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역할(role)의 의미
역할을 국어사전에서는 “자기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맡은 바 직책이나 임무”, “구실”, “소 임”, 더욱 쉽게 표현하여 해야 “할 일”로 정의한다. 이는 직무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개념 정의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직무도 “직책이나 직업상에서 책임을 지고 담당하여 맡은 사 무, 맡은 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국립국어원, n.d.).
영어사전(dictionary.com, n.d.)에서는, role을 특정 맥락에서 행위자에 의해 수행되는 일상적이고도 관습적인 무엇임을 강조하여 job 혹은 duty와 구분한다. 사전에 따르면, role은 “영화, 연극 등에서 배우가 연기하는 한 배역”, “무엇이 적절한지에 대한 기대에 영 향을 받는 특정 사회적 상황에서 한 사람이 수행하는 부분(part)”이며 “일상적이고도 관습 적인 기능(function)”이다. 그에 비해 job은 “합의한 대가를 받거나 어떤 직업 수행 차원 에서 수행하는 과제”, “어떤 사람이 수행하도록 기대되거나 수행해야 하는 무엇”으로서 의 무(duty), 책임(responsibility)과 동의어로 규정된다(dictionary.com, n.d.).
이러한 역할과 직무의 차이를 Perrone, Zaheer, & McEvily(2003)은 명료하게 구분하 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직무는 상대적으로 고정적이고 형식적이며 조직의 구조적 특징 에서 비롯된 용어라면 역할은 보다 발생적이고 역동적이며 사회적으로 정의된 일의 요소 를 지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Perrone, Zaheer, & McEvily, 2003: 424: Fischer, 2010: 79에서 재인용).
역할을 사회적 개념이라 이해할 때에도 이에 대한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하기는 쉽지 않 다. 사회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심리학 등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이 개념을 사용
해 왔으며, 같은 학문적 배경을 지닌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관점에서 이 개념을 활용 하여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Biddle, 1986: 67).
학문적 배경과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할 개념을 사용하는 이들의 기본 관심은 개 인의 사회적 행동과 사회구조와의 관련성에 대한 것이었다. 이 점은 여러 분야의 학자들 로 하여금 역할 개념이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인류학을 잇는 고리가 될 것이라 기대하게 하였다(Levinson, 1959: 170).
사회구조와 행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역할을 규정하는 방식은 달 리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역할을 연극에서의 배우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배 우가 연기할 배역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사회적 행위자는 사회 내에 명확한 지위를 차 지하고 있으며, 배우가 짜인 각본에 따라야만 하듯이 사회적 행위자도 규범을 따라야 한 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의 연기에 반응을 보여야 하듯이 사회적 행위자는 타인 들의 기대에 반응을 보여야 하며, 배우가 청중에게 반응을 보이듯이 사회적 행위자들도 다양한 청중들이나 일반화된 타자의 기대에 반응을 보여야 한다. 동시에 그들은 나름의 연기 능력을 가지고 이에 대응하여 각자 나름의 상호작용 양식을 갖게 된다(Biddle &
Thomas, 1966: 3-4: Turner, 1974: 김진균 외 역, 1982: 406-407에서 재인용). 이는 특정 역할에 대한 한 문화 내의 표준화된 기대를 가정하는 관점으로서, 역할을 “상호작용 과정에서 행위자의 참여를 규정하는 조직된 행위자의 지향성이며, 그것은 타자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일련의 상보적 기대를 포함한다.”는 Parsons의 정의(Parsons, 1951:
Morris, 1971: 396에서 재인용)가 이러한 관점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행위자에게 부각되는 각본, 타자의 기대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는 위의 관점과 달리 다른 한편에서는 역할을 만들어 가는 행위자의 능동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Goffman은 개인은 역할을 만들어갈 수 있으며 전반적인 상황 정의에 일조할 수 있 고 한 사람이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의 역할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역할 거리(role distance)’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Turner, 1991: 457-458). 표준화된 기대의 존재를 가정하면서 그것이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와 일치할 것이라 가정하는 구조 주의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행위자가 “극장의 배우”로 이해되는 반면, 상징적 상호작용론 으로 불리우는 행위자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그것은 “경기에 참여하는 참여자”로 설정된다(Turner, 1974: 김진균 외 역, 1982: 405).
Levinson(1959: 172)은 역할 개념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구분하면서 연구자에 따라, 그리고 한 연구자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역할 개념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는 특정한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구조적으로 주어진 요구(규범, 기대, 책 임 등)로서의 역할이다. 다른 하나는 한 조직 내 특정 배역(part)에 대한 구성원들의 지향 점(orientation) 또는 관념(conception)으로서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역할은 특정 지위 를 갖는 구성원의 행동적 특성, 행동 방식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Levinson은 연구자들이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아우르는 방식으로 역할을 정의하기도 하기도 하고, 체계적인 구 분 없이 맥락에 따라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이동하기도 한다는 점을 Parsons의 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행동이 사회적 규범과 다르지 않을 것이 라 가정하는데서 나타난다.
Levinson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역할 개념을 사용해 온 연구들의 역할에 대한 의미 규정은 여전히 일관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0여년 후의 Biddle(1986: 68-69) 역시 여전히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들에 따라 역할을 “특징적 행동 (characteristic behaviors)”으로 규정하기도 하고, 수행해야 할 "사회적 배역(social parts)"을 지칭하기도 하며, "사회적 행위를 위한 대본(scripts for social conduct)"에 초 점을 맞추어 역할을 정의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Levinson(1959), Biddle(1986) 뿐만 아니라 역할 이론 혹은 역할 개념을 활용한 각종 연구들도 역할 개념이 여러 차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많 이 인용되고 있는 역할 개념화 구분은 Deutsch & Krauss(1965)의 “규정된 역할(a prescribed role)”, “주관적 역할(a subjective role)”, “시행된 역할(an enacted role)”로 의 구분이다(Turner, 1974: 김진균 외 역, 1982: 413; Jain & Triandis, 1997: 153 등).
규정된 역할은 역할에 부여된 기대를 의미하고, 주관적 역할은 역할에 대한 행위자의 주 관적 해석을 뜻하며, 시행된 역할은 실제 행해진 역할을 의미한다(Jain & Triandis, 1997: 153).
주로 사회심리학적 관점의 논의에서는 이 세 차원의 구분을 개인의 역할 행동(role behavior, or role performance)을 설명하는 인과 사슬로 이해하려 하였다. 다시 말해 사회적 규범이나 준거틀에 대한 개인의 이해와 그의 개인적 특성(역할 연기 능력)이 결합 하여 한 개인이 수행하는 역할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Morris(1971: 405)는 이러한
연구 경향들을 Levinson(1959)을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하여 보여준다.
[그림 Ⅱ-1] 역할 기대, 주관적 역할 이해, 역할 행동과의 관계3)
출처: Morris(1971). p. 405.
그러나 위의 세 차원의 역할 개념화는 상호 간의 인과적 관계 확인을 위해 필요하기보 다 역할이 표현되는 서로 다른 형태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세 차원의 역할 은 상호 인과적 관계 속에 있기보다 상호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 이다. 역할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역할 행동으로 연결되기보다 주관적 인식과 상반되는 행동이 강요되는 상황이 흔히 나타나고 그에 따라 오히려 개인은 그의 인식 체계를 자신 의 외적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연구들 (Morris, 1971 등)도 존재한다는 점은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위 세 차원의 역할 개념화 중 하나를 취하거나 세 차원의 역할 간의 인과적 관계를 규명하려하기 보다는 세 차원의 역할 개념화를 하나의 역할을 이해하 는데 필요한 세 차원의 접근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에 역할 개념을 “사회적으로 규 정된 하나의 총체(entity)로서, 되풀이되는 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으로 구성된 행위와 태 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종합적 패턴”으로 종합적으로 이해한 Turner(1990: 87)의 정의 를 활용하되, 하나의 사회적 역할은 여러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며 각 차원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역할들은 상호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맥락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즉, 역할 기대로서의 규정된 역할, 역할 이해로서의 주관적 역 할, 역할 행동으로서의 시행된 역할은 상호 인과 관계에 있기보다 각각 상호 영향을 미치
3) Levinson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Morris(1971)가 이와 같이 도식화
고 있으면서 동시에 역할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내 주는 것들이라 이해하고자 한다. 이 를 도식화한 것이 [그림 Ⅱ-2]이다.
[그림 Ⅱ-2] 역할 이해의 세 차원
나. 교사 역할 관련 연구
교사 역할 관련 연구들은 규범적 논의가 대부분이며 역할과 직무를 뚜렷이 구분하지 않 은 채 교사 직무 수준에서 역할을 논의하는 연구들도 발견된다. 이는 역할 개념을 사회과 학적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역할 기대라는 규범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과 연 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내 연구들은 역할과 직무 개념을 구분하지 않은 채, 교사가 수행해야 할 여러 차원의 활동을 교사 역할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교사가 지향해야 할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곧 규범적 역할에 대한 연구로는 Reedl 과 Watenberg(1951)가 대표적이며, 이는 여러 교사론 관련 도서에 인용되고 있다. 이들 은 교사의 역할을 “사회대표자, 판단자, 동일시 대상, 지식 자원, 심판관, 훈육자, 학습 조 력자, 불안제거자, 자아옹호자, 집단 지도자, 부모 대리자, 친구, 적대감정의 표적, 애정 상대자”(김윤태 외, 1984: 65-69에서 재인용) 등으로 구분하여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학 생과의 관계와 관련하여 교사에게 어떠한 사회적 기대가 존재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