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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脫近代性과 毅齋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相關關係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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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년 8 월 석사학위 논문

동아시아 脫近代性과 毅齋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相關關係 考察

조선대학교 대학원

순수미술학과

강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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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脫近代性과 毅齋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相關關係 考察

The Study of the Post Modernity in East Asia and Huh Baek-ryun's Art and Social Activity

2007년 8월 일

조선대학교대학원

순수미술학과

강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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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신청논문제출서 학위신청논문제출서 학위신청논문제출서 학위신청논문제출서

동아시아 脫近代性과 毅齋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相關關係 考察

지도교수 양 계 남

이 논문을 미술학 석사학위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07년 월

조선대학교대학원

순수미술학과

강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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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준서 인준서 인준서 인준서

강원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위원 조선대학교 교수 위원 조선대학교 교수

2007년 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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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目 目 次 次 次

國文要約

Ⅰ 序文

Ⅱ 許百鍊의 南宗畵 인식과 脫近代性과의 相關關係 許百鍊의 南宗畵에 대한 思想 및 인식

朝鮮美術展覽會의 活動과 中斷에 대한 再考 日本의 世界化와 美術 展開

許百鍊의 朝鮮美術展覽會 活動에 대한 再考 朝鮮美術展覽會의 入賞과 活動 中斷

許百鍊의 南宗畵에 대한 고집과 脫近代性과의 相關關係 脫近代性으로서의 노마돌로지

脫近代性으로서 許百鍊의 繪畵活動 再考

Ⅲ 脫近代性과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再考 鍊眞會의 組織과 活動에 대한 再考

鍊眞會의 組織과 活動

鍊眞會 活動과 脫近代性의 相關關係 無等山 入山과 農業學校 運營에 대한 再考

無等山 入山

農業學校와 三愛思想

無等山 活動과 許百鍊의 近代性 認識에 대한 再考 新文化運動으로서 許百練의 思想展開 現況과 그 展望

Ⅳ 結論 參考文獻

圖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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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脫近代性과 毅齋 許百鍊의 活動에 대한 相關關係 考察

강 원

조선대학교대학원 순수미술학과 (지도교수 : 양계남)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은 서구의 문물과 동아시아의 고유한 정신 적 가치가 일본의 ‘脫亞入歐’로서 서구적 근대화와 강하게 부딪치던 조선말기로부 터 한일합방,한국전쟁 등 실로 한국사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변혁 을 격던 시기에 태어나서 활동했던 화가이다.예술적 영역에서 보았을 때 ‘東洋畵’

라는 회화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작가였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준 다양한 사회활동은 단순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예술이 사회적 실천 속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다.특히 근대화 과정 속에 배태된 수많은 문제점들이 논의되고 과연 ‘近代化’가 近代性의 본래적 실천기재로서 적합한가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 들에게 ‘脫近代’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許百鍊 의 행적을 면밀히 관찰해야 할 당위성이 충분히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그의 삶 속에 탈근대로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화는 이성과 합리성,인간주의,시민중심적 사회성,진보와 해방 등으 로 나열되는 近代性의 普遍性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일본의 脫亞入歐로서 서구적 근대화 모델이 국가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외형적 물질적 근대화였으며, 그런 상황은 결국 태생적으로 각 지역의 전통적 기재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생성해 냈다.즉 지역별 여건과 역사성,지역성 등에 따라 해당 지역민의 삶 속에 구체화 되고 조직화된 근대성의 특수성이 적용된 것이 아닌 외적인 근대화와 더불어 내적 인 문화의 기형화가 끊임없이 반복되던 것이었다.근대성의 실천과정에서 필연적으 로 나타나는 자기 정체성의 확보가 결여된 근대화는 결국 한국의 문화가 정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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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하고 부유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오늘날에 와 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해석과 실천이 요구되기에 이른다.

오늘날 서구의 사유와 통치방식을 지배해왔던 國家哲學statephilosophy의 한계 가 드러나고,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지배하는 脫近代時代의 사회 속에서 노마돌로 지nomadology가 脫近代時代의 새로운 사유와 실천방식임을 역설하는 것은 과거 근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퇴행적 현상들,예컨대 정신적 제요소의 상품화, 자본의 예속,과학기술의 남용,자본적 계급구조의 발달,소외,환경파괴,국가간 갈 등,전쟁 등 근대화시대가 노정한 극명한 한계를 벗어나 개인의 정체성이 확장되고 또 그것이 사회 내에 존속하는 ‘모래알 같은’개인관계 시대의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이다.오늘날의 국가가 과거의 왕이나 교회를 계승하듯이 國家哲學도 과거의 통 치술과 종교를 계승하고 있다.마찬가지로 노마드적 삶은 과거에도 존재했으며 노 마돌로지 또한 억압과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식체계로 존재해왔다.그 가운 데 동아시아의 노마돌로지로서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 老子와 莊子에 의해 계승되어진 道家哲學이다.또한 이것은 서구적 문화의 대항마로서 지식인과 민중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실천 기재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許百鍊의 繪畵 속에 老莊思想은 거의 전체라 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는 회화적 문맥이다.또한 그가 화인,문인들과 만들었던 鍊眞會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오늘날 전통적 회화의 대맥을 이룬 文化運動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이는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서구식 근대화의 한계를 넘어 普遍的 近代性과 近代性 의 特殊性을 아우르는 자아정체의 발로로서 전통을 현재적 삶에 결합시킨 문화운 동의 중요한 실례이다.탈근대시대의 사회구조는 물리적 힘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다.종래의 국가 통치적 관점에 사회를 담아내는 데는 그 한계가 매우 분명하게 드 러나고 있다.이 시대를 이끄는 사회적 문맥은 문화라는 것이 일반적이다.따라서 사회성원의 다양한 참여를 통한 문화운동은 내생적․자발적 문화사회를 만들어내 는 중요한 실천기재로 작용한다.許百鍊의 鍊眞會가 구가했던 문화적 맥락은 老莊 思想에 있다.부연하거니와 老子와 莊子에 의한 道家哲學은 노마돌로지로서 오늘날 매우 폭넓은 사회적 확장성을 갖고 있다.

許百鍊의 無等山에서 農業學校 운영과 차보급 운동은 국가로부터 기인한 수직적 근대화가 아닌 내생적․자발적인 근대화의 전형으로서 보편적 근대성의 순기능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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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이라고 보여진다.아울러 檀君神殿의 복원에 대한 노력은 일본의 강압적 근대 화와 식민정책에 의해 사라진 민족 정체성에 대한 회복이며 서구식 근대화가 가져 온 전통의 파괴,생활양식의 파괴를 문화적으로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許百鍊이 일본식민지의 미술정책에 반대하여 중앙화단활동을 접고 낙향하여 南宗畵를 고집한 것은 일본 근대화과정에서 나타났던 미술계의 폐해와 더불어 朝鮮의 전통을 말살하고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통치기구로서 문화 전반에 걸친 朝鮮總督府의 신속한 재편 움직임에 대한 반발이며,자아정체의 발견 에 따른 조국 근대화의 보편적 근대성에 대한 진작이라 해야 할 것이다.

脫近代時代인 오늘날 전통에 대한 회복은 필연적 과제로 남아있다.그러나 전통 을 이어갈 주체인 사회성원은 전통적 삶의 방식이 아닌 타자적 삶을 이어가고 있 다.이런 상황에서 전통을 보는 두 가지의 방식,즉 ‘解體’와 ‘回歸’사이에서 이 시 대 삶의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길 찾기’는 결국 노마돌로지에 따른 新 文化運動으로 귀결된다.그 실천적 전형을 毅齋 許百鍊은 그의 삶과 사상,활동을 통해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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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序 序 序文 文 文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은 서구의 문물과 동아시아의 고유한 정 신적 가치가 일본의 ‘脫亞入歐’로서 서구적 근대화와 강하게 부딪치던 조선말 기로부터 한일합방,한국전쟁 등 실로 한국사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변혁을 격던 시기에 태어나서 활동했던 화가이다.예술적 영역에서 보았 을 때 ‘東洋畵’라는 회화영역에 한정되어 있는 작가였지만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준 다양한 사회활동은 단순히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 예술이 사회적 실천 속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다.특히 근대화 과정 속에 배태된 수많은 문제점들이 논의되고 과연 ‘近代化’가 近代性의 본래적 실천기재로서 적합한가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에게 ‘脫近代’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許百鍊의 행적을 면밀히 관찰해야 할 당위성이 충분히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그의 삶 속에 탈근대로 인식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적 삶으로서 그의 회화는 형식상 傳統的 山水畵나 花鳥畵,書藝 등으로 점철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사회적 삶으로서 그의 활동은 文化運動,敎育 運動,民族運動 등 세 방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본고에서 중요하게 다루 는 요점 중 하나는 1980년대 이후 한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수많은 문화운동 들과 비교하더라도 그 철학적 내용과 활동방향 그리고 현실적 사회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실천성에 있어서 결코 진부하지 않다는 점이다.문제는 그동안의 허 백련 예술에 대한 비평이 대부분 그의 회화형식 안으로 국한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시대적으로 許百鍊이 활동했던 시기를 한국의 근대기라 한다면 ‘近代’라는 의미의 해석에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또한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삶과 별 개가 아니라면 작가의 인생 궤적을 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 봐야한다.별도로 한국 현대미술의 진정성 혹은 정체성,대표성 등을 논할 때 매 시기마다 논의 되는 문제로서 ‘한국미술에 근대가 있었는가’라는 자기성찰이 시대적 진정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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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당위성을 확보하려면 당시대와 현시대를 아우르는 특수한 상황을 동시 에 들여다보는 즉,時代的 普遍性과 地域的․社會的 特殊性을 활동 속에서 밝 혀내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날 현대미술에서도 사실 형식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현대미술의 실험성을 중요한 텍스트로 보는 대부분의 국제적 미술행사들(비엔날레를 포함 하여)에 형식,양식,장르 등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개념이 형식보다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따라서 諸批評의 핵심은 대부분은 어떤 과정을 통해 작품의 개념이 형성되었는가에 초 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여진다.대부분의 許百鍊에 대한 批評은 이런 점들을 간 과하고 있다.또한 예술활동이 단순히 藝術的 自律性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속 에서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며,피폐해진 삶을 치유하고 보전하려는 인간 삶의 본질적 가치로서 文化運動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였 다는 점이다.그럼으로써 오늘날 예술활동의 새로운 방향으로서 ‘新文化運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본보기model’로서,혹은 ‘자료reference’로서 許百鍊의 활동 이 가진 ‘社會的 擴張性’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본고는 許百鍊의 삶속에 나타난 몇 가지의 중요한 활동들을 근거로 논의를 진행한다.1922년부터 시작되었던 ‘朝鮮美術展覽會’의 출품과 중단,‘鍊眞會’의 창설과 활동,無等山 入山과 農業學校의 운영,檀君神殿의 復原 노력 등이다.

먼저 朝鮮美術展覽會의 출품과 중단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흐름을 살펴봄으 로써 日本의 近代期 ‘近代性에 대한 認識’과 美術政策이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찰하고,또한 朝鮮美術展覽會를 중심으로 전개된 일본의 정책을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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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許 許 許百 百 百鍊 鍊 鍊의 의 의 南 南 南宗 宗 宗畵 畵 畵 인 인 인식 식 식과 과 과 脫 脫 脫近 近 近代 代 代性 性 性과 과 과의 의 의 相 相 相關 關 關關 關 關係 係 係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보다 시기적으로 좀 더 앞선 180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전 술한대로 ‘脫亞入歐’의 기치 아래 일본 근대화를 급속하게 추진한바 메이지유신을 정점으로 일단의 근대화정책들은 성공을 거두며 서구세계에 다른 미개한 동양의 국가들과 다른 근대화된 민족으로서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1)런던의 수정궁박람 회,시카고박람회 등 국제박람회는 그런 일본의 근대화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만 화경으로 작용했으며 ‘우키요에2)’가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로서 박람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된다.‘문명사적으로 대단히 발달된 동양의 미술인 일본의 우키요에’라 는 명성과 함께 이른바 ‘자포니즘3)’이라 불리는 일본식경향의 핵심으로 자리하게 된다.그 과정에서 당시 청나라로부터 전해져 온 南宗畵는 전시대적 유물로 치부되 어 철저히 배격하게 되고 또한 대부분 남종화의 일차적 특성으로 나타나는 ‘詩書畵 一致’를 철저히 부정하며 미술로서 書와 畵를 완전히 구분하게 된다.이런 일련의 현상들은 1905년 조선에 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조선의 문화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며 아울러 1919년부터 논의되어 1921년에 결성되고 1922년에 1회전을 개최한 朝鮮美 術展覽會에 반영되기에 이른다.朝鮮美術展覽會는 당초 書畵協會를 포함한 일단의 조선 지식인 서화가들의 반대로 인해 ‘書畵의 分離’에 대한 강압적 요구가 반영되 지 않았으나 총독부의 조선문화의 일본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서화가 분리되는 과정을 겪는다.4)許百鍊은 제1회 朝鮮美術展覽會에서 일등상 없는 최고상을 수상하

1) 김영나, 「서양과의 첫 만남」, 『한국 근대미술과 시각문화』 , 2002. p.48

2) 우키요에(浮世繪);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부터 에도[江戶]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 로 하여 제작된 회화의 한 양식.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를 뜻하며 그림내용은 대부분 풍속화이다.

그러나 우키요에라는 말은 일본의 역사적인 고유명사로, 보통명사로서의 풍속화와는 구별된다. 전국시대 를 지나 평화가 정착되면서 신흥세력인 무사, 부호, 상인, 일반 대중 등을 배경으로 한 왕성한 사회풍 속·인간묘사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말기에 성행하여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가쓰 가와 순쇼[勝川春章]·도리이 기요나가[鳥井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우타가와 도요하루[歌 川豊春] 등 많은 화가를 배출시켰다.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에 들어서면서 사진·제판·기계인쇄 등의 유입으로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 애호되어 프랑스화단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3) 자포니즘 Japanism; 일본이 1868년 런던박람회 참가를 시초로 시카고, 파리 등의 국제박람회에 참가하 면서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품을 서구에 선보인바, 서구의 미술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 매우 많은 인기를 끌게 되는데 당시 일본미술의 경향을 가리켜 자포니즘이라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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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당 서화계의 핵심 인물로 자리하나,서화의 분리와 함께 총독부의 미술정책이 일본 성향 일변도로 전개된 후 일체의 朝鮮美術展覽會에 대한 활동을 중단하고 光 州로 낙향하며 이후 일생동안 南宗畵를 고수한다.

탈근대시대 노마돌로지적 관점에서,혹은 近代性에 대한 近代性의 特殊性이라는 관점에서 許百鍊의 예술과 삶을 해석한다면 그의 삶 속에 탈근대적 성향 즉,본원 적 의미로서의 近代性이나 傳統에 대한 再現性이 대단히 깊게 내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許百鍊 회화에 나타난 老子 장자적인 성향은 道家로서 분명 아시아적인 전 통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또한 莊子的 俗性에 의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자유인으 로서 회화세계를 탐구했던 특성에서 본다면 노마돌로지로서 현대인의 自我正體에 대한 對自的 觀點을 발견할 수 있다.

許百鍊의 활동이 탈근대적 성향(근대화에 대한 실천적 대안으로서)에 매우 일치 된다는 것은 그의 회화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許百鍊은 작품 내에서 끊임없이 文氣를 추구했으며,아울러 평생 詩書畵의 일치 를 일관되게 추구했다.그것은 우리의 전통적 남화가나 문인화가들이 추구했던 바 이며,결론적으로 우리 전통미술이 갖는 정체성이라고 보아 마땅하다.물론 이것의 출발은 中國의 오랜 畵論으로부터 출발된 것이며 그것을 과거의 文人들이 받아들 여 전통을 세운 것으로서 이것이 과연 韓國의 傳統的인 美術을 대변할 수 있는가 라는 反問의 여지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또한 그래서 한국의 정체성과는 무관한 과거 지배계급의 사대주의적 행위 등으로 치부해버린다.한국미술이 주변국의 영향 이나 시대적 상황과 아무런 관계없이 홀로 그 발전을 거듭한 純粹 結晶體로서 그 大敍事를 지고한 善으로 믿고 있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물론 이 말은 東洋畵라 불리는 대부분의 회화와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대부분의 現代美術을 폐기처분해버 림으로써 그 끝을 볼 것이다.동양화는 중국에 사대하고 현대미술은 서구에 사대한 다는 단순한 논리가 성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韓國美術의 정체성을 어떤 한 장르에 국한해서 생각한다거나 한 시대의 조류,일부의 藝術的 形式에 국한하여 생 각할 경우 이런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며,그에 대한 답을 얻기에는 요원해

4) 이중희 논문 『조선미술전 창립에 대하여』, pp.10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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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어쨌든 한국미술에 남종화적 성격이 중요한 전통으로 남아있다는 데에 반 문할 여지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南宗畵의 繪畫로서 발전방향을 따지기 이전에 이 미 그것은 韓國의 傳統 美學으로 체화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쳤고,또 수많은 前績 과 화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분명한 것은 남종화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일본과 서구의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왔으 며 그 과정 속에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로서 한국적 정체성이 논의되는 중심에 항상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

許百鍊은 그의 회화 속에서 평생 莊子的 思惟의 세계를 구가했다.5)그는 以堂 金 殷鎬(1892~1979)가 추구했던 儒家的 입장의 ‘後素功’과는 매우 상반되는 개념으로서 老子의 無爲自然이나,莊子의 逍遙遊를 그의 회화에 담고 있다.따라서 그의 회화 에서는 金殷鎬의 사실적 인물이나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종화가 추구했던 대 로 대단히 思惟的이고 理想的 世界이다.남종화를 그렸던 대부분 화가들이 事實美 보다는 理想美를 추구한 가장 큰 이유는 宋代 文人畵家들의 추구했던바 性理學에 내재된 禪學美 때문이다.6) 許百鍊은 남종화를 평생 일관되게 추구했다.다시 말해 노장자의 사유철학이 깊게 가미된 회화세계를 구가했던 것이다.이것이 탈근대시대 에 한국이 근대성을 재고하면서 許百鍊을 재고해야할 또 다른 이유인 것이다.

5) 김선희, 1997, 「근대 한국화의 흐름과 의재 허백련의 회화 연구」, pp.32~35 6) 김종태, 1994, 『동양화론』, 일지사,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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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 許百 百 百鍊 鍊 鍊의 의 의 南 南 南宗 宗 宗畵 畵 畵에 에 에 대 대 대한 한 한 思 思 思想 想 想 및 및 및 認 認 認識 識 識

許百鍊은 그가 米山 許瀅으로부터 고향인 珍島와 日本의 小室翠雲7)에게 南宗畵 수업을 받은 이후 평생 南宗畵를 고집했다.또한 그가 세운 鍊眞會에서의 繪畵도 모두 南宗畵로 일관되고 있음을 그의 이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毅齋가 南宗畵 를 고집했던 것은 南宗畵가 사의적 세계를 다루는 정신적 세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무위자연과 합일하여 절대적 자유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老․莊子的 道家의 사상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許百鍊은 1947년부터 無等山에 들어 春雪軒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景觀을 中國의 蘭亭에 비유하곤 했다.8)‘蘭亭’은 절강성(浙江省)소흥(紹興)에 있는 회계산(會稽山) 의 유명한 정자로서 東晋時代 王羲之가 계제사(禊祭祀)를 지내러 갔다가 지은 글 蘭亭書로 잘 알려져 있다.9)許百鍊이 春雪軒을 蘭亭에 비유한 것은 春雪軒 주변의 풍경이 마치 蘭亭에 등장하는 流觴曲手의 修禊 장면에 나타나는 풍광을 연상한 때 문이었다.실재로 春雪軒은 無等山 證心川과 璽印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細流의 사 이에 위치하여 그 풍경이 빼어나다.이 속에서 許百鍊은 道家的 은둔의 삶을 살았 고 그림을 그렸다.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春雪軒은 자신의 이상향 을 실현하는 중요 터전이었던 것이다.

탈근대시대의 대안으로서 들뢰즈는 고대 그리스의 노마돌로지를 언급했고10)그 에 대한 아시아적 관점으로서 장시기11)등 관련학자들은 老․莊子의 道家나 佛家 7) 小室翠雲(고무로 스이운 ; 1883~1945) : 본명은 貞次郞, 號는 長興人, 1889년 田崎草雲에 入門, 남화를

배움. 日本美術協會에 출품하여 수상. 제 2회 文典에 출품 수상한 이후 문전에서 활약. 1924년 帝國美 術院 회원이 됨

8) 문순태, 『의재 허백련』, 중앙일보․동양방송. P.182

9) 왕희지 난정서; 왕희지(303~361, 최근 밝혀진 연대로서 이전에는 정론이 없이 307~365년으로 통용되 다 최근 베이징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303년에 태어나 59세의 일기로 사망했다고 고증됨)는 中國 東晋 사람으로서 그의 나이 51세인 영화 9년(353년) 삼월삼짓날에 회계산에서 있었던 난정수계를 기념하여 당시의 명사 41명이 시를 짖고 난정집을 만들었는 바, 그 서문을 왕희지가 작성했는데 그것이 난정서이 다. 난정서의 원본은 당태종 이세민이 자신의 무덤 속에 같이 수장할 것을 명하여 유실되었고, 현재 전 해지는 것은 후세에 모사한 것들이 전해져 다만 그 전적을 짐작만 할 뿐이다.

10) 장시기, 2005,『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당대. pp.75~86

11) 장시기; 1960년 충북 괴산 출생.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탈근대에 대한 아시아적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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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서구의 대항마로서 아시아적 노마돌로지로 제시하고 있다.물론 道家나 佛家가 脫近代時代 아시아의 대안으로서 전부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12)그러 나 서구미술의 대항마로서 아시아적 전통이 내재된 미술이 아직 나타나고 있지 못 한 현 상황에서 道家나 佛家의 정신세계가 ‘새로운 길찾기’의 방향으로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특히 아시아적 노마돌로지로 제시된 道家思想은 한국미술 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쳐온 것이 사실이며,莊子가 말한 ‘逍遙遊’의 절대 적 자유세계를 구가한다는 점에서 국가에 의해 억압되어 온 개인의 욕망으로서 ‘자 유’를 구가하는 탈근대시대의 특성과 깊게 조응하기 때문이다.또한 오늘날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인간의 얼굴’을 한 새로운 ‘길찾기’로서 이정우13)가 제시한 ‘氣’에 대한 담론은 南宗畵에서 줄곧 강조해온 중요 텍스트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許百鍊 繪畵를 형성하는 南宗畵를 논하기에 앞서 南宗畵가 18세기 한국에 소개 되어 19세기에 토착화단계에 이르는 제과정을 검토해보아야 한다.당시 청나라와의 교류와 朝鮮 近代化의 前奏라 할 수 있는 ‘利用厚生’과 ‘經世治民’을 모토로 형성되 었던 實學,그리고 金正喜의 교류 등을 살펴봄으로써 南宗畵가 韓國繪畵의 傳統으 로서 토착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許百鍊의 繪畵를 南宗畵라 하는데 문제 삼을 경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그의 화업에 따른 가계의 전통이 그렇고,또한 그가 鍊眞會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강조했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과 언어』(동인, 1996), 『근대와 탈근대의 접경지역들』(사람생각, 2001),『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당대, 2005) 등이 있으며, 본 고에서 말하는 아시아적 노마돌로지는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에서 유래한다.

12)「세계화시대 아시아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개최되었던 <아시아문화심포지엄(5.18 기념재단 주최)>에서 조명래 교수가 아시아적 근대성의 실천적 대안으로 장시기 교수가 말한 ‘아시아적 노마돌로지’를 예로 들어 제시한 것에 대해 대구 카톨릭대 이정옥 교수는 아시아의 수많은 전통과 종교 중에서 하필이면 도교와 불교로의 회귀가 대안적 담론으로 떠오른 것은 최근에 유행되는 서구의 탈근대 담론에 조응하기 때문이라 밝히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서구적 담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차원에서 그 한 계성을 주장했다.

13) 이정우; 미학, 그리스철학, 프랑스 철학을 연구했으며 1994년에 미셀푸코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화여대에 출강하며 철학아카데미 원장으로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얼굴』(민 음사, 1999)에서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초점과 ‘전통. 근대, 탈현대의 흐름’이라는 역사적 초점 을 타원형의 궤적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동과 서를 ‘가로질러’ 사유하는 자아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제6장 「탈주와 회귀 사이에서」는 현대의 문화적 제현상을 놓고 새로운 길찾기에 대한 성찰적 입장으 로서 전통에 대한 ‘뿌리 없는 해체와 맥락 없는 회귀’를 주장하여 각 시대에 맞는 길찾기를 강조하고 있 음과 동시에 실천적 담론으로서 ‘氣chi’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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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회화,또 중앙화단에서의 남종화 발전에 대한 노력 등이 아니더라도 그의 수많 은 작품 속에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許百鍊의 회화 세계를 보다 면밀하게 살 피기 위해서 南宗畵의 역사와 함께 그의 화맥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南宗畵는 조선시대 중기에 중국으로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여 후기에 깊게 뿌리를 내린다.黃公望,吳鎭,王蒙,등 元末 4대가를 비롯하여 明代의 沈周와 文徵明 등 吳派의 화가들과 淸代의 4王․吳․惲(時敏,王鑑,王翬,王原祁,吳歷,惲壽平)등과 明代 후반의 董其昌의 화풍이 전래된 것이 그 유래라 할 것이다.이러한 중국의 남 종화라고 하는 文人畵風 繪畵는 北京과의 활발한 교류와 『顧氏畵譜』14)와 함께 일본의 회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芥子園畵傳』15)등이 들어온 후부터이 다.16)

이 시대에 활동한 대표적 南宗文人畵家로는 李麟祥(1710~1760), 姜世晃 (1723~1801)의 뒤를 이어 申緯(1769~1847),金有聲(1725~?),李在寬(1783~1837)이 있 고 조선말기에 이르러 金正喜(1786~1856)와 申命準(1803~1842)으로 이어진다.17)

조선시대 말기의 회화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金正喜波로 분류되는 金 正喜와 趙熙龍(1789~1866)許維(1809~1892),田琦 등이 주도한 남종화풍의 본격적인 유행과 토착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특히 秋史 金正喜는 <歲寒圖>와 <墨蘭圖>를 남겨 그 진적의 빼어남을 알렸고,그의 제자였던 小癡 許維는 본고에서 논의하고 있는 바,후대의 毅齋 許百鍊에 이르는 南宗畵脈의 중심인물로 자리하고 있다.

18세기는 대략 謙齋 鄭敾(1676~1759)과 檀園 金弘道(1745~1806)의 시대라 할 수 있다.이 시기 회화는 眞景山水와 風俗畵가 주류적 회화로 알려져 있고 그리고 李

14) 『顧氏畵譜』; 중국명대 고병(顧炳)이 1603년에 간행한 화보로 육조에서 명말에 이르는 중국 화가들의 화풍을 판화로 그린 것이다. 원명은 『歷代名公畵譜』였다. 이로써 중국회화의 임모본이 제공되었다.

15)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중국 청대 왕개(王槪) 형제들이 편찬하였으며 최초 1집이 「산수화보」

로 1679년에 출간, 이후 「난․죽․매․국보」와 「초충․영모․화훼보」가 1701년에 간행되었다. 체계적이고 내용이 풍부하여 오늘날까지도 회화교본이 되고 있다. 안휘준은 『한국회화사 연구』에서 정선의 진경 산수화 중 1937년 제작된 <육상묘도(毓祥廟圖)>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권5 「벽오청서도(壁梧淸 署圖)」를 참고하여 정선 자신의 화풍으로 새롭게 창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16)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돌베개, 2007. pp.258~259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80. pp.267~268 17) 안휘준, 위의 책. pp. 268~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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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祥(1710~1760)과 姜世晃(1713~1791)등에 의한 文人畵風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 던 시기였다.18)그러나 鄭敾과 金弘道로부터 시작된 眞景山水畵와 風俗畵는 19세기 에 들어 점차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자족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고,이 때 국제 적 감각의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는바 그것이 金正喜를 중심으로 한 新文人畵風회 화와 秋史體로 대표되는 개성적 서체이다.19)

19세기에 新文人畵風이 일어나게 된 것은 그 배경에는 조선 사상계의 동향과 밀 접한 관계가 있다.18세기에는 여전히 朱子學이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근 100년간 청나라와의 불편한 국제관계로 수용되지 못했던 乾 隆시대20)의 활기찬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화적 개방론이 朴趾源 (1737~1805)과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北學派에 의해 일어났다.北學派 가운데서도 청나라 燕京의 학문과 예술동향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교류했던 사람이 朴濟家 (1750~1805)였으며,그는 세 차례에 걸쳐 연경에 다녀왔고 그가 교류한 청나라 학 자는 무려 200여명이나 되었다.21)이 때 朴濟家의 수제자가 金正喜였고 그는 이런 당시의 상황에 힘입어 청과 많은 교류를 할 수 있었으며,아울러 19세기 조선의 글 씨와 그림을 국제화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金正喜의 이런 활동은 그가 제주도에 위배된 후 7년 동안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姜瑋(1820-1884)에게 전달되고 姜瑋를 중심으로 한 六橋詩社는 개화기 조선 의 문화를 朝鮮,中國,日本에 걸쳐 국제적으로 알리며 교류하는 역할을 한다.22)

18) 안휘준, 위의 책. pp.254~267

19) 유홍준,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그의 패트런」,『완당과 완당바람 展 도록』,부국문화재단, 2002. 이 글은 유홍준이 2000년 8월 영국 런던대학 아시아․아프리카 연구소(SOAS)에서 열린 ‘Patrons & Art in Korea’ 심포지움에서 영문으로 발표된 글을 2004년 의재미술관에서 있었던 ‘완당과 완당바람’전시회의 도록에 재수록한 내용이다.

20) 乾隆(1735~1795, 중국 명나라의 3대 황제), 건륭은 청초 선대황제가 세운 왕조의 통치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지식인을 회유하는 대대적인 문화정책을 편다. ‘四庫全書’라는 대편찬사업은 그런 그의 업적 인바 연인원 1만5천명의 학자가 20년이란 긴 세월동안 모두 3만6천권, 3천450책의 방대한 편찬작업이 었다. 이것은 청의 제1대 황제인 康熙, 2대 擁正, 3대 乾隆에 이르는 문화정책의 귀결로서 청대에 발달 했던 문화의 바탕이 된다.

21) 유홍준, 위의 논문

22) 최경현, 「육교시사를 통해 본 개화기 화단의 일면」, 『한국근대미술사학 제12집』, 한국근대미술사학 회, 2004. pp.217~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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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喜가 제자들이나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야기한 내용 중 대표적인 것이 ‘文字 香 書卷氣’이다.이는 그림이든 글씨이든 그 속에 흐르는 높은 정신적인 경지에 입 각한 개성을 강조한 말로서 다음의 텍스트를 통해 확인된다.

隸書 쓰는 법은 가슴속에 古雅한 뜻이 들어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 고,가슴속의 고아한 뜻은 또 文字香과 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끝에 발현되지 않는다.23)

그의 이런 文字香書卷氣는 후에 許百鍊에까지 이어지며 許百鍊은 평생 자신의 회화 속에서 이를 버리지 않았다.

秋史의 회화를 가장 많이 이어 받은 사람이 許維(1809~1892)이다.그는 스승인 草衣선사로부터 秋史를 소개받았는데,秋史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세 번 그를 방문하여 위로했고,또한 秋史의 소개로 憲宗 앞에서 山水畵를 그려 진상하기도 했 다.24)후에 秋史가 그의 작품을 평하기를 “압록강 이동에 小痴를 따를 자가 없다”

거나,“그의 그림이 나보다 낫다”라고 말한 것은 秋史가 얼마만큼 그를 아꼈는지 알게 한다.25)許維의 화풍은 다시 그의 제자인 許瀅에게 이어지며 毅齋 許百鍊에게 이어진다.이상이 金正喜로부터 許百鍊까지 이어지는 南宗畵脈의 가계이다.

許百鍊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준 또 한 사람의 작가는 東坡 蘇軾(1036~1101)26)이 다.그의 “詩中有畵 畵中有詩”나 “형상을 그대로 그리려함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유 치할 뿐이다”라는 말들을 자신의 회화세계에 접목하였을 뿐만 아니라27)또한 그의 23) 김정희, 「상우에게 써서 보이다」, 『국역완당전집』제2권, p.336, 유홍준이 위의 글 「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그의 패트런」에서 인용했던 글을 재인용 24) 허유, 김영호 편역, 『소치실록』, 서문당, 1992 25)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80. p.294

26) 소식(1036~1101), 북송을 대표하는 대 문장가이자 당송팔대가중 일인. 字는 子瞻. 號가 東坡. 미주 미산(眉州 眉山: 四川省 眉山)사람이다. 22세 진사에 합격 벼슬길로 들어서 초기에는 옥당 직을 역임하 였으나 王安石과 대립, 조정에서 쫓겨나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그 후로도 그의 시를 조정을 비 난하는 내용이라는 반대파들의 참소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목숨만은 건져 황黃州로 유배, 그때 동파의 최고 걸작 중 걸작인 赤壁賦를 썼다. 동파는 풍류 활달한 성격으로 道, 佛 學에 밝았으며 詩文뿐 아니라, 書畵, 音樂에도 통달한 그야말로 팔방미인으로 역대 중국의 최고의 문장 가로 일컬어진다. 작품집으로 <동파전집> 115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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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東坡와 관련된 많은 제발을 남겼다.그 대표적인 예로 그의 1947년 作 <淸 風明月>(圖1)은 東坡의 赤壁賦28)에 등장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냄과 동시에 題 跋로 삼았다.

惟有淸風明月在 맑은 바람 밝은 달이 다만 남아 있어서 網魚謀酒附髥蘇 고기 잡아 술을 받아 소식(蘇軾)에게 부치네.

또 그의 畵論을 이루는 많은 題跋들 가운데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것은 王原 祁29)의 畵論으로서 청초 화단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擬古主義로 알려진 내용이 다. “고법에 있는 것도 아니요,내손에 있는 것도 아니며,그렇다고 고법과 내손 밖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다(不在古法 不在吾手 又不出古法吾手之外).”라는 글귀 로 그의 수많은 작품에 題跋로 등장한다.30)(圖2)

27) 김선희, 「근대한국화의 흐름과 의재 허백련의 회화 연구」, 1997. p.27

28) 赤壁賦;송나라 元豊 5년(1082)가을 7월 16일의 달 밝은 밤에 소동파가 赤壁에서 뱃놀이를 하며 삼국 의 영웅인 조조와 주유의 풍류에 비겨 자신의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고,결국은 저들이나 자신이 다 무 한한 생명 앞에서는 모두 덧없는 존재라는 것과,무한한 본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이 다 같은 것 임을 깨닫고 시름을 잊는다는 내용을 술회한 명문이다.그 제3절에 해당하는 부분만 수록하면 다음과 같다.여기에서 제 15행과 16행에 ‘淸風明月’의 싯귀가 등장한다.“蘇子曰,客亦知夫水與月乎.逝者如斯, 而未嘗往也,盈虛者如彼,而卒莫消長也,蓋將自其變者而觀之,則天地曾不能以一瞬,自其不變者而觀之,則 物與我皆無盡也,而又何羨乎.且夫天地之間,物各有主,苟非吾之所有,雖一毫而莫取,惟江上之淸風,與山 間之明月,耳得之而爲聲,目寓之而成色,取之無禁,用之不竭,是造物者之無盡藏也.而吾與子之所共樂.客 喜而笑,洗盞更酌,肴核旣盡,盃盤狼藉.相與枕藉乎舟中,不知東方之旣白.내가 말하기를 “손(客)은 저 물 과 달을 아는가?강물은 가기를 이처럼 하나 일찍이 다하지 않으며,달은 찼다 기울었다 하기를 저처럼 하나 끝내 사라져 없어지거나 자라서 커지지 못한다.그 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천지도 일찍이 한 순 간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변하지 않는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과 우리 인간이 모두 무궁무진한 것이니, 또 어찌 부러워할 것이 있겠는가.또 천지의 사이에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만일 나의 소유가 아니 라면 비록 털끝만큼도 취하지 말아야 하거니와 오직 강 위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을 붙이면 색을 이루어 취하여도 금하는 이가 없고 써도 다하지 않으니,이는 조 물주의 무궁무진한 보고요,나와 그대가 함께 즐거워해야 할 것이다.”하니,손(客)은 기뻐 웃고 잔을 씻 어 교대로 술을 따르니,안주와 과일이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러웠다.서로 배 가운데 베고 깔 고 누워서 동쪽이 이미 밝음을 알지 못하였다.

29) 王原祁(1642~1715);자 무경(茂京), 호 녹대(麓臺). 타이창[太倉] 출생. 王時敏의 손자로, 조부에게서 그 림을 배우고, 1670년 진사에 합격하여 書畵譜館 총재가 되었다. 고금의 명서화를 감정하는 데 남달랐으 며, 학식이 풍부하고 詩·文·畵에 뛰어나 ‘藝林三絶’로 일컬어졌다. 王翬와 함께 청조의 화원에 南宗畵를 도입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왕휘의 虞山派에 대한 婁東派의 개조가 되었다. 勅選《佩文齋書畵譜》의 편 찬을 비롯하여《麓臺題畵錄》《雨窓漫筆》 등의 저술이 있다. 흔히 4王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30) 박영환, 「又不出古法吾手之外의 藝術-의재 허백련의 회화사상」, 『의재허백련』, 삼애학원, 1991. 의 재의 작품중 ‘又不出古法吾手之外’관련 제발을 실은 작품은 다음과 같다. <溪山淸夏圖>(1924), <湖山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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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百鍊의 繪畵는 대략 상기한 많은 인물들의 前績과 遺語로부터 연유한다면 수 많은 독서와 철저히 수양한 결과로부터 체득된 경우도 있다.許百鍊은 『論語』,

『孟子』,『中庸』,『大學』등 고전을 즐겨 읽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道德經』을 많이 읽었던 것도 그의 회화사상과 관련이 깊다.제자들에게도 남종산수화를 하려 면 老子의 道를 깨우쳐야 함을 강조하였다.(圖3)

“사람이 사람노릇을 하여 사람답게 살자면 대학을 읽어야 하고,화가가 우주 본 질을 깨우치고 진짜 뜻이 깊은 산수를 그리려면 노자의 도를 깨우쳐야 한다.”31)

老子의 道의 핵심은 無爲自然에 있다.노자는 ‘無爲란 적적하고 고요하며 無聲으 로,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끌어도 오지 않고 밀어도 가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32)자연과 철저히 융합함으로써 무위에 들고 또한 절대자유의 세계에 들 수 있다.이는 예술가가 구가하는 근본정신이며,확실히 道釋人物畵와 깊은 관계가 있다.작가는 자유방임적 상태에서 창작에 임함으로써 독창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33)(圖4)

예술에 있어서 莊子는 그것의 본성을 직관할만한 많은 전적을 남겼다.그러나 莊 子는 예술을 추구한 일도 없거니와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남긴 적도 없다.다 만 전쟁으로부터 연유한 빈곤과 고통스런 현실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구가했을 따름이다.그는 절대자유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기의 마 음속에 정신적 해방을 체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으로 보았다.34)그의 철학은 예술 이 진정한 인간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후세의 관점과 일치하며 道가 예술의 본 질일수 있음을 말하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바 그 대표적인 것이 ‘庖丁解牛’와 ‘胡蝶 夢’이다.장자는 이른바 道는 現實의 삶 속에서 體認된다고 하였거니와,현실 속에 서 표현할 수 있는 도구를 技로 보았으며 끝없는 技의 鍊磨를 통해 道에 이를 수

夏圖>(1931), <三公不換圖>(1942), <江山無盡圖>(1952), <遠浦歸帆圖>(1956), <余愛江山圖>(1962).

31) 문순태, 『의재 허백련』, p.229

32) 老子, 淮南子, 제19권 脩務訓; 惑曰 無爲者寂然無聲 漠然不動 引之不來 推之不往 33) 김종태, 『동양화론』, 일지사, 1994. pp.15~16

34) 최덕주, 「장자의 예술정신」, 숙명여대. 1996. pp.26~31 사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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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을 설명했다.이것이 그가 말한 ‘庖丁解牛’35)이며 후세에 藝術創作의 근본 태도 와 방향을 일러주는 핵심 텍스트이다.또 莊子는 ‘胡蝶夢’36)의 비유를 들어 자신이 온전히 망각되고 모든 사물과 ‘物化’됨으로써 절대 자유의 세계인 ‘逍遙遊’에 이른 다고 했다.이 또한 예술이 창작됨은 표현코자 하는 對象과 自我가 완전히 物化의 경지에서 합일되어야만 절대자유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종화의 근본정신에 깊이 박혀있음을 알 수 있다.37)(圖5)

35) 莊子의 <양생주편>, 莊子는 養生主의 庖丁解牛에서 道와 技를 비유하여 말했는데, 梁惠王이 포정의 칼 솜씨를 보고 “아! 훌륭하다. 놀라운 기술이다”고 말하자 庖丁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기술이 아 닙니다. 신은 기술을 넘어 道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으로 소를 다룰 때는 온통 소가 얼 마나 크게 보이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칼을 댈지 엄두가 나지 아니했습니다. 삼년이 지나자 겨우 소가 하나의 적은 덩어리로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는 전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감각과 지각 은 멈추고 정신이 행할 따름입니다. 천리에 쫓아서 칼날은 마치 뼈와 살 사이를 큰 길을 달리듯 나가는 것입니다. 힘줄이 얽힌 곳을 잘못 건드릴 이유도 없거니와, 더구나 큰 뼈를 다칠 이유가 있겠습니까?…

덜컹하고 마치 흙덩이가 뼈에서 떨어지듯이 하면, 그 때 저는 칼을 맨 채로 일어서서 득의만면해서 사 방을 휘 둘러보며 한없는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36) 莊子, 齊物論, “昔者莊周夢爲胡蝶. 翊翊然胡蝶也, 自喩適志與, 不知周也. 俄覺則籧籧 然周也. 不知周之夢 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周與胡蝶, 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잠을 자던 장주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 다. 훨훨 나는 나비… 그는 말할 수 없는 즐거운 기분이 되어 나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꿈속의 일 인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서. 깜짝 눈을 떠 틀림없는 장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자기의 존재를 의식 하지 못한다. 지금 눈을 뜬 장주가 胡蝶이 된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훨훨 날던 胡蝶이 꿈속 에서 지금 인간이 된 것인가? 분별된 세상을 넘어 물화된 세계만이 현재의 眞相이다.”

37) 최덕주, 위의 논문, pp.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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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 朝

朝鮮 鮮 鮮美 美 美術 術 術展 展 展覽 覽 覽會 會 會의 의 의 活 活 活動 動 動과 과 과 中 中 中斷 斷 斷에 에 에 대 대 대한 한 한 再 再 再考 考 考

許百鍊은 1922년에 열린 제 1회 鮮展에 1등상 없는 2등상을 수상하여 표면적으 로 鮮展을 통해 배출된 대표적인 작가군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문제는 선전을 중 심으로 진행된 내부적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許百鍊의 작가적 행보가 어디에 귀결했는가를 파악한 후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許百鍊은 1922년 제 1회 선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이후 제 5회전을 끝으로 더 이상 출품하는 것을 중단한다.이것은 당시 선전을 중심으로 작가의 성공여부를 가 름하던 관행을 놓고 보면 대단히 획기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선전의 연이은 입상 은 그 본말을 평가하기에 앞서 어찌 됐든지 작가적인 성공을 의미했고,경제적이든 사회적 지위이든 이미 보장 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던바,그것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다.

許百鍊은 선전의 출품을 중단한 이후 고향 진도와 광주 등지를 전전하며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되며 이 시기에 자신의 작품의 방향을 결정 짖는 가장 많은 실험작들을 제작하게 된다.1938년 광주 호남동에 집을 구입하여 정착하고 연진회 를 창설하게 된 것은 선전의 중단과 뒤이은 방랑생활의 종착점이며,아울러 한국 남종화로서 깊은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는 중요한 화력으로 자리하게 된다.38)

許百鍊의 선전 출품과 중단의 배후에는 조선 남종화의 전통과 일본의 조선미술 정책,일본의 서구화와 남종화에 대한 배척 등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진행되었 던 지난한 역사의 과정이 숨어있다.또한 西勢東占으로부터 일본의 동양주의와 동 아시아주의 등 패권적 발상이 당시대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하면서 문화,특히 미술의 엄청난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배후는 許百鍊이 전통을 인식할 수 있는 기재로 작용하며 또한 자 아를 발견해내는 거울로 기능한다.許百鍊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점점 또렷해 지는 南宗畵로서의 전통과 실체를 조선적 상황과 주변부 상황을 동시에 관망함으 로써 비로소 자각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런 자각은 일본으로부터 규정된 패권적 근 대화가 아니라 보편적 근대성의 순기능적 ‘재현’이 가능케 하며 그 구체적인 실천

38) 문순태, 『의재 허백련』,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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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朝鮮美術展覽會의 중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패권적 근대화가 자국과 그의 속국이 된 조선에 어떤 영향을 주 었는지,특히 미술에 나타난 대표적 현상으로서 남종화에 대한 배척이 어떻게 이루 어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日 日本 本 本의 의 의 世 世 世界 界 界化 化 化와 와 와 美 美 美術 術 術 展 展 展開 開 開

1905년 日本은 본격적인 조선 침탈의 제1보로서 朝鮮에 朝鮮統監府를 설치했다.

이것은 5년 뒤에 있을 韓日合邦의 전초와 같은 것으로서 조선은 사실상 이미 일본 의 속국이 되었음을 의미한다.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급속도로 확대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륙진출을 꾀하며 아울러 그에 필요한 모든 물자들을 조선으로부터 취 하는데,이런 일련의 전략은 서구 열강들이 급속한 산업화로 부족해진 물자와 전쟁 준비에 따른 물자들을 그들의 속국에서 취한 것과 그 궤를 같이한다.

서구 열강은 약소국가에 대한 그들의 침략을 국제적으로 적절하게 합리화할 필 요가 있었던바,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던 것이 ‘近代化’였다.미개하고 야만적인 민 족을 개화시키고 문명화시킨다는 것은 자국 내에서 혹은 국제적 차원에서 지극히 도덕적인 것이었으면서 아울러 문명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위상으로 인식되고 있었 던 것이다.그런 근대기 현상은 종종 대규모 국제적인 행사를 통해 현실화되어 나 타났고 열강은 그런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많은 국가적 역량을 동원했는데,그 대 표적인 것이 國際博覽會였다.39)

국제박람회에서 주로 전시된 것은 과학기술을 나타내는 산업기계 및 그 생산물 등과 각국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는 미술품,공예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따라서 이 때 소개된 각국의 미술은 美術的 自律性을 내재한 순수 작품보다는 匠人的인 39) 김영나, 「서양과의 첫 만남」, 『한국 근대미술과 시각문화』 2002, 조형교육, p14. 國際博覽會의 효시는 1851년 영국 런던의 수정궁에서 열린 ‘萬國 産業物産 大博覽會(TheGreatExhibition ofthe WorksofIndustryofAllnations)’였는데,이후 박람회는 인류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낸 기념비적인 성과물의 하나로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진보,미래적인 비전을 동시에 보여주는 큰 볼거리였다.脫亞入 歐의 기치 아래 近代化를 서두르며 서구열강의 대열에 들고자 했던 일본이 국제박람회에 눈을 돌린 것 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일본이 박람회에 처음 참가한 것은 1862년 런던 박람회였다.이 때 일본의 수공예품이 처음 전시되어 ‘멀리 동양에서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나라’로서 관심을 끌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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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고난이도의 手工이 깃든 것들이 인기를 끌었는데,즉 순수 미적인 가치보다 각국의 문화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부가적 가치가 앞서는 것이 보통이었다.

40)그동안 미술작품으로서 그 예술적 순수가치가 희박했던 공예품들이 미술품으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고,그것들에 앞으로 끊임없이 발전시켜야 할 대상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런 일련의 박람회 참가를 통해 ‘美術’이라는 단어가 정착되었 고,미술과 미술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1868년 시작됐던 메 이지 이전 에도시대 말기에 이미 서양미술이 들어온 이 후 일본은 급속하게 서양 미술이 정착되었고 메이지 10년을 지나면서 그 정점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의 미술이 완전히 서구화 위주로 치달은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일본의 전통에 대한 국수주의적 관점의 태동을 낳게 되는 극단주의 로 전개된다.일본의 서구화는 일본 국내에 자국의 정체성의 함몰을 의미했고 결국 사회 곳곳에서 일본의 전통에 대한 자각을 갖게 했다.메이지 10년대 후반부터 일 본 내에서는 지나친 서구화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있었고,마침내 메이지 22년 東 京美術學校의 창립을 기점으로 이른바 ‘復古主義’시대를 맞이한다.41)

전통에 대한 극단적 보호 움직임은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이후 거의 몰락의 위 기에까지 내몰렸던 일본의 전통미술에 대한 화려한 부활을 이루었고,그것은 시니 컬cynical하게도 당시 미국사람으로서 東京帝國大學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하버드 출신의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Fenollosa,1853-1908)42)와 후에 東京美術學校의 校長이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1863-1913)43)에 의해 주도되었다.특히 페놀로사 40) 김영나, 앞의 책, p21. 일본은 이후 계속해서 유럽과 미국의 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자포니 즘(Japonisme)과 일본미술품 수집의 붐을 일으켰다.1873년부터는 정부의 주도아래 박람회에 참석하는데 비엔나박람회에 공예품들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으며,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렸던 1876년의 필라델피아 박람회 때는 대부분의 일본 물품들이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41) 타카시나 슈우지(高階秀爾), 김영순 역, 근대미술에 있어서 전통과 창조, p237

42)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1853-1908), 일본회화부활운동의 선구자. 하버드대학 졸업.

1977년 동경제국대학의 정치학 교사로 처음 일본에 초빙되면서 일본에서 天繪學舍를 운영하고 있던 타 카하시 유이찌 등과 양화진흥론을 외쳤으나 차츰 일본의 고미술에 이끌려 일본회화의 부활을 주장했다.

메이지 15년에 행했던 강연 ‘美術眞設’에서 유화를 문인화와 더불어 ‘진정한 畵術을 압박하는 적’으로 공격했고, 그의 저서인 《중국 및 일본미술의 諸時代》에서는 일본의 古都에서 고대 로마나 그리이스를 연상시킬만큼 훌륭한 작품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기술할 만큼 일본의 전통미술에 깊게 매료 되었다.

43)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 미술행정가, 교육자, 미술사가, 본명은 覺三. 1880년 東京大學 졸업 후 문부성에 들어가 미술교육, 고미술보존문제에 착수. 1884년 페놀로사와 鑑畵會를 결성하여 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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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일본에 오게 된 메이지 11년 여름에서부터 다시 미국으로 귀국하는 메이지 23 년의 십년여의 세월 동안 일본 미술계는 양화일변도에서 일본미술의 철저한 복고 로 그 대전환을 이루었다.44)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일본의 미술이 복고풍으로 전환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그 복고의 대부분은 일본의 전통미술 카노우하狩野波45)에 집중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실재로 카노우하 회화는 일본의 많은 박람회 전시품 중에서 그 섬세함과 화려함,작화의 정교함으로 서구회화와 비견되는 동양의 회화로 인식되어 대단히 큰 인기를 누렸다.더구나 그것은 일본이 아직 서구의 영향을 받기 전인 1400년대 말에 태동하여 무려 3세기의 긴 세월동안 일본의 주류세력을 이루었다.

그런 역사성은 서양 유화의 역사와 비견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일본사람들의 전 통에 대한 자존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狩野波는 일본의 역사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화파였다.(圖6~7)狩野波의 시조는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1434-1559)이며 쿄토(京都)에서 쇼군의 御用繪師로 野波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서양화의 사실성을 수용하는 신일본회화의 개척에 진력하여 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1890년 東京美術學校 교장이 되고 帝國博物館 이사, 미술부장, 임시보물 취조관을 겸직.

1898년 미술학교의 내분으로 교장 및 박물관의 공직을 사임하고 日本美術阮을 결성. 1902년 인도여행 을 통해 “동양의 理想”을 자각 1905년 보스턴 미술관 동양관의 고문이되어 매년 1년의 반은 미숙에서 보냈다. 文展 심사위원, 국보보존회 이원을 지냄. 메이지기 미술의 지도자 뿐만아니라 탁월한 국제감각 속에 아시아의 문화 및 예술의 우위성과 일본의 역할을 주장한 국수적 이상주의자로 내외에 알려져 있 다. 주요 저서로는 《동양의 이상》, 《일본의 자각》, 《岡倉天心全集》등이 있다.

44) 타카시나 슈우지, 앞의 책, p251

45) 카노우하(狩野波);狩野波의 시조는 카노 마사노부(狩野正信,1434-1559)로 쿄토(京都)에서 쇼군의 御用 繪師로 활동했으며 이 후 그의 아들 모토노부(狩野元信,1476-1559)에 이르러 예술적,사회적으로 확고한 지위를 다졌고,모토노부가 당시 막부 에도코로(繪所)의 책임자였던 토사 미츠노부(土佐光信,?-1522)의 딸과 결혼하면서 이로 인해 궁중에서 비밀로 전수되어오던 일본 전통회화의 기법을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전문가로서의 지위와 가족과 제자들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과 재산 덕택으로 모토노부는 천재적 자질을 발휘할 수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쇼군의 어용회사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되었다.모토노 부는 당시 귀족들의 저택뿐만 아니라 여러 선종 사찰의 내부장식에 작품들을 남겼으며,이것들은 꽃과 나무가 조화된 중국식 소재의 시원한 산수화가 대부분이었다.또한 모토노부로부터 시작된 장병화(障屛 畵)는 송,원 회화의 영향 중 가장 큰 결실을 남겼고,모토노부의 손자인 에이토쿠(永德)와 그 밖의 다른 화가들에 의해서 모모야마(桃山,16-17세기)시대에 더욱 크게 발달했다.이렇게 15세기 후반부에 시작된 狩野波는 16세기 말기부터 17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다양한 건축물들의 장식화로 발전했고,또한 이 시 기 유행한 풍속화들과 결합하여 한층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었다.카노우하는 대부분이 어용회사들이 었으며 따라서 일본 내 많은 繪師들 중 주류적인 입장을 차지할 수 있었으며 막대한 부를 누렸다.궁중 회화로서의 섬세함과 화사함에 풍속화들이 갖는 세속성이 결부되어 지극히 화려하고 섬세한 인물화들, 특히 미인도들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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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했다.마사노부는 일본 禪僧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水墨畵를 그린 최초의 俗人 畵家였으나 일찍부터 그의 그림에는 狩野波의 가장 큰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표현 의 명확성,예리하게 잡힌 윤곽선,그리고 균형 잡힌 구도 등의 특징을 보였다.46)

카노 마사노부로부터 시작된 狩野波는 이 후 그의 아들 모토노부(狩野元信, 1476-1559)에 이르러 예술적,사회적 양면에서 그 기반을 다졌고,모토노부의 손자 인 에이토쿠(永德)(圖8)와 그 밖의 다른 천재적 화가들에 의해서 모모야마(桃山, 16-17세기)시대에 더욱 크게 발달했다.47)(圖9)

그러나 카노우하는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급속한 쇠퇴기에 이른다.거기에는 카 노우하가 그 말기에 이르러 천편일률적인 구도와 과거 대가들의 작품에 대한 방작 으로 그 생명력이 점점 사라져갔기 때문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양회화와 중 국풍 회화의 본격적인 도입이었다.더구나 어용회사들 중심의 카노우하가 새로운 문물을 요구하는 일본 사회의 변화 움직임에 조응하여 계속해서 신선한 감흥을 주 는 회화 경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민첩하지도 못했다.오랜 세월 주류세력의 그늘에서 그들 시각에 맞춘 그림만을 그려온 카노우하에게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 의 변화로 인해 결국 그들을 철저히 고립시키기에 이른 것이다.일본 사회는 매너 리즘에 흠뻑 젖은 그들 회화를 신속하게 외부로부터 들어온 신사조의 회화로 대치 해나갔다.서양화와 남종화에 3세기에 걸쳐 일본회화의 주류를 이루며 확고히 지켜 오던 지위를 내준 것이다.

日本 南宗畵는 17세기 나가사키에서부터 시작되었는바,오바쿠(黃檗)48)라는 새로 운 禪宗派 회화가 나가사키의 華僑들로부터 일본에 소개되었고 이후 중국화가들이 나가사키에 도착함으로써 明,靑代 회화는 급속하게 일본에 퍼졌는데 이 때 이상적 인 문인화풍의 산수화 양식도 함께 수용되어 유행되었다.49)18세기의 남종화의 유

46) 아키야마 테루카즈(秋山光和), 이성미 譯, 《일본회화사》, 예경, 2004, p.150-152 47) 아키야마 테루카즈(秋山光和), 앞의 책. p.208~240

48) 오바쿠파(黃檗派) : 正保元年(1644)에 明僧 逸然이 도일하여 세운 禪宗의 한 파. 이들 渡來僧은 명, 청 의 문인화적인 小品畵를 잘했기 때문에 일본 南畵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이 화파는 서양화풍을 가미 한 독특한 초상화법을 발전시켰는데 이럿게 黃檗宗에 부속되어 나가사키 지방에서 발생한 명, 청풍의 회화양식을 넓게 黃檗派라 부른다.

49) 일본의 남종화 ; 일본의 남종화는 텐쇼슈분(天章周文)이 조선에 방문한 1423~1424년에 조선에서 유 행하고 있는 남종화풍 수묵화(안견의 회화)등에 영향받아 일본의 회화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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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은 일본의 지식층이 새로운 태도로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중국의 예술과 과학을 연구하게 된 것과 때를 같이 한다.밀물처럼 밀려드는 과학과 예술에 대한 책이나 작품들이 이들을 눈뜨게 했다.중국에서 1620년에 저술되고 일본에서 1671 년에 출판된 『팔종화보(八種畵譜)』50)다음으로 남종화의 백과사전격인 『개자원화 전(芥子園畵傳,1679년 중국에서 출간)』51)은 일본에서 아주 귀중한 참고서가 되었 으며 1748년에는 일본판이 출간되었다.

한편 중국화가들,특히 1720년 이후 몇 차례 일본을 방문한 이부구(伊孚九)52)가 나가사키에 온 사실은 남화 기법의 전파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이 기법은 주로 아 마추어 문인화가들에 의해 채택되었으며,그것은 이 후 남화운동으로 그 세력을 형 성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다.53)(圖10)

이렇듯 남종화는 일본이 외부세계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도입되 어 정착되었으며 서양화와 함께 1880년까지 일본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다.앞에서 언급했던 대로 이 때 카노우하는 이미 외부에서 들어온 서양회화와 중국풍의 그림 들에 매료된 일반인들에게 더 이상의 호감을 주지 못하고 형식상의 매너리즘으로 인해 거의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카노가문의 대를 잇던 당시의 유명한 화가 카노 호우가이(생몰년도 미상)가 싸구려 도자기 그림을 그려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있었을 정도로 이미 카노우하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었다.일본 내에서 당시 외 부에서 들어온 미술로서 서양화와 남종화 그리고 일본화풍의 회화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는 메이지 20년대에 페놀로사가 “예를 들어,맷돌로 말하자면 유화는 윗돌 있다. 이 점을 안휘준은 그의 저서『한국회화사』에서 다루고 있고, 아키야마 테루카즈가 『일본회화 사』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남종화는 중국 청대에 나타난 문인화풍의 회화을 말 하며, 1400년대 조선에서 유행했던 송․원대의 산수화풍(이곽파 화풍, 남송원체화풍, 명대 원체화풍 등) 과는 구별된다.

50) 『팔종화보(八種畵譜)』; 명나라 말 黃鳳池가 출판한 회화 기법을 도해한 畵法書. 중국 소주에서 판화 기법으로 제작된 책으로서 중국 북송 시대부터 등장하여 화가, 문인의 회화입문서로 쓰인 각종 ‘畵 譜’들과 함께 그 제작기법이 매우 발달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소산화 보(小山畵譜)』등과 함께 청대의 대표적인 畵譜로 볼 수 있다.

51)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앞 절에서 언급. 중국 청대 왕개(王槪) 형제들이 편찬하였으며 최초 1집 이 「산수화보」로 1679년에 출간, 이후 「난․죽․매․국보」와 「초충․영모․화훼보」가 1701년에 간행되었 다. 이 畵譜는 1700년대 초 조선을 비롯하여 일본 등에 활발히 보급되었다.

52) 이해(伊海, 연대미상) : 청대화가. 吳興人. 자는 孚九. 호는 華野 또는 孚鳩 등.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 하여 중국보다 일본에서 더 추앙받는 화가이다.

53) 아키야마 테루카즈(秋山光和), 앞의 책, p.248~25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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