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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중국의 체제전환과 경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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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중국의 체제전환과 경제개혁

제1절 중국의 체제전환

1.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 정부가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면서 중국의 역사는 새로운 한 시대를 개막하게 되 었다. 인민공화국 수립 당시의 중국경제는 한편으로는 약 30여 년에 걸친 좌우의 대립과 내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편전쟁 이후로 계속된 서구 열강의 침략과 수 탈 특히 만주 침공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수탈로 인해 물적․인적 기반이 거 의 붕괴되어 있었고 민중의 생활은 곤궁과 비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처럼 황폐 해진 경제를 부흥시키고 반봉건(半封建)․반식민지(半植民地)적인 사회구조를 변혁하 여 조속한 기간 내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일은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당면한 시급한 과제였다.

인민공화국의 수립부터 개혁․개방을 통한 본격적인 경제개발을 추진하기까지의 중 국경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단계(1949~53)는 이른바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 단계로서 이 단계의 구체적 정책은 관료자본의 몰 수와 토지개혁이다.1) 제2단계(1953~57)는 성장기로서 제1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 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을 추진해 나간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은 사회주의 ‘3대 개조(三大改造)’를 완성하고, 중공업 우선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사회 주의 공업화의 기초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제3단계(1958~65)는 ‘대약진(大躍進)’

운동과 그 후유증에 따른 조정기이다. 대약진 운동은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 해 사회주의 건설을 가속화하려는 운동이었으나 정책의 맹목성과 그 시기에 겹친 자연재해로 실패하였다. 제4단계(1966~76)는 ‘문화혁명(文化革命)’으로부터 마오쩌

1) 신민주주의란 반봉건․반식민지 사회로부터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의 사회 경제정책으로서, 곧바로 사회주의의 건설을 시도하는 대신 우선적으로 반봉건․반식민지적 사회를 개조하여 독립된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시키고, 그런 다음 혁명을 더욱 진전시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민주주의적 변혁이 사회주의적 변혁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경제관계의 전면적인 폐지 대신, 한편으로는 사회 주의적 생산관계의 물적 토대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전제로 하여 반봉건적 생산관계를 청 산하는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방법을 통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도 모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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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毛澤東, 1892~1976)의 사망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중국 공산당 내에서 좌경 노 선이 지배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거의 정체 상태였으며, 이미 실패 한 대약진 운동 시기의 각종 정책들을 맹목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커다란 피해를 입 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5단계(1977~78)는 마오쩌뚱의 사망으로부터 덩샤오핑(鄧 小平, 1904~1997)에 의해 본격적인 개혁․개방 노선으로의 전환이 추진되기까지의 시기로, 마오쩌뚱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훠궈펑(華國鋒, 1921~2008)에 의해 ‘양 약진(洋躍進)’ 즉 서양의 자금과 기술을 도입하여 크게 도약하고자 하는 정책이 추 진되던 시기이다.

중국의 본격적인 사회주의 건설은 1953년부터 실시된 제1차 경제발전 5개년계획 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계획경제체제는 사실상 1차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과 정에서 완성되었다. 1차 계획의 기본목표는 ‘삼대개조’ 즉 농업, 수공업,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성하고 중공업우선 발전전략을 추진하여 공업화를 달성한다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소유제의 확대, 중공업에의 우선투자, 중앙집권화의 강화 등이었다. 특히 공업화는 자력갱생의 원칙에 입각한 공업국방체 계의 완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중공업 기반을 조속히 확충시키고자 하는 것이었 다. 공업화의 진행과 함께 소유제도의 측면에서도 사회주의적 개조가 추진되었다.

공업부문에서는 1949년 당시 전체 공업생산액의 55.8%를 차지했던 자본주의적 공 업을 국가자본주의적 부문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소유를 불식시켜 나갔 다.2)

한편 농업에서도 집단화를 위한 ‘호조합작(互助合作)’ 운동이 일어나면서 생산수 단의 집체적 소유와 집체경영으로의 전환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농업집단화는 호조 조·초급합작사·고급합작사의 3단계로 진행되었다. 생산호조조(生産互助組)란 각농가 가 기본적으로 단독경영을 유지하는 형태로 집단화를 위한 가장 초보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초급생산호조조는 3~5가구를 한 조로 하여 춘경기나 추수기에 공동영 농을 담당하는 일시적인 조직이며, 고급호조조는 6~10가구가 한 조로 편성되어 공 동으로 작업하는 상시적인 조직이다. 생산호조조는 1952년까지 약 800만 개가 조 직되어 농가 총수의 40% 가량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호조조의 노동생산성은 단순 한 개인농업의 경우보다 10~30%나 높았다.(정명기, 1999, 199쪽.) 그러나 호조조 에서는 생산을 계획적으로 안배할 수 없었고, 토지의 이용방법도 합리적이지 못했 다. 또한 호조조는 개인소유에 기초한 개인영농을 기본으로 하면서 필요에 따라 2) 국가자본주의란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의미로서 초급단계와 고급단계로 구분된다. 초급단계에서는 위탁가공·발주와 통일구입·독점판매의 형태를 취하고, 상업기업 에 대해서는 대리점판매·대리판매라는 방식으로 간접적 통제가 행해졌다. 고급단계에서는

‘공사합영(公私合營)’이라는 형태로 경영을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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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노동을 하는 것이므로 운영상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도 발생하였다. 따라서 생 산호조조를 보다 높은 수준의 생산협동조합으로 전화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는데, 그 래서 나타난 것이 ‘생산합작사(生産合作社)’이다.

합작사에는 초급합작사와 고급합작사의 2단계가 있는데, 초급합작사에서는 개인 소유로 된 토지, 가축, 농기구 등의 생산수단을 합작사에 출자하여 집단적으로 경영 하고 수익은 출자분에 따라 분배하도록 하였다. 고급합작사는 토지 등 생산수단을 집단소유로 하고 농민들은 노동량에 따라 필요물자를 배급받았다. 생산합작사는 경 작규모가 영세하고 분산되어 있던 토지를 공동관리함으로써 관리의 효율성과 생산 성을 놀일 수 있고, 개별농가들을 조직해 경작단위 수를 축소하고 생산계획을 개선 토록 함으로써 정부가 생산·소비·투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게 한 점 등에 서 호조조보다 한 단계 높은 사회주의적 영농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상 당수 농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농업집단화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1955년까지 전체 농가의 14% 정도의 농가만이 합작사에 참여하였으나 1956년 말 에는 전체 농가의 약 96%에 해당하는 1억 2,000만 가량의 농가가 참여하게 되었 다.(古澤賢治, 1995, 73쪽.) 공사합영이나 농업합작화와 같은 정책들의 경제적 성과 에 대한 평가는 그 시기에 따라 다소 엇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경제부문에 대 한 공산당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특히 공업부문의 예를 보면 사회주의적인 국유기업이 생산의 65%, 공사합영기업이 35%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이 기간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료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정책들의 추진을 통해 중국은 사회주의적 소유를 확립하고 가격기구에 의한 자원배분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경 제로의 전환을 완성하게 되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의 성공에 뒤이어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추진될 예정이었던 제2차 5개년계획은, 1958년 5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8기 2차 회의에서 사회주 의 건설총노선,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 운동을 추진한다는 ‘삼면홍기(三面紅旗)’ 운 동이 당의 노선으로 채택되고, 이에 따라 대약진 운동이 정식으로 당의 경제정책으 로 결정됨에 따라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다. 대약진 운동의 기본적인 노선은 같은 해 4 월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발표된 「10대 관계를 논한다(十大關係論)」라 는 제목의 강화에서 이미 제시되었는데, 즉 “소련의 경험을 경계 삼아 나라 안팎의 모든 요 소를 동원하여 사회주의 사업에 유용하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에 추진되어 왔 던 소련식 발전 모델에서 벗어나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의미이다. 다 만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을 가속화한다는 명분의 이면에는, 소련식의 발전전략에서 벗어나 중국의 특수성을 감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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략을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과,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 건설노선의 견인을 통해 공 산당 내부의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권력투쟁의 목적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과 공산당 지도부가 독자적 사회주의 건설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 하게 된 데에는 특히 1956년 2월에 일어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이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약진 운동과 동시에 농업부문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가속화함으로써 생산 력수준을 제고시키고자 한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이 전개되었다. 인민공사란 농 업, 공업, 상업, 교육 및 군대를 통합한 사회 구조의 기본단위로서 ‘일대이공(一大二 公)’과 ‘정사합일(政社合一)’의 원칙에 의해 조직되었다. ‘일대이공’에서 일대(一大)란 인민공사의 규모를 대단위화하여 규모의 경제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며, 이공(二公)은 생산관계를 변화시켜 집단적 소유제도를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또

‘정사합일’에서 정(政)은 향(鄕)과 진(鎭)과 같은 지방행정조직을, 사(社)는 경제조직 의 기초단위인 인민공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인민공사를 통하여 행정기능과 생산기 능을 통합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3) 인민공사는 각 향마다 1개씩 설치되었는데(一 鄕一社), 정사합일의 원칙에 의해 이후에는 인민공사가 향급의 지방정부를 실질적으 로 대신하게 되었다.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의 기본목표는 단기간내에 주요 농·공업품의 생산을 2 배 이상 성장시킨다는 것이었다. 당시 국무원 총리이던 저우은라이(周恩來, 1898~1976)는 “공업 생산량이 매년 20% 정도 혹은 그 이상이면 소약진, 25% 정 도 혹은 그 이상이면 대약진이며, 매년 30% 이상이면 대대약진”이라고 말했다. 대 약진 운동을 추진한 공산당 지도부가 어떤 야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 주는 말이다. 당시 공산당 지도부는 7년 이내에 영국을, 그리고 8년 또는 10년 이내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면서 중 국정부는 원래 계획되었던 생산목표들을 대폭 상향 조정하였다. 한 예로 산업의 주 요 소재인 철강의 경우를 보면 애초에 620만 톤이던 목표가 800만 톤, 850만 톤 등으로 증가하다가 1957년의 베이다허(北戴河) 회의에서는 1958년의 조강 능력을 1,070만 톤까지 제고시킬 것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1957년의 조강능력 535만 톤의 두 배가 넘는 수준이었다.4)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산당은 기본건설투자를

3)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중국의 향(鄕)은 우리나라 농촌의 면(面), 진(鎭)은 읍(邑)에 해당하는 행정단위이다. 따라서 향진은 우리나라의 읍면에 해당하는 농촌의 행정조직이 다. 개혁․개방 이후 활발하게 활동하는 향진기업은 바로 향이나 진이 소유한 집체기업을 가리킨다.

4) 베이다허(北戴河)는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岛)에 있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이다. 청(淸) 나라 말기에 베이징 주재 외국인들이 이 지역에 별장을 건립하면서 관광지 로 개발되었다. 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에는 주요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휴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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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배 이상 높이고 국가가 부담해야 하는 투자 자본을 가용능력 이상으로 투입하였 다. 그 결과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부의 가용자원이 집중적으로 투자된 중공업부문은 연평균 49.4%의 성장률을 기록함으로써 운동의 전망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은 애초부터 목표설정이 지나치게 무리한 것이었다. 특히 공 업부문에 대한 무리한 동원에 따른 농업노동력의 부족과 생산성 저하에다가 때마침 겹친 흉작으로 중국경제는 오히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심각한 것 은 농업의 기근이었는데, 비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대약진 운동 기간 동안 기근으 로 인한 아사자 수만도 무려 2,4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경제상황의 악화 와 정책의 실패가 명백하게 나타나자 1961년 1월 중국공산당 제8기 대회의 9차 중 앙위원회 전체회의, 약칭 9중전회(九中全會)는 공식적으로 조정정책의 실시와 대약 진 운동에 동원된 노동력을 농촌으로 되돌릴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대약 진 운동과 인민공사 운동이 처음 의도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하였 다.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운동의 실패는 마침 그 기간에 전에 없던 대흉작이 겹 쳤다는 것 이외에도 중소분쟁에 의한 소련 기술진의 철수와 원조의 중단 등과 같은 예기치 못했던 외적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 정책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 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결국 그 당시 중국경제의 발전단계와 생산력 수준에 맞지 않는 과도한 규모화와 공유화를 추진하면서 객관적 조건과 물질적 유인보다는 주관 적, 심리적 유인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데 있다고 해야 옳다.

대약진 운동 시기의 경제정책과 계획관리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획의 작성과 수행과정에서 공산당의 역할이 극단적으로 확대되어 행 정계통이 크게 위축되었다. 둘째, 발전 속도만을 중시하여 경제 각부문간의 균형을 경시하였다. 셋째, 투자 및 생산계획의 결정권이 중앙에서 지방으로, 지방에서 기업 으로, 기업에서 현장으로 이관됨에 따라 계획은 범위만을 확산시켰다. 넷째, 대중의 공산주의 열기에 의해 경제계획의 제도적 기초가 파괴되었다. 다섯째, 기업생산의 주요목표가 일부 제품의 생산량에 국한되어 기타 지표들은 무시되었다. 마지막으로, 자금면에서의 통제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는 것 등이다.(정명기, 1999, 91-92쪽.)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이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행정권을 장악한 류 사오치(劉少奇, 1898~1968)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용주의자들은 “조정(調整)·공 고(鞏固)·충실(充實)·제고(提高)”라는 ‘팔자방침(八字方針)’을 내걸고 경제 여러 부문 의 조정정책을 실시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먼저 농업부문에서는 인민공사제도를 수 정하여 인민공사, 생산대대, 생산대로 구성된 ‘삼급소유제(三級所有第制)’를 실시하

취하며 정책들을 논의하고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를 베이다허 회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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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집단화의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공업부문에서도 기본건설규모의 축소조정과 소 비재 공업의 성장 및 자립적 기술체계의 확립 등을 추진하였다. 조정기는 대약진 운동의 과도한 주관주의적, 평균주의적 사회주의 건설전략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면 서 집체화의 축소와 시장경제적 요소의 재도입을 통하여 경제적 효율성을 확보하고 자 한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 다. 1965년에 이르면 국민경제는 대약진 운동기간의 어려웠던 상황을 전환시켰을 뿐 아니라 비교적 높은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마오쩌둥을 비롯한 좌파가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고 실용주의자들이 대두하였다고 해서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둘러싼 공산당 내부의 노선대립과 권력투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으로는 더욱 내연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언젠가는 다시 현재화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결국 ‘문화혁명(文化革命)’이라는 새로운 사태의 발발을 초래한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조정기가 끝나고 1966년부터 중국경제는 제3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였다. 이 계 획의 수립과 실천을 주도한 것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이념담당 서기였던 야오원위안(姚文元, 1931~2005)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 瑞播官)’을 평한다」라는 논문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문화혁명이 확산되면서 조정기 의 정책노선은 수정주의적,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비판받게 되었다.5) 마오쩌둥의 직 간접적인 비호를 받은 문혁 세력은 류사오치 등의 실용주의 정책이 사회주의의 과 도기 사회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임무를 방기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부활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상이념의 강 화를 통한 대중동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평균주의를 부활할 것과 사상혁명과 계 급투쟁을 통한 생산촉진을 강조하였다. 문화혁명을 주도한 것은 국방장관이던 린뱌 오(林彪, 1907~1971)와 사인방(四人幇)이라 불리는 당내 극좌파들이었다. 사인방은 마오쩌둥의 세 번째 부인인 장칭(江淸, 1914~1991), 당내 이론가로서 문화혁명의 발단을 제공한 야오원위안과 그를 사주한 장춘차오(張春橋, 1917~2005), 공장 노 동자 출신으로 문화혁명의 대중지도자로 급부상한 왕홍원(汪洪文, 1935~1992) 등 이다. 마오쩌뚱의 비서실장인 캉성(康生, 1898~1975)도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동원 하는 등의 역할을 하였다.

5) 해서(海瑞, 1614~1587)는 명(明) 나라 때의 청백리로 백성을 위하여 황제에게 간언하다 가 파직된 인물이다. 이를 소재로 극작가 우한(吳晗, 1909~1969)이 쓴 경극 대본이 「해 서파관」 즉 “해서가 관직에서 쫓겨나다”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처음에는 마오쩌뚱도 높이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혁 주도세력이 이 작품 을 마오쩌뚱이 대약진 운동을 비판한 국방부장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를 해임한 일을 비꼰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문화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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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이 진행되면서 실용주의자들이 주류이던 공산당과 정부조직의 지도부는 반당(反黨)·반사회주의·반마오쩌둥 사상의 비밀조직으로 매도되었고, 류사오치와 덩 샤오핑 등은 ‘자본주의의 주구(走資波)’로 몰려 체포되거나 공산당에서 추방되었다.

문화혁명 주도세력은 ‘조반파(造反波)’로 불린 청소년, 학생,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당과 정부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조반파라는 이름은 ‘조반유리(造反有理)’ 즉 “모 든 반란에는 그럴 이유가 있다”는 마오쩌둥의 구호에서 비롯된 것인데, 시위가 격 화되면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 무장하여 군대와 유사한 조직을 형성하면서 부터는 마오쩌둥을 지키고 붉은 정권을 보위한다는 의미에서 ‘홍위병(紅衛兵)’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네 가지 낡은 것(四舊)’ 즉 낡은 사상·문화·풍속·습관을 타파 하고, ‘사류분자(四類分子)’ 즉 지주·부자·반혁명분자·악질을 처단한다는 명목으로 자 의적인 학살과 약탈행위를 전개하였고, 중국사회는 곧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학술계·교육계·언론계·문예계·출판계 등에 종사하던 지식인들은 반혁명분자로 비판받은 뒤 농촌으로 쫓겨 갔는데, 문혁 기간 샤팡(下放)된 지식인의 수는 모두 40만명에 이른다. 지식인과 교육자들이 샤팡된 데다가 대학은 물론 중등학생들까지 도 학업을 중단하고 혁명을 하러 나서면서 각급 학교는 사실상 폐교상태가 되었다.

특히 이후 6년동안이나 학생선발을 중단함으로써 중국의 대학교육은 단절되어 버렸 다. 이것은 이후 중국의 현대화를 위한 인재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였다.

문화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은 중국경제를 크게 파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경제방면에 심각한 혼란과 불균형이 야기되었다. 정치사상의 우위와 평균주의의 강 조로 경제적 합리성이 무시되고 생산규율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함에 따라 경제의 효율성은 현저히 악화되었다. 특히 도시의 공업부문에서는 원료공급의 부족과 잦은 단전 등으로 인해 생산 중단이 빈번하였고, 교통과 운수부문 등에서도 많은 장애가 나타났다. 문화혁명의 실패는 사상이념의 강화로 물질적 생산력을 대체하고자 한 시도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 1969년 말부터 문화혁명이 점차 수그러지면서 중국은 1971년부터 제4차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제4차 계획은 문 화혁명으로 숙청된 실용주의자들이 일부 복권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6) 그나마 문화혁명기의 공업건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농촌을 중심으로 한 ‘오소 공업(五小工業)’과 ‘사대기업(社隊企業)’의 발전이다. 오소공업은 농업 기계화를 가속화시 키고 농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지방 행정 단위를 중심으로 소규모 철강, 기계, 화학비료, 석탄, 시멘트 등 다섯 부문의 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사대기업은 원래 인민공사에 소 속된 소규모 공장으로서 처음부터 국가계획부문의 관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많 은 자주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특히 문화혁명으로 인한 혼란기에 농촌경제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개혁·개방 이후 나타나는 향진기업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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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5개년계획은 현상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구조의 개혁과 경제운용의 기본방침에서 본다면, 과거의 경제조정기의 경험을 살려 공업의 근대화를 도모하여 중국의 경제발전을 꾀하려던 실용주의자들 의 의도는 여전히 당내 권력의 핵심에 있던 사인방 등 좌파 진영과의 대립으로 충 분히 관철될 수 없었다.

1975년에 들어오면서 중국은 대내적으로는 문화혁명 등으로 인하여 낙후된 경제 와 기술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 여 새로운 발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른바 ‘4대 현대화(四介現代化)’가 바로 그것이다. 1975년 1월 저우은라이 총리는 제1단계로서 1980년까지 비교적 독립적 으로 갖추어진 공업체계를 확립하고, 제2단계로서 20세기 말까지 농업·공업·국방·과 학기술의 4대 현대화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중국경제를 세계 최선진국에 이르게 한다는 4대 현대화 계획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중국정부는 1976년부터 1985년까지 국민경제발전 10개년계획을 추진하여 120개 대형 중점건 설을 추진하고,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5개년계획으로 선진대열에 선다는 전략을 제 시하였다. 이 10개년계획으로 인해 1976년부터 실시될 예정이던 제5차 5개년계획 은 자연히 취소되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은라이의 사망에 이어 9월에 마오 쩌둥이 사망함으로써 중국의 경제정책은 근본적인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7)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른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결정한 정책은 모두 수호해야 하고 마오쩌둥의 지시는 모두 준시해야 한다”는 ‘양개범시론 (兩個凡是論)’을 내세워 10개년계획 등 마오쩌둥 정책의 계속적인 추진을 시도하였 다. 그러나 이에 대해 실용주의자인 덩샤오핑은 실천과 현실을 진리를 검증하는 유 일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실천표준론(實踐標準論)’을 제기하여 화궈펑의 정책 노선을 반박하였다. 실제로 당시 중국경제의 실정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잡 았기 때문에 10개년계획의 성공은 처음부터 거의 불가능하였다. 10개년계획의 추

7) 문화혁명의 피해와 그것을 주도한 공산당 내의 극좌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은 마오쩌둥 의 생전에 이미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한 예로 1976년 1월 사망한 저우은라이 총리는 중국의 인민대중들로부터 큰 존경과 지지를 받았으나 문화혁명 이후 사인방 등 당 내 좌파들로부터는 실용주의 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비판과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해 4월 5일 중국의 전통 명절인 청명절을 맞아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대 중은 저우은라이를 추모한다는 형식을 빌어 극좌파와 그들을 배후에서 비호해 온 마오쩌 둥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다가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것이 ‘1차 텐안먼 사건’ 또는 ‘4·5운 동’ 등으로 불리는 사건인데, 이는 개혁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요구가 처음 표현된 사건으 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문혁 당시 실권했다가 복권하여 부총리로 있던 덩샤오핑 이 저우은라이 사망 직후인 그 해 2월 두 번째로 실각한 일도 4·5운동이 일어나게 된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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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을 위해 화궈펑은 이른바 ‘양약진(洋躍進)’, 즉 “서양의 힘을 빌려 약진을 이룬다”

는 정책을 통해 자금과 기술면에서의 애로를 타개하고자 하였다.8) 그러나 화궈펑의 추진하고자 한 정책의 기본방향은 마오쩌둥식의 불균형발전전략이어서 철강, 석유, 화학 등 중공업부문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경공업과 농업부문의 위축을 초래했다.

또 중공업부문에 대한 과잉투자를 위해 역사상 최고 수준의 축적률과 투자율을 기 록했지만 투자효율은 매우 낮았다. 1978년 기본건설부문에 투자된 자금은 약 500 억 위안에 이르렀지만 그 해 완공된 중대형 프로젝트 99개 가운데 실제 조업률은 5.8%에 불과했다. 이처럼 양약진 정책은 계획목표와 자금 및 기술조달의 비현실성, 경제구조의 개혁을 도외시한 고속성장의 맹목적인 추구, 경제 각부문간의 불균형 등의 이유로 실패하였고, 화궈펑도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덩샤 오핑의 후원을 받은 혁명 제3세대의 새로운 지도자 후야오팡(胡耀邦, 1815~1989) 에게 당과 국가의 최고 지도자 직책을 양도하게 된다. 개혁파가 당과 정부의 실권 을 장악하고 전면에 나서게 됨에 따라 전반적인 경제구조의 조정과 경제정책의 전 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었고, 중국은 개혁·개방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인민공화국의 수립에서부터 개혁·개방정책이 선언된 1978년까지 약 30년에 걸친 중국경제의 성과를 종합해 보면, 우선 총량으로 볼 때에는 상당한 정도의 괄목할 성장을 기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체제에 서 중국의 경제성장은 산업들 간에 매우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다. 경제성장의 초기 에서부터 중국은 중공업우선적인 성장전략과 계획적 자원배분제도를 수립하여 중공 업부문에 우선적으로 자원이 투입되도록 함으로써 이 부문을 다른 부문에 비해 매 우 빠른 속도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 성장전략은 당연히 산업간의 극 심한 격차와 산업구조의 왜곡을 가져왔다. 개혁·개방 이전까지 공업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은 계속 상승한 반면 농업의 비중은 계속 하락하고 있으며, 기타 산업 즉 건축업, 운수업, 상업 등이 차지하는 비율도 지속적으로 하락하였다. 물론 중공 업의 빠른 성장이 국민경제의 성장을 주도한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산업구 조는 중국의 발전단계에 비해 지나치게 왜곡된 것으로서 경제의 총체적인 성장잠재 력을 희생시킴으로써 오히려 전체 국민경제의 발전을 지체시켰다고 해야 옳다. 중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전략과 산업구조의 왜곡이 초래한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 본재부문 중심의 자원배분으로 인해 소비재생산이 억제됨으로써 소비재의 공급부족 8) 양약진이라는 표현은 대약진 운동이 중국 자신의 자본과 기술로 약진을 이룬다는 의미에 서 ‘토(土)약진’이라고 불렸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화궈펑의 양약진 정책 은 그 후 실용주의자들이 추진한 개방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방 향은 오히려 화궈펑의 실각시 반대파들에 의한 비판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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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생활수준의 개선이 지극히 저조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농촌의 상대적 정체는 결국 공업 생산력의 확대를 위한 도시와 농촌의 분리발전정책에 따라 공업 이 대도시에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부문의 성장이 주변지역과의 상호보완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생산력의 발달이 정체된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따 라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국민경제의 재도약을 추진하는 과제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2. 중국의 경제개혁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화되는 것은 대체로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 당 제11기의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부터이다. 이 회의에서 다수파를 장악한 덩샤오핑은 경제발전과 4개 현대화를 당과 국가가 추구해야 할 최대의 과제라고 선 언하고, 사상해방과 체제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대담한 문호개방을 추진해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경제발전의 구체적인 목표로서 덩샤오핑은 1980년대부터 20세기 말까지 20여 년의 시간을 통하여 경제발전의 초보적인 성과를 거두고 중국사회를 중진국 수준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일인당 국민총생산을 800~1,000달러까지 끌어올 리고 GNP의 4배 성장을 실현하여 1조 달러에 도달하도록 할 것이라는 계획을 발 표하였다. 덩샤오핑은 또한 중국이 이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중국의 계속적인 발전 을 위해 대단히 좋은 기초를 다지게 될 것이며, 그 후 30년 내지 50년의 시간 동안 다시 발전을 지속하게 되면 선진국의 수준에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개혁·개방을 통한 중국경제의 ‘3단계 발전전략’인데, 1단계는 1980년 부터 1990년까지 GNP를 2배로 성장시켜 최저 생계의 해결 수준을 달성하며, 2단 계는 1990년부터 2000년까지 다시 GNP의 2배 성장을 달성함으로써 국민생활을 샤오캉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마지막으로 3단계는 21세기 중엽까지 완전한 현대화 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3단계의 발전수준을 각각 원바오(溫飽), 샤오캉(小 康), 따퉁(大同)이라고 한다. 원바오는 인민들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경 제규모의 낮은 단계를, 샤오캉은 중류수준의 생활이 보장되는 경제규모의 중간수준 을, 그리고 따통은 전면적인 현대화가 달성된 이상적인 복지사회로서 선진국 수준 을 의미한다.

덩샤오핑의 선언에 따라 공산당은 10개년계획을 포기하고 경제개혁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농산물가격의 대폭 인상과 30년에 걸친 중공업우선의 고도성장정책으로 부터 균형된 안정성장 노선으로의 전환을 천명하였다. 또한 중국공산당은 대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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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동시에 대외개방을 선언하였는데, 이로써 중국경제는 개혁·개방정책으로의 전환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개혁을 가져온 가장 주요한 요인 은 결국 사회주의 건설기간 누적되어 온 중국경제의 문제점들과 특히 문화혁명 이 후의 경제침체와 국민생활의 파탄이었다. 사인방 세력이 축출되고 덩샤오핑이 이끄 는 실용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한 1976~77년을 전후한 중국경제의 실정을 보면, 문화혁명의 ‘10년 동란’으로 상당수의 공장들이 문을 닫고 교통수송은 중단되었으 며,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급속히 하락하는 등 붕괴 직전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당시 중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는 농업과 공업 간의 불균형으로 인한 농촌경제의 파탄이다. 둘째는 경공업의 낙후로 인한 극도의 소비재 부족의 문제이다. 셋째, 에너지생산 및 교통·수송능력의 부족이다. 마지막으 로 축적과 소비의 불균형이 그것이다.

사인방 세력이 축출된 이후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본노선에 이의 를 제기하는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당내 보수파들은 개혁·개방이 불가피한 선택이 라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사회주의의 개선과 보강을 위한 개혁을 넘어서 체제를 부 인하거나 위협하는 수준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크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당내 갈등 속에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의 기본방향으로서 이른바 ‘사항기본원칙(四項基本原 則)’을 지킨다는 ‘사개견지(四個堅持)’를 선언하였다. 사항기본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주의 노선을 반드시 견지한다. 둘째, 무산계급독재를 반드시 견지한 다. 셋째, 공산당의 지도를 반드시 견지한다. 넷째,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반드시 견지한다. 이러한 기본원칙은 보수파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 기도 했지만, 개혁파들 역시 개혁·개방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로부터 시장경제체제로 의 전환이라는 엄청난 충격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도 력과 정치사회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데서 나온 것이 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등장한 1992년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1992년까지는 계획경제의 부분적 수정이 개혁·개방의 기본방침 으로 제시되었는데, 이 시기는 다시 세 단계로 구분된다. 제1단계는 개혁의 시작단 계로서,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1978. 12.)로부터 제12기 2중전회(1984. 10.) 에 이르는 기간이다. 이 단계의 개혁은 그 초점이 농촌에 놓여 있었다. 제2단계는 전면적인 개혁의 확대단계로서, 중국공산당 제12기 2중전회 이후부터 제13기 3중 전회(1988. 9.)까지의 기간이다. 1단계와는 대조적으로 이 단계의 개혁정책은 도시 부문의 개혁에 보다 많은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제3단계는 경제구조의 조정단계로서 개혁 이후의 성장에 따른 생산 및 분배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조정정책을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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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기이다.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개혁·개방의 기본방침으로 등장한 이 후는 개혁의 심화 및 가속화 단계로서, 이 단계의 중점은 기존의 개혁조치들을 실 현하면서 중국의 사회경제를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선진국 수준으로 끌 어올리는 데 주어졌다.

<표 Ⅲ-1> 중국경제의 개혁단계에 따른 목표와 전략의 변화

시 기 기본방침 개혁 내용

1978. 12 ~ 84. 10

계획경제를 위주로 시장조절을 보완(主補論), 농촌

중심의 개혁

개혁의 중점이 농업부문에 두어졌으며 도시·기 업부문 및 가격, 재정, 금융 등 거시부문의 개혁 과 대외개방은 제한적으로 시도됨.

1984. 10 ~ 88. 9

계획 있는 상품경제, 도시부문으로 개혁의

확산

농업부문의 개혁 성공을 기반으로 도시·기업부 문, 거시부문, 대외경제부문 등 경제 전반에 걸 친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됨.

1988. 9 ~ 91. 12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의 유기적 결합, 개혁의

속도조절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경기 과열, 통화 팽창, 인 플레이션의 심화, 국제수지의 악화 등의 문제와 텐안먼 사건의 발생으로 경제 안정화 및 부분적 으로 중앙집권화의 재강화 정책이 시행됨.

1991. 12 ~ 2002. 11.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의 본격적 적용, 개혁의

심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경제 이념으로 채택하는 등 개혁·개방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심화시킴.

2002. 11 ~ 삼개대표론, 국민경제의 현대화

국민경제의 균형발전과 선진국 수준의 현대화 를 목표로 제시함.

자료 : 조준현, 『중국의 경제발전과 21세기 발전전략』,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3, 67 쪽.

개혁 초기의 중국경제는 사회주의체제에서 누적되어 온 도농간 및 산업간 불균형 을 시정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기간에 가장 급속한 증가를 보인 것은 농업이었는 데, 이는 주로 ‘농가경영청부책임제’와 같은 새로운 경영방식의 도입에 힘입은 것이 었다. 경영청부제는 1979년 안후이성(安徽省)과 쓰촨성(四川省)에서 실험적으로 도 입되었다가 1982~83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1년이 지난 1984년에 전국 농가의 98%인 1억 8,000만 가구가 이 제도를 채택하게 되었 다.(Wang, 2000, p.9.) 농업에서의 새로운 경영방식은 인민공사의 기본단위인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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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다 작은 규모의 공작 소조를 단위로 한 소조도급책임제(包産到組)에서 호별로 생산계약제를 실시하는 농가생산청부책임제(包産到戶)을 거쳐 토지를 호별로 분할 하여 경영하는 농가경영청부책임제(包幹到戶)로 확대되어 갔다. 농가경영청부책임제 는 농가별로 농지를 임대 받아 생산계약을 맺어 할당량을 생산하고, 정부지정가격 으로 정부에 납품하고 남은 초과분을 시장에서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이 다. 따라서 토지를 비롯한 대형수리시설, 대형농구, 주요 복지시설 등과 같은 기본 적인 생산수단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공동소유로서, 토지의 소유권은 전인민소유제 가 유지되고 있지만 그것을 점유하고 경작하는 권리는 개별농가에게 분할되었다.

토지의 임대기간은 1979년 당시에는 3년이었으나 1984년부터 15년으로 연장되었 고, 토지의 상호합병과 교환도 인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업노동자의 고용과 이농 도 허용되었는데, 이농의 허용은 사영경제의 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이처럼 새로운 경영방식이 확산됨에 따라 농촌의 자유시장이 확대되고 생산량 도 크게 증가하였고 농가소득도 급격히 증가되었다. 또한 산업구조의 불균형도 점 점 해소되어 갔으며 국민의 생활수준도 상당히 향상되었고, 1984년 인민공사는 공 식적으로 해체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개혁은 아직 시장 메카니즘의 전면적인 도입보다는 실험적인 개 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어서, 가격체계에 있어서 도 전면적인 가격형성 메카니즘의 개혁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가격체계를 고정가 격, 부동가격, 협상가격, 시장가격 등으로 구분하여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을 채 택하였다. 금융부문에서도 1949년 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중국은 단일은행제의 원칙 아래 중국인민은행이 중앙은행의 기능은 물론 상업은행 기능까지 담당해 왔 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1979년 중국농업은행(中國農業銀行)과 중국건설은행(中 國建設銀行)을 설립한 데 이어 1984년에는 중국공상은행(中國工商銀行)을 설립하여 중국인민은행(中國人民銀行)의 상업금융 업무를 이관함으로써 인민은행은 중앙은행 의 기능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아직 금융시장 및 통화정책 등 의 측면에서 특별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부문들에서의 개혁조치는 제2단계에 가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된다.

개혁 초기단계의 경제적 성공에 힘입어 중국은 1984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혁과 개방조치를 실시하게 된다. 1984년 10월에 채택된 <중국공산당 중앙의 경제체제개 혁에 관한 결정(中共中央關於經濟體制改革的決定)>은 사회주의의 근본적인 임무는 사회의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기본적인 관점에 서서 사회주의 경제를 “공 유제를 기초로 한 계획성 있는 상품경제”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개혁정책으로의 전 환을 선언하였다. 이 계획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면 ① 계획경제체제의 개혁,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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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체제의 개혁, ③ 가격체제의 개혁, ④ 임금체제의 개혁, ⑤ 세수체제의 개 혁, ⑥ 금융체제의 개혁, ⑦ 유통관리체제의 개혁 등이다. 이 단계는 계획적 상품경 제론에 입각한 상품경제의 발달과 시장과 계획의 결합을 통하여 중국경제를 활성화 한다는 목표에 따라 국영기업을 비롯한 도시부문의 경제관리 체계를 전면적으로 개 혁하고자 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 중앙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의 기본노선에 따른 경제개혁의 추진은 제7차 5개년계획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제7차 5개년계획의 주요목 표는 시장과 계획을 적절히 결합함으로써 중국특유의 계획적 상품경제를 달성한다 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방침에 따라 제7차 5개년계획기간의 개혁의 중점은 경제활 동에 대한 국가의 간접적인 통제능력을 높이고, 이 능력의 강화와 함께 국가의 직 접적인 통제를 줄이는 범위, 정도, 절차를 정한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특히 1987 년 10월 공산당 13차 전당대회에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주창으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社會主義初級段階論)’을 공식화함으로써 개혁과 개방을 이론적으로 뒷받 침하였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중국이 이미 사회 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견지해 나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이 아직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 있으므로 이러한 단계를 초월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개혁파들은 주로 두 번째 의미에서 아직 초급단계인 중국 사회주의의 임무는 낙후된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개혁·개방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제2단계에서 이루어진 개혁조치의 핵심은 생산의 기본단위인 기업운영체제의 개 혁이다. 주요내용은 기업소유권과 경영권의 분리를 기초로 한 경영청부책임제를 비 롯해 주식제도의 도입, 중소기업의 임대경영, <기업파산법>의 실시, 노동계약제의 시행, 개체기업 및 사영기업의 허용과 장려 등이다. 특히 개체기업과 사영기업을 포 함한 중국의 사영경제는 1984~85년의 고속성장기를 거쳐 1980년대 말에는 이미 50~80만 개의 기업이 1,000~1,500만명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국민경제의 약 3~4%를 차지하였다. ‘개체기업’이란 개인이나 가족 또는 8인 미만의 종업원을 고용하여 소규모로 각종 공·상업과 서비스 활동에 종사하는 개인기업을 의미하며, ‘사영기업’이란 기업 자산이 사인(私人) 소유에 속하고 8인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영리활동에 종사하는 자본 주의적 기업을 말한다. 이 기간 중국경제의 빠른 성장, 특히 공업의 성장을 선도한 것 은 바로 이러한 기업개혁과 그 결과로 나타난 사영경제의 확대이다.

1991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는 제8차 5개년계획과 국민경제 및 사 회발전 10개년계획을 동시에 채택하였다. 제8차 계획기간에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가속화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1992년 초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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巡講話)’이다. 남순강화란 이 해 1월에서 2월 사이에 덩샤오핑이 선쩐을 비롯한 중 국 남부의 주요 경제특구와 연해개방도시들을 순시하면서 행한 일련의 담화를 가리 키는데, 이 강화에서 주요한 논점은 개혁·개방노선의 강화, 생산력 표준, 계획경제 와 시장경제의 결합 등이다. 특히 이 강화에서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에도 시장은 있으며,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 수단이므로 계획이 더 많으냐 시장이 더 많으냐 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별하는 기본적인 기준이 아니다”라는 말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社會主義市場經濟論)’을 제기하였다. 두 번째 사건은 같은 해 10월에 열 린 중국공산당 제14차 전당대회인데, 이 대회에서 공산당은 남순강화에서 덩샤오핑 이 제기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을 본격적으로 당의 공식노선으로 제시하면서 공유 제를 더욱 완화하고 국가의 간섭과 규제를 대폭 축소함으로써 개혁·개방을 더욱 확 대, 심화시킬 것을 선언하였다.9)

2002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는 21세기 중국경제의 새로운 발전전략과 방향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여러 측면에서 매우 각별한 의미 를 가진 대회였다. 16대는 21세기 들어서 처음 열리는 대회인 데다가 중국이 WTO 에 가입한 지 1년만에 열린 대회이다.10) 이 대회에서는 WTO 시대라는 새로운 대 내외환경 속에서 중국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전 망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보고와 토론들이 진행되었다. 16차 대회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이 대회에서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전면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지 도부의 인적 교체가 반드시 전략과 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개 혁·개방의 가속화라는 정책의 대원칙은 지도부의 교체와 무관하게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WTO 가입과 21세기의 출범이라는 새로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 중국경제가 9)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당의 공식으로 노선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제14차 전당대회였지

만 사실 이와 유사한 표현이나 생각들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사회 주의 시장경제론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988년 1월 10일 하이난다오의 경제특구 지정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중국사회과학학회에 의해 제출된 보고서이다. 이 보 고서는 “개혁은 하이난다오의 번영을 이끌 열쇠이며… 우리는 하이난다오에 공산당이 주 도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시장경제는 ① 다중적 소 유구조의 수립, ② 완전한 개방적 시장체제의 형성, ③ 거시적 규제의 도입에 의해 지도될 것이다”라고 지적함으로써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기본 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Li, 1999, pp.154-55.)

10) WTO 가입은 단순히 중국경제가 하나의 국제기구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넘어, 새로운 대내외환경 속에서 어떻게 지난 20여 년에 걸친 개혁·개방정책의 성과를 계승하고 새로 운 성장동력을 개발해 낼 것인가 하는 과제를 던져 준다. 이러한 과제에 대한 중국 지도 부의 대응책을 분석하고 전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건들이 바로 2001년부터 시작된 제 10차 5개년계획과 2002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6차 전당대회, 그리고 2003년 3월 5일 개막된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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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전을 위한 원동력과 전략의 개발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었다는 점은 역시 의미심장하다.

제16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중국공산당의 새로운 지도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혁명 4세대를 대표하는 후진타오(胡錦濤) 신임 총서기이다. 후진타오의 선출로 지난 1989년 텐안먼 사건의 여파로 집권한 장쩌민 주석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리게 되 었으며,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그동안 경제개혁정책을 주도해 온 주룽지 (朱鎔基) 총리 등 이미 70대에 들어선 기존 지도부는 정치 일선에서 퇴진하게 되었 다. 한편 공산당 16대에서 당의 지도부가 개편된 데 이어 2003년 3월의 제10기 전 국인민대표대회에서는 국가의 주요직책에 대한 교체가 이루어졌다. 이 대회에서는 후진타오 총서기가 국가주석을 겸하게 되었고, 그동안 경제개혁을 주도해 온 주룽 지 총리의 후임으로 원자바오(元家寶) 부총리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제10기 전인대 의 특징은 연소화, 전문직능화, 전문지식화 등으로 요약된다. 2002년 11월 공산당 16대에서 이루어진 지도부의 연소화와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변신을 시작한 공산 당의 노선변화가 전인대에서 추인된 것이다. 또한 대표들의 고학력화와 세대 교체 가 진행되었으며, 사영기업가들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중국경제의 장기적인 발전 목표와 과제에 대해 공산당 16차 대회는, 중국의 일부 연해지역은 샤오캉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아직 전국적인 범위에서는 샤오캉 단계에 들어서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2020년까지 GDP를 현재의 4배 수준으로 성장시킴으 로써 전면적인 샤오캉 수준을 달성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는 앞으로 중국경제가 양 적 성장과 함께 낙후 지역의 개발을 통한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의 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장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는 다음과 같 은 8개 항목이 제시되었다. 즉 ① 정보화와 공업화가 결합된 신형공업화의 추진,

② 농촌경제의 발전과 도시화를 통한 농촌문제의 점진적 해결, ③ 서부지역의 자원 개발을 통한 장기적 성장동력의 확보, ④ 국유기업의 효율적 관리와 비공유 경제부 문의 발전을 촉진하는 방향으로의 제도개혁 확대, ⑤ 실업, 물가, 국제수지 등 거시 경제적 안정의 유지, ⑥ 소득분배의 개선, ⑦ WTO 가입 및 세계화 추세에 부응하 는 대외개방 수준의 제고, ⑧ 노동집약적 산업의 적극적인 발전을 통한 실업문제 해결 등이 그것이다.

후진타오를 위시한 새로운 지도부의 독자적인 발전전략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 은 이른바 ‘조화로운 사회건설(和諧社會建設)’이다. 공산당 16기 4중전회는 조화로 운 사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첫째, 민주법치, 공평정의, 신뢰우애, 활력충만, 안정 질서,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지내는 사회로서 이것은 과학적 사회 주의의 범주에 속한다. 둘째,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사회로서 부강하고 민주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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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하고 조화로운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사위일체의 사회. 셋째, 인민대중의 공동 의 염원과 근본이익의 소재인 안정되고 성숙된 표현의 사회 등이 그것이다. 조화로 운 사회건설이라는 목표는 지금까지 중국의 경제발전이 성장지상주의와 동부 연안 중심의 발전전략으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을 즉 지역격차, 도농격차, 계층격차라는 이른바 삼대격차(三大差距) 문제를 안고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16대 당 시만 하더라도 아직 장쩌민 주석의 영향 아래 있던 공산당은 덩샤오핑의 ‘선부론’에 입각한 선성장 후분배라는 정책 우선순위를 견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최근 중국 전역에서 빈발하고 있는 각종 시위사태에서 보듯이 지금 중국은 전례 없 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겪고 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양적 성장 중심의 발전전략 으로는 날이 갈수록 깊어가는 인민 내부의 모순과 이해충돌을 해결할 수 없으며, 덩샤오핑식의 불균형발전전략이 아니라 모든 계급계층의 이익이 조화를 이루는 사 회건설이 시급한 과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에 후진타오 정부는 도농간, 지역간, 계 층간 소득격차를 줄여 부문간의 균형발전을 강조하는 ‘과학적 발전관(科學發展觀)’

과 인민의 권리와 이익을 앞세우는 ‘이인위본(以人爲本)’ 이론에 입각하여 이른바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새로운 국정목표로 제시하게 된 것이다.

한편 2005년 9월 원자바오 총리도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중 국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중점적으로 수행해야 할 5대 과제로 ① 내 수확대를 통한 발전 추진 ② 경제구조조정과 성장방식의 변화 ③ 독자적이고 창의 적인 과학기술 개발능력의 제고 ④ 교육에 우선순위를 둠으로써 인재양성에 주력

⑤ 각부문의 균형발전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10월 공산당 16기 5중전회는 11차 규획안을 의결하면서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페기하고 ‘공동부유(公同富裕)’

를 추구하는 ‘공부론(共富論)’ 또는 ‘균부론(均富論)’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전 략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었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였던 동안에는 전반적인 생활수준향상이 체제와 이념에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그 수준을 넘어서면 대중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확대된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여기 에 WTO 가입 이후 한층 더 진전될 개방화와 국제화도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고양 시킴으로써 이러한 요구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시장화 개혁이란 단순히 경제제 도의 개혁만이 아니라 일련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어서 시장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러한 요구는 필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2006년 3월 개최된 제10기 전인대 4차 회의는 2005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6기 5중전회에서 제안한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제11차 5개년규획요강(國民經濟和社會 發展第制十一個五年規劃綱要)>을 확정하였다. 이 요강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중국의 경제운영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번 계획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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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10차 5개년계획까지 유지되었던 ‘계획(plan)’이라는 단어를 ‘규획(program)’이 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사회경제적 불균형의 시정과 경제성장방식의 전환을 강조하 고 있는 것이다. 계획이 반드시 달성해야 한다는 강제적인 의미가 있는 반면 규획 은 방향을 제시하는 느낌으로 계획경제 이미지에서 벗어나 시장중심의 경제운용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중국이 WTO에도 가입한 상황에서 더 이상

‘계획경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분명히 천명하고, 구체적인 수량지표보다 는 정책의 장기적 방향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며, 경제성장 목표뿐 아니라, 취업, 교육, 공공위생, 치안, 사회보장, 생태환경 등 다양한 목표들을 추구하는 5개년계획 임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

한편 11차 규획안은 중국경제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사회 각부문의 균형적 발전을 강조하는 한편 ‘고성장(較快成長)‘ 앞에 ’안정적(平穩)‘이라는 수식어 를 새로이 삽입하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내용과 지속성 및 성장의 사회적 혜택 등 을 중시하는 후진타오 주석의 ‘과학적 발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즉 10 차 계획이 장쩌민 전주석의 통치이념과 발전전략에 기초해 수립된 데 비해 11차 규획은 “과학적 발전관”의 필요성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최초의 5개년계획인 것이 다. 11차 규획안은 이에 대해 세계각국의 발전경험과 중국의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 려한 ‘과학적 발전관’에 따라 경제사회발전의 구상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중국은 단선적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는 속도만을 조절하거나, 동 아시아 신흥공업국 등 특정 국가들의 경제성장 경험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의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장기적 경제발전 모델을 창출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이론이 정립된 이후에도 1984년 이래 강 조되어 온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개념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과 상통하는 의미 로 볼 수 있다.

11차 규획안은 소득격차 축소 및 사회보장혜택의 확대를 통해 소비를 진작함으로 써 소비의 성장기여도를 제고하는 한편, 경제효율을 높여 성장의 안정성과 지속성 을 향상시킨다는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인 목표로 1인당 GDP를 2000 년 수준의 2배로 확대하겠다고 설정한 것은 성장보다 소득격차의 시정을 위한 분배 를 중시하겠다는 의지로 평가된다. 삼농(三農) 즉 농업·농촌·농민 문제의 해결을 최 우선 과제로 설정하는 한편 도시 저소득층의 소득증대와 사회적 갈등요소의 해소 등 불균형 해소를 위한 과제에 큰 비중을 부여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평 가된다. 이를 위해서 농업의 현대화, 농촌 공공사업의 추진 등과 더불어 도시 저소 득층의 세금부담 완화 및 최저임금의 인상 등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이처럼 전체 적인 내용으로 볼 때 11차 규획안에 나타난 중국 지도부의 새로운 전략은 지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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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선부론’에서 벗어나 ‘공부론’으로 전환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공산당의 이러 한 발전전략수정은 지금 중국의 최대과제가 성장문제보다 이른바 삼대격차(三大差 距)로 표현되는 불균형 문제에 있으며, 최근 수년간 성장동력을 투자에서 소비로 전 환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계층간·

지역간·도농간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진타오 정부는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시진핑(習進 平)이 총서기로 선출되고, 2013년 3월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역시 시진핑 이 새 국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임기를 다하였다. 또한 12차 전인대에서는 시진핑 총서기가 국가주석에 리커창(李克强) 부총리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이로써 후진타오 전 주석을 정점으로 한 제4세대 지도부는 퇴진하고 제5세대 지도부가 출범하게 되 었다. 후진타오 총서기가 선출될 때는 장쩌민 전주석이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여전 히 가지고 있었으나, 시진핑 총서기는 중앙군사위 주석을 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권력승계를 이루었다. 다만 후진타오 정부가 기존의 덩샤오핑-장쩌민 지도부에 대 해 단순한 인적 쇄신을 넘어 WTO 가입 등 대내외 환경의 변화에 따른 발전전략의 새로운 전환을 추구한 데 반해, 시진핑 정부가 후진타오 정부와는 다른 발전전략의 근본적인 전환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장쩌민의 제3세대 지도부가 사실상 덩샤오핑 정부의 연속선상에 있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 다. 물론 시진핑 정부의 성격과 공과에 대한 평가는 그 임기가 끝나는 2018년 또는 2013년 이후에 가서야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진핑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중국은 2011년부터 제12차 국민경제 및 사회 발전 5개년규획을 시작하였다. 12차 규획의 기본방향은 과학적 발전의 신국면 창출 과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의 가속 등 16가지로 요약된다. 11차 규획에서 12차 규획 까지 중국정부가 중점을 둔 과제는 소득격차 완화 및 사회보장 강화, 그리고 자원 효율성 제고 및 환경오염 억제 등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재원마련과 중앙 및 지방정부간의 협조가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의 사회보장비 및 농촌개발 등 인프라 투자가 크게 증가한 반면 정부수입은 성장세 둔화, 소득세·농업세 부담감면 등으로 오히려 신장세가 축소되고 있다. 또한 중앙정부의 중장기 발전계획과 달리 지방정 부는 여전히 연평균 10% 이상의 고성장을 목표로 삼고 있어 과잉투자 및 자원낭 비,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내륙지방의 경우 소득수준이 낮고 산업이 발달하지 못함에 따라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정자산투자에 매달 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투자재원을 손쉬운 토지사용권 임대 및 국유은행 대출에 의존함으로써 대출부실 및 부동산투기의 과열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다른 한편 소득증가와 더불어 민주화에 대한 욕구가 증대됨으로써 정부와의 충돌이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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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치사회적 다원화, 기본적인 인권 및 자유의 확대, 독점 적인 정치권력의 민주적 재편을 요구하는 사회발전의 추세와 시민사회의 요구에 공 산당과 중국정부가 어떻게 전향적으로 대응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 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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