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와 적성산성(赤城山城)

N/A
N/A
Protected

Academic year: 2022

Share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와 적성산성(赤城山城)"

Copied!
1
0
0

로드 중.... (전체 텍스트 보기)

전체 글

(1)

60

중부 내륙의 젖줄 남한강이 꽃샘바람 앞세우고 연두빛 버선발로 영월에서부터 단숨에 달려와 소백산 자락 단양 에 이르면 갑자기 느림보 강물이 되어 산태극수태극을 빚고 한바탕 질펀한 길놀이 풍악을 울린다. 단양은 선사 시대의 주거지인 애곡리 수양개 유적과 도담리 금굴(동굴) 유적 등 유서 깊은 역사문화유적과 단양팔경까지 구 경거리 자랑거리도 참 많다. 특히 중앙고속국도 단양휴게소가 있는 단성면(구단양) 하방리 남한강변 성재산 정 상의 신라적성비적성산성이 유명하다. 적성비는 신라가 소백산 죽령고개를 넘어 단양 일대의 고구려 영토 를 차지하면서 점령지역(적성현) 백성들에게 본국의 시책을 알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진 다. 비석은 그 높이와 위쪽 너비가 약 1m이고 아래쪽 너비는 약 0.5m 안팎의 역삼각형으로, 윗부분이 많이 깨지 고 훼손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 글자는 대부분 선명한 편이다. 진흥왕 6~11년(545~550년) 경에 세운 적성비의 비문 내용은 신라 진흥왕의 국경개척 명령에 따라 이사부, 비차부, 무력(김유신의 조부) 등 10여 명의 군관 및 충성을 바친 야이차(也次)라는 적성 사람과 그의 가족들에게 공훈을 포상하고 국가정책에 따른 지속적인 방위태세와 충성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한편, 적성비가 서 있는 산 정상 남쪽 비탈을 둘러싼 적성산 성은 삼국시대 초부터 유명한 군사요충지로 당시에도 성터가 있었으나 진흥왕이 적성비를 세웠던 545~551 년경에 다시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성의 둘레는 약 900m 정도로 무너진 곳이 많지만 적성비가 있는 남쪽 구간 은 대부분 복원되었고, 죽령천이 흐르는 동북쪽 내벽은 지금도 복원공사 중이다. 적성산성은 비교적 지대가 좋 고 규모가 큰 내외협축 방식으로 축조되었으며, 군사들이 말을 타고 산성 위를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의 몽고군 침입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까지 많은 격전을 함께 겪어온 적성산성과 신라 적성비는 오늘도 남한강과 단양 땅을 건재하게 지키고 있다. 또한 이곳 하방리에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단양 지역의 문화자산을 모아놓은 단양 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박영순|수필가

단양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와 적성산성(赤城山城)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단양휴게소 뒤쪽 성재산 정상에 자리한 신라적성비

우 리 문 화 유 산 의 향 기 169

60

참조

관련 문서

[r]

According to Hwaseongseongyeog-uigwe, Deokrang is the timber which used in 9 buildings, South-Gongsimdon(南空心墩), Southeast-Gakru(東南角樓) and

秋七月 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今爲高句 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 一萬 伐高句麗南鄙.

공주 수촌리1호 목곽묘 금동신발... 羅州 新村里9號墳乙棺

토지의 질에 따라 도시의 분포밀도를 통제, 환경조건에 따라 도시의 분포밀도와 개발강도를 결정 도시의 입지 제안.

일산화탄소(一酸化炭素, carbon monoxide): 적혈구(赤血球) 내의 혈색 소( hemoglobin)가 산소와 결합할 수 있는 능력보다 일산화탄소와의 친 화력이 240배나 많아 체내

 발달을 평형상태의 도식(schemes)이 새로운 대상에 의해 불평형 상태가 되어 동화 (assimilation)와 조절(accommodation) 에 의한 적응 (adaptation) 을

서쪽에서 본 서북쪽 성곽 모습 서북쪽 성벽 목책열과 부강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