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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18년 2월 박사학위 논문

白坡 申獻求의 茶生活 硏究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과

윤 해 숙

(3)

白坡 申獻求의 茶生活 硏究

A Study on the Tea Life of Baekpa Shin Heon Goo

2018년 2월 23일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과

윤 해 숙

(4)

白坡 申獻求의 茶生活 硏究

지도교수 김 하 림

이 논문을 문학박사학위 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17년 10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제차문화학과

윤 해 숙

(5)

윤해숙의 박사학위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황 병 하(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김 성 한(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한 종 완(인)

위 원 목포대학교 교수 조 기 정(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김 하 림(인)

2017년 12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6)

목 차

ABSTRACT

Ⅰ. 서론 ··· 1

1. 연구배경과 목적 ··· 1

2. 선행연구와 연구내용 ··· 3

Ⅱ. 백파의 생애와 저술활동 ··· 7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 7

1) 시대적 배경 ··· 7

2) 생애 ··· 10

2. 백파의 저술활동 ··· 29

1) 추당잡고 : 해남생활(1875-1880)의 활동과 기록 ··· 29

2) 기행 시집: 백파만고 ··· 46

Ⅲ. 백파 차생활의 특징 ··· 58

1. 추당잡고 에 나타난 차와 문학의 결합 양상 ··· 59

2. 양파집 에 나타난 음다와 차도구의 전문지식 ··· 69

Ⅳ. 백파의 차생활이 조선 후기 차문화에 끼친 영향 ··· 84

(7)

1. 사대부 계층과의 교유 확대 ··· 85

2. 승려와의 상호교유 확대 ··· 105

3. 대둔사 차문화의 새로운 정립과 발전 ··· 134

4. 초의차의 새로운 위상 정립 ··· 144

Ⅴ. 결론 ··· 156

참고문헌 ··· 160

(8)

표·그림 목차

<표1> 진강과목(進講科目, 효경 통감 소학 맹자 강목 ) 일람 ··· 14

<표2> 백파의 고희 시에 차운한 후손들의 시 ··· 22

<표3> 秋堂襍稿 卷一 南征錄 上의 시제 ··· 32

<표4> 秋堂襍稿 卷二 南征錄 下의 시제 ··· 34

<표5> 「西征錄」 시제 ··· 49

<표6> 東征錄 시제 ··· 50

<표7> 成都錄 시제 ··· 52

<표8> 龍灣錄 시제 ··· 54

<표9> 金華錄 시제 ··· 55

<표10> 백파만고 와 추당잡고 의 특징을 비교 ··· 57

<표11> 추당잡고 에 나타난 백파의 茶詩 ··· 59

<표12> 兩 坡 集 시제 ··· 70

<표13> 兩坡集 에 나타난 茶詩 ··· 74

<표14> 차시 속에 나타난 차 관련시어 ··· 78

<표15> 추당잡고 에서 본 사대부와의 교유시 ··· 86

<표16> 양파집 에서 본 사대부와의 교유시 ··· 100

<표17> 백파와 승려와의 교유 ··· 107

<표18> 추당잡고 와 栢悅錄 의 十絶 ··· 142

<표19> 초의차의 이칭(異稱) ··· 146

<표20> 추당잡고 의 화훼잡시(花卉雜詩) 20수 ··· 149

<표21> 동다송 판본에 따른 ‘백파의 제시유무’ 비교 ··· 154

<그림1> 신선생백파소요대(申先生白坡消遙臺) ··· 19

<그림2> 백파공묘 이장 시 출토된 지석(誌石) ··· 19

(9)

ABSTRACT

A Study on the Tea Life of Baekpa Shin Heon Goo

Yun Hea Soog

Advisor : Prof. Kim Ha Lim, Ph, D.

Department of

International Tea Culture,

Graduate School of Chosun University

While the tea culture of the mid-Joseon dynasty diminished due to its policy of “Promote Confucianism and Reject Buddhism(崇儒抑佛)”, the tea culture of the late Joseon dynasty was revitalized mainly by scholar-officials in the 18-19th century. This means that the scholar-officials of the Joseon dynasty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revitalization of tea culture. The tea culture of scholar-officials gradually entered into everyday life and spread to the general public. They developed the tea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into various forms by combining the tea culture of Buddhism with Confucianism and spread the dailiness and popularity-centered tea life, which led to tea culture revitalization of the late-Joseon dynasty. Through a variety of social, cultural, and human activities and exchanges, they developed a new lifestyle, drinking tea(飮茶) culture, with which they expanded social communication, formed cultural consensus and built a human network. It means that not only scholar-officials strengthened the social, cultural and human role and function in order to revitalize the tea culture of the late-Joseon Dynasty, but also tea was the main vehicle for cultural activities and social exchanges.

Baekpa SHIN Heon-gu(白坡 申獻求, 1823∼1902) was a scholar-official with

(10)

a profound knowledge of three teachings (三敎)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fact is often found in his collection of works, Chudangjapgo(秋堂襍稿) . When he learned Buddhism by interacting with Buddhist monks of Daedunsa Temple, he encountered teas and left his 13 works for the monks. In addition, he wrote several works wandering around Buddhist hermitages. Among his tea poems in Chudangjapgo , Chaseol(茶說) and Hyangcha(香茶) are considered important materials for the history of tea culture, which means that he was a tea person and left remarkable achievements for the history of tea culture. Nevertheless, it seems true that his accomplishments and status in the tea culture history of the late Joseon Dynasty have not been properly appreciated so far. For this reason, many academic studies on Chudangjapgo

have not been conducted.

It is the purpose of this paper to objectively evaluate his academic achievem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his social and cultural achievements and status accomplished through teas. Therefore, this paper is to study his academic achievements as well as his tea life and cultural perspective on teas, based on which his social, cultural and religious influences on the formation of tea cul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ll be examined.

Chapter Ⅱ will review the circumstances of the time and his life through his memorial stone and Goheesichuk(古稀詩軸) . By analyzing

『Chudangjapgo』 and 『Backpamango(白坡漫稿)』, his journey to Haenam and his life in Haenam, as well as landscapes he travelled through as a secret royal inspector and the overall point of view in his works will be explored.

In chapter Ⅲ, Chudangjapgo and Yangpajip(兩坡集) will be introduced in detail to understand his tea life and the tea culture of the time. By exploring his tea life in his two books and his life as a tea person, the tea culture of the time will be examined.

(11)

Since the influence of his tea life on the late Joseon Dynasty is the core part of this paper, it will be mainly dealt with in chapter Ⅳ. For this, his literary background, ability and tea life as well as his personal network will be examined by reviewing his poems, through which he interacted with scholar-officials and monks. In addition, the influence of his tea life and poems on the establishment, succession, and development of Daedunsa Temple’s tea culture will be reviewed. Finally, the influences on the tea culture of Daedunsa Teample, the status of Choeui(艸衣) tea and the tea cul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will be examined by reviewing Baekpa’s Hyangcha and his view on Choeui’s Dongdasong(東茶頌)』.

In order to review the Baekpa’s tea life, this paper will focus on the interaction between Baekpa and Choeui. Backpa described Choeui as a discerning monk who make good tea. He highly appreciated Choeui’s tea life and regretted that Choui’s books were not systematically compiled as Lu Yu’s

『The Classic of Tea(茶經)』. In 『Dongdasong』, he tried to introduce the excellence of Daedunsa Temple’s tea cultur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raise the reputation. It means that Baekpa and Choeui maintained a close relationship overcoming the religious and ideological differences between Buddhism and Confucianism.

This paper is to attempt the concrete and systematic analysis on

『Chudangjapgo』 while reviewing the influence of Baekpa’s tea life on the development of tea life in the late Joseon Dynasty, which might be the first attempt in the history of Korean tea culture. The reason why this paper is to analyze Chudangjapgo』concretely and systematically despite these difficulties is to present a new direction in the academic study of Korean tea culture with distinctiveness from previous papers.

Keywords: Baekpa SHIN Heon-gu, 『Chudangjapgo』, 『Backpamango』,

『Yangpajip』, Choeui, Daedunsa Teample, Hyangcha , scholar-officials

(12)

Ⅰ. 서론

1. 연구배경과 목적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차문화는 불교의 전파와 함께 시작되어 유교의 확산으로 활 성화되었으며, 역사적으로 신라 시대에 시작하여 고려 시대에 꽃을 피웠으며 조선 시 대에 대중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계층 을 중심으로 차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런 분위기는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의 음다 풍속이 여전히 지속되었 으며, 사신 맞이 접견다례나 주다례가 새로 제정되어 시행되기도 하였다.1)

조선 중기의 차(茶)2)문화는 숭유억불의 영향으로 상당 부분 위축되었지만, 조선 후 기의 차문화는 18∼19세기에 이르러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다. 이는 조선 시 대의 사대부들이 차문화 활성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이다. 사대부들의 차문화 는 점차 일상생활 속으로 유입되었으며,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3) 이들은 불교의 차문화를 유교와 융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켜 조선의 차문화로 발전시켰으며, 일 상성과 대중성에 기초한 차생활을 확산시키며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기반을 구축하 였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활동과 교류를 통해 음다(飮茶)라는 새로운 대중적 생활양식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소통 확대와 문화적 공감대 형성 과 인간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갔다. 이는 조선 후기 차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사대부 들이 사회적·문화적 역할과 기능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차가 문화적 활동과 사회적 교류에서 주요 매개체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중 심에는 사대부들이 있었고, 그 이념적 기반에는 청조의 고증학을 수용한 북학(北學)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를 비롯한 당대 사대부 신지식인들은 새 로운 학문과 사상을 수용했으며, 노쇠하고 나태한 조선의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 운 사회를 구현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4) 이들은 실사구시 1) 신미경, 조선시대 차문화 , 한국전통문화연구 제 10호, 2012, p. 7.

2) 자전(字典)에서는 茶를 다로 독음하나, 오늘날에는 차 또는 다를 혼용해서 사용한다. 본고에서도 혼용 해서 사용한다.

3) 韓基貞, 18, 19 조선지식인의 차문화 연구 , 성신여대 박사학위논문, 2013, p. 1.

(13)

를 추구하는 새로운 문화사상 운동을 구현하였고, 학문과 종교와 예술 등 다양한 분야 에서 심도 있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조선 후기의 경제·정치·사회 변화에 중요한 역할 을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실용주의 사상의 확산과 함께 지역적·계급적 차별이 완화되었고, 개방과 교류가 활성화되었으며, 정통 주자학 위주의 폐쇄적 풍토에 서 탈피하여 북학과 서학 등 다양한 이념과 전통도 수용하는 자유로운 학문 풍토가 형 성되었다.5)

한편 조선 건국 이후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차문화가 쇠퇴하면서 제다법도 쇠퇴 하였다. 하지만 차문화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제다법은 사찰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맥 을 이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둔사로 전파된 선차(禪茶) 제다법은 초의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의 떡차와 산차 만드는 법으로 전승되었다. 조선 시대의 역사적·종교 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19세기 대둔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불교 부흥운동과 차문화 중흥운동은 조선 후기 차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으로 불교와 차문화는 공동운명체였으며, 흥망성쇠를 같이 해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대둔사의 불교문화와 차문화도 이런 상관관계에서 예외가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둔사가 새로운 불교적 위상을 갖게 된 계기는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의 의 발(衣鉢)이 대둔사에 전래된 것을 매개로 한 ‘서산유의(西山遺意)’에서 비롯되었다. 이 것은 18세기 말 정조로부터 표충사 편액을 받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또한 대둔사는 13대 종사 및 13대 강사를 배출함으로써 불교 발전을 이룩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 였다. 서산 이래 제시된 사교입선(捨敎入禪)적 조사선의 풍조는 많은 선승들로 하여금 다양한 음다 문화를 낳게 하였다.

초의의 활약과 그 뒤를 이은 범해각안(梵海覺岸, 1820∼1896)의 차생활은 대둔사 차 문화 및 조선 후기 차문화 중흥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등장과 그와 추사 등 조선의 대표적인 사대부 엘리트들의 교유는 조선 후기 차문화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유불도(儒·佛·道) 사상의 교유 속에 긴밀한 지기(知己)가 되었으며, 불교의 선승들이 만든 차는 이들의 교유에 중요한 매개 체가 되었으며, 이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차는 경화사족들의 애호품이 되었다.

백파 신헌구(白坡 申獻求, 1823∼1902)6)는 유불도 삼교(三敎)에 조예가 깊은 사대부 출신이었다. 이런 사실은 백파의 문집인 추당잡고(秋堂襍稿) 의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4) 이세영, 19세기 전기 사회경제의 변동 , 추사와 그의 시대 , 돌베게, 2002, pp. 61-63.

5) 이희재, 조윤호, 19세기 대둔사 학승들의 유교경전 이해 , 범한철학 28집, 2003, pp. 369-370.

6) 본고에서 원문을 제외 하고는 백파로 통일하여 약칭한다.

(14)

있다. 그는 대둔사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불교를 터득했으며, 이 과정에서 차를 다양하 게 접하게 되었고, 대둔사 승려들을 위해 13편의 글을 남겼다. 그는 대둔사의 여러 암 자를 돌아다니며 여러 편의 글을 썼고, 대둔사 내의 사당인 표충사에 제서산대사영각 표충사금철(題西山大師影閣表忠祠今撤) 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백파가 추당잡고 에 남 긴 차시(茶詩) 중 차설(茶說) 과 향차(香茶) 는 차문화사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이는 그가 차인이었으며, 차문화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지금까지 조선 후기 차문화사에서 그의 업적과 지위는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이 사실이다. 현재까지 그의 추당잡고 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백파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려는 본 논문의 목적은 그가 조선 후기에 이 룩한 학문적 성과와 차를 통해 이룩한 사회적·문화적 업적과 위상을 객관적으로 평가 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그의 학문적 성과와 차생활과 차문화관을 고찰하 고자 하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차문화 형성에 끼친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백파의 차생활과 차문화관을 고찰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의 생애, 저술 활동, 차생활, 차문화에 끼친 영향 등을 다음과 같이 고찰하고자 한다.

첫째, 백파의 문집인 추당잡고 와 백파만고 를 통해 그의 생애와 저술활동은 어떻 게 진행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둘째, 백파의 추당잡고 와 양파집 을 통해 그의 차생활과 차문화관, 차와 문학의 결합 양상, 그리고 그의 음다와 차도구의 전문지식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셋째, 백파의 차생활이 승려와 사대부와의 교유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 고자 한다.

넷째, 백파의 차생활이 대둔사 차문화 발전과 승려들과의 교유 확대, 그리고 초의차 위상 정립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고찰하고자 한다.

2. 선행연구와 연구내용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파에 관한 학문 연구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 다. 기존의 논문들 중 일부는 그의 저술들 중 일부 및 그 저술에 담겨 있는 시문학적 특징을 고찰하거나 그가 승려와 사대부와 맺었던 교유 관계에 대해 기술했지만, 그의

(15)

생애, 저술활동, 차생활 등에 관해 구체적으로 다룬 내용은 전혀 없는 상황이다. 특히 본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인 백파가 조선 후기 차문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아 직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조선 후기 차문화를 이끈 중요한 차인이었던 백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백파와 관련된 선행연구는 크게 단행본과 학술논문 두 가지로 구분 해 볼 수 있다.

백파와 관련된 단행본은 다음과 같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 발간한 고서해제 (古書解題) 는 추당잡고 의 구성과 내용 등을 다루었고, 추당잡고 의 흐름을 쉽게 파 악할 수 있도록 해석해 놓았다.7)

정민(2011)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는 추당잡고 를 통해 백파의 차설 과 초 의차를 소개했다.8)

고령 신씨 귀래정 안협공 도사공파 종중회(이후 종중회로 약칭한다)에서 발간한 영 천세승(靈川世乘) 은 백파가 말년(末年)에 친필로 편저한 자료를 세대별로 원문, 한글 번역문, 비석 탁본문 순으로 편집하였다. 시조묘 묘표음기문(墓表陰記文)과 5세 순은 (휘 德隣)공 부인정씨(夫人鄭氏) 묘표문(墓表文) 그리고 12세(世) 여옥(汝沃)·여관(汝灌) 공 묘갈명(墓碣銘), 15세 운(澐)공과 16세 선연(善淵)공 행장, 20세 이록(㶊祿)공과 23 세 병휴(炳休)공의 행력을 추록하였고, 후미에 부록으로 백파공 연보와 한·중·일 연대 비교표를 수록하였다.9)

종중회에서 발간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백파 신헌구 선생의 행적 에 는 백파 연보와 482건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10) 또 백파만고(白坡漫稿) 는 총 5장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파가 쓴 1868년부터 1872년까지의 시문을 모아 총 297수를 수록하고 있다.11) 유묵집(遺墨集) 에는 제문을 비롯하여 교유인물들과 주고받은 시문 과 서간문이 수록되어 있다.12)

단행본에 백파의 차생활이나 차문화에 끼친 영향 등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현상은 학술 논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학술 논문 중에는 백파와 직접적으 로 관련된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 관련된 사대부들의 연구를 선행연구의 대상으로

7) 김영봉, 古書解題 ,Ⅱ. 秋堂襍稿 , 평민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2004.

8) 정민(a),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 김영사, 2011.

9) 고령신씨 귀래정 안협공파 도사공파종중회, 靈川世乘 , 2013.

10) 고령신씨 안협공파 종중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실기에 기록된 백파 신헌구 선생의 행적 , 2013.

11) 신헌구, 백파만고 , (주)인쇄향, 2014.

12) 신헌구, 유묵집 , (주)인쇄향, 2016.

(16)

삼았다.

김상일(2002)의 조선 중기 사대부의 승려와의 교유사 연구 는 조선 시대 사대부 문 학을 연구하고 사대부 문학의 다양성을 검증하기 위해 조선 중기 사대부와 승려 간의 교유 문화 현상과 그 교유의 중심적 수단이었던 한시 문학을 검증하였다.13)

김효정(2011)의 조선 후기의 차문화 연구-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의 교유관계를 중심으로- 는 조선 후기 차인들의 유불선을 아우르는 차생활과 교유 관계를 언급한 조선의 차문화가 제다와 음다를 종합적으로 완성하여 정신 수양 체계로 손색이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정립한 과정을 설명했다.14)

박해당(2012)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불교관-승려문집의 서문을 중심으로 는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정치·경제·사회적 관점에서만 불교를 폄하하고 배척했던 것이 아니라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불교를 하나의 독립적인 사상이나 전통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그 바탕에는 모든 인간을 유교적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 는 당위적인 유교 절대주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시하였다.15)

한기정(2013)의 18∼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차문화관 연구 는 18∼19세기 조선의 차 문화가 중흥할 수 있었던 기반과 차문화 향유의 중심 세력인 지식인층의 다시를 통해 조선 후기 차문화의 전개 양상을 고찰하였다.16)

이정옥(2013)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문집을 통해서 본 차문화 는 조선 시대 차문 화를 유학자의 문집을 통해 고찰하였으며, 유학자들이 접한 차의 종류와 다구의 쓰임, 그리고 행다(行茶)와 음다를 통해 실제의 차생활을 분석해 놓았으며, 유학자들이 가지 고 있는 차의 정신과 차를 통한 교유의 내용과 대상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차문화를 고찰하였다.17)

이상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장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하며, 백파의 문집인 추당 잡고 와 백파만고 의 분석을 통해 그가 해남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겪었던 다양한 사건과 그가 해남에서 생활했던 내용뿐만 아니라 그가 암행어사로 활동했던 기간 동안 기행 했던 곳의 자연풍광 내용, 그리고 그의 저술에 담겨 있는 사상 전반 등을 조명하

13) 김상일, 조선 중기 사대부와 승려와의 교유시 연구 , 한국어문학연구 제39집, 2002.

14) 김효정, 조선후기의 차문화연구-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의 교유관계를 중심으로- , 차문화· 산업 학 제18집, 2011.

15) 박해당,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불교관-승려문집의 서문을 중심으로 , 태동고전연구 제28집, 2012.

16) 韓基貞, 18-19세기 조선지식인의 차문화관 연구 ,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17) 이정옥,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문집을 통해서 본 차문화 , 계명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3.

(17)

고자 한다.

Ⅲ장은 그의 차생활 뿐만 아니라 당시 차문화를 알아보기 위해 그의 문집인 추당잡 고 와 양파집 을 자세히 소개하고, 두 저술에 담겨 있는 그의 차생활을 살펴보며, 차 인으로서 그의 삶과 차생활, 추당잡고 에 나타난 차와 문학의 결합 양상, 양파집 에 나타난 음다와 차도구의 전문지식 등을 고찰하고자 한다.

Ⅳ장은 그가 조선 후기 차문화에 끼친 영향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가 사대부 및 승려들과 교유한 시를 통해 그의 문학적 배경, 차생활 등을 고찰하고 자 하며, 그가 교유한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대둔사 의 차문화 발전에 그의 차생활 및 사대부들과의 교유시가 끼친 영향과 대둔사의 차문 화 정립 및 계승에 끼친 영향도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백파가 동다송(東茶頌) 에 기술한 향차(香茶) 의 내용을 통해 대둔사의 차문화, 초의차의 위상, 그리고 조선 후기 차문화에 끼친 영향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8)

Ⅱ. 백파의 생애와 저술활동

1. 시대적 배경과 생애

1) 시대적 배경

조선 후기는 임·병 양란 후 지배층의 무능력이 드러났던 시기였으며, 이에 따라 지 배층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던 시기였다. 이런 이유로 양란 이후 실학적 사고를 지닌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민족 자존의식이 표출되었던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 사회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다. 지식층들은 조선 사회의 전반적인 모순에 대해 각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으며, 농업기술과 상공업 등 실용 분야의 발 전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시민 계층은 폐쇄적인 조선 사회의 구조에 대한 개혁과 변혁의 목소리를 다양한 형태로 표출하고 있었다.18)

조선의 봉건사회는 17∼18세에 점차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에는 세도정 권의 정치적 부패와 봉건착취가 가중되었으며, 이로 인해 삼정(三政)의 문란 현상이 나 타났고, 이로 인한 사회적 모순은 더욱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한 농민들의 불 만은 점차 고조되어 봉건왕조의 존립자체를 위협하였으며, 이로 인한 대내외적 위기는 조선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급증하였다. 조선 시대 양반에게는 군포를 면제시켜 주 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의 수가 약 4%에 지나지 않아 세금을 면제를 시켜주어도 조 선 사회가 별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후기에는 양반의 수가 급증하여 세금을 면제받는 숫자가 늘어나자 농민이나 천민 계층이 국가의 세금을 모두 부담하게 되었다. 이로 인 해 농민과 하층 계층의 사회적·경제적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국가의 재정도 양반 수의 증가로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경제적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원군은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호포제 는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나 저포(苧布)를 징수하던 세제(稅制)로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농민이나 천민층만 군포를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양반들도 군포를 내어 국가 재정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기득권 세력이었던 양반들은 대원군의 이런 조치에

18) 박인호, 한국사학사대요 , 이희문화사, 1996, p.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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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반발하였으나, 백성들의 호포제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아 양반들의 반발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백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재위 1863∼1907) 시기였다. 이 시기는 대내적으로 왕의 명령으로 신분질서가 새롭게 재편 되어 가던 시기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으로 집중되던 서구 열강의 관심이 점점 주 변국으로 바뀌어 가게 되면서 한반도에서도 이들 간의 대립이나 경쟁이 첨예하게 나타 났던 시기였다.

고종이 등극했던 시대는 국내외적으로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대외적으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비롯하여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이 증대 되었던 시기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대내적 으로 19세기 초부터 권력을 독점해오던 세도정권의 폐해를 해결하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국사에 깊숙이 개입했던 흥선대원군은 양반 관료집 단의 권력집중과 전횡, 특히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도의 폐해를 없애고 왕권을 회복하 여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19)

대원군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지금까지의 유교 중심 정책 대신 불교를 적극 지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불교에 호감을 가진 것에 그치지 않고, 불 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대원군의 불교 후원은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 었다. 첫째,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할 경우 직접 개명(改名)하고 사액(賜額)하여 해당 사찰의 권위와 위상을 높여주었다. 둘째, 사찰을 중창할 경우 반드시 복을 비는 염불을 위한 대방(大房)을 만들어서 불교 신자들의 결집을 도모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조 성된 대방을 중심으로 대왕대비 조씨(大王大妃 趙氏)와 왕대비 홍씨(王大妃 洪氏) 및 다수의 상궁(尙宮)과 같이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여성 불자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 하였고, 이를 통해 빈약한 정치적 입지를 극복하고 아들 고종의 즉위라는 필생의 염원 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20)

대원군은 집권 이전부터 용궁사를 중창하여 원찰로 삼았고, 고종이 즉위하자 그 보 답으로 보덕사를 크게 세우기도 했다. 또한 쇠퇴했던 흥천사, 화계사, 보광사를 중창하 였고, 종(鐘)이나 불화를 시주하거나 편액과 주련을 써서 제공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를 후원하였다.

19) 吳洪國, 大院君 國防力 强化 政策 硏究 ,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2.

20) 이정주, 흥선대원군 李昰應(1820-1898)의 불교 후원과 그 정치적 의미 , 역사와 담론 , 호서사학회, 2015, p.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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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불교를 이용하였지만, 불교에 대한 적극적 후원은 조선 후기 사원차의 명맥을 근대까지 계속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 차는 차산지에 거주하고 있었던 백성들이 감기나 배 아플 때 끓여먹던 약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고려 시대에 성행했던 차문화가 조선 시대에 일반인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 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시대 다점이 있을 정도로 성행했던 차문화는 새로운 유교 중심의 조선 왕조에 의해 직격탄을 맞아 영원히 회복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조선 시대의 차문화는 대내외적인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성리학이 유입되어 자리를 잡으면서 문벌 중심의 권력구조에서 관료 중심의 사회로 변화되었고,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사찰이 개혁되면서 선비들은 사찰보다는 관계로 진출하게 되었 고, 이로 인해 차문화도 사찰 중심에서 사대부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8∼19세기의 새 로운 학문 유입과 실용 학문의 확산은 조선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켰으며, 차의 존재감 이 거의 상실되어 가던 19세기 사대부를 중심으로 새로운 차문화 중흥운동이 실용학문 과 동시에 발생하였으며, 이는 조선의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관료중심 사회의 등장, 사찰의 개혁과 변화, 사대부의 주류 형성으로 인해 차문화는 사대부인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조선 후기의 차문화는 선비 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것이 사원차가 줄어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이후에 나타나는 제도적 변화로 인해 고려의 사원차가 차지했던 비중보 다 조선 후기의 사원차는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조선 후기의 차문화는 당시 활발했던 도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되었으며, 청나라 및 일본 문물의 수입 및 출판문화의 보급은 새로운 문예 중흥운동을 일으켰고, 그 중 심에는 새로운 실학사상이 내재되어 있었다. 실학사상의 등장은 조선 사회를 변화시켰 으며, 신분을 초월한 지식의 교류가 조선 시대에 쇠약해졌던 차문화를 대중의 문화운 동으로 중흥시키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신분을 초월한 지식층의 형성과 교유는 차와 관련된 시문의 발달과 차문화의 콘텐츠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었다. 이는 조선 후 기 사대부들이 지식인들 간 교유활동과 마음 수양의 수단으로 차에 철학적·예술적 의 미를 부여하면서 차생활을 다양하게 즐겼다는 것을 의미한다.21)

결론적으로 대원군 이후 등장한 사찰문화의 개혁과 조선 후기 경화세족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들과 승려들 간의 교류 확대는 사찰문화의 융성이나 사대부와 승려 간 학문 적 교류와 차를 매개로 한 만남의 활성화를 창출하였고, 이는 서로의 차생활이나 당시 21) 조인숙, 조선 전기 사대부의 다시로 고찰해 본 차문화와 성격 , 차문화·산업학 제19집, 국제차문화

학회, 20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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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차문화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의 정치·사상·문화를 주도 했던 유학자들은 학문과 예술 그리고 차생활 등의 문화생활을 향유하며 토론문화를 형 성하였고 이를 새로운 학문세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조선 후기에 차시문(茶詩文)이 풍 부하게 저작되었고 다화(茶畵)가 다양하게 등장했다는 사실은 사대부 사이 또는 사대 부와 승려 간 인적 네트워크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차에 대한 인 식 정도가 매우 높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 생애

백파의 생애는 그의 비문에 자세하다.22) 그러나 비문의 찬자(撰者)가 밝혀져 있지 않 고 또 너무 장황하다. 규장각제학이조판서백파신헌구선생공덕비(奎章閣提學吏曹判書白 坡申獻求先生功德碑) 23)에는 백파의 공덕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백파공(白坡公)은 1823년 5월 동지중추부사 신응모(申應模)공의 셋째 아들로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선대 이래의 세거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귀래정공의 14세손이며, 안협공에게 는 12세손이 된다.

37세 때인 철종1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 응교 (應敎) 등 사간원과 예문관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성천부사(成川府使)와 의주부윤(義州府 尹)을 비롯하여 각 지방의 암행어사로 활약 하였다. 이후 내직으로 들어와 병(兵)·리(吏)·예조참 의(禮曺參議)와 승지(承旨), 공(工)·형조판서(刑曹參判) 규장각의 제학(提學) 등 요직을 거친 뒤 예조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관환(官宦)으로 보아도 조선 중기 이후 고령신문(高靈申門)에서 유일하게 판서 등 정경(正卿)에 오른 영예를 누렸다.

우리가 백파공(白坡公)의 공덕(功德)을 칭송하는 것은 비단 관력(官歷)이 화려해서 뿐만이 아 니다. 公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종중사(宗中事)에도 큰 관심과 정성을 기우려 오래 기억될 업 적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령신씨 대동보(大同譜)-세칭 유동보(鍮洞譜)이다. 전 28권으로 제4회보인 대동보로서 족보의 품격과 기록의 정밀성에서 우리 보사(譜史 큰 획을 그을 보첩(譜 牒)으로 평가 받는다. 뿐만 아니라 백파공은 직접 각 지방을 심방하면서 기문(記文)과 행장(行 狀), 비문(碑文) 등을 지었으며 많은 문집도 남겨 우리 문헌통고(文獻通考) 뿐 아니라 국가의 문 화 담당기관에서 번역, 출판하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의 공덕을 흠모하는 소이연(所以然) 이다.”

22) 靈川世乘 , (주)인쇄향, 2013, pp. 694-698.

23) 서기(西紀) 2006년 四月 귀래정공후(歸來亭公後) 안협공파(安峽公派) 제십칠대손(第十七代孫) 고려인삼 연구(주)(高麗人蔘硏究(株)) 대표이사(代表理事) 왕수(王秀) 근수(謹竪) 고령신씨(高靈申氏) 귀래정공파 (歸來亭公派) 종회(宗會) 협찬(協贊)백파 서거 104주년을 추도하면서 남산대(南山坮) 숭모비원에 세운 공덕비로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 산 164-1에 위치하고 있다.

(22)

위 비문에는 백파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를 서술함에 있어 ‘공덕비’를 근거로 삼고자 하는 것은 여기에 그의 생애가 비교적 간명하고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 기 때문이다.

(1) 백파의 상계(上系)

백파는 1823년(순조 23년) 5월7일 아버지 응모(應模), 어머니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3남으로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선대 이래의 세거지에서 태어났다. 자는 계문 (季文)이고 족보에는 백파라는 호만 있지만, 영천(靈川)·추당(秋堂)·옥침도인(玉枕道人)·

백파거사(白坡居士) 등이 사용되기도 하였다.24) 본관은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高靈)으로 옛 대가야국의 중심지였다. 종중회 사이트에는 백파의 상계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시조는 고려의 고종이나 원종 시대에 군기감검교(軍器監檢校)를 지낸 신성용(申成用) 인데, 지금의 고령군 쌍림면 산주동 산 38번지 만대산에 시조묘가 있다. 그 후손들은 고려와 조선의 조정에서 800여 년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선비와 학자와 장상(將相)을 배출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다.

2세 강승(姜昇) ⇀ 3세 인재(仁材) ⇀ 4세 사경(思敬) ⇀ 5세 덕린(德隣) ⇀ 6세 호촌 공 포시(壺村公 包翅)로 이어지는데25) 6세 호촌공의 세 아들 신장(申檣, 1382∼1433)·

신평(申枰)·신제(申梯)가 모두 현달(顯達)하여26) 이들 7세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씨족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리하여 이 세 아들은 각기 암헌공파(巖軒公 申檣), 정언공파(靜隱公 申枰), 감찰공 파(監察公 申梯)로 갈리게 된다.

백파는 귀래정 신말주(歸來亭 申末舟, 1439∼?)의 14세손인데27) 그 사이에 9세 홍 24) 김영봉, 古書解題 Ⅱ, 秋堂襍稿 , 평민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2004. p. 285.

25) 고령신씨대종회 www.goshin.or.kr ‘연원탐방’ 중 ‘씨족의 발전’에 의하면 3세 인재, 4세 사경, 5세 덕린 등은 6세 호촌공이 과거시험 때 제출한 ‘행권가상(行卷家狀)’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6) 맏아들 신장은 직제학(直提學)과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있으면서 세종(世宗)의 총 애를 받았다. 둘째 신평은 사간원(司諫院) 正言을 역임했고, 셋째 신제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27) 1455년에 수양 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의 제7대 왕에 오르자 신말주는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 에서 물러나 순창(淳昌) 남산대(南山坮)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하였 다. 이듬해 정자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에서 따온 자신의 호 귀래정(歸來亭)으 로 정자 이름을 삼았다. 1974년에 고쳐 세운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내 부에는 1479년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歸來亭記 와 강희맹(姜希孟)의 시문 등의 액판이 걸려 보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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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 ⇀ 10세 공섭(公涉) ⇀ 11세 숙(淑) ⇀ 12세 언식(彦湜) ⇀ 13세 심(淰) ⇀ 14세 기한(起漢) ⇀ 15세 유(濡) ⇀ 16세 선연(善淵) ⇀ 17세 회(澮) ⇀ 18세 경순(景洵) ⇀ 19세 택권(宅權) ⇀ 20세 현록(顯祿) ⇀ 21세 응모(應模)로 이어지므로 백파는 시조 성 용(成用)의 21세손이 된다.28)

백파는 이런 선조에 대한 깊은 숭모(崇慕)에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그 한 예로 1875 년 가을 해남으로 가던 길에 순창을 들러 일가의 집에서 자면서 지은 시가 여러 편 있 다.29) 그 중 경차귀래정십노설첩시운(敬次歸來亭十老楔帖詩韻) 의 서(序)에는 파조 신 말주가 순창에 은거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마을의 아홉 노인들과 계모임을 만들 었을 때 남긴 설첩시(楔帖詩) 10수를 소개하고 있다.30) 설첩시 는 당시 이윤철(李允 哲)·김박(金博)·한승유(韓承愈)·안정(安正)·오유경(吳惟敬)·신말주(申末舟)·설산옥(薛山 玉)·설존의(薛存義)·장조평(張肇平)·조윤옥(趙潤屋)이 지은 7언 절구의 시첩이다. 백파 의 敬次歸來亭十老楔帖詩韻 는 위 10인의 시를 각각 차운한 것인데, 그 중 선조인 귀 래정 신말주의 시와 이를 차운한 백파의 시만 소개하고 있다. 먼저 귀래정의 시를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歸來亭上白頭翁 귀래정 위의 머리 하얀 늙은이

敝帚當捐不患窮 몽당 빗자루 버린대도 근심할 것 없어라.

賴有鄕人憐不棄 다행히도 고향 사람 날 버리지 않으니 開樽無日不吟風 술 단지 열어 놓고 날마다 풍월 읊네.

위 시의 2구에서 귀래정은 자신을 몽당비[敝帚]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고향 사람들 이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날마다 술 마시며 풍월을 즐긴다는 내용으로 단 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은둔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였 다. 그는 위 시에서 옹(翁)·궁(窮)·풍(風) 자를 차운(次韻)하여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 다.

名門繼世有泥翁 명문의 대를 이은 니옹(泥翁)이 계시니

傍溯伊溪浩不窮 방계(傍系)를 소급해보면 이계(伊溪)로 이어졌네.

고 있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28) 1899년 백파가 편집한 靈川世乘 에 의거함.

29) 秋堂襍稿 권1. 行到淳昌南山臺宿族侄泰休家 , 敬次歸來亭十老稧帖詩韻 , 宿妙法里族叔嵋隱敬模宅 , 宿廣巖族侄鍾休家 .

30) 秋堂襍稿 권1, “我先祖當光廟改玉後 嘉遯于淳昌 作亭號歸來 與里中九老作會 有稧帖詩十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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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派淳南流更遠 한 파는 순창의 남산대(南山坮)로 이어왔으니 旅菴家裏見遺風 여암공(旅菴公) 집안의 유풍(遺風)임을 알 수 있네.31)

위 시에서 니옹(泥翁)은 죽당 신유(竹堂 申濡, 1610∼1665)를 의미한다. 그는 귀래정 신말주의 7세손이요, 백파에게는 7대조가 된다. 2구의 협주에는 “죽당공우호니옹(竹堂 公于號泥翁) 방조정민공역복축우산남이계상이자호(傍祖貞敏公亦卜築于山南伊溪上以自 號)”라는 기술이 있는데, 이를 통해 신유(申濡)의 또 다른 호가 죽당(竹堂)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귀래정의 손자 신공제(申公濟, 1469∼1536)도 산 남쪽 이계(伊溪) 위에 집을 짓고 이계라고 자호(自號)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방조라고 한 것은 신공제의 아버지 신 홍(申洪, ?∼31세에 卒)이 3남(公濟·公渡·公涉) 1녀를 두었는데 백파는 3남 공섭(1481∼

1521)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4구의 여암가(旅菴家)는 귀래정의 10세로 백파의 고조부 에 해당하는 여암 신경준(旅菴 申景濬, 1712∼1781)이었다.

백파의 십노계축후서(十老契軸後敍) 에는 이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 선조 귀래공(歸來公)은 단종(端宗) 갑술년(1454)에 친림문과(親臨文科)에 합격하였는데 당시 나이 26세셨다. 뜻이 벼슬자리를 즐거워하지 않아 물러나 순창에서 남산 꼭대기에 정자를 짓고 귀래라 하였다. 71세가 되셔서 향산구로회(白香山九老會)를 모방하여 같은 마을에서 나이 70살을 넘은 이윤철(李允哲)·김박(金博)·한승유(韓承愈)·안정(安正)·오유경(吳惟敬)·설산옥(薛山 玉)·설존의(薛存義)·장조평(張肇平)·조윤옥(趙潤屋) 등 9인과 계(契)를 결성하여 때때로 정자 위 에 모여 술잔을 나누며 서로 즐거워하였다.32)

위 글에는 신말주가 순창으로 내려가 남산에 당나라 때 향산 백거이(香山 白居易, 772∼846)의 향산구로회를 본떠서 ‘십노회(十老會)’를 만든 내막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

이 외에도 백파의 금화록(金華錄) 에는 당후경차 죽당선조은대주련운(堂后敬次 竹 堂先祖銀臺柱聯韻) 이 소개되어 있다. 이렇듯 그는 명문세가(名門世家)의 후손답게 선 조의 위업(偉業)을 현창하고 있었다.

(2) 백파의 행장(行狀)

31) 秋堂襍稿 권1.

32) 고령신씨대종회 www.goshin.or.kr 종회자료실, 귀래정 신말주 선생과 정부인 순창설씨 생애와 업적,

“我祖歸來公 端宗甲戌 擢親臨文科時 年二十六 志不喜宦榮 退去淳昌 築亭于南山之巓 扁以歸來 年至七十 一 倣香山九老會 與同鄕年踰七十者 李允哲 金博 韓承愈 安正 吳惟敬 薛山玉 薛存義 張肇平 趙潤屋 九 人結契 以時會亭上 盃酒相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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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년도 진강과목(進講科目) 42세 고종1년

1864년

검토관(檢討官)으로 고종에게 효경 2회 진강.

전 옥당 관원으로 고종에게 효경 1회 진강.

44세 고종3년 1866년

고종에게 시강관(侍講官)으로 통감 제2권 3회 진강.

고종에게 검토관(檢討官)으로 소학 제4권 6회 진강.

고종에게 옥당(玉堂)으로 소학 제4권 1회 진강.

고종에게 검토관(檢討官)으로 소학 제4권 1회 진강.

45세 고종4년 1867

고종에게 검토관(檢討官)으로 소학 제4권 4회 진강.

고종에게 검토관(檢討官)으로 소학 제4권 5회 진강.

고종에게 시독관(試讀官)으로 소학 제5권 2회 진강.

고종에게 시강관(試講官)으로 소학 제5권 7회 진강.

<표1> 진강과목(進講科目, 효경 통감 소학 맹자 강목 ) 일람 백파는 17세 때(헌종 5년 1839년) 통덕랑(通德郞) 이기발(李基發)의 딸 광주이씨(廣 州李氏)를 맞아 관례를 올렸다. 이후 20년간의 행적을 추정할 만한 자료는 찾지 못했 다. 그런데 그의 시집인 동정록(東征錄) 에 그의 20대 중반 행적이 하나 발견된다.

백화암(白華庵)에서 완성(玩惺)법사에게 제하여 주다(白華庵題贈玩惺法師) 라는 시에서 그 무렵 백파는 서울 백련사(白蓮寺)에서 독서한 것으로 나타나는데33) 과거 준비를 하 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37세 때인 1859년에 증광문과(增廣文 科)에 응시하여 회시책문(會試策問)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민(閔)씨의 상(喪)을 당하여 전시(殿試)에는 나가지 못하였다.34) 1862년 모친상을 마친 40세에 드디어 문과 정시(庭試)에서 병과 5위로 급제하는데, 이토록 늦게 관계에 진출한 이유를 자세히 밝 힌 자료는 없는 것 같다. 그는 성균관 전적(典籍)·사간원 정언(正言)·사헌부 지평(持平) 이 되었다가 42세에 홍문관 수찬(修撰)에 제수되면서 곧 바로 경연청(經筵廳) 검토관 이 되어 고종(高宗)에게 효경 을 진강(進講)하게 되었다. 이후 45세까지 통감 · 소학 을 계속 진강하다가 46세에 관동어사(關東御史)에 제수되었고(3월-10월), 이어서 12월 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다가 47세부터 48세까지 다시 통감 · 맹자 를 진 강하게 된다.

33) 白坡漫稿 , p. 56, (주)인쇄향, 2014. “玩師嘗住京城西白蓮寺 余於少時 借其禪房讀書 別後廿餘年 至此 相逢(玩師는일찍이 서울 서쪽 백련사에서 살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그 선방을 빌어서 공부하였다. 헤 어 진지 20여년인데 여기에서 상봉했다).”

34) 신헌구, 백파만고 , (주)인쇄향, p. 224.

(26)

47세 고종6년 1869년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통감 제4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2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1권 9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통감 제4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1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통감 제4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1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통감 제□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2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통감 제□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2권 1회 진강.

48세 고종7년 1870년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4권 3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5권 1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5권 2회 진강.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맹자 제6권 5회 진강.

61세 고종20년

1883년 고종에게 참찬관(參贊官)으로 강목 제3권 1회 진강.

백파는 49세에 성천부사(成川府使), 50세에는 의주부윤(義州府尹), 52세에는 좌부승지 (左副承旨)의 직임을 수행하기까지 모두 61회나 진강하였으며, 이런 사실은 승정원일 기(承政院日記)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35)

백파의 벼슬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견제로 급제동이 걸렸다. 1874년 초 대원군은 여섯 사람에게 비봉(秘封)을 내려 성 밖에서 펼쳐보도록 하였다. 비봉에는 먼 변방에서 한가롭게 지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여섯 사람은 창졸간에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 이는 사실 유배에 해당하였다. 이들은 3∼4년 후에 다시 원직으로 복귀되었 다. 위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내용이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

36)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재상의 자제로서 나이가 젊어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거의가 대원군의 사인이 된 자들

35) http://www.itkc.or.kr/, 승정원일기 , 고령신씨 안협공파 종중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실기에 기록 된 백파 신헌구 선생의 행적 , 2013.

36) 午人宰相子弟, 年少名宦, 爲雲峴私人者, 不可僂數, 而韓耆東·崔鳳九·蔡東述·權鼎鎬, 鄭顯德, 其尤也. 甲 戌初, 內賜秘封, 使城外開見, 及開則命邊遠閒佳. 並北人申獻求, 亦列其中. 六人者, 倉黃上道, 其實窤配也.

三四年後, 稍稍召還, 皆改頭換面, 虱附諸閔, 遴致通顯. 惟鼎鎬參安驥泳逆謀, 辛巳冬誅死, 東述以知情不告, 坐斬. 지은이: 황현, 옮긴이: 임형택 외, 펴낸이: 채호기, 매천야록·원문 교주본 , 대원군 때 출세한 남 인들 , (주)문학과 지성사, 2005, p. 26.

(27)

이다. 그 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한기동·최봉구·채동술·권정호·정현덕은 대표적인 인물이 다. 갑술년 초에 비봉을 내사(임금이 물건을 신하에게 내려 주는 것)하고 성 밖에 가서 열어보 도록 하였다. 그 비봉의 내용은 변방 근처에 멀리 가서 한가로이 살라는 것이었다. 이들 중 북 인 신헌구도 들어 있었다. 이 여섯 사람은 창황히 길에 올랐는데 그것은 귀양살이였다.

이들은 3,4년 뒤부터 모두 개두환면하고 민씨들에게 붙어서 지위가 높아져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직 권정호만은 안기영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신사년(1881년, 고종 18년)겨울에 처형당 했고 채동술은 그것을 사전에 알았지만 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참형을 받았다.”

매천야록 의 기록에 의하면 백파는 귀양살이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동작나루를 건너다가 비를 만나 입으로 읊조리다(渡銅雀津遇雨口拈) 37)라는 시에서 그 사실을 확 인 할 수 있다. 추당잡고 는 그의 해남생활 5년 동안의 시를 모은 것이라서 이 시가 맨 앞에 실려 있다.

銅雀津頭捩拕迎 동작 나루에서 키를 틀고 맞이하니, 滿江風雨努濤生 강 가득한 비바람에 성난 파도 일어나네.

內裏緘書言不敢 궁궐에서 받은 밀봉 서찰 감히 말하지 못하나니, 靑衫猶帶繡衣行 푸른 적삼에 암행어사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일세.

위 내용에 의하면 죄를 짓고 유배 길에 오른 백파는 서찰내용을 말로 할 수 없어 시 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위 시가 말하는 밀봉은 비밀리에 지방수령과 악정과 부정부채 를 다스린 암행어사의 임무가 써진 서찰이었기 때문이다.

백파의 또 다른 시 점사술회이수(店舍述懷二首) 에도 그가 어사 임무를 얻었다고 언급되어 있다.38)

單車羸馬趂炎程 수레 한 대에 파리한 말로 더운 길을 따라가니, 十載重叨御史名 십 년에 다시금 외람 되게 어사 이름 얻었다네.

天意微深臣不識 임금 뜻 은미하고 깊은 줄 나는 알지 못하고서, 一身無罪是爲榮 이 한 몸 죄 없음만 영예로 여기네.<其一>

위 시에서 백파는 파리한 말이 끄는 수레에 짐을 싣고 해남으로 귀양 가는 중 어사 임무를 준 임금의 깊은 뜻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위 두 시의 내용 에 의하면, 백파는 어사의 임무를 띠고 해남으로 내려와 5년 정도 이곳에 머물게 되었 음을 알 수 있다.

37) 김영봉, 앞의 책, pp. 287-288.

38) 김영봉, 위의 책, p. 288.

(28)

위 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파가 이하응에게서 받은 밀지 속에는 그가 이하응으 로부터 어사 임무를 받았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또 다른 문건인 승정원일기 에 수록 되어 있는 백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행정적으로 유배를 당해 해남으로 내려 가게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에는 백파의 죄목이 19건이나 기록되어 있 지만, 여기에서는 주요 4건의 기록만 살펴보고자 한다.

(1)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39)) 12월 22일(신묘) 맑음

사진하지 않은 우승지 김규홍 등을 패초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 정원이 아뢰기를,

“우승지 김규홍, 좌부승지 신헌구가 오늘 사진(仕進)40)하지 않았으니, 모두 즉시 패초(牌招)41)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42)

(2)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 12월 27일(병신) 맑음

좌부승지 신헌구의 파직 전지에 대해, 추고만 하라고 전교하였다

좌부승지 신헌구가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에 대한 파직 전지와 관련하여, 추고만 하라고 전교 하였다.43)

(3) 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1) 1월 12일(계유) 맑음

우승지 김규홍 등의 파직 전지에 대해, 추고만 하라고 전교하였다

우승지 김규홍과 좌부승지 신헌구와 동부승지 이응하가 패초에 나오지 않은 데에 대한 파직 전지와 관련하여, 추고만 하라고 전교하였다.44)

(4) 고종 12년 을해(1875, 광서1) 1월 12일(계유) 맑음

사진하지 않은 우승지 김규홍 등을 패초할 것을 청하는 정원의 계 또 아뢰기를,

“우승지 김규홍과 좌부승지 신헌구와 동부승지 이응하가 오늘 사진하지 않았으니, 모두 즉시 패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45)

백파는 고종 11년 1874년 겨울부터 1875년 1월까지 사진하지 않아 패초하라는 전교

39) 동치(同治): 중국 청나라 목종 때의 연호(1862-1874).

40) 사진(仕進): 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각에 근무지로 출근함.

41) 패초(牌招): 조선 시대, 임금이 승지를 시켜 신하를 부르던 일.

42) 政院啓曰, 右承旨金奎弘, 右副承旨申獻求, 今日不爲仕進, 竝卽牌招, 何如? 傳曰, 允.

43) 以左副承旨申獻求牌不進罷職傳旨, 傳曰, 只推.

44) 以右承旨金奎弘, 左副承旨申獻求, 同副承旨李應夏牌不進罷職傳旨, 傳曰, 只推.

45) 又啓曰, 右承旨金奎弘, 左副承旨申獻求, 同副承旨李應夏, 今日不爲仕進, 竝卽牌招, 何如? 傳曰, 允.

(29)

를 받았지만 또 사진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사진과 패초가 반복되다가 파직까지 거론 이 되었지만 이하응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파직은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죄 목이 확실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유배를 보내는 걸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다음 문건은 백파가 해남생활 때 교유했던 대둔사 승려 범해의 편지이다. 범해는 백 파가 해남생활을 마치고 떠난 한참 후에 그에게 신 승지께 올리는 편지(上申承旨書) 를 썼다.46)

“접때 남창적소(南倉謫所)에 사람의 견제(牽制)47)가 되셨다가 분주하게 바로 돌아갈 즈음, 저 물녘에 왔다가 새벽녘에 나서느라 미처 하직 인사도 못한 채 산문을 떠나시니, 황공한 마음 가 슴에 가득하여 밖으로 넘칩니다.

머무신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로 마음 편치 않으면서도 어여삐 여기셨던 은혜 갈수록 더욱 사무칩니다. 때로 북풍 따라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줄입니다.”

위 편지에 적혀 있는 ‘접때 남창적소(南倉謫所)에 사람의 견제(牽制)가 되셨다가’라는 구절에 의하면, 백파는 해남 해창 소요원 시절에 견제를 받았다는 것과 암행어사가 아 닌 유배를 왔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매천야록 과 추당잡고 에 수록된 시 도동작진우우구념(渡銅雀津遇 雨口拈) , 점사술회이수(店舍述懷二首) 와 승정원일기 , 그리고 신 승지께 올리는 편지(上申承旨書) 의 문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일부 문건에서 백파가 암행어 사 임무를 띠고 해남에 내려왔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나머지 문건들에는 그가 죄를 지 어 해남으로 유배생활을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해남으로 내려온 이유는 암행어사의 임무를 띠고 내려온 것이 아니라 유배 생활을 왔음을 알 수 있다.

백파가 해남으로 유배 생활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남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 다. 그는 어성촌(漁城村) 어귀 부서만(扶胥灣) 동쪽 기슭에 자리한 해창촌사(海倉村 舍)48)에 소요원(逍遙園)을 열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은거하였다. 백파가 1875년과 1880년 사이에 처음 만들어 살던 소요원은 현재 해창 주조장의 정원으로 남아 있다.

46) 向於爲人牽制 南倉謫所奔走卽回 乘昏而歸來 乘曉而發行 未能奉謝而出山 惶恐之心 弸中溢外 棲止以來 至於今日 日無安心 而見愛之恩 愈久愈深 時因北風 以惠德音焉 謹不備. 각안,『범해선사문집』, 第二.

47) 일정한 작용을 가함으로써 상대편이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이다.

48) 현재의 주소는 해남군 화산면 해창길1이 되었다. 해창(海倉)으로 불리게 된 것은 朝鮮後期이다. 조선 후기의 호구총수(戶口總數) 에는 화산면 연곡리에 있던 조운창(조세를 한양으로 수송하기 위해서 물 길이나 바닷길 연안의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 바닷길을 이용하는 곳은 해운창 또는 해창이라고 불림) 이다. 고산 윤선도가 수원에 있던 녹우당을 해체해 제물포에서 배에 싣고 해남으로 들여온 곳도 해창 만이었다. 조선시대 조세창고가 있을 만큼 해창만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주조장 앞 도로변에는 신헌 구선생의 碑가 ‘신선생백파소요대(申先生白坡消遙臺)’라고 새겨져 있다.

(30)

아래 <그림1>에서 보듯이 주조장 앞마당에 있는 ‘신선생백파소요대(申先生白坡消遙 臺)’는 처음에 해남군 화원면 금평리 앞을 지나는 도로변에 있었는데, 그 주변은 방풍 림으로 심은 노송들이 즐비했다. 1988년 고천암이 간척되면서 이곳도 육지로 변했지만 주조장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을 때 풍수 비보(裨補)의 차원에서 심은 노송은 이제 해창만의 옛날을 증언하며 서있다.

<그림1> 신선생백파소요대(申先生白坡消遙臺) <그림2> 백파공묘 이장 시 출토된 지석

<그림1>의 공덕비에 적혀 있는 백파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암행어사 백파 신헌구 선생은 1862년 3월 10일 40세 의 늦은 나이에 문과 정시에서 병과 5 위로 급제하였다. 1882년 5월 22일 조선은 제물포에서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했는데, 당시 대표수 석이 백파 신헌구 선생이다. 한미수교 대표였다.

다산선생이 인용한 詩는 시경 의 정풍 , 청인 에서 나온 것인데 춘추시대 정 문공이 신하 인 고극을 미워한 나머지 그를 장수로 임명하여 군사를 주어 하수 위에 가서 적을 방어하라고 내친 뒤 종시 그를 불러들이지 않으므로 그에 따른 군사들이 오랜 세월에 지쳐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것을 읊은 詩이다.

금석학에도 관심이 많은 그였기에 울진의 왕피천 등 그가 가는 곳 여러 곳에 소요대라는 글 자를 새겨 놓은 것으로 다산의 심정과 곳곳에 숨어 있는 인재들을 보는 그의 심정이 통함을 짐 작할 수 있다.

해남에서 숨어 일하라 명받은 당시 상황은 왕실 창고와 국고가 바닥나 어려운 시기이고 곡창

(31)

지대인 전라도의 조세와 관련된 해운 해창의 관리 문제점과 관계된 사람들의 불법행위 등이 심 화되어 이것을 단속하고 해결하기 위한 암행이었고 이를 숨기기 위해 왕에게서 밀명을 받은 후 소요원을 가꾸며 5년간 이곳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한양으로 돌아간 얼마 후에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시 수석대표를 맡았고 성균관 대사성 형 조판서, 한성부 판윤, 의관에 제수되셨습니다.

여기 서있는 비석은 암행어사로 5년을 마치고 한양으로 떠나면서 전답을 마을에 주고 간 것 에 대한 해창 주민들이 백파선생이 살던 집터에 세운 공덕비입니다.”

<그림2>는 백파공의 묘소에서 이장 시 출토한 지석인데, 여기에는 “정헌대부예조판 서겸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영천신공휘헌구지묘 간좌(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同知成均館事靈川申公諱獻求之墓 艮坐)”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파 는 1902년 3월 28일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제수되었다. 또한 그는 예조판서, 지의금부 사(知義禁府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제수된 사실이 이 지석을 통해 다시 확 인할 수 있다.

백파는 해남 생활을 마치고 1880년 봄 상경하여 벼슬길에 복귀하여 다시 중용되고 있다. 1882년 6월 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때 우승지(右承旨)에 제수됨을 필두로 1883년 예조참의(禮曹參議),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고 이틀 후에 참찬관 으로 고종에게 강목 3권을 진강하였다. 이 후로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가선대 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1884년 12월에는 성균관 대사성, 1885 년에는 우승지가 되면서 의례, 교육, 과거, 외교 및 왕명(王命) 출납의 업무를 관장하였 다. 1898년 그의 나이 76세, 중추원 일등의관을 체차해 주기를 바라는 사직상소를 올리 기 까지 10여년을 더 벼슬살이 하면서 이조참판, 한성부 좌윤, 우윤, 공조참판, 형조참 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894년 경기감사에 제수되었을 때 강원도 일대에 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진두지휘한 일도 있었고, 1897년 9월 4일에 고종 임금 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에 오르도록 다른 조정대신들과 함께 상소하였으 며, 1902년 3월에는 궁내부 특진관(3월 16일)과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제수되었다가(3 월 28일) 불과 한 달이 못되는 4월 12일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문집에는 백파만고 , 고령신씨세보(高靈申氏世譜) , 제4회 족보인 유동보 28권 발간, 영천유사(靈川遺事) 2권, 영천세승 상, 하권 등이 있다. 신씨 족보인

『고령신씨세보 에 따르면 공사간(公私間)의 글을 묶은 백파의 기문이 50여권에 이른 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대계유고(大溪遺槁) , 송죽당문집(松竹堂文集) , 도촌유고 (道村遺稿) , 명곡선생문집(明谷先生文集) , 예곡선생문집(禮谷先生文集) 등의 권두

(32)

에도 서문(序文)을 써기도 하였다. 영천세승 후미에 부록으로 실린 백파의 연보 ·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 에는 백파의 행적과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고49) 백파의 유 묵집 에는 해남의 사대부들과 조카들의 간찰이 수록되어 있으며 백파 자신이 고희를 맞아 그 감회를 쓴 시와 친척들이 그 원시에 차운(次韻)하여 쓴 시를 모은 백파 신헌 구 선생 고희시축(古稀詩軸) 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축은 1893년 5월 7일 지의금부사 (知義禁府事)로 있을 때 지은 고희(古稀) 축하 시 모음집인데 그의 육필집(肉筆集) 유 묵집 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제문(祭文) 1편, 간찰(簡札) 68편, 서(敍) 1편, 고희 시축 25편,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문은 1854년 8월 22일 신병(申秉)의 대 상(大祥) 때 지은 것이고, 간찰은 순창 김씨 김광우(金匡祐, 1834∼1894)50)에게 보낸 것과 조카인 신관휴(申觀休), 신승휴(申勝休) 등에게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김광우에게 보낸 간찰들은 대부분 안부를 묻는 내용과 김광우의 자제이며 백파의 제자였던 김세필 (金世弼, 1854∼?)의 과거(科擧)에 관련된 일들이 적혀있다. 조카들에게 보낸 간찰들은 삼촌으로서 조카들의 관직생활에 대한 조언과 바람을 적었으며, 서(敍)는 그가 해남 시 절 가까이 지내던 송파 이희풍(松坡 李喜豊)의 시문집에 쓴 것이다. 부록은 이일찬(李 日贊)이 셋째 외숙인 백파의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글( 敬壽 三母舅白坡申公回巹序 ), 백파의 연보, 그리고 혼인(婚姻)과 글[文]로 맺어진 고령신씨와 능성구씨의 인연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희시축 의 첫 머리에는 고희를 맞은 백파의 7언 율시가 수록되어 있었고, 이어서 작은형 면구(冕求)의 아들로 삼척부사를 지냈던 신승휴(申勝休)를 비롯하여 종외손(從 外孫) 윤복용(尹復容)에 이르기까지 모두 24명의 후손들이 백파의 원시를 차운(次韻)하 여 축하하는 7언 율시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시축은 70세의 고령인 백파가 당시의 최 고급 중국 수입지인 냉금지(冷金紙)에 직접 필사한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이라 잠시 소 개한다.

백파가 자신의 고희를 맞아 감회를 쓴 시는 다음과 같다.

庸踈駑劣不材人 무능하고 용렬한 재목이 되지 못한 사람 靈老昇此七十春 영천 노인이 이제 70의 봄을 맞았네.

尙賴馨香先世德 아직도 선대 덕의 향기에 힘입어 偏承雨露聖君仁 과분하게 성군의 어진 은혜를 받는구나.

49) 신헌구, 白坡漫稿 , (주)인쇄향, 2014, pp. 4-5.

50) 전남 해남군 산이면 예정리 507번지 禮洞부락에 거주했던 順天人 金匡祐(1834.7.9-1894.7.9)는 자 正日, 호 禮亭이다. 1883년 11월 政筮繕工監役을 지냈으며 遺稿가 있다. 배위는 長興任氏(1832-1883)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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