 ‘경기대학교 한국건축사연구 실, 연표로 보는 고려시대건축, 2005(비매품)’에서 발췌, 정리).

4)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조선의 대외교류, 통천문화사, 2002. p.11.

(2)

주는 고려뿐만 아니라, 인접한 일본과의 교류에 있어서도 다른 도시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북송(北宋) 천골4년(天圣四年) 1026년에 일본 사신(使臣) 주양 사(周良史)라는 인물이 송으로 가는 경로를 살펴보면, 일본 열 도에서 출발한 배가 먼저 명주에 닿은 후, 다시 항주(抗州)를 경 유하여 운하(運河)〈Fig. 2〉5)를 이용해 도성(都城)인 개봉(開 封)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6). 이에, 서해 바다를 건너온 고 려 사신 역시 이와 동일한 노선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반대로 북송 사신들도 도성을 출발하여, 우선 명주에 도착한 후 바다를 건너 고려로 향하였을 것이다. 다시말해, 명주는 고려와 일본으로 오고 가는 경로상 중간 기착지로서 중요한 지리적 위 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절 요(高麗史節要), (이하 고려사절요) 등의 역사 기록들을 통해 서 확인할 수 있다.

Fig. 1. Overseas Exchange with Song Dynasty during Goryeo period

5) 郭沬若主編, 中國史稿地圖集(下冊), 中國地圖出版社, 1990, p.44.

6) 王冠倬, 中國古船圖譜, 三聯書店, 2000, p.160.

Fig. 2. Canal Map(Song Dynasty)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인종(仁宗)5년5월

∙ “…김부식 등이 송나라 명주(明州)까지 갔다가 마침 변주 (汴州)에 들어와 있는 금나라 군사를 만나, 길이 막혀 들어 가지 못하고…”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성읍(城邑)․봉 경(封境)》7)

∙ “…고려는 우리 송(宋) 수도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풍 연간 이래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 주(明州)의 정해(定海)에서 먼 바다로 길을 잡아 북쪽으로 나아갔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 고려도경)

은 북송 사신의 일행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저술한 일종의 견문록(見聞錄)으로 석 달이 넘는 사행(使行) 일정과 한 달 남짓 한 체류 기간 동안 보고 들은 것을 그림(圖)과 글(經)로 정리한 것이다. 특히, 여정(旅程)에 관한 내용은 당시 고려와 송 두 나라 의 지리적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에, 해도(海道) 즉, 바닷길의 기록을 통해 고려와의 해상 교류에 따른 지리적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려도경 권34《해도(海道)․초보산(招寶山)》

∙ “선화4년(1122) 임인년 봄 3월에 급사중(給事中) 노윤적(路 允迪)과 중서사인(中書舍人) 부묵경(傅墨卿)을 국신사(國信 使)와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고려로 가게 했다…”

∙ “…선화5년(1123) 계묘년(癸卯年) 봄 2월 18일에 임인일에 장비와 배를 재촉하여 갖추고…”

∙ “…14일 정묘일에 영녕시(永寧寺)에서 연회를 베푸셨다. 이 날 배를 타고 변경(汴京)에 나아갔다. 여름 5월 3일 을묘일 에 배가 사명(四明)에서 머물렀다…”

∙ “…명주(明州)의 청사(廳)에서 연회를 배풀었다. …16일 무

7) 이하 본문에서 인용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국역 내용은

‘조동원․김대식․이경록․이상국․홍기표 공역, 고려도경, 서울, 황소자리, 2005.’

에서 발췌, 정리하였다.

(3)

진일에 신주가 명주를 출발했다. 19일 신미일에 정해현(定 海縣)에 도착했다…이로부터 비로서 바다로 나아가는 입구 라 한다…”

위의 일련의 기록에 따르면, 도성인 개봉에서 사신 일행을 태우고 고려로 출발한 배가 명주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개봉을 떠난 배가 양자강(長江) 이남의 명주까지 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8). 다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명주에 대외무역 업무와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담당 하였던 시박사(市舶司)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9). 따라서 이곳에서 출경(出境) 절차를 마무리 한 사신 일행 들은 다시 정해현(定海縣)을 거쳐 비로소 바다로 나아가 고려로 향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2 대외 해상교류

명주는 오늘날 행정구역상 절강성(浙江省) 영파시(寧波市)에 속하며, 지리적으로는 중국 대륙의 동남연해안(東南沿海岸)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 해상교역이 비교적 일찍 시작된 항 구 도시 중의 하나로서 명주항(明州港)의 대외교류 역사는 약 1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먼 바다로 오고 가는 유 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이미 진․한(秦․漢)시기부터 어업과 항해술, 해상교통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 왔는데, 이는 주변의 다른 지역에 비해 해상교역의 중심적인 위치가 될 수 있었던 중 요한 밑바탕이 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오늘날 절강성 일대 지 역의 경제가 비속한 발전을 이루게 됨에 따라 중국과 일본을 연 결하는 중요한 거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오대(五代)에 이르러서는 일본과의 교역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본격적으로 고려와의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송(宋)․원(元)을 거 치면서 고려, 일본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는 데10), 당시 명주의 해상교역 정황은 아래의 기록을 통해서 충분 히 엿볼 수 있다.

『건도사명도경《분야(分野)》

∙ “…南則閩廣, 東則倭人, 北則高句麗11), 商舶往來, 物貨豊衍… ” 즉, 남쪽으로 민(閩, 오늘날 福建省)과 광(廣, 오늘날 廣東省), 동쪽으로 일본, 북쪽으로는 고려 상선들과의 왕래를 통해 교역 물이 풍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동남연해의 각 도시들 과 고려, 일본과의 빈번한 해상교역 중심에는 명주가 있었던 것 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조여괄(趙汝适)이 저술한

제번지(諸蕃志)12)의 기록 중 동남연해에 위치한 항구도시에 8) 정용석․김종윤, 선화봉사고려도경(완역), 움직이는 책, 서울, 1998, pp.32~33.

9) 倪士毅․方如金, 宋代明州與高麗的貿易關係及其友好往來, 寧波港海外交通 史論文選集, 中國海外交通史硏究會. 1983. p.91. 참조.

10) 王冠倬, 中國古船圖譜, 三聯書店, 2000, pp.53~279 참조. 또한, 고려사(高麗 史) 원종(元宗)9년6월 기사에서 “…순풍을 만나면 송나라에 2~3일이면 도착할 수 있고, 일본에는 아침에 떠나면 저녁에 이른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11) 고려에 대한 오기(誤記)로 보이는데, 이는 여러 역사책들을 채록하여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2) 제번지(諸蕃志)는 남송시기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와 아시아, 아프리 카, 유럽 각 국들과의 해상교류 및 교역물에 대한 내용을 서술한 기록물이다.

당시 천주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해상교통의 무역항 중의 하나이었으므로

서 고려로 향하는 선박들이 반듯이 명주를 경유해야만 하였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제번지(諸蕃志) 상권《지국(志國)․신라국(新羅國)》13)

∙ “신라국(新羅國)14)은 변한(弁韓)의 남은 종족이다. 이 나라 는 천주(泉州)의 해문(海門)과 대치하고 있다…흥판(興販) 하려면 반드시 먼저 사명(四明)에 왔다가 이후에 다시 출발 하는데, 혹 천주의 물살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반드시 사명 을 경유한다고도 한다…”

이는, 천주가 바닷길로 한반도와 마주보며 뱃길로 연결되어 있지만, 수세(水勢)가 점점 낮아지기 때문에 고려로 가기 위해 서는 수심이 깊은 명주를 반드시 경유한 후 다시 출발해야만 했 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천주 등 복건성 일대 각 지역의 상인 (商人)들이 고려와 적지 않은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Table 1〉, 이들 역시 상술한 이유로 인해 반드시 명주를 경유 지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밖에, 이 시기 명주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및 중동, 유럽 국가들과도 해상교역이 이 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어〈Fig. 3〉15), 명주항은 국제적 항구로 서의 면모와 위상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Fig.

4〉16). 특히, 앞서 살펴보았듯이 당대(唐代)부터 명대(明代)에 이르기까지 명주를 비롯한 항주, 천주, 광주 등 동남연해지역의 주요 항구 도시들에는 시박사를 설치하여 해상의 무역업무나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때 명 주의 시박사가 주로 고려와 일본으로 향하는 선박들의 업무를 관장하였으므로17) 결국, 명주는 고려와 송 두 나라의 해상 교류 에 있어 다른 항구도시들에 비해 절대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 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구분 기사내용

현종(顯宗) 20년8월

송나라 광남(廣南) 사람 장문보 등 80명이 와서 토산 물을 바쳤다

현종(顯宗) 21년7월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 노준 등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정종(定宗) 11년5월

송나라 천주(泉州) 상인 임희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 쳤다

문종(文宗) 13년8월

송나라 천주(泉州) 상인 황문경, 소종명과 의사 강조 동 등이 본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Table 1. Record of foreign exchange in Goryeosajeolyo(高麗史節要)

제번지는 남송시기 중국과 해외 각 국들과의 역사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저자 조여괄(趙汝适)은 당시 천주의 시박사(市舶司) 업무를 관장하였다(徐規, 宋代浙江海外貿易探索, 寧波港海外交通史論文選 集, 1983, pp.101~115.).

13) 박세욱 역주, 바다의 왕국들 제번지 역주, 영남대학교출판부, 2019, pp.283~284.

14) 제번지가 편찬될 때 이미 신라는 고려에 병합된 지 290년이나 되기 때문에 본 조목(條目) 역시 여러 역사책들을 채록하여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15) 郭沬若主編, 中國史稿地圖集(下冊), 中國地圖出版社, 1990, p.58.

16) http:/www./blneus.cnnb.com.cn.

17) 앞의 각주9) 참조. 이후, 청나라 정부에서는 근대적 시설로 해관(海關)을 창설하면서 시박사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4)

Fig. 3. External exchange of Southern Song Dynasty

Fig. 4. Myeong-ju Port Wharf ruins of Song dynasty

3.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의 건립과 소실

3.1 사관(使館)의 설치와 운용

고려와 송 정부는 빈번한 교류활동으로 인해 사신들의 사행 이 잦아지게 됨에 따라 이들의 접객(接客)을 위해 일종의 전문 적인 체류 시설18)을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운용되 었던 시설에 대해서는 여러 역사기록 등을 통해서 확인 수 있는 데, 먼저 고려의 상황에 대해서는 서긍의 고려도경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고려도경 권27 《관사(館舍)》

∙ “…제후국에서 사방의 빈객(賓客)을 대우하는 방식은 관사 (館舍)를 제공하는 것을 우선시 한다…그들이 세운 사관(使 館)은 규모가 화려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기까지 하니…”

『고려도경 권27 《순천관(順天館)》

∙ “…예전에 문종(王徽)이 이곳을 세워 별궁으로 삼았는데, 원풍(元豐) 연간에 조공을 한 이후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곳이 없었으므로 관사(館舍)로 바꾸고 순천(順天)으로 이름 지었던 것이다.”

즉, 서긍과 함께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일행이 순천관(順天 館)이라는 사관에 머물렀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19),

고려 문종이 세웠던 별궁(別宮)을 원풍년간(元豐年間) 즉, 송 (宋) 신종(神宗,1078~1085)대에 이름을 순천관으로 바뀌고 중국 사신들의 사관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밖에, 이 시기 고려에 설치 되었던 사신들의 접객 시설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이하

고려사)의 기사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Table 2〉.

18) 이에 대한 명칭으로 역사 기록에서는 사관(使館), 관사(館舍), 객관(客館), 역관(驛館) 등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편의상 사관으로 통칭하였다.

19) 고려사』의종(毅宗)5년2월 가사 내용 중 “…인종 때 송나라 사신 노윤적, 서긍이 왔을 때 부식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 조정에서는 김부식이 서긍 일행을 맞이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구분 관련 기사

현종(顯宗) 2년4월

영빈(迎賓), 회선(會仙) 두 관(館)을 설치하여 여러 나라 사신 들을 접대하였다

문종(文宗) 32년6월

송나라의 국신사 좌간의대부 안도와 기거사인 진목 등이 예 성강에 도착하였다…중추원사 형부상서 김제를 연반으로 삼 아 순천관(順天館)까지 영접하게 하였으며…

태자를 순천관(順天館)에 보내 송나라 사신을 인도하여 오게 하였다

인종(仁宗)

6년4월 왕이 대명궁(大明宮)으로 옮겨가서 순천관(順天館)에 들렀다 Table 2. Record of guesthouse installed in Goryeosa(高麗史)

먼저, 현종(顯宗) 2년 1011년에는 영빈관(迎賓館)과 회선관 (會仙館) 두 곳을 설치하여 송나라를 포함한 고려에 입경하는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맞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긍 일행이 머물렀던 순천관은 1078년 즉, 문종(文宗) 32년 기사 내용에 처음 등장하게 되며, 이후 인종(仁 宗)6년 기사에도 언급된 것으로 보아 최소 1128년까지는 존재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고려사 명종16년 6월 기사 중에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서면서 자기가 든 객관마 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20), 외국 사신들을 위한 사 관이 전국에 걸쳐 여러 곳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려에 입경 한 후 도성인 개경(開京)으로 향가는 길목 여러 곳 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송나라 정부에서도 고려 사신들의 숙박 등 편의제공을 위해 당시 배가 닫는 항구 도시에 이들 시설을 마련하게 되는데, 아래의 기록에 따르면 북 송 초기 등주(登州)에 사관을 설치하여 고려에서 온 사신들을 응대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권4 현종5년8월

∙ “… 송나라 황제가 등주(登州)에 명하여 해안에 관(館)을 설 치하여 대접하라고 했다”

등주는 오늘날 산동성(山東省) 봉래시(蓬萊市) 지역으로 오 래전부터 중국 동쪽 해안의 문호 역할을 하였던 항구도시로 알 려져 있다. 즉, 북송 초기에는 주로 고려에서 가까운 등주를 통 해서 육로로 도성인 개봉으로의 사행(使行)이 이루어졌지만, 거 란(요)이 요동 땅을 차지하게 된 이후로는 양자강 이남에 위치 가 명주가 고려와 일본으로 향하는 전문적인 항구로 이용 되었 다.

3.2 고려사행관의 건립과 의의

이렇듯, 명주가 고려와의 대외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 였던 항구 도시인 것을 감안하면, 사신들을 위한 접객 공간인 사관이 존재하였을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명주의 지리적 상황 등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한 건도사 명도경』(1169년)과 보경사명지』(1228년) 등의 기록을 근거 로 하면, 당시 ‘항제정(航濟亭)’과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으

20) 고려사(高麗史) 명종(明宗)16년6월 “…금나라의 횡선사인 대리경 이반이 우리나라에 왔다…그는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자기가 든 객관(客 館)마다에서…”

(5)

로 불리었던 적어도 2개의 시설이 존재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21). 먼저, 항제정이 고려사행관에 앞서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보경사명지《정해현(定海縣)22)

∙“…航濟亭, 縣東南四十步, 元丰元年建, 爲麗使住還賜燕之地.

建炎兵毁遂廢”

즉, 북송(北宋) 원봉원년(元丰元年)인 1078년에 명주 정해현 (定海縣)의 현성(縣城)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약 40보(步) 되는 위 치에 고려 사신들의 숙박과 연회를 위한 장소로서 항제정을 건 립하였으며, 건염년간(建炎年間, 1127년~1130년)에 전쟁 과정에 서 소실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송(宋) 정해현도(定海縣 圖)』상에서 이와 관련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는 없지만

〈Fig. 5〉23), 항제정은 최초 1078년 건립된 이후, 소실되기 전까 지 50여 년간 존재하였고, 이 기간 동안 모두 14차례의 고려 사 신들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24). 다만, 항제정의 구체적 인 역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위치한 정해현 이 먼 바다로부터 명주로 향해 들어오는 해구(海口)에 자리 잡고 있고〈Fig. 6, 7〉25), 또한 고려에서 바다를 건너 온 사신들의 최 종 목적지가 도성인 개봉이었으므로, 항제정은 일종의 중간 기 착지인 역정(驛亭)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상술한 지리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앞의 제번지

기록에서 천주와 고려를 오가는 선박들이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곳으로 언급하였던 명주는 곧 정해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고려도경 권34 《해도(海道)․초보 산(招寶山)》의 기록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려로 가기 위해 개봉 을 출발한 서긍 일행이 명주에 도착하여 여정을 푼 다음, 다시 정해현을 거쳐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기서 의 명주는 당시 치소(治所) 즉, 감영(監營) 등의 관청 소재지였던 은현(鄞縣)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아래의 기록에 따 르면 은현에 고려 사신들을 위한 사관 시설로 고려사행관을 설 치하였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21) 이밖에, 당시 명주에는 중동(中東) 및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위한 전문적인 시설로 ‘파사관(波斯館)’을 설치하기도 하였다(袁元龍, 洪可 堯, 寧波港考略, 〈浙東文化論叢〉, 中央編譯出版社,, 北京, 1995, p.180.) 22) 당시 명주는 치소(治所)인 은현(鄞縣)을 비롯하여 봉화현(奉化縣), 자계현(慈 溪縣), 정해현(定海縣), 창국현(昌國縣), 상산현(象山縣) 등 6개의 현(縣)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항제정은 정해현에 설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3) 이진한, 고려시대 무역과 바다, 경인문화사, 서울, 2014, p.53.

24) 영파시(寧波市) 진해성구(鎭海城區) 문물관리위원회(文物管理委員會)에서 항제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적비 내용 참조(유적비는 오늘날 영파시 진해성구(鎭海城區)의 동남방향 남대가로(南大街路)와 성하동로(城河東 路) 교차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언론기사 내용 등에 따르면 이곳이 본래 항제정이 세워진 곳으로 1948년 부근에 대형건축물 공사 과정에서 고대 선박 잔해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9년에는 인근의 용강(甬江) 북쪽 강변에 항제정을 재현하여 전시관으로 활용 중에 있다).

25)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이미지 자료를 재편집하여 사용하였다.

Fig. 5. Old Map of Myeong-ju(定海縣圖)

Fig. 6. Hang-Je-Jeong(航濟亭) Site of current(Google)

Fig. 7. Old Map of Myeong-ju(籌海圖編)

『보경사명지《시박(市舶)》

∙ “…政和七年, 郡人樓異除知隨州, 陛辞, 建議於明置高麗司, 曰來遠局 創二巨航 百畵舫, 以應辦三韓歲使. 且請墾州之廣 德湖爲田, 收歲租以足用. 旣對, 改知明州. 復請移溫之船場於 明, 以便工役. 創高麗使行館, 今之宝奎精舍, 卽其地也…”

건도사명도경《은현(鄞縣)》

∙ “… 政和七年, 太守樓異乞置高麗司 徽宗皇帝有御筆批諭, 刻之於石, 其碑在西湖錦照堂…”

먼저, 보경사명지《시박(市舶)》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북 송(北宋) 휘종(徽宗) 정화7년(政和七年) 1117년 당시 지방 장관 (長官)인 지주(知州)의 위치에 있던 루이(樓異)가 고려 사신들의 응대를 위해 소위, 래원국(來遠局)26)이라 일컫는 고려사(高麗

26) 래원국은 속칭 ‘동번역관(東藩驛館)’으로 불렸으며, 청(淸)『사명담조(四明 談助)』(1828년)의 기록 중 “…東藩驛館近儂家之語…”라고 묘사하고 있다 (袁元龍, 洪可堯, 寧波港考略, 〈浙東文化論叢〉, 中央編譯出版社,, 北京, 1995, p.180. 참조.). 즉,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는 호칭이

(6)

司) 설치를 건의 하였고, 이와함께, 고려 사신들의 응대에 소요 되는 비용은 광덕호(廣德湖) 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충당하고자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27). 그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고려사행관이라는 사관 시설이 건립되었는데, 그 위치는 보경 사명지』의 기록 시점인 1228년 당시, 보규정사(宝圭精舍)28)가 있었던 곳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위의 건도사명도경』《은현 (鄞縣)》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려사행관의 건립과 관련하여 황제인 휘종의 칙령을 비문(碑文)으로 새겨 서호(西湖)의 금조 당(錦照堂) 내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숙박 등 체류시설을 겸하였던 고려사행관 등의 사관 시설에는 송나라로 사행을 온 사신들 이외에 여러 계층의 사람 들도 사행단(使行團) 일행에 포함되어 함께 머물렀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아래의 기록들에 의하면, 화공(畵工)과 같은 장인 (匠人)에서부터 다양한 문물(文物)의 제도(制度)를 접하고 익히 기 위한 유학생(留學生)들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절요 예종(睿宗)10년7월

∙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학생들을 함께 보내어 귀국의 문 화를 견습하게 했다…헌장(憲章), 문물(文物)제도에 관한 것이라든가, 역대로 내려온 경전이라든가…”

고려사절요 명종(明宗)15년3월

∙ “…인종때 이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들어가니 이녕(李寧)에 게 명하여 본국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리게 하였다. 그 림을 바치니 휘종이 감탄하고 칭찬하여 이르기를 ‘요사이 고려의 화공(畫工)이 사신을 따라 온 사람이 많았으나…’

특히, 고려사절요 명종(明宗)15년 기사의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면, 화공이 오늘날 건축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 을 감안할 때, 이들이 당시 송나라에서 유행하였던 일종의 건축 양식(建築樣式)을 어느 정도 사실감 있게 그림으로 묘사하였거 나, 그럴만한 식견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려도경』의 경우에도 문자 기록(經)만 전해져 오고 있 지만, 본래는 당시 고려 도성을 비롯하여 서긍의 눈에 비친 색 다르고 다양한 건축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였던 그림(圖)도 존 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북송 정부는 1097년에 이르러 소위, 관식건축(官式建築)의 영조(營造) 규범서(規範書)인 송(宋)『영 조법식(營造法式)을 편찬하게 되는데, 이때 위의 고려사절요

동번(東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東藩驛館’은 우리나라 사신을 위해 중국에 설치한 전문 역관(驛館)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언급한 ‘고려사(高麗司)’, ‘고려사행관(高麗使行館)’ 역시 이와 유사한 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의 사명담조 기록에 따르면, 당시 역관의 모습은 일반 살림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7) 이밖에, 보경사명지』《시박》의 기록 중 …“創二巨航 百畵舫, 以應辦三韓 歲使…”에 따르면, 2척의 거대한 배와 아름답게 장식한 배(畵舫) 백척을 건조하여 고려의 사신들을 접대하라는 내용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송시대 문호(文豪)인 소동파(蘇東坡)가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에서 고려 사신이 매번 올 때마다 연회에 드는 비용이 10여만 근이나 되는데 비해 송나라는 터럭만큼도 이로움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다섯 가지의 폐해를 지적하는 소위, ‘고려오해론(高麗五害論)’ 중 두 번째로 고려 사신들의 관사를 수리하고 장식하는데, 민력(民力)의 수고로움을 배가한다고 언급하고 있어 당시 송 정부는 고려 사신들의 응대에 적지 않은 노력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참조)).

28) 보규정사(宝圭精舍)에 대해서는 각주34) 참조.

예종(睿宗)10년의 기사 내용과 연관 지어 보면, 이 역시 일종의 문물제도로서 당시 송나라에 체류 중이던 유학생들을 통해 충 분히 견습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9).

실제로 오늘날 절강성과 복건성 일대에 현존하는 송대(宋代) 유구(遺構)인 보국사대전(保國寺大殿), 화림사대전(華林寺大殿) 과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고려시기 목조건축인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등이 영조법 식』의 규범 속에서 서로 매우 밀접한 건축적 특성을 보이는 것 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Fig.

8〉30). 또한, 앞의〈Table 1〉에서 볼 수 있었듯이, 복건성 일대 상인들이 고려로의 왕래가 잦았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명주를 비롯하여 동남연해 여러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민간건축(民間建 築)에서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특징적 의장요소로 평가되고 있는 첨차(檐遮) 부재 하부의 연화두형(蓮花頭形) 소위, 쌍S자형 의 초각(草刻) 장식이 복건성 천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 양과 유사함에 따라 오래 전부터 양국 건축학계의 주목을 받아 오고 있다〈Fig. 9〉31).

영조법식 (營造法式)

화림사대전 (華林寺大殿)

부석사무량수전 (浮石寺無量壽殿) Fig. 8. Comparison of wooden conditional structural system

복건성 천주 개원사대전 (福建省 泉州 開元寺大殿) Fig. 9. Decorative Pattern of

Chem-Cha(檐遮)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송 정부가 고려 사신들의 응대를 위해

29)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 서유구(徐有榘)는 임원경제지(林圓經濟志)』

《섬용지(贍用志)》중 〈論鄕居宜訓工〉 즉, ‘향촌에 사는 이들은 공업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대목에서 사대부들도 공업 제도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조법식(營造法式) 등의 서책을 가져다 깊이 연구하 고 서둘러 시험하여(…取營造法式天工開物等書, 熱講而亟試之…)”라고 언 급한 바 있다(원문과 국역 내용은 ‘임원경제연구소, 임원경제지 섬용지 3, 풍석문화재단, 2017.).

30) 梁思成, 梁思城全集(第七卷), 中國建築工業出版社, 北京, 2001, p.423, 김왕 직, 알기쉬운 한국건축용어사전, 동녘, 서울, 2007, p.145, 궈칭화지음․윤재신 옮김, 중국 목조건축의 구조, 동녘, 서울, 2006, p.157.

31) 張十慶, 福建羅源陳太慰宮建築, 文物, 一九九年(第一期), p.72.

(7)

1117년 명주의 은현에 건립되었던 고려사행관의 정황을 살펴볼 수 있었으며, 또한 이와함께 1078년 정해현에 설치되어 역정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항제정에 대한 기록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 두 시설은 항제정이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127년까지 적어도 10여 년 동안 공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당시 사행단의 성격으로 보아, 이들 시설은 단순한 숙박과 체류 장소가 아닌, 문화․예술 등 다방면에서의 교류활동이 이루 어졌던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 라, 서긍 일행이 당시 고려에서 머물렀었던 순천관과 함께 이 시기 고려와 송 양국의 문화교류에 상징적 장소로서 보다 큰 의 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3 고려사행관의 소실과 유지(遺地)

남송 초기 중국 대륙의 북방지역에서 여진족의 금나라와 고 려가 육로로 국경이 맞닿게 되자, 고려와 송의 공식적인 교류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사신의 사행도 금 나라로 향하게 되었다32).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고려사행관의 역 할 또한 유명무실 해져 결국에는 소실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래의 기록을 통해서 그 시기와 과정 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보경사명지《창장고무원방(倉場庫務院坊)》

∙ “…都酒務, 美祿坊, 子城西南一百十一步, 皇朝天禧五年置.

紹興五年以其地爲通判南廳, 務遷子城南平橋下街西高麗行 衙. 淳熙七年, 有旨以其地賜相臣史浩, 今地宝奎精舍是也, 務又遷於湖西觀音寺側…”

즉, 위의 내용에서는 각종 관공서들의 상호 지리적 위치관계 를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이들의 동선 속에서 고려사 행관이 소실되었던 정황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먼저, 천희5년(天 禧五年) 즉, 1021년에 자성(子城)의 서남쪽으로 111보(步) 되는 곳에 도주무(都酒務)33)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후 소흥5년(紹 興五年)인 1135년에 지방 부장관(副長官)인 통판(通判)의 남청 (南廳)이 그곳에 새로 들어서게 됨에 따라 도주무는 자성 남쪽 에 위치한 평교(平橋) 아래의 대로(街) 서쪽편 고려행아(高麗行 衙)가 있었던 곳으로 이건(移建)하게 된다. 또한, 순희7년(淳熙七 年)인 1180년에 황제가 이 곳을 상신(相臣) 사활(史活)에게 하사 하게 되면서 그곳에 보규정사(宝奎精舍)34)가 들어서게 되자, 도 주무는 또 다시 호수(月湖) 서편 관음사(觀音寺)가 위치한 곳으 로 옮겨가게 되었다. 즉, 이러한 이전(移轉) 관계로 볼 때, 1180 년쯤 상신 사활이 보규정사를 세운 자리는 과거 고려행아가 있 었던 곳으로 파악된다. 다만, 이것이 고려사행관을 지칭하는 것 32) 보경사명지』《시박(市舶)》: “…金國旣盛, 高麗使行金正朔…”

33) 송대(宋代) 술을 제조하여 독점 판매하였던 곳으로 주(州)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에 도주무(都酒務), 현(縣) 또는 진(鎭)에는 주무(酒務)를 두었으며, 명주의 경우도 북송대(北宋代)까지 치소가 있었던 은현(鄞縣)에 도주무를 두고 각 현에 주무를 두고 있었다(金榮濟, 남송의 지방재정에 대해서,『중국 사연구』, 2002, p.157.).

34) 보규(寶奎)는 황제의 어서(御書)를 가리키는데, 당시 사활(史活)은 고종(高宗), 효종(孝宗), 광종(光宗)의 세 황제를 모신 원로(元老)로 세 황제 모두가 친필의 어서를 하사하였다. 당시 황제의 어서를 규문(奎文), 규제(奎帝), 규묵(奎墨) 등으로 불렀으며, 사활은 하사받은 황제의 어서를 보관하기 위해 보규각(寶奎 閣)을 건립하였으며, 남송 후기에 보규각을 보규정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寧 波博物館(http://www.blnews.cnnb.com.cn) 자료를 근거로 정리).

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술하고 있지 않지만, 앞서 살펴 본

보경사명지(宝慶四明志)』《시박(市舶)》의 기록 중 “…創高 麗使行館, 今之宝奎精舍, 卽其地也…”의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고려사행관과 보규정사는 동일한 위치로 확인되므로 결국, 고려 행아는 고려사행관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사 행관은 최초 1117년 자성 남쪽의 평교 인근에 세워졌으며, 1135 년쯤 그곳으로 도주무가 이전해 오기 이전까지 약 18년 동안 존 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Fig. 10〉35), 그 이후 어느 기록에서도 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Fig. 10. Goryeo-Sa-Haeng-Guan Site of Song Dynasty

절강성 영파시에서 실시한 대규모 고고(考古)조사 결과에 따 르면, 오늘날 시내 중심지역인 강하(江厦) 주변이 송나라 시기 상업이 가장 번성하였던 곳으로 세계 각 국에서 온 사신과 상인 들이 머물렀음이 밝혀졌으며, 또한 당시 세관업무를 담당하였 던 시박사와 함께 고려사행관의 옛 터가 확인 되었다36)〈Fig.

11〉. 특히, 1999년에는 호수(月湖) 동쪽편의 고려사행관 터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어 건물지 등의 유구(遺構)가 들어나게 되었으며〈Fig. 12〉37), 그 후 고려사행관의 모습을 고증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도 진행되어 복원도가 작성되기도 하였다

〈Fig. 13〉38).

35) 沈琼華 主編, 大元帆影(韓國新安沉船出土文物精華), 文物出版社, 2012, p11.

36) 倪士毅․方如金, 宋代明州與高麗的貿易關係及其友好往來, 寧波港海外交通 史論文選集, 中國海外交通史硏究會. 1983. p.90.

37) http://www.gusang.nationalculture.kr 참조.

38) 절강성영파시위원회(浙江省寧波市委員會) 제공.

(8)

Fig. 11. Goryeo-Sa-Haeng-Guan(高麗使行館) Site of current(Google)

Fig. 12. Excavation of Goryeo-Sa-Haeng-Guan historic sites

Fig. 13. Restoration drawing of Goryeo-Sa-Haeng-Guan

하지만, 자료에 대한 접근의 한계로 인해 당시 복원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또한 역사적 건축물로서 어느 정도의 진 정성이 담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단편적 으로 고려사행관 영역 내에는 여러 동의 건축물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는 있다39). 즉, 당시 명주항이 송나라와 고 려 사이 일종의 무역 환승 센터와 같은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해보면, 사신과 상인들을 위한 연회 및 저장, 숙박 등의 기 능을 수용할 수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공간이 요구되었을 것이

39) 현지 언론기사 내용 등을 종합해 보면, 1999년 영파시문물연구소(寧波市文物 硏究所)는 월호(月湖) 동쪽 기슭 일대에서 대규모 고고탐사와 발굴을 통해 고려사행관의 건축 유구 일부를 찾아냈는데, 남북방향을 중심축으로 하여 크게 주체(主體) 건축 즉, 중심이 되는 건물과 함께 중정(中庭),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주변에서는 송나라의 월주요 청자와 고려청자 등의 유물도 함께 발굴되었다고 한다.

기 때문이다. 현재 영파시 정부에서는 고려사행관 터 일대에 역 사 건축물 13동을 복원하여 ‘고건축정비구역(古建築整備區域)’

으로 조성하였으며, 2006년에는 고려사관사료진열관(高麗使館 史料陣烈館)을 신축하여 한․중 교류 관련 전시시설로 운영 중에 있다.

4. 결 론

고려사행관은 송나라 정부가 고려 사신들의 접객을 위해 명 주에 설치하였던 일종의 사관 시설로 1117년 건립된 이후, 1135 년경까지 약 18년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시 고려 와 송은 사신들의 사행에서부터 민간 상인들의 대외교역에 이 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적지 않은 왕래가 있었고, 특히 이들을 통해 문화․예술 등 다방면에서의 교류활동이 이루어졌다. 그리 고 이 과정에서 고려사행관은 단순한 체류 장소가 아닌, 중요한 거점 공간으로서 역할을 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행관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력에 대해서는 당시 명주 의 지리적 특징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보경사명지와 건 도사명도경 등의 지방지 기록을 통해서 건립 배경 및 소실 과 정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제한된 자료이긴 하지만 발굴을 통 한 고고학적 조사 및 복원도 등을 통해서 당시 고려사행관의 대략적인 규모와 형태 등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결국, 송나라 명주에 설치되었던 고려사행관에 대해 건립 배 경 및 그 일련의 과정 등을 건축사학적 관점에서 재조명 하는 것은 향후, 중세 한․중 양국의 건축교류 관계사를 파악하고 이 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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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 수 일 자 초 심 완 료 일 자 게 재 확 정 일 자 : : :

2020. 10. 10 2020. 11. 17 2020. 11. 21

수치

Fig.  1.  Overseas  Exchange  with  Song  Dynasty  during  Goryeo  period
Table  1.  Record  of  foreign  exchange  in  Goryeosajeolyo(高麗史節要)
Fig.  4.  Myeong-ju  Port  Wharf  ruins  of  Song  dynasty
Fig.  6.  Hang-Je-Jeong(航濟亭)  Site  of  current(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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