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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Central America)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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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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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미일반정보₩₩₩₩₩₩₩₩₩₩₩₩₩₩₩₩₩₩₩₩₩₩₩₩₩₩₩₩₩₩₩₩₩₩₩₩₩₩₩₩₩₩₩₩₩₩₩₩₩₩₩ 7 2. 중미연방공화국 ₩₩₩₩₩₩₩₩₩₩₩₩₩₩₩₩₩₩₩₩₩₩₩₩₩₩₩₩₩₩₩₩₩₩₩₩₩₩₩₩₩₩₩₩₩₩₩₩ 9 3.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 11 4. 정복자가 남긴 유산₩₩₩₩₩₩₩₩₩₩₩₩₩₩₩₩₩₩₩₩₩₩₩₩₩₩₩₩₩₩₩₩₩₩₩₩₩₩₩₩₩₩₩₩ 14 5. 중미의 문명과 유적₩₩₩₩₩₩₩₩₩₩₩₩₩₩₩₩₩₩₩₩₩₩₩₩₩₩₩₩₩₩₩₩₩₩₩₩₩₩₩₩₩₩₩₩ 22 6. 중미의 음식과 춤₩₩₩₩₩₩₩₩₩₩₩₩₩₩₩₩₩₩₩₩₩₩₩₩₩₩₩₩₩₩₩₩₩₩₩₩₩₩₩₩₩₩₩₩₩₩ 26 7. 파나마운하 이야기 ₩₩₩₩₩₩₩₩₩₩₩₩₩₩₩₩₩₩₩₩₩₩₩₩₩₩₩₩₩₩₩₩₩₩₩₩₩₩₩₩₩₩₩₩ 32 8. 중미는 섬유₩의류산업의 중심지 ₩₩₩₩₩₩₩₩₩₩₩₩₩₩₩₩₩₩₩₩₩₩₩₩₩₩₩₩₩₩₩₩ 36 9. 중미통합을 위한 노력₩₩₩₩₩₩₩₩₩₩₩₩₩₩₩₩₩₩₩₩₩₩₩₩₩₩₩₩₩₩₩₩₩₩₩₩₩₩₩₩₩₩ 38

중미(Central America) 알기

□ 과테말라 일반

1. 과테말라 일반 정보 ₩₩₩₩₩₩₩₩₩₩₩₩₩₩₩₩₩₩₩₩₩₩₩₩₩₩₩₩₩₩₩₩₩₩₩₩₩₩₩₩₩ 44 2. 간추린 과테말라 역사 ₩₩₩₩₩₩₩₩₩₩₩₩₩₩₩₩₩₩₩₩₩₩₩₩₩₩₩₩₩₩₩₩₩₩₩₩₩₩ 48 3. 과테말라 36년 내전과 평화협정 ₩₩₩₩₩₩₩₩₩₩₩₩₩₩₩₩₩₩₩₩₩₩₩₩₩₩₩₩₩ 51

□ 마야문명 그리고『포폴 부』

4. 마야문명이 숨 쉬는 과테말라 ₩₩₩₩₩₩₩₩₩₩₩₩₩₩₩₩₩₩₩₩₩₩₩₩₩₩₩₩₩₩₩ 54 5. 마야의 성경『포폴 부』₩₩₩₩₩₩₩₩₩₩₩₩₩₩₩₩₩₩₩₩₩₩₩₩₩₩₩₩₩₩₩₩₩₩₩₩₩₩ 58 6. 마야문명의 후손들의 현주소 ₩₩₩₩₩₩₩₩₩₩₩₩₩₩₩₩₩₩₩₩₩₩₩₩₩₩₩₩₩₩₩₩ 61 마야문명의 중심 - 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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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테말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

7. 노벨평화상 수상자 멘추 ₩₩₩₩₩₩₩₩₩₩₩₩₩₩₩₩₩₩₩₩₩₩₩₩₩₩₩₩₩₩₩₩₩₩₩₩ 63 8.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스투리아스 ₩₩₩₩₩₩₩₩₩₩₩₩₩₩₩₩₩₩₩₩₩₩₩₩₩₩₩₩ 65 9. 과테말라의 이방인 가리후나스 ₩₩₩₩₩₩₩₩₩₩₩₩₩₩₩₩₩₩₩₩₩₩₩₩₩₩₩₩₩₩ 67 10. ‘멜팅 폿’또는‘샐러드 보울’ ₩₩₩₩₩₩₩₩₩₩₩₩₩₩₩₩₩₩₩₩₩₩₩₩₩₩₩₩₩ 69 11. 과테말라의 상징, 국조‘케찰’₩₩₩₩₩₩₩₩₩₩₩₩₩₩₩₩₩₩₩₩₩₩₩₩₩₩₩₩₩₩ 71 12. 과테말라의 명물, 무지개 수공예 직물 ₩₩₩₩₩₩₩₩₩₩₩₩₩₩₩₩₩₩₩₩₩₩ 73 13. 과테말라인이 즐기는 전통음식 ₩₩₩₩₩₩₩₩₩₩₩₩₩₩₩₩₩₩₩₩₩₩₩₩₩₩₩₩₩ 75

□ 과테말라의 자연과 풍경

14. 지구 자연계의 미니어처 과테말라 ₩₩₩₩₩₩₩₩₩₩₩₩₩₩₩₩₩₩₩₩₩₩₩₩₩₩ 77 15. 영원한 봄의 도시, 과테말라 시티 ₩₩₩₩₩₩₩₩₩₩₩₩₩₩₩₩₩₩₩₩₩₩₩₩₩₩₩ 79 1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아티틀란호 ₩₩₩₩₩₩₩₩₩₩₩₩₩₩₩₩₩₩ 81 17. 스릴넘치는 관광명소, 파카야 화산 ₩₩₩₩₩₩₩₩₩₩₩₩₩₩₩₩₩₩₩₩₩₩₩₩₩ 84

□ 과테말라의 빛과 그림자

18. 한국은 IT로, 과테말라는‘닭’으로 ₩₩₩₩₩₩₩₩₩₩₩₩₩₩₩₩₩₩₩₩₩₩₩₩₩ 86 19. 중미연방국가의 수도 안티구아 ₩₩₩₩₩₩₩₩₩₩₩₩₩₩₩₩₩₩₩₩₩₩₩₩₩₩₩₩₩ 88 20. 과테말라 시티의 과제, 치안불안 ₩₩₩₩₩₩₩₩₩₩₩₩₩₩₩₩₩₩₩₩₩₩₩₩₩₩₩ 91 21. 털털이 벤츠 스쿨버스 ₩₩₩₩₩₩₩₩₩₩₩₩₩₩₩₩₩₩₩₩₩₩₩₩₩₩₩₩₩₩₩₩₩₩₩₩₩ 93 22. 스타벅스가 탐내는 과테말라 커피 ₩₩₩₩₩₩₩₩₩₩₩₩₩₩₩₩₩₩₩₩₩₩₩₩₩ 95 23. 사진으로 돌아보는 과테말라 ₩₩₩₩₩₩₩₩₩₩₩₩₩₩₩₩₩₩₩₩₩₩₩₩₩₩₩₩₩₩ 98 간단한 스페인어 배우기₩₩₩₩₩₩₩₩₩₩₩₩₩₩₩₩₩₩₩₩₩₩₩₩₩₩₩₩₩₩₩₩₩₩₩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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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본 중미 각국 정보

과테말라

(Guatemala)

과테말라시티 (Guatemala)

대통령제

임기4년 109 13.5 390 2,848 7,765 14,545 300 51

벨리즈

(Belize)

벨모판 (Belmopan)

임헌군주제

(영연방) 23 0.3 14 4,317 465 788 8 3

엘살바도르

(El Salvador)

산살바도르 (El Salvador)

대통령제

임기5년 21 7 221 3,812 4,549 8,667 67 7

온두라스

(Honduras)

테구시갈파 (Tegucigalpa)

대통령제

임기4년 113 7.4 143 1,858 2,883 7,637 131 37

니카라과

(Nicaragua)

마나구아 (Managua)

대통령제

임기5년 121 5.9 57 1,013 1,464 4,109 256 2

코스타리카

(Costa Rica)

산호세 (San Jose)

대통령제

임기4년 51 4.4 298 6,557 9,503 15,371 256 132

파나마

(Panama)

파나마시티 (Panama city)

대통령제

임기5년 76 3.3 385 9,255 10,870 15,180 6,464 873

도미니카(공)

(Dominican Republic)

산토도밍고 (Santo Domingo)

대통령제

임기4년 49 9.6 457 4,797 6,949 13,569 126 90

정부형태 면적

(천㎢) 인구 (백만명)

GDP (억달러)

1인당 GDP (달러)

수출 (백만달러)

수입 (백만달러)

우리나라와의 관계 수출 (백만달러)

수입 (백만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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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호수와‘태평양의 등대’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엘살바도르의 이살코화산 등 화 산성 경관이 많다. 기후는 태평양연안의 열대사바나 기후지역, 카리브해 연안의 북동무역풍지역, 고원이나 산간부의 온화한 기후지역 등 3가지로 구별된다.

1524년 스페인의 탐험가 알바라도가 과테말라를 정복한 이후 이 지역은 스페인 령으로 편입되었으며, 1543년 과테말라 총독령의 창설과 동시에 멕시코 남부와 중 미 5개국도 그 관할하에 들어갔다. 1821년 과테말라의 독립에 따라 다른 4개국도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822년~23년 이투르비데가 거느리는 멕시코제국에 합병되었으나 그 제국이 무너진 뒤, 1823년 중미 5개국은 중미연방 공화국을 창설했다. 그러나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되면서 연방은 곧 와해되었다.

국내총생산중 가장 큰 비중(약 20%)을 차지하는 산업부문인 농목업이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커피₩목화₩바나나₩쇠고기₩사탕수수 등 5개 품 목이 수출의 60%를 차지한다. 공업부문은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가 20%를 차지 하며 나머지 국가에서는 10% 정도이다.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성장률이 낮으며, 코스타리카를 제외하면 부의 상층계층으로의 집중이 두드러져 불평등한 소득분배 가 경제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사회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중미국가들의 규모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테말라의 인구는 1,350만이고 벨리즈는 30만으로서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인종구성은 이 지역 역사를 반영하 여 다양하다. 과테말라는 마야족₩키체족 등 인디오의 인구비율이 43%가 넘어, 볼 리비아₩페루 등과 함께 중남미에서 인디오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백인은 니카라 과₩엘살바도르₩과테말라₩파나마 등에서 10% 정도이고 흑인은 벨리즈 30%, 파나 마 10% 정도이며 혼혈인종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인종구성은 사 회적 계층에 대응하여 상층은 백인, 중간층은 백인과 혼혈인종의 일부, 하층은 대 부분의 혼혈인종과 인디오₩흑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인종 사이에는 복잡한 대 립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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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연방공화국(스페인어 명칭: Republica Federal de Centroamerica)은 1823년 7월부터 1840년까지 중미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과테말라, 니카라과, 엘 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로 구성되었으며, 미국을 모델로 연방 공화국을 이루려 했다. 연방은 1838년부터 1840년까지의 내전으로 인해 와해되었다.

1823년의 국기와 국장에는“중미연합주”(스페인어 명칭: Provincias Unidas de Centro America)라는 이름을 썼으나 1824년 제정한 헌법에서 국기와 국장의 표기를 중미연방공화국으로 바꾸었다.

중미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달성한 것은 1821년의 일이다. 독립 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이겨 얻은 것이다. 중미에서도 다양한 독립 전쟁 이 전개되었다. 이는 북멕시코, 남아메리카 대륙 각지의 독립투쟁과 맞먹는 것이 었다. 중미 최초의 조직적인 독립투쟁은 1811년 11월 엘살바도르에서 행해졌는데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 사제가 주도한 것이다.

1821년 과테말라시에서 중미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발족시부터 여러 지역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서 국가 구성의 명확한 방향이 없었다. 14년동안 유지된 미성숙한 국가, 중미연방공화국은 1840년에 붕괴되었다. 계기는 과테말 라의 장군이며 반연방주의자인 호세 라파엘 카레라가 이탈을 선언했기 때문이 다. 연방에 가입했던 여러 지역이 차례로 이탈을 표명하고 1842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3개국으로 공화국을 구성하는 계획이 실패하면서 중미의 분 열은 결정되었다. 이 시기에 중미 5개국의 국경선은 오늘날 보이는 것처럼 확정 되었다.

중미연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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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 리카 등의 나라들은 독립 기념일을 이 연방에서 이탈한 날로 채택하지 않고 스페 인 지배에서 독립한 1821년 9월 15일로 채택하고 있으며, 이들 나라들의 국기는 대부분 중미연방공화국의 국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중미연방공화국 국기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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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 인디오들이 본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한 조그만 섬(오늘날의 산살바도르)에 살고 있 는 벌거숭이 인디오들 앞에 느닷없이 커다란 날개를 편 배 세 척이 나타났다. 그것 은 인디오들이 일찍이 본 적이 없는‘괴상한 물건’이었다. 조그마한 배가 큰 배에 서 내려지더니, 살갗이 흰 사람들이 뭍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열심히 십자가 모양 기둥을 땅에 세우더니 그것 앞에 무릎을 꿇고 무언가 주문을 외우는 듯 했다.

신(神)인지 사람인지 모를 이 백인들은 섬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그들이 인디오 들의 코에 걸린 황금고리를 무척 가지고 싶어 하자, 인디오들은 남쪽으로 멀리 떨 어진 섬에 황금을 많이 가진 종족이 살고 있다고 손짓으로 알려주었다. 그러자 백 인들은 서둘러 그곳으로 떠나갔다.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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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쿠바에 살던 인디오들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백인들은 먼저처럼 며 칠을 머물다 떠나갔다. 다음으로 그들이 모습을 나타낸 곳은 에스파뇰라 섬의 아 이티였다. 백인들은 역시 곧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부서진 배 한척과 선원 44명을 남겨 두고 떠났다. 인디오들은 섬에 남은 백인들을 잘 대해주었다. 인디오들은 순 진했고, 욕심도 없어서, 백인들이 무엇을 달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디오들은 백인을 멀리하게 되었다. 백인들은 무엇 이든 빼앗으려 하였고, 벼락 소리와 번갯불을 뿜어내는 긴 막대기로 그들을 놀라 게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더 참을 수 없게 된 인디오들은 백 인들을 습격하여 무참히 살해했다. 이듬해(1493년) 백인들이 엄청나게 큰 배를 몰 고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백인들을 찾았지만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콜럼버스의 향해와 신대륙의 발견은 신대륙의 원주민에게 재앙이 되 었다. 신대륙 발견이후 라틴아메리카는 유럽인에 의해 정복되고 조직적으로 식민 화되어 유럽 제국주의의 단초가 되었으며,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서양인들이 보는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유럽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명에서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훌륭한 도전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콜롬버스는 황금의 대륙을 발견하기 위해 항해 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해양학과 지구 물리학에 풍부한 지식이 있었기에 신 대륙 개척을 위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평소에 마르코 폴로를 존경하였던 그는 투르크의 이슬람 교도들과 맞닥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인도와 교역하는 길 을 열고자 했다. 그러던 중,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당시 대서양을 건너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날이 가면 갈수록 떨어져가 는 물과 식량으로 선원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항해가 계속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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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기에 선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태연히 책을 읽으며 차 분한 마음으로 항해에 임하고 있었는데, 절망하고 있던 선원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나침판이나 선박의 성능을 믿고 항해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나를 움직이 는 동력은 꿈과 소망이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도전이 필요하며, 그것의 원동력은 호기심이다.”이러한 콜롬버스의 도전정신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당시 이미 아메리카에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 적으로 유럽과는 다른 양태를 보이는 수천년의 선진 문명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렇게 서로 존재를 전혀 몰랐던 이질적인 문명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조우한 것은 지구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중해의 좁은 바다에서 세계 패권을 다투던 유럽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타자성 (他者性)”의 발견인 동시에“또 다른 나”의 발견이자 잃어버린 낙원의 도래였다.

또한 식민과정에서 스페인이 착취한 대량의 금과 은은 유럽에 들어와 자본주의의 젖줄이 되고 산업혁명의 촉매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인 근대의 개막을 촉진하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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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아이러니컬 하게도 사랑과 평화의 가톨릭이 중남미에 전파된 것은 총과 칼을 앞 세운 스페인 침략자들의 강요에 의해서이다. 그러나“인간 제물”과“피의 신”을 숭앙했던 고대 인디오들에게“피를 흘려 희생함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의 신앙으로 쉽게 받아들여지고 유달리 신앙심 깊은 원주민들 사이에 깊게 파고들었 다. 따라서 대도시는 물론 작은 마을 어디서나 신앙의 중심이 되는 성당이 있고 성당에서는 가끔 갈색 피부를 가진 예수 상을 볼 수 있다. 원주민의 문화 전통이 강한 지역이나 농촌 지역에서는 원주민의 전통 요소와 혼합되어 중남미 특유의 민간 카톨릭을 만들었다. 특기할 점은 예수보다 지역의 수호신이나 성모 마리아 가 중요한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전체 인구의 90%가 로마 가톨릭교인 중남미에 는 우리나라 가톨릭 사제들의 선교 활동도 활발해서 성자로 인정 받은“김대건 신 부”의 이름인“대건”으로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크고 풍요로운 명절은 크리스마스로 이들은 이날을 위 해 1년을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 9월부터 성탄용품을 팔기 시작해서 11월에서 12월 사이에는 1년치 장사를 한다고 할 정도로 연말이 성수기이다. 가 난한 자든 부자든 이 날 만큼은 화려하게 집을 치장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선물을 나누며 부모와 고향을 방문해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마치 우리의 추석이나 설 과 같다.

정복자가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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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스타』

스페인 그리고 지중해 연안 국가와 중남미의 낮잠 문화인 시에스타(siesta)는 한낮에 무더위 때문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으므로 낮잠으로 원기를 회복하여 저녁까지 일을 하자는 취지이다. 그 유래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포르투갈 남 부 지방에서 시작되어 스페인을 거쳐 중남미로 퍼지게 되었다.

중남미에 가면 업무의 느려터짐과 불합리함에 답답할 때가 많다. 낮잠 자는 문 화인 시에스따(siesta, 낮잠)도 그 중 하나 이다. 보통 현지에서 일을 보려면 아침 10시에서 오후 1시까지가 가장 확실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보통 1시에 시작되는 점심 시간이 4~5시까지 늘어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시에스타 중에는 상점들은 물론 관공서 조차도 문을 닫고 낮잠을 즐긴다. 이 때 문에 시에스타는 중남미 사람들의 게으름이나 끈기 부족의 상징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과학자들은 시에스타는 생물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주 장한다. 곧, 시에스타는 원기를 회복하고 지적, 정신적 능력을 향상 시키는 효과 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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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구』

스포츠 중에서 축구만큼 보편성을 획득한 스포츠도 없을 것이다. 세계 거의 모 든 나라에서 매주 주말 마다 온 국민을 들뜨게 하고, 매 4년 마다 전 지구를 열광 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유일한 운동이 축구이다. 축구는 이들에게 바로 생활 그 자 체이다. 중남미를 다녀보면 몇 가구 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도 축구장이 있다. 골 목길을 뛰어 노는 아이들이나 학교 정규 수업 시간에나 모두 축구를 한다. 마치 축구 이외에는 스포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어린아이 때부터 축구공과 뒹굴며 자라기 때문에 중남미에는 축구 강국이 많다. 이들의 축구에 대한 열기는 실로 엄 청나서 국가대항전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거리는 축제 분위기로 휩싸인다.

축구는 각 집단의 고유성을 밝혀주고 차이점을 확인하는 삶의 양식이다. 엘리트 계층의 심심풀이 놀이였던 영국식 축구가 중남미로 도입되면서 중남미 고유의 문 화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축구는 중남미 전국민의 스포츠로 정착되었다. 중남미에서 축구는 다른 스포츠와 비교해 볼때 매우 빠른 속도로 발 전을 했다. 심지어 종주국인 영국과 비교해도 그 열기가 덜하지 않다.

중남미의 축구 열풍은 국민적 열정이 뒷받침하고 있어 지나치게 열정적이다 못 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축구는 개인, 클럽, 심지어 국가간의 갈등을 유발하기까 지 한다. 그러나 그러한 국민적 열정이 있었기에 전 세계인을 몸살 나게 만드는 중남미 고유의 축구양식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볍고, 부드럽고, 정확 하게”로 표현되는 현란한 개인기, 숏 패스로 연결되는 팀워크 등 중남미 축구의 대표적 이미지들이 바로 그 국민적 열정의 소산인 것이다.

중남미에서 축구는 국민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축제의 마 당이다. 특히 독재정권의 억압과 어두운 암흑시대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들에게 축구는 민주주의였다. 가난한 자든 부자든 그라운드에서는 빈부의 차이가 없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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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흑인과 백인의 인종차별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남미인들에게 축구는 모두가 어우러지는 한바탕 축제이다.

『중남미에서 축구는 언제부터』

중남미에 근대적 축구가 전래된 것은, 1860년 영국 선원들에 의해 아르헨티나 에 처음으로 도입되면서부터이다. 그들은 영국 상선에서 하역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몬떼비데오의 부두와 방파제에서 공을 차고 놀았다.

이때부터 라 쁠라마 강 유역이 중남미 축구의 발상지인 셈이다.

『100시간 전쟁 - 축구 전쟁』

100시간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축구 전쟁의 근본 원인은 영토 확장을 둘러싼 양국의 국경문제에 있으나 직접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적인 이유 때문으로 엘살바 도르로부터 수십만명이 온두라스로 불법 월경하여 정착한 데 있다.

온두라스는 1969년부터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으나 불법월경자들은 수혜 대상에 서 제외되었으며, 같은 해에 수만명의 불법 월경 농민을 국외로 추방하였는데, 그 들이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감정이 악화되다가 양국의 축 구경기를 계기로 전쟁이 벌어졌다.

1970년 월드컵 지역예선전은 1968년 5월부터 시작됐다, 북중미 예선 14조 A지 역은 중미 6개국이 혈전을 벌인 끝에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2 차전은 양국 이 번갈아 개최하고, 3차전은 제3국에서 개최하기로 하였다. 1969년 6월 7일 1차 전 때 온두라스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엘살바도르 선수 숙소를 찾아가 요란하게 떠들어 수면을 방해하였으며 덕분에 온두라스는 1:0으로 승리하여 전국이 축제였 다. 6월 14일 2차전에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 선수들을 아예 잠을 재우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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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덕에 3:0으로 승리하자 국경을 넘어 온 온두라스 극성 팬들과 난투극이 벌 어졌다.

피투성이 된 온두라스 응원단을 보고 중계 아나운서는 온두라스 전역에 더 과장 해 방송하였고, 분노한 국민은 거리로 나와 엘살바도르인을 찾아 대대적으로 테 러를 감행하여 80억원의 피해와 수십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서로 단교하여 전운이 감돌았다.

3차전은 국제 축구 연맹이 지정한 멕시코시티에서 6월 27일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은 진풍경 속에 벌어졌으며 2:2의 무승부에서 연장전에 들어가 엘살바도르 의 로드리게즈의 결승골로 승부는 엘살바도르에게 돌아갔다.

7월14일 새벽, 선전포고와 함께 엘살바도르 기갑부대는 온두라스로 진격하였다.

온두라스의 반격으로 전쟁은 열전에 들어가고 형세가 불리해진 가운데 온두라스 는 16일 미주기구(OAS) 이사회에 전투중지를 요구하였으며 마침 이날은 인간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최초로 달에 착륙하는 날이라 일단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다시 전투를 개시하여 후퇴를 거듭하던 전쟁은 미주기구(OAS)가 조정에 나서 7월 29일 엘살바도르는 무조건 철수에 합의하였으나 평화교섭은 난항이 계속되 었다. 1976년에 이르러서야 양국은 중재자의 교섭에 합의하여 1980년 페루 리마 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전쟁으로 엘살바도르는 인접한 국가의 무역에 지장을 채래하여 타격을 받았다. 국토 규모가 6배나 큰 온두라스는 2천명의 사상 자를 내고 전쟁과 축구에서 큰 수모를 당했다.

『스페인어 - 까스떼야노』

스페인어는 중남미에서 꼭 필요한 언어이다. 중남미 대륙에서는 포르투갈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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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브라질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동일 언어인 스페인어를 공식 언어로 쓴 다.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한 언어라고 생각하지만 알게 모르게 수많은 어휘가 우 리 생활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자동차 이름 중에 에스페로 (Espero: 희망), 티뷰론(Tiburon: 상어) 등이 모두 스페인어이다. 사실 중₩고등 학교 6년을 배우고도 간단한 회화조차 쉽지 않은 영어에 비해 스페인어는 발음이 쉬워서 한국사람들이 배우기가 비교적 용이한 언어이다. 그리고 영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아 스페인어를 잘 모르더라도 영어 단어를 떠올려 글자 그대로 발음 해주면 대체로 통한다.

스페인어는 여러 언어가 사용되던 이베리아 반도에 조그만 왕국 중 하나였던 까 스띠야 왕국이 스페인을 통일하면서 그 지역의 언어였던 까스띠야어가 스페인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에도 스페인어를“까스떼야노”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언어의 역사를 보면 그리 오래지 않아 보이지만 로마제국 시대에 사용 된,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 나이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라틴어를 모체로 하여 형성 과정에서 히브리어, 희랍어, 게르만어, 아랍어, 신대륙 토착어 등 다양한 언어에서 취사선택된 어휘로 구성되어 연마되 었기 때문에 오늘날 표현이 가장 풍부한 언어로 평가되기도 한다.

스페인어는 스페인을 비롯하여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20여 개국에서 사용된 다. 그리고 유엔기구에서 공식 언어로 쓰이는 5개 언어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주 요 국제기구들도 공용어로 채택한, 중요성이 매우 큰 언어이다. 따라서 외교, 통 상, 문화 등 국제교류활동에서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다.

스페인어는 유엔공용어이자 세계 20여 개국 4억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사용 국가 수에 있어서 세계 1위의 언어이고, 사용인구수에 있어서는 중국 어, 영어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언어이다. 미래의 세계 언어는 영어 와 스페인어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스페인어의 위상은 갈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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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되고 있다. 특히 광활한 영토와 무한한 천연자원을 지닌 중남미 대륙은 우리 나라 경제의 미래를 위해 더 없이 중요한 전략지역으로 지리잡고 있으며, 미국 내 에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히스패닉 인구로 인해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에게 스페인어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 내 히스패닉 가운데 영어만 사용하는 인구는 전체의 12%에 불과하며, 70% 이상은 가정에서 스 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미국 내 인구 증가율은 4.7%로 나이가 어릴수록 수 많은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3~12세 히스패닉 어린 이의 경우 현재 미국 어린이 전체의 4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혼혈인종』

중남미 원주민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몽골계 북부 아 시아인 도래설이 있고 또는 말레이₩폴리네시아계 태평양인 도래설도 있으며 대륙 자체 생성설도 있다. 그러나 머리칼이 검은색이고 황갈색 피부라든지, 태어날 때 몽골반점이 나타난다든지, 아이를 업어 키우는 등 아시아인과 외형이나 생활풍습 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 아시아인 유래설의 신빙성을 높게 한다. 중남미에서는 인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고 신분이동이 유동적이다. 여러인종이 섞여 사는 만큼 문화역시 여러 가지가 섞여 아주 독특한 혼합문화를 이루고 있다.

스페인계(系)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메스티조(mestizo)와 라디노(ladino)가 압도적으로 많아 전체의 약 70%를 차지하며, 그 다음은 인디오 20%, 백인 7%, 흑 인 3% 순이다. 그러나 비율은 나라마다 달라 중미의 유일한 백인국가인 코스타리 카는 백인과 메스티조가 97%를 차지하는 반면 과테말라에서는 인디오가 43% 이 상을 차지하고, 운하건설 등을 위하여 서인도제도로부터 흑인들을 이주시켰던 파 나마에서는 흑인이 14%를 차지하여 중미에서 흑인비율이 가장 높다.

중남미는 세계 최대의 혼혈지역으로 스페인에 의해 정복당한 후 대체로 다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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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혼혈과정을 거쳤다.

원주민과 백인 혼혈을 메스티조(mestizo), 백인과 흑인혼혈을 물라토 (mulatto), 원주민과 흑인 혼혈을 삼보(zambo)라 한다. 메스티조가 우월한 국가 는 멕시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에콰도르, 페루와 볼리비 아 등이다.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은 물라토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혼혈인종은 도시 중하층 노동자 및 소작농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멕시코의 경우 메스티조가 사회 전반에서 활동하고 있다.

원주민과 유럽인의 혼혈은 일반적으로 메스티조(mestizo)라고 하지만 중미에서 는 라디노(ladino), 브라질에서는 카보클로(caboclo) 등으로 불리운다.

히스패닉은 통상‘중남미 출신으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엄밀한 의미에서 인종 구분은 아니다. 미국 인구통계국은 히스패닉을 백인, 흑인, 아시안, 인디언과 같은 인종분류 항목에는 포함시키지 않고 대신‘미국에 사는 라틴아메리카 출신과 그 후손’으로 별도 분류하고 있다.

정보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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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인식에 의하면 중미의 역사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중남미 지역에는 이미 25,000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유카탄 반도와 과테말라 중미를 중심으로 한 마야(Maya) 문명과 멕시코 분지를 중심으로 한 아즈텍(Azteca) 문명으로 대표 되는 중미의 문화는, 인류학 용어로 메소아메리카라고 불리는 멕시코 중부에서 중 미 북부에 걸친 지역을 무대로 하여 번영하였다. 중미의 마야문명과 아즈텍 문명은 남미 페루지역의 잉카문명과 함께 중남미의 3대 인디오 문명을 이루고 있다.

『마야문명』

중미의 인디오문명 중에 문화적으로 가장 발전한 문명이 마야이다. 마야 문명은 기원전 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현 멕시코 유카탄(Yucatan)지역과 과테말라, 온두라스 지역에서 번성한 인디오 문명으로, 지구상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세련 된 문화를 자랑했다. 마야 문명은 B.C. 10세기 경 멕시코 지역에서 발생한 올메카 (Olmeca) 문명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지적이 다수설이지만, 아직도 마야 문명의 실체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마야의 사람들은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엄격하게 구분되는 계급 사회였다.

제사를 담당하는 신관(神官)₩군인₩정치지도자₩상인 등은‘알메헨’이라 불리는 귀 족계층이었고, 농민들은 이들보다 낮은 평민계층이었다. 이들 평민 아래에는 주 로 전쟁포로들인 노예계층이 있었다.

마야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표기법을 갖춘 고유 문자를 가 지고 있었다. 마야글자는 소리글자와 뜻글자가 복잡하게 뒤섞인 형태의 문자였

중미의 문명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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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치 우리나라가 한글과 한자가 섞인 문자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마야인은 1,000여개의 문자를 사용했는데 오늘날 일부가 해독되어 그들이 남긴 기록의 뜻 을 대체로 파악하게 되었다. 마야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네 권만이 전해진다. 대부분의 글자는 건축물이나 비석, 조각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고도의 문명을 뽐내던 마야문명의 최후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마야문화의 기반은 옥수수 재배였으며, 콩₩호박₩고추₩목화 등도 재배했다고 한 다. 마야의 농민들은 방이 하나뿐인 초가에서 살았으며, 50가호 혹은 100가호마 다 공동의 제단(祭壇)이 있어서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나아가 이들 마을들을 통합하는 대신전(大神殿)이 전체 마을들의 중심지에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예술과 지적인 업적은 종교의 부산물이다. 번영과 행복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들은 속세의 이면에 있다고 믿은 정신적인 힘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의 정 신적 힘에 대한 의지는 대단하였다. 많은 신들과 지배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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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태양신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고대 마야문명은 7~8세기에 수준 높은 문명을 발전시키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원시적인 부족전쟁으로 내란을 거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의 정복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붕괴되고 있었다. 마야는 1527년 코르테스의 부하였던 몬 테호(Francisco de Montejo)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복되기 시작했다. 그 후, 1546년에는 유카탄 반도의 북부지역과 과테말라 지역이 정복되었고, 1697년 유 카탄 반도 남부 페텐(Peten)지역에서 저항하던 마야족들이 정복됨으로 마야문명 이 붕괴되었다.

『아즈텍 문명』

아즈텍 문화는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원주민 문화로 마야문화 와 더불어 고도로 발달했던 대표적인 문화였다.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테모츠카인 들은 강가의 대지라 불리는 현재의 멕시코시티의 계곡 부근에 도착한 마지막 집 단이었다. 이들은 표범을 숭배하면서 인간을 재물로 바쳤으며 찬란한 문화를 향 유했다.

이들에게 농업이나 교역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이었다. 아즈텍인들은 전쟁에 매 우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군사적 힘으로 약탈하거나 조공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 에 전쟁을 추구하였으며 그들이 요구하는 조공을 바치는 것을 거절한 도시에 대 하여는 이를 공격의 구실로 삼았다.

아즈텍인들은 상형문자와 정교한 달력을 사용했으며, 철기의 사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금은세공, 토기제작, 피리미드 건축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목테수 마의 왕관’으로 대표되는 깃털공예에도 뛰어났다. 또한 약초 재배가 발달하였다.

스페인 정복당시 아즈텍인들의 외과의술은 유럽의 수준보다 높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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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아즈텍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즈텍의 종교는 다신교였으 며, 주신은 우이트실로포츠틀리(Huitzilopochtli)였으며, 이외에도 농업과 예술 의 신이며 선신인 케찰코아틀 등 많은 신들이 숭배되었다.

아즈텍 문명- 달의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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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를 비롯한 중미에서는‘옥수수의 신’이 있을 정도로 옥수수가 중요하게 여 겨진다. 뿐만 아니라 옥수수는 중미의 신화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마야신화에서 신은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 이 옥수수 인간들은 신과 맞먹는 지혜와 힘을 지니 고 있어서 신들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신들은 결국 옥수수 인간들의 힘을 거두었고 대신에 짝을 주어 삶을 영위하게 하였다. 이들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다.

옥수수는 중미지역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식량자원이었다. 대부분의 중 미 전통음식들은 옥수수로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러한 대표적 음식들은 토르티야, 타코, 타말 등이다.

『토르티야』

옥수수를 원료로 한 토르티야(tortilla)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이다. 토르 티야는 옥수수를 물에 불려 으깨서 밀전병처럼 원형으로 얇게 펴서 구운 것이다. 먹

중미의 음식과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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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흔하지 않던 때에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여물지도 않은 옥수수를 이용해 음식 을 만들었던 것이다.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는 멕시코 식탁에서 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토르티야에 기호에 따라 돼지고기, 닭고기, 치즈 등을 쌈처럼 싸서 양파나 매운 양념을 곁들여 먹는데, 이것이 바로 멕시코 음식의 대표격인 타코(Taco)다.

『타코 & 케사디야』

멕시코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바로‘타코’(taco)라는 음식이다. 타코는 어디 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야말로 멕시코에서 가장 사랑받는 음식이다. 옥수수가 루로 만든 토르티야에다 어떤 음식이든지 다 싸서 먹는다. 우리나라와 중국 음식 에도 타코와 비슷한 것이 있다. 궁중요리인 구절판 요리를 먹을 때 찹쌀이나 밀가 루로 만든 전병에 야채와 고기를 싸서 먹는 것이나, 중국요리인‘페이킹 덕’을 밀 전병에 싸서 먹는 것이 바로 멕시코의 타코와 비슷한 점이다. 타코 요리는 토르티 야에 싸서 먹는 방법에 따라서 수십 가지로 나눌 수 있지만 넓게 말해 토르티야에 싸먹는 모든 형태의 요리를 타코라 할 수 있다.

약간의 변형을 주어서 토르티야에 음식을 넣고 기름에 튀기면 이것이 케사디야 (quesadilla)이다. 넓은 토르티야를 반으로 접어 치즈 등 내용물을 넣고 구워낸 후 부채꼴 모양으로 3~4등분하여 내오는 것이다.

『타말』

과테말라 전통 음식으로‘타말’이 있다. 타말을 먹어보지 않고는 과테말라를 안 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한뼘 길이의 옥수수 떡인데 옥수수 껍질이나 바나나 잎 으로 겉을 싸서 찜통에 쪄 먹는다. 타말은 지역에 따라 맛과 모양이 다양하지만

‘로호’(토마토와 매운 고추 소스로 간한 쫄깃한 치즈를 넣음), ‘베르데’(초록 토마 토 소스와 돼지고기로 속을 채움), ‘네그로’(고추 카카오 소스와 닭고기) 등 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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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주류다. 우유, 파인애플, 그리고 건포도가 들어 달콤한‘둘세’타말도 있다.

타말은 껍질을 손으로 벗기고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또는 둥근 빵을 반 갈라서 햄버거처럼 타말을 끼워먹기도 한다. 타말에 반드시 곁들이는 음료는‘아톨레’인 데 옥수수를 뜨거운 우유에 타 끓여서 과일즙이나 초콜릿, 캐러멜로 맛을 낸 것이 다. 아침 준비가 바쁜 가정에서도 타말은 유용한 먹을거리로 저녁에 사 가지고 들 어가 아침에 쪄 먹는다. 타말과 아톨레는 잔치 때도 즐겨 먹는다.

『중미의 춤과 음악』

최근 우리나라 대학가의 라틴 바에서 살사, 메렝게, 차차차 등 라틴 댄스를 즐 기는 젊은이 및 중년층을 많이 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도 라틴 댄스가 깊숙이 전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라틴 댄스에 동반되는 음악도 춤과 함께 인기를 끌 게 되었다.

중남미 지역은 주말이면 동네 나이트 클럽에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러 오는 커 플들로 넘친다. 하지만, 일부 남미 국가에서 메렝게, 살사, 차차차 등은 저소득층 이 즐기는 춤으로, 고소득층은 매우 촌스러운 춤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러한 라틴댄스를 즐기는 나이트 클럽과 부유층이 주로 가는 테크노 나이트 클럽 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경제적 및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댄스가 부 유층에게 공감을 얻지 못해 발생한 사회적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춤은 중남 미 주말 파티 및 축제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중남미 문화 및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예술이다.

메렝게는 도미니카 공화국 및 아이티 섬에서 유래되었으며, 아프리카`-`카리브 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음악이다. 하지만 지금 알려진 메렝게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메렝게는 19세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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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한 유럽 춤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음악에는 서민들의 설움과 사 회적 및 정치적인 불만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렝게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아프리카-카리브 음악의 경쾌한 음악과 쉬운 2/4박자 리듬이었기 때문이 다. 1930년대에 메렝게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상징적인 음악 및 춤으로 각인되었 으며, 현대적인 요소가 혼합되면서 라틴 음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살사는 1960년대 뉴욕의 카리브 이민자 거주지에서 쿠바 음악이 발전해 생성되 었으며, 중남미에서 인기 있는 음악이자 댄스이다. 60년대의 라틴계 이민 거주지 는 카리브의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의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살사도 이 지역의 소외된 주민들의 사회적 불만, 사랑, 범죄, 마약 등 뉴 욕의 빈민 거주지에서 빈번했던 요소들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살사 음악의 제 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내용에는 폭력과 사회적 반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내용과 대조적으로 리듬은 매우 경쾌하고 화려하며 동적으로, 대표적인 라틴 댄 스로 지금도 그 유명세를 널리 떨치고 있다. 춤을 비롯하여 살사 음악은 라틴 팝 의 대표적인 장르로도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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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소스’를 의미하며 여러 종류의 양념으로 음식 의 맛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뜻이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살사는 쿠바의 론, 룸 바, 기타 카리브 지역의 음악인 봄바 및 쿰비아, 그리고 남미의 삼바 및 탱고의 적 절한 혼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사의 이름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장르의 음악과 리듬의 혼합과, 톡쏘는 열 정적인 요소가 넘치기 때문에 살사라 칭했다는 것이다. 다른 설은 라디오 프로그 램에서 이 음악 장르를 방송하면서 후원한 업체가 바로 소스 업체였기 때문에‘살 사’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라틴 댄스인 차차차도 메렝게와 살사에 못지않게 경쾌한 리듬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차차차의 유래도 매우 재미있다. 이는 쿠바 바이올리니스트인 엔리케 호린이 1948년에 개발한 춤이다. 1950~60년대에 유행한 맘보의 대를 이 어, 차차차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 춤을 개발한 엔리케 호린은 처음 에 차차차를‘Neodanzon’이라 칭했지만, 빠른 4/4박자의 세스텝으로 인해 바닥 에서 나는 소리가 ’차차차‘로 들려 이것이 춤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카리브에서 유래된 많은 라틴 댄스가 있다. 이러한 라틴 댄스속에서 도 중남미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카리브의 흑 은들은 노예 해방을 맞아 길거리로 나와 춤을 추며 노래했다. 이들은 그 사회에 잠재되어 있었던 차별과 불평등을 다시 노래와 춤으로 표현 하였다. 미국으로 이 민을 간 카리브인들도 미국 생활에서 겪는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사랑의 실패로 인한 고통을 담은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그 리듬이 경쾌하고 열정적인 것은 이들이 노래와 춤을 통해 잠시나마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 다. 라틴 댄스의 탄생은 수많은 중남미인들의 고통에서 비롯되었지만, 라틴 댄스 는 일상생활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열정과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는, 중 남미가 생산한 세계적인 문화 상품이라 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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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사메무초(Besame mucho)』

영어로 kiss me much 란 뜻으로 멕시코 어느 여가수가 리라꽃(라일락)에 얽힌 아픈 사랑이야기를 베사메무초란 제목의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비 틀즈, 냇 킹 콜, 플라시도 도밍고까지 세계 유명가수들이 꼭 한 번씩 부르고 넘어가는 베사메무초는 친근하고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세계적으로 50여 개의 다른 버전을 가지고 있다.

Besame, Besame mucho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 Besame, Besame mucho

Que tengo miedo perderte perderte otra vez Quiero tenerte muy cerca

mirame en tus ojos verte junto a mi

Piensa que tal vez manana yo ya estare lejos muy lejos de ti Besame, Besame mucho

Como si fuera esta noche la ultima vez Besame, Besame mucho

Que tengo miedo perderte perderte amor 키스해 주세요, 많이(뜨겁게) 키스해 주세요 마치 오늘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해 주세요, 많이(뜨겁게) 키스해 주세요 나는 또다시 당신을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워요 아주 가까이 당신을 두고 싶어요

당신 눈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싶고 내곁에서 당신을 보고 싶어요

내일이 되면 혹시라도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것만 같아요 키스해 주세요, 많이(뜨겁게) 키스해 주세요

마치 오늘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해 주세요, 많이(뜨겁게) 키스해 주세요 나는 당신을 잃을 것만 같아 두려워요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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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는 1914년 개통이후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 주는 지름길로서 전세계 교역확대에 크게 기여해 오고 있고 또한 지리적 요충지 로서 군사상으로도 중시되어 온 바 있다. 우리의 경우, 미국을 비롯한 미주지역에 대한 교역의 확대와 다변화로 우리 선박의 운하통항 횟수와 화물량도 매년 증가 해온 바 있고, 파나마의 콜론(Colon) 자유무역지대를 거점으로 한 대 중남미·카 리브 연안국에 대한 시장 진출도 활성화 되고 있어 파나마 운하를 통한 경제적이 고 신속하며 안전한 통항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파나마운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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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세계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 적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운하의 굴착 계획은 1529년 코르테스의 건의를 받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5세에 의해서 구상되었으나, 실제로 공사가 착수된 것은 1880년 이후이다. 이보다 한해 앞서 수에즈 운하를 완성시킨 프랑스의 레셉스는 7년만에 운하를 완공하겠다고 장담하고 동시에 1881년 양대양(兩大洋) 주식회사 를 설립,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 때문에 수평식 굴착계 획을 변경하여 갑문식 운하를 파기로 하였고 황열(黃熱)₩말라리아 등이 만연한 데 다 자금이 부족해 9년 만에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1894년에 프랑스 계 새 회사가 설립되었으나 이 회사는 그 당시 파나마 횡단철도를 완성하고 운하 건설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던 미국에게 가능한 한 비싸게 운하 굴착권을 팔아 넘기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1903년 미국은 프랑스 회사로부터 운하 굴착권과 설비 일체를 4,000만 달러에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콜롬비아 정부로부터 운하건설에 필요한 지역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사들이려던 계획은 콜롬비아 상원에서 거부되었다. 그 후 미국은 파나마를 지원해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을 승인하고, 11월 18일 파나마와 헤이 뷔노 바리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듬해 5월 4일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운 하건설공사를 정식으로 인계받았다. 처음 2년 동안은 군의(軍醫) 고거스를 중심으 로 철저한 방역대책이 실시되었으며 그 후 8년 동안 잇달아 일어난 절벽붕괴를 막 는 한편 증기삽, 준설선 등 새로운 공학의 진수가 모두 동원되었다. 또 유럽에서 12,000명, 서인도 제도에서 31,000명 등 방대한 숫자의 노동력을 투입한 끝에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운하가 완성되어 81,237톤의 퀸 엘리자베스 호가 사상 최초로 이 운하를 통과하였다. 연간 평균 이용 선박의 수는 15,000척이며 운하를 통과하는 데에는 약 8시간이 걸린다.

파나마 운하의 완공으로 콜론(Colon) 자유무역지대가 창설되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양대양을 통해 접근이 가능한 자유 무역의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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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무역지대에는 중남미 카리브 연안국 등을 상대로 무역을 중계하는 업소가 500여 개로, 다양한 인종이 종사하고 있으며 특히 유태인, 아랍계, 중국, 인도계 가 주요 상권을 형성하는 가운데 한국 교포 및 지상사 약 20여 개도 활동하고 있 다. 이는 홍콩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중계 무역지대로 수출입 규모가 연간 평균 110억 달러에 달하고 25만여명의 사업가와 관광객이 왕래하며, 중남미의 금 융 중심지라는 이점까지 가지고 있다.

파나마 운하 제원

착공연도 : 1904년 완공연도 : 1914년

공 사 비 : 3억5200만달러(수에즈운하의 4배 규모) 총 길 이 : 82km

연간 선박 통과 횟수 : 15,000회

수문규모 : 선채 폭 33.5m(수로 깊이 1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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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파나마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미국이 신생공화국 파나마에 금전적 보상과 보 호를 보장하고, 파나마는 그 대가로 미국에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독점 건설 권을 부여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 미국은 1903년 1월 22일에 체결된 헤이 에란 조약 (Hay Herran Treaty)에서 당시 파나마를 지배하고 있던 콜롬비아에 비슷한 조건을 제공했지만,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콜롬비아 정부는 자국의 주권 침해를 이유로 조약의 비준 을 거부했다.

미국 정부의 묵인과 인근 해역에서 미국 해군의 우호적인 호위하에 파나마는 1903년 11월 3월 콜롬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고, 3일 후에 미국은 사실상 독립을 승인했다.

이어 11월 18일 워싱턴에서 파나 마대표 필리프 뷔 노 바리야와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 는 지협을 횡단하 는 너비 16km의 운하 건설 부지를 미국에 영구적으 로 양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약 을 체결했다. 미국 은 이 운하지역을 통치하고 요새화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파나마는 그 대가로 독립을 보장받고 일시불로 1,000만 달러를 지급받았으며 9년후부터는 연간 25만 달러를 지급받았다.

조약이 발효되면서 조약의 해석과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파나마인에 대한 차별을 둘러싸 고 간헐적인 분쟁과 소송이 발생했다. 1968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토리호스장군은 1977년 미국의 카터대통령과 파나마운하 운영권 이양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토리호스-카 터조약)을 체결하였고, 이 조약에 의거하여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 부로 파나마운하 운 영권을 파나마에 인계하였다.

정보 마당

파나마 운하 전경

헤이 뷔노 바리야 조약 (Hay Bunau Varilla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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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유₩의류 산업은 중미 산업의 근간이다. 노동집약적인 산업 특성상 섬유₩의류 산업은 중미 각국에서 고용창출의 톡톡한 효자노릇을 해오고 있다. 최근 중미 각 국에서 섬유₩의류산업의 발전은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에 대한 수출실적에서 확인 된다. 지난 19년(1990~2008년)간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중미 5개국의 미국으로 섬유₩의류 수출은 금액기준으로 약 11배 증가했다. 1990년 7억 달러에 불과했던 중미 5개국의 미국에 대한 섬유₩의류 수 출은 2008년 79억 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미국 섬유₩의류 수입시장에서 점유 율도 3.2%에서 11.5%로 껑충 뛰었다.

이와 같이 중미에서 섬유₩의류산업이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 이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미국이 1980년대 중반부터 중미국가들에게 제 공한 무역특혜제도였다. 미국은 중미₩카리브지역의 경제적 빈곤이 지속되면서 니 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등장 및 과테말라 내전 등 정치적인 불안정이 심화되자 1983년부터 중남미지역의 저개발국인 중미와 카리브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중미

₩카리브지역 무역특혜법(Caribbean Basin Initiative; CBI)을 제정해 시행해왔 다. 이같은 미국 정부의 중미지역에 대한 파격적인 일련의 특혜무역제도는 미국 시장에 대한 근접성, 값싼 노동력 등 중미지역의 비교우위와 결합되어 이 지역의 섬유₩의류산업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공업단지가 발달한 온두라스는 현재 중미 최대 의류 수출국이다. 온두라스에서 의류수출은 1995년부터 비약적인 성장세를 거듭해왔다. 과테말라는 중미 국가 중 에서도 가장 섬유산업이 발달한 국가이다. 한편, 과테말라에서 봉제의류산업의 발전은 1990년대 본격화 되었는데, 한국기업들의 보세가공산업 진출이 활발하다.

엘살바도르의 섬유산업중 봉제기업수가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전체 봉제기업 중

중미는 섬유₩의류산업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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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기업이 65%에 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중미에서 노동비용이 가장 저렴한 니카라과는 중미 국가 중에서 섬유₩봉제산업 의 역사가 가장 짧다. 니카라과의 미국으로의 의류 수출이 본격화된 것은 1993년 부터이다. 하지만 최근 니카라과 섬유₩봉제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코스타 리카는 1994년까지 중미 국가 중에서도 미국으로 가장 많은 의류를 수출하던 국 가였으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에 따라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경쟁력을 상실, 2008 년에는 중미 5개국 중 가장 낮은 대미국 의류 수출 규모를 기록하였다.

최근 들어 중미 섬유₩의류산업의 앞날에 대한 불안한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 되고 있다. 2002년 11.9%로 정점에 달했던 중미산 섬유₩의류 제품의 미국 수입 시장 비중은 2003년과 2004년에는 11.3%로 하락한 후, 2008년에는 11.5%로 약 간 상승하였다. 그 근간에는 중국과 베트남의 약진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2005 년부터 WTO 섬유쿼터 폐지에 따라 낮은 임금을 무기로 중국 및 베트남산 의류의 미국시장 수출이 대폭 확대되어 중미국가에게 큰 타격이 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에서 중미 섬유₩의류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향후 아시아제품과 차별화되는 틈 새시장 개척, 인프라 개발 등 다각적인 노력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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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 통합의 역사는 중미 5개국(과테말라,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 스타리카)이 스페인과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여 단일국가인 중미연방을 구성했던 18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40년에 중미연방은 해체되었으나, 이러한 역사 적 경험으로 인해 중미 국가들의 지역통합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세계대전 이후 중미 국가들은 유럽의 통합 움직임과 UN 중남미₩카리브 경제이사회(Comision Economica para America Latina y el Caribe;

CEPAL)의 지역통합 권고에 영향을 받아 1951년 10월 14일 엘살바도르의 산살바 도르에서 개최된 중미 외무장관회의에서 제1차 중미기구헌장(산살바도르 헌장)을 조인하여 지역기구인 중미기구를 발족시켰다. 또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출 범한 1958년에는 중미자유무역경제통합협정(테구시갈파 협정)을 체결하여 중미 경제통합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1960년 12월 13일 테구시갈파 협정을 개정한 중미경제통합일반협정(마나구아협정)을 체결하여 관세동맹인 중미공동시장 (Central American Common Market; CACM)을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1961년 이후 중미 역내국간 교역자유화, 역내 관세철폐 및 역외 공동관 세제도를 부분적으로 시행하였고, 중미경제통합사무국(Secretaria de integracion Economica Centroamericana; SIECA), 중미경제통합은행(Central American Bank for Economic Integracion; CABEI) 등이 설립되었다.

중미공동시장 출범 이후 1960년 7%에 불과했던 역내무역 비중이 1968년에는 25%로 증가하는 등 중미공동시장은 출범 초기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역내 무역 확대의 혜택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 산업화수준이 앞선 일부 국가에 집 중됨에 따라 역내국간 무역 분쟁이 증가하고,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간

중미통합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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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명 축구 전쟁)이 발발하는 등 역내 정세불안으로 인해 1960년대 후반 이후 중미기구와 중미공동시장의 기능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냉 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콘트라 반군의 활동 등 지역분쟁과 내전에 시달리던 중 미 국가들도 게릴라단체와 연이어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중미지역에 평화무드 가 조성되었고,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세계적인 지역통합 추세에 영향을 받아 중미통합을 재추진하게 되었다.

마침내 1991년 12월 13일 제 11차 중미정상회의에서 중미 6개국(기존 5개국 및 파나마) 정상들은 이미 사문화되었던 중미기구 헌장을 수정한 테구시갈파 의정서 (Protocolo de Tegucigalpa)에 조인하였고, 기존의 중미기구를 대체한 새로운 중미통합기구인 중미통합체제(SICA)를 출범시켰다. 1993년 2월 1일에는 SICA가 정식 발효되었으며, 1993년 10월 29일에는 중미경제통합일반협정을 수정한 과테 말라 의정서(Protocolo de Guatemala)에 조인하여 관세동맹인 중미공동시장을 부활시켰다.

『중미통합체제(Sistema de la Integracion Centroamericana; SICA)』

테구시갈파 의정서와 과테말라 의정서에 의해 중미통합체제(SICA)가 출범하였 고, 중미공동시장도 부활하였다. 현재 SICA의 경제부문 통합추진 실무는 SICA의 산하기구로 재편된 기존의 중미경제통합사무국(SIECA)이 담당하고 있으며 경제 부문을 제외한 정치, 사회, 문화 부문에 대한 통합 추진실무는 중미통합일반사무 국(SG`-`SICA)이 담당하고 있다.

1993년 SICA 출범당시 파나마가 정회원국으로 참여하였고, 2000년 12월에 벨 리즈가 SICA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2003년 12월에는 도미니카공화국이 SICA 준회원국으로 가입하여 현재 SICA 회원국은 정회원국 7개국(과테말라, 온 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파나마, 벨리즈)과 준회원국 1개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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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카공화국이며, 대만 (’02년 4월), 스페인 (’04년 11월), 멕시코(’04년12월), 칠 레(’08년 6월), 독일(’08년 6월), 브라질(’08년 10월), 이탈리아(’08년 12월), 아르헨 티나(’09년 6월) 등이 옵서버로 참여하고 있다.

SICA의 설립 목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통합을 통한 중미지역의 자유₩평화

₩민주주의 및 경제발전의 달성이다. SICA는 이외에도 민주주의 강화 및 지역안보 의 새로운 모델 구체화, 경제통합의 달성과 경제블록으로서의 지역 역할 강화, 회 원국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분야의 조화 및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SICA는 중미 통합운동을 총괄적으로 조정₩지원하는 구심체로서 중미통합의 법 적 및 제도적 기본 틀을 형성하고 있다. 중미 정상회의를 정점으로 각료회의, 집행 위원회, 사무국, 중미의회, 중미사법재판소 등 중앙조직과 중미통화위원회 등 약 20여개 이상의 각 분야별 지역기구 또는 위원회를 산하조직으로 두고 있다.

『중미공동시장(Central American Common Market; CACM)』

중미공동시장에는 중미 5개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명칭과는 달리 불완전한 관 세동맹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중미 5개국간에는 자유무역이 이루어지고 있고, 역 외공동관세 부과상품 비율도 94%에 이르고 있다. 중미공동시장은 점진적으로 완 전한 관세동맹 결성, 공동관세 행정기구 설립, 노동 및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단 일통화 도입을 통한 통화동맹(monetary union) 결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중미 역내국 국민들의 자유로운 국경 왕래가 시행되고 있으며, 2005년부터 코스 타리카를 제외한 중미 4개국은 통합여권을 발행하고 있다.

중미공동시장의 부활 이후 중미의 총수출과 역내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모두 증가하고 있다. 중미 5개국의 총수출 규모는 1990년 39억달러에서 2008년에는 219억달러로 5.6배가 증가하였고, 역내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1990년 17.1%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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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2008년에는 29.5%로 증가하였다. 중미 5개국은 역내 자유무역을 저해하는 비관세장벽을 서로 지적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상호협조하면서 역내비관세장 벽도 크게 축소되고 있다. 이에 따라 역내국들이 지적한 비관세장벽도 2002년 70여개에서 2008년에는 거의 대부분 철폐되었다.

역내국간 무역법규, 통관 및 수입절차, 보건위생 규정 등을 일원화하고 상호 연 계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3개국은 세관 통합을 완료하였다. 또한,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를 표방하고 있는 중미공동시장은 자유무역협정 체결등을 통해 역외국과의 관계 강 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중미는 도미니카공화국, 멕시코, 칠레 등과 이미 FTA 를 체결하였고, 2006년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인 DR`-`CAFTA가, 2008년 타이 완과 FTA가 각각 발효되었으며, EU와의 자유무역협정 체결도 추진하고 있다.

『중미경제통합은행Central American Bank for Economic Integration; CABEI)』

중미경제통합은행(CABEI)은 중미경제통합일반협정(마나구아 협정)에 의거, 중 미공동시장 역내국의 경제발전과 동 지역의 경제통합 촉진을 목적으로 중미국가 들이 공동설립한 중미의 지역개발금융기관이다. 1961년 5월 8일 업무를 개시하 였고, 1992년 1월 20일 역외국 회원가입을 허용한 이래 역외국들의 가입으로 현 재 회원국은 역내국 5개국(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 과)과 역외국 7개국(멕시코, 대만,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스페인, 도미니카공화 국, 파나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벨리즈가 가입 의향서에 서명한 상태이며, 우리나라도 CABEI 가입을 추진하고 있고, 한국수출입은행의 경우 1992년 1월 최초로 CABEI 앞으로 전대자금 신용한도를 공여한 이후 현재까지 양호한 거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CABEI 최고의사결정기구는 운영위원회(Assembly of Governors)로써 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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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재무 또는 경제장관, 중앙은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신규회원국 가입 및 가입조건, 자본금 증감, 총재선출, 규정제정 등을 결정한다. 한편, 신규 회원국 가 입은 창설 5개국을 포함한 회원국 3/4 이상의 지지가 필요하다. 이사회(Board of Director)는 총 9명으로 구성되는데, 5명은 각국 운영위원이 선출하며, 나머지 4 명은 역외국 운영위원이 선출한다. 이사의 임기는 역내국 이사 5년, 역외국 이사 2년이다. 총재(Executive President)는 이사회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2005년 8월 현재 CABEI 회원국 출자자본금은 20억달러, 납입자본금은 4억 2,743만 달러이다. CABEI는 역내국의 경제발전과 지역경제통합을 위해 주로 통 신, 에너지, 도로, 사회개발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에 대한 금융제공 업무를 수행 하고 있다. 1991년부터는 역내국 중앙은행에 신용한도(Credit Line)를 설정하거 나, 상업금융기관과의 협조대출 등을 통하여 농업, 산업구조조정, 수출, 중소기업 지원 등 민간부분에 대한 금융제공 업무를 개시하였다.

CABEI는 2003~2008년간 대출집행 기준으로 총 208억 달러를 지원하였으 며, 주요지원부문은 인프라 26%, 국제금융 25%, 사회서비스 13%, 주택 6%, 산 업 6%, 교통통신 5% 등이다.

CABEI는 2009년에도 43억달러의 대출을 승인하고 31억달러를 집행하는 등 중미지역에서 미주개발은행(IDB)과 함께 중요한 지역개발금융기관의 역할을 수 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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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 남쪽에 위치한 면적 108,889km2, 인구 1,350 만명의 국가로 과테말라의 북동부와 유카탄반도는 마야족의 문명 중심지였다. 과 테말라의 지형은 태평양 연안에 동서 방향으로 발달한 좁은 해안평야, 북부의 페 텐호수를 중심으로 한 넓은 저습지, 시에라마드레산맥의 중앙고원, 카리브 해안 평야의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중앙을 통과하는 시에라마드레산맥은 멕시코와의 접경지역에서는 해발고도 3,500m이고, 동쪽으로는 고도가 낮아져 온두라스와의

과테말라 일반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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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서는 2,000m가 된다. 이 곳에는 활화산이 많으며, 산지에는 화산폭발시 함몰된 곳에 형성된 아티틀란호, 아마티틀란호 등 아름다운 호수들이 있다. 시에 라마드레산맥에 이어지는 중앙고원은 단층과 하곡평야로 깎여져 있으나, 두꺼운 화산재로 덮여 있어 비옥한 농업지대를 형성한다. 특히 산기슭에서는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인 커피 재배가 활발하다.

과테말라는“영원한 봄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섭씨 24도의 기온과 풍부한 강 우량, 다양한 야채와 많은 곡물 수확량 등이 이러한 이름을 만들어 냈다. 과테말 라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를 이룬다. 강우량은 고도차에 따 라 다르며, 수도인 과테말라시에서는 연강수량 1,316mm, 케살테낭고에서는 670mm 내외이며 기온은 15~20℃로 이 나라의 주요한 생활무대를 이루고 있다.

한편 카리브 해안저지는 연간 5,000mm의 강우량을 보이는 고온다습한 곳으로, 열대수림이 무성하다.

전체 인구의 43%가 23개 원주민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메스티조 50%, 백인 등 기타 인종 7%로 구성되어 있다. 소수의 스페인계 후손인 백인은 상류층으로 정 치, 경제의 핵심을 장악하고 있다. 원주민은 농업이나 노동자로 종사하고 있어 경 제적으로는 매우 빈곤하다. 메스티조는 대개 상인, 공무원, 정치가로 활동중이고 스페인식 전통을 추구하고 있다. 스페인어가 공용어이나 23개 부족들은 각기 고유 한 원주민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원주민어만을 사용하는 인디오들은 매우 드물다. 종교는 70% 이상이 가톨릭이며 개신교가 나머지를 차지한다.

마야 문명과 인디오의 나라로 불리는 과테말라는 마야 문명을 중심으로 번영했 었지만 마야문명의 갑작스런 멸망 후 1524년 스페인에 정복되어 300년간 스페인 의 식민지였고 1821년 독립, 1840년 연방 해체로 과테말라 공화국이 되었다. 과 테말라의 정체는 입헌공화제로서 현재 대통령은 임기 4년으로 2008년 취임한 알 바로 콜롬(Alvaro Colom)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인 단원제이다. 수도인 과테말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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