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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중국의 체제전환과 경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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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중국의 체제전환과 경제개혁

제3절 베트남의 체제전환

1. 체제전환 이전의 베트남 경제

제1장에서 이미 서술한 것처럼 흔히 체제전환국이라고 할 때 전환의 의미는 ‘정 치체제’와 ‘경제체제’의 변혁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유럽 및 옛 소 련의 경우를 보면 체제전환은 정치와 경제 두 측면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즉 정치적으로는 공산당의 일당지배가 붕괴하고 보통선거를 통해 의회민주주의체제 가 도입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공산당과 중앙정부에 의해 획일적으로 결정되고 집행되어 온 계획경제체제에서 개별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이익과 효율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체제전환국들을 보면 체제전환의 유형이 동유 럽이나 옛 소련의 경우와 많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 체제전환국들의 경 우에는 경제개혁의 속도와 무관하게 대부분의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그러한 유형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를 보여주고 있지만 베트 남, 라오스, 미얀마 등 인도차이나 반도 국가들의 경우도 큰 틀에서 보면 그리 다르 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의 체제전환국들에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이 전 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들 국가의 체제전환은 동유럽 및 옛 소련의 급진적인 개혁에 비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중앙계획경제를 지지하는 기존체제의 틀과 보수세력의 기득권을 위협하지 않고 새로운 경제조직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이 동유럽 체제전환국들과 구별되 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들 국가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된 동기가 소련 등 옛 사 회주의권의 붕괴보다는 오히려 주변국들의 빠른 경제성장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지리적으로 인근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많은 중국의 경험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체제전환국들이 개혁과 개방정책을 선택하는 데 더 결정적인 영 향을 미친 것은 멀리는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의, 그리고 좀 더 가까이는 1980년대 이후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와 같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 국가들의 경제성장이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서 추진된 경제개혁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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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내용은 체제전환이라는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동아시아 발전 모 델의 학습과 적용이라는 관점에서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겠다.

베트남의 식민지화 역사는 프랑스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된다. 프랑스가 베트남과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은 선교사의 활동이 시작된 16~17세기부터지만, 식민지화가 본격화되는 것은 중국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베트남을 이용하고자 한 19세기 중반 부터이다.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阮) 왕조는 미국과 영국 등의 개방 요구 를 거절하며 쇄국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1862년 프랑스는 가톨릭교도에 대한 박해 와 선교사의 처형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에 대한 무력 침략을 개시하였고, 베트남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1887년에는 캄보디아를 점령하여 베트남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을 만들어 하노이에 총독부를 두었고, 1893년에는 프랑스 해군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프랑 스는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주둔을 허용하였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은 일본군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본은 베트남의 쌀 경작지에 강제로 바이오 연료 작 물을 심게 하고 대규모로 군량미 공출을 하였다. 이로 인해 베트남에서는 일본군 지배 기간 동안 약 2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장준섭, 2013.)

프랑스의 통치하에서 베트남은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 자의 두 세력이 항불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점차 호치민(Hồ Chí Minh, 1890~1969)이 지도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일본군이 인도차이 나 반도 북부에 진주해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독립동맹회 (Viet Minh)가 결성되었고,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 화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재진출을 노린 프랑스 는 남부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이후 베트민 정권의 성립과 함께 퇴위하여 망명 한 응우옌(阮) 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Bảo Đại, 1913~1997)를 내세운 괴뢰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인데, 이로써 베트남은 제2차 인 도차이나 전쟁까지 무려 25년간에 걸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가고 프랑스 점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국제적인 반전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한국전쟁의 종결을 위해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네바 회의에서 베트남 문 제를 상정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군사적 총공세를 펼쳤으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는 북위 17도 선의 잠정 군사경계선 설 정과 국제감시위원회의 설치 등이 결정되었고, 통일을 위한 총선거는 1956년에 실 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에 따라 북베트남군은 북부를, 프랑스와 남베트남군은 남부를 통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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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의 잠정적인 분단 이후에 북쪽에서는 2년 후의 총선거를 준비하면서 토지개 혁 등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재건에 착수하여 국내지배의 확립을 추진했다. 한편 남 쪽에서는 1955년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고 카톨릭교도이며 반공주의자인 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 1901~1963)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56년 4월 프랑스의 마지막 부대가 베트남을 떠나자 미군이 그 자리에 주둔하게 되었고,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베트남 문제에 깊이 관여하 게 되었다. 1963년 쿠데타 등으로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자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지역에 본격적인 폭격을 감행하는 동시에 남베트남 지역 에 지상군을 투입하였다. 이로써 호치민의 지도하는 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사이에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막대한 전투 비와 많은 인명 손실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미 국 내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판과 반전 운동이 높아졌다. 1968년 구정(Tết) 공세에 의해 북베트남군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자 미국은 북베트남 과 평화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정전과 미 군 및 북베트남군의 동시 철수, 통일정부의 수립 및 총선거를 위한 남북 베트남 당 사자 간의 협의 등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남북 정부간의 협의가 순조롭게 진전되지 못하자 북베트남은 조기 무력해방을 결정하고 공세를 개시하였다. 1975년 4월 결 국 사이공의 베트남공화국은 붕괴되었고 다음 해인 1976년 7월 통일선거를 거쳐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새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할 당시의 베트남은 오랜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국토 의 대부분이 황폐화되고 공업기반과 사회 인프라는 거의 파괴된 채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76년 현재 농업과 임업이 총물질생산(Gross Material Product)의 44.8%에 이르고 제조업 및 건설업은 32%, 그리고 무역 및 운송이 23.2% 각각 차지하였다.1) 그러나 가장 주요한 산업인 농업에서조차 생산기술은 거 의 수작업에 의존할 만큼 베트남의 기술수준이나 산업기반은 매우 취약한 상태였 다. 무엇보다도 남과 북에는 약 20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상이한 경제체제가 존재 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산기반을 확충하고 공업생산의 증대를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남북의 경제체제를 통합시키는 문제가 시급하였다. 이에 통일정부는 북에서 추진되 어 온 경제 모델을 남쪽에 적용하여 국가경제구조를 통합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1) 총물질생산(GMP)은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사용되던 국민소득지표로서, Ⅱ장의 각주 3)에서 설명한 사회총생산(Gross Social Product)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베트남 정부는 1989년부터 GMP 대신 국내총생산(GDP)을 기본적인 국민소득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일 반적으로 GMP는 GDP보다 30~40% 가량 낮게 계산되는데, 그 이유는 GMP에는 무역 과 화물수송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비스부문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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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의 공공소유, 국가계획체제에 따라 국가명령에 의해 관리되는 경제운용방 식, 그리고 행정관리체계와 결합된 자급자족적인 경제조직 등으로 특징된다.(정동현․

조준현, 2001.)

강대국들을 물리치고 독립과 통일을 달성했다는 자신감 때문에 공산당 내에서는 앞으로의 경제성장과 체제통합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통일 이후 처음 맞은 1976년 설에 당시 공산당의 제1서기이던 레 주안(Lê Duân, 1908~1986)은 10년 이내에 베트남의 모든 세대가 TV와 냉장고를 가지게 될 것이 라고 공언하였다.(이한우, 2011, 16쪽.) 전쟁에 사용되었던 자원과 인력 그리고 자 산들을 모두 경제건설에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전망은 충분히 실현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1976~80년 동안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총물질생산 성 장률 13~14%, 농업성장률 8~10%, 그리고 총공업생산은 16~18%의 성장을 목표 로 제시하였으며, 이밖에도 기간산업과 중공업부문을 중심으로 한 많은 건설계획들 이 추진되었다.2) 그러나 1976~78년의 경제성장률은 기대보다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총물질생산의 연평균 성장률은 2.5%, 공업부문은 9.5%였으며, 농업부문 의 성장률은 -3.8%였다. 1980년에도 농업은 여전히 전체노동력의 70%를 고용하 고 있었으며, 총물질생산의 57%를 생산하였다. 공업부문만을 보면 중요 생산품들의 1980년 실제 생산실적은 계획목표치를 크게 밑돌았다. 석탄, 시멘트, 화학제품, 비 료, 강철, 제지 등은 심지어 1976년의 기록보다 낮았다. 성장의 지연으로 1979년의 개발투자 규모는 1976년보다 14%, 1980년에는 21%나 축소되었다. 정부투자에 의 한 건설 프로젝트 가운데 60% 정도만이 완수되었으며, 시작하기로 한 많은 프로젝 트가 이행되지 않거나 연기되었다. 특히 투자자본의 대부분이 공업과 수송산업에 집중되었지만, 완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선호함으로써 이러한 투자가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되었다.(정동현․조준현, 2001, 451-52쪽.)

경제성장의 목표를 실현하는 데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캄보디아 및 중국과의 두 차례에 걸친 국경분쟁과 같은 외적 요인도 있었지만, 역시 통일과 사회주의적 개조 의 급속한 추진에 따른 혼란과 부작용이었다. 통일 이후 베트남 정부는 소련식의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자 하였다. 단기간에 중공업부문을 육 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배급을 통해 소비를 억 제하고 잉여생산물을 국가가 강제 환수하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 의 도입은 사회적 혼란을 가속화시켰고 이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자부족이 심화되었 다. 그런데도 공산당은 이러한 문제들이 아직 완전히 해체되지 않은 자본주의적 경

2) 통일 이전에 이미 북베트남에서는 1971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실시되었다. 따라 서 통일 이후 시작된 새로운 경제개발계획은 제2차 5개년계획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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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부문에 있다고 보았으며, 사유재산 몰수와 사기업들을 공기업과 병합시키는 과정 을 통해 시장경제를 해체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부지역을 중심 으로 탈주난민, 이른바 ‘보트 피플(boat people)’이 대규모로 발생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베트남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들 30만 명이 이탈하면서 경제는 더욱 위축되었다. 공업부문에서는 국영기업의 30%가 생산을 중단하였고, 나 머지 국영기업도 40~50%의 설비가동률을 보였다. 농업에서도 개인소유의 농기계 를 모두 농업합작사로 편입시켰으나 70%가 고장으로 사용 불가능하였고, 700만 헥 타르의 농지 가운데 180만 헥타르가 버려졌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노동의욕 감퇴는 대규모의 농업인구가 존재함에도 수확량 감소로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현상을 보여주게 만들었다. 도이머이 정책 직전인 1986년에는 물가상승률이 500%까지 도달하면서 경제난이 지속되었다. 결국 1980년 초에 들어 공산당 지도 부는 국영기업의 비효율성과 계획경제체제의 실패를 인정하고 중앙집중적 경제체계 를 분권적 계획체계로 전환하게 된다.

1981~85년의 ‘신경제계획’은 제2차 5개년 계획이 베트남의 경제적 능력을 감안 하지 않고 과업과 목표를 과도하게 설정함으로써 인적, 물적 자원의 엄청난 낭비를 초래하였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신경제계획의 지침과 목표는 현실적 상황을 감 안해서 농업부문의 발전과 소비재생산의 확대에 자원을 집중시킬 것을 핵심 내용으 로 하였다. 신경제계획 기간 동안의 보다 중요한 변화는 경제의 관리체계에서 일어 났다. 정부는 농업협동농장의 구성원들이 규정 산출량 이상의 잉여를 자유롭게 소 유할 수 있는 산출물 계약제도를 도입하였다. 이와 함께 정부는 국영기업에 대해서 도 자유시장에서 물자를 구입하고 잉여생산물을 시장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허 용하였다. 여전히 국가의 관리와 통제하에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조치는 국영기업 들이 시장 메커니즘에 적응할 수 있게 한 첫 번째 조치였다. 투자구조의 조정과 새 로운 유인제도를 도입한 경제관 체계의 변화에 힘입어 1981~85년간의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지난 5년간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경제관리체계의 도입은 계획경제부문과 시장경제부문 사이의 가격 괴리와 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1981 년 10월에 취해진 가격자유화 조치로 자유시장 가격은 급속히 상승하였다. 쌀과 같 이 정부에 의해서 분배되는 소비재나 물자의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수십 배나 낮았 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물자나 재화를 구입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시 팔아 쉽게 그 차익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은 사회 전반에 매 매석과 투기행위, 그리고 부정부패 를 만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가는 계획시장가 격을 크게 조정해야 했다. 그러나 1981년부터 원료, 장비, 부품 등의 수입상품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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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급격히 상승한 반면에 농업, 임업, 수산업, 수공업 상품 등 베트남의 주요 수출 상품가격은 상대적으로 적은 폭의 상승에 그쳤을 뿐이어서, 베트남 경제는 심각한 국제수지적자와 재정적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정적 현상들이 평등을 강조 하는 사회주의 질서와 사회구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베트남 정부는 경 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다시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과 노동자의 초과수입에 한 도액을 설정하고, 서비스 부문의 세율을 높이며, 남부지역에서 농업집단화를 확대하 는 등의 조치가 그것이다. 이와 동시에 베트남 정부는 물가안정을 위한 긴축재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재정수입의 증대와 재정 지출의 억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에는 기여했으나 정부통제의 강화와 함께 베트남 경제를 다시 침체시키는 주요 요인이 된 것도 사실이다.

2. 경제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과

침체된 국민경제를 재건하고 국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베트남 정부와 공산 당 지도부는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도이머이(Ðôi Mơi)’ 정책을 채택하고 경제의 자유화와 개방화를 추진하기 시작하였다.3) 도이머이 정책은 시장 경제의 도입에 의한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노선 의 부분적인 궤도 수정에 불과했던 이전의 경제개혁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제6차 대회에서 공산당 지도부는 지금까지 사회주의로의 이행사업에서 과도기의 필수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통과하려는 조급함을 보였다고 평가하였고, 비사회주의적 요소를 조급하게 제거하려고 했으며 중공업 및 대규모 투자사업에 중 점을 둠으로써 배트남의 경제현실에 부적합한 자원배분을 시도하였다고 인정하였 다. 대회는 베트남의 사회발전단계를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의 초기단 계’라고 규정하고, 이 단계의 주요 임무를 대규모 사회주의 공업화에 필요한 사회 적·경제적·정치적 기초를 확립하는 데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전의 여러 개혁정책들과 구분되는 도이머이 정책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 다. 첫째, 정책 우선순위의 변화이다. 정부는 경제 정책의 우선 위를 중공업 육성에 서 농업 및 경공업 육성으로 전환하였다. 이것은 정책목표를 농산물과 소비재의 생 산 증대를 통한 국민생활의 안정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당시 국민들의 생활

3) 베트남어로 ‘도이’는 바꾼다, ‘머이’는 새롭다는 뜻이다. 따라서 도이머이는 새롭게 바꾼 다, 즉 한자어로는 쇄신(刷新) 또는 혁신(革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개는 개혁으로 번 역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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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수출산업의 육성이다. 수출을 증 대시켜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화를 조달하고 공업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셋째, 시장 경제체제의 도입이다. 경제운영체계를 중앙계획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전환 하고 정부개입을 축소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주요 정책수단으로는 대외개방정책, 서방 국가와의 협력 확대, 다부문 경체제의 활성화, 외국인투자 촉진, 가족 단위의 농업 장려와 농산물가격의 현실화, 토지제도의 변경 등을 들 수 있다.(오인식, 1997, 19-20쪽.)

<표 Ⅲ-5> 베트남 통일 이후 도이머이 정책의 형성

시 기 주요 사건 정 책

1975. 4. 30 베트남 통일 1976. 4. 25 전국 총선거

1976. 6~7 사회주의 공화국 선포 제2차 5개년 계획 1976. 12 제4차 공산당 대회

1979. 9 제4기 공산당 중앙위 6차 회의 신경제정책

1981. 1 공산당 비서국 제100호 지시 농업에서 생산물 계약제 도입 1981. 1 정부 결정 제25호 기업에서 3계획제 도입 1982. 3 제5차 공산당 대회

1982. 12 제5기 공산당 중앙위 3차 회의 사영 상업 규제-개혁 역전 1985. 6 제5기 공산당 중앙위 8차 회의

제25호 결의

가격·임금·통화개혁에 관한 결의 정부 보조금제 폐지 목표

1985. 8~9 공산당 정치국 제38호 결의 가격·임금·통화개혁 1986. 12 제6차 공산당 대회 도이머이‘ 정책 채택

1988. 11 신외국인투자법 시행

1988. 8 공산당 정치국 제10호 결의 농가계약제 채택 1989. 3 제6기 공산당 중앙위 6차 회의 시장가격으로 단일화

자료 : 이한우, 『베트남 경제개혁의 정치경제』,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 20쪽.

도이머이 정책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1988년 공산당 정치국

<제10호 결의>에 의해 농가에 토지사용권을 장기간 부여하고 농가를 독립된 생산 단위로 인정하였다. 또 1993년 <토지법>에 의해 토지사용권의 교환·임대·상속 드으 이 권리를 인정하믕로써 실질적인 사유화를 도모하였다. 둘째, 기업과 관련해서는 1990년에 <사영기업법>과 <회사법> 등을 제정하였고, 1992년에는 <헌법>에 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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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국유화하지 않는다는 보호조항을 명기하였다. 셋째, 산업에 대한 직접적 보호금제도를 폐지하고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품에 대한 가 격통제를 폐지하여 시장가격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였다. 넷째, 환율을 평가절하 하고 변동환율제로 일원화하였으며,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의 역할을 분리하였다. 다 섯째, 무역에 대한 정부의 독점체제를 폐기하고 개별 기업도 직접 무역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역자유화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기조는 1991년에 열린 공산당 제7차 대회에서 다시 확인되었고, 이후 개최된 일련의 당대회에서도 개혁의 기본노선과 원칙은 계속 유지되었다.(이한우, 2011, 64쪽.)

도이머이 정책이 결정된 이후에도 경제개혁 정책의 추진은, 계획 초기인 1986~88년 동안 연속적으로 세 자리 수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함으로써 중대한 곤 란을 겪게 되었다. 인플레이션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정부의 재정적자를 보전하기 위한 화폐발행이었는데, 증발된 화폐의 대부분은 낮은 가격이 책정된 배급품이나 시장환율과 일치하지 않는 가격으로 판매되는 수출품에 대한 가격보조금과 국유부 문에 대한 보조금으로 지출되었다. 국영기업의 손실보전과 가격보조금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계획시장과 자유시장의 가격 차이를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두 가격체계 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중가격체계의 개혁 을 위해서 정부는 우선 농민으로부터 싼 가격으로 농업생산물을 구입하고 역시 싼 가격으로 농업투입물을 판매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그것을 시장가격체제로 대체하 였다. 이어서 국가 소매거래망에 의해 판매되는 소비재와 국가배급품들도 시장가격 으로 판매되었다. 마지막까지 이중가격제가 유지되었던 것은 쌀인데, 쌀의 경우에는 1988년 말에 와서야 비로소 시장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렇게 해서 1989년 초에 이르면 쌀의 배급제가 완전히 폐지되고, 대부분의 상품가격이 실질적으로 자유화되 어 시장에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정부와 공산당은 국회 결의문을 통해 자유시장의 역할을 강조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시장에서 가격․임금․환율 등을 자율 적으로 결정하도록 허용하였다.

<표 Ⅲ-6> 베트남의 경제개혁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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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책 및 조치 사항

1986

- 도이머이 정책 채택(6차 당대회)

- 개인기업, 협동조합 형태의 기업소유권 인정

- 생산계획, 자금조달, 제품 판매 등 기업의 의사결정권을 개별 사업단위로 이양

1987

- 국영기업개혁에 관한 법령

- 검문제 철폐, 제조업체의 해외무역 승인 등 기업의 영업영역 확대

- 외국인 투자법 제정

1988

- 외국인 투자법 시행령 공포 - 외환관리법, 수출입 관세법 제정

- 민간기업에 대한 규모의 제한 철폐, 고용의 자유 승인 - 은행제도 개혁(국가은행과 상업은행 분리)

1989

-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유치를 위해 국가투자협력위원회(SCCI) 설치

- 재화와 용역에 대한 시장가격제 확립 - 수출가공지대 설치를 발표

- 국영부문의 보조금 완전 철폐 1990

- 외국인 투자법 1차 개정 - 사기업법 제정

- 회사법 제정

1991

- 사회안정 전략 채택(7차 당대회)

- 외국인 투자 및 기술을 유치하기 위한 수출가공지대 설치 허 용법안 통과

- 외환거래소 설립

- 국영기업의 민영화 가능성 제시

1992

- 새로운 수출입 관세법 시행

- 시장경제 도입을 명시한 신헌법 승인 - 외국인 투자법 2차 개정

- 외국인 투자법 시행령 공포 1993 - 토지법 개정

- 파산법 시행 1994 - 외환시장 개설

- 노동법 제정

자료 : 양승윤, 동남아와 아세안,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1996, 408쪽.

도이머이 정책의 추진 이후의 베트남 경제를 거시 경제 지표로 살펴 보면, 먼저 국내 총생산의 경우 경제개혁 초기인 1991~92년 동안에는 각각 5.10%와 5.96%

로 비교적 낮은 성과에 머물렀으나 1992년부터는 개혁의 성과가 본격화되면서 연 평균 8%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90년 67.1%, 1991년 67.8%로 여전히 높았으나, 역시 개혁이 본격화되면서부터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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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17.5%, 1993년에는 5.5%로 급속히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국내총생산에서 차 지하는 비중을 보면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산업은 여전히 농업과 광업이다. 그러나 개혁 이후 베트남의 성장을 주도한 것은 역시 제조업이었다. 1994~95년 공업생산 은 전년 대비 14%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수출에서도 여전히 쌀과 원 유가 전체 수출의 1/3과 1/8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섬유, 의류 등과 같은 노동 집약적 제조품의 비중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도이머이 정책의 추진 이후 베트남의 빠른 성장에 특히 기여한 것은 외국인투자 의 대규모 유입이다. 1988년에만 해도 승인된 외국인투자 건수는 불과 40여건에 지나지 않았으나, 1992년에는 거의 200건으로 증가하였다. 1988~93년 동안 외국 인투자 유입의 누계는 53억 달러였는데, 이 중에서 절반 가량인 26억 달러가 1993 년 한 해에 집중되었다. 주요 투자국은 역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 인데, 최근에는 일부 아세안 국가들의 직접투자도 증가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개 혁의 성공과 지속적인 경제개발이 외국인투자의 확대 여부에 좌우될 것으로 판단하 고 투자환경의 개선과 대외협력의 강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1995 년에는 미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아세안 및 아세안자유무역협정(AFTA)에 가입 함으로써 베트남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대외적 노 력과 동시에 베트남은 대내적으로도 투자환경의 개선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조치들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값싸고 우수한 노동력 과 풍부한 부존자원, 그리고 대규모의 시장잠재력 등 유리한 투자조건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투자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물론 베트남의 경제개혁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어 온 것은 아니다. 개혁 초기부터 공산당 내의 일부 보수세력과 정부관료 및 군부 등 기득권 세력은 개혁의 폭과 내 용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저항하였다. 또 개혁과 개방이 확대될수록 그에 따른 부작용들도 나타나고 있는데, 공해와 환경파괴, 부정부패 풍조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 사치․향락 산업의 번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 남의 경제개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문제는 앞으로 베트남이 어떻게 개혁과 개방 정책을 확대하면서 고도성장을 지속하느냐 하 는 것이다.

앞으로 베트남의 개혁과 성장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낙관적 전망과 비관적 전망이 모두 가능하다. 베트남의 미래를 낙관하게 하는 요인들은 대체로 다 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저렴하고 우수한 노동력이다. 베트남의 노동력은 문맹률 이 낮고 초등학교 취학률이 90%가 넘을 뿐만 아니라, 높은 근로의욕을 가지고 있 어 아세안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편에 속한다. 반면 베트남의 임금수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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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평균 50달러 정도로 인근의 태국이나 인도네시아보다도 훨씬 싼 편이다.

둘째, 거대한 시장잠재력이다. 약 9.000만 명에 달하는 베트남의 인구는 대규모의 시장잠재력을 제공한다. 물론 1997년 현재 베트남의 1인당 소득은 339달러 수준으 로 매우 낮기 때문에 전반적인 구매력도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도이 머이 정책 이후 최근까지 베트남 경제가 연평균 8% 이상의 고도성장을 달성해 왔 을 뿐만 아니라, 당분간 이와 같은 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따라 서 베트남의 소득과 소비 수준도 앞으로 급속히 증대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밖에도 베트남이 가진 긍정적 요인들은 석유와 석탄, 기타 광물자원과 열대작물 등 풍부한 부존자원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유리한 입 지조건을 들 수 있으며, 정부의 일관된 개혁정책 추진과, 안정된 정치체제도 베트남 이 가진 중요한 이점 가운데 하나이다.

반면 베트남이 성장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한계와 과제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역시 사회간접자본의 부족이다. 오랜 전쟁과 사회주의 체제하에서의 경제적 낙후성으로 인해 베트남은 전력을 비롯한 에너지 분 야와 교통․수송 및 통신시설 등 사회간접자본과 생산하부구조에 대한 투자와 관리 를 소홀히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밖에도 개혁정책이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온 것 다고 하지만 여전히 체제전환에 따른 제도적․법적 정비가 미흡하여 관료의 재량권 이 크고 법 적용의 투명성이 적다는 점, 특히 금융부문의 개혁이 부진하고 금융제 도와 기구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여 자금조달에 애로가 크다는 점, 인플레이 션과 환율의 불안정성 등이 상존하고 있는 등 경제의 안정성이 낮다는 점, 그리고 단순 저임금 노동력은 풍부하지만 기술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점 등도 베트남 경제 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3. 경제개혁의 성과와 노동시장

2013년 현재 베트남의 국내총생산은 1,711억 달러로 세계 58위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GDP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0년부터 2010 년까지 연평균 7.2%의 고도성장을 해왔으며, 1995년에는 GDP 성장률 9.54%를 달 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08년 일어난 세계경제위기로 수출, 외국인투자, 개발원 조 등이 동반 위축되어 성장률은 5% 대로 하락하였다. GDP의 산업별 구성은 전통 적으로 서비스 분야의 비중이 높았으나, 2003년부터 공업부문의 비중이 서비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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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를 추월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다. 베트남의 주요 산업분야에는 섬유산업, 신 발산업, 석유화학산업, 철강사업, 건설산업 등이 있으며 특히 섬유산업의 경우 베트 남 경제의 핵심으로 약 7,000개의 기업이 257만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다. 교 역액은 1,434억 달러로 수출은 627억 달러, 수입은 807억 달러로 무역수지는 180 억 달러 적자다. 주요 수출품목은 원유, 섬유 및 의류제품, 신발, 수산물, 목제품, 전자부품, 커피, 쌀 등이며 수입품목은 정유, 기계부품, 철강, 섬유, 의류원단, 화학 및 전자제품 등이다. 특히 쌀은 1989년에 100% 자급자족을 달성하였으며 2008년 기준 수출액은 450만 톤으로 세계 2위다. 커피도 세계 2위 수출국이며 후추 또한 세계 1위로 115만 톤을 수출하고 있다.

<그림 Ⅲ-5> 베트남의 국내총생산

(단위 : 억 달러)

자료 : 베트남 통계청

베트남 노동부는 노동인구를 취업 여부와 관계없이 15세 이상 인구 중 센서스 기 준일 과거 7주간 경제활동에 종사했거나 하려했던 사름으로 정의한다. 센서스 기준 일(2009년 4월 1일 기준) 베트남의 노동인구는 약 4,918만 명이며, 이는 총 인구 대비 노동력 비율은 약 57.3%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약 150만 명의 실업자도 포함 된다. 베트남의 노동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인구 증가와 맞물려 매년 거의 120만 명 이상의 신규 노동력이 노동시장에 유입되고 있다. 베트남 노동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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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장 큰 특징은 전 세계 대비 굉장히 젊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프1을 보 면 2009년 기준, 베트남의 인구 구조는 항아리 모형이다. 남성, 여성 각각 15~19 세에 가장 인구 비율이 높으며 그다음은 20~24세의 인구가 뒤를 잇고 있다. 즉, 노동력의 반이 넘는 52.2%를 20~39세의 젊은 층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특히 도 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는 베트남의 산업구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산업구 조에 따른 노동력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전체 노동인구에서 47.1%는 1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차 산업에는 21.1%, 3차 산업에는 31.8%가 종사하고 있다.베트 남의 실업률은 대체적으로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추산 한 실업률을 보면 대부분 2% 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도이머이 정책 전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영향 뿐 아니라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발달에 의한 것이다.

고용인구로 보면 농림수산업이 노동인구의 53.9%가 종사하고 있다.

<그래프 Ⅲ-6> 베트남의 실업률

(단위 : %)

자료 : 베트남 통계청

베트남의 절대적인 노동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노 동공급의 절대적인 양은 늘었으나 노동공급의 질적 측면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프라 미비로 인한 기술기능인력의 실업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베트남의 노동자 절반은 1차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비숙련 노동자 비율 또한 굉장히 높은 편이다. 직업에 대한 비율을 보면 비숙련 노동자가 40.3%에 육박하며, 그 뒤를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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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수산업의 18.5%로 따르고 있고 숙련 노동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 또한 기술기능인력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으나 8.2%정도에 불과하며, 이들 중 80%가 서 비스업에 종사하며, 특히 그 중 30%는 교육부문에 종사한다. 반면, 가공업과 정보 통신, 재정은행, 보험업, 과학연구 및 관리, 보건, 사회봉사활동, 국가관리 등에 종 사하는 노동자 비율은 낮은 편이다.(응우옌, 2013, 93-99쪽.)

노동자의 숙련은 크게 학교교육과 직업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일반숙련(general skill)과 특정 직업활동을 통해 얻는 특수숙련(specific skill)으로 나눌 수 있다. 일 반숙련은 식자율, 학교교육의 보급 현황, 고등교육 진학률과 같은 학교교육 관련 지 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특수숙련은 직업교육과 함께 기업 내에서 실시하는 교육훈련, 기업의 인사관리와 고용관행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이홍식․김형주, 2010.) 베트남의 의무교육 비율과 식자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의무교육을 받지 않은 비율이 1989년에 18%였으나 2009년에 5.1%로 줄어들었다. 식자율도 94%로 매우 높은 비율을 유지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중퇴 또한 22.7%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졸업은 27.6% 중등학교 졸업은 23.7%에 달하며, 고등 학교 이상 졸업은 20.8%에 불과하다. 특히 대학교 졸업율의 경우 남자는 5.4%, 여 자는 4.6%로 고등교육 비율이 높지 않다. 즉 기초적인 의무교육과 식자율은 높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인력 양성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 숙련인구의 양성을 위 하여 베트남 정부는 직업 훈련기관에 많은 예산을 투자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직업 교육은 정부에 의한 공적인 직업훈련과 기업에 의한 교육훈련으로 나뉘는데, 사회 주의 국가였던 베트남은 정부에 의한 직업훈련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 정 부 또한 직업훈련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2006년 <직업훈련법>을 제정하여 직업훈련 을 강화하고 있다.

베트남 노동시장의 또다른 특징은 기술기능인력의 실업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일 부 분야의 경우 기술기능인력 부족 현상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술기능인력의 실 업률이 총 실업률에 비해 더 높은 편이다. 2011년 전체 실업률은 2.7%이나 전문 대 졸업자의 실업률은 12%이고 3년제 대졸자의 실업률은 6.0%, 4년제 대학 이상 졸업자의 실업률은 3.2%이다. 이러한 실업률은 기술기능인력의 마찰적 실업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베트남 노동시장의 노 동이동률은 높은 편으로 2009년 센서스에 따르면 기술기능인력이 총노동이동의 총 노동이동의 11.3%를 차 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이동률이 가장 높은 것은 대졸자로 기술기능인력 중 71%를 차지했다. 또한 기술기능인력은 호치민(노동이동률 67.9%)이나 하노이(노동 이동률 19.1%)로 많이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외국인직접투자기업에 종사하는 기술기능인력도 이동률이 높다(노동이동률의 36%). 이와 같이 베트남의 기술기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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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은 이동이 잦으며 노동시장에서 원하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직업교육제 도가 노동공급과 수요를 잘 연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현재 베트남의 노동시 장 경우 지역별 노동시장 및 취업관련 정보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정보수 집과 정보제공 서비스도 원활하지 않다. 또한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취업상담알 선 서비스의 효과가 낮다. 실제 베트남 전체의 취업상담알선 서비스를 통해 취업상 담을 받은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10~15%에 불과하다. 특히 기술기능인력 중 고 급인력을 구하려면 보통 외국계 헤드헌팅 기업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 럼 인프라의 부족과 노동이동으로 인한 마찰적 실업이 기술기능인력의 실업을 야기 하고 있다.

베트남은 도이머이 정책 도입 이후 현재에 이르기 까지 양적인 성장만을 보자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그러나 체제전환이 상당한 기간 동안 이루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시장경제체제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주의적 체 제를 완전히 탈피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국가주도 경제의 비효율성 문제와 양적 팽창으로 인한 질적인 측면에서의 문제가 부각되며 성장 일도의 경제정책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노동집약형 산업의 한계생산점 도달과 고부가가치 산업 개발을 위한 인프라 부족, 그리고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하는 노동법과 노동조합의 형태는 노동생산성의 저하라는 모습으로 권위적 하향식 경제체제의 한계점을 보여 주고 있다.

노동시장이 경직적인 모습을 보여준 이유로는 현재까지 제한적인 직업 교육과 훈련, 제한적인 노동 인구의 이동과 이로 인한 지역 간 성장과 소득 불균형, 그리고 폭발적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비효율적인 임금 체계 성립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남과 동시에 경제성장이라는 기조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상태에서 단기적으로 해결할 방법은 사회주의 체제를 일부 유지하는 지금 단기적으 로 해결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장기적 차원에서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장 에 제동이 걸린 지금 일부 유지하는 사회주의 제도를 포기하고 시장경제 체제로의 완전한 전환이 없다면 장기적으로도 단기적으로도 성장과 발전 두 가지 모두 불가 능 하다. 객관적으로 막대한 노동력과 천연자원이 존재하는 국가인 베트남은 시장 경제 체제였다면 충분히 시장가능성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이에서 파생되는 노동시 장의 현재 문제들을 가속화 시키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이고 가시적 인 성과와 무리한 국가 주도의 성장을 시도함으로써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스스로 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개발도상국이라면 모두 거쳐 가는 단계이지만 베트남은 완전한 시장경제를 도 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존 개발도상국보다 더 빨리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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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과 개방을 시도하지만 체제 전환 자체가 본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발생한 문제점들은 국가의 역할은 경제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시장을 원활하게 돌아가는 윤 활제로서의 역할이 부각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베트남의 노동시장 문제들을 해 결하기 위해서는 시장질서 자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 며, 이전처럼 큰 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지금 잠재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요건들을 성립하기 위한 투자와 완전한 개혁은 다시 한 번 크게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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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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