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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284

문서에서 전망하다 (페이지 56-64)

방승환 「닮은 도시 다른 공간」 저자 (archur@naver.com) 2020 urbaN ODySSey•14

472호 2021 February

새벽 풍경 속 서울역

장사를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새벽 남대문시장을 따라갈 때면 아버지는 서울역 앞에서 나를 깨웠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본 차창 밖 서울역은 마치 모네(Claude monet)의 그 림처럼 어스름한 파란 기운과 주황색 가로등이 뭉쳐 있었다. 밤이 길었던 겨울에는 가로 등에 비친 서울역이 따뜻한 불빛을 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일가친척 모두 경기도에 살았기 때문에 어릴 적 기차 탈 일도, 서울역을 이용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역은 내 게 명절날 뉴스에 등장하는 배경이거나 차에서 바라보며 지나치는 풍경이었다. 당연히 그 안을 들어가 보거나 그 앞을 걸어서 지나간 적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역 안으로 들어가 본 건 서울역이 더 이상 기차역이 아닌 복합문 화공간으로 바뀐 뒤였다. 그래서 복합문화공간이 된 서울역을 훑어보면서 과거 기차역이 었을 때의 상황과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승객들이 분주하게 오갔을 중앙홀에서 주 출입구 상부에 있는 아치(arch) 창과 스테인드글라스 천창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은 했지 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이나 어딘가로 떠나는 기대감은 들지 않았다. 공간에 겹쳐 놓 을 기억이 없으니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의미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 몇 년 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뀐 서울역에서 열린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전시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반 고흐의 생애를 네 시기로 나누어 구성한 전시였 는데, 중앙홀에서는 인상주의 화풍이 한창 유행하던 파리로 고흐가 이주한 시기를 다루 었다. 빔프로젝터를 통해 고흐의 작품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활동했던 쇠라(Georges Seurat), 시냑(Paul Signac)의 점묘법 작품과 자포니즘(Japonism) 열풍을 일으킨 일본 판화가 중앙홀의 배럴 볼트(Barrel Vault, 반원형 아치 모양으로 된 천장)와 아치형 고창 (高窓)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10여 분간의 영상을 보며 전혀 상관없는 서울역과 파리라는 도시가 분위기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驛舍)의 역사(歷史)

일제가 삽입한 다른 근대화 시설과 마찬가지로 서울역도 식민지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서울역 자리에 기차역이 처음 들어선 건 1900년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부 터다. 경인선의 한쪽 끝은 인천 제물포역이었고 나머지 끝은 서대문역이었는데(현재 농 협중앙회와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인근), 당시에는 서대문역을 ‘경성역’이라고 불렀다.

서울역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남대문역은 서대문역 전에 있었으며 남산과 명동에 거 주했던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했다.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이 차례로 개통되면

문화역서울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번호를 의미함.

서 남대문역의 역할이 조금씩 커졌고, 1917년 조선철도의 운영권이 일본 국책회사인 만주 철도주식회사로 이관되면서 서울역 설계와 시공을 관할했다. 1919년 용산역에서 분기되 던 경의선이 남대문역으로 노선을 변경하면서 서대문역이 폐쇄됐고 남대문역이 서대문역 의 기능을 대신했다. 결국 만주철도주식회사는 새로운 역사 건설을 결정하고 1922년 공 사를 시작했다. 역의 이름도 ‘남대문역’에서 ‘경성역’으로 바꿨다. 이때부터 서울역은 서울 을 대표하는 관문이 됐다.

서울역 설계자에 대한 기억

서울역 설계자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당시 도쿄대 건축과 교수였던 쓰카 모토 야스시(嫁本靖)가 그린 도면이 발견되면서 암암리에 그를 설계자라고 생각했다. 그 런데 쓰카모토 입장에서는 서울역처럼 비중 있는 건물을 설계하면서 굳이 설계자를 밝히 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텐데 공식적으로 기록해놓지 않은 이유는 뭘까? 더군다나 그는 암 스테르담역을 모델로 한 도쿄역을 설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서울역 디자인은 오랫동안 암스테르담역-도쿄역으로 이어지는 계보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됐었는데, 서울역 원형복 원사업 과정에서 경기대학교 안창모 교수가 서울역의 모델이 도쿄역이 아닌 스위스 루체 른역이라고 주장했다. 1896년 지어진 루체른역의 설계자는 스위스-오스트리아 건축가 한스 빌헬름 아우어(Hans wilhelm auer)다. 서울역과 루체른역 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 는 문헌이나 자료는 나오지 않았지만 형태상 두 기차역은 많이 유사하다.

안창모(2017)는 서울역과 루체른역 그리고 그동안 설계자로 알려진 쓰카모토 간의 관 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주철도주식회사로부터 서울역 설계를 의뢰받은 쓰카모토 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창의적으로 설계하지 않고 유럽 기차역의 디자인을 서울역에 맞 게 수정해서 제공했다. 쓰카모토는 영국에서 유학하면서 유럽 내 여러 기차역을 직접 보 았을 것이다. 창의적인 설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쓰카모토는 자신이 서울역의 설계자가 아 니라고 생각했고, 설계를 의뢰한 만주철도주식회사도 이를 인정하여 설계자를 밝히지 않 고 준공 사진첩을 만들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설명을 읽으면서 ‘쓰카모토의 어떤 이유’를 생각해봤다. 혹시 서울 역 설계를 자신의 중요한 경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설계를 의뢰한 만주철 도주식회사도 쓰카모토의 입장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역사의 설계자를 굳이 밝힐 만큼 서 울역을 비중 있게 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식민국에게 식민지는 생산 자원이자 잉여생산물의 소비처일 뿐이다. 설계와 건설을 주도한 집단 모두에게 서울역은 식민지의 대표 기차역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역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식민지 국민

2020 urbaN ODySSey•14

472호 2021 February

들에게 전하는 식민국의 우월함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 서울역을 포함한 철도시설과 옛 한국은행 본관(현 화폐박물관) 등 금융시설은 일제 근대화론의 핵심 기반시설이었기 때 문에 건물도 제국주의적 속성을 드러내는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서울역을 문화역으로 바꾸기

해방 후 남북이 나뉘게 되면서 서울역은 통과역이 아닌 종착역이 됐다. 서부역사 신설 (1969년), 지하철 1호선 개통(1974년), 민자역사 증축(1988년) 속에서도 서울역은 대한민 국 수도의 철도 관문 역할을 했다. 그러다가 2004년 KTX 서울역사가 개장하면서 그 자 리를 넘겨줬다. 다소 상징적인 면이 있기는 했지만, KTX 서울역 개장 전까지 서울역은 꽤 긴 시간 본래의 기능을 유지했다. 운도 좋았다. 만약 산업화 시대 박정희 정부가 국가

<그림 1> 루체른역 <그림 2> 문화역서울284

<그림 3> 암스테르담역 <그림 4> 도쿄역

운송기간망을 고속도로가 아닌 철도로 택했다면 서울역의 변화는 서부역사 신설로 끝나 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역은 역사적인 공간을 평가하는 가치가 변화된 시대까 지 살아 남았기 때문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05년 8월 당시 문화관광부는 서울역의 ‘문화공간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09년 복원을 위한 설 계자 선정 현상설계를 개최했다.

당선자로 선정된 삼우설계, 금성건축, 아뜰리에17 컨소시엄은 복원설계에 앞서 가장 먼 저 복원시점을 정했는데, 근 80년간 기차역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됐기 때문 이다. 설계 컨소시엄은 서울역이 준공된 1925년을 복원 기준시점으로 정했다. 그리고 각 공간의 중요성, 역사적 의미, 물리적 상황, 현재적 가치, 잠재적 가치 등을 고려하여 서울 역 내 공간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닌 상급공간은 중앙홀, 1 · 2등 대 합실, 부인대합실, 귀빈실, 예비실, 주계단, 대식당과 부속시설이었다. 이 공간들은 원래 기능을 유지하거나 복합문화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실로 바뀌었다. 3등 대합실(복원 후 다목적홀 1), 승객통로, 수화물 취급소, 출찰실(물품보관함), 안내소 계단(안내데스크), 식당 부속시설(주방), 이발실(복원전시실 2)이 중급공간으로, 화장실(복원전시실 1), 사무 실 영역(회의실), 지하층은 하급공간으로 분류됐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잠재력

서울역은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됐다. 새로운 이름에 붙 은 ‘284’는 옛 서울역의 사적(史蹟) 번호다. 복합문화공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 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을 오가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서울역으로 인한 엄청난 유동인구는 문화역서울284의 성공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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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이발실과 화장실을 리모델링한 복원전시실 <그림 6> 전시실로 사용 중인 옛 1·2등 대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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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역을 통해 막 서울로 들어온 또는 서울을 떠나려는 사람들이다. 즉, 목적이 분명한 유 동인구다. 반면, 목적이 불분명한 산책자들은 대부분 서울역 주변을 배회하는 노숙자들이 다. 그들에게 복합문화공간은 너무 먼 공간이다.

사실 노숙자들은 문화역서울284의 개방성을 높이는 데 가장 큰 장애 요인이다. 서측 복도를 외부통로로 개방하거나, 설계 컨소시엄이 서울역 중심성 회복을 위해 제안했던 연 결방안을 실현시키고자 할 때도 주변 노숙자들의 시설 점유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보면, 옛 서울역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건 역사적 건물의 활 용방안을 문화 및 전시시설에서만 찾는 흔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사실 옛 서울역은 복합

이런 상황을 고려해 보면, 옛 서울역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건 역사적 건물의 활 용방안을 문화 및 전시시설에서만 찾는 흔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사실 옛 서울역은 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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