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첨단기술 MAY 20 1 9 39
과학과 시민사회 잇기: ESC 활동 사례를 중심으로
김 찬 현
저자약력 김찬현 사무국장은 경기과학고를 졸업하고 일본의 오사카대학 이학부와 동경대 학 대학원 이학계연구과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 에서 진행된 반수소(反水素) 원자 합성 연구에 참여해 석사학위를 받은 후, 반도 체(半導體) 기업에서 소자 연구원으로 근무해 개발에서 양산으로 이어지는 산업 현장을 경험했다. 현재는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의 사무국장 을 맡고 있으며, 과학기술정책 및 과학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두고 활동 중이다.요 약
현대사회는 크게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세 축으로 이루어 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은 국가 주도로 시작되어 시장으로 확산되었으나, 시민사회와의 융화는 아직 미비한 상태다. 한국은 소수 엘리트의 주도로 급속하게 근대화 를 이루는 과정에서 과학기술과 시민사회의 건강한 관계를 구 축하는 일은 도외시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근대 민주국가 의 기본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과학기술자와 시 민이 함께 고민하며 성숙한 과학기술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기술인 단체 ESC(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 사단법인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 인 네트워크)의 다양한 시도를 소개해보고자 한다.과학기술사회의 복잡성
한국사회에서는 ‘과학’과 ‘기술’을 합쳐 ‘과학기술’을 한 단어 처럼 부르는 경우가 많다.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과학기술자’이며, 이들로 이루어진 업계를 ‘과학기술계’라고 한 다. 이러한 용법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문제 는 분야 내 분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전 문가와 일부 교양인을 제외하면, 정부와 언론은 물론 일반 시 민까지 과학기술 혹은 과학기술계를 마치 하나의 통합된 실체 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현실의 과학기술계는 어떤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하기도 힘들 뿐더러, 학문과 산업의 영역이 점점 더 전문화되어 감에 따라 학술 공동체의 파편화도 심화되고 있다. 일각에서 융합의 필요 성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조금만 분야가 멀어지면 같 은 건물에 있는 다른 연구실의 성격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실상이다. 물리학에서 예를 들자면, 대학의 응집물리실험 연구실과 입자물리이론 연구실의 관계를 떠올려 보면 된다. 물 론 연구 대상이나 방법론도 다르지만, 연구 기금 조성이나 노동 환경 등 행정과 문화에 결부되는 부분도 다르다. 물리학계를 넘 어 과학기술계 전체를 살펴보면 대학, 출연연, 기업 연구소 등 기관에 따른 성격이 더해져 그 차이가 훨씬 심화된다. 정책은 그 본질적인 특성상 통합적이고 일괄적인 성격을 지향 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 현실의 복잡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 성공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러한 괴리를 줄이 기 위해서는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려는 노력이 필 요하다. 최대한 귀납적인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 나 앞서 언급한 파편화의 문제 때문에 서로 다른 분야의 과학기 술자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숙의할 만한 기회는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특히 과학기술계 특유의 권위적인 분위기는 대학원 생과 박사후연구원 같은 청년 과학기술자와 여성 과학기술자 등 과학기술계 내 소수자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환경이기도 했다.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모으다
ESC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 시도로 2017년 초 ‘대통령 후보에게 무엇을 묻고 요구할 것인가’라는 이름의 과 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을 개최했다. 타운미팅은 포스트잇이라 는 간단한 도구를 통해 여러 참가자가 수평적으로 토론에 임할 수 있는 숙의 시스템이다. 먼저 테이블마다 주제를 정해 8명 정 도씩 앉는다. A4 용지에 포스트잇을 가득 붙이고, 돌려가며 포 스트잇 한 장당 한 사람씩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는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떼어서 더 큰 전지에 붙이는데, 이 때 가까운 키워드들끼리 모이도록 그룹화한다. 이후 각 참여자 가 동일한 시간 동안 발언을 한 후 자유토론을 진행한다. 이때 기록한 내용을 정리해 참석자 전체에게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 타운미팅에서는 청년과학기술자 정책, 과학기술 기업 정 책, 신진과학기술자 정책, 과학기술 지원체계, 정부투자 연구소 정책, 과학대중화 정책, 과학기술 소수자(여성·외국인) 정책을 다뤘다. 언급한 총 7 분야에서 80여 개의 질문을 모았으며, 온라인 설문을 통해 가장 관심도가 높은 질문 10개를 추려 공 개했다. 경계인으로서의 대학원생 문제, 연구비 배분 문제, 과 학기술정책의 지속 가능성, 소수자 지원 대책, 시니어 연구자 육성 방안, 경제에만 종속된 가치관의 대체 등 과학기술정책의 핵심과 맞닿은 질문들이었다. 당시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의 캠프에서 이 10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내왔다. 이같은 활동은 ESC 열린정책위원회의 출발점이 되었다. 열 린정책위원회는 과학기술계 리더십과 관련한 설문을 진행하기물리학과 첨단기술 MAY 20 1 9 40 도 하였으며, 현재는 과학기술정책에 대해 공부·연구하는 세미 나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진행 중이다. 과학기술정책 의 역사 실행 체계, 헌법을 포함해 현행 법 체계의 과학을 다 루는 방식, 각종 기관이나 정부위원회의 민간위원 활동을 통해 얻은 경험의 공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주로 다양한 전문 성과 경험을 지닌 회원들의 발표로 진행되지만, 다루고자 하는 분야의 전문가나 정부 관계자를 초빙하기도 한다.
헌법 개정을 말하다
특별히 2017년 중순부터 2018년 초순까지는 개헌 논의가 비 등함에 따라 현장 과학기술 연구자와 법학 전공자를 중심으로 헌 법개정 TF팀(Task Force Team)을 꾸리고, 헌법 제9장 경제장에 있는 과학기술 관련 조항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 조항이란 헌법 제127조 제2항으로 다음과 같다.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 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 다.’ 1960년대 저개발 산업화 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후 수십 년 동안 근본 철학에 대한 재검토를 거치지 못해 표현만 조금씩 바뀐 조항이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기술이란 무엇인가, 그 둘이 다르 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맞닿아 있 음에도, 최근까지 과학기술계와 법학계 양측으로부터 거의 관심 을 받지 못했다. 시민사회로부터는 더더욱 소외된 주제였다. 헌법개정 TF팀은 몇 달간의 토론과 설문을 통해 의견을 수 렴한 ESC의 공식 개헌 제안을 발표하였다. 과학기술은 기초과 학부터 응용기술까지 다양한 범위를 포괄하며, 그 자체로 문화 와 사유방식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므로, 오로지 경제적 실익에 만 관련되는 조항은 차라리 삭제되는 편이 낫다는 회원들의 중 론이 모였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 내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소외되는 분야에 대해서는 특별히 보호 차원에서 장려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이 제안 은 헌법학자들을 초청한 포럼에서 공개되었으며 국회청원으로 까지 이어졌다. 여러 정치적 사정으로 개헌 논의는 뒤로 미뤄 졌지만, 이 국회청원은 국회에서 과학기술 관련 헌법 조항을 다뤘다는 헌정 사상 최초의 공식 논의 기록을 남겼다.광장에서 만난 과학자와 시민
미국에서는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기후변화나 백신 예방접종 을 부정되거나 환경과 과학 연구 예산이 삭감되는 등 증거에 기 반한 합리적 사고라는 과학의 보편적 가치가 퇴색될 위기에 처 했다. 이에 우려를 느낀 과학기술인들이 사회연결망(SNS)을 통 해 밝힌 제안이 확장되고 구체화된 운동이 2017년 4월 22일 지 구의 날에 열린 ‘March for Science’다. 공교롭게도 지구의 날은 과학의 날 다음 날이었다. 과학의 가치를 지키려는 전 세계 수많은 과학기술인들과 시민들이 미국의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한국의 서울과 부산을 포함한 세계 600여 도시에서 함께했다. ESC와 과실연(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은 이에 연대하는 의미에서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문화예술관 뜨락에서 ‘함 께하는 과학행진’을 공동주최했다. 미국의 경우 정부의 각종 반과학 정책을 직접적인 계기로 과학의 보편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으 려는 의의가 있었던 한편, 한국에서는 행진을 통해서 전 세계 과학 기술자들과 연대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 제대로 고민 해보지 못했던 과학의 가치 제고를 호소하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이 행사에서는 광장행진과 자유발언(버스킹)을 통해 연구자를 비롯해 학생, 교사, 여성, 장애인 등 다양한 과학기술인이 목소리 를 냈다. 연구자들은 특별히 연구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많은 비 중을 차지하는 기획 연구를 줄이고 연구자 주도 연구를 늘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여론과 정책에서 비과학적인 주장이 영향을 미 치는 세태도 비판했다. 여성과 장애인은 소수자로서 과학 분야의 다양성이 늘어나는 기회가 확대되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했다. 소 수자 혹은 약자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과학자 들이 기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같은 해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여름,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실 에서는 ‘광화문 1번가’란 이름의 열린 포럼을 열세 번에 걸쳐 주 최했다. ESC는 그 중 과학기술 분야의 회차를 주관하여, ‘과학과 기술이 즐거운 나라’라는 제목으로 앞서 다룬 과학기술지원정책 타운미팅의 연장선에 있는 주제를 다뤘다. 이날 각 세션의 발표 자들은 정부에 대해 건강한 기초과학 생태계 조성, 더 많은 이해 당사자가 참여하는 열린 과학정책, 학생중심의 미래 교육, 대학 원생 및 소수자의 인권과 다양성을 위한 제도 마련을 촉구했다. 시민들도 과학과 기술이 즐거운 나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제 언을 아끼지 않았다. 국가과학기술심의회(현재 국가과학기술자 문회의에 통합됨) 등 과학기술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회 의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 달라는 요청, 장기적인 관점에서 창 의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실패를 용인할 수 있는 정책을 전개해 달라는 호소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과학기술정책은 표면상 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과학기술계뿐만 아니라 시민 일반의 삶까지 깊숙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화와 교육 활동
광장이 과학기술인과 시민이 만나 정치적으로 소통하는 공간을 상징한다면, 문화적으로는 훨씬 더 다양한 공간을 상상할 수 있다. ESC 과학문화위원회에서는 시민들과 과학기술의 합리적인 사유 방식을 공유하기 위해 다각적인 문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역시 대중강연이다. 여러물리학과 첨단기술 MAY 20 1 9 41 과학 저술가 회원이 활동에 참여하는 점을 십분 활용해 박물관이 나 대학에서 성인 대상의 북콘서트를 진행하는 한편, 지방자치단 체 및 연구기관과 협력해 주로 중고생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진행 하는 사이언스 스테이션이라는 기획도 있다. 과학 대중강연은 수 용자에 대한 연구나 이슈화의 관점에서 개선의 여지가 많아, 새로 운 공간과 방식으로 참신한 기획의 시도를 모색 중이다. ‘어른이실험실탐험’이라는 기획은 다양한 과학 연구실을 방문하 는 프로그램으로, 일반 시민이 과학 연구의 일부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행동유전학 연구실, 응집물리학 연구 실, 응용광물리학 연구실 그리고 천문대와 지질 답사에 이르기까 지 풍부한 내용으로 현재까지 10여 회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기 획의 특성상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 어려운 한편 인기가 좋아 대부 분 선착순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쌓아온 경 험을 바탕으로 기획 매뉴얼을 만들어 여러 곳에서 참조할 수 있도 록 공개할 예정이다. 이외의 체험 기획으로는 과학을 테마로 한 전시를 관람하는 미술관 데이트, 과학 관련 영화를 관람하고 전문 가와의 대담을 진행하는 시네마떼끄가 있으며, 건축공학의 관점 에서 도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등 위원 들이 제안한 다양한 시도를 실험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위와 같은 과학문화 활동이 비제도권 영역에서의 대안적 시도라 면, 제도권 영역에서는 과학교육에 대한 담론이 중요하다. ESC 과학교육위원회에서는 과학자, 공학자, 과학교사, 교육학자, 비형 식 교육기관 종사자뿐만 아니라 과학학자까지 함께 모여 과학교육 이 지향해야 할 바를 고민하고 있다. 일반 시민으로서 교육 받아야 할 과학이 과연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부터, 과학과 과학사를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융합적인 연구 까지 다각적인 관점에서 미래의 과학교육을 모색한다. 실천적 관 점에서는 국내외의 소외된 지역을 방문하는 교육 봉사 프로그램과 과학 커뮤니케이터 양성 프로그램 개발 연구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