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

문서에서 새 정부에 바란다 (페이지 88-91)

막스 베버 지음·전성우 옮김 연구자의 서가 47

마침내 빛도 없는 까마득한 동굴 속을 나온 기분.

필자가 박사학위 논문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막 찍었을 때의 기분을 저렇게 표현 할 수 있을 것 같다. 군대 전역 후 허세에 가득 차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 던 그때처럼, 순진하게도 학위 이후엔 장밋빛 인생만 남아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오래 가지 않아 그 꿈은 산산조각 깨지고, 가혹한 현실을 마주했지만.

본격적인 지식노동자의 길을 걸은 지 얼마 안 된 필자에게 다른 연구자를 위한 책 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냉혹하게 거절하지 않았던 나 자신을 후회하며 서 가를 둘러봤지만, 가슴에 확 와닿는 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두 꺼운 책들이 가득한 서재 안에 고이 자리 잡고 있던 가장 얇은 책이 눈에 띄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그 내용과 교훈만큼은 필자가 가진 모든 서적을 압도하는 「직업으로서 의 학문」. 이 책을 독자들에게 추천하고자 한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17년 독일 대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문을 번역한 책으로,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는 당시 독일의 대 외적, 정치적 위기 상황 등을 마주한 채 방황하는 학생들의 지적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학생단체가 막스 베버를 초대하면서 강연이 성사되었다.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하 수상한 시절은 사회 구성 원에게 자신이 믿는 신이나 혹은 영적·초인적 힘을 가진 ‘예언자’에 의지하도록 만드

는 경향이 있고, 당시 독일의 진보적 성향 대학생들은 막스 베버에게 그 ‘예언자’와 같 은 역할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기대를 알고 있음에도 불 구하고, 당대 독일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막스 베버는 학생들에게 섣부른 해결책이 나 설교 대신 오히려 철저한 지적 금욕주의(asceticism)를 실천하며 ‘학자’의 자세로 일관하였다.

책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독일의 학계를 예로 들며 학자의 경력은 ‘금권주의적(金權主義的) 전제에 기초’(p.23)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경 제력의 뒷받침 없이, 젊은 학자가 경력을 쌓고자 학문의 길을 걷는 것은 무척 힘들다 는 뜻으로, 향후 안정적인 생계유지가 가능한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 를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 과정을 걷는 것 자체만으로 굉장한 도전이라 보았다. 또한 학자들의 채용 과정에서는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실력보다 때론 ‘요행’이 더 크게 지배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에게 막스 베버는 진정 가치 있는 일 (학문)을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하다면서,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p.38)라고 표현하였다. 덧붙여,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p.44)이 되라고 강조하면서 학문의 길을 걷기 위한 내 적 조건으로 소명의식(召命意識)을 열정과 함께 꼽았다.

막스 베버는 강연을 통해 젊은 학자에게는 애정 어린 조언을 하였지만, 동료 교수를 향해서는 강단에 서 있는 학자는 정치를 배제해야 한다는 날 선 지적을 하였다. “진정 한 교수라면 교단으로부터 청중에게 어떤 특정한 입장을 노골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강요하는 것은 삼갈 것입니다. 특히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입 장을 암시한다면 그것은 가장 악의에 찬 방법”(p.75)이라고 비판하며 질책하였다.

다시 첫 문단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이어가 보자. 학위 논문을 끝낸 이후 유유자적 전 세계를 유랑한 필자에게 기다리는 건 장밋빛 꽃길이 아닌 혹독한 취업 시장이었다.

물론, 지난 시간 고생한 나 자신에게 재충전의 시간은 필요한 선물이라 생각했지만, 재밌게 연구하다 보니 ‘어쩌다’ 박사학위자가 된 범인(凡人)에 불과한 필자가 학문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가시적·비가시적 ‘성과’가 필요했다.

이처럼 머릿속이 복잡한 시절 마침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재출판되었고, 잠시 학문 의 길을 떠나 있던 필자에게 이 책은 다시금 연구에 대한 열정을 찾고 비판적 성찰을 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듯 추천 책은 이미 안정적인 자리를 잡은 학자에게는 지난 시간 자신을 뒤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이제 막 학문의 길에 접어드는 ‘전 업(專業)’ 학자에겐 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연구자의 서가 47

연구자의 서가 48회 예고

정성훈 강원대학교 교수가 다음 필자로 나섭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학문의 길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쓰디쓴 고배를 마신 학자에게도 작은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막스 베버는 ‘학문’과 ‘정치’를 철저히 구분한 채, 강단의 대학생 앞에 서 있는 교수의 마음가짐과 그 무게에 관해 역설하였다. 이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기여하 는 필자 같은 정책연구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행하는 연구가 사회 혹은 정책 대상에게 미칠 파급력에 책임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었다. 시대의 지성인 막 스 베버의 ‘엄격한’ 가르침을 오롯이 따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필자에 대해 성찰하면 서, 최소한 막스 베버가 비판한 ‘지적 사기꾼’은 되지 말아야겠다 굳게 다짐해본다.

창조적 도시재생 시리즈 15

주민의 머뭄을 위한 도시재생,

문서에서 새 정부에 바란다 (페이지 88-91)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