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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자활지원 개념의 다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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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자활지원사업의 역사와 평가

김수현

-제1절 자활지원 개념의 다중성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자활(自活)은 그 자체로서 좋은 의 미이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자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대개 현재 자기 힘으로 살아가 기 힘든 사람을 대상으로 뭔가 대책을 논할 때이다. 예를 들면 ‘노숙인 자 활’, ‘장애인 자활’, ‘빈곤층 자활’처럼, 현재 어려운 사정에 있거나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할 때 주로 ‘자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자활이라는 말 속에는 현재 자활하고 있지 못한 사람에 대해 사회가 ‘기대’하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사회적 ‘기대’는 때로 ‘요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빈 곤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에는 자기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시각이 퍼져있었다. 이는 더 나아가 일하지 않는 것을 부 끄럽게 생각하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벌하는 시대까지 있었다. 인류 역사에 서 ‘일할 수 있는데도’ 자기 힘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원시하거나 배 척한 것은 아주 오래된 전부터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 들이 빈곤에 빠진 경우 전후맥락을 이해하기보다는 일단 이상하게 보는 시 각이 강하게 남아있다. 특히 한국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한 나라들일 수록 근로능력자의 빈곤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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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가 누군가의 자활을 기대한다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제약조 건이나 오래 누적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활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활하겠다는 마음, 즉 자활의지를 갖는다고 자기 힘 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후기 자본주의 시 대에 들어와 불안정 고용이 만성화되고, 이른바 근로빈곤층(working poor)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자활은 ‘기대’나 ‘요구’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완전고용, 종신고용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취업만 하고 있으면 빈곤을 면할 수 있다는 것도 과거의 이야 기가 되었다. 경제의 세계화,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함께 고용불안정이 만연 하면서 초래된 필연적인 결과였다. 더구나 이런 사정이 누적되면서 빈곤의 양상도 단순히 소득문제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박탈감과 소외 나아가 사회적 배제의 문제로 이어지게 되었다. 근로빈곤과 그에 연관된 다양한 빈 곤현상들이 현대빈곤의 특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구에서는 1980년대 말 부터 보편화된 이런 특징들이, 우리도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후기 산업사회 적인 특징을 보이기 시작한 1990년대 초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 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사회정책에서는 1990년대부터 부쩍 ‘일’이 강조되고 있다. 그만큼 일이 불안정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빈곤으로 인해 더욱 복지의존이 심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복지로부터 일로 (welfare to work)’라든가, ‘근로연계형 복지(workfare)’가 사회정책의 핵 심의제가 되었다. 나아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 ALMP)처럼 적극적으로 직업훈련, 취업알선 및 근로유인을 할 수 있는 정책 패러다임이 강조되고 있다. 각국에서 복지개혁의 일환으로 복지 와 일을 연계하거나, 나아가 복지로부터 일로 전환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New Deal, 미국의 TANF, 독일의 노동지원 프로그램(Help towards Work), 덴 마크의 활성화 정책(Activation) 등이다.

그런데 이렇게 복지와 근로를 연계하거나, 복지로부터 근로로 전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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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은 기존과는 다른 복지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즉, 복지혜택에 너무 의 존하지 않도록 제약을 가하는 한편, 복지보다는 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 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복지수급이나 실업수당 수급이 일정기간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계속 수급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 든 일에 참여하도록 하는 한편, 취업을 통해 조기에 복지 및 실업수당 수 급을 종료할 경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이 일반화되고 있다. 나아가 계 속 근로할 경우 근로소득에 상응하여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채찍과 당근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정책전환은 단순히 보수적인 정권에서만 일어나는 일 이 아니라, 1990년대 이후에는 서구의 중도좌파 내에서도 이른바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을 강조하는 정책전환에 대해 비판이 따르는 것도 당연하다. 우선 현재의 빈곤층 보호 상황 자체도 불완전·불충분한데 이를 축소하거나 기간을 줄이려는 것은 ‘복 지병’을 핑계로 한 복지축소일 뿐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는 더 나아가 근로빈곤 현상은 선진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적 문제인데, 이를 당사자의 근 로의지 문제로 보면서 조건부과와 인센티브 제공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피 해자를 오히려 비난하는 것(victim blame)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런 관점에서는 약자를 배제하는 노동시장 구조 자체가 더 문제이며, 양극화 와 사회적 단절이야말로 근로의욕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다.

어떻든 서구의 이런 정책기조 전환과 함께 우리나라도 1990년대 초반부 터 부쩍 ‘자활’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빈곤층 밀집지역에서는 빈민지 역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종교인, 지식인들의 활동이 생산공동체와 같은 경 제적 자립을 목표로 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특히 1996년에는 정부가 이들 의 활동을 인정하면서 자활지원센터를 시범적으로 설치하기에 이른다. 또한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되면서, 자활지원사업은 근로능력을 가진 수급자에 대한 조건부과 차원에서 전국적인 의무사업으로 제도화되었다.

이렇게 자활지원사업이 우리나라에서 본격화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 다. 우선 빈곤의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1990년대 들어 고도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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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마무리 되면서 종전 같으면 노동시장에서 생계유지가 가능했던 사람들 이 빈곤상태로 퇴적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외환위기와 함께 노동시장 구 조가 급변하면서 근로빈곤층 문제가 구조적 문제로 굳어지기에 이른다. 두 번째 요인은 1970년대부터 빈민지역에서 활동해 온 단체들이 1980년대 철 거반대운동을 거치면서, 빈곤층의 경제적 자립에 주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 다. 이들의 시도는 당시 빈곤층의 사정을 감안할 때 신선한 대안으로 수용 되었으며, 특히 지역사회의 참여와 공동체에 대한 강조는 김대중 정부의 가 치와 맞아 들어간 측면도 있었다. 세 번째는 당시 서구 사회정책 변화의 경향이었던 근로연계형 복지를 수용했던 측면이다. 다만 서구의 경우 이미 높은 복지수준을 경험한 다음 ‘일’을 강조하는 과정이었지만, 우리는 사회 안전망 자체가 부실한 가운데 근로연계의 외형을 빌려옴으로써 이후 구조 적인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출발한 자활지원사업은 그만큼 ‘자활’

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다중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빈민지역에서 활동하면 서 빈곤층들의 경제적 자활 뿐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자활까지 추구했던 지역운동단체들에게 ‘자활’은 개인과 사회의 자발성·책임감, 연대의식이 결 합된 복합적인 개념이었다. 반면 2000년 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과 함께

‘자활’은 근로능력자가 복지의존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빈곤탈출(즉, 기 초수급에서 탈피)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다. 더구나 우리 경제의 급속한 발전 과정에서 근로능력자의 빈곤현상을 ‘마음으로부터’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자활’은 근대화 주역 세대들의 ‘요구’가 반 영된 단어이기도 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자활지원사업을 통해 빈곤층의 자발성과 창의성, 더 나아가 엠파워먼트(empowerment)에 주목한다. 더 나아가 이런 입장에서는 근로빈곤의 원인이 후기 산업사회 특유의 불안정한 노동시장 구조에 있기 때문에, 개인을 탓하기보다 다양한 사회적 지원을 체계적, 지속적으로 연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자활은 단순히 기초생활보장 대상에서 벗어나 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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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이 목표가 된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자활을 빈곤층 지원에 대한 사회적 안전장치로 보 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초생활보장제도가 근로능력자에게까지 생계보호를 실시하게 되면서 ‘복지병’ 방지장치로서 자활지원사업이 기능하는 것이다.

이 경우 자활지원사업은 ‘빠른 성과’에 대한 압박이 불가피하다. 특히 기초

이 경우 자활지원사업은 ‘빠른 성과’에 대한 압박이 불가피하다. 특히 기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