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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위험, 비복지와 복지국가

제2절 사회적 위험과 시민권의 형성

1. 사회적 위험, 비복지와 복지국가

근대화의 과정은 ‘사회적인 것’이 모호해지고 형해화(形骸化)됨으로써 상당 부분은 시장(‘경제적인 것’)으로, 또 다른 상당 부분은 국가(‘정치적 인 것’)로 흡수되거나 포섭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 우프만(Kaufmann, 2013, p.2)은 사회정책이 ‘국가’와 ‘사회’ 간의 부정 합(disjunction)으로부터 발생한 사회통합(social cohesion)의 문제에 대한 반응으로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사회정책의 역사는 국가와 사회 간 의 변화하는 관계의 역사이며 사회통합의 잇단 문제의 역사라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 간의 관계 변화를 추적하기 이전에 시장과 사회 간의 관계 변화를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통찰은 일찍이 칼 폴라 니(Karl Polanyi, 1886~1964)의 역서 『거대한 변환』에 잘 기술되어 있 다. 폴라니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시장경제체계가 인 간의 사회적 관계 전반을 지배하는 상황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놓고 볼 때 200년 내외의 짧은 역사를 가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전산업사회에서 경제는 사회적 관계 속에 배태되어(embedded) 있었다 는 것이다. 즉, 시장경제법칙을 자연상태의 인간이 갖는 본성—이기적 인 간—에서 도출하려 했던 고전경제학파의 주장과는 달리, 역사적, 인류학 적 탐구 결과에 의하면 인간은 물질적 재화를 소유한다는 개인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회적 입장, 사회적 요구, 사회적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기 술발전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하에서의 ‘악마의 맷돌’은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전통적 문화를 파괴하고 경제적 관계로 전화시켰다는 것

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폴라니, 1991, 제3장 참조).

이는 동시에 봉건제 사회에서 국민국가로의 전환, 즉 국가의 영토적 개 념과 더불어 행정적 기능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카우프만이 말하는 국가 와 사회 간의 관계 재정립 과정—과 일치한다. 즉, 시장경제가 사회적 관 계를 파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복지’(diswelfare)의 문제, 더 나아 가 극도의 곤궁과 혼란, 그리고 재생산의 문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 의 역할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사회복지의 맹아를 이러한 파괴적 과 정에서 출현한 빈민법(The Poor Laws)의 제정과 정교화 과정에서 찾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산업사회, 즉 서구의 봉건제사회에서는 장원과 교 회가 개인의 복지에서 주축을 담당하였으나, 인클로저 운동으로 대변되 는 중세 봉건제 경제의 붕괴로 인해 공동체사회가 급격히 해체되면서 이 를 대체할 기제가 요구되었다. 또한 기존의 봉건경제에서 개인은 신분적 속박과 더불어 장원 영지에서 평생 경작권을 보유한 반면, 산업화로 인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신분의 속박을 벗어남과 동시에 봉건 영지로 부터도 ‘해방’됨으로써 자신의 노동을 판매함으로만이 생존이 가능한 이 른바 ‘노동계급’으로의 변모를 요구받게 된다. 이 경우—그것이 개인적 원 인이든 사회구조적 원인이든 간에—더 이상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수 없 는 상황의 도래는 곧바로 개인과 가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 질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규모 빈민의 발생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재생산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는 생존의 문제를 야기하 게 된 것이다. 즉, 공동체의 사회적․문화적 토대와 규율이 붕괴된 채 개인 이 독립적인—그리고 이기적이고 합리적이기를 강요받는—인간으로 존재 해야 했던 초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개인과 가족의 비복지를 야기하 는 다양한 ‘사회적 위험’(social risk)—대표적으로 노령, 실업, 질병, 사 고 등—에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여유진,

2004a 참조). 결국 전산업사회에서의 ‘사회적인 것들’ 즉 장원과 교회로 대표되는 공동체 내에서의 원조(help)체계, 비법률적 규율, 신망 (reputation)으로 평가되는 자기 규제 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성립과 함께 붕괴되면서 ‘사회적인 것들’을 대체할 새로운 기제가 필요했고 이것 이 국민국가라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 개념과 경계가 모호했던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적 국 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빈민법(Poor Laws)과 같은 복지국가의 맹아 적 형태가 발현하고 성숙되어 가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빈민법은 중세 봉건제가 붕괴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맹아적 형태가 싹트던 시절의 혼란상에서 사회적 붕괴를 막고, 노동의 재생산의 보장하며,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산업혁명이 발현되고 현대적 복지국가의 성립을 공식화했 던 베버리지보고서가 탄생한 영국에서 복지국가 형성의 역사는 빈민법의 쇄신과 극복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파국적 상황과 구조적 실업의 급증이 개인과 가족의 복지에 국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현실적 근거(증거)를 제공 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국민국가형성(nation-state building) 과정에서 국가가 사회주 의에 대응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위험을 관리하고자 했던 독일의 가부장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복지국가 형성 과정은 영국과 또 다른 역사 적 경로를 보여 준다. 세계 최초로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한 비스마르크의 의도는 노동자를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분리하고 국가에 충성스러운 신민 으로 길들이고자 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사회주 의자탄압법이라는 ‘채찍’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보험이라는 ‘당 근’을 통해 노동자를 사회주의로부터 분리하고 통일 독일제국의 충성스

러운 시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 새로운 위험과 재정적 압박으로 복지국가의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는 오 늘날에조차 사회보험은 사회적 위험으로 인한 개인의 비복지에 대처하는 가장 든든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맥락에서, 반 커스버겐과 비스 (Van Kersbergen & Vis, 2017)는 복지국가의 근거는 많은 논자들이 주장하는 사회경제적 평등이나 부자로부터 빈자로의 재분배라기보다는

‘사회적 위험의 분산과 재할당’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p.116). 물론

‘어떤 복지국가인가’에 따라 이는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한 사회적 위험의 발생 확률은 사회경제적 지위, 생애주기상의 위치 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평등과 사회적 위험의 분산을 분리해서 논의하기 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 추구에 소극적인 자유주의 복지국가 를 포함한 복지국가라 칭해질 수 있는 모든 선진 산업자본주의 국가에서 복지국가의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능은 현대 산업사회의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과 가족을 보호하는 것, 즉 사회적 위험1)의 분산과 재 할당을 통한 ‘안정(security)의 보장’임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