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News, Volume 12, No. 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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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考】
初志一貫과 始終一貫
이 철 태 교수 (단국대학교)
‘初志一貫’의 사전적 의미는 ‘처음에 먹은 마음을 끝까지 밀고 나감’이며, ‘始終一貫’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함’이라고 합니다. 의미에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음이라는 공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人間事에 있어 이 말이 많이 그리고 자주 사용 되는 것은 그것을 행함이 쉽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初志一貫’, ‘始 終一貫’ 이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은 참으로 다양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대상은 자기 자신 일 수도 있고 상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小數일 수도 있고 多數일 수도 있으며, 자신보 다 큰 힘을 가진 대상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미약한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또 사람과 사람사 이의 關係가 시작이 어디에 있고 끝은 어디란 말입니까? 시작은 因緣의 맺음이라고 한다면 끝은 어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관계에서 끝은 끝이 아니라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동안 우리사회에는 폭력조직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고 아주 인기리에 상영된 적 이 있습니다. 그러자 폭력을 미화한다고 하여 많은 비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판에 아랑 곳 없이 큰 흥행으로 제작사는 많은 수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폭력조직의 영화를 보면서 ‘義理’라는 것에 감동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이 ‘義理’를 지키기 어렵기 때 문에 영화 속 주인공의 ‘義理’에 대한 연기를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합니 다. 영화 속 폭력조직의 ‘義理’라는 것이 대상과 형태는 辭典的인 의미와는 다를지 모르나 이 ‘義 理’라는 것도 또 하나의 ‘初志一貫’이나 ‘始終一貫’이라는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최근에 우리는 전직 대통령이 용의자의 신분으로 봉화마을이라는 곳에서부터 서초동으로 소환되어 가는 안타까운 사태를 쳐다보아야 했으며 또, 안타까움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스 스로 세상과의 단절을 하고만 불행하고 가슴 아픈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을 지지했었던 지지하지 않았던 간에 한때나마 우리나라의 최고 지도자였던 사람이 오늘날 이와 같 은 catastrophe를 피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도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대통 령 취임식장에서 그의 가슴속에 있었던 그 초심이 始終一貫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물 론 그의 초심의 무게는 凡人과는 次元이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아무튼 ‘初志一貫’, ‘始終 一貫’의 자세를 갖고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나름대로 참으로 어려운 모양입니다.
나는 교수직에 몸담은 지 올해로 25년이 지나갑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고 여러 사람들과도 다양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동안 저와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 중에 ‘初志一 貫’하고 ‘始終一貫’해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1990년 10월 한국화학공학회 추계학술 발표회가 개최된 시점으로 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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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12권 제3호, 2009러 갑니다. 당시에 나는 바로 그날 한국화학공학회에서 수여하는 학술상을 수상하여야 하였기에 전남대학교에 가게 되었고 그리고 그날 저녁 학회 간친회 장소는 그 후 몇 번이나 이름이 바뀌 어 “프린스”라는 이름의 호텔로도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당시는 “광주 시티힐관광호텔”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간친회 장소에서 여러 지인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던 중 초면의 한분이 축하를 한 다고 하면서 명함을 내밀었으며 나 또한 명함을 건네자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명함이 필요 없다 고 하면서, 간친회 이후에 잠깐만 시간을 내어 달라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시 절로서 대학 교직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에게 박사 학위를 취득해야 한다는 강력한 정부의 시책 이 적용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만학을 하기에는 너무나 연로하신 많은 교수님들이 힘들어 하 는 시기였습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시절에 정부의 핵심인물과의 love story로 유명세를 탄 신모 여성의 가짜 학력으로 비화되어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유명 인사들의 가짜 학력 파동이 일어 나기도 하였지만 당시는 국가정책상의 이유로 대학교육기관 내에 가짜 박사학위소지자가 특히나 많이 밝혀지기도 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학 당국에서도 박사학위 취득에 대해 강력히 권장을 하는 사회의 분위기였고 그러한 흐름이 있었기에 전국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던 많은 교 수님들이 학위취득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학회 간친회에서 만나 그 분도 물론 당시 현직 교수로 재직 중이셨습니다. 나와 전공이 같은 이유로 나를 지도교수로 삼고 박사 학위를 하고자 하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습니다. 어느 광고 카피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의 관습상 나이는 참 으로 강력한 힘을 갖습니다. 그러나 많은 나이가 때로는 오히려 불편함을 줄 때도 있습니다. 더구 나 연상의 입장에 계신 분이 연하의 사람에게 아쉬움이 있을 때 그 불편함은 더욱 크게 느껴지 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3월 1일부터 그 교수님은 단국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을 하고 박 사학위를 위한 코스워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와 인연을 맺은 그 분이 올해 8월 31일 자로 정년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말할 나 위도 없지만, 당시에 단국대학교 화학공학과 대학원에는 40대 중반미만 연령층의 교수로 100%
구성되어 있었고, 교육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교수들의 대학원 수업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나 역시 “대학원은 학부에서 다진 체력을 소진하는 곳”이라 외치며 18명의
수강생 중 8명에게 낙제 점수를 주었고 이들 8명의 학생들은 한 학기를 더 등록을 하여야 하였
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면학에 대한 노력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곧장 박사과정에 입학을 한 소위 풀타임 학생들이 80% 정도이었으며 나머지가 파트 타임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수들보다 고령자인 파트 타임 학생들도 타이트하고 강한 교육
과정의 그 흐름에 결코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위 과정 속에서도 그는 매 수업시
간마다 광주로부터 서울 한남동까지 300 km 이상의 장거리 통학을 하여야 하였지만, 조금 과장
된 점이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수업에 단 한 번의 결석은 물론 지각조차도 한 적이 없었으
며, 학과 내의 다른 교수님들로 부터도 결석을 하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현직 교수님으로 소속 대학에서 강의를 비롯한 여러 업무도 있을 것이라는 易地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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