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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주의 보호주의의 관념적 경로의존성

제3절 한국 정치경제의 경로의존성

2. 발전주의 보호주의의 관념적 경로의존성

정치경제질서의 변화는 물리적 효과뿐만 아니라 관념적 효과에 달려있 다. 즉 물리적 효과가 정치경제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야기할 것인가 하는 점은 물리적 효과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념적 효과를 강조하는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을 둘 러싸고 있는 물리적 환경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물리적 환경 에 대한 인간의 규범적 또는 인식적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즉 물리적 환 경이 인간의 관념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물리 적 환경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 서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적 관점은 해석을 외부의 물리적 요소와 인간의 행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상정한다(Adler, 1997).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이 해석이라고 하는 관념적 요인을 강조하는 이유 는 인간이 자신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특정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자 신을 둘러싸고 있는 경제적 환경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어야하기 때문이 다. 구성주의 정치경제학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를 ‘단속 평형모델(punctuated equilibrium model)’과 비교해 보는 것이 유용 할 것이다. 제도변화에 있어 외부적 충격을 강조하는 단속평형모델은 정 치경제질서의 변화를 경제위기 등과 같은 ‘외생적 요소(exogenous fac-tor)’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상정한다. 단속평형모델은 정치경제질서의 변화를 장기간의 균형 또는 안정 상태와 단기간의 급속한 변화의 과정으 로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정치경제질서 변화는 장기간의 안정 상태를 허 무는 ‘중대국면(critical juncture)’에서 발생한다. 즉 정치경제질서는 기 본적으로 경로의존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지만 간헐

적으로 나타나는 중대국면에서는 경로탈피적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다(Krasner, 1984). 또한 이러한 중대국면을 발생시키는 요인은 안정적 균형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촉매적 외부 사건(catalytic external event)”이다(Krasner, 1976, p.341).

세계화나 코로나19 등과 같은 외부적 충격은 정치경제질서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외생적 요소이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외생적 요소들은 정치경제질서의 변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 지만 이러한 외생적 요소들이 정치경제질서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력은 외생적 요소가 야기한 충격에 인간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달려있다.

또한 인간이 외부적 충격에 대한 특정한 대응을 하려면 외생적 요소들이 야기하는 충격이 인간의 경제적 활동에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 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외생적 요소가 야기하는 충격에 대한 대응은 이러한 충격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석’이라는 관념적 요인은 국제정치경제질서의 변 화를 야기하는 내생적 요소로 기능한다(Blyth, 2002).

〔그림 2-1〕 정치경제질서의 변화

외생적 요소

내생적 요소

정치경제질서의 불안정성 현존 정치경제질서

정치경제질서의 변화

자료: 저자 직접 작성

경제적 불안정성의 증가와 발전주의적 보호주의의 미작동은 사회민주 적 보호주의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켜 복지국가 형성을 위한 호의적인 정 치적 환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관념적 경로의존성이 복지국가 형 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동하고 있다. 발전주의적 보호주의라는 과거 의 방식이 작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의 형성을 통해 경제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사회민주적 보호주의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강하지 않은 이유는 과거의 방식에 집착하는 관념적 경로의존성이 존재하기 때 문이다. 즉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관념적 경로의존성이 계속적으로 발전 주의적 보호주의 방식을 지속하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정에서 형성된 발전주의적 보호주의는 시장 경제가 야기하는 불안정성을 급격한 경제성장에 토대를 두고 해결하는 방식이다. 높은 투자율에 기초한 고도성장이 지속되면 노동시장에 대한 수요가 계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고도성장으로 인한 노동시장 수요의 지속적인 증가는 안정적인 고용과 임금상승의 토대로 작동된다. 또한 안 정적인 고용과 임금상승이 지속된다면 시장경제가 발생시키는 경제적 불 안정성 역시 완화되게 된다. 발전주의적 보호주의는 이처럼 경제성장에 토대를 두고 고용과 임금의 안정성을 확보해 시장이 야기하는 불안정성 에 대응하려고 하는 움직임이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폭발적으로 발생 한 노동자 대투쟁은 이와 같은 발전주의적 보호주의를 통해 시장이 야기 하는 경제적 불안전성을 해결하려고 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60년대 형성된 국가주도의 발전주의 질서와 1997년 금융위기 이전 까지 존재했던 재벌중심의 발전주의 질서 속에서는 높은 투자율에 기초 한 고도성장이 작동했기 때문에 발전주의적 보호주의가 확립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상이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 형태는 상 호대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도성장을 동반한 발전주의적

보호주의가 확립되고 작동되면 사회민주적 보호주의를 위한 복지국가를 형성하고자 하는 정치적 요구가 등장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이러한 점에 서 한국 정치경제질서의 발전주의적 특성은 복지국가 발전이 미미한 이 유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한국은 발전주의 질서에서 가능했 던 높은 투자율에 기초한 고도성장이 가능한 경제체제가 아니었다. 1997년 이후 국가나 재벌을 통해 급격한 투자 상승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끌어내 는 메커니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1990년대 이후 세계 화라는 전 세계적 경제통합과 함께 한국경제의 자유화가 증폭되어 경제 적 불안전성은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현재 한국 정치경제 질서는 경제적 불안정성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전주의적 보호주의 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다.

경제적 불안정성이 증가됨에 불구하고 발전주의적 보호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복지국가의 형성을 요구하는 정치적 목소리가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은 계속적으로 복지국가의 형성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계속적인 실패의 이유는 현실과 인식 간의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야기하는 경제적 불안정성은 계 속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에 반해 안정적 고용과 임금을 창출에 바탕을 둔 발전주의적 보호주의는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성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과 인식의 괴리는 관념적 경로의존성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적 경로의존성은 외부의 환경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 거에 존재했던 사회적 관념체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발전주의 시절의 고도성장의 경험은 발전주의 보호주의를 경

제적 불안정성을 해결하는 가장 유효한 방식이라고 인식하게끔 만들었 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인식 때문에 더 이상 발전 주의적 보호주의가 작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통해서 경제적 불안정성이 해소될 수 있다는 발전주의적 보호주의 관념체계는 지속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주의적 보호주의의 관념적 경로의존성은 복지국가 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장애 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