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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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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6년도

(근대문화재분과) 제5차 회의록

▣ 일 시 : 2016. 10. 4.(화) 14:00

▣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

▣ 출석위원 : 윤인석(위원장), 강규형, 신동원, 안창모, 여홍구, 오용섭, 채금석, 한태식

▣ 심의내용 및 의결사항 : 이하 자료와 같음

문 화 재 위 원 회

(2)

목 차

【심의사항】

1 「3 1 독립선언서」 문화재 등록

2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 문화재 등록

3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 문화재 등록 4 「국민성금 헌납기(T-6 건국기)」 문화재 등록

5 사적 제 252호 「서울 약현성당」 주변 현상변경 6 사적 제 280호 「서울 한국은행 본관」 주변 현상변경 7 사적 제 284호 「구 서울역사」 현상변경

8 사적 제 284호 「구 서울역사」 주변 현상변경

9 사적 제 285호 「서울 고려대학교 본관」 주변 현상변경 10 사적 제 285호 「서울 고려대학교 본관」 및 사적 제286호

「서울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주변 현상변경

11 사적 제 424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주변 현상변경 12 사적 제 497호 「서울 이화장」 주변 현상변경

【검토사항】

13 「예수성교 누가 복음전서」 문화재 등록 14 「예수성교전서」 문화재 등록

15 「신약마가전 복음서언해」 문화재 등록 16 「구약전서」 문화재 등록

17 「춘천 보타사 대웅전」 문화재 등록

18 「배화여자고등학교 과학관 및 본관」 문화재 등록

【보고사항】

19 사적 관련 현상변경 신청사항 처리 보고

(3)

심 의 사 항

(4)

안건번호 근대 2016-05-01

1. 「3 1 독립선언서」문화재 등록

가. 제안사항

ㅇ 「3 1 독립선언서」의 문화재 등록 여부를 심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문화재위원회 등록 검토(‘16.7.26.)를 거쳐 등록예고(’16.8.22.∼’16.9.20.)된

「3 1 독립선언서」에 대하여 문화재 등록 여부를 심의하기 위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문화재청장, 서울특별시청(ㅇㅇㅇ 소장본) (2) 대상문화재

번호 유물명 수량 규격 제작년대 재질 판종 소유자 소 재 지 비고

1 3 1독립 선언서 1장

세로 20.1×가로

44.9(㎝)

1919년 종이 신연 활자판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

박물관

서울특별시 서초 구 남부순환로 2406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 3 1독립 선언서 1장

세로 20.1×가로

44.9(㎝)

1919년 종이 신연

활자판 ㅇㅇㅇ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3) 추진 경과

ㅇ 근대문화유산 항일독립운동 분야 목록화 조사 용역(’14. 3〜10월) ㅇ 근대문화유산 항일독립운동 분야 등록조사 검토 대상 선정(’15. 2월) ㅇ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5. 7. 27.)

ㅇ ‘3 1독립선언서’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제7차 회의 검토사항 상정 (’15. 9. 22.)

- 결과 : 보류(사유 : 유사 유물들의 종합조사 검토 필요) ㅇ 관계전문가 현지조사(총3회/’16.2.18, 3.29, 4.20)

- 대상(5개소 6종) :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1종), ㅇㅇㅇ 소

장본(1종), ㅇㅇㅇ 소장본(1종), ㅇㅇㅇ 소장본(2종), ㅇㅇㅇ 소장본(1종)

(5)

ㅇ 현지 조사 위원들 서면 검토

- ‘3 1독립선언서’ 중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 ‘ㅇㅇㅇ 소장본’이 역사성과 보존상태 등 종합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남(우선 검토 대상) ㅇ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 검토(‘16.7.26.)

-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 ‘ㅇㅇㅇ 소장본’ : 원안가결 (4) 등록예고

ㅇ 예고기간 : ’16. 8. 22. ∼ ‘16. 9. 20.(30일간) ㅇ 예고결과 : 이의 제기(2건)

1)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이의 제기

- 내용 : 숭실대 소장본 「3 1 독립선언서」는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시 현장성과 역사성이 매우 높은 자료이므로 숭실대 소장 선언서가 등록 예고되지 못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유 명시와 추가 검토를 위한 재 심의 요청

2) 「개인 소장자」이의 제기

- 내용 : 1919년 3월1일 종로에서 김정실(1904∼1969. 교육자, 정치인, 단국 대학교학장)이 만세운동을 함께하며 취득한 3 1 독립선언서를 후손이 보관하고 있으며 소장 유물을 등록 검토 요청하는 이의 제기

(5) 심의내용 : 문화재 등록 심의

라. 검토의견(관계전문가)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6.2.18.〜4.20.)>

ㅇ ㅇㅇㅇ 위원

- 『3·1독립선언서』의 국한문 혼용체의 문장에 대해서는 “의지와 용기를 웅변적인 문투로 피력한 민족정신으로서 문장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이 라는 평가와 함께 “3ㆍ1 독립싸움은 민중이 한 것인데 정작 독립선언서 는 민중들이 도저히 알아보기 힘든 말”이라는 엇갈리는 평가도 있음.

그러나 일제강점기 암울하던 시기에 민족대표가 발의하고, 학생을 포함 한 전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의 기본선언서라는 점에서 우리민족 누구 에게도 보편적인 가치를 주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현재 국내에 공 개되어 전하는 『3·1독립선언서』중에서 보존상태가 좋고, 역사성을 갖 추었다고 판단되는 2점을 우선 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ㅇ ㅇㅇㅇ 전문위원

- 3·1독립선언서 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이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또 역사성을 갖추고 있는 ‘예술의 전당 소장본’과

‘ㅇㅇㅇ 소장본’ 두 점에 대해 우선 등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된다.

ㅇ ㅇㅇㅇ 전문위원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는 1919년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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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언서의 원본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따라서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 관 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ㅇ ㅇㅇㅇ 회장

- 현존 민족대표 3·1독립선언서 중 가장 상태가 좋으며, 민족대표의 일원이었 던 오세창 선생이 보관했던 선언서로서 3·1운동의 대표 문화재로 등록할 가 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마. 의결사항 ㅇ 원안가결

- 이의 제기된 숭실대 소장 및 개인소장 독립선언서 2점은 추가 검토토록 함 ㅇ 출석 7명, 원안가결 7명

붙임 : 1. 「3 1독립선언서」조사보고서 1부.

2.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장」이의 제기 공문 1부.

3. 「3 1 독립선언서」 개인 소장자 의견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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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독립선언서」조사보고서

1. 명 칭 : 3 1독립선언서

2. 소 재 지 : 전서울특별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서 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3. 소 유 자 :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ㅇㅇㅇ(개인) 4. 조사자 의견

<ㅇㅇㅇ 위원>

1) 현상

ㅇ 대체로 양호함 2) 내용 및 특징

ㅇ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 독립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 하였다. 처음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 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고 강력한 독립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내외에 선 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을 따라 이 선언서를 작성하 게 되었다고 한다.

ㅇ 내용은 기(독립 선언의 배경과 취지, 독립 선언의 정당성), 승(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민족적 피해, 독립의 필요성, 독립의 신념), 전(우리의 자세, 우리의 소임, 일본의 각성 촉구, 독립의 의의), 결(우리의 할 일, 우리 민족의 결의)로 구성되 어 있으며, 행동 강령은 공약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ㅇ 최남선은 약 3주일에 걸쳐 이 선언서를 작성하여 최린에게 전달하였고, 최린은 손병희 등의 동의를 얻어 2월 27일까지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뒷부분에 있는 공약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선언서 원고는 신문관에서 조판된 것을 건네받은 보성사에서 그해 2월 20일 부터 시작하여 35,000장(혹 21,000장)을 인쇄하였다.

ㅇ 당시 간행한 부수에 대해 인쇄 책임자였던 보성사 사장 옥파(沃坡) 이종일(李鍾 一, 1858~1925)은 일경(日警)의 취조과정에서 “인쇄한 선언서는 21,000매라고 하 는데 전부를 2월 27일 밤에 인쇄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이종일이 “그렇다.”고 응답한 기록을 따라 21,000장인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종일의 비망록에 는 일경의 취조에 대해 “2만 여 매로 대답했으나 실은 두 번에 걸쳐 3만 5천여 장을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 2만 5천 매 그리고 나중에 1만 매를 찍었 다.”고 하였고, 또 비망록 논설집에는 “2월 20일 오늘부터 독립선언서를 보성사 에서 인쇄하기 시작하다. 2월 25일에 2만 5천장을 우선 1차로 인쇄 완료하여 천 도교본부로 운반하다. 2월 27일 오늘까지 2차로 1만 장을 더 인쇄하여 천도교당 으로 가지고 가다가 파출소에서 검문을 당했으나 족보라고 속이고 겨우 운반했 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경의 취조에 무심하게 대답한 것보다는 이종일의 비망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므로 35,000장을 인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 적일 것으로 판단된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운영하던 신문관과 함께 당대 최대의 인쇄사였다. 종로구 수송동(옛 전동)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으며, 손병희가 1910 년 말에 보성학교를 인수하면서 천도교로 운영권이 넘어갔다가 1919년 6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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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화재로 전소(全燒)되어 버렸다.

ㅇ 이렇게 인쇄된 선언서는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당으로 옮긴 뒤 28일 아침부터 전국의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되었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의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이 선언서를 낭독한 뒤 모두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 였고, 같은 시각 파고다공원(현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각 학교 학생과 민간인 약 5,000명이 모인 가운데 『3·1독립선언서』의 살포와 낭독이 있었다. 이와 동 시에 전국의 주요도시에서도 일제히 살포되면서 민족과 국가의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이다.

ㅇ 이번에 예술의 전당 서예관,

ㅇㅇㅇ

,

ㅇㅇㅇ

,

ㅇㅇㅇ

, 개인(ㅇㅇㅇ) 소장본 등 모두 5점의 『3·1독립선언서』를 조사하였다. 보존 상태와 역사성 그리고 상호 간의 대비 등을 통해, 등록 가치가 앞서는 원본으로 예술의 전당 서예관소장본 (<사진 1>) 과 ㅇㅇㅇ 소장본(<사진 2>) 등 2점을 선정하였다.

ㅇ 예술의 전당 서예관소장본은 독립선언 33인중의 한분이자 33인의 선정에 핵심 적인 역할을 한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옛 소장본을 아들인 오 일륙(吳一六)이 이곳에 기증한 것이다. 오세창은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고, 3·1독립운동 때에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1918년에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발 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이후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동 탓에 그가 소장하던 『3·1독립선언서』가 유족에 의해 예술의 전당 서예 관에 기증된 것으로 판단된다.

ㅇ 선언서는 배접되어 유리액자로 표구되어 있다. 현재 표구 뒷면은 부분적으로 파 손되어 있으며, 표구 안쪽에 1968년 1월의 신문이 사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시기에 표구한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 아래에는 오세창의 것으로 보이는

「昌」 등 2개의 인장이 찍혀 있다. 접힌 부분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 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런데 공약삼장이 끝난 다음에는 “朝鮮建國四千 二百五十二年三月 日 朝鮮民族代表”에 이어 33인의 명단이 있다. 이렇게 인쇄된

『3·1독립선언서』에는 원래 날짜가 인쇄되지 않았는데 이 소장본에는 삼월 다 음에 “一”자가 보사(補寫)되어 있다. 소장자가 그 날짜까지 역사에 남기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1> 예술의 전당 서예관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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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ㅇㅇㅇ 소장본은 그의 부친인 이규흔(李圭昕)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3·1독립선언서』는 동아일보 1962년 8월 6일자 4면에 소개된 바 있다. 당 시 기사에는 선언서 사진과 함께 용산 이태원에 거주하던 김화진(金和鎭) 옹의 고증을 따라, “1919년 3월 1일 당시 14세 소년이었던 이규흔씨가 보통학교를 마 치고 용산에 있는 선린상업학교에 진학코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남대문을 거 쳐 종로 보신각 근처에 이르렀을 때 군중에 뿌려진 것을 주워 사 십 여년의 오 늘까지 비장해두고 온 것이다. 이 독립선언서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선언 서의 첫 줄에 「我朝鮮」에 이르러 「我鮮朝」의 오식이 있음은 당시 얼마나 분주하고 조급히 서둘러서 인쇄했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ㅇㅇㅇ 소장본 은 배접되지 않은 채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편지봉투에 담긴 채로 현재까지 보 존되어 왔다. 그래서 보존 상태로만 본다면 5점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사진 2> ㅇㅇㅇ 소장본

ㅇ 나머지 3본 중에서는 ㅇㅇㅇ 교수가 기증하였다는

ㅇㅇㅇ

소장본이 나아 보인 다. 그러나 <사진 3>과 같이 배접되어 있는데다 첫 6행은 무색 테이프를 붙였 다 떼어낸 흔적과 손상된 곳이 있어서 앞의 2점에 비해 보존 상태가 떨어진다.

그 외 독립기념관 소장본은 훼손이 심한 편이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본은 기관 이 문화재로 등록할 의사가 없었던 탓인지 유리 전시대 밖에서 실견(實見)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사진 3>

ㅇㅇㅇ

소장본

(10)

ㅇ 그리고 이번 조사에서 제외된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의 옛 소장 본(자신이 휘문고보 학생일 때 3월 1일 당시 탑동 공원에서 직접 습득했다고 함), 미국에 거주하는 최남선의 장손인 ㅇㅇㅇ의 소장본(<사진 4>) 등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3·1독립선언서』가 더 존재한다. 향후 이들을 포함하여 더 많은 『3·1독립선언서』가 공개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이번에는 공개된

『3·1독립선언서』 중에서 보존 상태와 역사성을 고려하여 2점을 먼저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진 4> 육당 최남선 장손 ㅇㅇㅇ 소장본(월간중앙 2014.12.17.)

ㅇ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보급용 『3·1독립선언서』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 월탄 박종화의 옛 소장본을 원본으로 삼아 현암사에서 간행한 영인본이 많으나

<사진 5> 와 같이 개별적으로 실물과 거의 동일하게 영인한 것들도 있어서 감 식에 주의가 요구된다.

<사진 5> 개별적인 영인본

ㅇ 한편 현재 전하는 『3·1독립선언서』와 유사한 선언서류가 제법 전한다. 이들 중에서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것들은 『3·1독립선언서』를 포함하여 2015년 12월 에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48점)라는 명칭으로 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공 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43-46조, 동시행령 제80-84조에 근거)로 지정되었다.

(11)

3) 문헌자료

ㅇ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http://search.i815.or.kr)』

ㅇ 김소진, “1910年代의 獨立宣言書 硏究”(박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1995.

ㅇ 임남숙, “세계의 인쇄인: 이봉창(李奉昌)의사와 보성사”, 『프린팅코리아』 10(4), 2011.

ㅇ 이정은, “3․1독립선언서 ‘異本’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320회 월례연구 발표회(2016.02.23.)

ㅇ 이정은, “국가지정기록물이 된 3.1운동 독립선언서”, 기록인 34호, 2016.봄.

4)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3·1독립선언서』의 국한문 혼용체의 문장에 대해서는 “의지와 용기를 웅변적 인 문투로 피력한 민족정신으로서 문장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이라는 평가와 함 께 “3ㆍ1 독립싸움은 민중이 한 것인데 정작 독립선언서는 민중들이 도저히 알 아보기 힘든 말”이라는 엇갈리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암울하던 시 기에 민족대표가 발의하고, 학생을 포함한 전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의 기본선 언서라는 점에서 우리민족 누구에게도 보편적인 가치를 주는 문화유산이다. 그 러므로 현재 국내에 공개되어 전하는 『3·1독립선언서』중에서 보존상태가 좋 고, 역사성을 갖추었다고 판단되는 2점을 우선 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할 필요 가 있다.

5) 종합의견

ㅇ 『3·1독립선언서』는 국가가 보존하여야 할 민족의 유산임. 보존상태가 좋고 역 사성을 갖춘 2점을 우선 등록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됨

<ㅇㅇㅇ 전문위원>

1.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 1) 현상

ㅇ 본 3․1독립선언문 은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인 ‘오세창’ 선생이 소장하였 던 것을 2002년 막내 아들 오일륙 씨가 기증한 것이다. 현재 선언문이 소장된 서울서예박물관에는 근역서화징 등 오세창 선생의 귀중한 원본이 일괄 기증 되었다.

ㅇ 본 3․1독립선언문 의 원 소장자 ‘오세창’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분이 소장하고 있다가 후손이 기증하였기 때문에, 현재까 지 알려진 어느 독립선언문 보다 출처가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ㅇ 그리고, 본 3․1독립선언문 의 오른쪽 하단에 원 소장자 ‘오세창’ 선생의 도장 2개가 찍혀 있기 때문에, 오세창 선생이 3·1운동 당시에 소장하였던 것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ㅇ 오세창 선생은 천도교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으로, 3·1운동 당시 일제에 피체되어 1920년 9월 재판에서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최린, 함태영, 권동진, 이종일, 김창준 등과 함께 출옥하였다.

2) 내용 및 특징

ㅇ 3․1독립선언문 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른바 ‘보성사판’이다. 보성사판은 1919년 당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 를 기다리다가 나타나지를 않자, 이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2)

ㅇ 3․1독립선언문 에 찍혀 있는 ‘오세창’ 선생의 도장 2개가 찍혀 있는 것을 보 아, 원 소장자가 ‘오세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 소장자의 막내 아들이 소 장하고 있다가 서울서예박물관에 기증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처가 가장 명 백하게 알려진 독립선언문이다.

ㅇ 본 3․1독립선언문 은 기증 당시와 같이 원본 그대로 액자에 넣은 채로 보관 되어 있다. 보관 상태가 매우 양호할 뿐만 아니라, 전혀 훼손이 되지 않았다.

ㅇ 현재 서울서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1독립선언서 는 1919년 당시 오세창 선생이 소장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까지 알려진 독립선언서 가운데 가장 출처가 확실한 원본이라고 할 수가 있다.

ㅇ 본 3․1독립선언문 이 들어 있는 액자의 배접된 신문으로 보아, 배접 시기는 1968년 1월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ㅇ 서울서예박물관에서는 1996년 오경석·오세창 부장 컬렉션으로 개최한 바 있으 며, 2001년에도 제2차 컬렉션전을 개최하였다.

3) 문헌자료

ㅇ 오수열, 독립선언서 인쇄경위 인쇄계, 1986.

ㅇ 묵암 이종일선생 비망록(4) 한국사상 19, 1982.

ㅇ 이정은, 3․1독립선언서 ‘이본’ 연구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320 회 월례연구발표회 발표문, 2016. 2. 23.

ㅇ 예술의전당, 葦滄 吳世昌 - 亦梅·葦滄 兩世의 學問과 藝術世界-, 예술의전당 한국서예사 특별전 15, 1996, 228쪽.

4)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예술의전당(서울서예박물관) 소장 3․1독립선언문 은 보성사판으로, 선언문에 원소장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오세창’이다.

ㅇ 본 독립선언문에는 ‘오세창’의 도장이 2개 찍혀 있어 원 소장자가 확인되며, 기 증자는 오세창 선생의 막내 아들 ‘오일륙’이기 때문에 출처가 가장 확실한 독립 선언문이다.

ㅇ 예술의전당(서울서예박물관) 소장 3․1독립선언문 은 원 소장자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로서 소장하고 있던 것임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어 느 선언문 보다도 역사적 가치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ㅇㅇㅇ 소장본 1) 현상

ㅇ 3․1독립선언문 은 소장자(ㅇㅇㅇ)가 부친으로부터 받은 그대로 책 속에 넣어 보관해 오던 것으로 원형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음

ㅇ 본 3․1독립선언문 은 소장자(ㅇㅇㅇ)의 부친이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보신각 을 지나다가 습득하여 보관하여 오던 것으로, 지금까지 전혀 공개가 되지 않았 다.

2) 내용 및 특징

ㅇ 3․1독립선언문 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독립을 선언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성사판과 신문관판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보성사판은 1919년 당시 탑골공원에서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나타나지를 않자, 이 선언서를 낭독하였 다.

ㅇ 그런데, 보성사판은 선언문을 조판할 당시, ‘我朝鮮’을 ‘我鮮‘朝’로 잘못 조판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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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신문관판을 찍게 되었다고 한다.

ㅇ 보성사판은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2만 1천부를 인쇄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보 성사 사장으로 3․1독립선언문 인쇄를 담당한 이종일의 묵암비방록에는 3 만 5천부를 인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종일의 손녀(ㅇㅇㅇ)의 증언도 3만 5 천부를 인쇄하였다고 한다.

3) 문헌자료

ㅇ 오수열, 독립선언서 인쇄경위 인쇄계, 1986.

ㅇ 묵암 이종일선생 비망록(4) 한국사상 19, 1982.

ㅇ 이정은, 3․1독립선언서 ‘이본’ 연구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320 회 월례연구발표회 발표문, 2016. 2. 23.

4)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ㅇㅇㅇ 소장 3․1독립선언문 은 소장자의 부친이 1919년 3월 1일 당시 서울의 보신각 근처에서 습득한 것을 지금까지 보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원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기념관 소장본과 지질 및 인쇄 상태를 상세히 비교할 필요가 있다.

5) 종합의견

ㅇ 3․1독립선언서 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이기 때문에,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또 역사성을 갖추고 있는 ‘예술의 전당 소장본’과 ‘ㅇㅇㅇ 소장본’

두 점에 대해 우선 등록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됨

<ㅇㅇㅇ 전문위원>

1) 현상

ㅇ 예술의 전당,

ㅇㅇㅇ

,

ㅇㅇㅇ

, 개인 소장유물의 현 보존 상태는 대체적으로 좋 은 편이다.

2) 내용 및 특징 1. ㅇㅇㅇ 소장본

ㅇ 세로20.1×가로44.9(㎝)로서 현재 배접하지 않은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2.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

ㅇ 세로20.5×가로45.8(㎝)로서 현재 배접된 상태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액 자로 만들었는데 표구시 1968년 신문이 사용되었다. 선언서의 앞부분에 위쪽에 1곳, 아래쪽에 3곳의 결손부가 확인되는데 배접 수리시 처리되었다.

ㅇ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이 기증한 독립선언서로서 소장처가 분 명한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ㅇ 이 독립선언서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제작된 것으로 선언서의 첫 줄에 보이는

아조선(我朝鮮)이 아선조(我鮮朝)로 바꾸어 인쇄된 상태이다. 3·1운동 당 시 온 국민에게 배포된 독립선언서와 전단류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3·1운동을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언서이다.

ㅇ 보성사는 본래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경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으로 활약 하던 이용익이 1906년 러시아어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출판 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이용익 사후 보성중학교와 보 성사는 재정난으로 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버렸다.

ㅇ 당시 천도교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 기관지인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으나, 1910년 말 보성학원(普成

(14)

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함께 인수한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 하여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던 것이다. 당시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 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ㅇ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27일 인쇄되었다. 당시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 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고,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 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 까지 극비리에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하였다.

ㅇ 「3.1독립선언서」의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吾等은 玆에 我鮮朝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 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 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主張함이며 人類的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 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 人類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할지니 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累千年에 처음으 로 異民族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奇緣을 遺 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하면 民族的良心과 國家的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하면 各個 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恥的財產을 遺與치안이 하려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獨立 을 確實케함이니 二千萬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 人類通性과 時代良 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하매 何强 을 挫치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못하랴

丙子修好條規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안이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ᄲᅮᆫ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안이하 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 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辯을 暇치못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 己의 建設이 有할ᄲᅮᆫ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안이하도다 嚴肅한 良心 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感情으로써 他 를 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覉縻된 日本爲政家의 功名的犧牲 이된 不自然又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又合理한 政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要求로서 出치 안이한 兩國倂合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威壓과 差別的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업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 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 안인가 ᄯᅩ二千萬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안일ᄲᅮᆫ 안이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15)

猜疑를 갈스록 濃厚케하야 그 結果로 東洋全局이 共倒同亡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금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支持者인 重責을 全케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恐怖로서 脫出케하는 것이 며 ᄯᅩ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問題ㅣ리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 도다 過去 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 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 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ㅣ라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ㅣ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躕躇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 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玆에 奮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男 女老少업시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羣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 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氣運이 吾等을 外 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ᄯᅡ름인뎌

公約三章

一 今日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要求ㅣ니 오즉 自由的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感情으로 逸走하지말라

一 最後의 一人ᄭᅡ지 最後의 一刻ᄭᅡ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 라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ᄭ 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朝鮮建國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 日 朝鮮民族代表 孫秉熙 吉善宙 李弼柱 白龍城 金完圭 

金秉祚 金昌俊 權東鎭 權秉悳 羅龍煥 羅仁協 梁旬伯 梁漢默 劉如大 李甲成  李明龍 李昇薰 李鍾勳 李鍾一 林禮煥  朴準承 朴熙道 朴東完 申洪植 申錫九  吳世昌 吳華英 鄭春洙 崔聖模 崔 麟 

韓龍雲 洪秉箕 洪其兆       

ㅇ 조사 유물인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는 보성사(普成社)에서 제작된 독립선언문으로 1919년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을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 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욱 조국의 독 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 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선언문은 명문장으로서 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16)

3.

ㅇㅇㅇ

소장본

ㅇㅇㅇ

에 소장되어 있다. 1967년 7월 21일 공식 기증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 제로는 1948년 남산 신궁터 소재 박물관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전한다. 현재의 박물관에는 1967년 10월 10일 소장되었다.

ㅇ 선언서는 세로20.0×가로45.3(㎝)로서 현재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낸 흔적이 있으나 양호한 편이며, 각 면 0.5㎜정도 절단 후 배접 처리 하였다. 후면 배접지의 크기는 세로24.9×가로50.1(㎝)이다.

ㅇ 선언서의 앞부분에 방형의 주인이 찍혀 있는데 인문은 ‘산택(山澤)’이다.

ㅇ 보성사(普成社)에서 제작된 것으로 선언서의 첫 줄에 보이는아조선(我朝鮮)

이 아선조(我鮮朝)로 바꾸어 인쇄된 상태이다.

4.

ㅇㅇㅇ

소장본 ㅇ ① 신문관판

- 세로25.3×가로35.8(㎝)이다. 오랫동안 인쇄업에 종사하였던 ㅇㅇㅇ씨가 기증하였다.

- 「3.1독립선언서」는 당시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고 이해되고 있다.

- 현재 국가기록원이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한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48점가 운데 하나이다.

ㅇ ② 보성사판

- 세로20.4×가로45.2(㎝)이다. 배접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김선량씨가 기증하였다.

5.

ㅇㅇㅇ

소장본

ㅇ 세로20.5×가로45.8(㎝)로서 현재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보성사에서 제작된 것으로 선언서의 첫 줄에 보이는아조선(我朝鮮)이 아선조(我鮮朝)로 바 꾸어 인쇄된 상태이다.

ㅇ 소장자인

ㅇㅇㅇ

에서 등록을 원하지 않는 자료이다.

3) 문헌자료

ㅇ 박현서,「3·1운동(三·一運動)과 천도교계(天道敎界)」,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三·一運動50周年記念論集)』, 동아일보사, 1969.

ㅇ 조용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성립경위(成立經緯)」, 『3·1운동50주년기념 논집(三·一運動50周年記念論集)』, 동아일보사, 1969.

ㅇ 김진봉, 『3·1운동(三·一운동)』, 민족문화협회, 1980.

4)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조사 유물인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는 신문관(新文館)판 및 보성사 (普成社)에서 제작된 독립선언문이다.

ㅇ 1919년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을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으로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ㅇ 더욱 내용면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 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 당시 세계적 정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ㅇ 조사 유물인 ㅇㅇㅇ 소장본, 예술의 전당 소장본, ㅇㅇㅇ 소장본, ㅇㅇㅇ , ㅇㅇ ㅇ 본은 모두 1919년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등록문 화재로 등록하여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ㅇ 다만,

ㅇㅇㅇ

소장본 가운데 신문관판은 국가기록원이 국가지정기록물로 지정한

‘3.1운동 관련 독립선언서류’ 48점 가운데 하나이므로 등록문화재 지정에서 제외

(17)

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된다. 또한

ㅇㅇㅇ

소장본은 소장자 측에서 지정을 원하 지 않고 있으므로 이 유물 또한 제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ㅇ 등록 명칭은 보성사(普成社)라는 인쇄 기관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시설인만큼 「보성사판 3·1독립선언서(普成社版 三·一獨立宣言 書)」라고 하여 함께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5) 종합의견

ㅇㅇㅇ

자료실, 예술의 전당 서예관,

ㅇㅇㅇ

그리고 개인 소장인

ㅇㅇㅇ

소장 본 「3.1독립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는 1919년 기미년의 3·1독립운동을 전국 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언서의 원본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ㅇ 따라서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ㅇㅇㅇ 회장>

1.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소장본 1) 현상

ㅇ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조선의 독립국 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밝힌 선언서이다.

ㅇ 제목은 “선언서”이다. 국한문 혼용체,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하고,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했다.

ㅇ 본문과 공약3장,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자 명단이 있다.

ㅇ 민족대표는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측 15명, 길선주 등 장로교, 감리교측 16명, 백용성, 한용운의 불교측 2명 등 33명이다.

ㅇ 이 선언서는 2월 20일경부터 인쇄되기 시작하여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인쇄책임 자 묵암 이종일 비망록에는 약 3만 5천매 인쇄(민족대표들의 법정 진술에서는 2 만 1천매 인쇄)되었다 한다.

ㅇ 선언서의 배포는 거족적 3・1운동의 발발과 전민족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내용 및 특징

ㅇ 1762자로 된 이 독립선언서는 반만년 역사와 2천만 민중의 정성과 충성심에 입 각하여 독립을 선언함을 표명하였다. 또한 비폭력적・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주장할 것을 제시하였다.

ㅇ 특징은 첫줄 국호 “朝鮮”이 “鮮朝”로 인쇄되어 있는 것이다.

3) 문헌자료

ㅇ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등 4) 기타

ㅇ 민족대표의 일원인 오세창 선생이 소장해 오다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일시 대여 했다가 회수하여 서예박물관에 기증했음

ㅇ 독립선언서 중 가장 상태가 좋고, 민족대표의 일원이 소장했던 자료임 ㅇ 현존 3ㆍ1독립선언서 문화재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음

5) 종합의견

ㅇ 현존 민족대표 3.1독립선언서 중 가장 상태가 좋으며, 민족대표의 일원이었던 오세창 선생이 보관했던 선언서로서 3ㆍ1운동의 대표 문화재로 등록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됨

(18)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장」이의 제기 공문

(19)

<붙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3․1독립선언서>

○ 서지사항 연대 : 1919년 크기 : 20.0×45.3cm

상태 : 선언문에 결실, 결락 부분 없어 대체로 보존상태 양호. 우측 상단부 테이프 접착 흔적 있음.

일부 여백 결실 부분 보존처리(1999년) 印文 : “山澤”

소장 경위 : 김양선 교수가 1945년 해방 전후 혼란기에 입수한 것으로 추정됨. 1967년 7월 숭실대학 교에 기증

○ 원소장자 : 야마지와 사이치로(山澤佐一郞)

1917년 2월 경성지방법원 검사로 임명된 이래 1943년 평양복심법원 검사장으로 활동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사상범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으며, 해방 뒤 북한정권으로부 터 사형 집행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및 참여자를 기소하고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언도했으며, 소장하고 있던 3․1독립선언서를 재판의 주요 증거물로 채택하여 활용했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13권, 3․1운동 Ⅲ, 3․1독립선언 관련자 심문조서)

○ 수집자 :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 교수(1907-1970) 1907년 평북 의주 출생

1926년 선천 신성중학교 졸업. 숭실전문학교 입학

1927년 숭실전문학교 동창 배민수, 문학린 등과 비밀결사 ‘청구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 전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평양시내 각급학교 학생들의 총궐기만세시위를 주도한 뒤에 검 속되어 평양 지방법원에서 1년 6개월 언도 받음

1934년 숭실전문학교 졸업

1938년 심사참배 반대로 피검되어 1개월 수감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피검되어 8개월 수감 1948년 ‘매산고고관’, ‘기독교박물관’ 설립 1954-1970년 숭실대 사학과 교수 역임 1960-1962년 안중근의사 선양회 이사 위촉 1962년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 위원 위촉 1963-1967 안중근의사 숭모회 부이사장 역임 1967년 독립운동사료조사위원 위촉

1970년 소천

(20)

「3 1 독립선언서」개인 소장자 의견서

현재 예고된 문화재등록 예고 2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추가로 1점을 등록 요청하는 이의를 제기하오니 꼭 검토를 요청합니다.

요청자 : 보관자의

ㅇㅇㅇ

의 아내 권〇〇

보관하는 곳 : 서울 양천구 신정로 300 〇〇〇

취득일:

1919년 3월1일 종로에서 시외조부이신 '김정실' 님(1904∼1969. 교육자·정치인,단국대학교학장) 께서 만세 운동을 함께하며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액자로 만들어 집의 가보처럼 보관해 오고 있었음.

이 독립선언서를 집의 거실에 한가운데에 두시며 자녀들에게도 국가관을 언제나 교육시키셔서 4자녀 모 두 교육자, 국가공무원, 학자 등으로 훌륭하게 성장하심.

현재 보관하고 있는 사연:

최초 취득자인 김정실님이 돌아가신 후 3째 딸인 김〇〇(대한적십자국제부국장역임) 님이 유품을 받아 '독 립선언서'를 계속 보관하였음. 이후 김〇〇님이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그의 아들인 ㅇㅇㅇ (건축가)에게 인 계하여 현재 ㅇㅇㅇ이 소장하고 있음.

상태는 사진과 같이 온전함.

등록을 요청하는 이유:

나라를 몹시 사랑하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던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특히 이 독립선언서가 집안의 거실에 또 이어서 2대의 거실에 3대의 거실에 걸려 자녀들에게 그마음을 또 그 마음을 계승받고있음. '독립선언서를 문화재'로 등록시켜 집안의 가보를 떠나 나라의 가보로 숭고 한 마음을 받들 수 있도록 꼭 문화재 등록을 요청하는 바임.

**** 젊은 세대에게 지금의 국가관이 고리타분한 옛이야기로 들릴 수 있으나 불과 수십년 전에는 내가 사는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탄압과 억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평화의 시대, 그 시대에 사는 젊은 세대인 저희가 할 일은 숭고한 그분들의 마음을 배우고 현재 삶에 '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 내는 것 같습니다.

현재 예고된 문화재 등록 예고 2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추가로 1점을 등록 요청하는 이의를 제기하 오니 꼭 검토를 요청합니다.

(21)

<사진자료>

(22)

안건번호 근대 2016-05-02

2.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 문화재 등록

가. 제안사항

ㅇ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의 문화재 등록 여부를 심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문화재위원회 등록 검토(‘16.7.26.)를 거쳐 등록예고(’16.8.22.∼’16.9.20.)된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에 대하여 문화재 등록 여부를 심의하기 위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ㅇㅇㅇ(개인) (2) 대상문화재

유물명 수량 규 격 제작년대 재질 판종 소유자 소 재 지 비고

발해태조건국 지 명림답부전

1권 (합철본)

세로 20.8×

가로14.9(㎝) 1911년 종이

(양지) 등사본 ㅇㅇㅇ

서 울 특 별 시 서대문구 연 세로 50 연 세 대 학 교 박 물관

(3) 등록예고

ㅇ 예고기간 : ’16. 8. 22. ∼ ‘16. 9. 20.(30일간) ㅇ 예고결과 : 의견 없음

(4) 심의내용 : 문화재 등록 심의

라. 검토의견(관계전문가)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6.6.20.)>

ㅇ ㅇㅇㅇ 위원

- 박은식이 1911년 한국역사를 만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저술한 『발해

태조건국지』와 『명림답부전』는 한국근대사학사와 한국독립운동사 분

야의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합철된 두 책은 별도의 책이지만 장서인이

위의 책에만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발행초기부터 합철되어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동일한 저자에 의해 동일한 장소와 시기에 완성 발행되어,

민족교육기관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만큼 합철된 상태 그대로 『발해태

조건국지․명림답부전』이라는 명칭으로 등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23)

ㅇ ㅇㅇㅇ 전문위원

- 박은식이 1911년 한국역사를 만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저술한 『발해 태조건국지』와『명림답부전』의 합철본 『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 전』(渤海太祖建國誌․明臨答夫傳)은 한국근대사학사와 한국독립운동사 분야의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 따라서 『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渤海太祖建國誌․明臨答夫傳)은 근대등록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ㅇ ㅇㅇㅇ 교수

- <발해태조건국지>와 <명림답부전> 2종은 구한말 민족 자강운동을 전 개한 박은식이 1911년 우리 국민들의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목적으로 저술하여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던 역사자료이다.

-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사가들의 고구려·발해 인식을 가장 명료하게 보 여주는 매우 희귀한 역사자료로 근대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므로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마. 의결사항 ㅇ 원안가결

ㅇ 출석 7명, 원안가결 7명

붙임 :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조사보고서 1부.

(24)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조사보고서

1. 명 칭 : 발해태조건국지 명림답부전

2.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학교박물관 3. 소 유 자 : ㅇㅇㅇ(개인)

4. 조사자 의견

<ㅇㅇㅇ 위원>

1) 현상

ㅇ 대체로 양호하나 산화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적절한 보존 대책이 요구됨.

2) 내용 및 특징

ㅇ 『발해태조건국지』는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을 맡기도 한 박은식 (朴殷植, 1859~1925)이 1911년에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홍도천에 있던 윤세복 (尹世復)의 집에서 저술한 저작의 하나이다. 그의 자는 성칠(聖七), 호는 백암 (白庵), 겸곡(謙谷), 태백광노(太白狂奴), 무치생(無恥生)이고, 이명(異名)은 인식 (仁植), 기정(箕貞) 등이다. 내용은 목차(서론, 발해 이전의 고구려 말운, 태조의 가계와 인격, 고구려 유민의 생기, 영웅의 은둔, 활동시기, 천문령의 대승첩, 태 조의 건국, 발해의 강역, 발해의 종교와 풍속, 발해의 문학, 태조의 외교, 태조의 후손, 결론)에서 보듯이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이 그 유민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한 과정과 영토, 문물, 종교, 풍속, 문학, 외교, 후손 등을 다루고 있다.

ㅇ 그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자신이 중국 망명을 통하여 독립운동의 선두 에 섰던 인물이었던 만큼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으로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임 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약 8개월 동안 이 저작 외에도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명림답부 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단조사고(檀祖事攷)』 등 고대사 관계 저작을 집필하였다. 이렇게 망명 초기 의 저작은 고대사, 만주, 영웅, 대종교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의 자주독 립을 지향한 실천적 역사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중에 서 『동명성왕실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ㅇ 서명 아래에는 <사진 1>의 왼쪽 “白庵 朴箕貞 著」 檀崖 尹世復 閱”과 같이 이 책은 박기정이 저술하고 윤세복(1881~1960)이 교열하여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 다. 박기정은 박은식의 다른 이름이다. 교열을 맡은 윤세복의 본명은 세린(世麟) 이고, 도호(道號)가 단애(檀崖)이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후 대종교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나라를 회복한다는 뜻으로 세복(世復)으로 바꾸고, 단애 라는 도호를 받았다. 드디어 1911년 2월에 망명지인 서간도 환인현 서문 안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여 대종교 포교와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박은식도 이곳에 머물며 교사로 일하였다고 한다. 『발해태조건국지』도 등 사본으로 간행하여 이 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후 동창학교가 폐교되자 교 사이던 김규환, 김광제 등이 1915년 6월에 흥경(興京)의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 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였는데 이듬해인 1916년에 일신학교는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명되었다.

(25)

ㅇ 『발해태조건국지』의 앞표지 우측 상부에는 <사진 1>의 오른쪽과 같이 「興東 學校」라는 장서인이 찍혀져 있다. 흥동학교는 동창학교-일신학교를 잇는 민족 교육기관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처음 동창학교에서 등사본으로 완성하여 교육 용교재로 사용하던 책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 책은 서론 끝부분의 “檀君大皇 祖降世四千三百六十八年(1911)十月日著者 識”와 같이 1911년 10월에 완성한 사 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대종교의 사상과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창작해 냈다.”거나 “일반인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 교육 보조 자료”로 평 가받고 있다. 저술이 끝난 뒤에는 북부여, 단군, 고구려, 발해, 금나라까지 모두 우리의 역사라는 내용의 「역사가(歷史歌)」 1장(<사진 3>)이 첨부되어 있다.

ㅇ 합철된 『명림답부전』은 서론 끝의 “大皇祖降世四千三百六十八年(1911)九月日 著者 識”와 같이 『발해태조건국지』보다 한 달 앞선 1911년 9월에 완성되었다.

박은식이 상무적인 고구려의 많은 인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애국충신으로 명림 답부(67~179)를 선정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혈투하는 모습을 통하여 한국민의 애국심을 함양시키고자 저술한 전기이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7대 차대왕을 제거 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를 신대왕으로 모신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최초의 국 상이었고, 뛰어난 지략으로 한나라 대군을 물리친 명장이기도 했다.

ㅇ 박은식은 명림답부를 서양의 크롬웰에 비견하였다. 내용은 목차(서론, 명림답부 의 출생지와 시대, 명림답부의 어린 시절, 조의대선의 지위, 차대왕의 역사, 대선 (大仙) 사무(師巫)의 선견지명, 수성의 왕위 찬탈, 대선 사무가 화를 당하다, 명 림답부의 활동, 관군과 민병의 충돌, 수성의 피살과 신대왕 즉위, 명림답부의 세 력과 정치, 명림답부의 무공, 결론)에서 보듯이 고구려 명장인 명림답부의 무용 담(武勇談)을 주로 담고 있다. <사진 2> 왼쪽과 같이 서명아래에는 “白庵 朴箕 貞 著」 檀崖 尹世復 閱”과 같이 박기정(박은식의 다른 이름)이 저술하고 윤세 복(1881~1960)이 교열하여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저술이 끝난 뒤에는 북부 여, 단군, 고구려, 발해, 금나라까지 모두 우리의 역사라는 내용의 「역사가(歷史 歌)」 1장이 첨부되어 있다.

ㅇ 내용은 정확하게 사료에 따른 것은 아니다. 곧 명림답부의 “청년기 선도(仙道) 수련 내용과 차대왕 시해의 종교 명분 역시 사료에는 없으나 저자가 상상력으 로 합리화”시켜 놓았다. 이렇게 저자는 “명림답부를 신교의 명맥을 이은 인물이 자 고구려 선교를 이끈 종교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신교 사수의 명분으로써 나라 를 구한 사실에 역점을 두어 애국명장의 본보기로 제시”한 것이다. 명림답부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당시 시대상황과 연관하여 구국구민이라는 목적을 위해 역 사적 인물에게 정당성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기타(참고 자료)

ㅇ 합철된 이 책은 소장자가 1984-5년경 계명대 교수시절에 대구의 서점에서 구입 하였다고 하며, 2001년에 처음 공개하였다. 책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나 저급의 양지에 인쇄된 탓에 산화가 이미 진행되고 있으므로 적절한 보존대책이 요구된다.

4) 문헌자료

ㅇ 김도형, “1910년대 朴殷植의 사상 변화와 歷史認識 : 새로 발굴된 자료를 중심으 로”, 『동방학지』 제114집 (2001. 12), pp.253-273.

ㅇ 임상선, “朴殷植의 『渤海太祖建國誌』의 검토 ”, 『韓國史學史學報』 제10권(

2004), pp.69-92.

(26)

ㅇ 조준희, “박은식의 서간도 망명기 저술 소고”, 『仙道文化』 제14집(2013.2), pp.

315-360.

ㅇ 정호섭, “白巖 朴殷植의 고구려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학보』 제 54호(2014.2), pp.33-66.

<사진 1> 『발해태조건국지』 표지와 권수제면

<사진 2> 『명림답부전』 표지와 권수제면

(27)

<사진 3> 역사가(歷史歌)

5)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박은식이 1911년 한국역사를 만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저술한 『발해태조건국 지』와 『명림답부전』는 한국근대사학사와 한국독립운동사 분야의 매우 중요 한 문헌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사가들의 고구려·발해 인식을 가장 명료하 게 보여주는 대표적 저술이라고 하겠다. 또 「興東學校」라는 장서인으로 보아 초기에 교육용교재로 사용하던 책이라는 사실도 확인된다.

ㅇ 합철된 두 책은 별도의 책이지만 장서인이 위의 책에만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발행초기부터 합철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저자에 의해 동일한 장소 와 시기에 완성 발행되어, 민족교육기관의 교재로 사용되었던 만큼 합철된 상태 그대로 『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이라는 명칭으로 등록하여 보존하는 것 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6) 종합의견

ㅇ 『발해태조건국지․명림답부전』이라는 명칭으로 등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됨

<ㅇㅇㅇ 전문위원>

1) 현상

ㅇ 이 책은 등사본으로서 발해건국사를 기술한 『발해태조건국지』와 고구려 명림 답부의 전기인 『명림답부전』의 합철본이다. 책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 나 종이의 지질인 양지(갱지)이기 때문에 산성화로 인해 적절한 보존대책이 요 구됨.

2) 내용 및 특징

ㅇ 첫째,『발해태조건국지』는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을 맡기도 한 박 은식(朴殷植, 1859~1925)이 1911년에 서간도 환인현(桓仁縣) 홍도천에 있던 윤세 복(尹世復)의 집에서 저술한 저작의 하나이다. 그의 호는 백암(白庵)이고, 이명 (異名)은 인식(仁植), 기정(箕貞) 등이다. 내용은 목차(서론, 발해 이전의 고구려

(28)

말운, 태조의 가계와 인격, 고구려 유민의 생기, 영웅의 은둔, 활동시기, 천문령 의 대승첩, 태조의 건국, 발해의 강역, 발해의 종교와 풍속, 발해의 문학, 태조의 외교, 태조의 후손, 결론)에서 보듯이 고구려 멸망 이후 대조영이 그 유민을 이 끌고 발해를 건국한 과정과 영토, 문물, 종교, 풍속, 문학, 외교, 후손 등을 다루 고 있다. 서명아래에는 “白庵 朴箕貞 著」 檀崖 尹世復 閱”과 같이 이 책은 박 기정이 저술하고 윤세복(1881~1960)이 교열하여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기 정은 박은식의 다른 이름이다. 이 책의 앞표지 우측 상부에는 「興東學校」라는 인장(印章)이 찍혀져 있다.

ㅇ 둘째, 『명림답부전』은 박은식이 상무적인 고구려의 많은 인물 중에서도 대표 적인 애국충신으로 명림답부(67~179)를 선정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혈투하는 모습을 통하여 한국민의 애국심을 함양시키고자 저술한 전기이다. 이 책은 서론 끝의 “大皇祖降世四千三百六十八年(1911)九月日著者 識”와 같이 1911년 9월에 완성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술이 끝난 뒤에는 북부여, 단군, 고구려, 발해, 금 나라까지 모두 우리의 역사라는 내용의 「역사가(歷史歌)」 1장이 첨부되어 있다.

3) 문헌자료

ㅇ 김도형, “1910년대 朴殷植의 사상 변화와 歷史認識 : 새로 발굴된 자료를 중심으 로”, 동방학지 제114집 (2001. 12), pp.253-273.

ㅇ 임상선, “朴殷植의 『渤海太祖建國誌』의 검토 ”, 韓國史學史學報 제10권(2004), pp.69-92.

ㅇ 조준희, “박은식의 서간도 망명기 저술 소고”, 仙道文化 제14집(2013.2), pp.

315-360.

4) 기타

ㅇ 이 『발해태조건국지 ․ 명림답부전』(渤海太祖建國誌․明臨答夫傳)은 소장자가 1984-5년경 계명대 교수시절에 대구의 서점에서 구입하였다고 하며, 『명림답부 전』과 함께 2001년에 처음 공개되었다.

5) 등록 가치 및 근거기준

ㅇ 박은식이 1911년 한국역사를 만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저술한 『발해태조건국 지』와『명림답부전』의 합철본 『발해태조건국지 ․ 명림답부전』(渤海太祖建 國誌․明臨答夫傳)은 한국근대사학사와 한국독립운동사 분야의 매우 중요한 문 헌으로 평가된다.

ㅇ 따라서 『발해태조건국지 ․ 명림답부전』(渤海太祖建國誌․明臨答夫傳)은 근대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6) 종합의견

ㅇ 근대등록문화재로 등록이 가함.

<ㅇㅇㅇ 교수>

1) 현상

ㅇ 전후 표지가 완전한 상태이나 제본 상태가 불량함 2) 내용 및 특징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ㅇ 이 책은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이 발해를 건국한 태조 대조영(大祚 榮)의 영웅적 사실을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서 민족혼을 고취시키어 굳건 한 역사관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저술한 계몽적 교육용 역사교재이다.

(29)

ㅇ 권수의 서론 말미에 ‘檀君大皇祖降世4368年(1911)十月日著者 識’라는 연기(年紀) 로 보아 1911년 10월에 저술을 완성하고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림답 부전>을 완성한 지 1달 뒤의 일로 이러한 계몽적 역사교재류가 연속적으로 저 술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술이 끝난 뒤에는 북부여, 단군, 고구려, 발해, 금나라까지 모두 우리의 역사라는 내용의 「역사가(歷史歌)」 1장이 첨부되어 있다.

ㅇ 이 책의 앞표지 우측 상부에는 「興東學校」라는 인장(印章)이 날인되어 있다.

이 흥동학교는 동창학교-일신학교를 잇는 민족 교육기관으로 흥동학교 시절에 등사본으로 완성하여 교육용으로 사용하였던 역사 교재이다.

ㅇ 이 책의 성격에 대해서는 대종교의 사상과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해 창작해 냈 다거나 또는 일반인이 아닌 학생들을 위한 교육 보조 자료 정도로 낮게 평가받 고 있으나, 이 책은 저자의 성향과 저술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민족혼을 고취하여 일제에 대항할 의도에서 저술하여 학습 교재로 사용되었다.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ㅇ 이 책은 박은식이 상무적인 고구려의 많은 인물 중에서도 대표적인 애국충신으 로 명림답부(67~179?)의 전기 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저술 당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그가 혈투하는 장면으로 묘사 서술하여 우리 국민들의 민족혼을 함양시 키고자 저술한 역사 교재이다.

ㅇ 명림답부는 고구려 7대 차대왕을 제거하고, 차대왕의 아우 백고를 신대왕으로 모신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었고, 뛰어난 지략으로 한나라 대군 을 물리친 명장이기도 했다. 저자 박은식은 명림답부를 영국을 내전에서 구한 크롬웰에 비유할 정도로 영웅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ㅇ 내용은 목차(서론, 명림답부의 출생지와 시대, 명림답부의 어린 시절, 조의대선 의 지위, 차대왕의 역사, 대선(大仙) 사무(師巫)의 선견지명, 수성의 왕위 찬탈, 대선 사무가 화를 당하다, 명림답부의 활동, 관군과 민병의 충돌, 수성의 피살과 신대왕 즉위, 명림답부의 세력과 정치, 명림답부의 무공, 결론)에서 보듯이 고구 려 명장인 명림답부의 무용담(武勇談)을 주로 담고 있다.

ㅇ 이상 2종의 역사자료는 박은식이 1910년 경술국치 후 대종교를 통하여 국민들 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조국독립을 성취할 의도로 저술하여 교재용으로 보급하였다. 그는 윤세복(尹世復) 등과 1911년 2월에 망명지인 서간도의 환인현 서문 안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여 대종교 포교와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때 <발해태조건국지> 등 여러 종류의 교육용 교재도 등사본으로 간 행하여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후 동창학교가 폐교되자 교사이던 김규 환, 김광제 등이 1915년 6월에 흥경(興京)의 동로홍묘자(東路紅廟子)에 일신학교 (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였는데 이듬해인 1916년에 일신학교는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명되었다. 따라서 이 2종의 자료는 이 무렵 흥동학교에 서 교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3) 문헌자료

ㅇ 김도형, “1910년대 朴殷植의 사상 변화와 歷史認識 : 새로 발굴된 자료를 중심으 로”, 동방학지 제114집 (2001. 12), pp.253-273.

ㅇ 조준희, “박은식의 서간도 망명기 저술 소고”, 仙道文化 제14집(2013.2), pp.

315-360.

(30)

ㅇ 정호섭, “白巖 朴殷植의 고구려사 서술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학보 제54호 (2014.2), pp.33-66.

4) 기타

ㅇ 상기 <발해태조건국지>와 <명림답부전> 2종은 구한말 민족 자강운동을 전개한 박은식이 1911년 우리 국민들의 민족혼을 고취시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목적 으로 저술하여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였던 역사자료이다.

ㅇ 이 2종의 자료는 일제 강점기 민족주의 사가들의 고구려·발해 인식을 가장 명료 하게 보여주는 매우 희귀한 역사자료로 근대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므로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다.

ㅇ 다만 이 2종의 자료가 한 책으로 합철(合綴)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이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1건으로 취급하여 등록한다.

5) 종합의견

ㅇ 근대 역사자료로 귀중한 가치가 있고 희귀한 자료이므로 등록문화재로 등록 관리할 필요가 있음

(31)

안건번호 근대 2016-05-03

3.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문화재 등록

가. 제안사항

ㅇ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을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부의하오 니 심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 제안사유

ㅇ 문화재위원회 등록 검토(‘16.7.26.)를 거쳐 등록예고(’16.8.22.∼’16.9.20.)된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에 대하여 문화재 등록 여부를 심의하기 위함

다. 주요내용

(1) 신 청 인 : 공군사관학교, 공군제15특수임무비행단 (2) 대상문화재

유물명 수량 규 격 제작년대 재질 소유자 소 재 지 비고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

2대

기장(세로)9.8×기 폭(가로)11.3×기

고(높이)4.2(m)

1940년대

추정 금속재 공군참모총장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일면 단재로 635 공군 사관학교 공군박 물관

복좌형

서울특별시 용산 구 이태원로 29 전쟁기념관

단좌형

(3) 등록예고

ㅇ 예고기간 : ’16. 8. 22. ∼ ‘16. 9. 20.(30일간) ㅇ 예고결과 : 의견 없음

(4) 심의내용 : 문화재 등록 심의

라. 검토의견(관계전문가)

<관계전문가 현지조사(’16.6.13., 6.20.)>

ㅇ ㅇㅇㅇ 위원

- 공군박물관 소재 ‘F-51D’ 무스탕과 전쟁기념관 소재 ‘F-51D’ 무스탕은 6.25

발발직후 도입된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기로서 등록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32)

ㅇ ㅇㅇㅇ 박사

- 공군에서 등록 신청한 F-51D 무스탕 (복좌형, 단좌형)은 사료적 가치는 물 론 소유자의 활용의지가 높아 향후 대한민국 근대사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넓히고 관심을 유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됨에 따 라, 이에 등록문화재로 등록함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ㅇ ㅇㅇㅇ 박사

- 전쟁기념관과 공군박물관에 각각 전시되어 있는 F-51D 무스탕 항공기는 역 사적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로 등록하여 보존 상태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마. 의결사항 ㅇ 원안가결

ㅇ 출석 7명, 원안가결 7명

붙임 : 「대한민국 최초 운용 전투기(F-51D 무스탕)」조사보고서 1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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