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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사회 윤리와 민족의 각성

문서에서 유교와 근대 국민 경제학의 상상 (페이지 159-170)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기된 제국주의와 금융자본의 독점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 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세계개조ㆍ사회개조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있었 다. 천도교 세력은 러셀, 카펜더 그리고 독일의 문화주의 사조 등을 일본으로부터 수용하면서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정신개조-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를 제기했다.70 조선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정신개조를 주장한 이들은 유산자의 경제적 파산 속에서 자본주의적 물신성과 투기성에 물든 조선민족의 정신 상태를 끌어냈다. 즉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물든 조선인의 정신상태가 파산이란 경제현상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유산자의 파산과 조선인의 경제생활의 연관관계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이광수

69 東亞日報 1923년 10월 7일자 「物産 副業共進會

70 정용서, 「일제하 천도교청년당의 운동노선과 정치사상」, 개벽 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얼굴 , 모시는사람들, 2007, 129쪽.

등은 조선인 유산자의 파산과 경제발전의 거시지표에 주목하여 조선인 유산자를 조선민족의 경제 상태를 대표하는 자로 표상하고 있었고, 천도교 세력은 유산자의 행위에 내포된 자본주의적 물신성과 투기성이 조선민족의 경제관념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여 ‘파산담론’의 내용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전자가 공동체 의 강조를 통해 조선인 내부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던데 비해 후자는 내부의 계급 적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파산을 통해 드러난 조선인 자본의 취약성 속에서 조선민족 전체로 확장할 수 있는 모티브를 발견했다. 조선인 경제의 파탄의 상징과 자본주의 물신성과 투기성을 내면화하고 있는 조선인의 경제 관념이 그것이었다. 조선민족의 경제상과 생활 관념이 근대 사회를 스스로 영위할 수 있는 ‘주체’로서 자격미달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경제 현상을 설명했던 ‘파산’

어휘가 조선민족 전체의 생활상을 설명하는 어휘로 등장했던 배경에는 식민지 사회 에서 민족공동체를 상상했던 지식인의 정치기획이 존재했다. ‘파산’은 근대 자본주 의 사회를 살아가는 민족 공동체의 위기를 설명하는 지식인의 담론었다. 그리고

‘파산담론’은 일본인과 함께 살아야 했던 식민지 공간이란 특수성으로 인해 경제구 조 내부의 문제보다는 민족의 상태, 민족의 정신이란 집단성을 자각하게 하는 기폭 제였다.

“세계 타민족에 대조하야 모든 것이 파산적이엇슴을 각오하고 이제로 執할만한 유일의 수단은 오 즉 實力養成에 잇다 함을 깨다랏다.”71라는 언급은 민족을 단위로 한 계몽의 서사를 부활시켰다. 이시기 계몽의 서사에는 전근대와 근대를 극복해야 하는 두 가지의 과제가 병존하고 있었다. 즉 서구문명이 배태한 퇴폐와 전근대적 유산으로서의 비합리성이 그것이었다. 더구나 조선인 경제의 총체적 파산은 여전히 서구문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게 했다. 이동곡은 「동서의 문화를 비판하야 우리의 문화운동을 논함」이란 글에서 인간문화에서 서양인은 자연을 정복하고 개조

71 이돈화, 「歲在壬戍 萬事亨通」, 개벽 제19호, 1922년 1월 10일.

하는 반면 동양인은 자연과 융화한다고 하면서, 최고의 문화운동 단계를 위해서 우리는 “일면의 경우에 制服과 改造에 노력하고 또 일면에는 자기정신의 수양에 노력하여야 할지니, 단순히 전자에만 노력하는 때는 인류는 장차 노동의 한 기관을 이룰 것 뿐이오, 또한 후자로서 능사를 하는 때는 인류는 생존의 경쟁 중에 자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근대적 병폐를 극복할 방법을 서양과 동양 문화의 혼합에서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梁啓超씨는 自著 「歐遊心影錄」의 중에 서양문명의 破産을 선언하야 동양문명의 利處를 논하얏”지만, “西洋文化를 承受하랴는 이때에 이상의 論이 世에 유행케 되면 참으로 前途에 큰 魔障이 아니라 할 수 없다”라고72 하여 서양 문화를 기초로 하되 거기서 오는 병폐를 동양문화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 다. 이 글은 당시 “물질적 영역에서는 ‘문명기획’을 추진해야 했으며, 정신적 영역에 서는 조선적인 것(역사, 문화, 민족성)을 찾는 작업”을 병행했던 지식인들의 주장에 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73 “조선은 조선인의 특수성에 존재가 달리었다.

그런데 조선인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조선인은 생존을 목표 삼고 자각한대로 死生 을 결정하여 結局에 至하여까지 철저히 행하는 성질을 포함하여야 되겠다. 이것이 조선인의 특수성이다. 문학계에서도 그 성질, 실업계에도 그 성질이 滲透가 되면 조선은 현재 破産의 지위에서 초월할 것이다.74

그러나 1926년 쇼와공황과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파산한 민족경제는 구 제의 가능성이 더 희박해져갔다. 파산의 공포가 현실화되면서 ‘파산’은 이제 지식인 이 사용하는 위기의 서사가 아니라 조선인의 생활 위기를 표현하는 기표가 되었고,

72 北旅東谷(이동곡), 「東西文化批判하야 우리의文化運動함」, 개벽 제29호, 1922년 11월.

73 류시현, 「일제하 최남선의 불교 인식과 ‘조선불교’의 탐구」, 역사문제연구 14, 2005, 198~201쪽.

물질영역과 정신영역의 정치기획에서 드러나는 문명과 문화개념은 보편과 특수, 국민과 민족 등의 이항대립을 내포하는 것이었지만, 최남선을 비롯한 당시 지식인들에게는 모순적인 것이 아니었다.

74 延禧專門學校敎授 韓稚觀, 「特殊的 朝鮮인」, 동광 제8호 1926년 12월 1일.

물질적 파산으로 인한 근대 인간성의 상실이 매체를 통해 알려진 극단적인 자살 사건을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 파산과 失妻는 자살로 연결되는 “무서운 현실”이 되고 있었다.75 1931년 4월 23일 형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파산한 동생이 형과 자신 의 처 사이의 불륜을 알고 형, 형수, 조카 2명 그리고 자신의 처를 살해한 사건에 대한 재판과정이 기사화되었다.76 선천에 사는 일본인 여관업자가 파산을 하자 자신 의 집과 몸에 불을 질러 자살한 사건과77 친정아버지의 파산을 비관하여 음독자살한 어린 며느리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78

현실적인 경제위기가 개인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파탄으로 귀결되는 사례들이 알려지면서, 조선 민족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논의가 나타났다. 1933 년 동아일보 는 조선인의 정신적 파산을 ‘조선인의 정신적 파산’은 “남녀의 도덕, 붕우의 도덕, 이웃의 도덕이 모두 파괴가 되는 경향이 날로 심하여 가고 개인과 개인은 마치 아무 도덕적 결속이 없고 저마다 제 이욕을 위하여 난투”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인이 정신적 파산을 하게 된 원인으로 지적된 것은 첫째, “도덕을 최고한 권위로 믿고, 이 권위에 복종하는 신성한 의무를 기조로 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 오든 조선인이 일단에 법 만능, 경찰 만능의 제도 밑에 들어 도덕의 권위 대신에 법률의 권위의 제제를 받게”된 것, 둘째, “조선에 있어서는 고래로 재산이 사회적 지위의 기준이 된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도덕을 주로 하는 인격으로써 사람을 평가하기를 힘쓰지 아니하는 듯한” 사회제도의 해독, 셋째 “도덕적 권위를 해이케 한 원인이 된 것은 혼란을 극한 신사조들이다. 모든 제도와 인습에 반항한다 는 슬로건은 민족의 전통에 **적 비판을 가할 여가도 없이 청년적 혈기로써 파괴를 일삼고 특히 청년적 혈기적 욕망에 제어를 가하는 모든 도덕률을 조소해버린” 태도

75 김동인, 「女人數題-溫泉雜感」, 삼천리 제6호, 1930년 5월.

76 동아일보 , 1931년 4월 23일, 「친형일가를 살상, 철창에서 발광까지, 파산신청의 원한」

77 동아일보 , 1931년 11월 14일, 「破産 後 差押當 自家 放火燒死 78 동아일보 , 1933년 5월 24일, 「親家破産悲觀 少婦飮毒自殺

였다.79

이 사설에서는 “세계자본주의사회에서 파시즘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고심의 결과 였고(중략) 재산본위를 인격본위로, 권리본위를 의무본위로, 개인본위를 국민본위 로, 권위를 바꾸어 놓자는 것이 그들의 근본정신”이며, 파시즘의 정신을 소개하는 것은 “오늘 날 사회가 경제기구로 파탄의 위기에 있는 동시에 정신적 대 파탄의 위기에 있는 것을 각 국민이 자각하려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파산은 회복할 수도 있지만은 정신적으로 한번 파산된 민족은 민족으로의 생명은 영원이 단절될 것이다”라고 하여 민족정신의 회복을 주장했다.

매체를 통해 확인된 파산의 결과가 물질생활의 파국을 넘어 도덕성의 상실이란 현상으로 해석되는 순간 ‘파산담론’이 추동했던 근대 사회를 영위할 주체의 형성을 위해 요구된 지향들이 급속하게 도덕성으로 수렴되는 경로를 밟는다. 개인에서 민족으로 확장되었던 경로와 동일하게 개인의 도덕성은 민족의 도덕성으로 확장되 고, 민족의 도덕성은 민족의 고고학적 기원으로서의 전통의 권위를 강력하게 소환 했다. “개인본위에서 민족본위로, 이욕본위에서 덕의본위로, 반만년 지켜오는 도덕 최고권위의 전통의 무너지려는 탑을 버티어야할 것이다.”라는 주장은 공황으로 발 견된 ‘민족경제’를 구제할 수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발견된 ‘민족’의 자본주의 경제는 그 상상의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4. 맺음말

19세기말 한국에서 국민경제학의 상상은 유길준의 서유견문 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경쟁 대신 競勵를 사용하면서 개인의 이익이 공익 또는 국가의

79 동아일보 , 1933년 8월 25일, 「권위의 폐허, 정신적 파산의 공포, 최근의 범죄증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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