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과 조계의 도시, 상하이
임춘성 | 목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모던 상하이
근현대 중국의 대외교류 창구는 주장(珠江) 삼각 주와 창장(長江) 삼각주 사이를 오갔다. 1840년 이 전에는 광저우(廣州), 1843년 개항 이후부터 1949 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전까지는 상하이(上海), 1950년대 이후에는 홍콩(香港),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에는 광저우와 선전(深圳), 1990년대 이후에는 상하이가 중심 역할을 했다. 중국 근현대 장기 지속 (longue durée)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하이는 가장 오 랜 시간 동안 중국의 대외 창구 노릇을 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1842년 난징(南 京)조약이 체결된 다음 해 상하이는 개항을 맞이 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다. 개항 이 전부터 상하이는 인근 도시의 기능을 흡수하고 있
었고, 그보다 훨씬 이전인 1685년 청나라 강희제가 개방했던 네 곳의 항구 가운데 하나인 강해관(江 海關)이 상하이 인근인 쑹장(松江)에 자리하고 있 었다. 그리고 명나라 정화(鄭和)의 대항해(大航海) 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렇듯 상하이의 지정학 적 가치는 일찌감치 주목을 받아왔었고 1843년 개 항을 계기로 집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다.
난징조약 직후 개항된 상하이에 가장 먼저 들 어온 사람들은 서양인들과 무역에 종사했던 광둥 인이었고, 뒤이어 오랜 도시 경영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인근의 닝보(寧波)인들이 몰려왔다. 전자가 상하이의 대외무역을 주도했다면 후자는 주로 금 융업에 뛰어들었다. 모던 상하이는 광둥 무역과 닝 보 금융의 경험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몸소 서양 을 시험(以身試西)’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창 영 화 와 도 시 4
색, 계
(Lust, Caution)안했다. 1949년 이후 상하이 금융인들은 마오쩌둥 (毛澤東)뿐만 아니라 장제스(蔣介石)의 손아귀에 서 벗어나기 위해 홍콩을 선택했다. 이들은 서유럽 식 금융업과 상업 실무를 습득한 최초의 중국인으 로, 서양의 규칙에 따라 국제적인 금융게임에 참가 했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전 세계 화교들의 국경 없는 네트워크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80 년대 대륙의 개혁개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상하
이는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을 압축적으로 구 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하이와 상하이인의 정체 성을 파악하는 것은 근현대 중국의 핵심을 이해하 는 것이기도 하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수상작 ‘색, 계’
2012년 김기덕의 ‘피에타’에게 황금사자상을 안겨 줬던 베니스국제영화제는 중 국 영화와 인연이 남다르다.
1989년 허우샤오셴(侯孝賢) 의 ‘비정성시’를 필두로, 장이 머우(張藝謀)가 1992년 ‘추쥐 의 재판(귀주 이야기)’, 1999 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황금사자상을 두 차례 수상 했다. 그리고 2005년 리안(李
상하이
임춘성 | 목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상하이 푸둥지구 모습
색, 계(Lust, Caution)
● 리안 감독, 2007년 개봉
● 양조위, 탕웨이 주연
●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2007) 수상
● 제44회 대만 금마장영화제 최우수감독상(2007) 등 7개 부문 수상
● 제6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 진출(2008)
● 제61회 영국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진출 (2008)
安)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2006년 자장커(賈樟柯) 의 ‘스틸 라이프’가, 2007년 다시 리안의 ‘색, 계’가 3년 연속 황금사자상을 석권했다. 3년 연속 수상은 당시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중국과 중국인 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문화 올림픽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한껏 높이려 벼르고 있던 중국 에게 베니스국제영화제 3연속 대상 수상은 문화대 국이라는 명예를 안겨준 셈이었다. 리안이 미국 국 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국경을 뛰어넘어 화인(華人)이라는 명명으로 그를 중국의 품으로 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가을과 겨울 사이 홍콩과 타이완 그리 고 대륙에서 리안의 ‘색, 계’는 대대적으로 환영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기 립 박수와 함께 “리안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리안 신화, 리안 기적, 세계적으로 공인된 감 독,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중국계 감독 등의 수식어 가 어색하지 않게 그는 상업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쥐고 대륙·홍콩·타이완을 넘나들었 고, 중국어 세계와 영어 세계를 횡단함으로써 ‘화인 의 빛(華人之光)’이 되었다.
리안의 ‘색, 계’는 ‘두터운 텍스트(thick text)’ 다. ‘색, 계’의 두터움은 우선 서사구조에서 비롯한다.
‘색, 계’는 최소한 세 개의 이야기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에서부터 보면, 리안의 영화 ‘색, 계’, 장아 이링(張愛玲)의 소설 「색, 계」, 그리고 딩모춘(丁黙 村)-정핑루(鄭苹如) 사건(일명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이 그것이다. 오리지널 이야기는 미인계 간 첩 이야기로, 이는 장제스(蔣介石) 정부(난징→ 충 칭) 및 왕징웨이(汪精衛) 정부(우한 → 상하이)와 관계된 국민당 내부 모순과 잇닿아 있고, 나아가 일본과 연계되어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상하이의 특수한 상황, 즉 조계지라는 특성과 긴밀한 관계 를 맺고 있다.
장아이링은 당시 왕징웨이 정부의 고위직을 맡 고 있던 남편 후란청(胡蘭成)을 통해 이 사건을 전 해 듣고 소설화했다. 그녀는 「색, 계」에서 이(易) 선 생과 왕자즈(王佳芝)의 이야기를 모던한 ‘재자(才 子)+가인(佳人)’의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이 ‘재자 +가인’ 모델에는 남편인 후란청에 대한 장아이링의 정서가 녹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안의 ‘색, 계’는 장아이링의 「색, 계」를 토대로 삼아 많은 공백을 메우고 있다. 주인공 이 선생(易 黙成)의 이름에는 ‘시베리아 모피점 사건’의 주인 공 딩‘모’춘과 장아이링의 남편 후란‘청’의 이름이 혼합되어 있다. 이모청은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않 아 외로운 인물이다. 그는 어두운 곳이 싫어 영화관 에도 가지 않고, 손님이 적기 때문에 맛이 없는 식 영 화 와 도 시 4
영화의 주인공인 이모청(양조위 분)과 왕자즈(탕웨이 분)
은 여주인공 왕자즈에게도 홍콩대학 생활을 부여 해 장아이링의 그림자를 투영시켰다. 영화로 개편 된 ‘색, 계’는 장아이링의 원작보다 훨씬 정채롭다.
특히 베드신은 대륙의 노출 수위를 넘나들었고 국 민당 내부의 모순을 다룬 것 또한 그동안의 금구 (禁區)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금지된 것을 돌파 하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똑같은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임 에도, ‘스틸 라이프’는 일부 지식인에게 호평을 받 았지만 중화권 관객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또한 러 우예(婁燁)는 ‘여름 궁전(頤和園)’에서 ‘색, 계’와 비 슷한 수준의 노출과 금구(천안문 사건)를 다뤘음에 도 당국으로부터 5년간 영화제작 금지 처분을 받았 다. 왜 중국 대중은 ‘색, 계’에 환호하고, 왜 중국 당 국은 ‘색, 계’에 관대한가? 과연 ‘색, 계’의 감동의
왕자즈는 이 선생에게 “빨리 도망치세요”라고 말한 다. 이 말을 할 때 후과(後果)를 인지했는지는 모르 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채석장에서 동창 여섯 명과 함께 총살당한다. “여성의 마음에 이르는 길은 음 도(陰道)를 통한다”는 장아이링의 언급을 남성이 체득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왕자즈가 다이아 반지 와 육체적 쾌락으로 구현된 이 선생의 사랑을 ‘진정’ 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비해 돈을 주고 데려왔던 부인이 딸을 데리고 돌아간 지 10여 년 만 에 모녀를 찾아 나선 한싼밍(韓三明)의 이야기(‘스 틸 라이프’)는 진정성 면에서 왕자즈의 그것을 압 도한다. 한싼밍의 이야기는 감동적임에도 불구하 고 관객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여러 요인이 있 지만 섹슈얼리티(sexuality)의 부재를 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리안의 ‘색, 계’는 섹슈얼리티로 넘쳐
영화에서 재현된 1940년대 상하이의 레스토랑(좌)과 거리의 모습(우)
난다. 전통적인 ‘재자+가인’ 서사모델을 모던한 수 준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드신 연출은 특 이한 미장센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 계 현상은 상하이 노스탤지어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국제적 공인 등이 중층적으로 교직된 결과 라 할 수 있다. 물론 국제적 공인의 배후에는 미국 의 권위가 존재하고, 미국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은 감독에 환호하는 것은 중국의 미국 숭배와 미국 상 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문화민족주의 기제가 자리하고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의 빛과 그림자
이야기의 배경에 1940년대 초 상하이가 놓여 있어 영화의 ‘문화적 두터움’을 더해 주고 있다. ‘색, 계’에 재현된 1942년의 상하이는 매우 다채롭다. 특히 국 제화 수준이 남다르다. 상점(커피숍, 보석점 등) 직 원부터 교통경찰, 레스토랑의 피아니스트 등에 이르 기까지 외국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주인공도 수 시로 외국인 점원에게 영어로 의사소통한다. 심지어 배급으로 연명하는 줄 선 외국인들과 가창(街娼)으 로 보이는 거리의 외국 여성까지도 눈에 띈다.
그러나 꼼꼼하게 보면 ‘색, 계’에서 보여주는 상 하이의 모습은 1990년대에 크게 유행한 ‘상하이 노 스탤지어’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큰 길의 모 습은 난징루(南京路)에 국한되어 있고 주인공의 패 션은 대형 화보잡지 「양우(良友)」의 수준을 넘어서 지 못한다. 모던 치파오(旗袍)를 입은 여성과 서양 식 정장을 입은 남성의 조합은 모던한 ‘재자+가인’ 의 패턴을 창출했다. 수십 곳의 치수를 재야 하는
모던 치파오는 ‘순수하고 소박한 올드 상하이’가 끼 어들 여지가 없는 억압으로 변모해 그 속의 사람들 이 숨 쉬기 어렵게 만든다. 리안이 구성한 상하이 는 영화의 주요한 공간인 침실과 마찬가지로 ‘상상 된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상된 노스탤지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하이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 이래 중국 전역을 풍미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현상 중의 하나다. 1930~1940년대 국제적 수준에 올랐던 중 국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중국 30년 동안 ‘숨은 구조(hidden structure)’로 억압되었다가 개혁개방 시기에 들어 부활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상하이 노스탤지어 붐’은 그 부활 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이전의 상하이, 특히 1930~1940년대의 상하이, 즉 ‘올드 상하이’를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노스탤지어는 상하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도시민 의 소비욕망을 겨냥하는 지구적 자본주의가 지닌 상업전략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사와 기억 을 소비 상품으로 유통시킨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인들은 부자의 꿈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며 살아간다. 이는 또한 사회주의 이전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한 ‘기억이 배제된 노스 탤지어’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상하이 노스탤지어 현상은 탈역사적이고 탈영토적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노스탤지어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소수자 또는 타자화(othernization)에 대 한 ‘역사들’과 ‘또 다른 기억’이다. 그것은 노스탤 지어의 주체들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들’이 고 ‘망각하고 싶은 기억’이다. 개혁개방과 ‘사회주 영 화 와 도 시 4
소외된 계층의 존재는 후자의 주요한 측면이다. 조계와 이민의 도시 상하이 에서 외국인은 중국인을 타자화시켰 고, 똑같은 이민이면서 먼저 온 사람은 후에 온 사람을 주변화시켰으며, 중상 층은 하층을 소외시켰고, 자유연애와 모던 신여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남 성은 여전히 여성을 억압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은 혁명을 포섭했고 자본주의 는 사회주의를 통합했다. 그러나 다음의 의문은 여 전히 남는다. 설사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했다 하더 라도 사회주의 이외의 역사,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역사는 아름답고 순수한 기억일까? 이런 문제설정 (problematic)은 ‘순수 과거’의 밖에 존재하는 ‘현실 과거’를 되살리는 작업을 요구하게 된다. 그 작업은 때로는 기억을 위한 투쟁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기억의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거대서사에 대한 미시서사의 탐구, 정치사에 대한 생활사의 복원, 전 통과 근현대의 중층성에 대한 고찰, 근현대성의 양 면성에 대한 성찰, 포스트식민주의적 접근 등은 바 로 이런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외국인 조계와 이주를 통해 중국의 새로운 중심 으로 부상한 모던 상하이는 1930~1940년대에 이 미 세계적인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49년 공산화 이후 그 영광을 홍콩에게 넘겨주었 다. 식민지였으면서도 20세기 자본주의 정점의 하 나를 구축했던 홍콩의 발전은 상하이의 후견 아래
이루어졌던 셈이다. 1930년대 서양인들에게 ‘동양 의 파리’ 또는 ‘모험가들의 낙원’으로 일컬어졌던 상하이가 왕년의 영광 회복을 선언하고 나선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푸둥(浦東) 지구 개발로 뒤늦게 개혁개방을 실시한 상하이는 10여 년 만에 중국 최고 수준의 발전을 이룩하는 저력을 과시하 고 있다. 특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이어 열린 2010년 세계박람회는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비상 하고픈 중국의 염원을 상하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투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방명주와 와이탄(外 灘) 야경 그리고 신천지(新天地) 등으로 대표되는 상하이의 경관을 보면서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농 민공과 실직 노동자 등 하층 인민들의 모습을 놓치 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0 상하이 세계박람회 ‘중국관’
사진출처
상하이 푸둥지구 모습(www.layovergui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