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면회시간에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당장 집으로 가시겠다며 역정을 내 셨다. 의료진들은 갑자기 위험해 질 수도 있으니 중환자실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께서 호통을 치며 소란을 피우시는 바람에 결국 다음날 오전 개인병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병실을 옮기고 식사를 하실 수 있게 되면서 처음 주문하신 것이 “혜 인이가 사다줬던 전복뚝배기”였다. 한번은 잣죽이 드시고 싶다 하셔서 사다드리기도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상태가 안정되어 당분간은 괜찮으실 줄 알 았는데,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신지 아흐레 만에 할머니 곁으로 가셨다.
마지막도 할아버지다웠다.
2014/1/28 울컥.
방어회를 보니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생전에 좋아하시던 생선이라서 자주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곱 달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돌아가셨다.
마치 당신들이 떠나시려 할 때 뒤를 봐줄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게 나였고, 나 또한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가벼웠 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1979) 귀천歸天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두 분 다 사이좋게 아흔 한해씩 사셨다. 돌아 가시기 전까지 크게 아프시지도 않았다. 게다가 너무 갑자기 가신 것도 아니고, 길지 않게 누워계시다가 편하게 가셨다. 이것은 자손들에게도 매우 감사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간은 죽어가는 이에게 스 스로 이 세상의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남겨질 가족들에게 이별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장례를 거창하게 치르는 것은 사회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행 위라 할 수 있다. 그 의식은 죽음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것임과 동시에 가까운 이를 잃는다는 것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다. 고대인들이 무덤을 만들고 장식했던 것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
다.
두 분을 보내드리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다가올 죽음을 예상하고 받아들이려고 하셨지만 그것에 대해 적극적인 마음의 준비는 하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절차에 대한 부 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당신들의 삶을 돌아보 고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조금 더 세련된 마무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