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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가 시작된 이래 ‘사회복지’는 항상 ‘문제’이자 ‘해결책’이었다.

사회복지와 복지국가는 유럽의 발명품이다. 공동체의 붕괴와 대중의 궁 핍화에 대처하기 위해 서구 유럽에서 빈민법, 공제조합, 우애조합과 같은 맹아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 이래, 사회복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불안정성을 완충하여 줌으로써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조절 기제 로 칭송받는 동시에, 경제성장에 반하는 낭비적인 지출이자 근로의욕을 떨어뜨림으로써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을 교란하 는 주범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선진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사회복지 없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경제 의 몸집이 급속하게 커진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복지’에 관한 문제는 좀 더 복잡하고 심각하다. 급격하 고 권위주의적인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한국은 거의 사회복지 없이 살아 남았다. 국가의 역할을 ‘시민에 대한 봉사자’(civil servant)라 규정하고 시장의 불안정성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데 역점을 두어온 유럽 복지 국가들—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이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과 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가는 직접적이고도 권위적인 방식으로 경 제 개발을 주도하고 대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만연한 절대 빈곤의 상황에서 ‘성장중심주의’ 이념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졌으며, 실제로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통해 ‘복지사회’가 구현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개발주의 접근이 고도성장기 동안 정책결정자들과 다 수 국민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1980년대 스태그플레이

서 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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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과 복지국가 위기를 겪고 있던 서구 복지국가들에게 한국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가장 위협적이면서 경이로운 국가 중 하나로 주목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동안 한국에서 ‘국가’와 ‘시장’은 날로 커졌지만 ‘사 회’와 ‘가족’은 왜소화되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항쟁과 1997년 외환위기는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사건은 민주주의와 사회복지를 급진전시 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화로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사회의 복원과 사회복지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경제위기로 그동안 누 적되어 왔던 국가주도적 개발경제의 모순들이 일거에 시장과 사회에 휘 몰아쳤다. 이후 진보적 성격의 정부가 연달아 집권하면서 사회복지의 양 적, 질적 성장이 진행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서구가 길게는 150여 년간, 짧게 쳐도 80여 년간 시장경제의 모순과 싸우며 그 나라의 독특한 경제, 사회, 문화, 인구학적 특성을 고려하며 짓고 고쳐온 ‘복지국 가라는 건축물’을 불과 30여 년 만에 쌓아 올리려는 시도에는 상당한 무 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나라가 가진 경제, 사회, 문화, 인구학적 특 성,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전산업, 산업, 탈산업 사회 모순들의 공존 등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복지국가 저변을 떠 받치는 버팀목으로서의 사회복지의 필요성에 대한 정책결정자의 철학적 인식과 대중의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복지국가라는 큰 건축물 내에서 각 제도들이 어떠한 크기와 위치와 구성으로 배치되고 접목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전체 설계도면 없이, 나타나는 문제에 즉자적이고 반응적으로 제도가 설계되고 시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부분은 비대칭적으로 커 지고, 어떤 부분은 작아졌으며, 어떤 부분은 비어 있고, 어떤 부분은 누수 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 물론 애초에 복지국가에 대한 완벽한 상(像) 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서구 복지국가들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여 개

혁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 탄탄하게 지어진 집을 보수하는 것과

자료: 여유진, 김미곤, 강혜규 등(2014); 여유진, 김미곤, 구인회 등(2015); 여유진, 김영순, 강병구

복지국가는 단순히 이러저러한 제도의 조합을 넘어서는 시장-국가-가족 (사회)의 구조화 방식이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권력균형에 대한 타협 의 결과로 구축된 ‘사회적 건축물’(여유진, 2014a, p.431)임을 상기시키 고자 했다. 또한 한국의 국가는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기존 의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의 목표와 궤도’를 수정할 의지가 약해 보인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2차 연도(2015년)에는 생애주기별 소득, 재산, 소비의 분포를 미시적, 계량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개인과 가구의 복지의 상태를 진단하고자 했 다. 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인과 가족이 부 닥칠 수 있는 사회적 위험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비복지의 상태로부터 보 호하고 안정(security)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분석의 결과를 통해, 한국 복지국가는 여전히 이러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과 가족을 보호하는 데 취약하며, 그 결과 빈곤과 불평등, 불안정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3차 연도(2016년)에는 복지국가의 유형별 비교 분석을 통하여 한국 복 지국가의 현 좌표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동안의 복지국가들에 대한 축 적된 데이터로 퍼지셋 이상형 분석(fuzzy-set ideal type analysis)과 군 분석(cluster analysis) 등의 방법을 활용하여 노동시장정책, 가족지원정 책, 노인생활보장정책, 조세체계, 복지지출, 재분배 효과와 사회의 질 등 을 유형화하고 이를 도식화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부실한 실업안정망형, 남성생계부양형, 의료중심의 노후생활보장형, 중립형 조세구조, 현물․가 족중심의 사회지출구조, 높은 불평등과 낮은 삶의 질에 가까운 유형으로 분류됨으로써 한국 복지국가의 불안정한 현 좌표를 확인하였다.

4차 연도(2017년)에는 한국 국가의 특수성 측면과 4차 산업혁명이라 는 보편적 흐름을 개괄함으로써 복지국가를 둘러싼 환경 변화를 분석하

고, 근로계층을 위한 복지제도, 아동․가족을 위한 복지제도, 노후소득보장 제도 등의 기존 복지제도의 재구조화 방안과, 자산기반복지,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기본소득 등 논의되고 있는 대안적 복지제도의 가능성과 한계 를 짚어봄으로써 향후 복지국가의 방향성을 짚어 보고자 하였다. 또한 이 들 대안들 각각에 대한 재구조화와 함께 좀 더 큰 목표하에서 이들의 정 합성과 연계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림 1-1〕 서구 복지국가에서의 연대, 시민권, 보편주의의 이념형적 분석틀 산업화

공동체의 붕괴 대중의 빈곤화 사회적 위험의 발생

새로운 (유기적) 연대의 형성 (직접적․간접적 권력자원 동원)

좌우 컨센서스의 형성

(공민권, 정치권에 바탕을 둔 사회권의 보편화)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형성

리스크의 공유․분산을 통한 연대의 실질화 (계층 내․계층 간․세대 간 재분배)

생산성 강화 탈상품화를 통한 재상품화

세대 간 재생산 보장

최저보장 생애주기 간 삶의 안정성

평등의 실질적 강화

유기적 연대감 사회적 응집성 강화

본 연구는 5차 연도(2018)이자 본 기획을 마무리 짓는 연구이다. 본 보 고서에서는 기존의 연구 결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적 흐름과 변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향후 한국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통찰과 시사점을 얻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 다. 특히, 본 보고서에서는 복지국가의 가치철학적 기반으로서 연대, 시 민권, 보편주의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각각이 가지는 의미는 본문에 담았 지만, 이들 세 가지 가치는 우리가 선진 복지국가라고 부르는 서구 유럽, 특히 북구 유럽 복지국가의 형성과 발달 기저에 면면히 흐르는 가치이자, 복지국가의 위기와 재편 과정에서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은 ‘서구 복지국 가의 철학적 기반’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본문에서는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공동체의 붕괴, 대중의 빈곤화로 사회적 위험이 편재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서술을 통해 사회적 연대가 탄 생하는 과정과, 이러한 연대의 실질화를 통해 사회권적 시민권과 보편주 의 복지국가가 공고화되는 선순환 과정을 보여 주고자 한다(제2장, 제4 장). 또한 이러한 내재적 분석틀을 활용하여 한국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연대의 억제와 시민권의 왜소화가 보편주의의 취약성으로 이어지는 경로 의존적 과정을 묘사하고자 한다(제3장, 제5장). 이어서, 연대의 실질화 결 과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노인 빈곤과 노후소득보장의 현 상태를 서구 와 비교하여 분석함으로써 한국 복지국가가 가진 문제점을 진단할 것이 다(제6장). 마지막으로, 한국 복지국가의 특수성과 복지국가를 둘러싼 다 양한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한국 복지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 에 대한 규범적, 실천적 제언으로 본 보고서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제7 장).

마지막으로, 이념형적 분석틀을 설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논의하 는 과정에서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과대 단순화와 이상화의 위험을 배제

할 수 없었음을 밝힌다. 반대로 이념형적 분석틀에 반하는 측면을 부각하 고자 함에 따라 한국 복지국가에 대해 비판적인 측면이 강조되기도 했다.

비판적 시각의 한계는 이에 대한 반비판적 시각에 의해 보완되기를 바란

비판적 시각의 한계는 이에 대한 반비판적 시각에 의해 보완되기를 바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