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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統一과 法律」에 논문 등을 투고하실 분은 발간일 전월(1월, 4월, 7월, 10월) 15일까지 aeacuscw@gmail.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투고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문의 : 법무부 통일법무과, (02) 2110-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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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문

1.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문제점과 한국의 대응방안 ···

제 성 호

/ 1 2. 북한주민의 상속회복청구권 행사와 제척기간 再論

- 대법원 2016. 10. 19. 선고 2014다46648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비판적 연구- ···

정 구 태 /

43 3. 집단살해죄의 주관적 구성요건과 북한인권

-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운영의 시사점을 위하여 - ···

이 규 창

/ 73 4. 북한 가족법의 양성평등의 원리 ···

김 영 규

/ 104 5. 북한법의 변화에 대한 고찰 ···

권 영 태

/ 134

◉ 실무 및 남북관계 동향

1. 머리기사로 본 최근 남북관계 ··· 183

2. 남북관계 주요 통계 ···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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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문

2016년 2월 중국은 한・미 양국에 대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을 제안하면서, 사실상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양자를 병행 논의하자는 것은 상호 무관계한 사안 의 부당한 연계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 비핵화는 NPT 및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국 제불법행위의 시정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인 반면, 평화협정 체결은 1953년 정전협정 대체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은 북한 핵무장의 국제법적 위법성(북한 핵프로그램은 일련의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이미 금지・불법화되었다)에 눈을 감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유엔 안보리의 제재 국면을 급속도로 약화시킬 공산이 크다. 대북 제재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한・미 양국으로서는 제재 국면의 중단 내지 전환을 초래할 위험이 있는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 법적 으로나 전략적으로나 그러하다. 앞으로 우리 정부는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의 확산을 차단 하는 국제법적 논리를 개발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 유도를 위한 국제공조 노력을 한층 더 강 화해야 한다.

주제어

북한, 평화협정, 비핵화, 병행 추진론, 9.19 공동성명, 6자회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문제점과 한국의 대응방안

제 성 호

(중앙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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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次 】

Ⅰ. 서언

Ⅱ.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 변천 1. 제1기(1962년~1974년): 「북남 평화협정」

체결 주장

2. 제2기(1974년~1984년):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3. 제3기(1984년~1994년): 「북남 불가침공동 선언」 및 북・미 평화협정 동시체결 주장 4. 제4기(1994년~2005년): 「새로운 평화

보장체계」 수립 주장

5. 제5기(2005년~2013년): ‘다자구도(9.19 공동성명과 6자회담) 하 북・미 평화 협정 체결’ 주장

6. 제6기(2013년~현재): 6자회담 중단상태 하 ‘핵 포기 없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Ⅲ.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 및 중국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문제점

1.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문제점 2. 평화협정 조기 추진론 및 비핵화-평

화협정 병행 추진론의 문제점

Ⅳ.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에 대한 대응방안

1.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론에 대한 한국의 대응방안

2. 9.19 공동성명에 의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 차단

3.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평화체제 구축의 방향

Ⅴ. 결어

Ⅰ. 서언

북한은 1954년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렬된 후 전후 복구 사업 등 내부체제를 정비한 다음 1960년대 초부터 평화협정 체결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라 할 수 있 는 1960년대에는 「북남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1974년부터 북한 은 당사자와 관련해서 대미(對美)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고수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 다. 물론 지난 40여년의 세월 동안 북한은 시대상황에 맞게 약간의 전술적 수정 내지 변형적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평화협정 체결 전략과 그 기조 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2016년 1월 북한이 전격적으로 4차 핵실험을 단행한 이후 지금까지 국제사회는 전례 없이 강도가 높은 대북 제재를 실시하고 있다.1) 그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반도 비핵화, 특히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북한의 핵폐기에 있다. 그러나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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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유엔의 대북제재 및 각국의 독자제재에 반발하면서, 비핵화는 거부한 채 평화협정 문제만 북・미 간의 양자대화를 통해 우선적으로 논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입장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일견 북한이 외교적・군사적 위기 때마다 발 동한 바 있는 소위 「고슴도치 전술」의 일환이자 국면전환용의 유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된다.

작금의 한반도 통일환경은 매우 엄중하다.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에 이은 한・미 양국의 사드 배치 결정,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 및 수중발사 탄도 미사일(Submarine- launched Ballistic Missile) 사출시험 등에 의한 북한의 강력한 반발, 대북 제재에 나름 동참하여 온 중・러의 이완 가능성과 새로운 동북아 지역에서의 냉전 회귀 조짐, 심상 치 않은 북한 내부정세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이 매우 유동적이며 불확실 성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서는 북한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 노선(이는 2016년 2 월 중국이 한・미 양국에 대해 제안한 것이다)에 대해 신중하면서 치밀한 대응전략이 요구되고 있다. 자칫하면 대북 제재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북한에 시간만 벌게 해줌으 로써 한반도 비핵화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패착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 하에 본고에서는 최근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비핵화-평화협 정 병행추진론에 대한 고찰하기로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의 변천과 문제점, 그리고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제의 배경 및 함정을 살펴본 다 음, 한국의 대응방안을 제시하기로 한다.

Ⅱ.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 변천

북한은 60년대 이래 지금까지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제의)하여 왔다. 북한의 주장은 대략 6단계의 변화를 보여 왔다. ①남북 평화협정 체결 주장, ②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③남북 불가침공동선언 및 북・미 평화협정 동시체결 주장, ④포괄적 평화보장체

1) 북한이 2016년 1월 6일 전격적으로 4차 핵실험을 단행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동년 3월 2일 결의 2270호를, 그리고 9월 9일 북한의 5차 핵실험 후에는 11월 30일 결의 2321호를 채택하여 전례 없이 강 하고, 다양한 형태의 대북 제재를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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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수립 주장, ⑤9.19 공동성명(다자구도) 하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⑥비핵화-평화 협정 병행 추진 주장이 그것이다. 이하에서는 이들에 관하여 연혁적・체계적으로 분석 하기로 한다.

1. 제1기(1962년~1974년): 「북남 평화협정」 체결 주장

김일성은 1962년 10월 22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 서의 연설에서 먼저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시키고 이어 「북남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 였다. 이 평화협정을 통해 ‘남북 상호 불가침과 양측 군대의 각각 10만명 또는 그 이 하로 축소’할 것을 강조하였다.2) 당시 주한미군 철수는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인 동시에 목표였다.3) 이후 북한의 「북남 평화협정」 체결 제의는 간헐적으로나마 7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졌다.4)

2. 제2기(1974년~1984년):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북한은 1974년 3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3차 회의에서 채택된 「미합중국 국회 에 보내는 편지」에서 최초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하였다.5) 더불어 제30차 유엔 총회(1975.9)에 제출한 각서(覺書)를 통해 6.25전쟁 및 정전협정의 ‘실질적 당사자’는 북 한과 미국이므로 북・미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 이 제안은

2) 김구섭,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부당성과 대응책”, 「북한학보」, 제21집, 1996.10, 34면;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한국정치연구」, 제18집 제2호, 2009, 66면;. 김일성은 1962년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에서 행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당면과업에 대하여」

라는 제하의 연설에서 “미국 군대를 철거시키고 북남이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을 데 대한 평화협 정을 체결하며, 북남조선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 이하로 축소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언급하였 다.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년감 1963」, 1963, 33면; 국토통일원, 「북한최고인민회의 자료집」 (제Ⅱ집:

2기 1차회의~3기 7차회의), 1988, 1167면; 허문영 외, 「한반도 평화체제: 자료와 해제」, 한반도 평화체제 연구총서 (1), 통일연구원, 2007.9, 271면.

3) 심병철, 「조국통일문제 100문 100답」, 평양출판사, 2003, 77면.

4) 제성호, “북한의 대미평화협정 채결 전략: 내용, 의도 및 문제점”, 민족통일연구원, 「한반도 평화체제 구 축방안 모색」, 제16회 국내학술회의 발표논문집, 1995.6.21, 8-9면.

5) 미국과의 평화협정 내용으로 북한은 ① 상호 불가침 서약 및 직접 무력충돌 위험 제거, ② 무력증강 및 군비경쟁 중지(조선 경외로부터 일체의 무기・작전장비・군수물자의 반입 중지), ③ 한국 주둔 외국군 으로부터 유엔군 모자 제거 및 완전 철수, ④ 외국군에 의한 조선의 군사기지화 및 작전기지화 방지 등을 들고 있다. 심병철(2003), 전게서, 90-92면; 국토통일원, 「북한최고인민회의 자료집」 (제Ⅲ집: 4기 1차회의~5기 7차회의, 1988, 85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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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철수를 조건으로 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 과거의 제안(선 미군 철 수, 후 평화협정 체결)과는 달리, 먼저 북・미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그 후에 주한미군 철수를 실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선 평화협정 체결, 후 미군 철수)하였다는 점에서 특 징적이다.7)

북한이 이처럼 입장을 변경한 것은 베트남 사례에 고무됐기 때문이었다.8) 1973년 1월 27일 미국과 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 파리에서 「베트남에서의 전쟁종료 및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Ending the War and Restoring Peace in Vietnam, 일명 파리협정)9)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2개월 후인 동년 3월 29일 미군이 남베트남 에서 완전히 철수했던 것이다.10) 주월(駐越) 미군 철수가 월맹의 베트남 공산화를 촉진 시킨 것은 역사적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다.11) 이를 목도한 북한은 미군 철수를 앞당 기려면 직접 미국과 협상을 하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며, 기존의 남북 평화협정 체결 주장을 철회했던 것이다.12)

3. 제3기(1984년~1994년): 「북남 불가침공동선언」 및 북・미 평화협정 동시체결 주장

북한은 1984년 1월 10일 중앙인민위원회・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연합회의에서 「서울 당국과 미합중국 정부와 국회에 보내는 편지(소위 3자회담 제의 서한)」를 채택하였다.

여기서 북한 측은 “우리와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군을 남조선에서 철거 시키며 북과 남 사이에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는 것”을 제의하였다.13) 이 제의에서도 평

6) UN Document A/C. 1/1054, 24 September 1975, pp. 12.

7) 제성호(1995), 전게논문, 9-10면.

8) 임수호(2009), 전게논문, 67면.

9) 국제법적으로 파리협정의 당사자는 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과 월남임시혁명정부의 4개 실체로 되어 있다. 파리협정의 전문은 United Nations, United Nations Treaty Series 1974, Vol. 935, No.

13295, 197), pp. 6-17.

10)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Peace_Accords;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6%A C_%ED%

98%91%EC%A0%95_ (1973%EB%85%84)(2016년 7월 1일 검색).

11) 백승주・고성윤, 「베트남 평화협정과 월남 공산화 과정의 연계성 분석」, 연구보고 정94-947, 한국국방연 구원, 1994.12, 1-48면.

12) 김구섭(1996), 전게논문, 34-35면; 제성호(1995), 전게논문, 9-11면.

13) 조선중앙통신사, 「조선중앙년감」, 1985, 255면; 통일원, 「남북한 통일・대화 제의 비교」, 제1권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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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협정은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수단으로 제시되었다. 즉 「선 평화협정 체결, 후 주한 미군 철수」 전략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14)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1992년 2월 19일 발효하였다. 북한은 남북기본합의서 제2장 「남북불가침」 합의사항과 이 제2장에 따라 1992년 9월 채택된

「남북불가침부속합의서」에 의해 기왕에 제의하였던 「북남 불가침공동선언」의 채택 문 제가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였다.15) 이에 북한은 정전협정의(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문제 를 시급한 현안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16)

4. 제4기(1994년~2005년): 「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주장

북한은 1994년 4월 28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현재의 정전협정이 이미 ‘빈 종 잇장’이 되었으므로 북・미 간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전협 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현 군사정전기구를 대신하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new peace arrangement)」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면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 할 것을 미국에 제의하였다.17) 북한은 또 1995년 6월 29일 유엔사 해체와 주한미군 철 수를 규정한 ‘제30차 유엔총회 결의 채택(1975년 11월) 20주년’에 즈음하여 북한 외교 부 비망록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북한은 미국의 잘못으로 인하여 현 정전체계가 “복구 할 수도 재생할 수도 없는 존재”로 되었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평화보장체계」로 교체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이 당장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는 형 편이라면, 먼저 유엔사라도 해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1987>, 1991, 319면; 김구섭(1996), 전게논문, 5면.

14) 제성호(1995), 전게논문, 11-12면.

15) 예컨대 「조선중앙방송」 1994년 9월 19일자 보도는 “북과 남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에 불가침을 공약한 합의서가 채택되어 있는 만큼 우리와 미국사이에 평화보장체계까지 수립된다면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공정하고 철저한 평화보장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16) 북한은 1991년 9월 17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계기로 유엔과 북한 간의 ‘비정상적 관계’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러한 비정상적 관계 청산의 일환으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 의 전환 및 유엔군사령부(이하 유엔사라고 함) 해체, 대미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등을 포괄적 으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91년 9월 18일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의 기자회견과 10월 2일 연형묵 총 리의 유엔총회 연설 참조.

17) 통일원, 「월간 북한동향」, 통권 제154호, 1994.4, 116-117, 245면.

18) “조선반도에서 평화보장체계가 지체없이 수립되여야 한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부 비망록)”, 「 로동신문」, 1995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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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평화보장체계」 수립 제안에 대해 한・미 양국이 ‘무시’ 또는 ‘일축’으로 일관 하자, 북한은 1996년 대미 잠정협정 체결을 제안하였고,19) 조명록 특사(국방위원회 제1 부위원장)를 통해 북・미관계 개선 및 정전협정을 대체할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를 거 론하였다.20) 또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의 방북 직후 2차 북한 핵 위기가 전개되면서 북한은 같은 달 10월 25일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제안하기도 했다.21)

5. 제5기(2005년~2013년): ‘다자구도(9.19공동성명과 6자회담) 하 북・미 평화 협정 체결’ 주장

2003년 8월부터 남북한과 미・중・일・러의 6자가 참석하는 다자회담이 북한 핵문제 해 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열리기 시작했다. 6자회담의 결과 2005년 9월 19 일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9.19 공동성명」은 핵문제, 외교관계 개선, 에너지 이슈 등을 포괄적이고 단계적으로 해결하는 구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합의사항은 관련 당사자 간의 동시이행 구도, 곧 연계추진의 해법을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선 비핵화 주장과 선 적대시정책 포기 주장의 대립되는 요구가 맞부딪치는 양상을 띠었다.22)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선 평화협정 체결 후 비핵화 실현’의 제안을 하기에 이른 다. 예컨대, 북한은 2010년 신년공동사설과 동년 1월 11일자 외무성 성명 등을 통해 평 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을 제의하였다. 특히 후자의 외무성 성명에서는 “비핵화를 달 성하기 위해서는 미・북 간 신뢰 조성이 우선”이라며, 평화협정 체결이 선행되어야 한

19) 통일원, 「’96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 관련 자료집」, 1996, 116-117면; 제성호, 「한반도 평화체제의 모색 -법규범적 접근을 중심으로-」, 지평서원, 2000, 175-177면; 박종철, “한반도비핵화와 평화체제 전 환의 단계적 접근”, 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PA 05-08, 2005. 12, 3면.

20) 2000년 10월 12일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사이의 공동콤뮤니케」 참조. 허문영 외(2007), 전게서, 32-33면.

21) 2002년 10월 25일 북한은 “외무성대변인 담화, 조미사이의 불가침조약체결이 핵문제해결의 합리적이 고 현실적인 방도”라는 제하의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으로 인 해 생긴 문제라면서, 미국이 ‘첫째로 우리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둘째로 불가침을 확약하며, 셋째로 우 리의 경제발전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는 조건에서 이(핵)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상게서, 187-189면; 「로동신문」, 2002년 10월 26일. 이후 북한은 2003년 4월 27일에도 「로동신 문」 논평을 통해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주장하였다. 김창준, “북한의 대미 평화협정 체결 제의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학위 논문, 2005.2, 105면.

22) 6자회담의 전개과정, 당사국의 입장 충돌 및 구조적 한계 등에 관해서는 배정호・황지환 외, 「북한 핵 의 국제정치와 한국의 대북 핵전략」, KINU 연구총서 11-10, 통일연구원, 2011, 13-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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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2010년 중 직접 관련 당사자 간 별도의 포럼이나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정전협정 당사국들이 평화협정 회담을 개시할 것을 제안하였다. 2010년 7월 9일 천안함 사태와 관련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로 약함) 의장성명이 채 택되자 그 이튿날인 7월 10일 외무성 대변인의 회견을 통해 북한은 ‘평등한 6자회담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일관하게 기울여 나갈 것’이라 고 주장하였다. 이후 북한 외무성은 2013년 1월 한반도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 꿔야 한다며 주한 유엔사 해체를 촉구하기도 하였다.23)

6. 제6기(2013년~현재): 6자회담 중단상태 하 ‘핵 포기 없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주장

2013년 3월 31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 설 병진노선(약칭 핵・경제 병진노선)」을 결정하였다.24) 그 다음날인 4월 1일 북한은 최 고인민회의 제12기 7차 회의를 개최하여 “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라는 법령(약칭 ‘4.1 핵보유 법령’)을 채택했다.25) 이때부터 북한은 미국 등 국제사회의 ‘선 핵포기’ 요구나 북한 비핵화를 위한 협상을 거부해 왔다. 반면 북한은 그들의 핵 보유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만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치는 가 하면, 때로는 미국에 대해 핵군축 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26)

23) 2013년 1월 14일자 북한 외무성 비망록에서는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60년이 됐지만 불안 정한 정전상태가 지속하고 있다면서 유엔사는 지체 없이 해체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유엔군사령부는 원래 유엔 성원국들의 총의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이 유엔의 이름만 도용해온 부당한 기구”라고 강변하였다.

24) “김정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보고 전문”, 「조선중앙통신」, 2013년 4월 1일.

25) 전성훈, “김정은 정권의 경제・핵무력 병진노선과 4・1 핵보유 법령”, 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13-11, 2013.4.8, 1-7면. 이에 앞서 북한은 2012년 4월 13일 사회주의헌법을 개정하여 그 서문에서 “김정일 장 군이 선군정치로 핵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전변시키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북한의 ‘핵보유 국’ 지위를 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26) 예컨대, 북한의 외무성 부상 박길연은 2013년 10월 1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 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청산하는 것”이며, ‘핵군축 협상을 조속히 개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 박길연, 미국에 핵군축 협상 제의”, 「중앙일보」, 2013년 10월 3일.

북한의 핵군축 회담 제의(거론)는 앞선 시기인 제5기에도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가령 북한은 2009년 에 자신을 포함한 핵무기 보유국들 간의 핵군축 협상이 이루어져야 하며 핵군축 협상이 한반도 핵문 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 바 있고(배정호・황지환 외(2011), 전게서, 39면), 2011년 3월 제네바 군축회의에서도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세계적인 핵군축과 종국적인 핵무기 철폐를 추동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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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북한 리수용 외무상은 유엔 총회 기조연설과 외무성 성명에서 “하루빨 리 낡은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또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단행하기 불과 얼마 전인 2015년 말에 비공식 외교경로를 통해 미국과 평화협정에 관한 논의를 하기도 했다.27) 한편 4차 핵실험 직후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자 중국은 2016년 2월 왕이(王毅) 외교부장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는 것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을 병행해 추진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을 주 의제로 급부 상시켰다.28) 이 같은 제안은 사전에 북한 측과의 논의와 상당한 교감을 거쳐 나온 것 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9)

한편 북한은 핵 보유국 자격으로 평화협정 협상에 나서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현 노동당 위원장, 국무위원장)는 2016년 5월 7일 7차 노동당대 회 사업총화보고에서 ‘핵전파방지의무의 성실한 이행과 세계의 비핵화 실현을 위한 노 력’을 언급하면서, “미국은 핵강국의 전열에 들어선 우리 공화국의 전략적 지위와 대 세의 흐름을 똑바로 보고 시대착오적인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여야 하며 정전 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남조선에서 침략 군대와 전쟁장비들을 철수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다.30)

27) “WSJ: 미국, 북한 핵실험 직전 북한과 평화협정 논의 합의”, 「연합뉴스」, 2016년 2월 22일; “북-미, 지 난 연말 평화협정 놓고 비공식 협의”, 「한겨레신문」, 2016년 2월 22일; http://www.hani.co.kr/arti/politics/

defense/731450.html(2016년 7월 13일 검색).

28) 이어 유엔 안보리가 2016년 3월 2일 대북제재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 추진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추궈홍 주한 중국대사는 6월 7일 “북미 평화협정과 북핵 문제 해결이라 는 두 가지 문제를 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동시에 풀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병 행 추진을 강조하였다. “추궈홍, 평화협정・북핵 해결, 한 테이블에 놓고 병행추진”, 「연합뉴스」, 2016년 6월 7일. 이를테면 북한의 오랜 주장인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중국이 거들고 있는 셈이다.

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외형상 이 같은 가능성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였다. 예컨대, 2016년 4월 12 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대해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정세 속에 일부에서 6자회담이니, 비핵화와 평화협정체결의 병행추진이니 하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면서, “대 화 자체를 반대하지 않지만 불평등한 대화는 철저히 배격한다”고 밝혔다. 즉 북한 당국은 최근 중국 등에서 북한의 비핵화와 미・북 평화협정 문제를 함께 논의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북 외무성, 비핵화와 평화협정 함께 논의 안해”, 「뉴시스」, 2016년 4월 12 일. 이 같은 발언은 ‘평화협정 우선 체결’ 노선을 공식화한 것일뿐더러, 향후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 진 시 협상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언술로 풀이된다.

3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07576(2016년 7월 13일 검색). 김 정은의 이러한 발언은 “미국이 북한과 비핵화를 얘기하려면, 핵보유국의 자격으로 핵군축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또 그가 대외관계 개선을 언급한 것은 현재의 정전체제를 평화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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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전과 확연하게 달라진 특징이 있다. 과거에는 북한이 핵 포기 가능성을 내 비치면서 평화협정 테이블로 한・미 양국을 유인하려 했던데 반해, 이제는 ‘핵 포기 가 능성 전혀 없다’는 점을 기정사실화 하면서,31)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하는 형국인 셈이 다. 다시 말하면 북한은 핵 포기 없는 평화협정, 또 주한미군 철수/한미동맹 약화를 위 한 평화협정만 되뇌이는 꼴이 되고 있다.

Ⅲ.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 및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문제점

1.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주장의 문제점

가. ‘정전협정=빈종잇장’ 주장 및 백지화 선언의 문제점

정전협정은 6.25전쟁 당사자(남북한과 미・중 등 핵심당사자)들에게 정전(停戰)의 보 장 의무를 부과하는 다자간 군사조약이다. 또한 정전협정의 핵심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는, 곧 시행 중에 있는 조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32) 정전협정이 한반도 정전체 제를 떠받치는 법제도적 장치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항 구적인 평화체제가 구축되기 전까지는 정전협정의 평화유지 기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33)

더욱이 북한은 1994년 4월 이래 정전협정이 빈종잇장이라고 강변하거나 더는 정전협 정에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전협정의 효력(유효성)을 인정

체제로 바꾸는 데에 집중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와 관련해서 북한이 내심 핵실험 동결을 조건 으로 한반도 비핵화 문제와 평화협정을 동시 진행하자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31) 2016년 1월 6일 북한은 4차 핵실험을 단행한 직후 정부 성명을 발표하여 “수소탄까지 보유한 핵보유 국의 전열에 당당히 올라서게 됐으며 최강의 억제력을 갖춘 존엄 높은 민족의 기개를 떨치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북한은 수소탄 시험이 주권국가의 합법적 권리이자 자위적 조치라고 강변하면서,

“미국의 극악무도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이 근절되지 않는 한 우리의 핵개발 중단이나 핵포기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32) 제성호, “한반도 안보환경 하에서 정전협정의 역할과 미래관리체제”, 「국방정책연구」, 제30권 제2호, 2013, 23-25면.

33) 제성호, “남북한의 정전협정 인식과 한국의 정책과제”, 「통일과 법률」, 통권 제15호, 2013.8, 9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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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례가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2000년 9월 26일 채택된 제1차 남북국방장관회담 공 동보도문 제4항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 주변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과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를 개방하여 남북관할지 역을 설정하는 문제는 정전협정에 기초하여 처리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명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빈종잇장’ 주장은 다분히 전술적 차원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법리적으로 볼 때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곧 일방적 폐기 선언은 용인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정전협정에는 ‘폐기(denunciation)’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부칙 제5조 제61항은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과 증보는 반드시 적대 쌍방 사령들의 호상 합 의를 거쳐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유엔군이나 북한군, 중국군 중 어느 한 쪽이 마음대로 협정을 고치거나 보완, 폐기하지 못하도록 한 안전장치라고 볼 수 있 다.34) 또한 정전협정 제62항은 “본 정전협정의 각 조항은 쌍방이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 및 증보 또는 쌍방의 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 중의  규정에 의하여 명확히 교체될 때까지는 계속 효력을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상의 두 조항에 따르면, 정전협정은 양측이 새로운 협정(정치적 수준에서의 평화 적 해결을 위한 적당한 협정이나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증보의 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계속 효력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적당한 협정’(예컨대 평화협정)이나

‘공동으로 접수하는 수정・증보’는 모두 쌍방의 합의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느 일방의 정전협정 폐기 선언만으로는 협정이 당연히 실효(失效), 즉 효력을 상실한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정전협정은 쌍방 간의 새로운 합의가 있어야 무효화 혹은 백지화될 수 있는 것이지 일방의 파기 주장(선언)으로 무효화 혹은 백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35) 요컨대, 정전협정은 여전히 유효한 군사조약이며, ‘정전협정=빈 종잇장’이라는 북한의 일방적인 낙인찍기는 부당하다고 하겠다. 그와 같은 주장은 한미동맹과 주한미 군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의 안보구도를 뒤흔들기 위한 억지논리에 다름 아니라고 할 것이다.

34) 이 규정을 준수하면서 그간 정전협정은 추가 합의, 일부 조항의 잠정 중지 등 수정과 보완이 계속됐 다. 협정 체결 이후 현재까지 30여 개 항목의 추가합의가 있었고 1개 항목이 중지됐다. “북한의 정전 협정 백지화 주장은 모순”, 「연합뉴스」, 2013년 3월 7일.

35) 제성호(2000), 전게서, 51면; 제성호(2013), 전게논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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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북 ‘실질적 당사자론’의 문제점: 직접 당사자 간 논의 및 해결 기피

유엔군사령관이 미국인이라는 이유(미군의 ‘유엔군 모자론’)를 들어 미국과 북한이 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실질적 당사자론’은 많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실질 적 당사자론’은 국제법적 근거를 찾기 어려운 비정상적 이론구성이다. 어디까지나 북 한식 「조국해방전쟁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라는 전략적 의 도를 관철하기 위해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군의 ‘유엔군 모자론’이란 것도 ‘연합군 이론(coalition army theory)’의 법리와 실 천36)에 대한 무지의 소치다. 유엔군사령관이 미군 장성으로 보임된 것은 1950년 7월 7 일 유엔 안보리가 회원국이 제공하는 병력으로 구성될 ‘통합사령부(a unified command)’

사령관(commander)의 임명을 미국에 위임한 결의 제84호(S/RES/84)에 의거한 것이다.37)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인이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38) 그러나 그는 6.25전쟁 중 유 엔군을 지휘하는 기간 동안 미국을 대표하여 활동한 것은 아니었고, 유엔 측 전 교전 당사국(참전 16개국)을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아울러 1950년 7월 14일 한국 정부(이승 만 대통령)로부터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을 위임 받아 한국군에 대해 서도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이 작전지휘권에는 당연히 정전협정 체결권이 포함된다.39)

보통 정전협정이란 군사적 사항에 국한되는 협정으로 교전자가 협정의 당사자가 되 며, 교전 쌍방의 군사령관이 교전자를 대표하여 체결하는 것이 통례이다.40) 한국정전 협정 역시 유엔군사령관이 연합군의 총사령관 자격에서 교섭・서명한 것이다. 그는 정 전협정의 서명자에 지나지 않는다.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유엔군사령관이 아니라 한국

36) 유병화, 「통일지향적 남북한관계의 법이론연구」, 국통정 90-12-97, 국토통일원, 1990.12, 14-15면; 백진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문제”, 「서울대학교 법학」, 제41권 제2호, 2000.9, 283면.

37) http://www.un.org/en/ga/search/view_doc.asp?symbol=S/RES/84(1950)(2016년 7월 30일 검색).

38) 유엔 헌장 제29조는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임무의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보조기관을 설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가 결의 제84호에 의해 유엔군사령관의 임명을 미국에 위임한 결 과 유엔군사령관이 유엔 안보리의 보조기관(subsidiary organ)성을 갖게 됐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안보 리는 이 같은 임명권의 위임에 입각해서 유엔군사령부와의 관계에서 보고서 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동 보고서를 접수하여 심의하는 등 간접적으로 유엔군사령부를 통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유엔군사 령부는 매년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안보리에 제출하며, 수시로 특별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39) 한국군 작전지휘권 이양의 연혁 및 전시 작전권 전환 추진 현황에 관해서는 김명기, “작전지휘권이양 공한에 관한 연구”, 이한기 박사 화갑기념논문집, 「현대국제법론」, 박영사, 1978, 123-145면; 제성호, 「 한미동맹의 법적 이해」, KIDA프레스, 2015.3, 45-53면.

40) 백진현(2000), 전게논문, 2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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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참전 16개국, 곧 유엔 측의 전 교전국이라는 것이 국제법학계의 통설이다.41) 다시 말하면 유엔군사령관은 미국을 위해 정전협정에 서명한 것이 아니라 교전 당사국 전 체를 위해, 혹은 그를 대표하여(on behalf of) ‘대표 서명'했다는 것이다.42) 그러므로 유 엔군사령관이 미국인이라는 근거로 미국이 당사자라는 주장은 정전협정 서명자 (signatory)의 국적과 그가 행한 법률행위가 귀속되는 당사자(party)를 혼동한 것이라고 하겠다.43)

만일 ‘실질적 당사자론’을 수용하는 경우, 미국과 북한이 아니라 남북한이 6.25전쟁 의 실질적 당사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북한이 처음 공격을 한 대상은 대 한민국이며 남북한이 주된 교전당사자였고, 한반도가 주된 전쟁터였으며 전쟁으로 가 장 많은 피해를 본 것도 역시 남북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6.25전쟁의 주된 당사자, 실질적 당사자는 남북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44)

다. 정치・군사적 신뢰구축을 생략한 ‘미군 철수’ 있는 평화협정 주장의 허구성 북한은 정전협정만으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될 수 없기 때문에 평화협정 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협정은 ‘주한미군 철수 있는 (전제조건 혹은 필연적인 결과로서) 평화협정’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주장과 그와 관련된 행동에는 자기모순이 존재한다.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면서도 정전기구 무력화라는 평화 파괴 및 급격한 현상 변경을 서슴지 않는 양면전술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NLL을 무단 침범하는 등 정전협정을 지속적으로 위반함으로써 한반도 위기관리 및 평화유지 기능 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45)

41) 배재식, “남・북한의 UN가입과 법적 문제”, 「한국통일정책연구논총」, 제2권, 1993, 19면; 이장희, “한국 정전협정의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법제도적 방안”, 이장희 편저, 「21세기를 대비한 한국의 당면과제:

개혁, 환경 그리고 통일」,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1995, 197면; 백진현, “휴전협정체제의 대체에 관한 소고”, 「통일문제연구」, 제3권 4호, 1991, 62-63면.

42) 제성호(2013), 전게논문(주 33), 91면.

43) 백진현(2000), 전게논문, 282면; 제성호(1995), 전게논문, 50면.

44) 남북한은 6.25전쟁의 원인과 이해당사자, 발발지역 등의 면에서 주인국가(host country)인 동시에, 주된 교전국(principal belligerent)이었다. Byung-Hwa Lyou, Peace and Unification in Korea and International Law, Occasional Papers/Reprint Series in Contemporary Asian Studies, Number 2-1986(73), School of Law, University of Maryland, 1986, 54-56면.

45) 제성호(2000), 전게서, 14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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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기본합의서 제5조와 「남북화해분야 부속합의서」 제20조는 “남과 북은 남북 사이 의 공고한 평화상태가 이룩될 때까지 현 군사정전협정을 성실히 준수한다”고 규정하여 평화체제로의 전환 시까지 정전협정 유지・준수원칙을 밝히고 있다. 또 「남북화해분야 부속합의서」 제18조는 “남과 북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 시키기 위하여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성실히 이행・준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 측이 이러 한 합의문건들을 실천하지 않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북한의 정전협정 이행・준수 거부는 남북기본합의서 제5조에 따라(또한 후술하는 9.19공동성명 틀 내에서 별도의 ‘평화포럼’을 구성하여) 정전협정을 대체할 새로운 평 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음을 행동으로써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북한은 평화협정 체결을 말하면서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분위 기 조성’에 성실한 노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령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해도 북한이 이를 준수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보아야 한다.46)

논리적으로 보더라도 평화협정 체결은 정전협정의 성실한 이행과 준수 위에서만 점 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정전협정을 파괴하고 위반하는 기초 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정전협정을 사문화시키려는 기도를 묵인한 채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그러한 협정의 명칭이 무엇이든 또는 그 내용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분식 (粉飾)・포장되든 관계없이 동 협정의 실효성은 보장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그 러한 협정이 잘 준수되리라고 신뢰할 수 없으며 그것은 ‘제2의 정전협정화’될 위험마 저 상존한다.

라. 유엔사 ‘유령기구론’ 및 유엔 총회 결의에 따른 조기 해체론의 문제점

북한은 2013년 6월 21일 신선호 주 유엔대사의 기자회견을 통해 유엔사는 유령기구 로서 이미 1975년에 해체됐어야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 당국 은 유엔사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 측은 유엔사는 조직 초기부터 유엔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유령기구, 유엔 성 원국들의 총의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이 미국이 유엔의 이름만 도용하여 만들어낸 부

46) 남만권,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의 접근방안”, 「주간 국방논단」, 제611호(95-56), 1995.12.4),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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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 기구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유엔사의 설치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남침 과 그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대응, 곧 결의 제82호, 제83호 및 제84조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유엔사가 조직 초기부터 유엔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유령기구라는 북한 측 주 장은 국제법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며, 6.25전쟁 당시 유엔의 실천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미국이 안보리 결의 제84호에 의하여 안보리의 위임을 받아 유엔사라는 명칭을 부 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총회와 안보리가 이를 추인하여 동 명칭이 오늘날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예컨대, 1950년 10월 7일자 유엔 총회 결의 제376(Ⅴ)호는 “The United Nations Unified Command”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였고,47) 이어 1950년 12월 1일자 유엔 총회 결의 제410(Ⅴ)호에서도 “The United Nations Unified Command”라는 표현을,48) 그리고 1951년 2월 1일자 유엔 총회 결의 제498(Ⅴ)호에서는 “The United Nations Force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49) 1950년 11월 8일자 유엔 안보리 결의 제88호 는 안보리 차원에서 “The United Nations Command”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 다.50) 이후 1975년 11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서방 측과 공산 측이 각각 발의하여 채택 된 한국문제(Question of Korea)에 관한 두 결의(A/Res/3390-A호와 A/Res/3390-B호)에서 도 공히 “The United Nations Command”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51) 더불어 매년 유 엔사의 활동 보고서는 '주한 유엔군사령부' 명의로 작성되고 있으며, 동 보고서는 미국 합참을 거쳐 미국 정부에 의해 유엔 안보리에 제출되고 있다. 이밖에도 북한은 유엔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을 타방으로 하여 1953년 7월 27일 체결한 군사정전협정(영어본)에 서명하면서, 상대방 서명자의 명 칭을 Commander-in-chief, United Nations Command로 명기52)함으로써 유엔사의 존재와

47)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 A/RES/376(Ⅴ), 7 October 1950. http://www.un.org/en/ga/

search/view_doc.asp?symbol=A/RES/376(V)(2016년 7월 31일 검색).

48) “Relief and rehabilitation of Korea”, A/RES/410(V)A-B, 1 December 1950. http://www.un.org/en/ga/

search/view_doc.asp?symbol=A/RES/410(V)(2016년 7월 31일 검색).

49) “Intervention of the Central People's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in Korea”, 1 February 1951. http://www.un.org/en/ga/search/view_doc.asp?symbol=A/RES/498(V)(2016년 7월 31일 검색).

50) “Complaint of aggression upon the Republic of Korea”, S/RES/88(1950), 8 November 1950. http://www.un.

org/en/ga/search/view_doc.asp?symbol=S/RES/88(1950)(2016년 7월 31일 검색).

51) “Question of Korea”, A/RES/3390(ⅩⅩⅩ)A-B, 18 November, 1975. http://www.un.org/en/ga/search/view_

doc.asp?symbol=A/RES/3390(XXX)(2016년 7월 31일 검색).

52)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의 정식 명칭은 Agreement between the Commander-in-Chief, Un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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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관련성’을 법적으로, 또한 명시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년이 지 난 이제 와서 The United Nations Command의 명칭과 그 실체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려 하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은 ‘금반언(禁反言)의 원칙(principle of estoppel)’에 저촉된다.53)

다음 북한은 1975년 제30차 유엔 총회 결의 3390-B호(A/Res/3390(XXX)B, 공산 측이 제출하여 채택된 결의)에 의거 유엔사는 이미 해체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전후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주장으로서 부당하다. 제30차 유엔 총 회 결의 3390-B호는 공산측이 제출하여 채택된 유엔사 해체에 관한 결의로서 그 내용 은 모두 동 사안에 관한 희망, 촉구, 고려에 관한 것일 뿐이다. 즉, 총회는 유엔사를 해 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고려’한다거나 유엔사 해체 및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를

‘촉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래 유엔 총회 결의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아니하며, 어디까지나 ‘권고적 효력’을 갖는데 불과하다.54)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과 미국 등 정전 협정 당사자들을 법적으로 구속하지 아니 한다. 따라서 한・미 양국이 이 결의에 기속 되어 당장 유엔사를 해체해야 하는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제30차 유엔 총회 결의 3390-B호의 제2항과 제3항은 남북한에 대하여 한반도 긴장 완화, 군비증강 중지, 무력충돌 방지 및 상호 무력 불행사 보장, 군사적 대결 제 거 등을 촉구하고 있는 바, 이러한 조건들이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측이 유엔사 해체를 거론, 추진하려 하는 것은 전혀 현실에 맞지도 않으며, 상기 유엔 총회 결의의 정신에도 배치되는 주장이라고 하겠다. 더욱이 북한은 지금 유엔 안보리 결의에 반해 두 차례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수차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한반 도 안보를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는 바, 1975년 11월의 결의를 원용하여 유엔사 해체를

Nations Command, on the one hand, and the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and the Commander of the Chinese People’s volunteers, on the other hand, concerning a military armistice in Korea 이다.

53) ‘금반언의 원칙’이란 일방 당사자의 표시를 믿고 타방 당사자가 이에 기하여 타방 당사자의 지위를 변 경한 때에 일방당사자는 그 후에 자기의 표시와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 없는 원칙을 말한다. D. W.

Bowett, “Estoppel before International Tribunals and It's Relations to Acquiescence”, B.Y.I.L., Vol. 33, 1957, 180면; D. P. O'Connell, International Law, 2nd ed., Clarendon, 1970, p. 13. 따라서 금반언의 원칙 에 의하면, 어느 국가가 한번 인정한 것은 그 뒤에 말을 바꾸거나 정책을 바꾸어도 나중 행위의 법적 효력이 인정되지 않게 된다. 이 원칙은 국제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요청에서 성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성호, “국제법상 독도영유권과 금반언의 원칙”, 「자유민주연구」, 제1권 제1호, 2006.12, 35-48면.

54) 장효상, “UN 총회 결의의 효력”, 「서울대학교 법학」, 제22권 제1호, 1981.3, 102-135면; https://en.wikipedia.org/

wiki/United_Nations_resolution(2016년 7월 30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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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반면 같은 날 채택된 제30차 유엔 총회 결의 3390-A호(A/Res/3390(XXX)A, 서방 측이 제출하여 채택된 결의) 제2항에서는 정전협정의 효력 존속과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 보의 충분한 유지를 보장할 필요가 있음을 유의한다는 점과 아울러, ‘정전협정을 유지 하기 위한 적절한 체제의 마련’을 유엔사 해체의 선결조건으로 명시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군정위 및 중감위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등 ‘정전협정을 유지하기 위한 적절한 체제의 마련’에 전혀 협조하고 있지 아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정전협정 유 지를 위한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은 채 유엔사 해체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일방통 행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북한 측 주장은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부각시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으로서, 다수 유엔 회원국의 의사에도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2. 평화협정 조기추진론 및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문제점

가. 평화협정 조기추진론의 문제점

우리가 평화협정의 조기(早期)체결을 추진할 경우, 한국 정부가 평화체제 구축에 적 극적으로 나선다는 이미지를 제고하는 정치적 효과를 거둘 수는 있다. 그러나 실질적 이득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 정전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협정의 조기 추 진은 정전체제를 유명무실화하려는 북한의 주장(명분론)을 인정, 맞장구를 쳐주는 형국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화협정 체결이 끝내 무산될 경우 그 같은 행동은 장래 한・미 양국에 계속해서 정치・군사적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다.

만일 현 단계에서 북핵 문제의 진전 없이 무리하게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할 경우(혹 은 두 사안의 병행 추진을 모색할 경우), 논의의 초점이 비핵화에서 평화협정으로 이 동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북한은 그동안의 비핵화 논의 미진전 책임을 한・미 양국에 전가시키려 할 것이다.55) 나아가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핵화가 진전되 지 않은 것처럼 사실을 호도함으로써 ‘선 평화협정 체결 후 비핵화’의 구도를 관철시 키려 할 것이다. 결국 우리의 선의가 외교적 자충수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55) 외교통상부 평화체제과,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공세 대응방향 검토 -평화협정 관련 회의자료-”, 내부 간담회 자료, 2010.7.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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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회담장에서는 주한미군 철수・핵우산 제거・사드(THAAD)배치 결정 철회 등 한・미동맹 관련 사안이 집중적으로 논의될 가능성이 높다. 자연스럽게 북한이 평화협정 협상을 주도하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이 협상 진전을 명분으로 과거 즐겨 구사하였던 평화협상 전술, 곧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한・미간의 틈새를 파고들 공산이 크다. 그에 따라 한・미간에 불신과 갈등 이 증폭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비핵화 촉진 유도 혹은 비핵화-평화협정 조기 타결 을 구실로) 관련국들이 한국에게 양보를 종용할 경우 우리의 국익을 훼손하게 될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아가 평화협정 체결을 조기 추진할 경우 6자회담 내 5자간 공조체제의 와해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재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와 관련해서 5자간의 공조체제가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평화협정 조치 체결(또한 후술하는 비핵화-평화협정의 병행 추 진) 시 협상 국면의 진입으로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국면이 급속하게 와해될 공산이 크다. 게다가 평화협정 이슈가 부각될 경우 5자간의 공조체제가 한・미・일 대 북・중・러 의 구도로 재편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상의 점에 비추어 지금은 비핵화에 집중해야 할 때이지 평화협정을 거론할 시점 이 아니다. 향후 북한이 비핵화에 관련된 모든 기존의 합의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천 명하고, NPT 복귀-IAEA의 사찰 수용 등 실천적 행동이 수반될 때 비로소 진정한 대화 가 개시될 수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56) 무엇보다도 우리의 최대 안보우려 사안인 북 핵 문제의 해결 전망이 투명하게 확인된 후 긴 호흡을 가지고 평화협정 및 동맹 사안 들에 대해 한・미간에 협의를 진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비핵화는 평화협정 체결의 선결 조건이자 전제인 것이다.

나. 최근 ‘비핵화-평화협정’ 병행추진론의 등장 배경과 함정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케리 미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비핵화 와 평화협정을 병행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두 가지 협상을 병행하고, 단계적으 로 추진하며,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2016.2.17, 2.23, 3.8).

이후 중국은 여러 경로를 통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론(병행론)에 대한 미국의 의

56) 문성묵, “비핵화와 평화협정 병행논의 주장의 함정”, 「국가안보전략」, 제5권 제4호, 2016.4,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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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57)

중국의 병행론은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한 전략적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중국 은 제재 국면의 관리와 동시에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둔 이중전략을 구사하 는 것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58)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유엔 안보리 결의 2270호를 이행(대북제재 동참)하면서도 미・중관계 갈등, 북・중관계 관리 등을 포 함한 거시적인 동북아전략의 일환으로 북한 측 입장을 배려하는 모습을 과시할 필요 가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중국은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6자회담 진행을 주도하려 하거나 혹은 관련 당사국의 입장을 절충함으로써 회담의 판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의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 주장과 미국의 ‘선 비핵화 후 평화협정’ 주장이 팽팽 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양자를 함께 논의하는 병행론이 최상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제재의 다음 수순으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분위기를 띄우고, 6자회담의 어젠다로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병행논의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미・북 간 접촉 결과를 지켜보면서 미국의 입장변화 가능 성을 탐색하고 향후 이 문제에 관한 이슈 선점과 주도권 확보를 시도하는 것으로도 풀 이할 수 있다.59)

다른 한편 대북제재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긴장의 수준만 높아질 뿐 북핵문제 해 결이 지지부진할 경우,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중국은 “자기들이 제의한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을 미국과 한국이 받아들이 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공산이 크다.60) 그럼으로써 향후 북핵문제 대처 및 한 반도 상황의 전개와 관련해서 미국에 밀리지 않고 자국에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복선 이 깔린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중국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병행론은 한마디로 부적절하다. 병행논의 제안은 아직 까지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은데 따른 안보불안 때문에 핵을 개발했다는 북한 측 주

57) 박종철,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의 재조명: 배경, 쟁점, 과제”, 통일연구원 Online Series CO 16-18, 2016.5.27, 2면.

58) 상게논문, 2면.

59) 상게논문, 2면.

60) 문성묵(2016), 전게논문, 3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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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을 그대로 두둔하는 논리이기 때문에 한・미 양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설령 병행 추진론을 받아들일 경우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 전선을 균열・약 화시킬 위험성이 크다. 이는 제재를 통한 북한 핵포기의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 는 결과가 될 것이다. 또한 급속도로 대화국면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일 경우 북한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상투적인 대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국제사회 에 대해 제재가 아닌 대북 인센티브(제재 중단)를 요구할 게 분명하다. 북한은 병행론 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을 야기할 것이며, 대북제재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의제를 가지고 한국의 차기 대선에 개입하려 할 것이다. 요컨대, 병행론의 수용은 비핵화를 촉진하기 보다는 전술한 바와 같이 회담 의제의 무게중심이 평화협정으로 쏠리는 현상을 야기 할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시간만 벌어주는 대화의 판이 반복될 위험성62)이 매우 크다 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의 북한 전문가인 브루스 클링너(Bruce Klingner)는 북한 핵문제 와 평화협정 연계 논의의 위험성 내지 부당성을 3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첫째, 북한이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에 대응하여 핵무기 개발을 해왔다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인 정함과 아울러 그동안 북한이 서명한 핵 프로그램 포기에 관한 합의를 무용지물로 만 드는 꼴이 될 수 있다. 둘째,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북한 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반면, 북한으로 하여금 평화협정 협상에 응하 는 대가로 상응하는 조치(한・미 상호방위조약 폐지, 한・미 군사훈련 중단, 핵우산 폐기 등)를 요구하도록 만들 것이다. 셋째, 북한이 평화회담에서 충분한 양보를 얻어내지 못 할 경우 비핵화 약속을 준수・이행하지 않더라도 이를 항변, 정당화할 수 있다.63)

61) 북한은 4차 핵실험을 강행한 직후 중대보도를 통해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다시금 촉구하고 나섰는 데, 북한 측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북한이 핵을 개발하게 된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으로 북한을 압살하며 위협해 왔기 때문에 자위권적(자위적 억제력 확보) 차원에서 핵을 개발했다. 따라서 자기들에게 핵 포기를 요구하기에 앞서 미국은 먼저 대북 적대시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미국은 대북 적대시정책의 핵심인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한미연합연습 을 영구히 중단해야 한다. 미국 측이 자기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핵포기를 검토할 용의가 있다.”

“KRINS 논평: 북한 핵문제, 평화협정으로 해결된다고?” 「국가안보전략」, 제5권 제3호, 2016.3, 7면. 이 상의 주장에 비추어 보건대, 북한은 핵개발 책임을 전적으로 미국에 전가하면서,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비로소 핵포기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비치고 있다. 결국 ‘북한은 선 평화협정 후 핵포기’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62) 문성묵(2016), 전게논문, 32면.

63) Bruce Klingner,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데 따르는 도전”, 「한반도 군비통제」, 제48 집, 2010.12, 165-166면; 제성호(2013), 전게논문(주 32), 30면.

(25)

Ⅳ. 북한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론에 대한 한국의 대응방안

1. 국내외에 ‘비핵화-평화협정’ 연계 추진의 부당성 홍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은 국제법적으로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문제이다.64) 다시 말하면 북핵 문제와 평화협정은 본질상 상호 무관한 문제이다. 북핵 문제는 북한 정권이 보편적인 핵비확산규범인 NPT(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약칭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곧 「핵무기 확산 방지조약」을 위반하여 핵개발/

핵무장을 강행함에 따라 발생한 사안이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0월 이래 5차례의 결의를 채택하여 북한의 핵개발 프로그램을 불법화・금지시키는 한편, 이를 중 단토록 하기 위해 대북 제재를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요컨대,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NPT(국제규범)에 대한 위반 행동을 국제사회가 시정하는 차원에서 추진되는 것이다.

현재는 관련국들이 긴밀히 협의하는 가운데 유엔 안보리가 전면에 나서고 있는 형국 이다.

그에 비해 평화협정 체결문제는 1953년의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문제이다. 정전협정 은 남북한과 미중을 국제법적으로 구속하는 유일한 군사조약이다. 그동안 북한이 정전 협정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구사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법적 문서인 것이다.

정전협정만으로는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므로 평 화협정으로의 대체문제를 고려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평화협정의 체결 혹은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여건의 조성’이 핵심이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황 에서 평화협정을 서둘러 체결하는 것은 오히려 한반도 평화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물 론 여건이 성숙되면 평화협정 체결도 가시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 북한의 핵무장은 안보 불안을 가중시키는 동시에 한반도 평화를 크게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 용하고 있다. 남북한 간의 군사력 균형을 파괴하는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그대로 두고 서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자는 것은 우리의 안보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단견이라고 하겠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 혹은 최소한 일정한 정도의 진전이 평화협정 체결의 전제

64) 이기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과연 필요한가?”,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16-06, 2016.4.19, 1면.

(26)

가 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요컨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은 본질상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북한은 양자를 연계하여 병행 추진하자고 주장한다. 중국도 이를 거들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평화협정의 여건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따라서 현재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국면에서 한국 정부 는 미국과 긴밀히 공조하는 가운데, 북한과 중국의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 제의를 단호하게 일축해야 한다. 즉 ‘무조건의 비핵화 추진’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더불어 우 리 국민과 세계 시민들이 북한의 선전전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절한 홍보대책을 강구 해야 한다. 우리 사회 일각(주로 진보・좌파진영)에서는 비핵화-평화협정 병행 추진 외 에 대안이 없는 것처럼 현실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9.19 공동성명에 의해 ‘비핵화-평화협정’ 병행론 차단

가. 단기적으로 대북제재 집중하되, “비핵화 진전 시 평화협정 논의 가능” 입장으로 대처

현재 유엔 안보리를 중심으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대북제재가 실시되고 있 다. 이 같은 국면에서 한국은 유엔의 대북제재 동참 및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의 전략 적 결단을 이끌어내는 데 모든 역량(외교・군사・경제 역량 포함)을 결집해야 한다. 이 시기에 한국 정부로서는 대북제재에 집중함으로써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매 우 긴요하다. 섣불리 국제공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평화협정 논의는 자제하는 것 이 적절하다.

한편 2016년 3월 3일 미국 국무부 대변인 John Kirby는 일간 브리핑에서 “그는 정전 협정의 평화해결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He [the Secretary] wouldn’t rule out the possibility that there could be discussions about a peace resolution of the armistice)”라고 언급하였다.65) 국내 언론에서는 ‘a peace resolution of the armistice’라는 표현에 대해 대부분 평화협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평화해결(a peace resolution)은 평화

65) http://www.state.gov/r/pa/prs/dpb/2016/03/253948.htm(2016년 8월 25일 검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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