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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말: 생철학적 사유와 철학적 진리의 객관성

아도르노의 생철학적 주저가 된 미니마 모랄리아에는 “손상된 삶으로부터의 성찰들”이란 부제가 붙어있다. 이어 책의 1부는 “삶이 살아지지 않는다”는 오스트 리아 문필가 F. 퀴른베르거(Ferdinand Kürnberger, 1821-1879)의 언명을 모토로 인용한다.45) 손상된 삶, 살아지지 않는 삶.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파괴와 학살을 목도한 유대인 철학자에게 삶에 대해 성찰하는 일은 너무나 힘겨울 뿐 아니라 무의미하고 허망한 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삶이 살아지지 않 는다”는 모토는, 삶의 상황에 대한 암울한 진단을 넘어서서, 생철학적 사유 일반 의 암묵적인 추동자로 봐야할 것이다. 생철학적 사유는 삶의 ‘부정적 징후’이다. 그 것은 삶의 가장 친숙한 토대,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믿음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었 음을 알려주는 징후이다. 벤야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나 있는 일련의 생철학적 성찰들은 모두 그가 삶을 위협하고 있는 여러 근본적인 위기들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그 위기들은 경험의 45) Theodor W. Adorno, Minima Moralia(1947) (Frankfurt a.M.: Suhrkamp 1964), p. 13.

위기,46) 종교와 형이상학의 위기, 교육과 정치적 의식의 위기, 역사적 인식과 구제의 위기, 예술의 위기, 정신적 삶과 충동적 삶의 균열 등 삶의 다양한 층위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벤야민에게 가장 절박하게 다가온 것은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의 위기, 곧 진리의 ‘객관성’과 ‘서술 가능성’의 위기였다. 그가 창조적인 정 신과 형이상학적 경험을 중시하고, 특히 정신적 본질을 전달하는 언어 개념에 천착한 것은 바로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벤야민은 언어의 현실성과 객 관성이 확고하게 정초되어야만, 철학적 사유와 비평이 목표로 하는 ‘이념(진리)의 서술’이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인 토대를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념(진리) 자 체가 명명하기(상징)의 힘을 회복한 ‘언어’이며,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가 실현되는 매체도 언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47) 역사철학과 언어철학에 대한 논의가 그 의 초기 저작의 중심에 서 있는 것도 이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즉 역사철학적 내지 언어철학적 논의를 촉발한 결정적인 동기는 전통적인 유대교적-신학적 구원 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진리의 객관성과 서술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이 정당화의 배경에 생의 중첩된 위기를 넘어서려는 그의 역사 적이며 실존적인 진단과 분투가 놓여있다.

물론 벤야민은 현상을 구제하는 이념(진리)의 서술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애극서의 「인식비판 서론」은 이 어려움에 대한 엄정한

‘선언문’이라 할 수 있다. 「인식비판 서론」은 이념의 서술을 목표로 하는 철학적 사유가 어떤 당연하고 익숙한 사유의 방법들을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정치하게 논구하고 있다.48) 벤야민은 수학적-논리적 방법에 대한 과신, 언어 상대 주의, 소박한 연역주의, 경험론적 귀납주의, 상식주의(대중추수주의), 아류적-무비 46) Thomas Weber, “Erfahrung”, in: Benjamins Begriffe, Bd. 1, pp. 230-259, 특히 pp.

230-235 참조.

47) “[…] 철학적 고찰과 서술의 유일한 매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선집 6, p. 170).

48) 벤야민의 고유한 ‘관조’ 개념의 의미에 대해선, 윤미애, 「벤야민의 관조와 세속화론」,

독일언어문학 55권 (2012), pp. 143-159 (DOI: 10.30947/zfdsl.2012..55.143), 특히 pp.

148-152 참조.

판적 체계주의, 비역사적 본질주의, 명목론적 회의주의, 다양한 형태의 직관주의, 신비주의, 관점(세계관)주의, 심리주의(감정이입), 방법론적 혼합주의(절충주의) 등을 모두, 진정한 철학적 사유를 방해하는 적들로 단호하게 논박하고 내친다 (선집 6, pp. 146-147, pp. 163-174). 이념을 포착할 수 있는 직접적이며 손쉬운 길은 (더 이상) 없다. 반대로 이젠 저 무수한 적들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부단히 침잠과 중단을 반복해야 하는 변증법적 “우회로”(선집 6, p. 148)만이 있을 뿐이다. 이 우회로는 매우 험난한 길이다. 철학적 사유는 이 길 위에서 현상들 가운데 의미 심장한 ‘극단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들이 보내오는 미세한 신호에 예민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또한 극단들 사이에서 불현 듯 드러나는 짜임관계(성좌)를 구성적으로 읽어내야 하며, 아울러 이 짜임관계의 전사(前史)와 후사(後史)를 가능한 정치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벤야민은 젊은 시절부터 삶의 위기와 삶의 표현, 그리고 이 표현의 구제 가능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였으며, 당대의 생철학적 시도들의 이론적 한계를 비판 하고, 삶의 정신적 차원의 독자성, 역사성, 객관성을 함께 정초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갔다. 그의 생철학적 성찰은, 비록 독립된 이론의 형태로 개진된 적은 없지만,

‘언어’, ‘역사’, ‘예술(비평)’에 관한 그의 철학적 사유와 처음부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글은 이 점을 보여주고자 한 하나의 시도이다. 벤야민의 잠재된 ‘비판적 생철학’이 이후 1930년대 저작들에서 어떤 모습으로 분화, 전개되었는가에 대해선 후속 연구에서 다루고자 한다.

49)

* 논문투고일: 2020년 4월 27일 / 심사기간: 2020년 4월 28일-2020년 5월 15일 / 최종게재 확정일: 2020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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