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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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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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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의 나루

신정일|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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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낙동강은 민족의 대동맥이자 영남의 젖줄이다. 강원도 태백시 천의봉 너널샘에 서 발원하여 태백시내의 황지에서 발원한 황지천을 만나고 구문소를 지나 경상 도에 접어든다. 봉화군 명호면을 지나 안동에 이르는 그 강가에 수많은 나루들 이 들어섰었다.

나루는 강가나 냇가 또는 좁은 바닷목의 배가 건너다니는 곳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주의 웅진(熊津)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빠른 시기의 나 루에 관한 이름이다. 배로 사람이나 짐을 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 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 삼전도), 진(津, 정 암진, 주문진)이라 하였고, 조금 더 큰 것을 포(浦, 다대포. 삼천포)라고 하였으 며, 대규모의 바닷가 나루는 항(港, 부산항)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이름난 나루터에는 취락이 발달하였다. 그 형성 배경은 대체로 화 객(貨客)을 이동하기 위하여 도선장(渡船場), 계선장(繫船場), 주막, 여인숙, 여 관, 상가 등이 들어선 것이었다. 낙동강의 왜관·삼랑진, 금강의 강경포, 한강변 의 삼전도·양화진·목계, 영산강의 영산포, 예성강 동안에 위치한 벽란도가 이 름난 나루터 마을이었다.

나루에는 나룻배가 있어서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건너다 녔다. 강 건너로 장을 보러 다니기도 했고, 관청에 일보러 가거나 학교 다닐 때도 나룻배를 탔다. 그리고 옛 시절에는 소를 배에 태우거나 물건을 가득 싣고 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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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을 걸고 그 줄을 잡아당기며 건너는 줄배였 다. 지금도 섬진강이나 한강의 상류에는 줄배가 남아 있다.

수많은 이별이 이루어진 나루터

나루를 배경으로 전해오는 이야기 중 가장 오래 된 이야기는 고대 시가 중의 공무도하가(公無渡 河歌)일 것이다. 술병을 든 백발의 미친 노인인 남편이 나루에서 물에 빠져 죽자, 뒤따라가던 아 내가 노래를 불렀다.

임은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코 물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네.

임은 장차 어이하리오.

이 노래를 부른 여인은 이 노래를 공후로 연 주하고 뒤따라 죽었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고 이 노래를 전달한 사람이 사공 곽리자고(郭里子高) 였다고 한다.

어떤 이별보다 애절한 이별이 나루터에서의 이별이라고 한다. 수많은 나루터의 이별 중 압 권은 고려의 천재 시인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시 대동강송인(送人)이라는 시다.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시인데, 천년을 두고서 이보 다 더 슬픈 이별의 시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누구라고 정한 사람은 없지만 떠나보낸 슬픈 심정에 눈물은 대동강 물처럼 마를 날 없이 보태 지기만 하는 애틋한 마음을 시로 노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여러 강 중에서도 유독 낙동강에 나루가 많았다. 봉화와 안동 지역에도 크고 작은 나루가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사연이 많기로 소 문난 나루가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나루 였다. 낙동강의 큰 흐름이 태백산 자락에서 발 원한 내성천과 충청북도 죽월산에서 시작하는 금천을 이곳 풍양면 삼강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한 배 타고 세 물을 건넌다는 말이 있는 삼 강리는 경상남도에서 낙동강을 타고 오른 길손 이 북행하는 길에 문경새재 쪽으로 건너던 큰 길 목이다. 또 삼강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거두어들 인 온갖 공물과 화물을 배에 실어 올라와 노새 의 등이나 수레에 바꿔 실어 문경새재를 넘어가 던 물길의 종착역이었다. 여기에서 낙동강 줄기 를 따라 더 올라가면 안동 지방과 강원도 내륙으 로 연결되었다.

세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몸을 섞는 삼강나 루에 이제 나룻배는 사라지고 주막테마파크가 만들어졌다.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였던 유옥연 주모가 살았던 주막집 근처가 새로운 관광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낙동강변에서 제일 큰 낙동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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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해 있다. 상주 지역에는 열두 곳의 나루가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큰 나루가 상 주시 낙동면 낙동리에 있던 낙동나루다. 낙동강의 연원이 된 낙동나루는 고려시 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나라 안에서 가장 번성했던 나루다.

옛 시절의 낙동나루는 영남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용무를 보러 가거나 과거 보 러 갈 때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보러 가던 길 이었으며, 해방되기 전까지는 부산에서 출발한 소금배가 낙동강을 거슬러 안동 과 예안으로 올라간 길목이자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낙동나루는 조선시대에 일본 사신들이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올라오던 길목이 었다. 일본의 사신들은 많은 화물을 휴대했기 때문에 감시하고 조사하기 위한 수 참관(水站官)과 창(倉)이 낙동강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큰 포구들은 조선의 상선과 일본인들이 타고 온 배들 의 기항지로, 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갯벌장이 발달했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까 지만 해도 낙동강은 중요한 수상교통의 통로였다. 김해에서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와 상선들이 꼬리를 이었고, 주변의 객줏집과 주막에는 외지 선원들과 상인들 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낙동나루는 영남대로를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였다. 때문에 5척의 대형 나룻 배와 도선군(導船軍) 등 16명의 군인과 장교가 배치되었고, 나라에서 나루의 관 리자인 도승(渡丞)까지 파견되었다. 1920년대만 해도 소금과 비단, 그리고 당시 귀했던 인삼과 녹용을 가득 실은 배들이 낙동나루에 정박했고, 보부상들은 이곳 에 부려진 소금을 비롯한 생필품들을 등짐과 봇짐으로 져다가 안동·봉화·영양 일대를 다니며 팔았다.

낙동나루는 낙동강 하류지방의 각 조세창고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나르 던 뱃길의 최상류 종착지점이기도 했다.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생긴 것도 바 로 이 때문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조 문물(文物)의 유통은 수로(水路) 를 주로 이용했는데, 세미(稅米)의 경우, 영남지방에서는 낙동강을 이용해 상주 낙동진에 모아서, 육로를 이용해 점촌, 문경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충주 가흥창 (可興倉)에서 다시 한강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 동나루는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수산물의 4대 집산지였 을 정도로 낙동강변에서 가장 큰 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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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에만 해도 낙동나루는 뗏목이나 동력 선으로 버스를 운반하면서 나루의 명맥을 유지 했다. 그러다 1967년 낙동나루에서 20리쯤 아 래 있는 선산군 도개면 신림동에 일선교가 놓이 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근처 주민들이 관공서에 진정을 하여 낙동나루 에도 낙단교를 세우기로 했으나 다릿발만 6개를 세운 채 한참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다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후보들이 저마다 다리 를 완공시키겠다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만이어서 20여 년이 지난 1986 년에야 낙단교가 완공되어 선거 다리라는 별명 까지 붙었다. 하여간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낙동 나루는 강을 건너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는데 다리가 놓인 뒤로는 나룻배로 건너는 사람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 낙동강은 조선시대 나라의 길(國道)

조선시대 나라의 길(國道)은 육로와 수로를 통 틀어 부르는 말이었다.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고 을이 세곡과 물산이 모여 낙동강을 통해 낙동나 루로 운송되었다. 그러므로 낙동강은 오늘날 경 부고속도로의 역할을 했으며, 낙동나루는 가장 큰 포구였다.

소금이 내려졌던 나루가 낙동나루만은 아니 었다. 소금이 강의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중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었던 주 막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 주막이 언제부터 존재하였는지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으나 아 득한 옛날부터 주막 기능을 했던 것은 많았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주막의 효시는 신라시대 경 주 천관(天官)의 술집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 의 주역 김유신이 젊었을 때 천관이 술을 파는 집에 다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고려 시대인 1097년(숙종 2)에 주막이 등장하였다는 설도 있다.

옛날 강가의 나루터나 길가 혹은 큰 고개입구 에 있었던 주막은 대개 술을 팔고 마실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주가(酒家), 주점(酒店). 주사(酒 肆), 주포(酒鋪)라고 부른 주막에는 주기(酒旗) 나 주패(酒旆)라는 깃발을 달았다.

조선시대의 주막은 나그네가 하룻밤을 쉬어 가는 곳으로 대부분 술과 음식을 같이 취급했으 며, 주모는 대체로 소실이나 나이 든 작부들이 맡았다고 한다. 혼마 규스케(本間九介)라는 일 본인이 1894년에 여수거사(如囚居士)라는 필명 으로 지은 「조선잡기(朝鮮雜記)」에 의하면 술집 입구에 술상머리에 술값을 내놓는 것을 아까워 하지 마시오!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하며 술 과 함께 명태, 돼지고기, 김치를 팔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그네들이 묵어가던 주막집의 하 룻밤 요금은 얼마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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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관의 숙박요금은 터무니없이 싸다. 등잔과 따뜻한 구들이 제공되는 방에 는 요금이 없다. 그러나 나의 경우 여관에서 파는 상품을 아무것도 사지 않았기 때문에 하룻밤에 1냥씩의 숙박요금을 치렀고, 낮 동안 방에 들어 휴식할 수 있 는 요금도 같은 값으로 치렀는데, 이 낮의 휴식은 매우 한적하고 만족스러운 것 이었다. 나그네들은 하루를 묵으며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고 사소한 팁까지 포함 하여 2내지 3냥의 요금을 지불한다. 북부지방의 여관들은 밥 대신 기장을 제공 한다. 한국의 여관에서는 손님들이 술이 거나해서 취하지 않으면 소란이 없고, 설사 소란이 일어나도 곧 가라앉는다. 조랑말들이 싸우고 그 소란을 가라앉히려 고 마부들이 후려치고 욕하는 소리가 새벽이 오고 나그네들이 움직이기 전까지 의 주요한 소동이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서울에서 과거라도 있게 되면 과거 보러 가는 손님들로 주막은 만원을 이루었 다. 주막에 들어 돈을 낸다고 하여 특실에 들거나 상석에 앉지는 못하였다. 지위 나 권세가 낮으면 천금을 낸다 하여도 구석방이나 마루방으로 밀려나게 마련이었 다. 양반 중에서도 권세가 있는 자가 특실에 들어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어쩌 다 손님끼리 시비가 붙으면 따라온 하인들끼리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그럴 경우 주막 주인은 돈도 못 받고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골탕만 먹게 되었다.

강이 있으면 나루가 있고, 나루에는 나룻배가 있으며, 나룻배 뱃사공이 있다.

나루터에서 일하는 뱃사공을 고려시대에는 진척(津尺)이라고 하였고, 역정(驛 丁) 등과 마찬가지로 천민층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역참에 역졸이 있었던 것 과 더불어 각 나루와 육로를 통하여 조세곡이 집결되는 강변과 해안에 설치된 조 창(漕倉)에는 조졸(漕卒), 수부(水夫)가 있었다. 그들은 몸은 양인이나 역은 천 역에 종사하여 천류의 대접을 받았다. 또한 전국에 산재한 각 나루에는 진부(津 夫)라고 불리는 뱃사공이 있었다.

오광대 놀이가 시작된 율지나루

강변의 풍경이 마치 꽃동산처럼 아름다워 화원(花園)이라 이름 지은 대구의 화원 에서 고령군 다사면 평리동으로 건너가는 나루가 사문진 나루였다. 동래(부산), 김해 등지의 장삿배가 소금과 여러 가지 물품을 싣고 이곳에 이르러 대구의 물품 과 바꾸는 큰 나루였고, 물길을 따라가면 개포나루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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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엽 이후 낙동강 중류의 최대 나루터였던 율지나루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 지역 농산 물의 집산지였다. 전국의 보부상과 장꾼들이 몰 려들어 큰 장터를 형성했던 율지나루터에서 경 상도 지역에서 성행하는 가면무극인 오광대놀이 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상남도 여지집성(輿地集成)」 초계지에는

밤마리 장은 초계군 북쪽 30리에 있으며, 초하 룻날이 장날이다. 한 달에 여섯 번 장날이 서는 데, 고깃배, 소금배, 장삿배가 와서 머문다고 실 려 있고, 「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에는 밤마리 장에 대해 강가 나루에 장삿배와 고기잡이배가 숲처럼 왕래하고 노 젓는 소리와 뱃노래가 서로 어울려 끊어질 사이가 없다고 실려 있다. 밤마 리 장은 정기적인 향시(鄕市)가 대규모로 열리 기도 했지만, 난장이라고 하여 일정기간 동안 집 중적으로 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30년까지만 해도 수심이 깊어서 장삿배가 빈번히 왕래하고 남해안의 해산물과 대구 왜관 등 내륙지방과의 교역이 이루어져 수많은 길손 들이 오고갔던 나루터에 1999년 말에 율지교가 만들어진 뒤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작 은 배만 묶여 있을 뿐이다.

남강변의 큰 나루였던 정암나루

낙동강에서 가장 큰 지류인 남강은 창녕군 남지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다시 강은 남지읍을 지나고 함안보를 지나 임 해진 나루에 이른다. 「해동지도」 지지에 임해 진은 영산읍 읍치로부터 28리 거리에 위치하며,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부곡천의 강폭이 70자이 고 강을 건너는 배 한 척이 있다고 실려 있고,

「임원십육지」에 부곡면 청암리에 위치한 임해 장은 4일과 9일이 설장일(設場日)이라고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임해진 나루를 중심으로 장시 가 개설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임해진은 옛날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창원시 북면 외산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임해진나루였다.

번성했던 수산나루와 명례나루를 지나면 밀 양강이 낙동강으로 접어드는 삼랑진에 이른다.

이곳에 있던 뒷기미나루에서 노 젓는 뱃사공이 부르던 뒷기미 뱃노래가 재미있다.

뒷기미나리는 눈물의 나리 임을랑 보내고 나 어찌 살라고 아이고데고…… 성화가 났네

낙동강을 배경으로 수많은 글을 남긴 김정한 의 소설 「뒷기미나루」에도 나룻배에 대한 내용 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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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러한 뜨내기 배들은 대개 소금이랑, 미역, 남비, 기타 일용품 등속을 싣 고 다니며 강가 사람들과 물물 교환해 가는 것이 일이었다.

김정한의 소설을 보면 대개 나루터 뱃사공은 배로 손님들을 건네주는 일만 하 는 게 아니라 그 근처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가 누구? 하고 부르면 나가서 배 를 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랑진을 지난 강물은 양산시 물금읍 물금나루에 이른다. 이 나루는 낙동강에 자리 잡은 모든 나루가 폐쇄되었던 때도 폐쇄되지 않았다 해서 금하지 않는다는 뜻의 물금(勿禁) 또는 물구미라고 불린다.

강폭은 더없이 넓어져 흐르고, 흐름을 잊은 채 흐르는 낙동강은 구포에 이른 다. 구포교가 놓이기 전에는 이곳에 김해시 대동면 초정리 기우막으로 건너가던 구포나루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구포역이 들어섰다. 사 라진 것이 어디 그뿐일까? 낙동강 700리에 배다리 놓고, 물결마다 흐르는 행렬 진 돛단배에, 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 구포랑 선창가에 갈매기 춤추 네. 일제 때까지 번성했던 보부상들이 구포 지역에서 불렀다던 구포나루 선창노 래를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맺음말: 낙동강 나루의 어제와 오늘

영남을 적시며 흐르고 흘렀던 낙동강의 물길은 일제가 이 땅을 수탈하기 위해 놓 은 경부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그 역할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나그네들이 줄을 이었던 옛길은 신작로가 되었고, 낙동강을 따라 영남지방 문물의 교류를 책임졌 던 배의 역할을 기차와 자동차가 대신하면서 낙동강 물길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 었다. 나라 안에 새로운 길들이 거미줄처럼 수없이 만들어지면서 갈수록 낙동강 의 물길은 빛을 잃어갔다.

수없이 많은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낙동강의 물길을 따라 나룻배를 타고 오갔 다. 그러나 나루는 사라져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수없이 많은 나라가 일어서고 쓰러지는 것을 지켜본 나루들, 그 나루들이 지금은 이름으로만 남아 있 다. 하지만 나루야말로 이 나라의 역사에서 귀중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우리 역사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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