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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담론과 국민경제

문서에서 유교와 근대 국민 경제학의 상상 (페이지 143-153)

반면 경제의 ‘일반법칙’을 거부했던 독일의 역사학파는 경제를 다른 국가의 그것 과 구별하여 온전히 국가의 틀 안에서 사유할 것을 주장했다. 독일역사학파 경제학 은 모든 지역과 국가에 상관없이 보편적이고 타당한 경제학을 추구했던 고전경제학 을 비판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역의 특성에 맞는 경제학을 주장했다. 영국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이 늦은 독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학 파경제학은 독일 국가 내의 생산과 교환, 소비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고, 독일국민의 생황실태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사회윤리’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의 협조, 국가의 적극적인 사회정책 실시 등을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윤리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사유는 (신)고전경제학과는 달리 경제영역에 대한 국가 또는 사회 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국민경제학의 상상은 (신)고전경제학에서 자본주의를 국가 내부로 사유할 수 있는 지식을 마련하 고, 역사학파에서 지역 또는 국가의 특수성과 사회윤리가 경제에 부가됨으로써 온전히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글에서는 한국에서 국민경제에 상상이 등장하고 확산되어 갔던 과정을 고찰한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유교윤리의 관계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고, 인간사회가 보다 나은 이익을 얻게 된 것이 바로 ‘相競相勵’의 과정에서 비롯되 었다고 했다. 그런데 문명하지 못하여 경려에 기강이 없었던 시대에서 부귀를 다투 는 일은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약탈적인 것이었지만, ‘時世의 風氣漸開함에 至하 야 人이 言行을 修하며 知識을 硏함애 國家의 法紀를 改正하고 民生의 權利를 保護 한 즉 (중략) 富貴利達을 致하는 者는 亦 他人의 裨益을 成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증기기관, 배차, 방직기계를 발명한 대가들과 그 발명을 도운 사람들이 모두 개인적인 名利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사람들에게도 막대한 이익을 끼쳤다고 평가했다.3 이는 개인의 사적활동이 ‘國家 法紀의 改正’을 통한 ‘民生의 權利 保護 ’-근대 정부의 기능을 통해, 집단 또는 국가의 이익으로 연결된다는 관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장을 매개로 하는 개인의 활동은 언급된 반면 개인의 활동을 매개하는 시장-사적 활동의 횡적 조율 장치로서의 시장개념이 분명 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길준은 문명한 사회에서 ‘開明한 世에 損人益 己하난 鄙夫가 不無하나(중략) 政治公益한 法律制度의 不許함’이라고 하여,4 약탈이 라는 극단적 양상은 법률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世人의 結交하난 道(競勵)가 家族 間의 親愛慈情에 比하여 彼此의 差別은 固有하나 緩急에 相救하고 憂樂을 與同하여 現世의 光景을 飾하고 大衆의 福祿을 保하는 者’라고 하여5 시장의 개인경쟁이 친애라는 개인의 심성 또는 가족규범의 확장을 통해 통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유길준이 ‘경쟁’이란 용어대신 ‘경려’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경쟁에 대한 통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유길준의 입장은 정부 의 시장개입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임금, 실직자 구제, 물가 안정 등에 정부가 개입

3 西遊見聞 , 「人世 競勵」, 130쪽.

4 西遊見聞 , 「人世 競勵」, 132쪽.

5 西遊見聞 , 「人世 競勵」, 133쪽.

해야 한다는 ‘世間諸學者의 議論’을 비판하면서 ‘政府의 大職은 人民을 爲하야 其業 을 求하기에 不在하고 其所有한 業을 保하기에 在한지라’고 하면서 프랑스의 시장 개입 정책과 영국의 보호무역주의가 모두 폐단을 일으켜 폐지되었다는 사례를 들고 있다.6 정부의 역할이 자본의 무한증식에 기여했던 19세기 자유주의 정책에 기초하 여 서술되고 있었다는 점은 ‘외행하는 주권’의 배후에 있는 근대세계체제의 규정성 이 정부의 역할에도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정부’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유주의 시장질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시장의 자기조정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親愛慈情’이 란 가족 간의 윤리에 차별은 있지만, ‘緩急에 相救하고 憂樂을 與同’하는 관념을 통해 경려가 공익에 부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점은 아담 스미스와 달랐다.

아담스미스는 국부론 에 앞서 서술한 도덕감정론 에서 개인의 이기심과 사회 의 번영을 매개하는 것이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고, 그것은 인간행위에서 발견되는 천성 그리고 신의 섭리였다.7 반면 유길준은 ‘親愛慈情’이란 가족의 자연성 으로서의 유교윤리를 소환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1908년 출판된 노동야학독본 에서도 등장한다. “自로 助 음”에서는 “스스로 도움이 실상은 서로 도움이니 가령 농부가 공장의 물건을 사니 이는 공장이 간접으로 농부를 도움이오, 공장이 농부의 곡식을 사니 농부가 간접으 로 공장을 도움이로다.”라고8 하여 시장을 통한 교환은 자신이 비록 이익을 추구하 더라도 남에게 만족을 주는 섭리임과 동시에 시장의 경쟁에서 노동자가 노동자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정직」, 「노동의 성실」, 「노동의 근면」을 준수해 야 한다고 했다. 약속한 기간, 임금, 결과의 산출이 노동자가 지켜야할 윤리의식이

6 西遊見聞 , 「政府職分」, 155~161쪽.

7 아담스미스, 박세일ㆍ민경국 역, 도덕감정론 , 비봉출판사, 1996, 346쪽.

8 유길준, 앞의 책, 90쪽.

었다.9 정직, 성실, 근면이라는 사회윤리는 경쟁의 미덕과 함께 평화로운 시장의 질서였다. 유길준은 ‘국민경제’란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시장의 경쟁을 통해 인민과 국가의 부가 달성될 수 있음을 설명했고, 노동자란 새로운 경제주체가 시장 의 경쟁에서 지켜야할 윤리로서 유교의 윤리관을 소환했다.

‘국민경제’라는 단어가 매체에 등장한 것은 1905년 시행된 화폐재정정리에 대한 재정고문 메가타(目賀田種太郞)의 인터뷰를 보도한 기사에서 발견된다.10 그 후 국민경제는 일본인의 경제침탈현상을 보도할 때도 등장하는데 일본인의 완도삼림 채벌이 “國民經濟上問題”라는 것이다. 이때 국민경제는 대한제국인 경제활동 전체 를 지시하는 것으로 현재의 사전적 의미가 분명하게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10년 조진태, 유길준 등이 주도하여 설립된 국민경제회는 “중외의 경제상 연락을 통하여 상호 원조하여 재산을 보호하며 각자 혹은 공동의 경영으로 업무에 힘써 지방물산의 興植改良과 國家富源의 개발증익을 도모”한다고 하여 자본가의 부와 국가의 부를 선순환 관계로 보았다.11

그러나 이러한 관념은 국민경제란 어휘의 등장 이전부터 발견된다. “나라마자 집과 인구와 국 중에서 생기는 돈과 밭과 논과 전국에 있는 지면, 장광 수효들을 모두 사실하여 책에 박혀 인민을 가르치는 법인데”12라는 독립신문 의 언급은 國勢 에 대한 지식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는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다. 자본은 국민재산을 생산케 하는 것이며, 화폐는 국민의 생산, 재산을 원활하게 유통케 하는 것이다. 서로 체결된 연후에 일정한 토지를 보존하며 인민을 조직하여 국가가 영원히 그 복을 향유하는 것이오. 만약 그렇지 못한 즉 쇠퇴의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오호라 우리 ‘대한경제’의 상황을 돌아보면”13이라고 하여 ‘자본’과 ‘화

9 유길준, 앞의 책(1908), 30~34쪽.

10 皇城新聞 1905년 11월 18일자 「財顧說明 11 皇城新聞 1910년 3월 9일자 「國民經濟會設立 12 독립신문 1896년 5월 30일자 논설.

폐’ 즉 생산과 유통의 상호결합을 경제로 보고, 국가를 유지하는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이미 국민경제적 관점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05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국민경제의 상상에서 발견되는 차이는 경제발전의 주체로서 자본가, 지식인에 대한 것이었다. 1905년 이전 國勢의 기준인 경제발전에 대한 1차적 책임은 대한제국 정부가 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매체는 정부에 ‘식산흥업’ 정책을 요청하는 문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반면 1905년 이후에는 지식인, 자본가 그룹이 경제발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매체의 지면을 뒤덮었다. 국가의 자기결정권을 증명하기 위해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회진화론적 경쟁담론은 “지구상 인물의 태어남이 날로 번식하여 각기 생존을 위해 경쟁하며,”14 “생존적 능력을 분휘”15할 것을 주장하면서 자산가의 자본 투자를 촉구했다. 1906년 대한자강회연설에서 장지연은 “무릇 일국의 경제는 수입 수출의 균형 여하로 알 수 있으므로(중략) 우리 자강회는 식산흥업의 발달을 기대함 으로 강령의 제1항을 더하였소.”라고 하여 무역을 통해 국가를 경제단위로 규정하 고, 지식인과 자본가가 경제발전의 주체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16 여기에는 을사 조약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통치행위가 제한된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통감부의 경제조사를 통해 국부의 재원이 새롭게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 밀려드는 일본인,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만주무역의 증가 등으로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독립’을 위해 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야 한다는 경쟁담론의 확산으로 인해 국민경제적 상상은 ‘생산’을 중심으로 확산되 었고, ‘분배’의 균형은 망각되어 갔다. 그러나 ‘생산’의 주체였던 ‘자본가’의 경쟁은

‘공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신문매체에서는 자본가가 ‘사익’보다는

13 皇城新聞 1903년 6월 3일자 「我國經濟上有感 14 박은식, 「本校 測量科」, 西友 17, 1908년 4월.

15 大韓每日申報 1909년 4월 8일자 「經濟恐慌原因 續

16 皇城新聞 1906년 4월 30일자 「大韓自强會演說 殖問題 張志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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