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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의 인문지리와 삶 1)

이윤선|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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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영산강영산강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삶은 끊임없이 교섭하고 충돌하며 그 결과들을 상 속시켜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영산강문화라고 말한다. 영산강 생활문화의 범주는 매우 넓어 그 양상을 짧은 지면에 포착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인 의식주만 하더라도 요약하여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강과 바다의 긴밀한 넘나 듦 속에서 형성되어온 문화라고 한다면 강문화의 특징과 바다문화의 특징, 나아 가 내륙문화의 특징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이 온전한 기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 일 것이다. 이를 위해 반농반어 기반의 생활패턴 혹은 포구를 통해 쉼 없이 다도 해와 소통했던 문화적 배경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다와 육지의 매개 체로서의 영산강이 서남해 도서지역과 여타의 내륙을 소통시키는 인문생태적 문 화의 길(Culture Road)이었음을 재확인하는 방편이며, 필자가 지금 영산강의 문 화에 대해 문제 삼고자 하는 것, 나아가 시대적 화두로 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 다. 영산강의 물길이 차단되고 오염이 심화되는 생태현상으로서의 현재는 영산 강문화권 사람들의 인식 즉, 영산강에 대한 현재의 마음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 다. 인문지리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1) 이 글은 이윤선. 2011. “영산강의 인문지리와 ‘갱번’문화 試論”. 도서문화 제38집. pp61-93의 일부를 요약·발 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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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문화의 토대, 영산강의 어로와 농경

영산강의 어로와 농경문화는 그곳에 사람이 살 기 시작한 이후 줄곧 존속되어왔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특징적인 것은 영산강 중류로 이해 되어 온 나주 영산포까지 바다를 기반으로 하는 어로생활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흑산도로 대 표되는 섬 지역의 홍어가 나주 영산포를 기점으 로 속칭 삭힌 먹거리의 상징성을 갖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면상 영산강 상류에서 하 류에 이르는 어로와 농경 관련 조사 자료 열 가 지를 통해서2) 영산강 상·중·하류의 맥락을 도 식화하면 <표 1>과 같다.

상류를 제외한 영산강 중류 이남에서는 어로 생활이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산강 자체가 본래 습지가 많은 구릉지와 개펄지역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로생활이 중 심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발굴된 고대의 농경 흔적들을 통해 논과 밭의 경작 생활 또한 부분 적으로 영위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미 광주 신창동 밭유구를 통해 초기 철기시대 영산 강 유역 밭농사체계의 일면이 보고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5~6세기 철제농기구의 보급을 통해 생산력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도 확인된다(전덕재. 2000).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류와 인접한 지역에서는 하구언이 완공되기 이 전까지는 바다를 기반으로 하는 어로생활이 지 속되어왔다. 이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면, 영산강문화권은 반농반어를 중심으로 하는 권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바

<표 1> 영산강의 어로와 농경

분류 상류(농경 위주) 중류(농경, 어로, 강상 상업) 하류(어로, 반농반어)

현지 사례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농경

광주시 서창 농경

나주 동강면 옥정리 어로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 옹기

영암 신북 갈곡 농경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 어로

무안 옥암 초당산 반농반어

영암군 나불도 어로

목포 하당 갓바위마을 어로

영암 용당마을 어로

특성 강상 물류의 흔적만 남아 있음

농경 위주 문화권

농경과 어로를 병행하는 권역임

특히 옹기 제작·판매 등 강상 교역이 발달하였음

어로를 중심으로 하되 반농반어적 특성이 나타남

반농반어는 서남해 연안도서의 특성이기도 해서 관련성을 찾을 수 있음

2) 필자가 직접 조사한 아래 사례들을 통해서 추출하였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위의 글을 참고하면 된다.

사례 1: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들노래와 농경생활.

사례 2: 광주시 서창 만드리와 농경생활.

사례 3: 나주 동강면 옥정리 3구 복룡마을 안교춘(당시 85세, 강변어업)의 어로생활.

사례 4: 무안군 몽탄면 몽강리 홍영수(남, 당시 68세, 옹기장이), 이오복(여, 당시 77세, 옹기장수), 문인례(여, 당시 76세, 옹기장수), 권원 금(여, 당시 85세, 옹기장수)의 옹기 제작과 판매 생활.

사례 5: 영암 신북 갈곡마을 들소리와 농경생활.

사례 6: 영암군 삼호면 산호리 중촌마을 김연순(당시 61세, 강변어업)의 어로생활.

사례 7: 무안군 옥암리 초당산 마을 안창규(당시 75세, 채소 농사)의 반농반어 생활.

사례 8: 영암군 나불도 전도영(당시 49세, 어업)의 어로생활.

사례 9: 목포시 하당 갓바위마을 김복실(당시 55세, 어업)의 어로생활.

사례 10: 영암 용당마을 박복련(당시 68세)의 어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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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의 물고기를 대상으로 하는 어업이 영산강 중류 이남에서 광범위하게 영위되 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물의 교류, 문화의 창조

위 사례는 서남해 도서지역과 끊임없이 소통해온 권역이라는 특성을 포함한다.

물길을 따라 다도해 섬과 영산강 중류를 넘나드는 생활이 이어졌다는 점은 영산 강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무안 몽탄 옹기의 경우는 심지 어 제주도까지 풍선으로 판매를 다녔다는 점이 주목된다. 서남해 도서지역을 제 외하고 영산강의 경제권 혹은 교류권역을 거론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러한 맥 락은 영산강 상류까지 배가 드나들었던 고대로 올라갈수록 더욱 명료해질 것으 로 생각된다. 이미 역사적 물증들을 통해-나주의 회진나루, 영암 상대포 등-동 아시아까지 문명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영산강의 경제 기반은 강변에 산재했던 포구와 서남해 도서지역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민중들의 문화가 소통된 맥락을 가지고 있다. 무안의 장시는 그중 대 표적으로 거론할 만한 것이다. 무안은 향시의 시원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고석 규. 2007. pp311-319). 최초의 장시가 경인년, 즉 1470년에 열렸고 그 장소가 전 라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일하게 거론된 읍명이 무안이었다는 점에서 이 를 엿볼 수 있다. 「성종실록」을 보면 전라도 지역에서 흉황의 자구책으로 시포를 열고 장문이라 칭하는 교환·교역기구를 만들었다고 하였고, 첫 발생지는 전라 도의 무안 등 여러 고을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3) 장시의 발상 혹은 교역의 증대 는 자연스럽게 장터의 문화와 연결된다. 일차적으로 장터의 문화는 유통문화라 할 수 있다. 또한 장터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놀이문화, 혹은 난장문화를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 판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놀이의 형식들이 후대에 오면서 일정한 틀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무안군의 강용환4)이 한국 최초 로 창극을 시도하고 강태홍이 가야금산조를 새롭게 짠 것도 이런 문화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이윤선. 2008).

의 음악 혹은 의 예술을 좀 더 확장하여 해석하면 노래로서의 판 소리와 기악합주로서의 판음악으로 확장된다. 창극의 시조로 불리는 강용환

3) 성종실록 권27. 성종 4년 2월 임신.

庚寅之荒 全羅道人民 自相聚集 以開市脯 號爲場門 4) 강용안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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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불리는 영암의 김창조 및 그 예하의 명인들, 대금산조의 창시 자로 불리는 진도의 박종기 등도 이와 관련하 여 거론할 수 있다. 화순5)의 박종선은 아쟁산조 를 처음 짠 명인으로 불리며, 월북한 박동실6)은 일제강점기에 창작판소리 열사가를 지어 민족 혼을 불러일으켰던 명인이다. 목포 부두노동자 의 애환을 소재로 일로읍 마을회관에서 초연되 었던 무안의 품바극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남도문화권의 세습무 자체가 무 가, 춤, 놀이를 통한 예술성, 연희성 외에도 이른 바 난장성이 강조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 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속음악만으로 끝나지 않고 마당판의 예술음악으로 재창조되었기 때 문이다. 산조가 짜이고, 판소리가 전개되며 창 극이 시도된 것이 이러한 재창조적 맥락과 무관 하지 않다.7)

강해(江海) 교섭지의 인식

따라서 영산강의 생활문화는 어로와 농경을 경 제적 기반으로 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때의 어로는 영산강이 바닷물과 강물이 교합되는 곳 이라는 점에서 강상어로와 해상어로의 혼융으로 나타난다. 농경은 고고유적에서부터 현재에 이 르기까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 영위되 는 생활방식이다. 고고유적에서부터 영산강 하 구언 준공 이전까지 영산강의 도처에서 산견된

유물 및 풍경들이 이를 말해준다. 어로와 농경, 반농반어를 중심으로 생활했던 영산강 생활문화 의 특징이 바다와 강의 교섭 혹은 습합이라는 관 점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의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륙과 도서지역을 매개한 영산강권역 사람들의 마음의 지평, 혹은 인식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째, 갱번(강변)이란 용어 혹은 개념을 공 유하는 문화적 영역을 주목한다. 갱번은 개펄 이 있는 강물과 바닷물이라는 의미 외에도 바다 와 강의 교류지역 혹은 습합지역이라는 뜻으로 선택할 수 있는 용어다. 영산강을 중심으로 하는 목포권역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는 여수순천권 역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 광양권에서는 강변을

갱변이라고 하고(이기갑 외. 1998. p16), 진도, 신안을 포함한 목포권에서는 개(바다)갱번 이라고 한다. 거론한 지역은 일찍이 강을 통해서 바다의 문화를 유입하고 내륙의 문화를 바다 및 섬으로 교류시킨 문화접변의 현장이다. 반면 영 산강 내륙지역에서도 포(포구)로 불렀던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영산강 자체를 바다 로 인식했음을 확인해주는 물증이다. 이 교류사 를 주목하지 않으면 영산강문화 혹은 남도문화 의 온전한 의미들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강과 바다를 토대로 하는 갱번이라는 장소의 의미가 큰 이유다(이윤선. 2007a. p448).

둘째, 매향비와 강해(江海) 결절지에 관한 사 람들의 인식을 주목한다. 매향비는 널리 알려진

5) 화순은 영산강과 섬진강을 공유하는 지역이지만 광주를 포함하여 영산강권역의 문화예술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 박동실은 담양의 지실 마을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명창인 김소희와 다수의 명인들을 길러냈다.

7) 다른 지역에는 이 같은 ‘판’이 없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유독 이 지역에 ‘창시자’급의 예인들 및 애호 민 중들이 몰려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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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 향나무를 강물(혹은 계곡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의 개펄에 묻고 그 시 기와 장소, 관련 집단 등의 정보를 비문에 남긴 것을 말한다. 이 의식은 미륵신 앙과 연결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토대 삼아 영산강과 서남해 연안 혹은 도서 지역에서 발견된 매향비에 대한 그간의 강과 바다의 결절지라는 인식을 추적해 볼 수 있다.8)

셋째, 고려 이후 존속되었던 3대 해신사 중의 하나인 남해포의 위치를 주목한 다. 남해포의 남해신사(南海神祠)는 흔히 남해당(南海堂)이라고 부르는데, 폐 허로 남아 있다가 1998년에 영암군에서 매입하여 2001년 이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윤선. 2006b. p417). 남해신사의 제의는 고려시대 전남지방의 국제(國祭) 중 하나다.9) 조선시대의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국사로 모신 삼 대 해신사가 기록되어 있다.10) 동해를 수호하는 동해묘(東海廟)를 강원도 양양 에, 서해를 수호하는 서해단(西海壇)을 황해도 풍천에, 남해를 수호하는 남해신 사(南海神祠)를 전라도 나주에 두었으며, 북쪽은 바다가 없어 해신(海神) 대신 강신(江神)을 모셨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윤선. 2006b. p420). 이 글에서 주목 하는 것은 남해포의 위치가 영산강 본류에서부터 삼포천 갈래 물길에서 약 5km 지점에 위치하며 이를 남해 바다의 기점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앞선 사례들 과 비교해서 말하면, 즉 남해포의 하단은 바다라는 뜻이다.

넷째, 영산강 조수간만의 경계를 주목한다. 근대시기 조수간만의 차에 의해 해 수가 유입되거나 빠지는 북방한계는 나주시 학산 지석천 갈래지점을 꼽고, 평상 시의 조수한계는 현재의 나주대교를 꼽는다(변남주. 2011). 하지만 포구를 통해 배가 드나들었다는 문헌 기록이나 지명이 상당수 확인된다는 점에서 조수 감조 구간이 훨씬 깊은 내륙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영산강의 지천에

8) 첫째,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매향비다. 비문에 의하면 조선 세종 12년(1430)에 세워졌다. 미암면 채지리는 영산 강 남단 소댕이나루 갈래 물길에서 영암천을 따라 남동쪽으로 약 7km 거리에 위치한다. 둘째, 영암 엄길리 암각 매향비다. 조성 시기는 고려 충혜왕 5년(1344)이다. 엄길리는 영암군 서호면에 위치하며 영산강과 삼포천이 만 나는 갈래 물길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셋째, 영암 군서면 구림리의 정원명석비(貞元銘 石碑)다. 당나라 연호 정원 2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으로 매우 빠른 시기다. 향 장(香藏), 합향(合香) 등의 글자로 보아 매향비로 보고 있다. 영암 구림은 널리 알려진 대로 대당 포구였던 상대 포가 있던 곳으로, 영산강과 삼포천이 만나는 갈래 물길에서 동쪽으로 약 9km 지점에 위치한다. 넷째 해남군 맹 진리 암각 매향비로, 태종 6년(1406)에 조성되었다. 맹진리는 현재의 영암방조제로부터 동남쪽으로 24km 지점 에 위치해, 영산강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영암호와 직접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신안 군 암태면 송곡 매향비로, 영산강의 하구에서 북서쪽 바다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한다.

9)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4집. 56면.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 현종 19년(1028)에 이르러 비로소 사전(祀典)에 올 렸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보다 앞선 신라시대에 국제를 지냈던 곳은 영암 월출산과 완도 청해진으로 알려져 있 고, 고려 때 국제를 지낸 곳은 지리산과 무등산, 금성산 등이다.

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영암지역에서는 ‘남해당’이라고 부른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p594.

“시종면 옥야리에서는 남해당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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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되는 담양, 광주, 장성, 화순 등지에 널리 분 포해 있는 지명이 이를 말해준다.11)

다섯째, 해로와 물길에 따른 전통적인 행정권 역을 주목한다. 전통적으로 서남해의 행정권역 이 해로를 따라 정해졌다는 점에서 주목의 필요 성이 많다. 해로의 결절지에 포구들이 존재했고 그중 대표성을 갖는 지역이 관할지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영암의 상대포구가 대당 교통로의 거 점이었던 점이나 영산강 중부의 회진나루가 교 통로의 거점지역이었던 것은 바로 그곳까지 군 선이나 무역선 등이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1천 여 년 전 영산포 수심은 지금보다 50cm가 낮 아 대형 전함도 출입할 수 있었다(변남주. 2011.

p373). 이 같은 맥락에서 행정권역은 영산강 뱃 길을 통해서 서남해 연안이나 섬 지역으로 연결 되었다. 현재 신안군 일부의 지명이 나주군도였 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고려초기의 초기청자12) 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해남의 화원반도를 비 롯해 강진군, 영암 미암면, 해남 현산면, 해남 마 산면 등이 모두 나주목 영암군에 속했다. 다시 말하면 뱃길을 통해서 영산강과 연안해로가 연 결된다는 점에서 공간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권 역이 관할구역으로 정해졌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흑산도의 홍어와 영산포의 관계 를 주목한다. 영산강과 서남해의 소통 맥락을 거 론함에 있어 홍어와 영산포를 빼고는 말하기 어 려울 만큼 그 상징성이 강하다. 재론의 여지가 없이 영산강 물길을 통해 흑산도의 홍어가 영산

포의 장터에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영산 포에서 개최되는 홍어축제나 나주시 주최의 영 산강 축제 등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이런 맥 락은 논증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홍어를 삭히는 전통과 그 과정을 말할 때도 영산강의 뱃길을 언 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영산포의 영산마을 이 흑산도의 부속 도서인 영산도 사람들이 소개 되어 살기 시작한 곳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갱번’과 ‘귄’의 영산강 인문지리

이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다를 강으 로 인식하거나 강을 바다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머문 지점들이 영산강과 서남해 도서지 역 혹은 서남해 해안지역의 도처에 형성되어 있 다는 점이다. 이것이 대개 강과 바다의 결절지라 는 관점으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 역설적으 로는 강과 바다를 크게 구분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식이 이 지역에서 공유되었다는 점에 유의해 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갱번이라는 호명방식 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을 인문지리 적 관점의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이 지 점들이 꼭 강과 바다의 결절지나 해로상의 인식 에 머문 것은 아니다. 이것이 확대되어 이른바 남도문화라는 권역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을 미학적 준거로 삼는 사람 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 남도문화 혹은 그 문화의 젖줄인 영산강문화의 모든 것을 포용

11) 담양군 봉산면 와우리 부근에는 ‘조수고개’, 광주 하남 안청동에는 ‘소금나들이’, 황룡강가인 광산 송산교에는 ‘염해평(소금바다들)’, 장성 삼계 덕산리에는 ‘해평’, ‘상선들’, 장성 서삼 송현리에는 ‘바다들’, 북일면 성산리에는 ‘구해’, 화순읍 다지리에는 ‘잠바댓들’, 이양면 소재 지에는 ‘배골(배고을)’ 등이 있다. 광주에는 현재 전남대학교 일대의 견훤 할거지로 추정되는 곳의 왕포라는 포구 지명이 남아 있다. 이 외 에도 영산강 지천에는 물길이나 포구와 관련된 이름이 산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2) 흔히 녹청자 등으로 호명해왔는데, 본격적인 청자 생산 이전의 초기형태를 ‘초기청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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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큼 상징적인 용어다. 일찍이 지춘상은 남도문화를 귄의 문화로 규정하였 다.13)귄대가리, 귄지다, 귄 있다, 등으로 말해지는데, 단순히 귀엽 다, 아름답다, 잘한다 등의 의미를 넘어선 남도문화의 미학적 준거다. 예를 들 어 아무리 못생겼어도 하는 모양이 마음에 쏙 든다면 그것을 일러 귄 있다라고 한다. 맑고 고운 목소리가 아니라, 탁한 목소리를 귄 있다고 여기는 미학 때문에 남도 무속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로 승화될 수 있었다.14) 따라서 은 예로부터 남도 사람들의 미학적 준거로 작용해왔으며, 영산강문화 나 남도문화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작동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이윤선.

2007a. pp448-449).

이를 정리해보면 상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서지역과 영산강이 끊임 없이 만나고 소통하는 공간 속에서 꽃피워낸 것이 이른바 영산강문화라 할 수 있 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남도 특유의 문화예술을 끊임없이 창조해내는 이 능력 이 영산강권역을 중심으로 하는, 즉 섬과 강과 내륙이 습합되는 문화접변의 지리 적 조건을 통해서 생태적으로 잉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이윤선. 2007b. pp241- 242). 자연스럽게 어로문화와 농경문화가 혼융되어 이른바 귄 있는 문화를 태동 한 생태적 배경이 강해(江海) 결절지 혹은 교섭지라는 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참고문헌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4집.

성종실록 권27.

고석규 외. 2007. 무안군의 문화원형. 전남 : 목포대도서문화연구소·무안군.

김경수. 1995. 영산강 삼백오십 리. 광주 : 향지사.

나주시지편찬위원회. 2006. 나주시지. 전남 : 나주시지편찬위원회.

남해신사제례보존회. 2002. “남해신사의 역사적 배경과 연혁”. 프린트물.

변남주. 2011. “영산강 중하류 뱃길 환경과 돛단배 항해술”.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4권 제1호. pp373-407.

윤선자. 2009. “영산강유역의 민족운동 사적지와 기념시설”. 대구사학 제94집. pp93-124.

이기갑 외. 1998. 전남방언사전. 경기 : 태학사.

이윤선. 2006a. “소포만의 간척기 민속음악 변화 연구”. 도서문화 제27집.

13) 지춘상은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로, 남도민속학의 시조이자 대부로 꼽힌다. 고싸움, 강강술래, 씻 김굿 등 수많은 남도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업적을 남겼다.

14) 이는 판소리의 기원설 중에서 ‘남도무가기원설’에 입각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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