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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철거반대운동을 넘어 생산공동체운동으로

나. 철거반대운동을 넘어 생산공동체운동으로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빈곤층들은 대개 특정한 지역에 모여서 거주했다.

서울이 급속히 성장하고, 이농인구가 밀집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주거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허가 정착지, 판자촌 또는 산동네로 불린 곳 이 이들의 주거지였으며, 이는 동시에 일자리를 찾고 이웃끼리 돌보며 사는 공동체 공간이었다. 말하자면 ‘도시 속의 농촌’이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 에는 서울시내에 이런 곳이 100여 곳 이상 있었으며, 여기에 거주하는 주 민들은 약 100만 명이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1983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합동재개발사업을 통해 급격히 해체되기 시작한다. 판자촌이 아파트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원주민들이 들어가기는 어려웠고, 대체로 5~15%만이 재입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판자촌에 살던 세입자들은 소액의 현금 보상 외에는 사실 상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이미 올라버린 전월셋값을 무릅쓰고 인근 지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세입자들을 중심으로 철거반대운동이 격렬히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까지 따르게 된다. 이후 1990년, 정부가 재개발지역 세입자들에게 임대주택 입주를 약속하면서, 이 갈등은 급격히 완화되기 시작한다.

이후 빈민지역에서 주민운동에 관계하던 종교인, 학생 등은 철거반대운 동을 넘어 빈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고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하 게 된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보다 나은 조건을 쟁취하는 것이 과 제였다. 무엇보다 건설일용노동은 가장 중요한 빈곤층의 생계수단이었지만, 가장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는 직종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건설일용 노동은 전형적인 불안정 노동이며 원청 업체가 위험을 전가시키는 노동이 었다. 실제 원청업체의 수주액이 100이라면 시공을 맡는 하청업체는 30∼

40 정도만 가지고 공사를 하게 되며, 이 공사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1년 에 200일 내외만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건설일용노동자들은 퇴 직금도 없을뿐더러 연금이나 건강보험의 직장가입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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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노동시장이 비공식적인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단결권을 행사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개선하려는 데 빈민운동의 관심이 모아진 것이다(김수현, 2010).

이에 건설노동자들이 스스로 공동체 기업을 만들어 건축주와 직거래 하 려는 운동이 시작된다. 1990년 허병섭 목사 등이 시작한 월곡동의 ‘일꾼 두레’는 처음에는 노동조합을 생각했다가 건축주와 직거래하는 방식의 노동 자 공동체를 결성한다. 도화동 철거민인 정을진은 1990년 마포인력센터를 설치하여 인력소개, 직업교육, 법률상담 등을 하다가, 1992년 ‘마포건설’을 설립하고 건설업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또 1993년 봉천동에서는 성공회 송경용 신부를 중심으로 ‘나섬건설’이 설립되었는데, 이후 월곡동의 ‘일꾼 두레’와 합쳐 ‘나레건설’로 확대된다. ‘나레건설’은 1996년에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이 시작될 때, 집수리 사업 자활공동체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건설업 이외의 공동작업장과 생산공동체가 추진되기도 한다.

인천 사랑방 교회의 박종렬 목사는 1990년 주민들의 부업공동체를 설립하 여 ‘두레협업사’로 이름 붙인다. 또 1991년 서울 월곡동에서는 지역 활동 가 유미옥 등이 중심이 되어 화장수를 생산하는 여성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이전부터 어머니 학교 등을 만들어 주민들과 함께 호흡한 결과 가능했던 일이다. 또 비슷한 시기인 1992년, 상계동 성공회 나눔의 집 김홍일 신부 가 중심이 되어 봉제생산 공동체인 ‘실과 바늘’이 구성된다. 또 1995년에 는 구로지역의 여성봉제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협동조합 ‘한백’이 결성되기 도 한다(이문국, 2009).

이처럼 남성들을 대상으로 건설노동자 공동체가 추진되고, 여성들은 봉 제나 부업 등 자신들이 익숙하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생산공 동체를 만들어 갔다. 빈민지역에서 이런 활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는 앞 에서 설명한 대로, 철거반대운동만으로 빈곤층의 삶의 조건이 개선될 수 없 다는 현실 인식, 철거반대운동 과정에서 성숙된 주민지도자 역량, 빈곤층의 노동시장 자체가 변하면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요구, 그리고 당시 소 개된 스페인 몬드라곤 공동체 등 대안적 노사관계와 생산공동체 논의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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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활동을 확산시키고, 평가하며 객관화시키려는 시도도 이루 어지는데, KDI의 권순원 등은 1993년, “빈곤대책의 재조명 : 협동조합을 통한 탈빈곤운동의 활성화를 중심으로”(「한국개발연구」 제15권 제2호)라는 원고를 통해 일꾼 두레, 실과 바늘, 나섬건설, 마포건축 등의 사례를 조명 했다. 또 김성오·김규태는 1993년 󰡔일하는 사람들의 기업󰡕(나라사랑 출판 사)이라는 책을 통해 일꾼 두레, 실과 바늘 등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의 사례 를 소개했다. 이런 과정을 반영하여 보건사회연구원의 노인철 등은 1995년,

「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 자활지원을 중심으로」라는 보고서를 통 해 자활지원센터 설치의 필요성과 모형을 제시했다.

이 시기의 생산공동체 운동은 이후 정부가 빈곤층의 자활지원을 실제 정 책으로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성공회가 빈민지역에 설치한 ‘나눔 의 집’과 다양한 생산공동체 활동은 자활지원센터의 직접적인 모델이 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당시 협동조합 등 제3의 대안에 대한 사회운동의 관 심, 빈민지역 운동의 새로운 모색, 성공회 등 종교단체들의 적극적인 모델 개발 등이 결합되어 다음 단계의 제도화된 자활지원 시범사업을 가능케 했 다고 할 수 있다.

3. 시범사업 실시와 외환위기 시기

1)

가.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의 시작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몇몇 지역의 생산공동체 운동은 빈민지역운동 의 새로운 모델이자 대안적 빈곤극복 운동으로 많은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 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들 공동체 활동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협동 조합의 정신을 살린 생산공동체를 추구했으나, 실제 이들이 경쟁해야 되는

1) 이 항의 1), 2), 3)을 작성할 때 김승오(2009)의 원고를 기본 자료로 활용했다. 잘 정리 된 자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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