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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비판적 생철학’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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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910-20년대 초기 저작을 중심으로

하 선 규*

1)

Ⅰ. 들어가는 말

Ⅱ. 1910-20년대 초기 저작에 나타난 삶에 대한 성찰

1. 「현재의 종교성에 대한 대화」(1912)와 「대학생의 삶」(1914) 2.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

3. 「횔덜린」(1917)과 「철학 프로그램」(1918)

Ⅲ. 나오는 말: 생철학적 사유와 철학적 진리의 객관성

철학과 삶은 하나의 숙명을 공유한다.

온전한 전체가 되지 못하거나, 그냥 지나가 버리는 숙명을.

-헤르만 슈미츠

*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이 논문은 한국미학예술학회 2020년 봄 정기학술대회 기획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한 것이며, 2019학년도 홍익대학교 학술연구진흥비에 의하여 지원되 었음.

* DOI http://dx.doi.org/10.17527/JASA.6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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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벤야민의 ‘생철학(Lebensphilosophie)’을 얘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또

‘비판적 생철학’은 어떤 의미이며, 벤야민의 사유에서 ‘비판적 생철학’을 논의할 수 있는가? 먼저 ‘생철학’ 자체의 어려움에서 시작해보자. ‘생철학’은 일단, 생명(체)에 대한, 특히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뜻한다. 하지만 철학 자체가 인간 삶이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 혹은 카시러의 말로 하자면 여러 문화적 상징형식들 가운데 하나인데, 철학이 어떻게 생명과 삶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객관적으로 고찰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삶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이라면, 그것은 애초부터 언어와 개념의 손길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생철학은 통상, 19세기 후반 독일(Wilhelm Dilthey, 1833-1911)과 프랑스(Henri Bergson, 1856-1941)에서 등장하여 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된 현대 철학의 한 사조를 가리킨다.1) 하지만 니체는 물론,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키에르케고어와 쇼펜하우 어도 각기 독자적인 생철학을 펼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학에서 처음 정기적으로 ‘인간학’을 강의한 것은 칸트였고, ‘생철학’이란 이름의 강좌를 처음 개설한 이는 낭만주의 사상가 Fr. 슐레겔(Friedrich Schlegel, 1772-1829)이었다.

나아가 만약 생철학을 인간 삶의 조건과 의미에 관한 이론적 성찰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넓게 이해한다면, 소크라테스부터 들뢰즈까지 서구의 모든 사상가들을 생철 학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세 번째 난점은 철학적 성찰의 전제 내지 방법론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생명과 삶에 대한 모든 철학적 성찰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삶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이해(원리)’ 또는 ‘접근 방식’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며, 삶의 현상들에 어떻게 접근하려 하는가에 따라, 생철학의 내용과

1) Joachim Ritter & Karlfried Gründer (ed.),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5 (Basel/Stuttgart: Schwabe 1980), Sp. 135-137. 오늘날에도 영미권에서는

‘philosophy of life’라는 표현 대신 독일어를 그대로 쓰는 일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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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는 현저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벤야민의 생철학’을 얘기하는 것은 더더욱 의심스럽고 난망해 보인다.

벤야민이야말로 당대 생철학을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비판한 사상가가 아닌가?

그는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2)의 도입부에서 당대의 몇 몇 생철학적 흐름을 강하게 질타한다. 그가 보기에 생철학적 흐름은 현대 자본주의 대중사회의 실상을 부인하거나 경시하면서 이른바 “참된 경험”을 확보하려 한 ‘반역사적이며 시대착오적인’ 시도이다(선집 4, p. 181). 또한 벤야민은 어디서도 자신의 철학적 사유와 비평 작업에 대해서 ‘생철학’이란 표현을 쓴 적이 없다.3)

그럼에도 필자는 이 글에서 벤야민의 1910-20년대의 초기 저술을 중심으로 그의 생철학적 사유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다른 중요한 근현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벤야민의 철학도 또한 생의 위기와 가능성, 생의 자유와 표현에 대한 깊은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가 경험, 에로스, 시선, 사랑, 그리움, 놀이, 꿈, 기억, 수집 등을 섬세하게 성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째로, 삶에 대한 벤야민의 관찰과 분석은 단지 부차적인 단상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사유의 세 가지 중심 영역인 ‘언어철학, ‘역사철학’, ‘예술철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사는 개인적 및 집단적 삶의 기억과 직접 연관된 문제이고, 예술은 삶의 역사적, 사회정치적, 문화적 조건들 및 표현들이 교차하고 영향을 주고 받는 독자적인 언어-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와 예술에 관한 벤야민의 성찰은 이미, 항상 그의 ‘잠재된’ 생철학과 내밀하게 얽혀있다. 셋째로, 벤야민의 생철학적 2) 벤야민의 저작은 번역본이 있는 경우, 번역본 권수와 쪽수로 인용한다. 번역은 기본적 으로 선집을 따르되 일부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그 외 독일어 전집은 약칭(GS), 권수, 쪽수로 인용한다. 또한 글의 제목도 관례에 따라 ― 예를 들어, 「기술적 복제 가능성 시대의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으로 ― 약칭한다. 자세한 서지는 참고문헌을 볼 것.

3) 벤야민 사상을 관류하는 23가지 개념들에 대한 독립된 논고를 모아놓은 벤야민의 개념들에도 ‘생’ 개념은 빠져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논고들 가운데는 ― 특히 ‘경험’,

‘기억’, ‘역사’, ‘언어’, ‘구제’, ‘신학’에 관한 논고들 ― 내용적으로 벤야민의 생철학과 연관된 것들이 적지 않다 (Michael Opitz & Erdmut Wizisla [ed.], Benjamins Begriffe. 2 Bände [Frankfurt a.M.: Suhrkamp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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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현대의 철학적 인간학은 물론, 예술과 감성에 관한 미학적 사유와 관련해서도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글 제목의 ‘비판적 생철학’이란 용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필자가 ‘비판적’이란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방금 언급했듯, 벤야 민이 당대 생철학적 흐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은 동시에 칸트적 ‘이성비판’을 ‘살아있는 정신의 역사적-해석학적 비판’으로 변형, 확장시킨 슐레겔적인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4) 벤야민의 ‘잠재된’ 생철학은 생철학의 가능성의 조건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이러한 가능성의 조건을 ‘정신의 구체적인 역사적 삶’과 연결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정신의 역사적 ‘삶의 구제’, 곧 정신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구제하려는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 이 지향을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들의 형상과 의미를 가능한 명확히 그려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Ⅱ. 1910-20년대 초기 저작에 나타난 삶에 대한 성찰

1. 「현재의 종교성에 대한 대화」(1912)와 「대학생의 삶」(1914)

먼저 벤야민이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서 쓴 두 개의 글 「현재의 종교성에 대한 대화」(1912, 이하 「종교성」)와 「대학생의 삶」(1914, 이하 「대학생」)을 보자.

우리는 이 글들에서 이후 벤야민 사유를 관류하게 될 몇 가지 중요한 모티브를 관찰할 수 있는데, 이들 모티브는 넓은 의미의 생철학적 성찰에 포함시킬 만하다.

「종교성」(GS II/1 16-35)은 ‘나’와 ‘친구’ 사이의 가상적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어 플라톤의 대화편 내지 슐레겔의 「시에 관한 대화」5)를 떠올리게 한다. 내용

4) Friedrich Schlegel, Schriften zur kritischen Philosophie(1795-1805), ed. Andreas Arndt & Jure Zovko (Hamburg: Meiner 2007) (DOI: 10.28937/978-3-7873-2105-6), pp. XXVIII-XX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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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벤야민이 두 화자를 통해 일련의 사상적 관점들을 극명하게 대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vs. 우리를 위한 예술, 종교로서의 사회주의 vs. 형이상학적 종교, 심미적 인생관 vs. 인륜적 삶, 자연의 왕국 vs.

자유의 왕국, 희망 없는 사변들 vs. 칸트적 실천이성에 근거한 새로운 종교 등이 그것이다.6) 이러한 대립된 관점들을 바탕으로 한 논의에서 첫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종교적 차원과 형이상학을 분명하게 긍정하는 관점이다. 20세기 현대사회에서 종교적 앎(확신)의 위상은 모든 생기를 잃은 ‘습관적 사실’로 축소되었지만, 그럼 에도 벤야민은 종교적 구원과 형이상학적 진지함을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벤야민이 종교적 차원과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벤야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가 ‘친구’의 신비주의, 데카당스, 일원론 등을 “희망 없는 사변들”로 일갈하고, 입센이나 하우 프트만과 같은 중요한 문필가들이 시대의 ‘사회적 타성과 관습’을 혁파하려는 ‘종 교적 의지’를 표현한다고 평가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GS II/1 28-29) 세 번째로 지적해야 할 것은 벤야민이 진화와 진보의 환상에 사로잡힌 시대의 ‘곤궁함’을 비판하면서도, “후손을 잉태하고 있는 이 시대가 결국 새로운 인간을 찾게 될 것”(GS II/1 34)이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한다는 점이다. 물론 벤야민은 ‘새로운 인간’이 어떤 모습일 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예견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익숙한 모 습의 인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을 냉철하고 담 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벤야민은 「대학생」(GS II/1 75-87)에서도 두 가지 사상적 관점을 선명하게 대립시킨다. 그런데 이번엔 예술이나 종교가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5) Fr. Schlegel, “Gespräch über die Poesis”(1800), in: Kritische und theoretische Schriften, ed. Andreas Huyssen (Stuttgart: Reclam 1984), pp. 165-224.

6) 여기서 더 논의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대립된 관점들을 병치시키는 것은 칸트, 라이 프니츠, 헤겔, 니체, 키에르케고어의 영향을 보여주며, 아울러 벤야민 특유의 ‘변증법적 사유’의 맹아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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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을 충돌시킨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역사를 생각할 때, ‘시간의 무한함’을 신 뢰한 상태에서 단지 ‘진보의 궤도’ 위를 굴러가고 있는 인간과 시대들의 속도만을 구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관에는 “현재를 향해 제기되어야만 하는 요청 들과 관련된 정교함과 엄정함이 결여”되어 있다. 다른 편의 역사관은 ― 이것이 벤야민이 지향하는 관점인데 ― “[전체] 역사가, 마치 하나의 초점에 집결되어 있는 듯, 머물고 있는 어떤 특정한 상태를 지향한다. 이 상태는 예로부터 사상가들이 제시한 유토피아적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역사의 구원이 실현되는 유토 피아적 상태는 단지 저 먼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최종적 상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최종적 상태의 요소들은 […]

가장 위험에 처해 있고, 가장 나쁘게 평가되어 비웃음거리가 된 창조물들이자 사상들로서 모든 현재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 이로부터 벤야민은 “역사적 과제”, 곧 역사 인식이 추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도출한다. 그것은 “현재 안에서 완전성의 내재적 상태를 순수하게 절대적인 상태로 구체화시키는 일, 현재 속에서 이 절대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지배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GS II/1 75).

「종교성」에서 강조한 ‘형이상학’ 개념을 이어받으면서, 벤야민은 역사 인식의 과제를

“현재적 상태를 그 형이상학적 구조에서 파악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 과제를 곧바로 ‘철학적 비평’과 연결시킨다. 철학적 비평의 목표는 다름 아니라

“기형적인 형태로 현재 속에 들어있는 미래적인 것을 인식하고, 바로 이 형태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GS II/1 75, 87).

여기서 청년 벤야민의 열정적인 논변을 세밀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세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짚어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첫째, 벤야민은 이미 「대학생」에서 동질적인 시간의 진행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 이해를 분명하게 거부한다. 둘째, 역사에 대한 진정한 ‘철학적’ 인식은 역사의 궁극적인 유토피아적 지향점(구원)을 반드시 함께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지향점(구원)은, “하나의 초점에 집결되어 있는 듯”과 “형이상학적 구조”란 문구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역사(현세적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초월적으로, 더 정확히는 ‘종말론적 (Eschatologie)’7)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의 ‘종말’, 역사 전체의 의미가 실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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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은 실제 역사의 진행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벤야민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위한, 현재에 직접 개입하는 인식을 각별히 중시 한다. 왜냐하면 모든 현재 속에는 유토피아적 지향점을 형성하는 “창조물들과 사상들”이 묻혀 있으며, 이들의 본 모습을 찾아내고 그 비판적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바로 현재에 개입하고, 현재를 혁신하는 실천적 인식이기 때문이다.8)

「대학생」은 이어 대학생의 삶이 ‘의식된 통일성’이 될 수 없는 상황, 즉 “인식 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당시 대학의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대학생들은 자유로운 학자들과 문필가들의 “창조적인 정신적 삶”(GS II/1 80)에서 배제되어 있으며, 대학은 사실상 “직업학교”로 전락했다. 대학이 형성해야 할

‘창조적 정신’은 사라지고 “직업정신”(GS II/1 81)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근본 정조는 ‘무관심과 순종’이다.(GS II/1 76-77) 또한 대학생들이 시도하는 ‘사회적 작업’, 곧 공동체의 교양과 복지를 위한 실천적 활동 들도 “전적으로 파편적이며 파생적인 것”(GS II/1 78) 내지는 “노동자와 민중의 마음을 향한 유치한 감정이입”(GS II/1 79)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벤야민은 대학생들이 ‘인식하는 자들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 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대학 안에는 ‘급진적인 의심, 근본적인 비판, 완벽하게 새로운 삶의 건설’(GS II/1 80)에 매진할 수 있는 “창조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때 철학이 이 공동체의 형성을 이끌어가는 중추적 학문의 역할을 해야 한다(GS II/1 82). 슐레겔이 주창한 “공동으로 철학하기 7) 종말론의 개념사에 대해선, J. Ritter & K. Gründer (ed.),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2 (Basel/Stuttgart: Schwabe 1972), Sp. 740-742. 또한 Karl Löwith, Weltgeschichte und Heilsgeschehen, 8. Aufl. (Stuttgart u.a: Kohlhammer 1990) (DOI: 10.1007/978-3-476-03166-2_2), pp. 11-16 참조. 벤야민의 인간학적 유물 론과 역사 인식에 대해선, Burkhardt Lindner, “Anthropologischer Materialismus, Geschichts-Zeit und ‘Jetzt der Erkennbarkeit’”, in: Burkhardt Lindner: Studien zu Benjamin, ed. Jessica Nitsche & Nadine Werner Nadine (Berlin: Kadmos 2016). pp.

23-43.

8) 이 세 가지 특징은 「신학적․정치적 단편」(1921, 선집 5, pp. 129-131)을 거쳐, 미완성 유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선집 5, pp. 329-350)에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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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ilosophieren)”9)의 에토스를 계승하는 듯, 벤야민은 ‘순수한 학문의 이념’을 지향하는 대학생들이 “위대한 철학적 전통의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궁구하면서

“철학적 공동체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문학과 예술이 제시하는 새로운 이념들을 철학적 관점에 의한 학문적 문제들로 전환시키는 “위대한 변압기”가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보다 더 심오한 삶이 직업과 가장 심층적으로 결합”(GS II/1 82)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의 비판적 성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벤야민은 대학생들의 “창조 하는 삶의 중심”을 왜곡시키는 또 다른 문제점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애적 관습”이다.(GS II/1 83) 벤야민은 ‘창조하는 것(정신적 삶)’과 ‘산출하는 것(무의식적, 충동적 삶)’의 통일이 “가족이란 형태 안에 주어져 있는지, 주어져 있지 않은지”(GS II/1 83)를 묻는다. 왜냐하면 대학생은 ― 가족과 달리 ― 인식하는 자이면서 산출 하는 자로서 “창조하는 자들의 에로스”를 향해 분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에서는 “산출하는 에로스를 창조하는 에로스의 아래에” 두었고,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의 왕국”을 정립하면서 두 에로스의 개별성과 각각의 고유한 의미를 모두 폐기하였다. 벤야민은 이제 대학생들은 에로스에 대해 ‘심미적(낭만적)인 고찰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대중화된 매춘으로 인해 ― 아울러 암묵적으로 ‘창조적 공동체’로부터 여성을 배제하였기에 ― “에로스가 중성화(Neutralisierung)”되었다고 비판한다.10) 벤야민은 “정신적 삶에서 출발하여 [두 에로스의] 통일을 이루는 일”의 어려움을 거듭 강조하고, ‘고독과 위대함’에 열려 있는 대학생들의 ‘우정’과 ‘실천적 용기’를 촉구하면서 글을 맺는다.11)

9) Friedrich Schlegel, “Athenäum Fragmente”(1798), 단편 112, 125, 220, 264, in: 문학적 절대, ed. Philippe Lacoue-Labarthe & Jean-Luc Nancy, 홍사현 옮김 (그린비 2015), p. 165, p. 170, pp. 191-192, p. 203.

10) 여기서 더 논의할 수는 없지만, 벤야민은 초기부터 매춘과 창녀의 ‘인륜적이며 정신적인’

의미를 깊이 성찰하였으며 한 편지에서는 “정신적인 것의 성별화(性別化)”가 요구된다는

― 하만과 키에르케고어를 연상시키는 ―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GB 1, 127-128).

11) 초기 벤야민의 사유가 형성된 시기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선, Uwe Steiner, Walter Benjamin (Stuttgart: Metzler 2004) (DOI: 10.1007/978-3-476-05073-1), pp. 2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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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살펴본 「대학생」의 논의를 생철학적 시각에서 음미해보자. 가장 먼저 삶의 ‘정신적 차원’ 혹은 자유로운 인식과 창조적인 정신을 중시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벤야민은 분명 낭만주의와 니체의 충실한 후계자로 보인다.

특히 대학이 순수한 학문의 이념을 저버리고 직업학교로 전락한 것, 생산적인 의심과 비판 대신 무관심과 순종이 만연한 상황을 질타하는 모습은 금방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12)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니체와의 차이점도 분명하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구조’와 ‘종교적 차원과 종말론적 사유’를 긍정하는 데서 명확히 드러 난다. 니체와 달리 벤야민은 현대의 철학적 사유와 비평도 ‘위대한 철학적 전통의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주목하고 시대적 상황에 상응하는 이론적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고 본다. 시간과 역사에 대한 시각도 니체와 다르다. 인간을 시간적이며 역사 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 ‘현재’를 각별히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는 니체와 상통하는 듯하지만, 현재가 항상 ‘최종적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현재가 유토피아적 구원의 함의를 내포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다음으로 인상적인 것은 정신적 삶을 역사적, 사회정치적, 사상적 조건들과 긴밀하게 연결시켜 사유한다는 점이다. 정신적 삶은 독자적인 차원이지만 결코 고립된 영역이 아니다. 철학적 사유와 비평은 정신적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여러 상황, 전통,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넘어서야 한다.13)

12) Friedrich Nietzsche, Unzeitgemäße Betrachtungen(1873-1876), in: 비극의 탄생/반시 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특히 pp. 183-200, pp. 396-422 볼 것. 초기 벤야민과 니체의 연관성에 대해선, H. Pfotenhauer, “Benjamin und Nietzsche”, in:

Walter Benjamin im Kontext, ed. Burkhardt Lindner, Frankfurt a.M.: Syndikat 1978, pp. 100-126, 특히 pp. 100-111 참조.

13) 벤야민이 1920년대 후반 이후 경험의 역사적, 기술적, 문명사적, 매체적 조건들을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것은 여기에 그 단초가 있다고 보인다. 이러한 벤야민 특유의

‘유물론적’ 경향은 일방통행로, 「초현실주의」, 「사진」, 「생산자」, 「예술작품」, 「푹스」

등을 거쳐 특히 「보들레르」 에세이에 이르면 정교한 이론적 성취를 보여주게 된다 (선집 4, pp. 177-250). 보들레르 에세이에 대한 상세한 주해로는 Wolfgang Bock, Vom Blickwispern der Dinge. Sprache, Erinnerung und Ästhetik bei Wal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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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벤야민이 마음과 육체, 정신적 삶과 충동적 삶의 관계를 진지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두 삶의 통일을 하나의 ‘과제’로서 요청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통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논의 전개로 볼 때, 그가 두 삶의 통일이 ‘역사적 인식 (구원)’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둘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정신적 삶’을 바탕으로 시도되어야 할 과제로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충동적 삶이 어떤 인륜적이며 사회정치적 의미가 있으며, 이 의미가 정신적 삶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깊이 성찰하면서, 두 삶의 통일이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

「언어철학」 논고(GS II/1 140-157, 선집6 71-95)는 벤야민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논고는 「부버에게 보낸 편지」(1916), 그리고 30년대의

「유사성론」(1933), 「미메시스 능력」(1933)과 함께 벤야민 언어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14) 우리는 통상 ‘언어’라는 말을 들으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어를 생각 하고, 언어의 본질을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소통 수단’ 혹은 어떤 ‘복합적인 구조’ 같은 것으로 여긴다. 벤야민의 시각은 이러한 통념과 확연히 구별된다. 그는 언어의 기능이나 구조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가 스스로, 그 자체로서 전달하는 ‘정 신적 본질’에 주목한다.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하는 정신적 본질을 전달한다. 이 정신적 본질이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 핵심이다”(선집 6, p. 73). “모든 언어는 자기 자신을 전달한다” (

선집, 6 p. 74, 강조는 벤야민) “자기 자신을 전달한다”는 말은 모호하고 부조리하

Benjamin, Würzburg: Königshausen & Neumann 2010, pp. 8-108 볼 것.

14) 「언어철학」 논고의 주요 내용에 대해선, 최문규, 파편과 형세: 발터 벤야민의 미학, 서강대출판부 2012, pp. 107-128 볼 것. 또한 오형엽,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 고찰 - 미메시스 개념을 중심으로」, 어문연구 61권, 2009, pp. 479-505 (DOI: 10.17297/rsll.2 009.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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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들린다. 하지만 이 부조리함 속에 벤야민 언어철학의 핵심이 들어있다. ‘자기 자신’은 하나의 언어가 전체로서, 그 자체로서 드러내는 ‘정신적 본질’을 가리킨다.

정신적 본질은 어떤 언어적 표현을 통해 전달되는 개별 내용(message)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가 독립된 ‘형식(매체)’로서 현실화시킬 수 있는 ‘의미의 지평 전체’ 또는 하나의 언어가 독자적인 표현형식으로서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이며 정신적인 의미 일반’을 가리킨다. 벤야민은 이러한 의미를 ‘전달 가능한 것’ 혹은

‘전달 가능성 자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언어가 독립적으로 자기 자신의 본질 (혹은 정신적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언어 마법’이라 칭한다. 언어 마법은 결코, 어떤 신비주의적이며 초월적인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언어의 ― 언어에는 자연어뿐만 아니라 ‘사물’의 언어와 ‘예술’의 언어도 속하는데

― ‘무한성’, 곧 언어가 지니고 있는 절대적인 ‘자족성’과 ‘자기-목적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는 언어 마법을 좀 더 세밀하게 이렇게 규정한다. “언어는 어떤 경우이든 전달 가능한 것의 전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전달 불가능한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선집 6, p. 95).

생철학의 관점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언어철학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떤 논점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 벤야민은 자신의 언어철학이 ‘형이 상학적’이며 ‘신학적인’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논의를 하만의 신학적 언어철학,15) <창세기>의 신의 말씀과 아담의 언어, 키에르케고어의 ‘수다 (Geschwätz)’,16) 즉 참된 언어의 타락에 관한 이론과 긴밀하게 연관 짓는 데서 잘 엿볼 수 있다. 언어는 “더 이상 환원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현실성”이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현실성으로서의 객관적이며 엄정한 타당성은 최종적으로는 종교적, 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종교성」과 15) 하만의 언어철학에 대해선, Johann Georg Hamann, Schriften zur Sprache, ed. Josef

Simon, Frankfurt a.M.: Suhrkamp 1967, pp. 3-37 볼 것.

16) Søren Kierkeggard, Zur Selbstüberprüfung der Gegenwart anbefohlen, in: Gesammte Werke, 27-29 Abt., hg. Emanuel Hirsch (Düsseldorf 1953), pp. 84-85 (선집 6, p.

90 각주 6에서 재인용). Arne Grøn, Begrebet Angst hos Søren Kierkegaard(1994),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 하선규 옮김 (도서출판 b 2016), pp. 270-27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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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과 마찬가지로, 벤야민이 삶의 ‘정신적 차원’을, 이 차원의 독자적인 의미를 중시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결코 동물적이며 생물 학적인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고, 이러한 차원으로 적절히 이해될 수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모든 사물들과의 “마법적 공동체”를 창립시키는 “생명이자 정신”

이다(선집 6, p. 82).17) 따라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정신적 삶이 표 출”된 모든 자연과 사물, 모든 문화적 산물들의 ‘언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자연 현상과 사물들은 물론, “기술, 예술, 법률, 종교”(선집6 71) 등 모든 사회적, 문화적 산물들 각각을 하나의 독자적인 ‘언어-표현(곧 독자적인 매체)’으로 보고, 그 ‘정신적 의미(본질, 내용)’를 가능한 명확히 해명해야 한다.18)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벤야민이 삶의 ‘정신적 차원’을 철저하게 역사 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정신적 차원은, 칸트의 선험적 원리처럼 변화하지 않는 존재론적 기초개념이 아니다. 반대로 정신적 차원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과정 속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이를 보여주는 논점이 바로 벤야민이 <창세기>를 논평하면서 제시하는 언어 본질의 변천 과정이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온전히 명명하는 아담의 ‘이름언어’에서 시작되었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이후 ‘선악을 판정하는 언어(“언어정신의 타락”)’로 변화되었고, 다시 무수히 많은 개별 언어들(기호적 언어) 19) 분화되어갔다(선집6 84-91). 만약 ‘판정하는 언어’를 사회적 규범이 정립된 역사적 공동체의 시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서술은 결국 언어의 역사적 변화(진화)과정에 대한 논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어 본질의 변화는 필연적

17) “인간의 언어가 갖는 탁월함은 그 언어가 사물들과 맺는 마법적 공동체가 비물질적이고 순수하게 정신적이라는 점이 음성이 바로 그것의 상징이다. 성서는 이 상징적 사실을 신이 인간에게 숨결(Odem)을 불어넣었다고 말하면서 증언해준다. 이 숨결은 생명이자 정신이고 또 언어이다 ”(선집 6, p. 82, 강조는 필자).

18) 「언어철학」 논고와 비애극서의 이념론과 알레고리론의 긴밀한 연관성에 대해선, 김 유동, 「“순수 언어”에 대한 기억 - 벤야민의 초기 언어논문의 관점에서 본 독일 비 애극의 원천」, 뷔히너와 현대문학 33권, 2009, pp. 265-293 볼 것.

19) 벤야민이 말하는 ‘기호적 언어’의 단계를(선집 6, pp. 90-92)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 하자면 ‘기표적 언어’ 혹은 ‘의사소통적 언어’ 정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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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언어정신”의 변화, 다시 말해 언어 속에서 표출되는 정신적 삶의 양상 변화를 수반한다. 이에 따라 특정 시대의 언어를 ― 가령 하나의 언어-표현(매체)으로서 특정 시대의 ‘예술형식’(선집 6, p. 94)을 ― 이해하는 일은, 이 언어 속에서 표출되고 있는 정신적 삶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독특한 모습과 내용을 보여주는가 를 구체적이며 엄밀하게 파악하는 작업이다.

세 번째로 흥미로운 지점은 “자연의 깊은 비애”(선집 6, p. 92)에 관한 논의 이다. 벤야민은 역사 시대의 개별 언어들의 단계에 들어오면서 “자연의 모습도 심각하게 변화한다.”고 말한다. “이제 자연의 또 다른 무언성이, 우리가 자연의 깊은 비애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무언성이 시작한다. 모든 자연은 언어가 부여되면 탄식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은 형이상학적 진실이다”(선집 6, p. 92). 벤야민은 자연의 무언성과 비애를 좀 더 명확히 이렇게 묘사한다. “자연은 말이 없으므로 슬퍼한다. 하지만 이 문장의 도치는 자연의 본질 속으로 더 깊이 이끈다. 즉 자연의 비애가 자연을 침묵케 한다. 모든 비애에는 말없음을 향한 매우 강렬한 경향이 내재한다”(선집 6, p. 93). 우리는 이 논의를 초기 니체를 상기시키는 삶의 근 원적인 비극성에 대한 논변, 즉 본래의 ‘자연(과의 합일)을 영원히 상실한 것’에 대한 언어철학적 해석으로 읽을 수 있다. 또는 계몽의 변증법20)의 문명사적이며 정신분석적인 ‘억압적 주체(형성)’ 이론을 선취하는 언어철학적 단상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철학」 논고에서 자연의 비애가 언어 본질의 역사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 따라서 자연의 비애가 인간 언어에게 불가피한 ‘역사적 가능성의 조건’이란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의 ‘창조하는 말씀’과 아담의

‘이름언어’와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의 언어는 사물들을 “피상적으로 지칭 (Überbenennung)”21)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렇게 덧붙인다. “피상적

20) Theodor W. Adorno & Max Horkheimer, Dialektik der Aufklärung(1944),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옮김(문지사 2011), 특히 오딧세이 단편(pp. 80-130)을 볼 것.

21) 최성만은 이 개념을 “과다명명”으로 번역하였으나. 여기서 접두사 ‘über-’는 ‘적정한 한계를 초과하는’의 의미라기보다는 ‘피상적’ 혹은 ‘표면적’(가령, 간과하다를 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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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칭은 모든 슬픔과 (사물의 측면에서 봤을 때) 모든 말없음의 심원한 언어적 근거이다. 슬픈 존재의 언어적 본질로서의 피상적 지칭은 언어의 또 다른 특이한 관계를 시사하는데,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 사이의 비극적 관계를 지배하는 피상적 지칭이 바로 그것이다”(선집 6, p. 93, 강조는 필자).

마지막 문장이 생철학적 관점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간은 언어 속 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언어 속에서 인식하고 소통하면서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좀 더 가까이 특정한 개별자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개별자는 ‘자신의 언어’ ― 침 묵을 포괄한 의미에서 ― 속에서 사물과 타인을 느끼고 인식하며, ‘자신의 언어’

속에서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고 타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면서 살아간다.

개별자의 정신적 삶의 한계는 그의 언어의 한계이다. 그런데 개별자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본질을 포착하는 ‘이름언어’가 아니라 ‘피상적으로 지칭’하는 언어이다.

이 때문에 개별자들의 언어 사이에 어떤 “비극적 관계”가 지배하게 된다. 즉 언어적 소통의 불확실성과 불완전성, ‘온전히 말하지 못함’과 ‘결코 말할 수 없음’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개별자들은 언어를 통해 소통하면서도 이미, 늘 서로의 언어 사이에 어떤 깊은 간극이 있음을 느낀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서 로의 언어 사이에 어떤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음을, 곧 “전달 불가능성”의 심연이 있음을 저 깊은 곳에서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별자들은 피상 적 지칭의 언어, 이 언어 속에서의 삶을 벗어나거나 회피할 수 없다. 인간은 언 어적 삶의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인간의 언어적 삶은 ‘비극적 관계’라는 근원적 한 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적 본질’이 전달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또

‘비극적 관계’를 완벽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의미 있게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은 언어적 삶에 분명하게 주어져 있다.22) 벤야민은 「언어철학」 논고에서 이 가능성을 열어주는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을 언급한다. ‘언어의 상호 번역가능

übersehen에서처럼)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 때문에 ‘피상적 지칭’

으로 번역하였다.

22) 자연의 깊은 비애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자연 속에 인간의 삶과 언어가 있는 것”이다 (선집 6, p. 92, 강조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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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집 6, p. 87)과 ‘전달 불가능성의 상징’(선집 6, p. 95)이 그것이다. ‘번역가 능성’은 모든 언어에 내재한 전달가능성의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고, ‘전달 불가능성의 상징’은 전달가능성과 분리되어 있거나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전달가능성과 암묵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간접적이며 암시적인 지 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23)

3. 「횔덜린」(1917)과 「철학 프로그램」(1918)

20대 중반의 벤야민은 「언어철학」 논고에서 인간의 ‘정신적 삶’을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토대로서 ‘언어’ 내지 ‘언어적 표현(매체)’

개념을 확고하게 정초하였다. 그의 언어 개념이 자연, 사물,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초 작업으로 이후 벤야민의 사유와 글쓰기를 이끌어가는 근본원리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벤야민은 곧 바로 언어철학적 성찰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두 편의 글을 발표한다.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두 편의 시」(1917, GS II/1 105-126, 이하 「횔덜린」)와 「도래하는 철학의 프로그램에 대하여」(1918, GS II/1 157-171, 이하 「철학 프로그램」)가 그것이다.

「횔덜린」에서 벤야민은 언어의 ‘정신적 본질’ 개념을 특정한 예술형식에 대한 철 학적 비평에 적용한다. 역사적 시인 횔덜린의 송가 두 편을 ‘미학적으로 주해’하면 서, 그는 ‘시작(詩作)된 것’과 ‘내적 형식’을 명확히 구별한다. ‘시작된 것’은 개별 시들의 표면에 직접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념적으로, ‘잠재적으로’ 지향 하고 있는 ‘시(형식)의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뜻한다. 반면, ‘내적 형식’은 괴테가 개별 시의 ‘실질적 내용(Gehalt)’이라 부른 것으로, 개별 시의 구체적인 시어들과 구성이 내재적으로 형성해내는 ‘조응과 통일’을 가리킨다.24) 벤야민에 따르면, 역사적 예술비평은 ‘시작된 것’과 ‘내적 형식’을 각각 명확히 파악해야 할 뿐만

23) 벤야민 언어철학의 전반적인 전개 과정과 핵심 논점들에 대해선, 최성만, 기억의 정 치학 (도서출판 길 2014), pp. 43-85 볼 것.

24) U. Steiner, Walter Benjamin, pp. 32-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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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이 둘 사이의 간극과 대립 속에서 일어나는 이중적이며 역설적인 운동도 엄밀하게 서술해야 한다.25) 우리는 ‘시작된 것’과 ‘내적 형식’이 언어철학의 맥락 에서 각각 ‘정신적 본질’과 ‘개별 언어들’에 상응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26)

한편, 「철학 프로그램」에서 벤야민은 당대 칸트 해석의 주류를 형성하던 신칸트학파의 편향성과 한계를 직감하고, 오히려 칸트철학의 ‘형이상학적 지향’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포괄적인 ‘경험’과 ‘인식’ 개념이 정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가올 철학의 과제는, 경험 개념도 함께 오로지 선험적 의식에 결부되는 가운데 기계적 경험뿐만 아니라 종교적 경험도 논리적으로 가능케 하는 인식의 개념을 찾아내거나 만들어내는 일로 파악될 수 있다”(선집 6, pp.

108-109).27) 벤야민은 모든 경험과 인식 가능성에 대한 ‘선험철학적’ 정당화라는 칸트의 기획을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수학적 인식과 과학적 인식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 차원을 긍정적으로 포괄하는 새로운 경험과 인식 개념을 정초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철학 프로그램」의

25) 「횔덜린」 논고에 대한 훌륭한 분석으로, 이용란, 「발터 벤야민의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 두 편: ‘시인의 용기’와 ‘수줍음’」에 나타난 “시화된 것”」, 미학 85권 2호, 2019, pp. 175-208 볼 것. 벤야민 비평 개념의 역사철학적 함의에 대한 발전사적 분석으로 는, 최성만, 「발터 벤야민의 ‘비평’ 개념」, 뷔히너와 현대문학 52권, 2019, pp.

181-216. 또한 벤야민 예술철학의 수용 개념을 현대적, 학제적으로 재해석한 성과로 는, 강수미, 「읽기와 먹기 : 벤야민 미학에서 학제적 의미의 ‘수용’」, 미학예술학연구

56집, 2019, pp. 35-66 (DOI: 10.17527/JASA.56.0.02) 볼 것.

26) 벤야민의 예술비평 개념에 대한 충실한 해설로, 최문규, 파편과 형세, pp. 219-253 참조.

27) 일반적으로 20세기 칸트 연구사에서 이른바 ‘형이상학적 칸트’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칸트 탄생 200주년이었던 1924년으로 본다. 이즈음에 M. 분트, H. 하임쇠트, G. 크뤼거 등이 칸트를 형이상학자로서 조명하는 뛰어난 연구 성과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Gerhard Funke, “Die Diskussion um die metaphysische Kant-Interpretation”, in: Kant-Studien, vol. 67 [1976], pp. 409-424 [DOI: 10.1515/kant.1976.67.1-4.409] 참조).

벤야민이 1918년에 이미 칸트철학의 ‘형이상학적 확장과 혁신’을 시도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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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부에서 벤야민은 이 정초 작업의 실마리를 다름 아닌 하만의 ‘신학적 언어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언한다. “인식의 언어적 본질에 대한 성찰에서 획득 되는 인식 개념은 그에 상응하는 경험 개념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 경험 개념은 칸트가 진실하고 체계적인 정돈을 이루어내지 못한 영역들도 포괄하게 될 것이다.

그 영역들 중 최상의 영역은 종교라 할 수 있다”(선집 6, pp. 114-115). 여기서 말하는 ‘영역들’은 「언어철학」 논고가 ‘정신적 삶’을 표출하는 영역으로 거론한 기술, 예술, 법률, 역사 등을 포함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벤야 민이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의 혁신이, 정신적 본질을 스스로 전달하는 ‘언어-표현 (매체)’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4. 「번역가의 과제」(1923)와 비애극서의 「인식비판 서론」(1928)

「횔덜린」의 예술비평론과 「철학 프로그램」의 새로운 경험과 인식 개념의 기획은 정신적 삶을 구제하려는 언어철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초기 저작 가운데 생철학적 성찰이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상세하게 등장하는 글은

「번역가의 과제」(GS I/1 207-237, 이하 「번역가」)이다. 벤야민은 이 글을 보들레르

악의 꽃 안의 「파리의 풍경」을 독일어로 번역, 출간하면서 그 서문으로 썼다.28) 그러나 「번역가」의 내용은 통상적인 서문의 의미를 확연히 넘어선다. 아니, 필자가 보기에 「번역가」는 ― 단지 ‘번역’에 대한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 문필가와 지식인의 삶의 철학, 문필가와 지식인의 ‘역사적 실존’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해명하고 정당화한 대단히 의미심장한 텍스트이다. 30대에 접어든 벤야민은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키에르케고어가 실존의 변증론의 목표로 언급한

‘투명한 의식(Durchsichtigkeit)’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즉 「번역가」에서 벤야민은 철학자이자 비평가로서,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역사적 개인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가는가를, 앞으로 어떤 정신적 삶의 ‘과제’에 도전하고 헌신하면서 살아야하 28) Burkhardt Lindner (ed.), Benjamin Handbuch. Leben - Werk - Wirkung (Stuttgart:

Metzler 2007), pp. 609-6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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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가를 스스로에게 명확하게 답변하고 있다. 여기서는 「번역가」의 내용 가운데 생철학적으로 중요한 논점들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29)

번역이 단지 원작의 모사나 반복이 아니라 독자적인 ‘담론(언어) 형식’이라고 선언한 후, 벤야민은 의미 있는 원작에 내재한 ‘번역가능성(Übersetzbarkeit)’을 잊혀 져선 안 되는 삶과 순간에 빗대어 설명한다. “어떤 잊을 수 없는 삶이나 순간에 대해 […] 그 삶과 순간이 잊히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면 그러한 술어는 전혀 잘못 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이 부응하지 않는 어떤 요구를 내포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Gedenken Gottes)에 대한 지시까지도 내포할 것이다.”(선집6 123) 여기서 세 개의 대목이 시선을 끈다. 삶과 순간, 망각을 거부하는 요구, 신의 기억(회상)이 그것이다.

삶과 순간을 함께 언급하는 것은 두 개념 사이에 뭔가 차이와 긴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은 즉자적으로는 흘러가는 시간의 순간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순간’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삶’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만약 키에르케고어처럼 ‘순간’을 “시간과 영원이 서로 접촉하는”30) 이중적 운동의 지점으로 규정한다면, 다시 말해서 정신이 유한과 무한의 종합을 실행하는 혹은 실행해야 하는 ‘절대적 실천의 지점’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의미의 순간은 객관적 시간의 동질적인 단편이 아니다. 반대로 순간은 개별자의 구체적인 삶의 ‘연관성과 연속성’이 정립되는 실천적이며 실존적인 ‘자유의 실행’이다. 그것은 개별자가 구체적인 자기 자신이 되는31), 자기 삶의 연관성과 전체성을 스스로 획 득하는 실천적 과정 자체이다. 요컨대 순간이 어떻게 정립되는가에 따라 한 개별 자의 인격적 통일성(책임성을 포함한)에 근거한 삶의 연속성과 내용이 결정되는

29) 번역학의 관점에서 벤야민의 번역 이론을 논의한 성과로, 윤성우, 「발터 벤야민의 번역론에 관한 소고」 번역학 연구 8권 1호, 2007, pp. 175-192 (DOI:

10.15749/jts.2007.8.1.008) 참조.

30) Søren Kierkegaard, Begrebet Angest(1844), Der Begriff Angst, trans. Hans Rochol (Hamburg: Meiner 1984), pp. 87-101.

31) Søren Kierkegaard, Sygdommen til Døden(1849), Die Krankheit zum Tode, trans.

Hans Rochol (Hamburg: Meiner 1995), pp.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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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에 따르면 어떤 삶과 순간은 ‘망각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한다. 물론 모든 삶과 순간이 이런 요구를 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번역 가능성’이 과거의 모든 원작들에 내재된 것이 아니듯이, 그러한 삶과 순간도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뭔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에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요구’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벤야민이 삶과 순간을 물리적이거나 생물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신적인 의미’와 ‘역사적인 구원’의 ― 이 구원은 사상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을 포함하는데 ― 관점에서 이해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32) 그러한 요구에 누가, 언제,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선험적 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가령 근대 철학사에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스피노자의 사상이 품고 있던 ‘망각을 거부하는 요구’는 ― 라이프니츠의 ‘비밀스러운 응답’을 논외로 하자면 ― 사후 100년이 지난 후에 독일 철학계(특히 헤르더와 셸링)에서 비로소 생산적인 수용과 반향을 얻기 시작하였다.

과거의 삶과 순간이 현재를 향해 던지는 기억의 요구. 이 요구는 단지 잊혀 졌던, 간과되었던 과거의 산물을 다시 찾아내라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실증적 조사를 통해 ‘역사적 연대기의 빈칸’을 메우라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의 삶과 순간이 어떤 의미심장한 정신적 내용을 품고 있는지,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어떤 ‘정신적 본질’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엄밀하게 파악하라는

‘역사(철학)적 인식을 향한 요구’이다. 이 요구는 「언어철학」 논고의 ‘언어-매체’의 직접적(즉 절대적)인 ‘전달 가능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개념으로 봐야하며, 궁극적으로는 신학적, 형이상학적 정당화를 함축하고 있는 요구이다.33)

32) 벤야민의 회상(gedenken) 개념과 기억 이론에 대해선 김남시와 이용란의 충실한 연구 논문을 보라. 김남시, 「과거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 발터 벤야민의 회억 개념」, 안 과밖 37권 (2014), pp. 243-274; 이용란, 「발터 벤야민의 기억 이론」, 미학 83권 1호, 2017, pp. 177-219.

33) “생의 진정한 척도는 기억이다. 기억은 뒤돌아보면서 섬광처럼 생을 통과하여 지나간다”

(GS VI 529). 벤야민의 변증법적 역사 서술에 대해선, Willi Bolle, “Geschichte”, in:

Benjamins Begriffe, Bd. 1, pp. 399-425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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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때문에 벤야민이 ‘신의 기억(회상)’을 언급하는 것이다. 번역은 결코 원전의 문장 내용을 다른 자연어(번역자의 언어) 속으로 ‘옮겨 놓는(trans-latio)’

작업이 아니다.34) 반대로 그것은 망각을 떨쳐내라는 과거의 요구에, 과거가 표현 하거나 암묵적으로 지향했던 ‘정신적 본질’(곧 ‘순수언어’35))을 최대한 엄밀하게 파악하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번역은 과거에 대한 실증적 이해나 주관적 내지 상대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과거의 객관적인 ‘정신적 본질’에 관한 역사 (철학)적 인식을 시도하는 일이다. ‘번역가의 과제’는 역사(철학)적 인식에 대한 지식인의 ‘진지하고 엄정한 자기의식의 과제, 곧 자기 사명의 실천의 과제’에 다름 아니다.36) 그리고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의 시도가 「대학생」에서 보았듯, 과거에, 삶과 순간에 내재된 유토피아적 지향을 ‘인식하는 현재’ 속에서 구원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 잠재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는 ― 종말론적이며 구원사적인 의미에서 ‘신의 기억에 대한 지시’를 내포한다고 봐야한다.37)

과거의 삶과 순간, 그리고 과거의 원작은 완결되지 않았고, 완결될 수가 없다. 벤야민은 원작, 번역, 삶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좀 더 진전시킨다. “[…]

번역은 원작의 번역 가능성 덕택에 원작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다. […] 그 연관은

34) 벤야민은 이러한 기계적이며 비역사적인 번역 이해를 “두 개의 죽은 언어들 사이의 생명 없는 동일성”이라 비판한다(선집 6, pp. 128-129).

35) 선집 6, p. 129, pp. 137-139.

36) 벤야민의 이후 저작들은 모두 이 진지하고 엄정한 자기의식 내지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과제’의 의미를 해체론적으로 ‘포기하다(aufgeben)’와 연결시키는 폴 드만의 설명은 기지에 찬 언어유희 이상이 아니다(Paul de Man, “The Conclusion:

Walter Benjamin's >The Task of the Translator<”, in: Yale French Studies, vol.

69 [1983], pp. 25-46).

37) 비애극서에서 벤야민은 이념의 상징적인 힘을 복원시켜주는, 즉 현상들의 객관적인 역사적 본질(진리내용)로서 이념을 서술하는 철학적 고찰의 사명을 플라톤적 상기와 연결시킨다. “철학자의 일은 […] 우선적으로 근원적인 청취로 되돌아가는 기억하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는 어쩌면 이러한 기억과 동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선집 6, p. 161, 강조는 필자).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이념론에 대 해선, 졸고,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이념론과 예술철학에 대한 시론」, 미학예술학연구

28집 (2008), pp. 243-2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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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연관이라 칭해도 좋을 것이고, 그것도 더 정확하게는 삶의 연관이라 칭할 수 있다. […] 번역은 […]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Über-leben)’

에서 나온다. […] 중요한 작품들의 경우 번역은 그것들의 ‘지속하는 삶 (Fortleben)’의 단계를 지칭하게 마련이다.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 속에서 예술작품의 삶과 지속하는 삶에 대한 생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선집 6, p.

124, 강조는 필자). 원작의 삶이란 말을 들으면, 통상 특정한 저자(작가)와 원작이 만들어지고 수용된 특정한 시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벤야민은 ‘번역 가능성’ 개념과 마찬가지로 원작과 저자에 대한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다. 원작의 삶은 저자의 생물학적 삶이나 객관적 시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원작의 ‘사후의 삶’

내지 ‘지속하는 삶’이란 근본적으로, 번역을 매개로 새롭게 해석되고 갱신되는 원작의 ‘정신적 본질’과 연결된 개념이다. ‘정신적 본질’이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본질을 파악하고 드러내려는 번역 작업38)과 번역 작업을 통해 이어지는 원작의 삶도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봐선 안 된다. 이 점을 벤야 민은 ‘완전히 비은유적인 객관성’이란 말로 적시하고 있다. 벤야민은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을 좀 더 이어간다.

“사람들이 오로지 유기적 신체에 대해서만 생명을 부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사유가 꽉 닫혀 있던 시대에조차 추측할 수 있었다. […] 삶이라는 것을, 그 것을 간간히 특징지을 뿐인 감정과 같이 훨씬 덜 중요한 동물적인 것의 요인들로 정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역사를 지니면서 그 역사의 무대이기만 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삶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삶이라는 개념은 정당한 권리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로부터 결국 삶의 영역은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는 모든 자연적 삶을 역사의 보다 더 포괄적인 삶으로부터 이해해야 할 과제가 생겨난다” (선집 6, pp. 124-125, 강조는 필자). 벤야민은 생물학적 특징이나 동물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38) 어떤 원작에 대한 개별 번역들이 다양한 수준을 보여준다는 사태와 벤야민이 생각하는 번역의 본질적인 의미, 즉 객관적인 역사(철학)적 인식의 시도라는 의미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22)

삶의 개념을 규정하려는 입장을 분명하게 거부한다. 인간의 삶은 결코 동물적이며

‘자연적인 삶’으로 환원될 수 없다. 반대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그것을 포괄하고 있는 ‘역사적인 삶’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적인 삶에는 자연과 사물은 물론, 사회, 정치, 학문, 도덕, 종교, 예술과 같은 정신적 차원의 형성물들도 속한다.

그리고 엄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과 사물의 역사적인 삶보다 정신적 차원의 역사적인 삶을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역사적 삶의 원천과 변화를 추적하고 해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대상, 곧 ‘작품들(원작)’이 분명 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번역들 속에서 원작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가장 뒤늦으면서 포괄적인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선집 6, p. 125).

그런데 벤야민은 이러한 전개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합목 적성’ 개념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전개는 독특하고 고귀한 삶의 전개로서 어떤 독특하고 고귀한 합목적성(Zweckmäßigkeit)으로 규정되어 있다. 삶과 합목적성

― 겉보기에도 판연하면서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이 둘의 연관은 삶의 모든 개별적 합목적성들이 지향하는 목적을 다시금 그 고유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보다 상위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는 곳에서만 해명된다. 모든 합목적적 삶의 현상들이나 그 현상들의 합목적성 일반은 결국 삶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의 표현, 그 삶의 의미의 서술(Darstellung)을 위해 합목적적인 것이다”(선집 6, pp. 125-126, 강조는 필자). 이 대목은 생철학적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물론 이 대목은 직접적으로는 원작의 삶을 역사적. 현실적으로 이어주고 갱신해 주는 번역의 근본적인 기능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합목적성’과 ‘삶의 본질의 표현’이란 말은 넓은 의미의 생철학적 관점에서 좀 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근대철학사에서 ‘합목적성’ 개념을 철학적 원리의 관점에서 심층 적으로 논구한 사상가는 칸트였다. 칸트는 제3비판서 판단력비판에서 ‘합목적성’

개념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논의한다. 한편으로는 심미적 판단의 주관적-형식적 조건으로서 ‘합목적성의 형식’(KU 34-38)39)을 논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 39)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1790/93), Werkausgabe, ed. Wilhelm Weischedel, Bd. X (Frankfurt a.M.: Suhrkamp 1974). 판단력비판은 관례에 따라 축약어(KU)와

(23)

(체) 및 자연 전체에 관한 목적론적 판단의 주관적 조건으로서 ‘자연 목적’(KU 284-295) 개념을 논의한다. 심미적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은 판단의 성격은 물론, 판단의 근거와 목표가 전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두 판단의 저변에는 공통적인 선험적 능력인 ‘반성적 판단력’이 놓여있다.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에 내재한 능동 적이며 형식적인 원리를 “자연의 형식적 합목적성(formale Zweckmäßigkeit der Natur)”이라 칭하고, 그 원리적 위상과 의미를 엄밀하게 논증한다.40)

합목적성 개념에 대한 칸트의 논증에서 이 글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칸트가 합목적성 개념을 심미적 판단과 예술, 그리고 생명(체) 현상의 경험 가능성을 위한 주관적이며 능동적인 원리로서 정당화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합목적성 개념이 경험적인 지각을 통해서는 도출될 수 없으며, 본질 적으로 정신의 능동적 형성력이 발현된 ‘관계성(통일성)’의 창출이란41) 점을 밝힌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형식적) 합목적성’ 개념의 핵심 내용이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독특한 관계성(통일성)’에 있으며, 이 관계성에서 ‘전체’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규정 할 수 없음을 논증한 것이다. 미적-예술적 경험에서 ‘전체’는 개념적 규정을 근본 적으로 벗어나는 ‘심미적 이념(ästhetische Idee)’(KU 192-193), 곧 상상력의 함축 적인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심미적 이념은 언어와 개념에 의해서 명확히 정의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다른 한편, 생명(체) 현상에 대한 판단에서

‘전체’의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해당 생명체의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전체에 기여하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선 분명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생명(체) 현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자연 목적’ 개념은 이론적 인식을 위한 ‘범주’와 달리, 그 ‘객관적 현실성’을 엄밀하게 논증할 수 없는 것이다.42) 왜냐하면 합목적성은 그 주관적 기원으로 볼 때, 시간성의 차원을 의식

제2판(1793) 쪽수로 인용한다.

40) 상세한 논구는 「서론」에서 이루어진다 (IV절과 V절, KU XXV-XXXVIII).

41) 여기서 ‘형식적 합목적성’이 판단력비판 「분석론」의 세 번째 ‘관계(Relation)’의 계기 에서 논의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KU 32 이하, 특히 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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