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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筠과 小說 洪吉童傳에 대한 精神力動學的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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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EP Original Articles J Korean Psychoanalytic Study Group Vol. 9, No. 1, page 52~80, 1 9 9 8

許筠과 小說 洪吉童傳에 대한 精神力動學的 考察

한 우 상

*

·조 두 영

**

Psychodynamic Study of Heo Kyoon and His Novel,

「 「

「Hongkildong Chon」

Wou-Sang Han, M.D.,* Doo-Young Cho, M.D.**

서 론

심층심리적으로 문학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20세기 초 Freud로부터 시작되었다.

Freud는 예술에 관해 20여편의 논문을 남기고 있다. 그는 1897년 Fliess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Oedipus Rex and Hamlet] 의 제목으로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언급하 였고, 1900년『꿈의 해석』 에서 Shakespeare 희곡의 주인공인 Hamlet에 관해서 에 디푸스적 고착을 주 심리기전으로 본다는 언급을 하였다. 문학작품을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이후로 정신분석의 역사와 함께 변혁을 거쳐 왔으며, 그 이론이 다 양해지면서 여러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Freud는 미학적 정서의 연구, 예술 창작과 의 관계, 모티브 분석, 작가분석 등 다양한 형태의 접근 방법을 시도하였다. 그는「신 경증의 일반이론(General Theory of Neuroses)」 에서 예술을 모름지기 한 내성적인 정신병 질환의 일종이라고 밝히면서, 이에 따라 예술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신경증 이 될 수도 있는 환상의 세계에 관심과 욕구를 갖는다고 하였다. 1908년 무렵의 환상 에 중점을 두던 그의 이론은 1910년 부터는 승화의 역할로 중심을 옮기면서 쾌락과

*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Department of Psychiatry, Samsung Medical Center, Sung Kyun Kwan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eoul, Korea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정신과학교실

Department of Psychiatry,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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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원칙의 타협이라는 원리를 제시한다. 이후, Freud는 무의식의 환상과 본능의 관계 에서 에디푸스이전기(preoedipal) 측면을 주장하였으나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고, 그 이후 자아심리학이 등장해서 새롭게 문학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 일환으 로 이때부터 창작과정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Kris등은 자아의 서비스에 의한 퇴행(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의 개념을 도입하여 창조성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자아심리학의 발달로 Hartman, Loewenstein, Kris 등은 작품을 만들 당시의 특수한 시대적 조건과 작가의 특수한 사회적 환경이 작품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Kris는 예술분석을 잘 하려면 인간의 보편적 인 무의식 내용 뿐만 아니라, 사회와 사회전통 및 그리고 예술양식의 전통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Weissmann(1969)등은 퇴행과 달리 정상적으로도 자아의 기능이 정지되고 해리될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현실원칙을 넘 어서(beyond the reality principle)’ 라고 명명하였다.

이후로, 대상관계이론이 발달이론으로 중요시되면서, 예술가의 창조성이 분리-개별 화 단계의 해소를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대상관계이론은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중재한 심리과정과 예술의 형식적인 측면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최 근에는 대상관계이론의 발달로 자기와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예술분석으로는 1956년 兪碩鎭이 시비평가협회가 주최한 모임에서「李 箱의 정신역동학적 고찰」 이라는 연제형식으로 발표하였고, 1964년에는 李符永이「한 국전래동화 <선녀와 나뭇꾼>의 심리학적 제문제」 를 발표했는데 이것이 활자화된 학술 논문으로 한국 최초의 것이다. 이후로, 문학작품을 대상으로한 심층심리학적인 연구는 다수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고전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작품과 작가를 역동정신의 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장화홍련전(李憙, 1990), 沈淸傳(柳仁鈞과 趙斗英 1992), 九 雲夢(金鐘欣과 趙斗英 1995) 등에 대한 연구가 있다.

물론 정신분석비평으로 문학작품의 창조성과 그 심리적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Freud는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햄 릿』 , 디드로의『라모의 조카』 와 괴테에게서 자신의 견해를 앞서는 작가는 통찰력을 발 견했고, 작가는 완고한 신경증 환자가 아니며 그의 창조적 작업으로 실질적인 치료까 지 면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Freud는 초기의 예술을 정신병질적인 차 원으로 받아들이던 생각을 바꾸어 예술에는 그에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현존하는 분 석이론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방법상의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 비평을 통하여 작가와 독자, 비평가

가 발견하지 못한 심리학적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현대 응용 정신분석의 중요한 과제

가 된다. 예술과 문학작품을 통하여 시대를 달리하는 인간에게서 고유한 심리적인 진

실을 발견할 수 있고, 예술과 문학을 이해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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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려는 시도로서 시작된 심리학은 그 방법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인간의 마음과 문화를 이해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러한 정신분석 비평을 문학에 적용하는 방법은 첫째, 작가에 대한 심리학 적 연구, 둘째, 창조의 과정에 대한 연구, 세째, 문학작품에 내재해 있는 심리학적 유 형들에 대한 연구, 네째, 문학의 효과에 대한 연구(독자 심리학)의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본고가 대상으로 하는「洪吉童傳」 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심리학적 연구 대상으로

서 관심을 갖게 된다. 첫째,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다른 고전문학 작품과는 달리 정확

한 저자가 밝혀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심리와 창작과정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연구

가 쉽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許筠이라는 한 개인의 전기적 사실이 중요한 단서가 되는

데, 그에 대한 기록이 여러 가지 문헌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본 연구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고 하겠다. 물론「洪吉童傳」 을 許筠이 지었다고 한 澤堂 李植의 증언은 여

러 가지 점에서 의심스러운 데가 있고,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다른 결정적 자료가 발

견되지 않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다른 결정적 대안을 찾을 수 없고, 許

筠을 작가로 보는데 국문학계에서도 대체적인 합의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본

논문에서는 작가를 許筠으로 확정하고 연구를 전개하였다. 둘째는, 작가가 소수의 특

권 계층인 양반 계급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일반 민중들에게 널리 보급되어 오래도록

읽혀져 온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까닭에는「洪吉童傳」 이 순

우리말로 씌어져 일반 민중들을 접하기 쉬웠다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

만, 작품이 조선시대를 지나서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시대적 차이를 뛰어 넘어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만한 소

설적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작가의 무의식적인 동기가 한국인의 보

편적인 심성을 자극하였고,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무의식을 주제로 다루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洪吉童傳」 의 주제는 다른 고전인「沈淸傳」 과「春香傳」 등의 구전문학

작품이나「九雲夢」 과 같은 소설과는 달리 당시 사회체제에 대한 문제점 제기와 모순

을 드러내는 강도가 훨씬 높다. 또한 작가가 당시의 정치, 역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체제 저항적인 주제의 소설을 썼지만, 그 소재 면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소재와 주제의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소재와 주제를 중심으

로 하는 소설이 오랫동안 읽혀져 온 밑바탕에는 사회체제에 대한 갈등과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한국인의 무의식속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세

째는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소설로, 알려진 다른 고전문학 작품에 비하여 국문학계

에서 작가론과 아울러 어학적 연구, 배경 연구, 주제론, 형상론, 유형론, 문학사적 연구

등 비교적 다양한 형태의 선행 연구가 이루어진 상태이므로 정신분석적인 연구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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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에 용이하다는 점이 있겠다.

연구대상 및 방법

「洪吉童傳」 은 고전소설 가운데 이본(異本)이 많은 작품의 하나로도 손꼽힌다. 학계 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판본만 해도 경판본, 안성판본, 완판본, 필사본, 활판본 등의 다수이며, 연구의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되어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전기적 자료로『許筠硏究』 (金東旭, 새문사)와『허균의 생각』 (李離和, 여강출판사),『고전소설 의 이해』 (홍길동전의 논리, 鄭夏英, 문학과 비평사)등의 기존 연구를 종합한 연구서들 을 이용하였고, 기본 텍스트로는『홍길동전, 허균산문집』 (許敬震, 한양출판사),「洪吉 童傳」 (黃浿江과 鄭鎭炯, 시인사),『許筠詩硏究』 (許敬震, 평민사),『洪吉童傳硏究』 (鄭金主 東, 민족문화사) 등을 참조하였다. 그리고, 기타 자료로서 타 문헌에서 인용된 것을 간 접 참고하였다.「洪吉童傳」 텍스트의 선정 문제에 있어서는 이본들간의 관계나 차이점 을 밝히는 작업이 국문학계에서 많이 연구되었으나, 이는 역동정신의학의 연구 범위 밖에 있다는 판단하에, 경판본을 중심으로 이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들 을「洪吉童傳」 의 핵심으로 간주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다루었다.「洪吉童傳」 의 인용은 한글세대를 위하여 다시 옮겨 지은 한양출판사의『홍길동전』 은 근거로 하였고, 내용이 불분명할 경우는 다른 본을 인용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고전정신분석학, 자아심리학, 대상관계이론 등의 포괄적인 방법으 로「洪吉童傳」 을 분석하였다.

본 론

1. 인간 許筠

許筠은 양천 許씨로 許珙의 후손이다. 許珙은 고려 충렬왕 때에 僉議中贊이란 벼슬 에까지 오른 이름이 높은 문신이었다. 許筠의 증조부 許琮은 우의정을 지낸 철저한 배 불론자였고, 許筠의 증조부의 동생인 許琛은 좌의정을 지내고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다. 조부인 許澣은 군자감봉사로 글씨와 그림이 뛰어났고 이름있는 선비였다. 許 筠의 아버지는 許曄으로 副提學, 경상도 觀察使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로, 문장가로, 외교관으로, 정치가로 이름이 높았고, 또 바른말을 잘하 고 性理學에도 정통하였다. 許曄은 슬하에 딸셋과 아들 셋을 두었는데, 전처 소생은 뒤에 禹性傳과 朴舜元의 아내가 된 딸들과 장남 筬, 후처 소생은

과 蘭雪軒 그리고 筠이었다.

許筠의 삶을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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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년(1569) 1세:서울 건천동에서 許曄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許 曄의 後妻인 金씨이다.

선조 8년(1575) 7세:동서로 당이 갈라지자 아버지는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조 10년(1577) 9세:경상도 관찰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상주에서 잠깐 살았다.

이때부터 시를 잘 지어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선조 12년(1579) 11세:누이인 蘭雪軒이 金誠立과 혼인했다.

선조 13년(1580) 12세:본격적으로 글을 배웠다. 2월에 아버지 許曄이 사망하였다.

선조 16년(1583) 15세:둘째 형

이 鏡城으로 유배되었다. 맏형 筬이 별시 문과 에 급제하였다. 둘째 형으로부터 그가 지은 글을 칭찬받았다.

선조 18년(1585) 17세:金大涉의 2녀 金씨와 혼인하였다. 둘째 형

이 유배에 풀 려 유랑생활 시작하였다.

선조 21년(1588) 20세:9월에 둘째 형이 금강산에서 사망하였다.

선조 22년(1579) 21세:생원시에 급제하고, 李爾膽을 알게 되었다. 누이인 蘭雪軒 이 사망하였다.

선조 25년(1592) 24세: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어머니, 부인 金씨와 피난길 에 올랐다. 7월에 첫아들을 낳고, 부인 金씨가 사망하였다. 첫아들도 이내 사망하였다.

선조 28년(1595) 27세:가을에 부인 金씨 묘를 강릉으로 이장하였다. 맏형이 大司 諫이 되었다.

선조 32년(1599) 31세:2월에 兵曺左郞에 부임하였고, 5월에 황해 都事가 되었다 가, 12월에 罷職되었다.

선조 33년(1600) 32세:3월 부인 金씨의 묘를 원주 서면으로 이장하였다. 다시 兵 曺左郞이 되었다.

선조 34년(1601) 34세:전라도로 내려갔다. 부안에서 기생인 桂生을 사귀었다. 8 월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선조 36년(1603) 35세:4월에 질녀가 光海君의 이복동생인 義昌君과 혼인하였다.

선조 38년(1605) 37세:불교 믿었다는 규탄을 받아 遂安군수에서 罷職되었다.

선조 40년(1607) 39세:3월에 삼척부사에 부임되었으나, 5월에 파직되었다. 12월 에 공주 牧使에 부임되었다.

선조 41년(1608) 40세:2월에 宣祖가 사망하고, 光海君이 즉위하였다.

광해 2년(1610) 42세:11월 展試의 對讀官으로 조카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 받았다.

광해 4년(1612) 44세:8월에 맏형 筬이 사망하였다. 洪吉童傳 著述이 추측된다.

광해 8년(1616) 48세:4월에 社稷堤調되고, 5월에 형조판서에 부임하였다. 冬至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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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奏副使의 공으로 상을 받았다.

광해 9년(1617) 49세:12월에 副司直을 거쳐 左參贊이 되었다. 비밀 상소가 奇俊 格에 의해 3회 올려졌다.

광해 10년(1618) 50세:1월에 奇俊格의 상소가 있었다. 삼사에서 許筠에게 불리 한 합계를 올렸다. 8월에 남대문 격문 사건으로 8월 26일에 일당과 함께 서시에서 처 형되었다.

許筠의 아버지 許曄은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趙光祖의 신원을 청하 였고 許磁, 具壽聃들의 무죄를 논핵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許筠의 형인 筬은 眉岩 柳希春의 문인으로, 이름난 문장가이며 性理學者였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宣祖가 죽을 때에 그에게 어린 永昌大君을 부탁한다는 밀지를 내려 遺敎七臣이 되었 다. 둘째 형

은 서른 여덟살에 요절한 재사였다. 맏형과 같이 柳希春의 문인이었는 데 許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조좌랑을 지냈고, 창원부사로 있을 때 같은 동인인 朴謹元들과 함께 병조판서 李栗谷이 이론만 세우고 군정을 소홀히 한다 고 탄핵을 하다가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삼년 만에 유배에서 겨우 풀려났으나 벼슬자리를 거절하고 백운산에 들어가 책 읽기에 열중하고 불교에 몰두했다. 유배중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껴서 온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누이 蘭雪軒은 아우 許筠과 같이 蓀谷 李達에게서 시를 배웠다.

이상으로 볼 때, 그의 집안 가족들은 반골정신과 자기주장이 매우 강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許筠의 일생을 통하여 보여준 권위에 대한 도전은 이러한 집안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장과정에 작은형 許

과 누이 蘭雪 軒의 영향이 컸는데, 그의 시 가운데 어려서 오누이가 의 친구였던 蓀谷에게서 나란히 글공부하던 추억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그의 삶에 있어 서 여성의 존재는 무척 중요하게 부각된다. 扶安妓 桂生을 사랑하여 그녀가 죽자 만사 를 지어 슬퍼했고, 京妓 洛濱등과 날이 새도록 환음(歡飮)하고 모부인의 상중에 기생 과 놀아났다는 기록 등은 許筠이 누이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던 것처럼, 많은 여성에게 애정을 갖고 의존한 것을 알게 해준다.

許筠의 생애에서 또 하나의 특징은 가정적으로 매우 불행하였으며 성장과정에 심한

정신적 갈등이 있어다는 것이다. 筠의 아버지 曄은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날 당시 承旨

로 있었고 이조참의를 거쳐 大司諫, 大司成, 副提學 등을 역임하여 서울에 있었으므로

비교적 부유하고 평탄한 삶을 살았지만, 6남매 중 筬과 禹性傳, 朴舜元에게 결혼한 두

딸은 前妻 韓씨 소생이고,

, 蘭雪軒, 筠은 後妻 金씨의 소생이었다. 이런 배다른 형

제에 대한 갈등은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의 나이 12세 때 갑자기 부친이 사망하고 20세 때에는 그를 아껴주던 형

이, 22세

때에는 그를 사랑해 주던 누이 蘭雪軒이 사망한다. 사춘기가 시작할 무렵의 부친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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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과 청년기로 접어들 무렵 제2의 아버지인 형과 제2의 어머니인 누이의 사망은 그에 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2년 후, 24세 때에는 임진란을 당하여 母夫人과 만삭 의 부인 金씨을 이끌고 함경도 서천으로 피난하는데 그 곳에서 아내와 첫 아들이 죽는 다. 이에 대하여 許敬震의『홍길동전, 허균산문집』 (1995)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 고 있다.

허균의 가족들이 가토오의 군대에 쫓겨가며 단천에 이른 칠석날, 김씨 부인은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음놓고 몸을 풀 수가 없었다. 가토오의 왜군이 다시 들이닥친 것이다. 허균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어린 딸까지 이끌고서 밤새도 록 고개를 넘었다. 임명역에 다다르자 기운이 다하여서, 아내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다음날 저녁에 아내는 끝내 목숨이 끊어졌다…(중략)… 아내의 살덩이가 따뜻해서, 차마 땅에 묻을 수 없었다…(중략)… 갓난 아기마저 젖이 없어서 결국은 죽고 말았다.

이로써 젊은 나이에 그는 의존할 대상을 잃고, 그 상실감으로 인하여 심한 방황을 하기 시작한다. 29세에 金孝元의 딸과 재취했으나, 44세 때 당쟁으로 맏형 筬이 죽음 으로써 그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게 되자, 그의 자존 의식은 환상 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와 강한 현실 집착을 보인다.

현실적인 능력으로 볼 때, 그가 비록 잦은 파직을 당하기는 하였지만, 從事官으로서 는 유능하였다. 이는 그의 성격과 재능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성격에 대하 여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그의 천성이 경박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부정적 으로 나타난 원인을 早失嚴親하고 막내동이로 자모와 형제의 사랑을 받은 데 있다고 하였고, 또 어려서 시문에 빼어나 남의 칭찬을 많이 산 것이 부지중에 경박성으로 변 모했는데, 일찍 등과하여 당돌한 행동으로 과실이 많았으므로 자연 남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이라 술회하고 있다.

許筠에 대한 인물론 내지 작가론은 李能雨의「허균론」 , 金鎭世의「허균연구」 , 車溶

柱의「허균론 재고」 등이 있다. 李敏求, 安鼎福, 중국에서 간행된 조선시선의 후서, 柳

夢寅의『어우야담(於于野談)』 , 金萬重의『서포만필(西浦漫筆)』 등에서는 모두 許筠

의 글재주가 뛰어나고 식견이 남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명륜록(明倫

錄)』 ,『하담록(荷潭錄)』 ,『일사기문(逸史記聞)』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광

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그리고, 許筠이 능지처침을 당하고 난 뒤의 반교문 등에는 許

筠이 가벼운 성품으로 인륜을 어지럽혔고,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남을 해치는 거짓 글

을 지어 인심을 어지렵혔으며, 이단을 좋아하며 참선과 예불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

다. 한편, 국문학자 具滋均의『인물한국사』 , 鄭金主東의『洪吉童傳 硏究』 , 국문학자 金台

俊의『조선소설사』 등에서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오늘에 이르러서 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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筠은 혁명가, 개혁가 그리고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평가가 서로 다르게 내려지는 것은, 許筠이라는 인물의 성격을 여러 각도에서 다르게 살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흥미로운 정신역동학적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는 항상 사회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였고,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동정 했다. 당시 현실사회에서 주변부에 위치한 서자들과 친하였고, 학문적으로는 다양한 경험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제도권의 많은 양반들이 지지하는 유학에 대한 저 서는 없었다. 그는 오히려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다른 학문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생의 말년에 이르러 돌연 그때까지의 유유자적한 현실도피 의 태도를 버리고, 현실에 깊숙이 뛰어들어 철저한 현실 원칙에 따라 살았고, 이러한 삶의 태도로 당쟁에 휘말리어 50세의 젊은 나이로 죽게 된다. 許筠이 살던 16세기 말 엽부터 17세기 초는 조선조가 중기로 접어든 때였다. 조선조가 세워진 이래 엄격한 체제 정비로 왜구와 북방민족의 침입이 없었고 나라의 기틀이 튼튼해졌으므로 이백년 이 넘게 태평스러운 세월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안정된 상황이 계속되자 지배층은 나 태와 무사안일에 빠졌고, 사림 세력은 공리와 공담을 일삼았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날카로와져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치와 사회의 혼란 이 심해지고 민생고는 참담하였다. 유교의 교조주의가 강화되었고, 정치에서는 당론이 심화되었고, 사회에서는 민생고가 매우 극심해졌다. 宣祖 40년에 人穆大妃가 적자인 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에는 이미 光海君이 세자로 확정되어 있었으나, 宣祖는 마음 속으로 永昌大君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다. 영의정 柳永慶은 이에 동조하였고, 李爾膽 은 柳永慶을 탄핵하였다. 宣祖는 爾膽膽등을 귀양보냈다. 그러나 宣祖가 죽자 光海君 이 왕위에 올랐다. 대북파는 정권을 잡고 온갖 음모와 살육을 저질렀으며 光海君은 이 를 뻔히 알면서도 왕위에 불안을 느껴 이들에게 의지하였다. 宣祖와 큰 형 許筬의 비 호를 받던 許筠은 정권의 교체로 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던 筬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 자, 대북파의 李爾膽과 야합하게 된다. 이때부터 벼슬에서는 순탄한 관운을 지속할 수 있었으나 이것이 그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許筠은 李爾膽의 사주를 받 아 서궁에 유폐된 人穆大妃의 폐모론에 동조하여 음모를 꾸몄다. 李爾膽은 처음엔 許 筠을 이용하려다가 나중엔 오히려 許筠의 세력이 비대해져, 許筠의 딸을 光海의 후궁 으로 들이려는 움직임에까지 이르자 모반의 죄목으로 그를 죽이게 된다.

2) 소설 洪吉童傳

「洪吉童傳」 이 언제 지어졌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심지어는 李能雨는 1965

년 그의『허균론』 을 통해 許筠의 생애를 고찰하면서, 엄청난 소인인 筠과 위대한 작품

인「洪吉童傳」 을 결부시켜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金鎭世등은 許筠의 작품이 아니

라는 구체적인 논증도 하였다. 하지만, 車榕柱는『허균론재고』 에서 許筠의 생애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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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으로 보기보다는 두 시기로 분리해서 분석해야하고 許筠에 대한 기록이 편파적임 을 주장하여 이에 반박한다. 또한 許筠의 제자인 澤堂 李植의 글을 모은『澤堂集』 에 의하면 許筠이「洪吉童傳」 의 실제 저자로 이야기된다. 許筠설을 부인하는 논의는 논리 와 추론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澤堂의 명문 내용을 번복하기 에는 미흡하다고 보인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에 대해 許敬震은『홍길동전, 허균산문집』(1995)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洪吉童傳」 이 그의 문집인『성소부부고(惺所覆言互藁)』 가 완성된 뒤에 지어졌다면, 그가 아직 光海君에게 신임을 얻기 이전에, 즉 현 사회에 대하여 불 만을 가득 품고 있을 무렵인 임자, 계축년 사이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얼(庶孼) 들에게 이상을 형상화하고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한 의식화의 교과서로 이 소설을 지 었는지, 아니면 서얼들의 역모가 일어난 뒤에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洪吉童傳」 을 지었는지에 대하여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洪吉童傳」 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세종조 시절의 홍 모라는 재상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인형(仁衡)으로 정 실 류씨 소생이고, 둘째는 길동으로 시비 춘섬(春蟾)의 소생이었다. 길동은 홍대감이 용몽을 꾸는 것을 계기로 잉태되었다. 이러한 길동은 서자라는 자신의 신분에 갈등을 느끼게 된다. 길동은 8세되어 총명이 과인(過人)하여 하나를 들으면 백을 통하여 공이 더욱 아끼나 근본 천생이라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하면 꾸짖어 못하게 하니, 길동이 십 세 넘도록 감히 부형을 부르지 못하고 비복(婢僕)등이 천대함을 각골통한(刻骨痛 恨)하여 심사를 정치 못하였다. 한편 홍대감에게는 총애하는 초란이라는 첩이 있었는 데, 초란은 교만방자하고, 춘섬이 아들을 낳아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을 질투하였다. 초 란은 쟁총상대인 홍길동 모자를 제거하려는 불순한 동기로 음모를 꾸몄고, 관상녀를 불러 관상을 보게 하였다. 길동의 재주가 너무 비상하여 그대로 두면 나라에 해를 끼 쳐 멸문지화를 면치 못하리라는 관상녀의 말을 들은 홍대감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 끝에 병이 생겨 침식이 쾌하지 못하였다. 일가의 장래를 생각할 때 길동을 미리 없애 어 화근을 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겠으나 인정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부인과 장자 仁衡은 나라의 장래와 장차 가문에 닥쳐올 앙화를 근심하고 병든 대감을 우려하 였다. 이에 초란의 사주를 받아 특재라는 자객이 홍길동을 죽이려 하였으나 도리어 길 동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집안에서 살인한 홍길동은 출가하게 되었다. 홍길동은 출 가하면서 홍대감을 만나게 되어 호부호형을 허락받는다.

홍길동은 출가하고 나서 사방주류하던 끝에 적굴에 들어가 괴수(魁首)가 되었다. 도

둑의 괴수가 된 홍길동은 그 집단을 이름하여 활빈당이라 하고 나라 각처에서 갖은 작

란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해인사, 함경감영을 비롯한 각읍 수령방백의 부정한 재물을

앗아 불쌍한 백성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상(왕)은 포장(捕將)을 명초하여 홍길동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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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나, 포장은 홍길동의 도술을 이기지 못하고 실패한다. 조정에 서는 홍길동이 전임 이조판서 홍모의 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길 동을 잡아들이고자 하게 된다. 홍길동의 평생소원은 병조판서가 되는 것이었다. 길동 은 그의 형 인형에게 그 원을 들어주면 스스로 잡히겠노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홍길 동의 제안을 놓고 찬반양론으로 의견이 갈려 결론이 나지 않았다. 홍길동은 신장(神 將)을 부려 군용(軍容)을 이루고, 황건역사로 하여금 자기를 참소하는 조정신하를 잡 아들여 곤장을 때려서 내쳐버리게 한다. 그 뒤 왕은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당해내지 못할 것을 알고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평생소원인 병조판서 직첩을 받은 홍길동은 왕께 사은하고 돌아가 다시는 작란치 아니하였다. 왕이 내려준 정조(正組) 3천석을 배에 싣고 길동은 대궐을 향해 사배하직 한 후 고국을 떠났다. 적도를 이끌고 조선을 떠난 홍길동은 해외로 나와 성도에서 3년 간 군력을 기르고, 망탕산(芒石易山)의 요괴를 쳤다. 이때, 요괴에게서 구해낸 백룡(白 龍)의 딸과 정・통 두 사람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홍판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들은 홍길동은 다시 조선으로 와서 아버지 상을 모시고 길지를 골라 시신을 운구하여 모신 다. 삼상을 마치고 홍길동은 율도국을 쳐서 자신이 왕이 되었다. 백녀는 중전왕비, 정・

통녀는 각각 정・숙비로 봉한다. 작가(혹은 개작자)는 천생이라는 조건을 극복하고 뜻 한 바를 쾌달하고 효우를 성취한 홍길동을 극구 찬양하고 있다.

3) 許筠에 대한 심리전기적 해석

許筠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나뉘어져 있지만, 대체로 그에 대하여 모두가 긍 정하는 사실은 그가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金鉉龍은 그의 저서『許筠 (1994)』 에서 그의 장점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즉 첫째,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우 며, 둘째로 여러 방면의 많은 책을 읽어서 지식이 풍부하고, 세째로 시와 문장을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는 것이다. 宣祖 34년 5월 許筠의 나이 33세 때, 중국 사신을 맞이하 는 원접사 李廷龜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아 되어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李廷龜는 許筠이‘시에 능할 뿐 아니라 성품이 총미하고 많은 옛날 서적과 중국의 일에 밝다’ 라 고 칭찬하였다. 또한, 宣祖 39년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원접사 柳根은 중국사신 朱之 蕃을 만나게 된 許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을 하였다.

許筠이 종사관이 되어 원접사 柳根을 따라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 여위사 申欽이

날마다 같이 만났는데, 고서를 널리 외고 있음을 들었으며, 유학, 도교, 불교 등에

관계된 서적들도 막힘이 없어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申欽이 물러 나와 탄식

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반드시 狐狸나 사서(蛇鼠)의 정령(精靈)이 아

닌지 모르겠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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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와 같이 뛰어난 재능과는 달리 그에 대한 당시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못하였다. 물론 그가 당쟁에 휘말렸고, 당시 정권을 잡은 정적들에 의한 평가가 많다 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저술과 다른 역사책을 참조하면 그의 인간적인 한계를 볼 수 있다. 宣祖 32년 5월 종오품의 벼슬인 황해도 도사로 임명되는데,『조선왕조실록 (朝鮮王朝實錄)』 의 당시 관직 제수기록의 소주(小註)로‘許筠은 예의범절과 염치가 없 는 사람으로서 오직 문장을 짓는 재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행세하는 사람은 같이 서 있는 것마저 수치로 여긴다’ 고 기록되었다. 이와 같은 내용의 평은『조선왕조실록(朝 鮮王朝實錄)』에서 許筠이 관직을 제수받는 기록에 계속적으로 붙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우리는 許筠의 생활방식이나 행동이 당시 禮法之士의 마음 에 들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고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宣祖 36년 4월 탄핵을 받고 강릉으로 내려가서 관동지방을 유람하면서 세월을 보냈는데 이 때 원주에 살고 있던 모친이 별세하였다. 그러나 許筠은 모친의 상사에 참여하지 못했 는데, 이 사실은 뒤에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악평에 한 몫을 하게 된다. 그가 기생과 의 사랑에 빠져 놀면서 모친의 사망에도 나타나지 않았다고『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 實錄)』 에 기록되어 있다.

그 자신도 자신의 성품을 그의 저서『성소부부고(惺所覆言互藁)』의「四友齋記」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왜 사우재라 하였는가? 나의 친구가 셋이고 내가 그 하나로서 합쳐 넷인데, 현세 의 선비가 아니고 옛사람들이다. 나는 성품이 소탄하고 세상에 부합되지 않으며 세 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매도하고 배척하니 우리집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밖을 나가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다. 아아, 朋友는 五倫의 하나인데 나 혼자 친구가 없 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심하지 않으리요. 물러나 생각하니,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더 럽다고 사귀어 주지 않으니 내가 가서 친구를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면 옛사 람 가운데에서 구해서 사귈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자기의 성격을 탓하면서도 아무도 친구로 사귀어 주지 않는데, 꼭 찾아가서

친구를 사귀려고 노력할 필요 없고, 옛사람인 晋의 陶淵明과 唐의 李太白, 그리고 宋

의 蘇東波 등의 세 사람과 許筠 자신을 합하여 넷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

기서 친구가 없으나, 사귀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許筠의 독선적인 의지를 엿볼 수 있

다. 즉, 그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만하고, 예법을 제

대로 지키지 않았기에 외톨이가 되었고, 외로움에 대하여 괴로와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이것은 병적인 나르시즘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나르시즘 때문

에 타인과 적절한 대상관계를 이루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 반대로 적절

한 대상관계 형성이 불충분하여 병적인 나르시즘을 만들게 되고, 사회생활에서 오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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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거절당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나르시즘의 증거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陶淵明의 글에다 화운하여「귀거래사」 를 지었다. 許筠이 陶淵明의「귀거래사」

에 화운한 까닭은 주제가 자기의 마음과 같았고, 또한 그의 사람됨이 자기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蘇東波가 陶淵明의 시에다 120수나 和韻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許筠이나 蘇東波의 和韻은 陶淵明과 같아지려는 동일화의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또 한번 그의 나르시즘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사회의 규준에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대인관계에서 타인의 사고와 타협하기보 다는 자신의 만족에 머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대상과의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할 때, 방어기제의 하나로 나타난 나르 시즘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A.Reich(1960)는 병적 자기애가 되는 원인으로‘성장기 의 초기에 너무 일찍이 또는 너무 심한 충격을 입게 되면, 당시의 미분화된 원초적 상 태의 자아가 기능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궁극적으로 자기방어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나르시즘은 자아 정체성 확립의 장애에서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O.Kernberg(1985)는 이 원인으로 자기와 대상의 상이 각각 성욕동으로 이루어진 것과 공격성욕동으로 이루어진 것 사이에 잘 융화를 이룩하지 못하여, 관념 적인 차원에서 통일된 자기 및 타인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許筠은 성 장과정에서의 갈등으로 올바로 된 자아 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그의 어머니는 후처로서 許筠이 아버지의 적자로 신분을 내세우는 데에 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무의식속에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신감 같은 감정 적인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자아동일 시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감정적인 거리가 멀었고, 이러한 아버지의 감정적인 부재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어려움을 초래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초자아 형 성과정에서도 왜곡된 초자아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접 어린아이를 관찰한 최 근의 연구에서도 에디푸스(Oedipus) 삼각관계에 이르기 전, 대상관계 형성에 있어서 아버지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된 바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감정적인 부재와 후처의 자 식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불확신감은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큰 형은 許筠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집안과 조 정에서 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許筠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 지를 혼동하는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 감정적인 경쟁상대인 형제를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권위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가족내의 역동은 조선시대나 우리나라의 근대사에는 흔히 발견될 수 있는

갈등 상황이다. 許筠은 무의식 속에서는 아들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았기에 감정

적으로는 적자가 아닌 서자로 느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장과정에서 충분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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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계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함으로 인한 자아 정체성에의 위협은 자 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병적 나르시즘에 빠지게 만들고, 자신이 박해받는 존 재로 인식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장원급제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벼슬길에서는 말 년에 이르기까지 큰 성공을 할 수 없었다. 항상 현실에 부딪치면서 심한 적응상의 문 제를 보였다. 30세에 황해도사가 되지만 그는 불과 반년만에 경창(京娼)을 솔축(率 畜)하고 관원에 무뢰배들이 드나들게 하며, 청탁을 자행하여 도민의 소회(笑悔)를 사 고 있다는 사헌부의 규탄을 받고 파직된다. 이후로 50세에 참형을 당하기까지 그는 여러 차례 타의에 의한 파직으로 현실과 자아의 괴리 속에서 고민한다. 그는 자기 나 름대로의 나르시즘으로 세상을 살았기에, 늘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다. 현실을 벗어 나기 위해서 귀거래를 생각했고, 현실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는 선계를 생각했다. 그 선계는 처음에는 도교의 신선세계였지만 차츰 그것을 넘어선 이상세계로 바뀌었다. 자 신과의 화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시를 지었다. 그 시들 속에는 당시 현실 세계와 부딪치고 갈등하는 과정에 있는 내면세계가 있는 그대로 드 러난다. 하지만 그가 43세에 함열현으로 귀양가서 쓴 마지막 시에서는 43년 동안 지 었던 문장을‘헛수고’ 라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하여 그곳으로 도 피하는 것이 실제 현실의 불화를 전적으로 대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러한 인식의 결과로 그는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기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서 붓을 꺾고, 그때까지 걸어온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 문집을 엮었다.

그가 좋아하던 시와 저작 활동의 많은 부분이 그의 환상과 관련되어 중요하다.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저술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가 선계의 시와 같은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 하다. 둘째 형은 귀양살이 후에도 산수를 벗삼아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누나 蘭雪軒의 도선사상도 약관의 許筠에게 영향을 미쳤다. 李家源 교수가 지적 했듯이 집안의 도교사상은 徐敬德에게서 수업한 許曄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특 히 노장에 빠진 것은 선학이 풍미한 선조 시대의 분위기와 그의 호기심이 만났기 때문 이기도 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읜 뒤로 집안의 교육이 엄격하지 않았으며 제멋대로 살다가 벼슬길에서 자주 쫓겨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현실과의 거리가 자꾸 벌어진 그 로서는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그에게 더한 안정감을 줄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 받은 벗까지도 자기의 심정을 몰 라주었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선계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선계와 같은 환상 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의 병적인 나르시즘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A.Reich(1960)는 자기애적인 환자의 경우, 자기와 자아가 충분히 분화되지 못할

때, 병적상태에서 현실과 환상이 불분명해지고 동력(drive)에 대한 승화작용이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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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과대한 생각과 같은 원초적인 사고력을 보일 수 있다고 하였다. 물론, 許筠의 환상 은 작품을 통하여 승화되고 있으나, 삶의 많은 부분들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부족한 자아기능 때문에 현실에서 뿌리 를 내리지 못하고, 환상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 것이다.

그가 지은 5편의 한문소설인「엄처사전(嚴處士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장 산인전(張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藏生傳)」 을 통하여 우리는 그 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설정된 모든 인물들은 부유한 가 정의 정상적인 인물형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에서 버림을 받거나 불행하여, 부귀 영화를 꿈꾸면서 과거시험에 몰두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모두 신선사상의 범주 안에 속해 있는 것은 불우한 환경과 신선사상과의 관련이 있기 때문 이다. 또한 許筠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자의식이 강한 인물들로 설정되었다.「남 궁선생전(南宮先生傳)」 의 南宮斗 는 뜻이 굳고 자존심이 강하며, 냉정하게 일을 처리 하고 재능을 믿어 주위 사람들에게 잘난 체하며, 거만하여 좀처럼 머리를 굽히지 않는 성격의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성격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배 척을 당하기에 알맞기 때문에, 그를 모함해 죄에 걸어 해치려는 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許筠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이런 성품의 소유자로 설정되어 있으니 아마도 이는 지극히 배타적이고 독선적이어서 친구가 없었던 許筠 자신의 성격을 반영한 것 이라 볼 수 있다. 신선사상에 있어서 득도를 위한 수련을 쌓는 데는 이런 성품이 또한 알맞다. 냉정해야 하고 인내심이 강해야 하며 독선적이어야만 득도가 가능한 것이다.

즉, 소설 속에서 그의 환상이 선계로 표현되면서 그의 나르시즘이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술작품에서 무의식의 환상이 전환된 것을 볼 수 있다는 H.Trosman(1990) 의 주장과 같이 許筠의 나르시즘에 의한 환상이 소설에서도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에서 또 한가지 두드러진 점은 항상 외로와 하면서 정을 그리워 했다는 것 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여자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그에게 중요한 첫번째 여자로 는 누나인 蘭雪軒이 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그의 어머니보다는 재능이 있고, 다 정다감한 누나가 그에게는 무척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런 누나의 사망은 작은형 의 죽음에 이어서 큰 충격이 되었다. 許筠에게 다음으로 중요한 여자는 17세에 결혼 한 아내 金씨이다. 金씨는 許筠보다는 2살 아래였으나 성숙한 모성을 지닌 아내였다.

許筠은 일생동안 여러 여인을 사랑했지만 가장 아꼈던 사람은 첫째 부인인 金씨였다.

그녀는 어진 아내이며 許筠에게는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고, 누나의 죽음으로 부족했

던 정을 다시 느끼게 해준 존재였다. 특히, 金씨 부인은 許筠에게 부족한 조절기능을

해주었던 여인으로, 許筠이 지나치게 방탕하려는 것을 막는 엄한 모습도 보였고, 공부

를 할 때는 농담으로 격려하면서 학업에 정진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許筠의 참

다운 글 공부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런 후원자로서의 아내는 임진란 속에서 비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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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만다. 許筠은 대상상실로 인한 심한 상실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상실감은 이후 그가 계속해서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여 현실생활보다는 환상속에서 마음의 위안 을 얻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중요한 삶의 부분을 환상으로 표현한 그의 문학에 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특히 선계시에는 여성이 많이 등장한다. 조선조 선비들의 여성에 대한 이상은 중국의 여선이나 역사적 미인이었다. 연애문화가 성숙할만한 사회 적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현실의 여성보다도 독서의 범위안에서 선녀들에게 자 기의 감정을 전이시켰다. 또, 폐쇄적인 조선조 사회에서 그들이 마음놓고 만날 수 있 는 여성은 기녀들뿐이었다. 현실의 기녀들은 그의 작품속에서 중국 고사에 나오는 선 녀나 전설적 미인에 비유되어 사랑의 감정을 승화시킨 형태로 변형된다. 이런 여성에 대한 의존은 대상관계의 부적절함 때문에 외로움을 느껴,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돌보아 줄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찾는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許筠의 성격적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둘째, 그의 성격은 거만하며, 경망스럽고 안하무인으로 예의범절을 모르는 자아도취적인 성격이었다. 세째는 그는 항상 정에 굶주린 사람처럼 정을 그리워했다.

이러한 성격들로 인하여, 뛰어난 재능이 있지만, 사회현실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한 그 는 자신의 문학적 능력을 이용하여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이루지 못한 세계를 문학 작 품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재창조하였고, 환상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심리역동을 기원적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면,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감정적 부 재로 좀더 덜 구조화된 남성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그 는 전 인생을 걸쳐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였다. 귀거래사를 원하면서도,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바로 조정으로 달려가서 벼슬을 취하였다. 그러다 가도 일에 쉽사리 싫증을 느끼고, 자신이 원하던 것과 다른 것이라고 한탄을 하고 있 다. 또한 성장과정에서 적절한 남성상이 발달되지 못한 결과, 적절한 초자아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는데 너무도 많은 자아의 기능을 요구되었다.

큰형은 아버지의 적자로 동인의 거두가 되어 출세를 하였고, 둘째 형과 누나와 자신은 그렇지 못하였지만, 그에게는 항상 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경쟁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에 대한 그 리움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과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적절한 대상관계의 부 족이 애정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많은 권위와 충돌하였다. 그것은 집안의 전통적인 강직함의 가풍에서 나온 것

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강직함 이외에도 적절하게 형성되지 못한 아버지상에 대한

두려움과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의 어려움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적절한

아버지상의 부재는 거세불안(castration anxiety)과 남근 열등감(phallic inferi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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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방어로서의 공격성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아버지가 소년의 공격성을 통제 하지 못하고 엄하게 대할 때, 그는 적절한 남성성과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권위로 표현되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무척 극복하기 어려운 존재로 보여진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남성적인 정체성을 방대한 지식의 결집과 상상을 통하여 승화시 킨 결과 許筠은 많은 문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한 유재론과 정 치적인 행동 방식은 당시 사회에서 살던 지식인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로 보인다.

許筠의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등은 작은형을 모방한 것이기도 하다. 작은형은 율곡 을 탄핵하여 귀양을 갔다. 당시의 당파싸움이라는 요소가 작은형의 행동에 내제되어 있으나, 작은형 역시 권위주의적인 인물에 대하여 반항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기존의 벼슬길에서 성공한 첫째 형과의 경쟁심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후로 둘째 형은 반항의 삶에서 다시 도피하여 환상의 세계로 유유자적하는 해결책 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모습은 許筠에게 쉽게 영향을 미쳤고 그로 하여금 비슷한 과 정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는 어쩌면 Heinz Kohut가 주장한 바와 같이 성장과정 초 기의 원형적인 구조가 발달되지 못한 결핍(deficiency)된 자기상을 형을 모방함으로 써 보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항상 사회에서 소외되고 박해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을 피학성애

적(masochistic)인 입장에 놓고자 하였고,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된 공격성의 표

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적 정신욕동이 잘 조절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나는 병적인

자기애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O.Kernberg(1989)에 의하면 자아와 초자아의 발달에

있어서 대상관계의 내재화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경계선 인격체에서는 자기와

대상의 상이 잘 융화되지 못하여 자기나 대상이 어떤 때는 전적으로 좋고, 어떤 때는

전적으로 싫은 분리(splitting)된 상태를 보일 수 있다. 공격성향으로 인하여 자아 스

스로가 자신 및 정신세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괴리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전

은 소외받고 박해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표현된다.‘너는 전적으로 나쁘고, 나는 전적으

로 좋다’ 는 표현과 마찬가지로,‘너는 나를 괴롭히고 있고, 나는 괴롭힘을 당하는 착

한 사람’ 이라는 무의식적인 공격성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그의 감정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성장과정에서 비롯된다고 추측할 수 이다. 아마도, 후처의

자식으로 늦게 태어난 許筠은 생존에 있어서 위협받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자아의

괴리는 초자아 형성에도 영향을 미쳐 자기나 대상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든지, 반대로

비현실적으로 격하시켜 지나치게 이상적인 초자아 혹은, 가학적(sadistic)으로 위협을

주는 초자아처럼 극단적인 형태가 되게 한다. 이는 정상적인 대상관계나 현실적인 요

구와는 거리가 멀다. 일상생활과 대인관계의 부적응은 대상관계의 부족과 원시적 초자

아(primitive superego)의 작용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비현실적인 대상관게는 쉽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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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O.Kernberg(1989)의 이론에 따르면 병적인 자기애를 가 진 경우는 현실적인 대인관계에 있어서 참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 대한 방 어 수단으로 스스로를 본래의 자기와는 다른 자기로 느끼고, 이것을 실제의 자기인 것 처럼 느낌으로써, 현실적으로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 또는 자기가 내부적으로 느 끼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許筠의 생애에는 초기의 심한 충격 때문인지, 적절한 대상관계의 부족에 의 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기의식이 발전된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병적인 자기애가 그의 생애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학문과 문학에서 나타나는 자아기능이 현실적응에는 숙달(mastering)의 역할 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문과 문학속에서 느끼던 충족감과는 다른 현실상황 때문에 그는 실망하였다. 말년에는 성공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지 만, 그것도 그가 생각한 환상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성공에 이르기 까지는 현실 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이를 동경했지만, 성공을 이룬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적절한 자아 정체성이 없이 이루어진 현실 적인 위치는 불완전한 자아 정체성을 위협하게 되고, 거친(harsh) 초자아(superego) 에 의한 심한 거세불안(castration anxiety)을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그는 현실의 자 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리를 범하고 온갖 음모술수를 행하였다. 건강한 성장과 정에서는 자아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자신의 내면의 자기상을 재구성하여 자기 정체성 과 자기애를 만들어가는 반면, 許筠의 경우는 학문과 문학에서는 자신의 세계를 성공 적으로 구축하였으나 현실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모습을 정형화시키지 못하였다. 마지 막 생애에서는 자신의 환상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였고, 동조될 수 없는 현실 에 의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4)「洪吉童傳」의 정신역동학적 연구

「洪吉童傳」 을 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사회소설이나 革命소설로서 의「洪吉童傳」 을 볼 수도 있고,「洪吉童傳」 이 傳記적인 유형을 가지고 있으므로 신화 적으로 파악하거나 英雄소설로 보는 시각이 있기도 하다. 金紀東은 道術소설이라고 명 명하기도 하였다. 본고는「洪吉童傳」 을 문학적 분석의 대상이 아닌 정신역동학적 연구 대상으로 놓고, 한 인간의 상상속에서 창조된 새로운 현실로서의 의미를 읽어내려고 한다.

閔肯基, 金炳旭등은「洪吉童傳」 을 이루고 있는 화소들이 신화로부터 형성된 전기적

유형에 연원을 두고 있으므로「洪吉童傳」 을 한정된 의미가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보

편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洪吉童傳」 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가지 갈

등상황과 타협형성 등의 내용에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심리적 진실이 포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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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만으로「洪吉童傳」 의 전 면모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고는 말할 수는 없다. 완판본과 같이, 후대에 독자와 편집자에 의하여 많이 채색된 경 우는 좀 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으나,「洪吉童傳」 에는 보편적인 인간상의 모 습 이전에 그것의 창조자인 작가 許筠이라는 개인의 자아의식의 발전 양상이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무의식적 환상이 작품을 통하여 직접 나타날 수도 있 지만, 창작과정 자체는 새로운 현실의 창조이며, 더 나아가 P.Weissman(1969)의 주 장처럼 현실원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일 수 있다. 문학 작품이 개인의 세계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의 소산이라고 할 때, 어떤 문학 작품이든 창작과정에서 다양한 형태 로 작가의 개인적인 무의식이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다.「洪吉童傳」 에서도 일반적인 영웅신화에서 나타나는 영웅의 생애가 작가의 무의식에 의하여 새롭게 구성되어 나타 난다. 趙東一은「 “영웅의 일생” 과 홍길동전」 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화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무시한다. 아버지는 주인공이 출생하는 대목에 나오며, 주인공에게 가혹한 짓을 하기 일쑤이다. 아들도 아버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갖는 다…(중략)… 그런데‘홍길동전’ 에서의 아버지는 이렇지 않다. 홍길동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편이지만 자기가 속한 사회적 질서 때문에 아들에게 동조하지 못한다…

(중략)… 신화의 주인공은 자기가 왕이 되거나 무당의 신이 된다. 어느 경우에든 최 고의 지위에 이르며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지배자에 대한 충성 같은 것은 보여주지 않는다.

일반적인 신화소에서 얻을 수 있는 영웅의 세계가 작가의 가치관과 무의식에 의하 여 창작과정 중에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洪吉童傳」 의 길동은 조선왕에게 계속 충성을 다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許筠이라는 작가가 극복하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컴 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아버지의 가치’ 를 완전히 전복하지 못하고 그것의 동 조자로서 남아있는 것이다.「洪吉童傳」 을 보는 여러가지 분류는 기실 許筠의 심리세계 가 작품에서 여러 형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를 각각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표현하는 영웅에 대한 시각을 개인의 나르시즘의 성장과정

으로 본다면「洪吉童傳」 은 신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화의 차이에

따라 창조성은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洪吉童傳」 은 한국인의 나르시즘의 성장과정

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이다. 그러므로「洪吉童傳」 에서 한 영웅의 탄생은 그와 호

흡을 같이하는 작가와 독자의 의식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한 관점에서「洪吉童傳」 의 구성방식을 보면 여기에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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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在秀가 지적한 바와 같이「洪吉童傳」 의 사건들은 인과적 계기가 없이 임의로 연 결되어 있다. 길동이 율도국을 건설하는 말미부는 앞 부분과 연결되지 않는 종잡을 수 없는 구성이며, 갈등 또한 제기만 될 뿐 심화 발전되지 않고 회피되고 있으며, 인물 역 시 변화가 없는 평면적 인물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주제면에서도‘결론 적으로 말해서 홍길동전의 주제는 애매하다. 비범한 서출 홍길동의 일대기 혹은 출세 담이라고 할까? 아니면 아무리 적서 차별이 심한 사회의 서출이라도 저만 뛰어나면 가문도 빛내고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다는 일종 토속적 운명론이나 찾아볼 수 있다고 할까? 구성의 실패로 인해서 주제의 구현도 이렇게 판이해 지는 것이다.’ 는 지적이 나 올 수 있을 만큼 종잡을 수 없는 면이 있다. 반면, 이에 대해 金一烈은‘홍길동전이 구 성상 실패한 작품이 아니고 반항적 힘의 자기전개’ 가 통일성의 원리이며‘지배층의 부 당한 억압에서 오는 반향적 힘이 위력을 보여주려한 것’ 이 주제적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는 문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상상속의 현실을 오직 현 재의 의식세계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정신분석으로 이런 문 학의 현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으며, 정신분석적인 이론의 정립 전에도 무의식에 의 한 작가의 창조성이 문학비평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 고 이런 주제나 구성에 대한 의문은 작가와 문학작품 속의 인물을 역동적 관계망에 놓 고 파악할 때, 더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洪吉童傳」 의 줄거리 에는 그것이 상상속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상황이 존재한다. 이 갈등상황은 작가 의 과거의 경험의 표현이기도 하며, 작가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환상의 전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현실과는 다른 작품 속의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창조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이를 통하여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는 통찰력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洪吉 童傳」 에서는 주인공의 나르시즘이 성장하여 반복되는 성공과 좌절속에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許筠이 본래 의식적으로 의도한 혁명적인 주제와 아울러 작가가 상상속의 현실을 통하여 구성하고자 하는 다른 진실, 즉 무의식의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洪吉童傳」 은 주인공이 서얼이라는 신분을 가진 인물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일찍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일자(一字)는 이름이 인형(仁衡)이니 정실 류씨 소생이 요, 일자는 이름이 길동(吉童)이니 시비(侍婢) 춘섬(春蟾)의 소생이라.

許筠이 원작에서도 같은 의도를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홍길동은 비범한 서

자로서 마땅히 적자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앞서 밝히고 있다. 이는 이야기 전개의

실마리가 된다. 여기서 許筠은 그 자신이 재능이 뛰어난 훌륭한 사람이나, 환경에 의

하여 박해받는 삶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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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나르시즘은 위협을 받게 된다. 許筠은 소설의 주제로 서얼문제라는 사회적인 문제를 부각시키고자 하였고, 인재가 적은 우리 나라에서는 더 많은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며 그 스스로도 정치에 있어서 실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을 하고 있 다. 이런 서얼문제에 許筠이 관심을 가지게 된 원인에는 개인적으로 젊은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蘇容 李達이 서얼출신이어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 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의도하고자 한 주제는 그의 성장과정과도 밀접 한 관련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후처임에 기인하는 아버지 의 감정적인 부재는 그로 하여금 자아 정체성과 초자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가지 게 하였다. 후처의 자식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신감 때문에 許筠은 무의식속에 서 안정된 대상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許筠이 성장과정에서 충분한 대상관계를 통하여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여 병적인 나르시즘에 빠지게 되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어린 시절의 충격과 불안감은 그의 창작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다. P.Greenacre(1957)의 조심스러운 주장처럼 후 대의 비평가나 분석가가 작가의 모든 생애를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작가의 어린 시 절이 창작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면, 홍길동은 작가 자신처럼 적자의 위치 에 서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의 자신과 동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홍길동은 가족 내에서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얻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면서 비로소 정체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許筠이 정체성을 얻고자 노력했던 반역의 삶과 나르시즘 의 생애와 일치한다. 작가 許筠은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을 위하여 싸워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끊임없이 벼슬에 올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인정받지 못할 때에는 귀거래사를 통하여 자기만의 환상세계에 도취하곤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A.Reich(1960)나 O.Kernberg(1989)의 이론 모두에서 자기애적 인 환자의 경우, 자기와 자아가 충분히 분화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진실한 자기의 모습 을 인식하기 보다는 왜곡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고 하였다. 이 러한 현실과 괴리된 자기애는 과대한 생각과 같은 원초적인 사고로 나타날 수 있을 것 이다.

소설에서 홍길동은 자객을 죽인다. 즉, 주인공의 나르시즘이 직접적인 죽음의 위험을

받고 있으므로 이에 대항하고자 자신을 구속하고 박해하여 정체성 회복을 가로막는

존재를 죽임으로써 자기를 보존하고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Mar-

garet Mahler가 주장한 분리개별화 단계의 자기조절 및 자율성이 실패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적절한 대상관계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관계를 피

해의식 속에서 위협적으로 인식하고 자신만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이다. 이런 성장기의

고착은 이후로 에디푸스기(oedipal period)에 영향을 미쳐 좀더 거친(harsh) 아버지

상을 만든다. 실제로 이런 거친(harsh) 에디푸스적 문제(oedipal issue)는 소설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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