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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유교」라는 주제는 지금까지 학계 뿐 아니라 미디어계에서도 수없이 토론 되어온 주제이고, 이미 일본(또는 동아시아)에서는 진부한 주제로 여겨질 정도다.

일본의 경우,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전쟁 전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나 「반봉건적」

일본 자본주의 특성을 논할 때, 거의 항상 유교와의 관련이 부정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 강좌파계 마르크스주의자나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男) 학파. 그런데 이러 한 흐름은 1960년 대에 이르러 바뀌게 되었다(냉전 하의 「반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색깔을 진하게 띄면서). 「일본에서는 어째서 근대화가 성공한 것인가,

<발전도상국>은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월트 로스토(Walt W.

Rostow)의 근대화론(『경제성장의 첫단계』 다이아몬드사, 1961)이나, 막스 베버 (Max Weber)의 이론에 기초한 로버트 벨라(Robert N. Bellah)의 연구(『일본의 근대화와 종교윤리』 미래사, 1962), 그리고 마리우스 얀센(Marius B. Jansen) 등과 같은 미국 연구자들의 이론이 등장했다. 이제는 유교가 무엇보다도 일본 근대화를 성공시킨 에토스로서 긍정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1990년경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과 대만 등을 무대로 잘 알려진 「유교 르네상스」론이 등장하기에 이른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1

여기서 하나하나 논평할 수는 없지만 강좌파, 마루야마 학파, 그리고 근대화론 이 모두가 유교(주자학)를 도쿠가와 시대의 「관학적 교설」(막번체제 이데올로기)로 정립시키고 「전근대적 사유」로 수렴하여 파악하는 점에서(「~파악하기 때문에」 「~

파악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공통된다고 볼 수 있다. 유교가 「전근대적 사유」(=중 세자연법)인 것에 대해서는(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인 개괄이긴 하지만) 전후 도쿠가 와 사상사 연구에 압도적 영향을 끼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연구』(도 쿄대학출판부, 1952)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재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판하는 사 람도 포함해) 그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만 할 것은, 도쿠가와 시대의 유교(주자학)가 「관학적 교설」(막번체제 이데올로기)이었던 것이, 지금은 거의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는 점이 다.2 곧 (명청조나 조선왕조와 달리) 과거제도가 없었던 도쿠가와 일본에 있어서는, 심지어 무관에 의한 정치체제였던 막번 체제에 있어서는, 외교적 의례적인 필요성 이 있었다고는 해도 유교 주자학의 지식이 특히 17-18세기에 막번 정치에 영향을 끼친 일은 거의 없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의 「정덕의 치(正の 治)」나 미토번(水藩)ㆍ오카야마번(岡山藩)의 정치 같은 예외가 있다고는 해도 말이다.

더욱이 17세기에 집중되는 저명한 유학자들 -교학파(京派), 야마자키 안사이학 파(山崎闇斎学派), 도주학파(藤樹派), 고학파(古派), 고기학파(古義派), 고분 지학파(古文辞学派) 등- 의 교설도, 지식인계에 침투는 했으나 사회적 영향력은 크 지않았다는 게 거의 정설이다. 이전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무 전제 없이 일본 근대화와 관련하여 유교를 그 에토스로 논해 왔던 일의 근본이 크게 무너져 버렸음을 뜻한다. 덧붙이자면 근래의 불교 연구의 진전으로 인해, 오히려 「막번제

1 「유교 르네상스」론의 상세에 관해서는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유교 르네상스를 생각하다』(大修 館書店,1991) 중에 특히 13~38페이지를 참조.

2 대표적 의론으로 와타나베 히로시(), 『근세일본사회와 송학』(東大出版, 1985)이 있다.

불교」(또는 거기서 파생하는 「선서(善書)」 등의 통속 도덕)야말로 도쿠가와 가문을 필두로 한 무사 위정자 계급부터 사단(寺檀)체제 아래의 농민 계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를 뒤덮는 사회의식에 깊은 영향을 끼친 막번제 이데올로기였다고 하는 이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3

그렇다고 해도 유교(주자학)가 도쿠가와 일본에서 전혀 존재가치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앞에 서술했듯이 비록 지식인계에 한정되어 있지만, 저명한 유학자를 비롯하여 학문으로써 유교(주자학)가 재야도 포함하여 착실하게 침투하고 있었던 건 18세기를 산 유학자의 술회에서도 엿볼 수 있다.4 그러므로 아무리 「관학적 교설」(막번제 이데올로기)이 아니었다고 해도, 〈도쿠가와 일본의 지(知)〉로서 유교 가 착실히 뻗어가고 있었던 것은, 앞으로 서술할 관정기(政期) 이후의 유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경시해서는 안 될 점이다.5

한편 근래 연구동향에서 주목할 것은, 도쿠가와 일본에서 유교(주자학)가 사회적 영향력을 나름대로 심화한 것이 실은 18세기말 이후 구체적으로는 관정개혁 이후가 아닐까 하는 일련의 연구다.6 <관정이학(政異)의 금(禁)>과 쇼헤이자키 학문

3 이 개념에 대한 참조는 오오쿠와 히토시(大桑)『일본근세의 사상과 불교』法蔵館, 1989.

4예를 들면, 라와 로도(那波魯堂, 1727-1789)의 『問源流』(1794年刊)는 지식인계에 한정된다고는 해도 18세기에 야마자키 안사이학파(山崎闇斎学), 이토 진사이(伊藤仁)ㆍ도가이학파(東涯 ), 오규우 소라이학파()가 에도나 카미가타(上方)에서 얼마나 융성하고 있었는가를 기 술하고 있어, <관정이학의 금> 이전의 도쿠가와 유교의 보급 양상을 엿볼 수 있다(『日本文庫東京 博文館, 1891).

5이 밖에 도쿠가와 일본이 「동아시아 근세제국」 내의 왕권인 것이 의식되는 경우(新井白石 등)에는, 당연히 유교(특히 주자학) 또는 거기에 근거한 의례가 요구된다. 이런 경우에 「동아시아 근세제국」

에서의 보편적 이념의 공유가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근세제국』의 해체와 19세기 전반기의 사상 동향」 『日本思想史講座③』(펠리컨 출판사, 2012)을 참조.

6오래전 자료로는 기누가사 야스키(衣笠安喜) 「절충학파와 교학통제」 『岩波講座日本⑫』(岩波 書店, 1963)나辻本雅史 『근세교육사상사 연구』(思文閣出版,1990)가 ‘관정이학의 금’ 전후의 유교사상 동향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근래는 壁仁 『도쿠가와 후기의 학문과 정치』(名大出 版会,2007)나奈良勝司『메이지유신과 세계인식체계』(有志舎, 2010)가 쇼헤이자키 학문소야 말로 19세기 막부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극명하게 밝혀내 주목을 받았다.

소(昌平坂問所)의 관학화, 이를 짊어진 주자학 정학파의 활동이야말로 막부뿐 아니라 각 번의 번학 설립을 촉구하여, 처음으로 도쿠가와 일본사회에 유교(주자학) 을 침투하게 했다는 지적은, 서두에 말했던 일본 근대화와 유교의 관련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시사적이다. 요약하자면, 이제껏 아무 전제 없이 언급되어 온 도쿠가와 유교를, 18세기 말~19세기에 등장한 도쿠가와 후기의 유교로 다시 지정하여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이상의 내용에 의거하여 본 논문에서는 주로 18세기말, 구체적으로는 관정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동했다고 생각되는 사회적 언설로서의 도쿠가와 후기 유교 의 특성을 훑어본다. 이윽고 그것이 어떻게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사회에 영향을 주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봄으로써, 본 학술대회 주제인 「소강(유교)와 근대 국민 경제학의 상상」에 접근해보고자 한다.7

2.도쿠가와 후기 유교의 특성

주지하는 바와 같이, 18세기말이 되자 동아시아 전역에서는 (1)인구 증가 (2)역 사적 템포의 가속화 (3)경제활동 중심으로서 「지방」도시의 성장 (4)도시상업계층의 발흥 (5)종교의 재부흥과 선교활동 (6)농촌의 소요 (7)유목민의 몰락이라는 경향이 강해졌다.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침투됨에 따라 봉건경제 의 모순은 심화했다고 볼 수 있다.8 이에 더해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7 「소강(小康)」은 일반적으로는(「대동(大同)」과 나란히) 치정이 두루 미치고 교화가 이루어져 안태로 안정되는「문무주공의 치」 등을 가리킨다(『礼記』). 다만 근대 이후 강유위(康有) 등으로부터 발단 한 청조ㆍ조선왕조의 공교운동(運動)에서는 「대동」과 대치시킨 바꿔 읽기도 행해지게 되었다 (梁啓超「지나의 종교개혁에 대해」『梁啓超文集岩波文庫, 2020, 充昭 「동아시아 근대에서 의 공교운동의 전개」 『立命館文』 626, 2012 등을 참조). 여기서는 상세히 논하지 않겠지만 공교운동의 「소강」론도 사정권에 두고 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9- 의 파장이 동아시아에도 미치기 시 작하여, 해금체제(海禁制)의 주변을 흔드는 「내우외환」 상황이 만들어지고 있었 다.

도쿠가와 왕조에서의 관정기의 개혁은 이러한 「내우외환」에 대한 최초의 대응으 로 알려져 있다.10 무엇보다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때까지 본격적으로는 도모 되지 않았던 유교ㆍ주자학에서의 교화 시스템이 처음으로 채용된 것이다. <관정이 학의 금>, 쇼헤이자키 학문소 설치, 그리고 그에 촉발된 각 번의 번학 설치가 그 계기가 된 것은 앞에 서술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8세기 이전과 는 달리) 유교ㆍ주자학의 교화적 측면이 중시된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무사의「의기 (義)」나 농민의 복종을 촉구하는 도덕주의적 권선사상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11 이것은 단적으로는 <관정이학의 금>의 주도자 중 하나인 고가 세이리 (古賀精里, 1750~1817)의 「옛 사람의 학문은 윤리(倫理)일 뿐이다. 무엇을 ‘윤(倫)’

이라고 하는가? 부자ㆍ군신ㆍ부부ㆍ형제ㆍ붕우가 이것이다. 무엇을 ‘리(理)’라고 하는가? 부자의 친(親)ㆍ군신의 의(義)ㆍ부부의 별(別)ㆍ형제의 서(序)ㆍ붕우의 신 (信)이 이것이다 (古人ノハ倫理ノミ。 何ヲカ倫ト謂フ、父子君臣夫婦兄弟朋友、是 ノミ。 何ヲカ理ト謂フ、親義別序信是ノミ)」(「川窪学舎記」) 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12

8 岸本美, 「동아시아ㆍ동남아시아 전통사회의 형성」, 『岩波講座世界⑬』, 岩波書店, 1998.

9 『근대세계시스템』ⅠⅡ(川北稔), 岩波書店, 1981.

10 藤田, 『근세후기정치사와 대외관계』, 東大出版会, 2005.

11 만약을 위해 말하자면, 이 동향은 <관정이학의 금> 이후 소헤이자키학문소 유학자ㆍ주자학 정통파에 현저히 나타나는 것으로, 도쿠가와 시대 후기의 유교 전체가 도덕주의적인 것이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재야의 유교까지 사정권에 넣으면, 고주학ㆍ절충학에서 고증학으로 비판적 경세론의 유행, 「심의 철학」의 심화라는 동향이 존재한 것은 나까무라 유키히코(中村幸彦)가 지적한 그대로이다(「근세후기 유학계의 동향」, 『中村幸彦著述集⑪』,中央公論社, 1982). 이들 이 메이지 이후에 각자 더듬어 간 동정도 따로 검토할 필요가 있으나 지금은 넘어가겠다. 전망만 서술하자면, 고증학은 근대역사학 등으로, 비판적 경세론은 자유민권론 등으로, 「심의 철학」은

「동양철학」 등으로 각각 계승되었지만, 청일전쟁 전후 시기(1894년경)에는 전체로서는 분해되어 갔다고 생각한다.

주자학 정학파(正派)가 주자학을 표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념적 형이상학과 내발적 수양(격물궁리ㆍ거경)과는 동떨어진 도덕주의에 서 있었던 것 을 비롯하여, 세끼몬심학(石門心) 등의 삼교일치적 교화,13 『선서(善書)』적 교화와 의 결합 등 유교ㆍ주자학이라기보다도 우민관에 기초한 권선징악적 절충사상의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간파된다. 이러한 정책에 강한 주도권을 발휘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1759~1829)였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막부에 등용된 시바노 리츠잔 (柴野栗山, 1736~1807), 오카다 칸센 (岡田寒泉, 1740~1816), 비토 니슈(尾藤二洲, 1745~1814),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히로시마 번(島藩)의 유학자 라이 슌스이 (春水, 1746~1816)와 니시야마 셋사이(西山拙 斎, 1735~1799), 그리고 오사카회덕당(大坂懐徳堂)의 존재가 지적된다.14

두 번째로 한편에서 「외환(外患)」에 대응하려고 재구성된 주자학에도, 교화를 효과적으로 이루기 위한 제정일치적 체계를 향한 강한 충동이 있었던 것이다. 마쓰 다이라 사다노부가 공자를 대리하여 도쇼구 제사(東照宮祭祀) 더욱이 아마테라스 제사에 기인해 「외환」 극복을 위한 「성(誠)」을 환기시키려 했던 것을 우선 주목할 수 있는다.15 여기서는 에조치(蝦夷地) 방위책이라는 실천적 과제와 함께 후기 미토 학(水戸学)이 일어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아이자와 야스시(会沢安, 1782~1863)는 러시아 제국의 국민교화 시스템을 높이 평가하여 우선 아이누의

「풍속개체ㆍ교화」에 따른 에조치의 「내국화」부터, 나아가 도쿠가와 왕조 전역에서

「전례교화」에 따라 「백성의 마음(民志)를 하나」로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 한 주장은 같은 시기의 에조치 개발론에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대부분

「서양인」을 본받아야 된다고 하는 점이 주목된다. 예를 들면 모가미 토쿠나이(最上

12 近世儒家文集集成精里全書 之十四, 펠리컨 출판사, 1996.

13 石川謙石門心岩波書店, 1938.

14 衣笠安喜前論文辻本雅史前.

15 松平定信의 신국사상」 岩井忠熊외 편 『천황제 국가의 통합과 지배』 文理閣, 1992.

徳内, 1755~1836)의 『에조초지(蝦夷草紙)』는 막부 수뇌부인 혼다 타다카즈(本多忠 籌, 1740~1813)에게 헌정되었다. 이것은 막부 내의 에조치 개발론ㆍ상지론(上知 論)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16 「적인(赤人)의 풍속으로 변했다」라는 상황에 촉구되어 「시마시마(島々)의 사인土人을 무육교도(撫育導)」할 것이 제언 되고 있다.17 이런 언설들도 또한 주자학의 교화적 측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 번째로, 이 시기에 급속히 대두한 모든 양학이 이와 같은 대외방위책과 밀접하 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군사과학화).18 더 말하자면 후기 미토학이 그러했듯 이 이미 도덕주의적 경향을 진하게 풍기던 도쿠가와 왕조 후기의 유교ㆍ주자학에서 는, 형이하학(예술)로 규정된 양학과의 절충에 관대했다. 관대했다기 보다 오히려 (형이상학을 뒤로 미루어둔 채) 형이상하의 분리가 이루어진 만큼, 양학과의 절충은 용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33~1817)도 연구자들 사이 에서 의론이 있긴 하지만 「난한(蘭漢)」 병용의 입장에 가까웠다.19 또한 대외방위적 관점에서 본 양학의 섭취는, 그것을 현저하게 형이하학적인 면에 한정시키게 됨으 로써, 반대로 그 형이상학(예를 들어 기독교)에 대해서는 단호한 배격 태세를 관철 시켰다.

덧붙여 말하자면 청조나 조선왕조에서는 유교ㆍ주자학이 사회 시스템의 깊은 부분을 규정하고 있었으며, 형이상과 형이하로 분리하기 어려운 체계적 사유의 견고한 존재와도 맞물렸다. 가령 형이하학적으로 파악했든 아니든 서양의 학예에 대한 거절의 정도는 강했다고 한다. 물론 청조나 조선왕조에서도 양학 연구는 이루

16 田源六, 『本多忠籌侯』, 本多忠籌侯遺徳顕, 1942.

17 졸저, 『자타인식의 사상사』, 有志, 2008. 18 佐藤昌介, 『양학사의 연구』, 中央公論社, 1980.

19 山崎彰, 「 성립의 사상적 전제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日本洋』 Ⅵ, 創元社, 1982.

어지고 있었다. 특히 청조에서는 양학(서학)의 한문번역이 의욕적으로 행해졌고, 그 발신력이 동아시아에서 완수한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예를 들면 번역은 아니지 만 명조 말기에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수사 알레니(G.Aleni, 1582~1649=애유략 (艾儒略)이 쓴 『직방외기(職方外記)』가 몰래 일본에 반입되어 필사본으로 전파된 일이나, 청조 초기에 웅명우(熊明遇, 1579~1649)의 『격치초(格致草)』 등을 토대로 유예(游芸, 17세기 인물, 생몰년 미상)의 『천경혹문(天或問)』이 쓰여 진 일본에서 도 널리 유통된 일 등이다.20 또한 조선왕조의 이익(李瀷, 1681~1763), 정약용(丁若 鏞, 1762~1836) 등의 「실학」이 조선의 「사상지도(思想地)」를 변화시킨 것도 지적 할 수 있다.21 다만 유교ㆍ주자학이 공정(公定) 이데올로기로 존재했던 이들 왕조에 서 왕권중심부에 있어서의 양학의 영향력은 한정적인 것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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