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Ⅲ. 남북한 교류․협력의 전개

2)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

(1) 3원칙 3단계의 통일방안

김대중은 1991년 4월 ‘공화국연합제 통일의 제창’이라는 글에서 ‘3원칙 3단계 통 일방안’을 제시했다. 3원칙 3단계의 통일방안에서 3원칙은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 화통일의 세 가지 원칙에 의해서 통일을 추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평화공존의 원칙은 남북한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쟁을 배격하고 통일 되는 그 날까지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평화교류의 원칙에 있어서는 모든 분야에 걸쳐 전면적인 교류를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추진방법은 쉬운 것부터 단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 모든 교류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인도적 교류로서, 무엇보다도 이산가족의 상호 방문과 필요하면 거주 이전을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북한간에 서로 실질적 80) 이우정(1998), “남․북한 교류협력의 현황과 과제”, 북한연구학회보 제2권 제2호, p.127.

81) 심지연(2001), “남북한 통일방안의 전개와 수렴”, 돌베게, pp.88∼89.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서 진행중인 경제협력이 더욱 확대되어서 상호이익을 추구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TV와 라디오를 남북한이 서로 개방함으로써 상호이 해와 확대에 기여토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북한이 듣지 않으면, 서독이 실행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남쪽 일방만이라도 개방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류는 쉬지 않고 추진하되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전면적 교류가 되어야 한다.

셋째는 평화통일의 원칙이다.

우리는 통일에 있어서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쪽이 지는 그러한 통일을 추구해 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양쪽이 서로 이해가 일치하고 서로 협력과 우호 속에서 공존하는 제1단계의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국민이 뜻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제1단계는 1연합 2독립정부의 형태의 통일로서, 이것을 공화국연합제라고 부르 고 있다. 즉 북한의 인민공화국과 남한의 대한민국 두 공화국이 모여 하나의 연합 을 이루는 것이다.

제2단계는 1연방과 2지역 자치정부 체제이다. 1연방은 외교․군사의 권한을 전 면적으로 장악하고 중요한 내정에 대해서도 권한을 가지고 있다. 제1단계의 공화 국연합제를 통해서 상호신뢰와 교류, 협력, 그리고 동질성이 증대되면 이 단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제2단계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마지막으로 통일이 완성 조치로서 제3단계의 1국 가 1정부 체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타의에 의해서 분단되었던 국가가 우리 민족의 자주적 노력에 의해서 결국 하나 로 완전 통일이 되는 것이다.”82)

(2) 베를린선언과 6․15남북공동선언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및 평화 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와 협력 추진’이라는 대북정책 3원칙을 천명했다. 그리고 북한을 지원하 는 데 인색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남북기본합의서 실천을 위한 특사 교환 제의 82) 김대중(1991), “공화국연합제”, 학민사, pp.197∼204.에서 발췌함.

와 함께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전임 정권 의 대북정책 실패 요인을 거듭하지 않겠다는 각오 하에 햇볕정책을 표방하며, 이 미 이론화하고 구체화한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에 입각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83)

김대중 ‘3단계 통일론’의 완전통일이 최종시기와 관계없이 연방으로 진입하는 자 체를 의미한다는 점과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의 통일이 두 개의 정부에 기초한 느슨한 연방제가 통일이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통일방 안의 유사성 때문에 북한도 종래와 마찬가지로 대화의 선행조건을 주장하였지만, 어느 정권 때보다도 상호접촉과 교류협력의 실천을 주장하고 고위급 회담 및 폭 넓은 민간대화를 갖자고 제의하였다.

남북 모두가 남북관개 개선 및 평화정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남북 한간 대화 재개의 필요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2000년 3월 9일 김대중은 베를린 자 유대학에서 남북한간 대화를 촉구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는데, 선언의 내용 중 햇볕정책이 일정정도 독일의 동방정책의 기능주의적 접근전략과 궤를 같이 하 고 있음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동서독 관계와 통일의 경험은 우리가 대북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매우 소중 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독일로부터 얻은 교훈은 첫째, 독일의 통일은 민 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함께 발전시켜 온 서독 국민의 저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서독은 ‘접촉을 통한 변화’로 요약되는 동방정책을 일관되게 추 진하여 동서독간의 상호공존과 긴장완화의 틀을 구축하였습니다. 셋째, 서독은 진 지하고 성의 있는 노력으로 통일독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사전에 불식시켰 으며 놀랍게도 소련과 동구 공산권의 이해와 협력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이 고 성공적인 외교를 전개하였습니다. 넷째, 서독 정부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 움과 제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과 성의를 가지고 동서독간의 화해와 교 류․협력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서독의 대 동독 정책은 우리 한국의 햇볕정책 추진에 매우 귀중한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84)

83) 심지연(2001), 전게서, p.94.

84) 통일부(2003), “2003 통일백서”, pp408.∼409에서 발췌함.

베를린 선언이 있는 직후 북한은 비공개적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제 등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특사 접촉을 제의하여, 2000년 4월 8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관한 ‘남북합의서’가 타결되었고, 이후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실무절차 합의서’가 타결되었다. 합의서에서 남북정상회담의 의제를 ‘역사적인 7․4 남북공 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 협력,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로 합의하였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되 었다. ‘6․15공동선언’ 내용 중 남북 교류협력 강화의 필요성을 밝힌 부분은 다음 과 같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 전향 장기수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 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 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85)

(3)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은 ‘평화와 화해협력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이며 당장 통일 실현을 서두르기보다는 평화의 토대를 확고히 유지하는 가운데 교류협 력을 꾸준히 추진함으로써, 남북주민들간 자유왕래를 통한 상호이해의 폭을 넓히 고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북한체제는 실패한 체제이긴 하지만 조기 붕괴 가능성은 희박하 다. 또한 북한의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대남 혁명전략과 군사제일주의노선은 유지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86) 이러한 대북인식을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남북한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인적, 물적교류를 하는 사실

85) 통일부(2002), “대북정책 추진 현황”에서 발췌함, p.19.

86) 임동원(1999), “한반도 냉전 종식의 길”, 월간조선 1999 6월, p.374.

상의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87)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은 과거 정부에 비해 획기적인 대북정 책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안보와 교류협력의 병행추진’이 불가피한 한반도의 특수상황에서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이 개방과 변화의 길로 나오도록 환경과 여건 을 조성하는 정책인 동시에 힘의 우위에 있는 정부의 자신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포용정책이자 적극적인 ‘접촉을 통한 변화촉진정책’이라 할 것이다.88)

햇볕정책은 전통적 기능주의 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 이유는 햇볕정책의 가설 자체를 현실에 옮길 수 있는 국가간의 관계는 교류협 력이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기능으로 형성되는 협력과 협동망은 어느 수준에 이 르면 상호이득이 보장되며 이러한 기능망이 참여국들의 객관적 여건과 주관적 여 건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폭력에 호소하는 극단적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게 된다 는 논리이다.89)

북한은 햇볕정책에 대해 여전히 ‘흡수통일’ 지향이라는 점과 체제생존 위협이라 는 불신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1999년 6월초 북방한계선에서 서해교전은 햇볕정책으로 추진하고자 한 안보와 화해협력의 병행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보 여주었다. 하지만 서해교전과 같은 긴장상태에서도 역대 정부와는 확연히 비교가 될 정도로 북한과의 교류협력의 빈도가 괄목할만한 증가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