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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독일통일과 교류․협력

1) 콘라트 아데나워의 서방정책

패전과 연합국의 붕괴, 냉전의 과정 속에서 독일 내 서부지역에 1949년 9월 21 일 ‘독일연방공화국(BRD)’과 동부지역에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DDR)’

이 각각 수립되었다. 이로써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멍에 속에 분단국가로 다시 태 어나게 됐다.

서독은 ‘기본법(Grundgesetz)’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기본법에 의해 독일연방공 화국이라는 국가가 외형적으로는 수립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주권 국가로서 위상 이나 국가적 상태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기본법의 전문에는 “전 독일 민족은 자유로운 자결권으로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달성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후 ‘자유로운 자결권(freie Selbstbestimmung)’은 통일을 위한 기본조건으로 통일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강조하였다. 또한 ‘자유로운 자결권’을 기저로 통일을 대비하여 두 조항을 마련하였다. 기본법 제23조에 “다른 독일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면 가입한 주에도 기본법이 그 효력을 발휘한 다.”고 규정하였다. 제146조에 “이 기본법은 독일 민족의 자유로운 결정으로 제정 된 헌법이 발효하는 날에 그 효력을 잃는다.”고 하였다.

기본법 제23조와 제146조는 상이한 정신의 조항으로, 통일과정에 따른 법치주의 원칙과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양면을 명시해 통일선택의 영역을 미리 넓혀두었다.

제146조는 독일통일에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민주주의 원칙에 준한 반면, 제23조 는 국가이성에 토대를 둔 법치주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이한 정신 의 두 조항을 명시한 이유는 통일에 접근하였을 때 제146조에 의거 국민투표에 의해 혹시 통일헌법이 부결되어 통일실현이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였다. 이 두 조항은 분단된 상태에서 두 국가가 수립되지만 이는 일시적이고, 언 젠가는 통일을 이루겠다는 분명한 의지와 미래지향적 통일좌표를 설정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결국 1990년 10월 3일 기본법 23조에 의해 통일을 이루었다.

이렇게 수립된 서독은 패전 이후 연합국 분활 통치 밑에 있으면서도 자주적 국 가정체 및 주권을 재빨리 성취할 수 있었다. 이는 폐허가 된 독일을 다시 재건해 야겠다는 집념과 의지가 강했던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서독 초대 연방 수상의 역할이 컸다.

아데나워는 서독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경제재건과 완전한 주권회 복으로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였다. 독일은 독일제국의 환상에서 벗어나, 독일의 미 래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긴밀한 상호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협력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다. 아데나워의 통일․외교정책은 친서유럽 정책과 이를 통한 서 독이 서방세계에 통합되는 것을 기조에 둔 소위 ‘서방정책(Westpolitik)’이었다.

아데나워의 통일․외교정책은 동서분단을 고착화시키며 국경선을 제한시키는 등 독일통일과는 거리가 먼 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특히 폴란드 등 소련 점 령지역 내에 거주하고 있는 1,700만 명의 독일인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아데나워가 서방정책을 추진한 이유는 서방정책으로만이 서독의 안보보 장과 빠른 시일 내 완전한 주권국가가 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아데나워는 유럽의 새로운 질서에 따른 서독의 위상을 구상하였다. 서유럽 국가 들과 군사 및 정치협력을 추구하여,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받아 서독의 주 권회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가입하 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나토는 서방연합국으로 하여금 독일통일을 위한 의무를 지 고 서베를린의 안전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독일국경의 최종확정은 강화조약이 체 결될 때까지 미루기로 하였다. 이로써 서독의 서유럽 결속이 더욱 굳어질 수 있었 다. 이와 같이 하여 이루어진 것이 ‘파리조약’9)이다.

파리조약이 발효되면서 점령규정은 폐지되고, 서독은 거의 완전한 주권을 회복 하여, 15번째 국가로써 나토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서독의 군사적 공헌에도 불구하

9) 서방연합국과 서독간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서독에 대한 서방 3대국의 점령지배를 종식 하고, 서독의 주권을 회복시킨다는 내용, 1955년 5월 5일 발효되었다.

고 4대국은 독일 전체 문제에 대하여 법적으로 동의권 또는 참여권을 가지고 있 었다.10)

한편 서독이 나토에 들어가자 동유럽도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기구’

를 창설하였고, 동독은 이 기구의 회원국이 되었다. 따라서 동서독은 정치이데올로 기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면에서도 적대국이 되었다.

서독이 나토에 가입한 후 소련은 서독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동독을 자국의 영향권 내에 두기 위하여 독일에 대한 분단정책을 고수하였다. 이 런 과정에서 결국 동독은 스파이활동 방지라는 명목 하에 분단정책의 일환으로 마침내 1961년 베를린 장벽 구축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1954년까지도 표면상으로는 독일통일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서방연합국이 요구하는 형태의 민주주의 총선거 실시에는 동의하지는 않았다. 1955년 7월, 소련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동베를린에서 ‘2국가 이론’을 제시하였다. 흐루시초프는 독일통일은 어디까지나 독일인들의 일이지만, 통일은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의 성과가 유지되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며 독 일통일을 반대하였다. 즉 소련은 동독이 주도하는 통일은 가능하나 동독이 소멸되 는 통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11)

아데나워의 외교정책은 1955년 공포된 ‘할슈타인 원칙’12)이었다. 서독과 국교관 계에 있는 제3국이 만약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경우, 독일의 분단상태 고착화 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서독 정부는 이러한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 다는 것이었다. 이는 동독 불승인 및 고립화 정책이었다. 서독만이 독일을 국제적 으로 대표하는 유일 합법정부라는 것이다.

아데나워의 통일 정책기조는 우선 대내적으로 1937년을 기준으로 한 구독일 영 토 내 단일민주국가의 건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서방 강 대국과의 유대강화를 통한 대소 힘의 우위 유지였다고 할 수 있다. 아데나워의 외

10) 백경남(1999), “서독에서의 연합국 군정과 서독의 주권회복 과정”, 건국대학교한국문제 연구원연구총서4, p.220.

11) 손선홍(1994), “새롭게 쓴 독일 현대사”, 소나무, p.71.

12)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ktrin)’은 ①독일제국의 존속성 ②독일영토의 온전성 ③독일 내 2개 국가 존재 부인이라는 법적인 세 가지 원칙에 근거를 두었다.

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쟁 뒤의 혼란, 병폐 그리고 소련의 팽창적인 의 도로부터 서독을 지켰다.13)

서독의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단일 국가와 단독 대표권 그리고 자유 총선에 의한 대동독 정책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10년 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고 동서 베를린간의 통행이 단절됨으로써 주민들의 고통과 불만은 높아가면서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동독 정책은 그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14)

아데나워는 동독에 대한 ‘힘의 정책(die stärke Politik)’과 친 서방정책을 꾸준하 게 추진하였다. 그의 통일정책은, 서독이 유일하게 민주적으로 형성된 합법적 국가 이며, 기본법 상 보장된 자유정신과 경제적 우위로써 노예화된 동독지역을 자석처 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서방세계의 미․영․불이 합심하여 독일의 통일의지를 돕는다면 소련은 조만간 그의 약탈품(동독)을 포기하게 될 것으로 믿 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아데나워의 ‘힘의 정책’은 거의 전적으로 서방정책에 만 집착했기 때문에 통일정책으로서는 실패작이라는 비판도 많다. 지금 와서 생각 하면 아데나워가 자신의 집권기에 독일의 통일을 달성치는 못하였지만 그 후 빌 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아 놓지 안았나 생각된다. 사실 브란트는 늘 입버릇처럼 서독의 동방정책은 서방정책의 연장이라고 말해왔다.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