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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판정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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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7일, 아버지는 평상시의 퇴근시간 보다 훨씬 일찍 집에 들어오셨다. 창백한 얼굴의 아버지 뒤로, 어두운 표정의 어머니가 누우 실 자리를 준비하신다. 언제나처럼 현관 앞에 달려나와 인사를 하고난 우리 남매는 이상스러운 분위기에 눈치만 보다가 방에서 나오시는 어머 니를 따라가며 슬며시 물었다.

“아빠 어디 편찮으세요?”

어머니는 그렇다시며 더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날 저녁 우리들을 불 러 앉히신 아버지는 한 달 전 받은 건강검진의 결과, 위암 3기 판정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장기에 전이되지 않은 상태라 수 술을 받으면 회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위암 3기? 전이? 생소 했다. 아버지는 다음날 바로 입원하셨고, 그 다음날 수술을 받으셨다. 순 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는 좀 더 편하고 좋은 환경의 다른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자 권하셨으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질 게 뭐 있냐시며 극구 처음 진단 받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고 하셨다. 검사와 진찰을 맡았던 주 치의 선생님을 믿고 치료를 맡겨보겠다고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 하다. 아래에 인용된 부분은 아버지께서 병원에 가시던 날부터 돌아가시 기 전까지의 기록을 토대로 기억을 회상하고 재구성하여 기록한 것이다.

2000년 3월 8일, 아빠의 속옷 가방을 챙겨드리며, 잘 다녀오시라 배웅했다.

3월 9일, 수술침대에 누우신 아빠를 마취실 앞까지 모셔다드렸다.

3월 11일, 중환자실에서 나와 일반 병실로 옮기셨다.

3월 15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 하다가, 충무로 길바닥에서 명중이를 붙잡고 통곡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돌아가실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3월 17일, 다 아물지 않은 봉합 부위의 실밥을 풀어버린 탓에 꿰맸던 수술 부위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재수술을 받으셨다. 속이 터질 노릇.

3월 18일, 겨우 열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버렸다.

새 학기에 적응하면서 집안 돌보고 병원까지 오가느라 숨 돌릴 틈이 없다. 괜히 동생들에게 큰소리 치고 짜증내는 내 행동에 또 화가 난다.

3월 21일, 밝은 얼굴로 아빠 옆을 지키시던 엄마도 꼬박 병원에 계시다 보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신 것 같다.

3월 24일, 태권도장에서 실컷 땀을 흘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3월 26일, 주말이라 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아빠 병원에 갔다. 그때는 그저 철없는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동생들도 나름대로 각자 힘이 들었을 것 같다.

3월 28일, 다시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살지.

3월 29일, 心亂 어지럽다.

4월 1일, 마음이 약해지는 건지 자꾸만 눈물이 난다.

4월 6일, 오직 ‘아빠, 힘내세요’라는 마음만.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평상시처럼 병원에 갔다. 아빠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하고 묘한 마음이 들었다.

빨리 건강해지셔야 할텐데. 요즘은 나도 늘 피곤하다.

5월 12일, 괜한 일로 심통을 부려 엄마한테 꾸중을 들었다. 이 때쯤엔 나도 피로가 겹쳐 짜증이 늘었다. 그리고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자꾸만 밀려왔다.

5월 25일, 우울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진­5> 병원에 계실 때 어머니께서 남기셨던 메모

매일 아침 동생들을 챙겨서 학교에 보내고 어머니, 아버지께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병원에 들렀다. 수업이 오후에 있거나 일찍 끝나는 날은 어머니를 쉬게 해드리려고, 아버지 심부름도 하고 안마도 해드리면서 잠 깐씩 병실을 지키곤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안 계시면 아버지가 워낙 불 안해 하셔서 나 혼자서는 그리 오래 돌봐드리지도 못했다. 시간이 지나 면서 아버지의 병은 회복 보다는 악화되는 쪽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 다. 틈틈이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던 어느 날, 예전의 단단하고 풍성했던 근육은 오간데 없고 약간의 살과 뼈만 앙상하게 만져졌다. 그 즈음에는 음식도 잘 못 넘기셨다. 물론 식욕도 눈에 띄게 줄었다. 나날 이 쇠약해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느껴졌다. 이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세가 나빠지면서 날카롭고 예민해지셨다. 간간히 통증 을 호소하시며 불편함을 드러내시기도 했다. 처음에는 2인용 병실을 사용하

셨는데 다른 환자와 병실을 같이 쓰는 것을 싫어하셔서 결국 1인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강건한 정신력을 지니신 아버지셨는데 한 순간에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속이 쓰렸다. 한편으로는 억 울하기도 했다.

내가 다 알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져 가슴이 쿡쿡 쑤 셨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본래의 자리를 지키며 나머지 가족들을 챙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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