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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과 민족경제

문서에서 유교와 근대 국민 경제학의 상상 (페이지 153-159)

민족경제적 상상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 찾아온 불경기와 관련이 있었다. 1920년부터 부동산경매 건수와 파산선고 건수는 전년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에 돌입했다. 세계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인플레이션 의 여파로 인해 일본에서 금융공황이 발생했다.39 금융경색에 따른 일본의 은행 및 상점 파산이 식민지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40

1920년 5월부터 동아일보 에서는 조선인 파산 상황을 다루는 기사가 게재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재계 불황의 영향이 일본과 같이 심대하지는 아니하나 금일 에 이르러서 소자본가의 파산자가 빈번히 출현하고 府內(서울)뿐 아니라 지방 또한 그러하며 대자본 측은 아직 이와 같음에 미치지 아니하나 전도는 자못 경계를 요한 다.”라고 하여 서울상인의 파산 상황을 전하고 있다.41 서울 남대문 시장 포목상점의 파산은 6월부터 운송업의 파산과 실업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곡물상 잡화상을 막론하고 남에게 돈냥 준 것은 받을 길이 아득하고 각 은행에 지불한 手形 기한은 점점 닥치어 오는 중 상점에 쌓인 물건은 도무지 팔릴 길이 없으니(중략) 이대로 계속되다가는 일반상계의 앞길은 오직 「파산과 멸망」의 두길 밖에 없을까 싶다.”42 라고 하여 조선인 유통업이 파산의 위험에 놓여 있음을 전했다. 서울 남대문에서

39 小林英夫, 植民地への企業進出-朝鮮會社令分析 ,柏書房, 1994; 동아일보 1921년 3월 28 일, 「加州日銀危險期切迫」, 6월 8일 「米經濟極恐慌, 「프락스츠리트」誌 調査에 의하면四月中破 産率 七十四퍼센트나 된다고」

40 동아일보 1920년 5월 31일 「東京市內破産會社 七十個所」, 8월 4일 「大阪市綼絲布商 前川 商店破産

41 동아일보 1920년 5월 14일 「小資本破産者頻出」, 20일 「財界恐慌布木業者慘狀」,

布木價 3,4 暴落

42 동아일보 1920년 6월 7일 「錢慌餘波 悲風慘雨() 破産! 失職!」

시작된 상점 파산은 유통업 전반으로 그리고 평양 인천 목포 부산 등으로 확산되어 갔다.43 이시기 동아일보 가 조선인 상점 파산에 대해 민감하게 주목했던 것은 그들이 주도하는 물산장려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즉 조선인 유통 업의 파산은 조선인경제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기 때문이었다.44 실력양성론의 입장에서 문화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은 불경기로 인한 조선인 상점의 파산에 대해 다소 시각의 차이가 있었지만, 파산 현상을 빈곤한 조선인 전체의 생활상과 연관 짓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경제’와 ‘조선인 경제’를 구별 짓고, 재조일본인과 조선인을 비교하는 수사를 통해 조선상점의 파산을 전체 조선인경제의 파탄상과 연결 지어 설명했다.

유산자의 파산현상을 조선민족 전체의 파산으로 연결 지은 인물은 이광수였다.

그는 “파산이라 함은 빈궁과 다릅니다. 빈궁이라 하면 부족하지마는 아직도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지만, 파산이라 하면 빈궁을 지나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達하는 것을 이름이오다.”라고 하여45 결여된 상태인 빈궁과 달리 ‘파산’을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스스로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는 “수출입액 통계를 제시하면서 매년 1억 수천만원식 조선민족은 그 생활에서 밑져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조선민족의 “경제적 파산”을 선언했다. 그리고 “知識으 로나 富力으로나 全民族의 中樞階級을 作한다 할 公務及 自由業者(官公吏, 敎員, 醫師, 辯護士가튼)와商業者”의 수적 질적 열세를 지적하면서 조선인이 스스로 자본

43 동아일보 1922년 9월 27일 「續出하는 破産 商人」, 1922년 10월 24일 「破産者 簇出 44윤해동의 연구(「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 한국사연구 27, 서울대한국사학과,

1992, 302~306쪽)에 따르면 1910년대 경기호황 이후 성장한 조선인자본가가 일본자본의 조선진 출에 대응하기 위해 1921년 동아일보의 지원으로 ‘조선인산업대회발기준비회’를 개최했고, 이것이 물산장려운동을 시발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1910년의 경기 호황은 1920년에 점차 하강국 면으로 돌입했는데, <그림1>의 부동산경매건수와 파산선고선구가 1920년부터 전년에 비해 급격 히 증가했다. 이점은 당시 물산장려운동이 호경기에 따른 하강국면에 대한 조선인자본가의 위기의 식이 배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5 魯啞子(이광수), 「少年에게()」, 개벽 제19호, 1922년 1월 10일.

주의적 물질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상태임을 역설했다.46 이광수의 파산은 민법상 규정된, 행위 주체의 소멸이란 내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살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조선민족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함의가 포함된 것이었 다. 이광수의 ‘파산’담론은 그의 ‘민족개조론’의 배면을 구성하는 위기의 수사였다.

동아일보 는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인 경성의 조선인 시민」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조선경제와 조선인의 경제를 분리하고 총독부의 통계를 근거로 하여 서울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제력을 비교했다. 토지가옥 등 부동산 소유상황, 법인세 납부 상황, 조선인 유민 증가상황을 보도하면서 “조선 사람의 서울은 텅텅 비고야 말 것이다”라고 했다.47 또한 1924에는 경성과 동일한 현상이 부산, 원산, 평양, 대구뿐 만이 아니라 농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면서 조선인이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이야기했다.48 조선일보 는 차압집행, 파산 등이 증가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급격한 파멸을 당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고,49 서울을 비롯한 평양 상점의 파산 참경을 전했다.50 “三分一도 못 남은 市街地(중략)이 數字 이야 말로 우리 민족적 경제의 破産宣言이 안이냐”라는51 언술은 1920년 초기 조선 민족의 경제 상태를 상징하는 수사였다.

1920년대 민족주의정치기획자들은 일본-조선 경제발전의 연쇄를 끊어내고 민족 차별의 내러티브를 전면에 드러내고, 민족공동체 내부를 국민경제적 상상으로 구상

46 魯啞子(이광수), 「少年에게」, 개벽 제17호, 1921년 11월.

47 동아일보 1923년 11월 6일 「경제적으로 파산상태인 경성의 조선인시민」, 「토지가옥의 산분이 도 일본인에게 들어가고 상공업의 생산액도 산분지일밖에 아니되고」, 「遊衣遊食食口만 19만」

48 동아일보 1924년 3월 1일 「경제적파산(상), 3월 5일「경제적파산(하)」: 6월 12일 「줄어드는 조선인토지」: 8월 5일 「농사시설의 모순 농잠구상파산속출」

49 조선일보 1924년 5월 18일 사설 「경제적으로 명증하는 참상」

50 조선일보 1924년 10월 25일 「파산! 폐점! 평양 시가의恐慌」: 1925년 1월 16일 「전조선인의 큰 파산이 온 것을 깨달으며」

51 仁川아 너는 엇더한 都市」, 개벽 제48호, 1924년 6월.

했다. 경제발전을 통해 대외적 자기경정권을 증명하고자 하는 지향은 지속되었지 만, 그 지향의 전선은 자본축적의 위기로 인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일본 산업화에 따른 조선인 자본가 그룹 내부의 분화, 노동자와 소작농의 생활상태 악화는 민족 내부에 심각한 균열을 발생시켰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심각한 생존위기에서 벗어나 기 위해서, 분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혁명의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서, 조선의 생산증진과 조선인의 생활상태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회주의세력 일부의 진단은 무역수지와 산업구조에 대한 국민경제에 대한 경제학적 지식과 이를 뒷받침 하는 통계지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인구, 무역, 산업, 재정 등에 대한 국민경제적 지식과 통계생산방식으로 인해

‘민족경제’ 내부는 생산증대-소득증대-소비확대-경제발전이 선순환적 관계라는 국 민경제적 상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산한 민족경제의 조선인은

“일본인은 자본가, 조선인은 노동자”라는 김동성의 언급과52 “조선인의 경제력은 조선의 부력과 반비례”한다는53 동아일보 의 언급에서 드러나듯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받는 계급으로 은유되었다. 마르크스가 국민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노동자의 빈곤은 그 생산의 힘과 크기에 반비례 한다.”는 언급이 민족경제에 대한 상상에서 유사하게 재현된 것은 민족주의정치기획자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자기화’하려 했다 는 점을 보여준다.54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문제를 포섭하려 했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계급대립을 민족대립으로 치환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문제가 민족 외부의 차별과 억압의 문제로 전환될 수 있었고, 차별과

52 東亞日報 1922년 6월 15일자 「朝鮮人 觀察朝鮮産業大觀(2)」

53 東亞日報 1923년 10월 7일자 「物産 副業共進會

54 동아일보 는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근거는 생산력의 발달에 있는 것이니 물산장려운 동 역시 사회주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민족경제담론 안으로 포섭하려 했다. 여기에 대해 이성태는 민족이란 미명 하에 계급문제를 엄폐하려는 것이라고 비판 했다( 東亞日報 1923년 3월 20일자, 「中産階級利己的運動,社會主義者가 본物産勵運動 (이성태)」).

억압의 혁명성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각성으로 선회될 수 있었다.55 이시기 민족경제담론을 확산시켰던 물산장려운동 세력은 파산한 조선경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조선인의 소득이 증대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조선인의 노동에 주목 했다. 물산장려회 기관지 산업계 는 “조선의 富力은 아직 통계적으로 조사한 적이 없어서 자세히 알기 어려우나 개괄적 숫자로 열거”하면, 조선의 총 부력은 약 130억 내외인데 이는 관동대지진으로 없어진 총 손해액 보다 얼마 많지 않다고 했다.56 조선의 부가 일본에 비해 현저히 적음을 알리려고 했다. 일본농업생산성과 조선농 업생산성을 비교하여 조선인 대부분이 종사하는 농업생산성의 취약성을 부각시키 기도 했다.57 또한 총독부의 공장통계를 활용하여 조인공장의 영세성을 지적하기도 했다.58 경제상태의 취약성이 생산성문제라는 진단은 총독부가 조선에 대한 통계조 사를 통해 확인한 것이기도 했다.

물산장려운동세력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소득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고, 그 방법 역시 ‘부업’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총독부가 추동했던 부업장려는 기존 경제체제 속에서 중산층 이하 계층의 소득증대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고, 이시기 조선 에서는 가계소득 증대를 위한 모범적인 사례와 직종을 발굴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59

55 물산장려운동 세력은 기존연구를 통해 알려진바, 민족주의우파와 좌파, 지주금융자본가와 상공업 자본가, 생산력증진론과 토산품애용론의 실천방향 차이, 영국의 신(new)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영향 등 다양한 계급적 이해와 정치적 실천적 지향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의도와 지향이 만들어낸 경제담론이 조선경제에서 조선인경제를 분리해 냄으로써 경제공동체 내부의 동질성을 구성했다는 점은 공통된 것이다. 민족경제담론은 각기 다른 세력에 의해 과잉결정된 것이다.

56 朝鮮 富力槪算」, 産業界 2, 1924년 1월.

57 朝鮮農産地生産力」, 産業界 1, 1923년 12월; 「朝鮮農業에 관한數字的 考察」, 産業界 3, 1924년 3월.

58 朝鮮 副業的 小工業」, 産業界 2, 1924년 1월.

59 副業道也味里」, 朝鮮 12월호, 1923년, 朝鮮 1월호, 1924년; 「慶尙南道 晉州郡 業獎勵計劃」, 朝鮮 4월호, 1924년; 「改良種豚鷄普及狀況」, 朝鮮 6월호, 1924년. 이외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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