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News, Volume 23, No. 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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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 마음으로 만물의 이치를 품은 심학의 완성자
❙이 상 은 교수 (상지대학교)
왕수인(王守仁, 1472-1529)의 자는 백안(伯安)이고, 호는 양명(陽明)이다. 절강성(浙江省) 여요현(餘姚縣)에 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멀리 진(晉)의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서성(書聖)으로 일컬어지는 왕희지(王羲之)가 그의 증손이었다. 왕람은 본래 산동(山東)의 낭야(瑯琊) 사람이었는데, 남쪽으로 이주해서 회계산(會稽山) 산음(山陰)에서 살았다. 그 뒤 23대 왕수(王壽)가 거처를 여요로 옮기게 되었다. 그의 집안 대대로 명문 기족이었고,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것 같다. 왕수인의 부친인 왕화(王華)는 남경이부 상서(南京吏部尙書)를 지냈다.
왕수인은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분만했다고 한다. 그가 태 어날 때, 그의 조모가 꿈속에 천신(天神)이 비단과 옥을 걸치고 구름 속에서 북을 치며 아이를 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조부는 그의 이름을 왕운(王雲)이라 짓고, 사는 곳도 “서운루(瑞雲 樓)”라고 불렀다. 원래 왕운이던 것을 왕수인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된 데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왕운은 다섯 살 까지 말을 못했으나, 머리가 좋아 조부가 읽은 책을 이미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한 고 승(高僧)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훌륭한 아이인데, 도(道)가 끊어지는 것이 애석 하다.”고 말했다. 조부는 《논어》 위령공편의 “앎이 미치더라도 인(仁)으로 지키지〔守〕 못하면 비록 얻었다 하더 라도 반드시 잃게 된다.”는 말에 근거하여 ‘수인(守仁)’으로 이름을 바꿔 주었다. 그러자 바로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소흥(紹興)의 산음(山陰)을 좋아해서 소흥으로 이주해 살았다. 어린 시절 왕수인은 훌륭한 집안의 좋은 학습 환경에서 자랐다.
12세에 서숙(書塾)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13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큰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는 뜻이 높고 심사가 활달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한 번은 서숙의 선생이 천하에 가장 중요한 일은 과거에 급제 하는 일이라고 하자, 그는 “천하에 가장 요긴한 일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여 성현이 되는 일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17세에 부인 제씨(諸氏)와 결혼했는데, 결혼하는 날 우연히 도사(道士)를 만나 양생술을 묻다가 함께 수련하 느라고 오지 않는 바람에 온 집안사람들이 겨우 찾아 혼례를 치렀다는 얘기도 있다. 그만큼 여러 분야에 관심 이 많았고,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18세에 왕수인은 누량(婁諒, 1422-1491)에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누량은 그에게 주희(朱熹)의 “격물치지(格物致知)”설을 강의했다. 왕수인은 이처럼 처음에는 주자 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는 “모든 사물에는 다 이치가 있으므로, 이 사물들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 하면 모두 알 수 있게 된다.”는 주자의 격물치지의 이론을 실천해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는 우선 대나무의 이치를 궁구해보려고 친구와 함께 대나무 앞에 앉아 뚫어지게 대나무를 바라보았다. 마 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며 대나무의 이치를 깨닫고자 노력했으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못했고, 어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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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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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3권 제6호, 2020도 떠오르지 않았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앉고 그대로 앉아서 대나무의 이치를 생각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 다. 3일 째 되던 날 친구가 쓰려졌고, 왕수인은 일주일을 버티다 결국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로부터 왕수인은 주자학에 근본적인 의문을 품으면서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왕수인의 학문적 관심은 크게 세 차례 변화의 시기가 있었다. 첫 번째가 주자학에 회의를 갖고 문학에 빠져 시문을 짓는 일에 몰두하던 시기이다. 두 번째가 도가와 불가사상에 빠져 산으로 들어가 수련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으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유학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왕수인은 21세에 향시에 합격했고, 28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몇 가지 작은 직책을 역임하다가 31세에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양명동(陽明洞)에 집을 짓고 살았다.
양명이란 호는 이곳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얼마 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인정을 받았으나, 환관 유근(劉 瑾)의 전횡으로 남경급사중어사(南京給事中御使)인 대선(戴銑) 등 20여인이 체포되자, 왕수인은 상소를 올려 이들의 석방을 논했다. 이로 인해 유근의 분노를 사서 끌려가 곤장 40대를 맞고 귀주(貴州) 용장(龍場)이라는 후미진 산골짜기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 역은 급한 용무로 오가는 관원들이 잠시 쉬어가며 말을 갈아 타고 하는 곳인데, 역승은 그것을 담당하는 미관말직이었다. 이것은 실로 유배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의지가 굳은 이에게 위기는 기회일 수 있는 법이다. 용장은 기후도 나쁘고 풍토병도 심하며, 온갖 독 충과 맹수들이 들끓는 오지였다. 그러나 그는 풍속에 근거하여 그곳 백성을 교화하여 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 았다. 또한 늘 죽음과 마주하고 있는 이곳이야말로 그에게는 오직 자신에게 집중하여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왕수인은 이 시기에 《대학》의 핵심사상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성인 의 도는 내 본성 안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므로, 사물에서 이치를 구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마음이 곧 이치다(心則理).”라는 깨달음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용장의 깨달음(龍場悟道)”라고 칭한다.
그 후 1509년에 환관 유근이 권좌에서 밀려나 처형되면서 왕수인은 용장을 남경형부주사(南京刑部主事)라 는 벼슬을 맡았다가, 2년 후에는 북경으로 불려가 이부험봉사주사(吏部驗封司主事), 서원외랑(署員外郞), 이부 문선사주사(吏部文選司主事)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45세부터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왕경(王琼)의 추천 으로 장군이 되어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토벌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몸소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하고 여러 상황을 체험한 것은 그의 학문이 주자학의 이지적이고 이론적인 것과는 달리 실천적인 감성적이고 실천 적이 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특히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을 진압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어리석은 임금인 무종(武宗) 때에는 이 공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그것은 무종 측근의 신하들이 평소 영왕과 친밀했던 관계로 상황이 좀 복잡했던 것이다. 왕수인은 이런 복잡한 정세를 파악하고, 정치사단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병을 칭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1521년에 명(明) 세종(世宗)이 즉위한 후, 이런 큰 공을 세운 신하를 냉대한 것을 알고는 다시 논공행상을 하여 그를 우선 남경병부상서로 승진시키 고 얼마 안 되어 그를 신건백(新建伯)으로 봉했다.
1522년에 부친 왕화가 세상을 떠나자 왕수인은 고향에 돌아와 상을 치르고는 강학(講學)을 시작했다. 처음 에는 직산서원(稷山書院)에 초빙되어 가르치다가, 1525년에 드디어 양명서원(陽明書院)을 창건하여 제자들에 게 양명학을 전파했다. 그 해에 부인 제씨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장씨와 재혼하여 아들을 얻었다. 양명이 자 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삼았다가 55세에 늦둥이를 본 것이다. 그런 그를 조정은 가만 두지 못했다. 1527년에 또 부름을 받고 광서(廣西)로 반란을 평정하러 가며 천천교(天泉橋)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심학사구(心學四 句)”는 그의 학문의 정수를 잘 말해주고 있다. “선도 악도 없는 것은 마음의 본체요, 선과 악이 있는 것은 의지 의 발동이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格物)이다.(無善無惡心 之體, 有善有惡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난을 평정한 후 왕양명은 폐병이 중해져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529년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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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이 유언을 묻자, 그는 “내 마음이 환하게 밝은데, 또 무슨 말을 하겠느냐?(此心光明, 亦復何言)”하며 눈을 감았다. 그의 상을 치를 때, 군인과 백성들이 삼베옷을 입고 울면서 그를 보냈다고 한다. 후에 신건후(新建候) 로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文成)이 내려졌고, 1586년에 공자 사당〔孔廟〕에 배향되었다.양명 선생으로 더 잘 알려진 왕수인은 뛰어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앞서 보았듯이 능력 있고 도덕적으 로 성실한 실천적 정치가였다. 그의 학문은 상산(象山) 선생으로 잘 알려진 육구연(陸九淵, 1139-1193)과 맥을 같이 한다. 두 사람 모두 돈오를 몸소 체험한 결과로 자신들의 사상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이 둘의 사 상을 합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라고 하는데, 일명 ‘심학(心學)’이라고도 한다. 주희가 정이의 ‘성즉리(性則理)’
를 이어 받은데 대하여, 육구연은 심즉리(心則理)를 주장하였고, 이것은 왕수인에 계승되어 학문적으로 완성되 었다. 그것을 우리는 주자학에 대하여 양명학이라고 부른다.
왕수인은 공자, 맹자의 유가사상을 불변의 계율로 보거나,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봉건윤리 도덕을 반대하며 개인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사상을 폈다. 그의 사상은 《전습록(傳習錄)》 이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상, 중, 하의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서는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이 중심이며, 중권과 하권은 치양지설과 만물일체 설이 주류를 이룬다.
주자학과 양명학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이론인 역시 성즉리설과 심즉리설이다. 여기서 성리학과 심학이라는 명칭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성즉리”란 “본성이 곧 이치이다.”라는 말인데, 이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 만물은 각 자의 이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그 사물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본성은 이치(理)이지만, 마음은 이를 내재하고 있으나, 분명 기적(氣的)인 존재라고 본다. “심즉리”란 “마음이 곧 이치이다.”라는 말이다. 이것 은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유학의 인식이론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근거가 된다. 주희는 격물의 격 (格)을 이를 지(至)와 같다고 보았다. 치지(致知)는 나의 앎을 미루어 나가 극대화 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주 희의 격물치지설은 모든 사물에 나아가 거기에 내재한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인식주체의 주관보다 인식의 대상에 대한 경험, 즉 객관적 공부를 강조한 이론이다. 그러나 왕수인은 격(格)을 바로잡을 정(正)과 같다고 보았으며, 치지(致知)를 ‘치량지(致良知)’로 보았다. 여기서 양지는 맹자에 서 연원한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아는 것을 양지(良知)라 했고,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을 양능(良 能)”이라고 했다. 양명의 설은 “내 속에 들어있는 선천적인 인식능력인 양지를 잘 드러내기만 하면〔致知〕, 모 든 사물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格物〕.”는 얘기다. 경험을 통한 객관적인 공부보다 인식주체의 주관을 강조 한 것이다. 내 마음이 곧 이치이기 때문에, 내 마음을 바르게 하면 객관사물을 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 다. 철학은 어차피 세상을 보는 관점을 체계적으로 풀어 놓은 얘기다.
동서양의 모든 철학을 크게 보면 유물론과 유심론 혹은 관념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물의 가장 근원으 로 파고들어가도 오직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 유물론이다. 그러나 그 물질 배후에 물질이 아닌 ‘그 무엇’이 있어 그 물질을 있게 하고, 그 물질의 생성과 소멸을 관장한다는 것이 유심론 내지는 관념론이다. ‘그 무엇’을 신으로 보면 그것은 ‘유신론(有神論)’의 철학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태극(太極)’이나 ‘도(道)’와 같은 궁극적인 원리로 보면 그것은 유심론 또는 관념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주자학이나 양명학은 모두 유심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 어느 쪽에 중점이 놓여있느냐에 따라 그것을 객관유심론과 주관유심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주자학이 이론에 치중하여 공리공론에 이르는 폐단을 가져오게 되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양명학의 “마음이 곧 이치다.”라는 심즉리설이 나오고,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실천은 앎의 완성이다(知行之始 行知之完).”라는 지행합일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심즉리에서 출발한 양명학설은 결국 나와 너 우리가 하나이고 만물이 하나라는 만물일체설까지 발전하게 된다. 양명의 제자들은 이론의 차이와 지역에 따라 갈라졌다. 양지는 누구에게나 항상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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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3권 제6호, 2020는 양지현성파와 양지를 사물과 만나기 전의 고요한 상태와 만난 후의 상태를 나누어 고요한 본모습을 강조한 귀적파, 그리고 양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도덕법칙인 하늘의 이치를 깨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수증파가 그 것이다. 그 중 왕기에서 왕간으로 다시 하심은과 이지로 이어지는 양지현성파가 주류로 내려왔다. 이들의 사상 은 일반 서민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개인의 주체적 능동성이 강조되었다. 물질과 인간의 욕구도 긍정적으 로 보아 다분히 실천적이고 정감적이었다. 중국철학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양명학은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는 퇴계 이황이 《전습록》 비판을 쓴 후로 양명학은 주자학에 밀려나 있다가, 조선 후기에 하곡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와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 자들이 이를 수용하여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