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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과 도덕주의적 유교

문서에서 유교와 근대 국민 경제학의 상상 (페이지 131-134)

어지고 있었다. 특히 청조에서는 양학(서학)의 한문번역이 의욕적으로 행해졌고, 그 발신력이 동아시아에서 완수한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예를 들면 번역은 아니지 만 명조 말기에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수사 알레니(G.Aleni, 1582~1649=애유략 (艾儒略)이 쓴 『직방외기(職方外記)』가 몰래 일본에 반입되어 필사본으로 전파된 일이나, 청조 초기에 웅명우(熊明遇, 1579~1649)의 『격치초(格致草)』 등을 토대로 유예(游芸, 17세기 인물, 생몰년 미상)의 『천경혹문(天或問)』이 쓰여 진 일본에서 도 널리 유통된 일 등이다.20 또한 조선왕조의 이익(李瀷, 1681~1763), 정약용(丁若 鏞, 1762~1836) 등의 「실학」이 조선의 「사상지도(思想地)」를 변화시킨 것도 지적 할 수 있다.21 다만 유교ㆍ주자학이 공정(公定) 이데올로기로 존재했던 이들 왕조에 서 왕권중심부에 있어서의 양학의 영향력은 한정적인 것이지 않았을까?

리) 이었다는 점을 우선 주의해야 한다. 근대 이후에 유교ㆍ주자학은 한학(漢学)이 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권의 성스러운 사상, 보편사상으로 존재 하던 유교가 서양적ㆍ일본적이지 않다는 의미도 포함된 「지나(支那)의 사상」으로 변질되어 가던 양상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덕주의적인 내용 은 유교윤리라 일컬어져 사회유기체론 등과 결합되었다는 것이다.22 청조ㆍ조선왕 조의 유교ㆍ주자학이 근대와 크게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물론 도덕주의적이라고 해도, 한편으로 그것은 「동양의 정신」에 관련된 것으로 경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20세기중반까지는 도덕의 요점으로서 유교윤리라는 인식이 일본에 계속 남아있었다(이 부분은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1840~1931)의 발언으로 마지 막에 가서 다시 언급하겠다). 더욱이 특히 동양적인 것(일본적인 것)을 상상할 때에 유교는 그 열거 대상이 되었다. 일본 입장에서 멋대로 동아시아(동양)와의 「연계」

「연대」를 외칠 때에도, 한자와 나란히 –동아동문회(東同文) 등- 유교가 그 기둥 으로 내세워졌다.23

하지만 근대 일본의 한학(유교)과 도쿠가와 시대 특히 18세기까지의 유교ㆍ주자 학의 내막은 크게 달랐다. 그 차이점으로서 근대가 계승한 것이 주로 도덕주의적이 었음을 앞에서 서술했는데, 거기에서 파생하는 문제로서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중요하다. 즉 형이상학적인 의론, 예를 들어 17세기에 많은 유학자ㆍ주자학자 를 고민하게 만든 리기론 등은 근대 이후엔 거의 검토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나 형이하학적인 부분에는 근대자연과학과 서양적 지식 또는 기독교적 신앙이 접목되는 유형의 지식인이 다수 나타나게 된 것이다.24 그것은 계몽사상가나 초기 기독교계 지식인뿐만 아니라, 국민 도덕론을 창도하고 혹은 교육칙어 제정

22 石田雄, 『明治政治思想史』, , 1954.

23 中村春作, 『에도 유교와 근대의 「지」』, 펠리컨 출판사, 2002년.

24 和靖, 『補版明治思想史』, 펠리컨 출판사, 1985.

등에 관련한 국수주의적인 유교계 지식인, 나아가 (편차는 있지만) 아시아주의계 지식인으로 파악되는 유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1832~1891), 우치무라 간조(村鑑三, 1861~1930),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 1844~1895),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 1856~1944) 등. 이 러한 까닭으로 예외적으로 서양지식의 수용에 소극적이고 중화주의적인 자타인식 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던 유학자ㆍ주자학자는 야쓰이 솟켄(安井息軒, 1799~1876) 과 이케다 소앙(池田草庵, 1813~1878) 등을 염두에 둠) 특히 청일전쟁 후에는 거의 시민권을 잃었고 그 중 몇 명은 이윽고 확립될 「근대 지나학」 학자가 되어가는 것이다.25 이러한 현상은 동아시아 문명권의 변경부, 유교의 후진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교화의 객체로 여겨진 민중에게는 천황제 교화사상과 결합한 유교적 덕목이

「교육칙어」나 수신(修身) 같은 학교교육, 군대 등을 통해 보급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는 「동양의 패자(覇者)」로서 선양되는 국민 내셔널리즘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로 서, 또한 서양화ㆍ근대화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됐다. 무엇보다도, 예를 들어

「교육칙어」에 관해서는 적어도 메이지 시대에는 「체계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간주 되지 않았다. 거기에 기록된 내용은 각각 독립된 「통속 도덕」으로 인식될 뿐이었 다.26 천황제와 유교적 덕목 사이에는 한층 메우기 어려운 괴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도덕주의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유교라는 것이 국민 내셔널 리즘의 일부에 편입된 일은 지식인 사이에서도 심각한 번민을 일으켰다. 어떻게 얼버무린다 해도 공자ㆍ맹자ㆍ주자는 「지나인(支那人)」이고, 그것을 포함한 중화문 명의 영향은 한자도 그러하듯 지울 수 없는 역력한 흔적으로 눈앞에 존재한다.

25 町田三, 『메이지의 한학자들』, 文出版, 1998.

26 籠谷次郎, 『근대일본의 교육과 국가 사상』, , 1994.

지식인에게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딜레마가 되어 반복해서 표명되고, 근대사상사 또는 근대국어학의 주제 중 하나가 된 것이다.27

부언하자면 19세기 후반 이후에 청조ㆍ조선왕조의 유교ㆍ주자학이 밟았던 길은, 근대일본보다도 굴절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통파 유학자에게 있어 (형이하 학적으로 일부 수용했다고 해도) 서양지식은 희귀한 야만인의 신지식에 불과하고, 성스러운 보편사상으로서 유교ㆍ주자학과 그것들을 결합시킬 필요성은 전혀 없었 을 터이다. 청조 말의 유학자 가소민(柯劭忞, 1848~1933)이 서양지식에 무관심했 던 것도, 유교에 대한 조금도 흔들림 없는 확신 때문이었다.28 서양과 일본의 침략도 야만인의 소행이라 보면,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국민 내셔널리즘과의 결합이 청조ㆍ조선왕조에서도 올라오게 되자, 거기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한국통사(韓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国独立 運動之血史)』의 저자로 알려진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유교계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상문(文)」과 「상무(尚武)」 사이에서 흔들리다 「무강(武)」으로 비친 식민지배자 일본에 대항하는 길을 계속 모색했다.29

4. 마무리 - 시부사와 에이이치( 渋沢栄一 ) 『논어강의(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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