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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7대 불가사의 - 멕시코의 ‘치첸이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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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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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글

(1)

2009년 집중탐사 - 중앙아메리카(멕시코ㆍ 과테말라ㆍ온두라스) 마야문명과 쿠바

기원전 1200~400년(단군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올메까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라벤따유적공원(비자에르모사)에서 중앙아메리카 문화의 기원을 만난다.

1)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 유적 - 떼오띠와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 아스카제국의 중앙신전 유적 - 템플로 마요르

1) 세계 7대 불가사의 - 멕시코의 ‘치첸이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 고대 마야의 수수께끼를 풀어준 - 멕시코 ‘빨렝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 정글에 묻힌 마야 최대의 유적 - 과테말라의 ‘띠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4) 마야 문자와 비석의 보고 - 온두라스의 ‘꼬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 마야시대 벽화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 멕시코의 ‘보남빡’

2) 세계 최대의 비석(높이 11m) - 과테말라의 ‘끼리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3) 고고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죽은 자의 언덕 - 과테말라의 ‘까미날 후유’

1) 멕시코 고대 문명의 집대성 -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

2) 과테말라 고대 문명의 집대성 - 과테말라 국립고고민족학박물관 3) 온두라스 꼬빤의 마야 집대성 - 마야고고학박물관

1) 헤밍웨이가 살던 집 - 헤밍웨이 박물관

2)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 코히마르

3)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쓴 - 암보스 문도스 호텔 4) 체 게바라의 첫 저택(Centro Cultural Casa del Che en la Cabaña) 5)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유물이 전시된 집무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쿠바 땅에 세운 한인 쿠바 진출 기념비를 찾는다.

1) 쿠바 최대(25㎞)의 비치 리조트 - 바라데로

2) 세계적 명성을 가진 카리브해의 코발트불루 리조트 - 칸쿤

(2)

답사 일정

1. 1월 6일(화)

서울(15:00) - KE017 - LA - MX901 - 멕시코시티(18:55)

♨ 멕시코시티 1박

2. 1월 7일(수) 멕시코시티

오전 : 떼오띠와깐(Teotihuakan, 08:00~19:00)

오후 : 인류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o, 09:00~19:00)

♨ 멕시코시티 2박

3. 1월 8일(목) 멕시코시티 - 비자에르모사

오전 :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09:00~17:00)

멕시코시티(14 : 45) - MX7705 - 비자에르모사(15 : 45)

♨ 비자에르모사 1박

4. 1월 9일(금) 비자에르모사 - 빨렝께

오전 : 라벤따유적공원(Parque-museo de al Venta, 08:00~16:00)

인류학지방박물관(Museo Regional de Antropologis, 09:00~17:00) 빨렝께로 이동

오후 : 마야 유적지 빨렝께(Palenque Ruinas, 08:00~17:00)

♨ 빨렝께 1박

5. 1월 10일(토) 빨렝께 - 보남팤(Bonampak) - 과테말라 플로레스(Flores)

오전 : 마야 벽화의 보고, 보남팤(Bonampak)

오후 : 과테말라 플로레스로 이동

♨ 플로레스(띠깔) 1박 6. 1월 11일(일) 플로레스 - 띠깔 - 끼리과

새벽ㆍ오전 : 마야 최대 유적지 띠깔(ruinas de Tical, 06:00~18:00) 오후 : 끼리과로 이동

♨ 끼리과 1박

7. 1월 12일(월) 끼리과 - 온두라스 꼬빤 - 과테말라시티

오전 : 마야 유적지 끼리과(Ruinas de Quirigua, 08:00~16:00) 온두라스 꼬빤으로 이동

오후 : 마야 유적지 꼬빤(Ruinas de Copan, 08:00~17:00)

♨ 과테말라시티 1박 8. 1월 13일(화) 과테말라시티 - 쿠바 아바나

오전 : 마야 유적지 까미날 후유(Sitio Arqueologico de Kaminal Juyu, 08:00~16:30, 국립고고민족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rqueologia y Etnololgia, 09:00~12:00)

과테말라시티(16:30) - LR654 - 쿠바(22:05) - 산호세 경유

♨ 아바나 1박

(3)

9. 1월 14일(수) 쿠바 아바나 - 바라데로

오전ㆍ오후 : 아바나 시내관광 저녁 : 바라데로로 이동

♨ 바라데로 2박 10. 1월 15일(목) 쿠바 바라데로, 마탄사스, 코히마르 - 아바나 오전 : 바라데로 수영

오후 : 바라데로 - 마탄사스 - 코히마르 - 아바나

♨ 아바나 3박 11. 1월 16일(금) 아바나(07:35) - MX7323 - 칸쿤(07:40)

하루 종일 - 세계 7대 불가사의, 치첸이짜

♨ 칸쿤 1박 12. 1월 17일(토) 칸쿤 - LA

오전 : 칸쿤 수영

칸쿤(17:40) - MX946 - LA(21:05)

♨ 항공기(공항) 1박

13.

1월 18일(일) LA - 한국

LA(00:10) - KE012 - ♨ 항공기 2박(날짜변경선) 14. 1월 19일(월) 서울 도착

- 서울 (06:10)

* 항공편은 바뀔 수 있음.

* 미국 비자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미국 비자 면제 여부가 주목됨.

과테말라 띠깔의 1호 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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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월 6일(화)

서울(15:00) - KE017 - LA - MX901 - 멕시코시티(18:55)

♨ 멕시코시티 1박

2. 1월 7일(수) 멕시코시티

* 멕시코시티 (Mexico D. F.) ***********************************

멕시코시티는 인디오인 아스떼까의 시대에는 호수에 떠 있는 커다란 도시였다. 그러나 스페인 이 점령한 후 호수를 메워버렸기 때문에 현재처럼 분지의 형태가 되었다. 아스떼까 도시에 있던 건축물 역시 묻혀 버리거나 파괴되었다. 지금도 멕시코시티의 지하에는 아스떼까의 도시가 잠들 어 있다.

멕시코시티는 아스떼까제국과 스페인 식민지시대의 옛터, 그리고 중남미 여러나라의 중심지로 서 현대 문화가 섞여 있는 860만 인구(수도권까지 포함하면 2000만이라고 한다)의 대도시다.

유럽에서 콜럼부스가 찾아오기 전에 이미 스스로 독자적인 고도의 문명을 가진 민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멕시코시티의 원주민인 아스떼까인들은 호수 위에 거대한 도시를 건설하여 살고 있 었는데, 나중에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이 떼스꼬꼬라는 이 호수를 매워버렸기 때문에 지금 같은 함 지땅이 되어버렸다.

「‘꿈의 세계란 이런 것인가!’ 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높은 탑, 신전, 건물 같은 것들이 수중 에 우뚝 세워져 있어 병사들 가운데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는 자 도 있었다.」 아스떼까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꼬르떼스가 지휘하던 군대의 기록관은 떼노치띠뜰 란(?)이라 부르던 현재의 멕시코시티를 처음보았을 때의 놀라움을 그렇게 쓰고 있다.

현재의 멕시코시티는 아스떼까제국의 중심지였던 신전이나 궁전을 부셔 그 석재로 스페인풍의 시가지를 만들고, 호수를 메워 완성하였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거대한 유적 위에 지금의 수도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내에서 신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국립궁전 옆의 템플로 마요르나 3문화광장, 그리고 남쪽의 꾸이꾸일꼬 같은 곳이 있다.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멕시코시티 거리에 나타난 멕시코 전통 샤먼

오전 : 떼오띠와깐(Teotihuakan, 08:00~19:00)

멕시코시티의 북쪽 약 50km 되는 곳에 있는 떼오띠와깐의 피라미드군은 기원전 2세기 경에 건축된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국가였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 도시를 건설한 것은 떼오띠와깐 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을까? 그리고 7세기경 의문 의 쇠퇴와 함께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떼오띠와깐 문명은 멕시코 분지를 중심으로 A.D. 350-650년 사이에 번영의 절정기에 도달했 다. 도시의 면적은 20만㎢ 이상이 되지 못했지만 인구는 20만 명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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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것을 당시의 유럽과 비교해 보면 유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한다면 인구 2만 이상의 도시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떼오띠와깐이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짐 작 할 수 있다.

그들이 영위한 정치 형태는 모든 행정을 관할하는 신관(神官)을 정점으로 군인ㆍ상인으로 계급 이 나누어져 있었으며 최하층인 장인들도 직종별로 각각의 바리오(지구)에 정연하게 거주하고 있 었다. 그리고 신관 그룹은 잠시도 쉬지 않고 피라미드의 건설을 지도하고, 종교 제례를 정확하게 결정하기 위해 수학ㆍ천문학의 지식을 탐구하고 있었다.

후에 폐허가 된 떼오띠와깐을 방문한 아스떼까인들은 장엄한 피라미드군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신들이 지은 도시라고 믿고, 그들의 우주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태양과 달의 신화’ 무대로 삼았 다. 현재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이라는 명칭에도 아스떼까의 신화가 투영되고 있다. 떼오띠와 깐은 당시로서는 그만큼 거대한 도시였던 것이다.

유적을 돌아볼 때 먼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따르따블로레라는 건축 양식이다. 경사진 기반 위에 수직으로 판면(板面)을 끼워 넣은 기단(基段), 그것의 중첩이 거대한 피라미드의 형태를 이 루고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건물의 공통된 특징이다. 또 현재는 석면(石面)이 드러나 있는 피라 미드도 전에는 회반죽으로 덮여 있었으며 안료로 벽화가 묘사되어 있었다 하니 그 화려함은 대단 했을 것이다.

해피라미드에서 바라다 보이는 달피라미드 떼오띠와깐은 멕시코 학생들의 현장 학습장

세계에서 세 번째로 거대한 해(太陽)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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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 인류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io)

<화 - 토 09:00-19:00 일 10:00-18:00> 45페소=3,825원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유명한 규모와 내용을 자랑하는 대 박물관이다. 떼오띠와깐, 마야, 아 스떼까 같은 유적을 비롯하여, 영원히 보존할만한 발굴 유물을 가려 뽑아 전시하고 있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적에서 중요한 벽화나 석상은 현지 신전에는 없고,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는 유적이 존재하는 현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한 전시품이 다 수 있다. 예를 들면 빨랑케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왕의 분묘를 비롯하여 유적의 발굴품들이 더 좋은 상태로 보존된 채 감상하기 쉽게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1층은 북쪽 끝의 입문(1실)에서 시작하여 시계반대 방향으로 나아가 남쪽의 서부 멕시 코실(12실)까지 훌륭한 전시가 계속된다. 바쁜 사람은 태양의 역석(曆石)이 있는 멕시까=아스떼 까실(7실)을 먼저 보고나서 다른 전시를 보면 좋다.

기원전에 만든 거대한 올메까 돌머리상 BC 7세기의 까까슈틀라 벽화 “새사람(鳥人)”

떼오띠와깐 께짤꼬아틀의 깃털뱀 장식 아스떼까 칼렌다 - 해돌(太陽石)

♨ 멕시코시티 2박

3. 1월 8일(목) 멕시코시티 - 비자에르모사

오전 : 아스카제국의 중앙신전 터 - 템플로 마요르(Templo May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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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카테드랄 뒤쪽에서 아스떼까유적의 일부로 보이는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발견되었 다. 또 1979년에는 8톤이나 되는 석판(아스떼까신화의 달신 코요루샤우기의 상으로 1450~1500 년 경의 경으로 추정된다)도 나왔다. 이것을 계기로 발굴이 시작되어 이 유적이 아스떼까제국의 수도 떼노치띠뜰란의 중앙 신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통로를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색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붉은 신전(Templo Rojo), 물의 신 뜰랄록에게 받친 신전 앞에는 희생물을 태웠다고 하는 신의 사자 챠크몰의 석상, 카에루의 제단, 뱀머리상, 사람 키만큼 큰 것도 있는 석상 떼가 늘어서 있다.

유적 북쪽 광장에도 3개의 사당이 남아있는데, 도꾸로가 조각된 쫌빤토리 제단이 눈을 끈다.

부지 안에는 템플로 마요르 박물관이 있고,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면 바로 로 비에 템플로 마요르를 중심으로 하는 떼노치띠뜰란의 신전 콤플렉스 모형이 있다. 이 모형에서 보면 구역의 한 변이 약 500m, 그 가운데 크고 작은 78개의 신전이 있었던 당시의 모습이 떠오 른다. 동시에 소깔로 까테드랄, 국립궁전 아래는 지금도 유적이 파묻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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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한 복판의 고대 유적 - 템플로 마요르 원색이 칠해진 챠크몰 - 박물관

멕시코시티(14 : 45) - MX7705 - 비자에르모사(15 : 45)

♨ 비자에르모사 1박

4. 1월 9일(금) 비자에르모사 - 빨렝께

오전 : 라 벤따 유적공원(Parque-Museo de La Venta, 08:00~16:00)

비쟈에르모사에서 서쪽으로 130㎞, 올메까문명의 중심지였던 라벤다유적에서 1925년 출토된 석상과 비석들을 초목이 무성한 공원에 배치한 독특한 유적공원. 높이 2m, 무게 20톤이 넘는 거 대한 돌머리상 같은 멕시코 문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올메까 유물이 열대우림 시내 공원에 나 타난 것이다. 공원에 부속된 동물에서는 원숭이나 재규어도 있기 때문에 비경에서 유적을 견학하 고 있는 기분이다.

기원전 1200~400년에 걸쳐 만들어진 거대한 돌머리상은 아프리카계 흑인을 닮아 더욱 흥미롭 다. 올메까는 아스떼까말로 ‘고무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고무를 만드는 열대지방에서 온 사람이 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공원에는 전부 33개의 비석과 석상이 있는데 볼만한 것들은 (8)번 젊은 전사, (18) 하늘을 올려다보는 원숭이, (25) 왕의 비석, (26) 거대한 돌머리상 1번(숫자는 길 따 라 붙인 것) 따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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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메까 전사상 (2.41×2.25×2.21m) 올메까 늙은 전사상(2.26×1.97×2.03m)

인류학지방박물관(Museo Regional de Antropologia, CICOM )

라벤다유적처럼 비쟈에르모사 출신으로 시인이며 고고학자인 카를로스 베지세르(?)의 유물을 가지고 만들었는데, 올메까문명과 마야문명에 관한 박물관이다. 올메까 돌머리상 말고 이 도시 근교에 있는 코마르카르꼬에서 발견된 토우나 비석 전시도 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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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전경 (2007년 12월 말 현재 문 닫음) 박물관 안에 전시한 올메까 전사상

오후 : 마야 유적지 빨렝께(Palenque Ruinas, 08:00~17:00)

(관람시간 08:00-17:00/ 미니버스 10$, 05:30~18:00 10~15분 간격, 소요 시간 20분, )

마야 문명의 유적은 거의가 깊은 오지에 있다. 문명을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불리한 조건이지만 고대 마야 인들은 그것을 해 냈다.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그 곳으로까지 내몰았던 것일까?

치아빠스 주의 습도가 높은 정글지대에도 여러 개의 마야 유적이 잠들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존된 것이 빨렝께 유적이다. 피라미드군은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 주위에 흩어져 있다. 이런 복잡한 배치는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다른 마야 유적과는 사뭇 다르다. 빨렝께의 복잡한 구조는 지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지하에서는 왕의 분묘가 발견 되었는데 도굴꾼의 손을 피하기 위해서 지하에서 다시 지하로 계속되고 있다. 분묘 안에서는 진귀한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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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이 발견 되었다. 그중 하나인 석판에는 마치 우주인의 도래를 나타내는 것 같은 무늬가 있 어 ‘빨렝께의 우주인설’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 빨렝께의 역사

멕시코의 유적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것이 빨렝께의 유적이다.

하나하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물들에는 각각 궁전ㆍ비명(碑銘)의 신전ㆍ태양의 신전ㆍ십자가의 신전 등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빨렝께에서 발견된 마야 문자에 의하면 ‘파칼 왕은 603년에 태어 나 12세에 즉위하여 683년 죽을 때까지 68년간 재위하여 빨렝께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 아들 찬 발룸은 48세 때 왕위를 이어받아 66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마야의 기록과 고고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빨렝께는 기원후 3세기경부터 사람이 살 기 시작하여 7세기 초까지는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파칼왕과 그 아들 찬발룸 왕의 시대에 급 속하게 성장하여 692년경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 유적에 있는 중요한 건물은 대부분이 이 시대 의 것이다. 뻴렝께는 771년 이후 급속히 쇠퇴하여 820년경에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마야 도시의 붕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파깔 왕의 무덤이 나온 ‘비문의 신전’ AD684년 대관식이 있었던 십자가신전

빨렝께 전경 1952년 발굴된 빠갈 왕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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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렝께 1박

5. 1월 10일(토) 빨렝께 - 보남팤(Bonampak) - 과테말라 플로레스(Flores)

오전 : 마야 벽화의 보고, 보남팤(Bonampak)

• 보남팤은 치아파스 주의 정글 한가운데에 위치한 우수마신따 강의 지류인 라깐하 강 근처에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문화적ㆍ정치적으로 야흐칠란의 지배에 있었고, 당시 제사지내는 중심 지였다. 보남팤 유적은 1946년 라깐돈족을 조사하러 왔던 미국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중요성은 3개의 방 전체에 그려져 있는 벽화에 있다. 보남팤이란 마야어로 ‘채색된 벽’이라는 뜻이다. 이 프레스코화는 기원전 8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회반죽이 채 마르기 전에 물감을 바른 것 같다. 적색은 산화물의 화합물, 황색은 황토 갈철광, 흑색은 탄 소, 갈색은 역청탄이나 아스팔트, 청색은 인디고 염색과 아타바르자이트의 혼합물, 녹색은 청색과 황색을 혼합한 것이다.

동쪽의 (왼쪽)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의 의식이 묘사 되어 있다. 완전히 정장을 한 귀족들과 의 식을 위한 무용수나 악단들이 있다. 중앙의 방은 전쟁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동서남의 벽에는 적을 잡으려는 장면, 북쪽 벽엔 승리자 앞에 포로가 꿇어 앉아 있다. 서쪽 방(오른쪽)의 벽에는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 장면이 펼쳐져 있다. 포로가 애원하는 그림, 승리의 연회, 신관이 토론하고 있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중앙 광장의 비석은 마야 학자 누치아니 브로스꼬리아꼬스가 “마야 인이 남긴 기념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라고 절찬한 것이다.

보남팤의 행렬도 벽화 보남팤의 벽화 - 전투도

오후 : 과테말라 플로레스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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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가는 길 - 국경을 가르는

우수마신따강(Rio Usumacinta) 과테말라 플로레스의 뻬뗀이짜 호수

* 과테말라 (Guatemala) **************************************************************

이 나라의 주인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야계 원주민들이다. 이 나라를 처음 방문한 여행자들 은 모두 아름다운 민속 의상을 몸에 걸친 원주민 여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양한 색채의 우 이필(블라우스), 꼬르떼(직선으로 재단하여 몸에 감아서 입는 스커트)를 입고 생활하는 원주민 여 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선조가 건축한 도시국가 띠깔의 유적과 끼리과ㆍ세이발ㆍ사꿀레우 같은 무수한 유적들은 이 나라 관광의 하이라이트다.

또한 유적을 감싸고 있는 자연은 열대 동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고원지대는 열대에 있으면서도 아침저녁으로는 얇은 스웨터를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하다. 그러나 태평양을 향해 자동차로 3시간만 가면 홍수림이 빽빽하게 형성되어 있고 바다거북이 산란을 위해 해변에 나올 정도로 변화무쌍한 자연을 가진 국가다.

또한 마야 원주민의 대지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식민도시로 만든 안띠과 시는 아메리카 대륙의 기념물로서 시 전체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도시는 과 테말라 관광의 거점이 되고 있으며, 중미 여러 나라, 더 나아가 남미 대륙으로 남하하려는 여행 자들에게는 휴식을 취하면서 여행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 과테말라 역사 :

천문학ㆍ수학 등에 뛰어난 고대 마야 문명의 중심지였던 과테말라의 역사는 기원전까지 거슬 러 올라간다. 무수한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마야 특유의 神聖문자가 해명되고 있다. 1821년 과테 말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 플로레스(띠깔) 1박

6. 1월 11일(일) 플로레스 - 띠깔 - 끼리과

새벽ㆍ오전 : 마야 최대의 신전 도시 띠깔(Ruinas de Tical, 06:00~18:00)

과테말라의 북부 뻬뗀주의 정글에 묻혀 있는 띠깔은 마야의 최대ㆍ최고의 유적으로 20~30m 로 자란 나무 사이를 헤치고 높게 솟아 있는 신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야의 위대함과 신빙성 을 새삼 느끼게 한다.

띠깔은 기원전 수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300~800년에는 뻬뗀 일대의 마야 도시를 거 느리는 대 신전으로 번영하였다. 인구는 적을 때에도 1만 명을 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의 황폐한 주변을 살펴보면 굉장한 대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500년경에는 일시적으로 멕시코의 떼 오띠와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나 떼오띠와깐이 쇠퇴해 버린 8세기에 띠깔은 오히려 가 장 찬란한 시기를 맞아 지금 남아 있는 대 신전도 모두 이 시기에 건조되었다. 전성기에는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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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수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띠깔은 도시가 번성함에 따라 영토나 건물을 점점 늘려갔으며 현재 알 수 있는 것만도 약 16km의 공간에 3,0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건조물이 있다.

영화를 누렸던 띠깔도 1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돌연히 붕괴되고 주민은 전부 사라져 버려 최대 의 옛 도시도 정글 속에 버려지는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묻혔던 도시가 다시 발견된 것은 1696년의 일이다. 스페인의 선교사 아벤다뇨와 그 일행이 따야살(지금의 플로레스)의 이싸 족으로부터 도망쳐 나왔을 때 우연히 밀림 속에서 이 오래된 유적을 발견했다. 근래 미국의 펜실 베이니아 대학을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5개의 대 신전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피라미 드나 궁전 등 수많은 건축들이 복원되고 있다. 그리고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띠깔 외에도 광대한 떼뻰 주의 정글 속에는 아직도 여러 개의 마야 도시가 묻혀 있다고 한다.

띠깔 유적 관광은 우선 띠깔에서 약 60km 떨어진 뻬뗀 이싸 호에 있는 플로레스 시를 기지로 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정글 위로 솟아 있는 띠깔의 피라미드들 띠깔에서 발굴된 불상처럼 앉은 마야인

1호 신전과 주변 유적

오후 : 끼리과로 이동

♨ 끼리과 1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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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월 12일(월) 끼리과 - 온두라스 꼬빤 - 과테말라시티

오전 : 마야 유적지 끼리과(Ruinas de Quirigua, 08:00~16:00)

컬럼버스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비석이 있는 유적이다. 공원 입구에서 보도를 따 라 가면 광장이 나온다. 신전은 그 광장 안쪽에 위치한다. 이 유적에서 볼만한 것은 이 광장에 다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광장에 흩어져 있는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비석과 특이한 ‘짐승꼴 제단’들은 끼리과의 매력이다.

끼리구아의 비석은 꼬빤의 기법과 예술성에서 크게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 다.

꼬빤왕조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생겨난 위성도시로, 3세기경부터 끼리과의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 뒤 꼬빤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길을 걸었는데, 8세기 끼리과에 ‘폭풍의 하늘 왕’이라는 현명한 왕이 나타났다. 이 왕이 통치하는 동안 끼리과는 국력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폭풍의 하늘왕이 즉위한 지 13이 지난 737년 꼬빤을 공격하였다. 이 전쟁에서 끼리과는 꼬빤의

‘18토끼왕’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하여 끼리과는 명실공이 독립하였다.

이 전쟁은 끼리과가 깊이 생각하여 선택한 결과라는 것은 731년에 끼리과가 가진 ‘문장문자 (紋章文字)’에서 볼 수 있다. 독립의 의지를 가지고 제작한 문장이었는데, 전쟁을 일으키기 6년 전의 일이다. 그 6년간 꼬빤과의 외교 교섭 기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꼬빤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끼리과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한 꼬빤왕조는 세력이 크게 줄어들 고, 이후 꼬빤 예술의 정수였던 입체적인 비석은 사라져 갔다. 그런 전쟁이나 끼리과의 독립이 증명된 것은 비석에 새겨진 신성문자를 해독해서 밝힌 것이다.

끼리과는 전쟁에서 이긴 결과 모따구아강 유역의 지배권을 쥐고, 과테말라 고지에서 카리브해 를 있는 교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현재도 끼리과유적의 곁을 주요 도로가 달리고 있다.

11.7m 높이의 세계 최고 비석 한 면에 가득 찬 마야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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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 마야 유적지 꼬빤(Ruinas de Copan, 08:00~17:00)

과테말라 국경에 가까운, 온두라스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꼬빤 유적은 온두라스 국내에서는 가장 잘 정비된 관광지다. 모타과 강의 한 지류인 꼬빤 강에 의해 형성된 이 작은 꼬빤 계곡에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기원 후 700~800년경에는 꼬빤의 왕조를 중심으 로 도시문명의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그 후 멕시코ㆍ과테말라ㆍ벨리세 각지의 마야 여러 도시와 나란히 꼬빤의 도시도 급격히 붕괴해 갔다.

꼬빤은 남동 마야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센터이며, 마야 문명의 여러 도시 가운데서도 기원후 700년대에는 과테말라의 띠깔이나 멕시코의 빨렝께와 나란히 일대 중심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1970년대 후반부터 매년 미국과 온두라스의 합동 조사단을 주체로 한 고고학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1986~1987년에는 저명한 마야 문자 해독가인 린다실리 박사가 비문의 해독 작 업을 했다. 1989~1990년에는 마야 최대의 석실무덤과 소장품이 발굴되는 등 해마다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입구에서 손님 맞는 앵무새 마당에 가득 찬 비석과 제단

돌계단 책 : 모든 돌에 마야 문자가 새겨져 있다. 제단 Q의 돋을새김 - 8세기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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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테말라시티 1박

8. 1월 13일(화) 과테말라시티 - 쿠바 아나나

오전 : 마야 유적지 까미날 후유(Sitio Arqueologico de Kaminal Juyu)

과테말라 시에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그러나 200개 이상의 신전은 주택 건물로 파괴되고 지 금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0개도 안 된다. 이 마운드는 미라후로레스기(기원후 200년~30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전은 플랫을 겹겹이 쌓은 것이고 이 신전에서 발굴된 사체는 머리 에서 발끝까지 빨간색 원색 안료로 칠해져 있었다. 비취를 비롯한 호화로운 매장품은 대부분 도 굴꾼에 의해 손실되었다. 그 밖의 우술루딴식 토기나 이사바 양식의 돌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 유적은 일단 파괴된 후 재건되었는데, 이 시기를 에스뻬란사 기(5세기)라 한다. 이 시기는 멕시코 떼오띠와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떼오띠와깐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을 기지로 하여 띠깔 등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한때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죽은 사람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까미날 후유는 기원전 4~2세기에 번영했지만 2세기 이전에 일단 쇠퇴하였다. 그 뒤 멕시코 중앙 고원 최대의 고대 도시 떼오띠와깐에 정복되어 새로운 문화 가 재생되었다. 마지막으로 11세기경 도시가 붕괴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가장 번영할 때는 10㎢에 달하는 면적을 가진 신전도시였다고 본다. 현재 라 아우로라 국제공 한 근처에 수도 다리를 바치고 있는 흙담이 계속 이어지는 곳이 있다. 그 용도가 분명하지 않은 데 이 흙담도 까미날 후유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 도시의 크기를 알 수 있다. 까미날 후유의 피라 미드는 몬고이(흙산)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찰흙을 몇 겹씩 발라 단단하게 쌓은 특수한 것이다.

과테말라시티가 수도가 되던 때, 시내에는 이런 피라미드가 200기나 존재하였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차츰 파괴되어 주책이나 공장 아래 묻혀갔다. 지금은 7기 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 유적에서는 중요한 출토품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현무암에 인물이 새겨진 10호 비석 같은 것은 1급 마야 미술품이다. 남아있는 것은 전체의 3분의 1로 크기가 1.3m쯤인 데, 원래는 3m나 되는 거대한 돌비석이었다고 생각된다.

유적 안에는 흙의 궁전터라고 보이는 큰 폐허가 보존되어 있는데, 마야의 독특한 아치도 모두 흙으로 만들었다. 다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는 ‘흙의 마야’로서, 이 유적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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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을 다져 쌓은 까미날 후유 유적

임신한 여인(BC2000~AD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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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고민족학박물관(Museo Nacional de Arqueologia y Etnololgia)

마야 문명ㆍ인디오의 생활 및 문화가 전시되어 있다. 마야 문명은 기원전부터 기원 4세기 경 까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문명이다. 그 부흥에서 멸망까지를 설명한, 입구에 있는 연표 나 도표를 보고 커다란 흐름을 염두에 둔 뒤 수많은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로 가보자.

마야 문명은 지방분권형 사회로 중앙집권 국가형의 아스떼까ㆍ잉카 문명으로 나뉜다. 각 유적마 다 독자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토기나 석기 같은 출토품을 보면 마야 문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 았는지 알 수 있다. 별실에 설치되어 있는 비취 코너도 볼 만한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었던 비취 장식품과 가공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안뜰을 둘러싸듯이 있는 띠깔 신전의 스뗄라(비석)와 알따(제물을 바치는 제단의 일종)다. 띠깔에 갈 수 없는 사람은 이곳에서 감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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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깔에서 출토된 그릇 장례용 옥 마스크(띠깔 출토)

마야 글자로 된 책 코디세(Cod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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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시티(16:30) - LR654 - 쿠바(22:05) - 산호세 경유

♨ 아바나 1박

9. 1월 14일(수) 쿠바 아바나 - 바라데로 오전ㆍ오후 : 아바나 시내관광

워싱턴 백악관을 닮은 옛 국회의사당 300년 전통을 가진 시내 복판의 카테드랄

*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아바나 시내 오비스뽀가에 있는 헤밍웨이가 장기 투숙했던 호텔이다. 호텔 팜플렛에 헤밍웨이 의 ‘El Hotel Ambos Mundos en la Habans, Es un buen lugar(아바나의 암보스ㆍ문도스 호텔 은 좋은 곳이다.)’는 말이 실려 있다. 그가 머문 511호가 헤밍웨이박물관(Museo Habitacion Ernest Hemingway)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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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호텔 전경 호텔 안 박물관에 진열된 헤밍웨이 타자기

* 헤밍웨이박물관(Museo Ernest Hemingway, Finca la vigia)

산프란시스토 데 빠울라(San Francisco de Paula)의 조용한 주택지에 있는 헤밍웨이가 살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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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다. 그는 1928년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한 뒤 이 땅에 매료되어,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의 판권(인세)으로 이 휜까 비비아 저택을 구입하고 바다와 낚시를 주제로 한 작품을 쓰기 시작 하였다. 1960년 미국으로 귀국한 헤밍웨이는 그 다음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다시 이 집에 돌아 오지 못했다. 집은 유언대로 쿠바 정부의 것이 되었지만 내부는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노 인과 바다’를 쓴 방, 타자기도 그대로 남아있다. (화요일과 비오는 날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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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옛 저택(현재 박물관) 헤밍웨이 저택 안(거실)

* 까바냐 요새에 있는 체 게바라 박물관 ********************************************

체 게바라가 일했던 집무실을 박물관으로 꾸몄는데, 1967년 볼리비아 산속에서 총살되기 까지 체 게바라의 궤적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흥미로운 것은 볼리비아에 잠입할 때 변장했던 사 진이 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이곳에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사용한 총이나 장비가 전 시되어 있고, 방송에 사용했던 장비, 배낭, 옷 같은 것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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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집무실 깃발

저녁 : 바라데로로 이동

♨ 바라데로 2박

10. 1월 15일(목) 쿠바 바라데로, 마탄사스, 코히말 - 아바나 오전 : 바라데로 수영

* 바라데로(Varadero) *****************************************************************

마탄사스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바다를 향해 가늘고 긴 모서리처럼 뛰어나온 반도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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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까꼬스반도(Peninsula de Hicacos)가 바로 쿠바 최대의 리조트인 바라데로다. 대서양에 면 한 비치는 길이가 25㎞쯤 되고 가늘고 하얀 모래가 어디나 투명한 바다 속에 이어져 있다.

1930년 즈음에는 미국의 억만장자 듀퐁을 비롯하여 부호들이 차례로 별장을 지어 아름다운 비 치에서 우아한 바캉스를 보냈다. 1959년 혁명이 일어나자 주인들이 모두 마이아미로 망명하자 남은 별장들은 모두 쿠바 것이 되었다. 지금은 모든 별장들이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되고, 유럽 자본을 끌어들여 대형 리조트로 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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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대로를 유지한 바라데로 해변 가

오후 : 바라데로 - 마탄사스 - 코히마르 - 아바나

* 마탄사스(Matanzas) *****************************************************************

수도 아바나 동쪽 80km 지점, 플로리다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이다. 사탕수수·사이잘삼 재배가 성한 농업지대의 중심지이며, 선적항이기도 하다. 제당·피혁·비료·제지 같은 공업이 성하고, 근교 에 온천·해수욕장·경승지 등이 있다. 아바나 시내에서 차로 2시간쯤 달리면 인구 50만의 마탄사 스(Matanzas)가 있다. 콜럼버스가 두 번째 항해 때 상륙했다는 곳으로 1690년 만들어진 도시다.

한편 마탄사스는 1920년 처음으로 한국인 이민선이 도착한 곳이다.

“조선인 1,033명이 1905년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이주했다. 그들은 에네껭 농장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들 가운데 270명은 1921년 멕시코의 척박한 삶을 청산하고 쿠바로 옮겨갔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주하자마자 설탕 값이 폭락하 면서 쿠바 한인들은 다시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아바나 같은 세 곳으로 흩어져 다시 에네껭 농 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리고 84년이 흘렀다. 1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2~5세가 남아 한인 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멕시코 전역에 3만5000여 명(추산), 쿠바에는 600여 명의 후손 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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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는 마탄사스 항구 기념비 앞에서 선 한인 3세

* 코히마르(Cojimar)

아바나에서 동쪽을 가면 작은 어촌 코히마르에 다다르는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헤밍웨이의 배 ‘삘라르호’도 당시 이 항구에 정박하고 있어 낚시를 좋아하는 그는 여기서 낚시에 나서곤 했다. 또 카스트로 의장도 우승한 적이 있는 유명한 낚시대 회 ‘헤밍웨이컵’도 여기가 무대가 되었다. 항구에 면한 작은 요새가 있는데, 그 옆 공원에는 마을 사람들이 세운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다.

② 라 테라사(La Terraza)

코히마르에 배를 정박하고 있던 헤밍웨이는 코히마르에 올 때 이곳에 들러 럼주 칵테일을 기 울이거나 한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바 카운터를 지나 앞에 테이블 석이 있는데 왼쪽 2번째가 그 의 지정석이었다고 한다. 상점 안에는 유명한 낚시대회에서 ‘카스트로 의장과 찍은 사진’을 비롯 하여 ‘낚시를 즐기는 헤밍웨이’ 같은 귀중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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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코히마르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라 테라사”

♨ 아바나 3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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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월 16일(금) 아바나(07:35) - MX7323 - 칸쿤(07:40)

하루 종일 - 세계 7대 불가사의, 치첸 이싸(Chichen Itza) 답사

마야 문명은 중앙아메리카 남부의 밀림에 번성해 왔다. 수많은 도시의 유적이 이 땅에 흩어져 있는데, 치첸 이싸는 200년 이상 유까딴의 예술ㆍ종교ㆍ경제의 중심지였다. 치첸 이싸란 마야 어 로 ‘우물가 Itza의 집’이라는 의미다. 유까딴 반도 최대의 세노떼(성스러운 샘)를 중심으로 이 도 시가 번성한 점으로 미루어 그렇게 불렸던 것 같다.

유적군은 ① 마야의 특징이 두드러진 6세기경의 마야 고전기에 속하는 구 치첸 이싸와 ② 똘 떼까 문화와 융합한 10세기 이후의 후 고전기에 속하는 신 치첸 이싸의 두개 지역으로 나뉜다.

7세기에 융성한 치첸 이싸는 마침내 쇠퇴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일단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 다. 그러나 10세기에 중앙고원의 패권을 장악한 전투 부족인 똘떼까 인과 손을 잡아 다시 한 번 번성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마야 똘떼까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새로운 유적의 모티프에 그 영향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까지 비의 신인 차끄 Chac만을 모시던 소박한 모티브 에, 호전적인 병사의 상과 똘떼까의 상징인 꾸꿀깐(깃털을 가진 뱀)이 새롭게 그려지게 된 것이 다. 그 후 군사국가로 변모하여 영화를 누리다가 13세기 초 마야팡 족에 의해 멸망되면서 그 오 랜 역사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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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조화를 이룬 마야의 걸작 신전(신) 고대 마야인의 천문대, 까라꼴(구)

♨ 칸쿤 1박

12. 1월 17일(토) 칸쿤 - LA

오전 : 칸쿤 수영

유카탄반도의 끝, 카리브해와 라군 사이에 있는 좁고 기다란 20㎞의 땅에 개발된 리조트다. 이 곳에서는 미국 돈이 그대로 쓰일 정도로 미국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비 치다. 강렬한 태양 아래 빛나는 코발트 불루의 바닷물과 가늘고 고운 모래, 야자나무 사이로 잘 개발된 특급 리조트의 행렬 등, 한 겨울 바캉스는 천하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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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17:40) - MX946 - LA(21:05)

♨ 항공기(공항) 1박

13. 1월 18일(일) LA - 한국

LA(00:10) - KE012 - ♨ 항공기 2박(날짜변경선) 14. 1월 19일(월) 서울 도착

- 서울 (06: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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